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은 산수유로부터 오나 보다. 겨자색 온화한 빛이 이웃집 담장에서 넘어온다. 주로 산과 들에서 자생하는 산수유가 언제 도회지로 내려왔는지 개나리보다 한발 먼저 봄소식을 전하는 폼이 남의 옷을 입은 듯 겸연쩍어 보인다. 연일 꽃샘 추위가 들락거려도 꽃은 시절을 아는 모양이다. 목련, 매화, 개나리가 봉오리 터트리기 바쁘다. 불과 얼마 전에 흩뿌리는 눈발을 헤치며 집을 나섰는데 갑자기 펼쳐진 화사한 정경이 낯설어 현기증이 난다. 적응력을 키우는 덴 시장이 제격이겠다.
아들을 앞세우고 재래시장을 찾았다. 묵직한 배낭을 메고 도우미를 자처한 녀석은 세세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어미 따라 시장 길을 촐랑거리며 걷던 모습이 선연한데 어느 사이 나의 지킴이라니 대견해서 팔짱을 꼭 낀다.
이른 시장은 떠밀려 다니지 않아서 좋았다. 갓 펼쳐놓은 생물들에서 싱싱함이 묻어나고 또 하루를 여는 상인들의 움직임은 활기가 찼다.
재래시장의 매력 중 하나는, 떡집 옆에 옷가게, 그 옆에 생선가게 그리고 방앗간 하는 식으로 연관성이나 질서감 없음이 아닐까. 자연스런 현상이긴 하지만 독립성 추구엔 더 없이 좋은 기획이란 생각을 하다가 야채전 앞에서 발이 멈췄다.
밑동이 샛빨간 짤막한 시금치, 실하게 묶인 오동통한 쪽파, 향긋한 냉이와 달래 그리고 쑥 …… .
옹기종기 펼쳐놓은 좌판엔 늘 허기졌던 것들 투성이였다. 갖가지 해물을 넣은 쪽파전에 쑥국도 끓이고 알싸한 방풍잎을 데쳐서 초장에 찍으면 금방 세상이 달리 보일 것 같다. 눈요기만으로도 배가 부른 그리운 것들을 하나씩 들여다 보며 조우하는 데 옆에 있던 사람이 굵직한 톤으로 ‘콩나물 오백원 어치 주세요.’ 라고 한다. 반사적으로 그를 넘겨다보니 기타를 등에 멘 말쑥한 청년이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상인의 움직임을 쫓고 있었다. 나는 나의 즐거움을 잠시 보류한 채 그들의 거래에 관심을 쏟았다. 콩나물 오백원 어치, 가능한 일일까. 이십여 년 전에도 콩나물 기본 단위는 천원이었고 양도 네 식구가 겨우 한끼를 해결할 수준이었다. 그동안 물가 상승이나 여러 요인들로 인해 가격이 두 세배 정도 되어도 타산성이 없을 것 같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며 가게 주인이 퉁명스럽게 손님을 돌려 세울지, 아니면 금액에 맞춰서 쥐꼬리만큼 팔지 궁금했다. 하지만 나의 궁금증 따윈 상관없다는 듯 비닐봉지를 쭉 뽑아 탐스런 콩나물을 한 움큼 두 움큼 그리고 덤으로 조금 더 담아서 덤덤한 표정으로 청년에게 봉지를 건넨다. 이를 받아 든 청년은 “양이 많다.”며 허리 굽혀 인사하고 자리를 뜬다. 무표정한 상인은 다시 가타부타 말없이 손님을 맞고 일손을 바삐 움직인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손님의 입장을 배려하는 그 사람의 행동이며 예나 지금이나 서민의 신실한 찬거리인 콩나물이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시장을 도는 동안 내내 청년과 콩나물 생각이 가시지 않았다. 다음엔 혹시 너무 많은 양에 놀라 삼백원 어치로 하향 구매하지 않을까 하는 실없는 상상으로 웃기도 하고 초심자로서 결코 쉽지 않은 콩나물을 어떻게 다룰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아들도 청년의 모습이 머릿속에 맴도는 모양이었다. “엄마, 그 청년 궁색한 음악도 인가봐요.” 아마도 홀로서기 하던 자신의 옛모습이 떠올랐나 보다.
시장을 한 바퀴 도는 동안 쇼핑 봉지가 줄줄이 매달렸다. 아들은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더니 배낭에다 봉지들을 집어넣는다. 파도 시금치도 삐쭉 나와서 매끈한 스타일을 구기게 생겼건만 녀석은 개의치않는 눈치다. 홀로서기 십여 년 동안 후덕해진 모습이 보기 좋다.
퇴근에 맞춰 녀석이 전화를 했다. 저녁을 먹기는 해야겠는데 마땅히 당기는 게 없단다. 수제비를 권했더니 회가 동하는 듯 재촉한다. 시장에서 받은 에너지로 밀반죽을 힘있게 한다. 오랫만에 어미 노릇 좀 하게 되려나 보다.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등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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