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재래시장에서

● 칼럼 2015. 4. 4. 16:25 Posted by SisaHan

서울의 봄은 산수유로부터 오나 보다. 겨자색 온화한 빛이 이웃집 담장에서 넘어온다. 주로 산과 들에서 자생하는 산수유가 언제 도회지로 내려왔는지 개나리보다 한발 먼저 봄소식을 전하는 폼이 남의 옷을 입은 듯 겸연쩍어 보인다. 연일 꽃샘 추위가 들락거려도 꽃은 시절을 아는 모양이다. 목련, 매화, 개나리가 봉오리 터트리기 바쁘다. 불과 얼마 전에 흩뿌리는 눈발을 헤치며 집을 나섰는데 갑자기 펼쳐진 화사한 정경이 낯설어 현기증이 난다. 적응력을 키우는 덴 시장이 제격이겠다.
 
아들을 앞세우고 재래시장을 찾았다. 묵직한 배낭을 메고 도우미를 자처한 녀석은 세세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어미 따라 시장 길을 촐랑거리며 걷던 모습이 선연한데 어느 사이 나의 지킴이라니 대견해서 팔짱을 꼭 낀다.
이른 시장은 떠밀려 다니지 않아서 좋았다. 갓 펼쳐놓은 생물들에서 싱싱함이 묻어나고 또 하루를 여는 상인들의 움직임은 활기가 찼다.
재래시장의 매력 중 하나는, 떡집 옆에 옷가게, 그 옆에 생선가게 그리고 방앗간 하는 식으로 연관성이나 질서감 없음이 아닐까. 자연스런 현상이긴 하지만 독립성 추구엔 더 없이 좋은 기획이란 생각을 하다가 야채전 앞에서 발이 멈췄다.
밑동이 샛빨간 짤막한 시금치, 실하게 묶인 오동통한 쪽파, 향긋한 냉이와 달래 그리고 쑥 …… .


옹기종기 펼쳐놓은 좌판엔 늘 허기졌던 것들 투성이였다. 갖가지 해물을 넣은 쪽파전에 쑥국도 끓이고 알싸한 방풍잎을 데쳐서 초장에 찍으면 금방 세상이 달리 보일 것 같다. 눈요기만으로도 배가 부른 그리운 것들을 하나씩 들여다 보며 조우하는 데 옆에 있던 사람이 굵직한 톤으로 ‘콩나물 오백원 어치 주세요.’ 라고 한다. 반사적으로 그를 넘겨다보니 기타를 등에 멘 말쑥한 청년이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상인의 움직임을 쫓고 있었다. 나는 나의 즐거움을 잠시 보류한 채 그들의 거래에 관심을 쏟았다. 콩나물 오백원 어치, 가능한 일일까. 이십여 년 전에도 콩나물 기본 단위는 천원이었고 양도 네 식구가 겨우 한끼를 해결할 수준이었다. 그동안 물가 상승이나 여러 요인들로 인해 가격이 두 세배 정도 되어도 타산성이 없을 것 같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며 가게 주인이 퉁명스럽게 손님을 돌려 세울지, 아니면 금액에 맞춰서 쥐꼬리만큼 팔지 궁금했다. 하지만 나의 궁금증 따윈 상관없다는 듯 비닐봉지를 쭉 뽑아 탐스런 콩나물을 한 움큼 두 움큼 그리고 덤으로 조금 더 담아서 덤덤한 표정으로 청년에게 봉지를 건넨다. 이를 받아 든 청년은 “양이 많다.”며 허리 굽혀 인사하고 자리를 뜬다. 무표정한 상인은 다시 가타부타 말없이 손님을 맞고 일손을 바삐 움직인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손님의 입장을 배려하는 그 사람의 행동이며 예나 지금이나 서민의 신실한 찬거리인 콩나물이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시장을 도는 동안 내내 청년과 콩나물 생각이 가시지 않았다. 다음엔 혹시 너무 많은 양에 놀라 삼백원 어치로 하향 구매하지 않을까 하는 실없는 상상으로 웃기도 하고 초심자로서 결코 쉽지 않은 콩나물을 어떻게 다룰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아들도 청년의 모습이 머릿속에 맴도는 모양이었다. “엄마, 그 청년 궁색한 음악도 인가봐요.” 아마도 홀로서기 하던 자신의 옛모습이 떠올랐나 보다.
시장을 한 바퀴 도는 동안 쇼핑 봉지가 줄줄이 매달렸다. 아들은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더니 배낭에다 봉지들을 집어넣는다. 파도 시금치도 삐쭉 나와서 매끈한 스타일을 구기게 생겼건만 녀석은 개의치않는 눈치다. 홀로서기 십여 년 동안 후덕해진 모습이 보기 좋다.

