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사회적 사망’과 사회건강

● 칼럼 2015. 5. 15. 18:42 Posted by SisaHan

박근혜 대통령의 동생 박지만씨가 회장으로 있는 이지테크 노조위원장이 4년간의 긴 부당해고·복직 등의 우여곡절을 겪다가 결국 “박지만 회장은 기업가가 갖추어야 할 최소한 기본조차 없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포스코 사내하청회사인 이지테크에서 2006년 노조를 설립했지만, 회사로부터 금속노조 탈퇴를 요구받아 2011년에 해고당했다. 이후 부당해고 판결이 나긴 했지만 회사는 복직을 거부하며 또다시 해고했고, 법원은 그것을 부당해고라고 판결해 2014년 5월 겨우 복직할 수 있었다. 그러나 회사는 그를 원래 일하던 곳이 아닌 공장 밖 사무실에서 1년간이나 일감도 주지 않은 채 고립시키다가 최근 또다시 정직 처리했다.


언제나 법은 멀고 해고조치는 너무 가깝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22명이 자살한 것을 비롯해서, KT, 삼성전자서비스 등의 기업에서 해고, 전직, 노조활동으로 인해 노동자들이 자살, 질병 등으로 생을 마감한 일은 셀 수 없이 많다. 노동계는 이들의 자살을 ‘사회적 살인’이라고 규정한다. 아직 제대로 개념화되어 있지는 않지만, 나는 노령, 지병 등 자연적 이유가 아닌 사회, 경제, 정치적 이유로 인한 사망을 ‘사회적 사망’이라 부를 수 있다고 보고, 이번 이지테크 노조위원장의 자살은 노동계가 주장하듯이 “학대에 의한 살해”의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사망에는 우선 산재사망자가 포함될 수 있고, 빈곤, 실직, 노조 탄압, 해고 등으로 자살한 사람도 해당될 것이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에서 산재로 인한 사망자는 10만명당 18명으로 세계 최고 수준이며, 2014년 한해만 2165명이 사망했다. 약간씩 줄어들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거의 세배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전쟁 혹은 정치적 이유로 인한 사망을 훨씬 넘어선다. 즉 5.18 민주화운동 관련 희생의 거의 10배, 이라크전쟁 미군 병사 사망자의 4배가 매년 한국의 일터에서 목숨을 잃는다. 한국의 자살률은 30여명(10만명당 자살자 수) 정도로서 거의 10년째 세계 최고 수준인데, 그중 상당수는 사회적 사망일 것이다. 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에 의하면 소득 수준과 자살 생각 간에 큰 함수관계가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노인 빈곤층의 자살률이 매우 높은 것으로 봐서, 자살의 원인도 개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사회경제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사회적 사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한국은 세계 최악이며, 따라서 한국은 사회 건강성이 매우 낮은 나라라 해도 좋을 것이다. 영국의 사회역학자 리처드 윌킨슨은 불평등 사회일수록 사망률이 높다고 주장하면서, 사회적 불의가 결국 질병과 사망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사회가 상당수의 국민을 사형시키는 것과 같은 효과라고 보았다.
87년 민주화 이전까지 군 복무 중 사고, 자살로 죽은 사람이 매년 1000명 이상이었다. 1953년에서 2005년까지 비전투상황에서 죽은 군인은 총 6만여명이었다. 결국 과거는 군대에서, 오늘날에는 일터에서 멀쩡한 청장년 수천명씩 죽어 나가는 한국은 가히 사회적 사망, 국민사형 공화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망은 개인 단위로 고립된 상태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사회적 관심이나 정책적 배려를 받지도 못한다. 이렇게 본다면 한꺼번에 300명이 국민이 보는 앞에서 죽은 세월호 ‘참사’는 오히려 예외적인 것이었다.


국가 경제력(GDP), 수출, 1인당 국민소득 등의 흔한 경제지표로만 보면 한국은 확실히 선진국가가 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회적 사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한국은 여전히 후진국이고 심각하게 병든 나라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산재, 빈곤, 노조 탄압 등 사회적 불의로 매년 수천명 이상이 죽는 나라를 결코 선진국이라 말할 수는 없다. 국민들이 비자연적 이유로 죽음을 맞이할 확률이 낮은 나라, 즉 약자가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나라가 선진국이다. 그래서 나는 ‘사회건강’, 생명존중을 새 사회발전 지표로 만들어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김동춘 - 성공회대 사회학부 교수 >



