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이완구, 총리직 물러나서 수사받아야

● 칼럼 2015. 4. 18. 19:25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2013년 국회의원 재선거 당시 이완구 국무총리에게 3000만원을 주었다고 숨지기 직전 언론 인터뷰에서 폭로한 사실이 추가로 밝혀졌다. 이 총리는 “돈을 한 푼도 받은 사실이 없다”고 부인하고 있지만, 이 총리에게 쏠리는 의혹은 점점 짙어지고 있다. 이 총리가 성 전 회장의 측근들에게 15차례나 전화를 걸어 성 전 회장이 숨지기 전 나눈 대화 내용을 집요하게 캐물었던 것도 3000만원 수수 주장의 신빙성을 더하는 정황증거로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현직 국무총리가 불법 정치자금 수수 피의자가 된 사상 초유의 사태는 결코 범상히 보아 넘길 수 없다. 이 총리는 “돈 받은 사실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나면 총리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말했으나, 현 단계에서도 총리직을 수행하기 어려운 처지가 되고 말았다. 사실, 검찰 수사 결과 돈 받은 사실이 드러나면 총리직을 그만두는 정도가 아니라 감옥에 가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따라서 이 총리는 그런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할 게 아니라 검찰 수사에 앞서 총리직에서 물러나든가, 아니면 최소한 무죄가 밝혀질 때까지는 총리직을 수행하지 않는 게 옳다.


우선 검찰 수사의 공정성이나 신뢰성을 위해서도 이 총리가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검찰이 현직 총리를 수사하는 데 느끼는 부담감이 얼마나 클지는 긴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게다가 총리는 마음만 먹으면 검찰 수사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자리다. 이런 상황에서 검찰 수사의 독립성이나 공정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설사 이 총리가 돈을 받은 사실이 없다고 하더라도 검찰 수사 결과를 온전히 믿을 국민은 아무도 없다. 모든 것을 떠나 현직 총리가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청사에 출석하는 참담한 모습은 나라의 큰 수치다.


게다가 이 총리는 내각을 통할할 권위와 체통을 잃어버렸다. ‘피의자 총리’의 지시가 공직사회에서 무슨 영이 서겠는가. 자신도 범죄 혐의 방어가 일차적 과제로 떠오른 상황에서 나랏일이 손에 잡힐 리 만무하다. 결국 이 총리가 그 자리에 머물고 있는 한 국정운영은 헛바퀴만 돌아가고 내각은 식물 상태로 빠져들게 돼 있다. 이 총리의 첫 대국민담화 주제는 부정부패 척결이었다. 하지만 그가 쏘아 올린 사정의 화살이 부메랑이 돼 돌아와 자신이 “사정 대상 1호”로 지목되면서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차라리 물러나 자신의 무죄 입증에나 힘을 쏟는 것이 본인을 위해서나 나라를 위해서나 좋은 일일 것이다.



[사설] 세월호 1주기를 모독하는 정부

● 칼럼 2015. 4. 18. 19:24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세월호 참사 1주기를 앞두고 정부의 세월호특별법 시행령안 폐기를 요구하는 유가족 등 시민들을 향해 경찰이 최루액을 뿌렸다. 11일 저녁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문화제를 연 유가족과 시민들이 청와대를 향해 행진하려 하자 차벽을 설치하고 캡사이신 최루액을 뿌려 진압한 것이다. 경찰이 세월호 관련 집회에 대응해 최루액을 사용한 것은 처음이다. 참사를 애도하고 책임을 통감해야 할 공권력이 되레 추모 행렬에 주먹질을 한 셈이다. 참사 1주기가 다가오면서 정부가 내놓는 ‘세월호 인양 검토’ 등 온갖 유화 발언보다 이런 행동 하나야말로 세월호를 대하는 정부의 솔직한 속내를 드러내 보여준다.


경찰은 ‘집회 참가자들이 여덟 차례 해산명령에 불응하고 경찰 방패를 뺏는 등 폭력을 행사했다’고 이유를 댔다. 정당한 요구를 표출하는 시민들을 가로막은 뒤 충돌이 벌어지면 폭력행위자로 매도하는 낡은 수법이다. 유가족과 시민들의 평화로운 행진을 경찰이 폭압적으로 차단하지 않았어도 그런 충돌이 벌어졌겠는가. 나아가 정부는 시민들이 왜 분노하는지부터 헤아려야 했다. 세월호특별법 시행령안은 누가 봐도 진상 규명을 방해하는 독소조항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런 시행령안을 고치라는 요구를 보름 넘게 묵살해온 정부가 급기야 그 요구를 최루액으로 틀어막고 있는 것이다.


