[사설] 한국문단의 성찰 계기 ‘신경숙 표절’

● 칼럼 2015. 6. 26. 15:45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작가 신경숙의 표절 문제가 깊은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신경숙과 출판사 창비는 애초의 완고한 태도를 바꿔 표절 가능성을 인정하고 고개를 숙였다. 23일에는 작가단체와 문화운동 단체가 중심이 되어 ‘최근의 표절 사태와 한국 문학권력의 현재’라는 주제로 긴급 토론회를 열었다. 작가의 창작윤리와 이른바 문학권력의 전횡을 포함해 오늘의 사태를 초래한 문제점들을 문학계는 깊이 성찰해야 할 때다.


신경숙은 23일 회견에서, 거론된 일본 소설과 자신의 작품 문장을 대조해본 결과 “표절이란 문제 제기를 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인정했다. “문학상 심사위원을 비롯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숙하는 시간을 갖겠다”고도 했다. 표절 경위를 기억하지 못하겠다고는 했으나 표절을 인정하고 반성한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철저한 반성을 통해 더욱 훌륭한 작가로 거듭나길 바란다.
문학시장을 좌지우지해온 몇몇 대형 출판사의 행태도 문제로 떠올랐다. 23일 토론회 발표 내용을 보면, 신경숙은 창비와 문학과지성사, 문학동네라는 세 출판사를 번갈아가며 소설을 간행해왔다. 이들 문학출판사는 예전에 참여문학이든 순수문학이든 나름의 색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여 권위를 쌓아왔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작품이 팔리느냐라는 상업적인 기준만을 경쟁적으로 추구했고 최소한의 작품 검증 기회마저 도외시했다고 한다. 문학의 사회적 책임이 실종된 배경에 출판자본의 무한상업주의가 도사리고 있었던 셈이다.


지금 보니 한국문학이 노벨 문학상을 배출해야 한다거나, 아무개가 한국문학의 대표상품이라는 등의 언술도 당연시할 게 아니었다. 문학의 사명을 제쳐놓고 자본의 논리를 은근히 정당화하는 포장일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비평의 나태도 문학의 사회적 책임과 윤리가 뒷전이 되는 데 한몫했다. 문학의 권력화와 상업화를 견제해야 할 비평가들이 문학권력에 포섭되어 동업자 노릇을 해왔다는 비판이 나오는 실정이다.
신경숙 표절 사건을 계기로 드러난 문학계의 문제는 문학 밖의 한국 사회가 직면한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공공성과 사회적 책임이라는 가치가 실종된 가운데 자본 중심으로 욕망만을 추구하는 시대의 문제점이 문학에 그대로 투영됐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창비와 같은, 사회 담론 생산의 근거지로 자부해온 대표적 출판사들이 나쁜 순환고리의 한 축에 있었음은 충격이다. 문학계의 총체적 반성과 재탄생을 촉구한다.



[기고] 방산비리 진짜 주범은 누구인가?

● 칼럼 2015. 6. 26. 15:44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년 3월에 임명장을 받으러 청와대에 간 방위사업청장 노대래씨. 전임 장수만 방사청장이 비리로 3개월 만에 자리에서 물러난 후유증이었을까. 이명박 대통령은 임명장 수여 후에도 신임 청장을 상대로 물경 2시간30분 동안 잔소리를 퍼부었다. “리베이트만 안 받아도 국방예산 20% 삭감해도 된다”는 대통령의 말이 이때도 나왔다. 모든 무기도입 사업에서 일률적으로 예산을 20% 이상 삭감하라는 지시나 마찬가지였다. 노 청장이 대통령의 말을 받아 적은 분량이 복사용지 앞뒤로 빼곡히 3장이 넘었다. 임명 첫날부터 군에 함부로 돈을 주지 말라는 이 대통령의 지침을 단단히 받고 나온 노 청장은 정신이 얼얼했는가 보다.
얼마 후 영종도의 한 호텔에서 청와대, 국방부, 방사청, 군, 업체 관계자들이 모인 방위산업 합동 워크숍에서 노 청장은 “군은 무능한 집단이고 업체는 부패한 집단이다”라고 선언하며 모든 무기도입 사업을 방사청이 주도할 뜻을 명확히 했다. 모든 국방사업에서 일률적인 예산삭감이 예고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4년이 지난 지금. 방산비리 합동조사단이 터뜨리는 각종 무기도입 비리는 전부 이 대통령이 돈줄을 막아버렸던 시절에 저질러졌던 사업들이다. 방사청을 앞세워 방산 비리를 척결한다며 군의 숨통을 눌러버리니까 군은 다른 살길을 찾아 나섰다. 성능이 낮은 저질 무기라도 일단 사고 보자는 식으로 정책을 속속 변경한 것이다. 통영함의 음파탐지기는 애초 120억원가량 비용이 예상되었고 협상을 잘하더라도 70억~90억원 정도의 예산이 필요했다.
그러나 달랑 40여억원을 배정받자 유럽 전문 업체와의 협상을 포기하고 미국의 이름도 없는 불량 업체와 41억원에 계약을 했다. 돈에 장비의 성능을 맞춘 결과 엉터리 부실 장비가 들어왔다. 영국으로부터 도입되는 해상작전헬기는 대잠수함 작전능력이 없는 헬기였으나 경쟁 기종인 미국제보다 싸다는 이유로 채택되었다. 이 과정에서 군이 요구하는 작전성능 중에 대잠수함 작전 기준이 하향 조정되었다. 핵심 작전의 요구 성능이 하향 조정되는 건 해군의 권한으로도 안 되는 중요한 정책결정이다. 정치권력과 합참의 고위층이 개입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될 만하다. 단지 비리로 적발된 사업만이 문제가 아니다. 한국군의 무기도입 전부가 일제히 부실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게 문제다.