“소련× 속지 마라. 미국× 믿지 마라. 일본× 일어난다. 조선× 조심하라.”
1960년대 초까지 어른들한테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던 말이다. 이건 2차대전 패전 후 철수하는 조선총독부가 심리전 차원에서 퍼뜨린 말이다. 일본인들에 대한 조선인들의 보복을 막기 위해서. 그런데 광복 70년이 되는 시점에 아베 일본을 보면서 70년 전 총독부가 퍼뜨리고 간 말이 씨가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작년 7월 초 일본은 헌법 9조(전쟁 포기)에 대한 ‘해석적 개헌’ 방식으로 일본의 해외출병을 합법화했다. 오는 4월 말 아베의 미국 방문 때 ‘미-일 방위협력지침’이 개정되면, 앞으로 일본은 동맹국 미국의 후방지원 명분하에 ‘집단적 자위권’ 행사 차원에서 어디에나 출병할 수 있게 된다. 패전 일본이 70년 동안 꿇었던 무릎을 펴고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난 4월 셋째 주말 워싱턴에서 미·일은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 시 한국의 주권을 존중한다”고 합의했다. 그러나 4월 말 개정될 미-일 방위협력지침에는 그걸 명문화하지는 않기로 했다고 한다. ‘한국의 주권 존중’을 미-일 간에 말로만 합의하고 문서화는 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일본군의 한반도 출병을 미-일 간에는 사전합의 해놓고 우리에게는 출병 직전에 ‘주권 존중’ 형식만 갖춰 통보(사실상 사후통보)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어찌하랴? 2012년 4월17일 찾아오게 돼 있던 전시작전통제권을 미국에 다시 맡겨놨으니 미국이 결정하면 일본군의 한반도 출병도 감내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을.
한편, 지난 22일 자카르타 ‘아시아·아프리카 정상회의’ 연설에서 아베는 “지난 전쟁에 대해 깊은 반성을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무라야마 담화(1995)나 고이즈미 담화(2005)에 쓰였던 ‘침략’ ‘식민지 지배’ ‘통절한 사죄’ 같은 표현은 쓰지 않았다. 미국 하원 의원 25명이 연명 서한을 보냈지만, 4월29일 아베의 미 상·하원 합동연설 논조 자체가 바뀔 가능성은 적다. 어희(말장난) 수준의 표현 변화는 약간 있을지 몰라도. 전범 후손으로서 아베의 정체성과 최근 우경화돼온 일본 대외정책의 방향성 때문에 8월로 예정된 ‘아베 담화’에서도 아베는 과거사에 대해 사과하지 않을 것 같다. 오히려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8월)을 계기로, 일본도 (원폭)피해국임을 부각시키면서, “이제 미래를 위해 손잡고 나가자”는 식으로 과거사를 매듭지어 버리려 할 것 같다.


그러면 일본이 해외출병을 합법화할 수 있게 된 국제정치적 배경, 과거사에 대해 후안무치하게 버티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일본의 이런 정책에 대해서 미국은 왜 슬그머니 일본 편을 들고 있는가?
나는 미국의 대중정책이 바뀌면서 우리나라에 불리한 외교환경이 조성되고 있다고 본다. 경제력과 군사력이 빠른 속도로 커지면서, 중국은 ‘중화부흥-중국몽’ 실현을 국가목표로 설정해놓고 미국에 ‘신형 대국관계’를 요구했다. 사실상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에 도전하는 셈이다. 이런 중국을 미국이 ‘아시아 회귀-아시아 재균형’ 정책으로 견제하려 하지만 힘이 부친다. 앞으로 10년간 국방비를 매년 500억달러씩 삭감해 나가야 할 정도니까. 이 때문에 미국은 자기 돈으로 군사력을 키워 중국을 견제해줄 동맹국이 필요해졌다. 이에 일본이 적임자로 뽑힌 것이다.
미국이 이이제이로 중국을 견제하는 셈인데, 아베는 이걸 일본이 정상국가로 되고 나아가 동아시아 패권국가로 부활하는 디딤돌로 삼으려 할 것이다. 중국에 ‘중화부흥-중국몽’이 있듯이, 일본도 2차대전 패전으로 좌절된 ‘대동아공영-일본몽’을 아직 꾸고 있을 수 있다. 이런 야망이 없다면 일본이 과거사에 대해 시인·사과를 악착같이 안 할 이유가 없다. 그런 점에서 우경화돼 가는 일본의 움직임 속에는 ‘일본몽’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우리의 광복 70년에 패전 일본은 다시 일어서고 우리 외교의 앞날은 점점 더 험난해져 가는 것 같다.
< 정세현 - 전 통일부 장관 >



뉴욕, 퍼거슨, 볼티모어. 지난해 7월 이후 미국에서 흑인 소요의 진원지가 된 도시다. 양상도 비슷하다. 흑인 젊은이가 경찰에 의해 숨진 뒤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소요·폭동으로 비화하고 전국 주요 도시로 확산된다. 이런 일이 되풀이되는 것은 미국 사회의 구조적 취약성을 보여준다.