퇴근에 맞춰 녀석이 전화를 했다. 저녁을 먹기는 해야겠는데 마땅히 당기는 게 없단다. 수제비를 권했더니 회가 동하는 듯 재촉한다. 시장에서 받은 에너지로 밀반죽을 힘있게 한다. 오랫만에 어미 노릇 좀 하게 되려나 보다.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등단 >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미국 <워싱턴 포스트> 인터뷰에서 일본군 위안부를 “인신매매의 희생자”라고 표현했다. 아베 총리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인신매매’라는 표현을 쓴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오는 29일 미국 상·하원 합동 연설을 앞두고 여러가지 깊은 계산 끝에 나온 용어 선택임이 분명하다.
인신매매란 말은 주로 여성이나 아동들을 성적 착취나 강제 노역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 각종 강제적인 수단을 동원해 본인의 의사에 반해 사고파는 행위를 말한다. 지금까지 아베 정부가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하지 않아온 점에 비추어 보면 인신매매란 말은 한걸음 진전된 것이라는 평가가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치장을 한꺼풀 벗기고 보면 이 발언은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는 절묘한 말장난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아베 총리의 발언에는 인신매매의 ‘주체’가 빠져 있다. 위안부 문제의 핵심은 일본군이 모집 과정에서부터 위안소 설치·운영·관리에까지 직접 개입했음을 인정하는 데 있다. 그런데 아베 총리는 범죄행위의 부당성을 말하면서도 막상 그 범죄행위를 누가 저질렀느냐는 가장 핵심적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발언의 밑바탕에는 위안부 문제는 민간업자들의 책임일 뿐 일본군과는 무관한 일이라는 발뺌이 담겨 있다. 아베 총리가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을 겪은 이들을 생각할 때 가슴이 아프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가해자로서 ‘사과와 반성’은 전혀 없이, 그냥 제3자적 입장에서 가슴이 아프다는 개인적 연민만 표시했을 뿐이다.
아베 총리의 물타기 시도는 “역사상 많은 전쟁이 벌어졌고 거기서 여성들의 인권이 침해됐다”는 말에서도 확인된다. 위안부들이 고통을 겪은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은 일본군이 저지른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 전쟁이 일어나면 늘 벌어지는 ‘보편적 비극’이라는 취지가 짙게 배어난다. 아베 총리는 미국 의회 연설을 앞두고 위안부 문제를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침해한 행위임을 부각시켜 국제사회의 비판을 무마하면서도 일본의 책임은 교묘히 벗어나려는 절묘한 용어 선택을 한 셈이다.