정부의 어이없는 행보는 이뿐만이 아니다. 세월호 인양을 두고도 말이 뒤죽박죽이다. 모르쇠로 일관하던 박 대통령이 6일 “선체 인양을 적극 검토할 것”이라고 밝히더니, 9일에는 박인용 국민안전처 장관이 인양의 위험성과 실패 가능성, 추가 비용 등을 고려해 인양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신중론을 폈다. 대통령과 장관의 말이 전혀 다른 뉘앙스다. 게다가 하루 뒤인 10일에는 해양수산부가 ‘세월호 인양이 가능하다’는 기술 검토 결과를 예정보다 이틀이나 앞당겨 급작스레 발표했다. 마침 ‘성완종 리스트’가 보도된 날이었다. 이렇게 속 보이는 태도를 취하니 정부의 진정성을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정부는 세월호 참사 1주기인 16일 당일 추모제 대신 ‘국민안전다짐대회’를 연다. 참사와 관련된 내용도 담지 않은 고색창연한 관변행사나 열겠다는 발상이 한심하다 못해 놀랍기만 하다. 반면 유족과 시민들이 참여하는 16일 추모집회에는 다시 경찰 차벽을 설치하겠다고 경찰청장이 나서 당당히 밝히고 있다. 박 대통령은 그날 외국 순방을 떠난다.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뻔뻔한 정부다.



[칼럼] 박근혜의 하얀 손수건

● 칼럼 2015. 4. 18. 19:23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지난해 7.30 재보궐선거 때 ‘박근혜 대통령의 눈물을 닦아주세요’라는 말을 처음 꺼낸 건 당시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였다. 이 희한한 개그 캠페인은 선거전 내내 계속됐고, 선거판에 먹혔다. 새누리당은 압승했고, 박 대통령은 눈물을 말끔히 씻어버렸다.
당시 이 캠페인을 앞장서 실천한 것은 다름 아닌 새정치민주연합 지도부였다. 그들은 세월호 참사를 저희가 타고 갈 꽃가마쯤으로 여겼다. 나뭇가지라도 꽂으면 된다고 생각했는지, 온갖 공천 장난을 다 쳤다. 유권자는 안중에도 없었고, 지기로 작정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짓이었다. 그로 말미암아 ‘박근혜의 눈물’만 씻어주었고, 유가족들에겐 더 많은 피눈물을 요구했다.
야당으로부터 압승을 진상받은 뒤 이 정권은 일찍이 유례가 없었던 무능과 무책임에 교만까지 더했다. 그 추종자들은 심지어 시체장사라는 패륜의 욕지거리까지 입에 올리며 희생자와 유가족을 조롱했다. 그건 지금까지 계속된다. 국가예산에서 배정하는 건 쥐꼬리만큼에 불과한데, 총 배상금이 칠팔억이라느니, 누구는 십억이라느니… 유가족을 돈에 환장한 사람들로 몰아간다.


유가족들이 간절하게 요구해온 진상 규명에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10개월여 동안 진을 뺄 대로 뺀 다음 조사권만 갖는 진상규명특별위원회 구성에 동의했다. 그리고 근자엔 특별조사위원회를 정부가 통제하도록 하는 시행령(안)을 제시했다. 피의자가 수사권을 갖게 한 것이다.  선령을 30년 이상으로 늘리고, 증개축을 허가하고, 과적을 눈감아 주었던 게 바로 그들이었다.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을 때 구조요청도 제대로 접수하지 않았고, 뒤늦게 출동해 승객을 버린 승무원들만 구했고, 승객을 구조하려는 민간 어선들을 위험하다며 막았던 것도 그들이었다. 침몰한 뒤 희생자 수습도 온갖 핑계를 대며 늑장을 부렸다. 선체 인양을 처음 주장한 것도 다름 아닌 이 정부였다. 참사의 늪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 수습이 끝나가는 듯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이 정부는 인양 비용이 수천억, 많게는 5천억원이나 든다며 인양 불가론을 폈다.