국방예산이 아까우면 무기소요, 즉 사업 자체를 재검토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방만한 군의 무기소요는 놔둔 채 예산만 줄이는 방식으로 국방을 관리하니까 실체도 없는 페이퍼컴퍼니, 즉 엉터리 유령회사가 개입하기 시작했다. 각 군과 사업부서마다 하나씩 사업을 꿰차려고 하니까 엉터리 장비를 납품하고 튀는 한탕주의 세력이 득세하기 시작하여 한국군의 전 무기체계를 뿌리째 흔드는 양상으로 간 것이다. 이것이 지난 보수정권 7년간 약 70조원을 무기도입에 쏟아붓고도 군의 작전능력이 개선되지 않은 핵심 이유다. 덤으로 지난 20년간 꾸준히 축적해온 국내 방위산업의 연구개발 기반도 극심한 가뭄에 시달렸다. 무기소요는 늘어나는데 예산이 줄어든 당연한 귀결이다. 이렇게 국가안보의 핵심 자산이 부실 덩어리로 전락하여 거대한 국가적 낭비를 형성한다. 4대강과 자원외교에 이은 가장 끔찍한 국가 부실은 다름 아닌 국방이다. 이에 대해 아무도 항변할 수 없었다. 이 대통령이 직접 “이거 사라, 저거 사라”는 지시를 하는데 누가 그 부당함을 말하겠는가?


무기는 많지만 각종 엉터리 장비로 무장한 한국군의 위기는 지금도 이어진다. 방만한 국방이 디폴트(지급불능) 사태로 가는 데 앞으로 3년이면 충분하다. 이런 정치권력이 방산비리 주범이 아니라면 무엇이 주범인가?

< 김종대 - 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



[한마당] 기업에 휘둘리는 나라

● 칼럼 2015. 6. 19. 17:21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사람들의 필수품이 된 스마트폰만으로도 삼성의 위력은 눈부시다. 지난 1년 사이 전세계적으로 팔린 스마트폰 5대중 1대는 삼성이 만든 것이다. 아프리카와 유럽에선 부동의 1위다. 삼성전자는 세계적인 기업으로, 삼성은 ‘글로벌 재벌’의 반열에 올랐다.
미국의 포브스지가 매년 선정하는 세계 2000대 기업 순위에서 삼성전자는 20위에 당당히 올랐다. 덩달아 삼성의 브랜드 가치는 애플에 이어 세계 2위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삼성전자만의 브랜드 파워도 세계 7위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국제경제에서 삼성의 위상을 보여주는 사례로 지난 2009년 베트남에 설립한 삼성전자의 휴대전화 공장이 거론된다. 만성적인 무역적자에 허덕이던 베트남은 현지 삼성전자의 수출실적에 힘입어 무역 흑자국으로 돌아섰다고 한다. 삼성전자의 매출이 베트남 전체 수출의 18%를 차지해 베트남 국가 경제를 뒷받침 할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글로벌 시장에서 그 정도 일진대, 대한민국 안에서의 삼성의 절대적인 위상이야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룹차원에서 20개 주요 계열사만으로도 1년 총 매출이 390조원 규모로, 나라 전체의 1년 총 예산 360조원을 웃도는 데에서 충분히 실감할 수 있다. 삼성전자 한 회사가 국내 10대 그룹 상장기업 전체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이익을 내고 있을 정도로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경제를 좌우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삼성의 실적이 부진하면 나라 전체 경제가 어려워진다고 걱정들 한다.
문제는 삼성이 거대화하면서 경제뿐만 아니라, 여타 분야까지 막강한 영향력이 파급되고,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삼성 공화국’이라는 어휘가 세간에 회자되기 시작한지도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풍성한 자금에, 막강한 경제비중, 그리고 치밀한 인맥관리와 정보기관에 버금간다는 정보력 등등 정부에 맞먹을 만한 삼성의 파워를 표현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는 결코 좋은 말이 아니다. 나라가 기업에 휘둘린다는 부정적 표현이고, 경계를 촉구하는 심각한 조어다.