아베 총리의 미국 상·하원 합동 연설 소식이 알려진 뒤 우리 외교당국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일본이 과거사 문제에 대해 올바른 입장을 표명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해 왔다. 하지만 이번 아베 총리의 발언을 보면 이런 기대도 무망해 보인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아베 총리의 인식은 전혀 변한 게 없다. 오히려 위안부 문제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미국 사회에 일본이 과거사에 대해 충분히 사과·반성하고 있다는 인상을 줄 가능성마저 있다. 아베는 과거사 문제에 관해 국제사회에서 우호적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교묘한 행보를 계속해나가는 반면에, 우리 외교당국은 ‘무대책’으로 일관하며 계속 뒤통수를 맞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정부가 지난 27일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애초 요청한 정원•조직 등을 대폭 축소한 내용의 특별법 시행령 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해양수산부가 내놓은 안을 보면, 특위의 정원은 세월호 특별법에 명시된 120명보다도 30명이나 적은 90명에 그쳤다. 조직 구성에서도 진상규명국만 ‘국’으로 남았을 뿐 안전사회국이 안전사회과로 격하되는 등 크게 축소됐다. 2월17일 특위가 안을 내놓은 뒤 한 달 이상 차일피일 시간을 끌던 정부가 내놓은 대답은 결국 ‘축소지향형 특위’였다.


시행령의 문제점은 단지 정원과 조직의 축소에 그치지 않는다. 특위의 특성상 인적 구성은 민간인 비율이 공무원보다 많은 게 정상이다. 하지만 시행령에는 민간인과 공무원의 비율을 48명 대 42명으로 엇비슷하게 맞췄다. 이렇게 되면 정부의 입김이 강화될 수밖에 없다. 또 일반직 고위공무원이 실장을 맡게 될 기획조정실에서 진상규명과 피해자 지원대책 점검 등의 업무 전반을 ‘기획·조정’하게 만들었다. 정부에서 파견된 공무원들에게 실질적인 힘을 주어서 특위의 활동을 무력화하려는 교묘한 발상이 시행령 전반에 깔려 있다.


세월호 특위가 제대로 성과를 내려면 위원회의 독립성과 중립성, 충분한 인적·물적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것은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정부의 시행령은 완전히 거꾸로 가고 있다. 이런 식의 조직 구성이라면 세월호 특위는 진상규명에 필요한 인력과 예산은 빈약한 또 하나의 ‘관제 조직’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짙다. 이번 입법예고안은 그동안 특위 활동을 사사건건 방해해온 정부가 내놓은 특위 발목 잡기의 제도적 결정판이라 할 만하다. 특위를 대하는 정부 태도가 어떤 것인지는 시행령을 입법예고하면서 당사자인 특위에 내용을 알려주지 않은 데서도 잘 드러난다. 해수부 쪽은 “이미 협의가 끝난 사안이라 특위도 다 알고 있는 내용”이라고 했지만, 일반적인 통념은 물론 예의에도 어긋나는 행동이다. 특위에 대한 ‘존중과 협력’보다는 ‘무시와 트집’으로 일관하는 정부 태도를 이 대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입법예고 제도의 취지는 정부가 독단적으로 법령을 만들지 않고 국민의 의사를 충분히 수렴해 문제점을 보완하자는 데 있다. 정부가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을 원안대로 밀어붙이는 일은 절대 용납될 수 없다. 세월호 특위의 성공 여부는 우리가 세월호 참사의 상처를 딛고 한 단계 전진할 수 있는가를 가름하는 중대한 갈림길임을 잊지 말기 바란다.



장로회의 언더우드와 감리교의 아펜젤러가 제물포항에 첫발을 내디딘 게 1885년 4월5일이다. 부활절 주일과 정확히 일치하는 날, 한국 기독교가 선교 130돌을 맞는다.
기독교는 불과 130년 만에 동아시아에서 유독 한국에서만 주류 종교가 되었다. 이들은 어떻게 단기간에 민중들 속에 뿌리내릴 수 있었을까.


의문을 풀려면 언더우드나 아펜젤러보다 한 달 뒤 들어온 윌리엄 스크랜턴을 주목해야 한다. 그는 예일대와 컬럼비아대 의과를 나온 엘리트였지만, 다른 선교사들과 달리 외국 공사와 양반들의 거처였던 정동을 떠나 하층민들이 살던 애오개, 남대문, 동대문에 병원과 교회들을 세웠다. 그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은 거리에 버려지거나 가난한 여성들을 위해 이화학당과 여성병원을 설립했다.

