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하고 안타깝다. 고고도 미사일방어(사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문제로 불거진 우리 외교·안보팀의 수준 낮은 대응력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한숨이 나온다. 외교·안보 문제의 특성상, 실상보다 정부의 일방적인 홍보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많은 시민이 장차 직면할 실망의 크기를 생각하면 화가 난다.
그래도 박근혜 정부의 정책 중 일반 시민으로부터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분야가 외교·안보라니 역설이 아닐 수 없다. 홍보와 의전을 앞세운 화려한 정상외교가 불러일으키는 착시현상과, 경제·사회·정치 등 다른 분야에 비해 나아 보인다는 상대평가 탓이 클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호사도 오래갈 것 같지 않다. 한반도 주변 환경의 엄중함과 정부의 안이함이, 그간 정책과 홍보의 격차에서 기인한 호시절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 2년을 되돌아보면, 외교적으로 어느 하나 주도적으로 문제를 해결한 것을 찾기 어렵다. 단지, 원칙을 높이 내건 채 상대가 그에 맞춰올 때까지 기다리는 ‘천수답 외교’를 펼쳐왔을 뿐이다. 설거지를 하지 않는 바람에 접시도 깨지 않는, 운동경기에 비유하자면 나의 득점이 아니라 상대의 실점에 의존하는, 비가 오고 나서야 비로소 삽을 들고 나서는 방식으로 일관해왔다고 할 수 있다.

북한과 일본 정책이 대표적이다. 북한에 대해서는 ‘선 신뢰-후 문제해결’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내놓았지만, 실제로는 신뢰가 아닌 굴복을 강요해왔다. 일본에도 마찬가지다. 일본군 군대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 문제에 진전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전부였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북한과 일본의 자책골이 제때 터져주는 바람에 홈팬을 만족시켜왔지만, 그런 상황이 후반전에도 계속된다는 보장이 없다. 오히려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을 두둔하고 우리나라를 헐뜯는 듯한 웬디 셔먼 미국 국무차관의 최근 발언은 이런 방식의 외교가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징후다.


천수답 방식의 외교·안보 정책은 북한, 일본 정책에만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것이 아니다. 1~2년 전부터 줄곧 큰 문제가 될 것이라는 예고가 제기됐음에도 기회주의적 태도로 소일해오다가 발등의 불이 되고 나서야 호들갑을 떠는 사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에 대한 대응은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은 미국의 1급 동맹국인 영국이 총대를 메는 바람에 부담을 크게 덜었다고는 하지만, 주체적 결정에 따라올 실익은 크게 줄었다. 사드는 상황과 사람에 따라 ‘전략적 모호성’(한민구 국방부 장관)과 요청도 협의도 결정도 없다는 ‘3가지 부정’(민경욱 청와대 대변인), ‘제3국 간섭 배제’(김민석 국방부 대변인)와 ‘국익에 최우선을 둔 결정’(윤병세 외교부 장관)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다. 도대체 이 문제를 결정하는 주체는 누구이며, 조율된 입장은 있기나 한 것인지 헷갈린다. 5월 열리는 러시아의 승전 70주년 기념행사가 한달 남짓 앞으로 다가왔는데도 주위 눈치를 보며 좌고우면하고 있는 것도, 갈수록 초청한 쪽과 말리는 쪽 앙쪽의 불만만 키울 뿐이다.


천수답 외교와 ‘환상의 짝’을 이루는 것이, 국제정세와 상대를 살피지 않고 모든 걸 ‘우리 중심’으로만 바라보는 ‘천동설 인식’이다. 좋은 예가, 박근혜 대통령이 최근 중동을 다녀온 뒤 부흥회 간증에서 하듯이 쏟아낸 ‘제2의 중동 붐’이니 ‘하늘의 메시지’니 하는 말이다. 이야말로 중동이 겪고 있는 곤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자기중심적 인식이다. 중동의 최부국 사우디아라비아마저 달포 전 신용등급이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격하될 정도로, 중동의 거의 모든 나라는 지금 석유값 폭락으로 경제적 곤경을 겪고 있다. 또 ‘이슬람국가’(IS)의 발호와 이란 핵 문제로 인한 안보 불안이 이 지역을 사로잡고 있다. 이런 마당에 돈 벌러 “대한민국 청년을 나라가 텅텅 빌 정도로” 중동으로 보내자는 독려를, 이들이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하다.
외교는 국익을 걸고 상대와 겨루는 ‘총 없는 전쟁’이다. 천동설의 자기중심주의와 천수답의 소극성으로는 절대 좋은 성적을 낼 수 없는 경기다.
< 오태규 - 한겨레신문 논설위원실장 >



[1500자 칼럼] 도배질

● 칼럼 2015. 3. 21. 17:41 Posted by SisaHan

도배질이란 말이 있다. 이제 여기서 오랜 산 사람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말이다. 한국에서는 방의 벽에다 벽지를 바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예쁜 꽃무늬라든지, 부드러운 색의 벽지를 붙여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상하게 벽지를 별로 바르지 않는다. 그런 까닭인지 처음 이곳에 이민 왔을 때 방안이 썰렁하게 느껴졌다. 아직도 한국에선 집집마다 벽지를 바르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말은 신문에서 말하는 도배질이다. 큰 사건이 터지면 신문에서 한 가지 사건으로 지면을 채우다시피 하는 것을 도배질이라고 한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사건의 비중이 큰 만큼 독자들의 관심도 많다.

