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검찰, 또 ‘봐주기 수사’로 가나

● 칼럼 2015. 5. 15. 18:46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검찰이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한테서 1억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를 사고 있는 홍준표 경남지사에 대한 소환조사를 마치고 형사처벌 수위 조절에 들어갔다. 검찰은 홍 지사에 대한 기소를 기정사실화하고 있으나, 구속영장 청구에 대해서는 무척 조심스러운 모습이다. 물론 피의자에 대한 구속수사만이 능사는 아니다. 정치자금법 위반의 경우 금액이 2억원 이상인 경우에만 영장을 청구해온 전례 등에 비춰볼 때 불구속 기소가 온당한 결론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핵심 증인에 대한 홍 지사 쪽의 회유와 허위진술 강요 혐의에 대한 소극적인 수사 태도를 보면, 검찰이 ‘봐주기 수사’ 쪽으로 기울지 않았나 하는 의혹을 지우기 어렵다.


검은돈이 오간 사건에서 관련 증인들을 회유하거나 협박하는 행위는 구속영장 청구의 중대한 사유가 된다. 그런데 홍 지사의 측근인 김아무개 전 청와대 비서관 등은 돈 전달자로 지목된 윤아무개 전 경남기업 부사장에게 “돈을 (홍 지사의 보좌관에게) 준 것으로 진술하면 안 되겠느냐”는 등의 회유를 시도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이런 회유 정황이 담긴 녹음파일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도 검찰은 “주요 참고인에 대한 회유·무마 의혹 수사도 계속 진행 중”이라는 말만 할 뿐 뚜렷한 수사 결과를 내놓지 않고 있다. 홍 지사의 지시 여부는 일단 제쳐놓고라도 측근들의 증거인멸 시도에 대해서도 가타부타 말이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검찰의 이런 소극적 태도는 박모 전 경남기업 상무 등 성 전 회장 측근들을 증거인멸 혐의로 잇따라 구속한 것과도 크게 대조된다. 검찰은 이들이 회사 자료를 폐기·은닉한 혐의가 있다며 수사초기 전격 구속했으나, 정작 돈을 받은 쪽 증거인멸 혐의에 대해서는 수사가 지지부진하기만 하다. 검찰의 이런 미적지근한 태도는 이완구 전 총리 측근들의 증거인멸 혐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홍 지사에 대한 사법처리 수위는 ‘성완종 리스트’ 사건 수사의 진로를 가늠하는 풍향계다. 리스트에 오른 인물 중 유일하게 돈 전달자와 전달 과정 등이 구체적으로 드러났고 증거인멸 혐의마저 있는 이 사건을 맥없이 처리할 경우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 정권 핵심인사들에 대한 수사가 어떻게 진행될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이 사건 수사가 성 전 회장 측근들만 감옥에 가고 리스트에 오른 인물들은 거리를 활보하는 본말이 전도되는 상황으로 끝나지 않을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칼럼] ‘사회적 사망’과 사회건강

● 칼럼 2015. 5. 15. 18:42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박근혜 대통령의 동생 박지만씨가 회장으로 있는 이지테크 노조위원장이 4년간의 긴 부당해고·복직 등의 우여곡절을 겪다가 결국 “박지만 회장은 기업가가 갖추어야 할 최소한 기본조차 없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포스코 사내하청회사인 이지테크에서 2006년 노조를 설립했지만, 회사로부터 금속노조 탈퇴를 요구받아 2011년에 해고당했다. 이후 부당해고 판결이 나긴 했지만 회사는 복직을 거부하며 또다시 해고했고, 법원은 그것을 부당해고라고 판결해 2014년 5월 겨우 복직할 수 있었다. 그러나 회사는 그를 원래 일하던 곳이 아닌 공장 밖 사무실에서 1년간이나 일감도 주지 않은 채 고립시키다가 최근 또다시 정직 처리했다.