정치인들은 삼성의 ‘뒷돈’에 길들여진 탓인지 삼성 관련 기업들의 부정에 대한 국회추궁의 칼날이 무디기가 한량없다. 검찰은 삼성 수사에서 유독 맥을 못추고, 법원은 ‘솜방망이’판결을 내기 일쑤다. 법조와 조세를 비롯한 정부 고위직에 삼성 출신들 혹은 ‘삼성 장학생’들이 대거 포진하면서 국정에 미치는 삼성의 입김은 ‘암묵적 비밀’에서 이젠 공공연한 현실이 되었다. 입법·사법·행정의 삼권에 그치지 않는다. 삼성의 광고에 목을 매는 ‘제4부’ 언론도 그 영향권에서 예외가 아니다. 거기에 삼성맨, 삼성가족이 되겠다고 좁은 문에 몰려드는 수많은 청년들, 국민들을 감안하면 삼성의 위세에 나라전체가 휘둘리는 것은 틀림없다.
“X파일 사건, 반도체 백혈병 사건, 태안 기름유출 사건, 당장 떠올릴 수 있는 이 모든 사건과 사태에서 삼성은 언제나 예외였고 법 위에서 군림해 왔다. 이제 우리는 삼성이 한 나라 국민들의 생명이 걸린 메르스 사태에서조차 예외가 되고 법 위에 군림하는 사태를 눈앞에서 보고 있다. 과연 삼성공화국이다.”


어느 보건분야 전문가가 최근 기고한 글의 일부다. 삼성의 파워가 메르스라는 괴질파동의 현장에도 위력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감염된 환자의 절반 가까이가 삼성병원에서 나왔는데, 정부는 병원명 거론을 질질 끌다가 사태확산을 초래했다. 삼성병원의 실명 공개는 이 병원에 관련된 확진자가 17명이나 나온 뒤에야 뒷북치듯 이뤄졌다. 삼성서울병원은 최고의 시설과 의료진으로 소문 나 있다. 특히 병원장은 감염분야 권위자라고 한다. 그런데 사실상 메르스의 진원지가 됐다는 오명을 뒤집어 썼다. 그래서 “정부의 오판과 무능, 삼성의 자만과 의료 영리화가 부른 참화”라는 비판도 나온다. 기업의 영향력이 너무 비대해질 때 초래되는 폐해가 고스란히 나타난 전형적 사례인 것이다.
기업인 대통령이 국정을 기업마인드로 경영하려다 나라를 망친 MB의 추억을 망각해선 안된다. 기업은 기업에 충실해야지 타 영역에 마수를 뻗치면 마피아가 될 수 있다. 이윤에 눈먼 세상은 틀림없이 황폐해진다. 공직자와 국가기관은 기업의 이익이 아닌 오직 국민을 위해 존재하고 봉사해야 한다. 재벌 앞에 설설 기고 눈치보는 나라를 정상적인 나라라고 할 수는 없다. 미국정부가 애플이나 구글 앞에만 서면 기가 죽고 작아지던가?


< 김종천 편집인 >



[1500자 칼럼] 연리지 나무

● 칼럼 2015. 6. 12. 16:45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은퇴를 하자고 조른 건 나였다. 남편은 그런 내 생떼를 3년간이나 잠자코 견뎌냈다. 아마도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서양 명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부활절)이 오면 서툴지만 서양식 명절식단을 마련하려고 애를 썼었다. 이 나라의 풍습을 제대로 알지는 못했지만 이곳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추억을 만들어 주려고 나름대로 노력을 했었다. 내 자식들에겐 이 캐나다가 모국이니 말이다. 그런데 번번히 만찬을 차려놓고도 네 식구가 함께 식사를 할 수가 없었다. 남편의 자리는 늘 비어 있었고, 가게를 닫은 한밤중에서야 혼자 늦은 식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 20년을 훌쩍 넘기고 보니 어느 새 자식들이 우리 곁을 떠나고 있었다. 왜, 무엇을 위해, 온 가족이 식사도 같이 할 수 없는 생업을 지속해야 하는지 그 명분을 더 이상 찾을 수가 없었다. 아직 건강할 때, 더 늦기 전에, 그간 잃어버린 삶의 의미와 즐거움을 누려보고 싶은 갈망만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던 것이다.