그 꼴을 다 보고 들은 국민 앞에서, 박 대통령은 ‘선체 인양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했다. 조사위를 바지저고리로 만드는 시행령(안)에 대한 반발이 비등할 때였다. 그걸로 논란을 덮자는 뜻이었다. 대통령령 즉 대통령의 명령인 시행령에 대해 그가 일언반구도 안 한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행령(안)을 성안한 건 해수부라지만, 대통령의 이름으로 반포하고 집행하는 것이니, 그 내용은 대통령의 뜻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소관부처라고 함부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선체 인양은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에 필요한 하나의 조처일 뿐이다. 물론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안전사회에 대한 국민의 염원을 상징하는 장치가 될 수도 있겠지만, 조사 과정에서 세월호는 조사의 출발점일 뿐이다. 진상 규명에 선행하는 조처가 될 수 없다. 유가족들이 그렇게 선체 인양을 요구해온 것도 다름 아닌 진실 때문이었다. 선체는 진실 규명과 맞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게 이 정부는 지금까지 유가족과 뜻있는 국민을 속이려 했다.


혁명이 어려우니, 선거를 통해 집권자의 무능 무책임 실정 오판 교만을 심판하자는 게 민주주의고, 국민을 대신해 견제자이자 심판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게 야당이다. 그러나 지난해 이 나라 야당은 심판은커녕 정권의 방패막이 구실만 했다. 유권자로 하여금 도저히 저희를 선택하지 못하도록 분탕질과 자중지란을 벌여 ‘박근혜의 눈물’이나 닦아주고, 결과적으로 정권에 면죄부를 주는 밑씻개 노릇을 했다.
그 참담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한데, 야권에선 다시 그 판이 벌어지고 있다. 당 대표까지 한 사람들이 당에서 뛰쳐나가, 저희가 망가뜨린 새정치민주연합을 심판하자며 선거판에 뛰어들었다. 당내 소지역주의자들은 이 분란을 이용해 지분이나 챙기자고 등 뒤에서 총을 쏘아댔다. 차라리 조용히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을 일이지, 세월호 참사의 제상에 침이나 뱉고 있었던 것이다. 국민의 떼죽음을 방관했던 자들이 나라마저 침몰시키는 걸 소원하지 않고서야 할 수 있는 짓이 아니다.


청와대가 찌라시 공작소로 전락하고, 내시들이 국정을 쥐락펴락하고, 그들이 이편저편 나뉘어 권력 투쟁을 벌여도 정권이 무사한 건 그런 야권 정치인들 때문이다. 나라 살림을 수십조원씩이나 구멍 내고, 담뱃세 왕창 올리고 샐러리맨 월급봉투를 탈탈 털어내어 구멍을 메우려는 이 정부가 멀쩡한 것도 그런 야당의 존재 때문이다. 박종철씨 고문치사 및 축소 왜곡 사건을 정권의 각본대로 수사한 검사가 이 나라의 대법관 후보자가 되어 큰소리칠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세월호 참사 고통을 함께 나누는 이들이 간절히 원하는 건 하나다. 진실 규명으로 유가족 피눈물을 씻어주는 일이다. ‘박근혜 가짜 눈물’을 닦아주는 게 아니다.
< 곽병찬 - 한겨레신문 대기자 >



[한마당] 부활한 백합과 측은지심

● 칼럼 2015. 4. 11. 17:55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부활절을 앞두고 어느 목사님이 예쁜 백합 화분을 하나 선물해 주셨다. 고맙고 기쁜 마음으로 집에 들고 와 백합이 든 비닐봉지를 꺼내놓는데… 이런! 봉오리 하나가 고꾸라져 있지 않은가. 운반도중 봉지 속에서 아마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3개의 봉오리 가운데 하나는 활짝 피어 우아하고 예쁜 자태를 뽐내며 잘 버티고 있는데, 통통해서 곧 피게 될 봉오리 2개 중 하나가 꽃대의 상처로 고개가 푹 꺾여진 것이다. 이를 어쩌나, 이 봉오리는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시들어버리게 될까. 가여운지고… 안타까운 마음에 응급조치를 해보기로 했다. 꺾인 꽃줄기 부분에 반창고를 두르고, 옆 꽃대에 고무줄을 걸어 버틸 수 있게 바로 세웠다.
그런데, 이렇게 반가울 수가! 꽃봉오리가 생기를 띄는 것 같더니 부풀어 올라 꽃잎을 내밀기 시작한다. 마침내 부활절 아침, ‘부활절의 꽃’ 답게 웃음 가득 머금은 곱고 뽀얀 얼굴로 활짝 피어난 것이다. 아이구 하나님, 감사합니다! 백합에게도 부활을 주셨군요!
하찮은 식물도 상처를 싸매는 작은 손길 하나가 부활의 기쁨을 안기는구나~. 신기함과 뿌듯함에 부활절의 의미가 더욱 새로워진 것은 물론이다. 죄악과 온갖 상처에 찌든 사람들에게 생명의 부활을 깨우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대속(代贖)이란…도저히 비교할 수야 없는 일이지만.