언제나 법은 멀고 해고조치는 너무 가깝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22명이 자살한 것을 비롯해서, KT, 삼성전자서비스 등의 기업에서 해고, 전직, 노조활동으로 인해 노동자들이 자살, 질병 등으로 생을 마감한 일은 셀 수 없이 많다. 노동계는 이들의 자살을 ‘사회적 살인’이라고 규정한다. 아직 제대로 개념화되어 있지는 않지만, 나는 노령, 지병 등 자연적 이유가 아닌 사회, 경제, 정치적 이유로 인한 사망을 ‘사회적 사망’이라 부를 수 있다고 보고, 이번 이지테크 노조위원장의 자살은 노동계가 주장하듯이 “학대에 의한 살해”의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사망에는 우선 산재사망자가 포함될 수 있고, 빈곤, 실직, 노조 탄압, 해고 등으로 자살한 사람도 해당될 것이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에서 산재로 인한 사망자는 10만명당 18명으로 세계 최고 수준이며, 2014년 한해만 2165명이 사망했다. 약간씩 줄어들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거의 세배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전쟁 혹은 정치적 이유로 인한 사망을 훨씬 넘어선다. 즉 5.18 민주화운동 관련 희생의 거의 10배, 이라크전쟁 미군 병사 사망자의 4배가 매년 한국의 일터에서 목숨을 잃는다. 한국의 자살률은 30여명(10만명당 자살자 수) 정도로서 거의 10년째 세계 최고 수준인데, 그중 상당수는 사회적 사망일 것이다. 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에 의하면 소득 수준과 자살 생각 간에 큰 함수관계가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노인 빈곤층의 자살률이 매우 높은 것으로 봐서, 자살의 원인도 개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사회경제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사회적 사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한국은 세계 최악이며, 따라서 한국은 사회 건강성이 매우 낮은 나라라 해도 좋을 것이다. 영국의 사회역학자 리처드 윌킨슨은 불평등 사회일수록 사망률이 높다고 주장하면서, 사회적 불의가 결국 질병과 사망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사회가 상당수의 국민을 사형시키는 것과 같은 효과라고 보았다.
87년 민주화 이전까지 군 복무 중 사고, 자살로 죽은 사람이 매년 1000명 이상이었다. 1953년에서 2005년까지 비전투상황에서 죽은 군인은 총 6만여명이었다. 결국 과거는 군대에서, 오늘날에는 일터에서 멀쩡한 청장년 수천명씩 죽어 나가는 한국은 가히 사회적 사망, 국민사형 공화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망은 개인 단위로 고립된 상태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사회적 관심이나 정책적 배려를 받지도 못한다. 이렇게 본다면 한꺼번에 300명이 국민이 보는 앞에서 죽은 세월호 ‘참사’는 오히려 예외적인 것이었다.


국가 경제력(GDP), 수출, 1인당 국민소득 등의 흔한 경제지표로만 보면 한국은 확실히 선진국가가 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회적 사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한국은 여전히 후진국이고 심각하게 병든 나라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산재, 빈곤, 노조 탄압 등 사회적 불의로 매년 수천명 이상이 죽는 나라를 결코 선진국이라 말할 수는 없다. 국민들이 비자연적 이유로 죽음을 맞이할 확률이 낮은 나라, 즉 약자가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나라가 선진국이다. 그래서 나는 ‘사회건강’, 생명존중을 새 사회발전 지표로 만들어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김동춘 - 성공회대 사회학부 교수 >



[1500자 칼럼] 패전 일본, 70년만에 다시 일어서나

● 칼럼 2015. 5. 9. 14:55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소련× 속지 마라. 미국× 믿지 마라. 일본× 일어난다. 조선× 조심하라.”
1960년대 초까지 어른들한테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던 말이다. 이건 2차대전 패전 후 철수하는 조선총독부가 심리전 차원에서 퍼뜨린 말이다. 일본인들에 대한 조선인들의 보복을 막기 위해서. 그런데 광복 70년이 되는 시점에 아베 일본을 보면서 70년 전 총독부가 퍼뜨리고 간 말이 씨가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작년 7월 초 일본은 헌법 9조(전쟁 포기)에 대한 ‘해석적 개헌’ 방식으로 일본의 해외출병을 합법화했다. 오는 4월 말 아베의 미국 방문 때 ‘미-일 방위협력지침’이 개정되면, 앞으로 일본은 동맹국 미국의 후방지원 명분하에 ‘집단적 자위권’ 행사 차원에서 어디에나 출병할 수 있게 된다. 패전 일본이 70년 동안 꿇었던 무릎을 펴고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난 4월 셋째 주말 워싱턴에서 미·일은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 시 한국의 주권을 존중한다”고 합의했다. 그러나 4월 말 개정될 미-일 방위협력지침에는 그걸 명문화하지는 않기로 했다고 한다. ‘한국의 주권 존중’을 미-일 간에 말로만 합의하고 문서화는 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일본군의 한반도 출병을 미-일 간에는 사전합의 해놓고 우리에게는 출병 직전에 ‘주권 존중’ 형식만 갖춰 통보(사실상 사후통보)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어찌하랴? 2012년 4월17일 찾아오게 돼 있던 전시작전통제권을 미국에 다시 맡겨놨으니 미국이 결정하면 일본군의 한반도 출병도 감내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을.
한편, 지난 22일 자카르타 ‘아시아·아프리카 정상회의’ 연설에서 아베는 “지난 전쟁에 대해 깊은 반성을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무라야마 담화(1995)나 고이즈미 담화(2005)에 쓰였던 ‘침략’ ‘식민지 지배’ ‘통절한 사죄’ 같은 표현은 쓰지 않았다. 미국 하원 의원 25명이 연명 서한을 보냈지만, 4월29일 아베의 미 상·하원 합동연설 논조 자체가 바뀔 가능성은 적다. 어희(말장난) 수준의 표현 변화는 약간 있을지 몰라도. 전범 후손으로서 아베의 정체성과 최근 우경화돼온 일본 대외정책의 방향성 때문에 8월로 예정된 ‘아베 담화’에서도 아베는 과거사에 대해 사과하지 않을 것 같다. 오히려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8월)을 계기로, 일본도 (원폭)피해국임을 부각시키면서, “이제 미래를 위해 손잡고 나가자”는 식으로 과거사를 매듭지어 버리려 할 것 같다.