중요한 내용의 기사라면 일면 톱 기사에 사진도 크게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만큼 독자들이 궁금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신문도 아무래도 독자들이 알고 싶어하고 읽기를 원하는 기사를 중점으로 다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흔히들 독자들의 알 권리라고 말하기도 한다. 특히 한국 신문은 그런 현상이 심하다. 물론 여기 신문도 그렇지만, 여기 신문은 지면이 분명히 나누어져서, 그렇게 심한 편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 신문의 경우, 신문이 온통 한가지 기사로 덮을 때가 많다. 그 뿐만 아니라 다루는 내용조차 사소한 내용까지 다룬다. 그 현상을 어느 때 보다 잘 보여 준 것이 지난 연말이 아니었나 한다. 정윤회, 문고리 삼인방, 땅콩 부사장…한동안 신문만 펼쳤다면 그 기사였다.


여기 신문은 지면이 분명히 나누어져 그런 현상을 보기 힘든 이유도 있지만 하루 이틀 지나면 큰 사건도 밀리기 나름이다. 한국의 어떤 기사는 내 개인적인 생각이기도 하지만 너무 지나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사건이 과연 온 국민이 떠들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의문도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건을 그렇게 과대평가한 것이 언론의 지나친 반응이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한사람의 불행, 또는 실수를 놓고 온 국민이 씹으면서 대리 만족을 느끼려 하는 것은 아닌지? 그 보다 더한 문제들을 잊어버린 채, 또 정작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는 안보이고, 까발기는 자체에서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무서운 것은 다른 사건과 사고는 안 보이고 완전히 덮어버리고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정치하는 사람들은 큰 실수나 비리가 들통이 나면 다른 사고가 터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터트리는지 모른다. 어떤 사회건 여론 형성에 큰 힘을 가지고 있는 언론이 권력과 결탁하기는 쉬운 법이다.

대형 사고가 터져 자신의 비리를 덮어주기를, 그러나 사실 기다릴 필요가 없는지 모른다. 그가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그 어떤 사고가 당연히 터지는 것이 한국사회다. 신문을 도배질할 만한 사고가 터져 신문에 도배질을 하면, 국민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까맣게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다른 일이 터져 먼저 터진 일을 덮어버리는 셈이다. 사고가 사고를 해결해 준다고 할까? 그런 상황에서 먼저 터진 사고는 해결 된 것이 아니라 그냥 잊혀진 셈이다. 그리하여 같은 사고가 되풀이 돼도, 또 잊으면 그만이었다. 일반 시민들은 그 어떤 사고에 대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책임감을 느끼기보다 잊어버리는 것이 편한 셈이다. 그 어떤 사고가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에게 직접적인 피해만 안 준다면 그저 고마울 뿐이다.


그런 상황 아래서 아무도 문제의 원인이나 해결책을 묻지 않는다. 어느 일이 중요한가 물어 볼 여유도 없다. 새로 생긴 일이 지난 일을 덮어버릴 뿐이다. 오래된 벽지는 빛이 바랬고 단물이 빠졌다 할까? 오히려 지금 도배질한 사건을 보며, 눈 앞에 보이는 일에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는 것이다. 마치 이 사건 만이 전부인 양, 오히려 새로 터진 사건에 고마워하고 있다. 지난 사건들을 잊어버리게 해주어 고맙다고….