윌리엄 스크랜턴의 제자가 전덕기(1875~1914) 목사다. 9살 때 부모를 모두 잃고 숙부 집에서 자란 전덕기는 건달기가 다분한 숯장수였다. 17살에 스크랜턴의 병원 일꾼으로 들어간 그는 아랫사람까지 평등하게 대하는 스크랜턴 모자에게 감화돼 기독교에 입교하고, 28살인 1903년 목사가 된다. 전덕기는 그해 상동교회 청년회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펼친다. 을사늑약 무효 상소, 이준의 헤이그 파견, 신민회 조직, 105인 사건 뒤엔 늘 전덕기가 있었다. 그는 불과 39살에 세상을 떴지만 위를 향한 신앙과 옆을 향한 이웃동포 사랑을 동시에 실현하려던 선구자였다.


안창호, 조만식, 김구, 3.1운동 당시 인구의 1.5%에 불과하면서도 투옥자의 17~22%가량을 차지한 기독교인들에게도 개인 구원과 민족의 구원은 하나였다.
그러나 제국에서 온 선교사들은 신앙과 현실을 분리시켰다. 스크랜턴은 한국 감리교를 관할하던 일본의 해리스 감독이 너무 친일적이라고 반발하다 밉보여 1907년 목사직을 사임했다. 그러나 그조차도 전덕기의 상동교회 청년회가 민족운동의 구심점이 되자 1905년 해산시켜버린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일제의 한반도 점령을 용인한 미국은 스크랜턴에게도 조국이었던 것이다. 105인 사건을 일제에 밀고해 독립지사들을 일망타진케 한 프랑스인 천주교 대주교 뮈텔처럼 제국에서 온 선교사들은 ‘현실참여 금지’라는 명목으로 독립운동을 막았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반대였다. 1차대전이 터지면서 적대국이 된 프랑스와 독일의 가톨릭 선교사들은 서로 갈등했고, 참전을 위해 자기 조국으로 떠났다.


3.1운동 때도 오산학교 설립자 이승훈이 “나라 잃고 형제 동포들이 다 지옥에 있는데, 나라 없는 놈이 어떻게 천당에 가?”라고 일갈한 일화가 전한다. 선교사들의 권면 때문에 길선주 목사 등조차 독립선언문 서명을 주저했기 때문이었다.

일제가 물러간 뒤 선교사들의 조국은 더 큰 우상으로 다가왔다. 해방 이후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와 혐오에 사로잡힌 기독교인들에게 미국과 미군은 구세주이자 가장 든든한 ‘빽’이었다. 마크 리퍼트 대사가 피습당했을 때 미국대사관 앞에서 부채춤을 추고 무릎을 꿇은 기독교인들의 숭배는 극소수의 의식만은 아니다.
북에서 잔혹한 학살과 재산 탈취를 당하고 월남해 남한 우익의 핵이 된 기독교인들의 공산주의 혐오증과 반공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해방은 70년, 6.25도 65년이 지났다. 한국 기독교도 유아 청소년기를 지나 장년이 될 시점이다. 해방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맷집이 커졌다. 보채는 아이에서 그런 아이를 달랠 만큼 성장했다.


기독교(개신교)는 구한말, 이 땅과 동포의 안위보다 상국에 대한 예의에 더 정신을 쏟은 조선 유교 사대부를 비판하며 등장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이 외세 숭배자로 남아 여전히 한반도의 갈등만 재생산해낸다면, 선교의 논리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다. 이제 원한을 십자가에 못박고, 희망을 부활시킬 때가 아닌가.
불교는 당나라란 외세의 압박 아래서 분열된 삼한을 하나로 묶기 위해 ‘화쟁’(다름을 인정하면서도 화해)을 제시하며 어른 노릇을 했다. 한국 기독교도 원효 정도의 대안은 제시하며 희망을 열어야 평화 통일 시대를 책임질 어른이 되지 않겠는가.
< 조현 -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