그러면 일본이 해외출병을 합법화할 수 있게 된 국제정치적 배경, 과거사에 대해 후안무치하게 버티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일본의 이런 정책에 대해서 미국은 왜 슬그머니 일본 편을 들고 있는가?
나는 미국의 대중정책이 바뀌면서 우리나라에 불리한 외교환경이 조성되고 있다고 본다. 경제력과 군사력이 빠른 속도로 커지면서, 중국은 ‘중화부흥-중국몽’ 실현을 국가목표로 설정해놓고 미국에 ‘신형 대국관계’를 요구했다. 사실상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에 도전하는 셈이다. 이런 중국을 미국이 ‘아시아 회귀-아시아 재균형’ 정책으로 견제하려 하지만 힘이 부친다. 앞으로 10년간 국방비를 매년 500억달러씩 삭감해 나가야 할 정도니까. 이 때문에 미국은 자기 돈으로 군사력을 키워 중국을 견제해줄 동맹국이 필요해졌다. 이에 일본이 적임자로 뽑힌 것이다.
미국이 이이제이로 중국을 견제하는 셈인데, 아베는 이걸 일본이 정상국가로 되고 나아가 동아시아 패권국가로 부활하는 디딤돌로 삼으려 할 것이다. 중국에 ‘중화부흥-중국몽’이 있듯이, 일본도 2차대전 패전으로 좌절된 ‘대동아공영-일본몽’을 아직 꾸고 있을 수 있다. 이런 야망이 없다면 일본이 과거사에 대해 시인·사과를 악착같이 안 할 이유가 없다. 그런 점에서 우경화돼 가는 일본의 움직임 속에는 ‘일본몽’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우리의 광복 70년에 패전 일본은 다시 일어서고 우리 외교의 앞날은 점점 더 험난해져 가는 것 같다.
< 정세현 - 전 통일부 장관 >



[사설] 인종문제 심각성 재확인한 미 볼티모어 사태

● 칼럼 2015. 5. 9. 14:53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뉴욕, 퍼거슨, 볼티모어. 지난해 7월 이후 미국에서 흑인 소요의 진원지가 된 도시다. 양상도 비슷하다. 흑인 젊은이가 경찰에 의해 숨진 뒤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소요·폭동으로 비화하고 전국 주요 도시로 확산된다. 이런 일이 되풀이되는 것은 미국 사회의 구조적 취약성을 보여준다.


2주일가량 이어진 볼티모어 사태는 1일 주 검찰의 신속한 행동으로 전기를 맞았다. 관련 경찰관 6명이 살인 등 혐의로 기소된 것이다. 물론 불씨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법적·사회경제적 측면에서 흑인들의 불만이 그대로다. 앞서 뉴욕과 퍼거슨 사건과 관련된 경찰관들은 대배심의 지루한 공방 끝에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소요의 상처도 작지 않다. 가장 격렬했던 4월27일 시위는 폭동으로 돌변해 차량 140여대와 건물 15채가 불에 탔다. 이번 사태에서 약탈 등의 피해를 당한 한인 업소만 해도 100곳이 넘는다.
소요가 쉽게 전국으로 확산되는 것은 주요 도시 흑인들의 사정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볼티모어에서는 흑인과 백인 거주지가 엄격하게 분리돼 있다. 숨진 흑인 청년의 거주지인 샌드타운에서는 노동가능연령(15~64살)의 실업률이 51.8%나 된다. 미국에서는 볼티모어보다 인종간 거주지 분리 현상이 심각한 도시가 시카고, 애틀랜타 등 여러 곳 있다. 경찰의 업무 중 총격에 의한 사망 사건도 지난 10년 동안 수천건에 이르지만 기소된 경찰은 수십명에 그친다. 피해자의 절대다수는 흑인이다.


흑인인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집권 기간에 흑인 소요가 빈발하는 것은 역설적이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인종문제가 더 심각해졌을 수도 있고, 오바마 정부에 대한 흑인들의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었을 수도 있다. 흑인 소요를 대하는 오바마 대통령의 태도도 일관돼 있지 않다. 인종문제에는 미국의 정치·사회·경제적 모순이 집약돼 있다. 미국이 이 문제를 풀지 못한다면 다인종 국가로서 정체성과 통합 역량도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세계화가 진전될수록 다문화·다인종과 관련된 갈등이 많아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이런 문제에서 미국보다 훨씬 경험이 적다. 흑인 소요 사태가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이 적지 않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