2주일가량 이어진 볼티모어 사태는 1일 주 검찰의 신속한 행동으로 전기를 맞았다. 관련 경찰관 6명이 살인 등 혐의로 기소된 것이다. 물론 불씨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법적·사회경제적 측면에서 흑인들의 불만이 그대로다. 앞서 뉴욕과 퍼거슨 사건과 관련된 경찰관들은 대배심의 지루한 공방 끝에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소요의 상처도 작지 않다. 가장 격렬했던 4월27일 시위는 폭동으로 돌변해 차량 140여대와 건물 15채가 불에 탔다. 이번 사태에서 약탈 등의 피해를 당한 한인 업소만 해도 100곳이 넘는다.
소요가 쉽게 전국으로 확산되는 것은 주요 도시 흑인들의 사정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볼티모어에서는 흑인과 백인 거주지가 엄격하게 분리돼 있다. 숨진 흑인 청년의 거주지인 샌드타운에서는 노동가능연령(15~64살)의 실업률이 51.8%나 된다. 미국에서는 볼티모어보다 인종간 거주지 분리 현상이 심각한 도시가 시카고, 애틀랜타 등 여러 곳 있다. 경찰의 업무 중 총격에 의한 사망 사건도 지난 10년 동안 수천건에 이르지만 기소된 경찰은 수십명에 그친다. 피해자의 절대다수는 흑인이다.


흑인인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집권 기간에 흑인 소요가 빈발하는 것은 역설적이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인종문제가 더 심각해졌을 수도 있고, 오바마 정부에 대한 흑인들의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었을 수도 있다. 흑인 소요를 대하는 오바마 대통령의 태도도 일관돼 있지 않다. 인종문제에는 미국의 정치·사회·경제적 모순이 집약돼 있다. 미국이 이 문제를 풀지 못한다면 다인종 국가로서 정체성과 통합 역량도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세계화가 진전될수록 다문화·다인종과 관련된 갈등이 많아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이런 문제에서 미국보다 훨씬 경험이 적다. 흑인 소요 사태가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이 적지 않다는 얘기다.



한국 외교가 총체적 위기를 맞고 있다. 우리 외교 전략을 주도적으로 펼치기는커녕 한반도 관련국들에 대한 우리 입지마저 좁아지는 양상을 보인다. 기존 진용과 접근방식으로는 더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될 가능성이 크다. 외교 전략과 체제, 사람 등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할 때다.


무력한 한국 외교를 실감케 한 최근 사례는 미-일 신밀월 체제의 구체화다. 아베 신조 일본 정권은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과거사 문제에서 역주행한다. 미국은 은근히 ‘과거사 묻어두기’를 우리나라에 요구하면서 중국을 겨냥한 일본의 군사역할 및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를 밀어붙인다.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 체계)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문제는 미-중 사이에 낀 우리 처지를 잘 보여준다. 이런 문제는 언제든 되풀이될 수 있다. 게다가 박근혜 정권 3년차를 맞았지만 핵심 외교전략인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등은 전혀 진전되지 않고 있다. 북한 핵 문제와 남북관계도 개선될 조짐이 없다.
외교 위기가 이렇게 심화하는데도 정부는 무신경하다. 4일 국회에 나온 윤병세 장관은 반성하는 모습 대신 ‘잘하고 있는데 왜 그러나’라는 식의 태도를 나타냈다. 박 대통령이 이날 한-미 관계와 관련해 전작권 환수 재연기, 방위비 분담 협상, 원자력협정 개정 등을 성과로 꼽은 것도 급변하는 현실과 동떨어진다. 박 대통령이 중-일 정상회담이 전격적으로 열린 반둥회의 60돌 기념 아시아·아프리카 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남미 순방에 나선 것은 우리 외교 전략이 얼마나 겉도는지 잘 보여준다. 이렇게 가다간 한반도 관련 사안에 대한 최소한의 통제력조차 잃어버리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우선 인적 쇄신이 절실하다. ‘자화자찬 외교’의 진원지인 윤병세 장관은 이미 외교의 구심점이 될 역량을 잃었다. 외교안보 전략의 가온머리(컨트롤타워)가 돼야 할 청와대 국가안보실이 제구실을 못하는 것도 큰 문제다. 책임자 교체까지 염두에 두고 어떤 식으로든 정비가 요구된다. 외교 전략을 전체적으로 점검해 다시 설정하고 적절한 실행 방안과 체제를 갖추는 것은 더 중요한 과제다. ‘미·일 대 중국’이라는 대결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동북아 평화협력 구조를 만들어가야 한다. 그러려면 균형외교가 필수다. 한-미-일 안보협력을 꼭 필요한 수준에서 제어하면서 일본이 과거사 문제 해결에 나서도록 해야 한다.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북한 핵 문제를 풀기 위한 노력이 외교 재정립에 핵심이 돼야 함은 물론이다. 한반도 관련 현안을 방치한 채 주변국들의 움직임에 사안별로 대처하는 기존 방식으로는 외교 주도력이 생길 수가 없다. 정부는 사태의 급박성부터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박근혜 정부의 임기는 곧 내리막길을 걷게 되며 내년에는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있다. 외교를 재정립해 실행할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