우리는 듣지도 보지도 말도 못하는 헬렌 켈러를 사랑으로 돌본 앤 설리반 선생의 이야기를 안다. 하지만 설리반 자신도 엄청난 상처와 장애를 극복한 인간승리의 주인공임을 아는 이는 많지않다. 설리반은 엄마가 죽고 아빠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보호소에 보내져 동생마저 죽자 그는 충격에 자살을 시도하고 실명과 정신이상이 됐다. 치료도 포기상태에서 로라 라는 한 간호사가 그녀를 자원해 돌보기 시작했다. 철벽처럼 닫히고 굳어진 설리반의 마음이 변하고 열린 것은 2년이라는 긴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그렇게 로라의 사랑의 손길은 그녀를 신앙으로, 또한 학교 우등생으로 부활시켰다. 그리고 설리반이 눈 수술로 시력을 되찾아 읽은 한 신문에서 ‘보도 듣도 말도 못하는 아이를 돌볼 사람을 구한다’는 구절을 읽고 “내가 받은 사랑을 갚겠다”며 찾아가 48년간이나 헌신해서 길러낸 인물이 바로 헬렌 켈러였던 것이다.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린 ‘생명을 구하는 포옹’(The Rescuing Hug) 혹은 ’사랑의 터치’라는 사진과 실화가 있다. 95년 미국 매사추세츠의 메모리얼병원에서 12주나 빨리 태어난 쌍둥이 조산아 자매가 서로 다른 인큐베이터에서 자라게 됐다. 그런데 심장에 문제가 있던 한 아이의 상태가 갈수록 나빠져 생명이 희미해져 갔다. 마침 오랜 경력의 간호사가 엄마 뱃속처럼 한 인큐베이터에 넣어보자고 제안해 같이 있게 했을 때, 기적같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아직 눈도 뜨지 않은 상태인데, 건강한 아이가 손을 뻗어 병약한 아이를 감싸 안았고, 죽을 고비를 헤매던 아이는 놀랍게도 호흡과 맥박이 정상으로 돌아와 나날이 호전되어 갔다. 이후 무럭무럭 자란 아이들이 꿈에 부푼 소녀들로 자랐다는 사실을 조엘 오스틴이 ‘긍정의 힘’에 소개해 세상에 감동을 전했다.

크든 작든 따뜻한 사랑의 손길이 사람을 살린 사례는 드물지 않다. 그 사랑의 힘은 우리가 함께 어울려 살아가며 서로 돌보고 서로 부축해 주어야 함을 일깨운다. 상처와 고통으로 낙심하고 절망하는 이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 힘과 용기가 되어주는 일. 눈물 흘리는 이들을 위로하고 감싸주는 마음, 그런 측은지심(惻隱之心)과 긍휼의 발로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가르친 예수는 원수도 사랑하라고 말씀했다. 맹자는 측은지심을 남의 불행과 어려움, 고통을 보면 불쌍히 여겨 도우려는 사람의 본성이라면서, 그런 마음이 없다면 인간이라 할 수 없다고까지 단언했다.
우리는 아주 작고 하찮은 손길에도 위대한 결실을 맺는 사랑의 힘을 목도하며 감동하곤 한다. 그런데도 말처럼 쉽지 않은 게 또한 사랑과 긍휼의 손길 내밀기다. 이런저런 형편 때문에, 바빠서, 내 일이 아니니까, 내편이 아니어서…, 그렇게 메마르고 무정할 때가 너무나 많다. 부족한 이들을 비웃고, 모자라다고 업신 여기고 짓밟고, 아파하는 이들의 가슴을 후벼파지 않으면‥그마나 다행일 정도다. 그런 매정함에 둔해져 가는 현실이 더 무섭다. 갈수록 인간다움을 잃어가며 삭막한 기계인간의 세상으로 달려가는 것은 아닌지, 두려움에 스스로도 자문해본다. 너의 측은지심은 살아있는가. 주변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는가. 사랑의 손길을 내밀 줄 아는가? 나의 작은 ‘사랑의 터치’가 언제 나에게 닥쳐올 ‘생명을 살리는 손길’이 될지 알 수 없다는 것을 아는가.


< 김종천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