<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



[한마당] 공약보다 품성을 뜯어보라

● 칼럼 2015. 3. 21. 17:39 Posted by SisaHan

요즘 모국 국회에서 국정조사 대상이 된 소위 ‘자원외교’와 논란의 ‘4대강 사업’은 이명박 전대통령측이 큰 업적이라고 내세웠던 국가적 대형 프로젝트였다. 그런데 그가 물러난지 3년도 안돼 이명박 정부의 최대 비리와 실책으로 비판받고 있다. 자원외교라는 미명 하에 국민의 피땀으로 모아진 나랏 돈을 수십조 원씩 날려버렸고, 국토는 망가졌으며, 후세에는 뒤처리의 무거운 짐을 떠넘겼다. 그러고도 뭘 잘못했느냐는 투의, 눈 귀막은 몰염치가 아니면 판단력이 마비된 동키호테 같은 회고록이랍시고 펴냈다가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의 재임 중 실정을 열거하자면 헤아릴 수가 없다. 가시밭길을 헤쳐 나와 영글어가던 민주 꽃봉오리에 찬물을 끼엊고 후퇴시킨 것 부터, 고위직들의 도덕수준을 전락시켜 공직사회의 물을 흐리고, 나아가 국민적인 도덕의식마저 무뎌지게 한 것 까지, 아마 가장 능력이 떨어지는 대통령 일 것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그가 대통령에 출마해 ‘7.4.7’을 외쳤을 때 사람들은 ‘경제 대통령’을 기대했다. ‘경제성장률 7%’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세계 7대 강국(G7) 진입’을 임기 중 달성하겠다는 공약은 그의 건설사 성공신화와 청계천 개발이 입증하는 듯 포장됐다. 그래서 5백만 표라는 압도적 표차로 국민들은 손을 들어 주었다. 하지만 순진한 국민들이 속았음을 깨달은 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럴 듯한 선거용 입발림 공약이 하나 씩 허언으로 드러난 때는 이미 그의 허풍잔치를 제어할 수가 없는 상태가 됐다.


현 박근혜 대통령은 어떤가. 그 역시 ‘전쟁’으로 비유되는 선거 때 무슨 말인들 못하느냐는 속설을 그대로 입증하듯, 수많은 공약들을 쏟아내 국민들을 현혹했다. 야당 후보가 내세울만한 공약까지 재빨리 ‘편취’해 자신의 것으로 선전했다. ‘반값 등록금’과 ‘4대 중병보장’ 등을 포함한 각종 복지공약에, ‘언론 민주화’와 ‘경제민주화’까지, 이른바 ‘행복 공약’은 당대에 모을 수 있는 구상들을 총 취합한 ‘장밋빛 공약의 백화점’에 다름 아니었다. 그런데 하나 둘 거둬들이고 뭉개버린 공약이 줄을 잇는다. 국민과의 약속을 파기하고도 일언반구 사과조차 없다.
‘정치인은 원래 거짓말쟁이’라는 말이 있다지만, G7 혹은 더 넓게 G20에 드는 나라에서 한국처럼 그렇게 심하게 국민을 속여 정권을 잡은 전례가 있을까. 그러고도 아무 탈없이 권좌를 지키며 지지율이 40%를 넘는다고 큰소리 칠 수 있는 나라 말이다.


이 기네스적인 한국의 선거풍토는 허풍에 너그럽고 ‘망각병’에 걸린 국민들과 이를 악용하는 정치인에게 일차적 책임이 있음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후보자의 사람 됨됨이를 검증하는데 소홀한 때문이 아닌가하는 생각이다. 지도자가 되겠다는 인물의 이력과 품성, 그동안의 삶의 자세와 철학, 헌신된 태도여부 등을 정확히 살펴보면 그의 정치비전과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패와 비리가 흔한 건설기업인 출신이라는 점과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공철학, BBK등 그의 주변에 떠돌던 음험한 소문들을 간과한 것은 이명박 후보 검증의 최대 실수였다. 장기 독재자 부친 아래 ‘궁중수업’만을 받았던 박근혜 후보의 소통과 대인관계, 용인술, 경세론 등을 제대로 검증하지 못하고 공약에만 눈을 팔았던 결과가 지금의 여러 후유증을 낳고있는 것이다.


눈을 돌려 지금 한창인 토론토 한인회 선거를 살펴보자. 마치 ‘미니 한국선거’ 같은 모양새다. 서로 공약을 내걸고, 수천 장씩 선거인(유권자) 등록신청서 확보에 열을 돌린 세몰이도 닮았다. 하지만 현 이진수 회장을 포함해 그간 한인회장들이 내걸었던 공약을 기억하는 동포가 몇이나 되나. 그 공약이 이행됐는지, 알고 체크하는 사람은 눈을 씻고 봐도 찾기 힘들다. 장담컨대, 요란한 공약은 대부분 빈말로 끝날 확률이 높다. 그리고 거기에 시비를 걸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곧 잊어버릴 테니까. 잊지 않아도 어쩔 도리가 없으니까.


여기서도 명심해야 할 것은 진실성과 정의감, 배려심 등 후보자의 전력과 품성, 평소의 헌신자세 여부다. 그가 그동안 무슨 일을 어떻게 했고, 이웃을 위해 무슨 일을 했으며, 주변에서 무슨 평판을 듣고 있는지가 진짜 중요하다. 사람 됨됨이가 괜찮으면 한인회 뿐 아니라 나라의 지도자가 된다해도 걱정할 일이 없을 것이다. 동포사회 앞날을 염려한다면, 눈을 크게 떠 그의 인품을 보고, 귀를 크게 열어 그의 주변 이야기들을 듣고, 발품을 빌어 후보들의 봉사이력을 뒤져보고 ‘싹수’를 판단하라! 그래서 수준미달이라면, 그래도 좋다면, MB의 추억처럼 한인사회도 당분간 정체나 후퇴를 각오해야 할 것이다.