은퇴하면 무엇을 하며 살까 고민하던 남편의 주저는 기우였다. 날마다 얽매인 스케줄로부터의 자유, 가게 운영상에 생기는 문제로부터의 자유, 무엇보다도 시간적으로 여유로우니 마음의 평화를 누리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지 않아도 되고, 피로하면 아무 때나 쉴 수가 있고, 오랫동안 미뤄놨던 일들도 처리할 수 있었다. 아침이면 토스트, 요구르트, 과일을 곁들여 커피 한잔과 느긋하게 들며 새벽에 배달된 신문을 자세히 살펴 읽는 즐거움도 컸다. 가끔 창 밖으로 쏟아지는 햇빛을 벗삼아 호숫가와 숲 속을 산책하는 여유도 싱그러웠다. 식사 때마다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그 나머지 시간은 아래층과 위층에서 각자 다른 생활을 한다. 간간히 친구가 생각나면 전화를 잡고 수다도 떤다. 저녁에는 함께 한국인 드라마로 다양한 삶의 모습을 접하며 메마른 감성을 적셔보기도 한다. 몸이 뿌듯하면 운동 삼아 탁구도 치고 골프도 함께 간다. 손주들이 보고 싶으면 영상통화를 하거나 장거리를 달려가 만나는 기쁨도 나눈다. 이 모든 일들은 은퇴하지 않으면 절대로 누릴 수 없는 소중한 시간들이니, 얼마나 적절한 때 은퇴를 결단했는지 퍽 다행스럽기만 하다.


언젠가부터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 부부의 모습이 연리지(連理枝)나무를 연상케 한다. 연리지 나무란 서로 다른 뿌리를 가진 이웃 나무끼리 가지가 서로 붙어서 결이 하나로 이어진 것을 말한다. 일명 사랑나무로 불리며 연인과 부부의 영원한 사랑을 상징한다. 두 나무의 가지가 만나면서 서로 문질러 껍질이 터지고 생살이 뜯기면서 점차 상처가 아물어 같은 나이테를 갖는다는 연리지. 그 과정에서 껍질이 파괴되고 안쪽으로 밀려나 맨 살끼리 닿게 되면서 서로의 나무세포가 갈라지는 고통을 인내해야 한다. 이런 고통을 10년이나 견뎌야 비로소 연리지 나무의 특징인 서로의 영양분을 공유할 수 있다고 하니 얼마나 신비로운 자연의 조화인가. 마치 남녀간의 사랑이 많은 장벽을 거치면서 완성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나무가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특히 그것은 수십 년 동안 갖은 불화와 갈등을 아우르며 평탄하게 살아가는 노년의 부부모습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실제로 다정스런 노부부를 보면 성격도 얼굴도 많이 닮아 보인다. 그 이유는 모난 돌이 세월에 닦여 동글동글한 조약돌로 변형되듯, 서로 부딪히면서 인내하고 양보하고 배려하며 타협을 배우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요즘 젊은이들은 연리지 나무 같은 결혼생활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들은 철저하게 각자의 영역을 구분하며 서로 구속하지 않는 결혼생활에 가치관을 두는 것 같다. 우리 세대처럼 인내와 희생을 무조건적으로 하지 않고 쉽게 이혼을 결정하는 경향이 아닌가. 어쩌면 무턱대고 참고 견딤을 미덕으로 생각하며 살아온 우리세대가 비합리적일 수도 있겠다. 하여, 근래에 부쩍 많아진 황혼이혼도 충분히 이해가 갈만도 하다. 다만 은퇴 후 나의 일상은 한 나무가 부실할 때 서로 영양분을 주고 받으며 공생하는 연리지 나무를 닮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요즈음 와서야 깨달아가고 있을 뿐이다.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뀔 세월을 함께 산 부부이니 오죽하겠는가. 한때 상대방을 위해 살아가는 줄만 알고 억울해 한 적도 있었으나 그것 역시 나 자신을 위한 길이었으니, 얼마나 새로운 깨우침인가. 이제서야 남편의 건강과 행복을 내 것인 듯 챙긴다.


< 원옥재 - 수필가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원, 전 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