< 김종천 편집인 >



1990년대 중반 김영삼 정부 시절, 교수들 주도의 연구용역에 조교로 일을 한 적이 있다. 우리 사회의 지도자급에 속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묻고 정리하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그때 내가 놀란 것은 상당한 사회적 지위와 부를 갖고 있다고 여겨지는 대부분의 면담 대상자들이 자신은 뭔가 박탈당한 상태라 여기면서 피해의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이후 나는 우리 사회에서 돈과 권력, 지위와 명성에서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이 피해의식과 불안감을 갖고 있으며, 자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의 마음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물론 자본주의 시장경제라는 것이 언제나 불안정하기 때문에 대기업 소유자들도 언제나 위기의식, 긴장과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특히 많이 가진 사람들은 잃을 것이 많으니 언제나 불안하고 빈자의 공격을 의식하여 공포감을 갖는 경향이 있고, 또 그들의 욕망 자체가 불안을 수반하는 법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 최상층이 갖고 있는 불안감은 좀더 다른 연원을 갖는 것 같다. 그것은 자신의 권력·부가 적법하고 정당한 절차를 거쳐 얻어진 것이 아닌 데서 오는 원천적 불안감, 사회운동 진영이 그들의 과거나 도덕성을 거세게 공격한 것을 의식한 피해의식 등에서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중국 고전 <대학>(大學)에는 “편안한 이후에 능히 깊이 생각할 수 있다”(안이후능려:安而后能慮)는 말이 있다. 극심한 대립과 전쟁 상태에서는 깊고 멀리 생각할 수 없고, 당장의 생존에 급급하게 된다. 그런데 위기는 사실 주관적이다. 권력자 자신이 깨끗하지 못한 과거를 갖고 있고, 비판자들이 자신을 도덕적으로 부인하면 단순한 비판자도 ‘적’으로 보일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포용하기보다는 국가안보를 들먹이며 없애려 할 것이다. 과거 일제에 부역했던 사람들, 독재정권하에서 권력과 부를 누린 사람들은 매우 불안한 상태에 있었고, 그래서 권력을 잡은 후 가시적 성과나 목표 달성에 집착을 하거나 자신을 비판하는 학생들까지 적으로 취급해서 탄압했는데, 그것은 결국 그들이 강한 위기의식과 불안감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통합진보당을 해산 청구하고, 국정원과 검찰을 정치의 전면에 나서게 하고, 흠결이 많아도 대통령에게 충성을 바칠 사람들을 기용한 것은 이 정부가 국가의 미래나 장기 정책을 검토할 여유가 없고 쫓기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 정부에서 대통령 임기 안에 효과가 나오지 않을 사회정책, 즉 교육·복지·노동정책을 거의 펴지 못한 것, 통일을 ‘대박’이라고 표현한 것이나, 영세자영업자·비정규직·청년실업자 등 구체적 대상의 처지를 고려하면서 정책을 내놓지 못하고 그냥 ‘경제 살리기’만 주문처럼 반복하는 이유도 모두 여기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지난 대선 부정의 과거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런 자기방어에 급급한 박근혜 정권하에서 3년을 더 견뎌야 하는 우리는 참 딱한 처지에 있다.
권력과 부를 가진 세력이 편안하고 자신감을 가져야 정치공동체의 미래를 깊이 고민할 수 있고 멀리 보는 정책을 구상하고 또 실천할 수 있다. 정부의 정책은 지지율 제고와 표를 얻기 위한 정략의 산물이어서는 안 되고 국민의 처지와 나라의 미래를 위한 숙고의 결과여야 한다. 그게 없을 때 ‘종북몰이’나 경제‘성장’에 집착하게 된다.


광복 70년이 흘렀다. 지난 70년간의 분단과 사실상의 전쟁 상태를 겪으면서 우리는 30년, 100년을 내다보는 보수 지도자나 세력을 거의 만나보지 못했다. 이제는 좀 편안한 마음을 갖는 지도자, 특히 자신감 있고 미래를 걱정하는 보수세력이 나올 때도 되었다. 그러자면 국민들이 ‘종북몰이’를 써먹는 정치가나 언론을 퇴출시킬 안목이 있어야 한다. 남남 화해를 먼저 해야 남북 화해와 평화통일의 길로 나아갈 수 있고, 중국과 미국의 틈에서 지혜를 발휘할 수 있다. 피해의식과 불안감이 없는 ‘보수’가 나와야 그와 맞수가 되는 진보가 만들어질 수 있다.
< 김동춘 - 성공회대 사회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