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디 셔먼 미국 국무부 정무차관이 지난달 27일 일본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이해하기 어려운 발언을 했다. 미국 정부의 납득할 만한 후속조처가 없다면 한-미 관계를 해칠 수 있는 내용이다.
“(동북아에서) 민족주의 감정이 여전히 이용될 수 있으며, 어느 정치지도자도 과거의 적을 비난함으로써 값싼 박수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런 도발은 진전이 아니라 마비를 초래한다”는 그의 말은 분명히 중국과 한국을 겨누고 있다. 과거사 해결에 소극적인 것도 모자라 문제 자체를 부인하는 아베 신조 일본 정부의 입장을 적극 두둔하는 발언이다. 미국 국무부 4인자로 동아시아 정책을 총괄하는 고위 관리의 언급으로 믿기지 않는다. 그가 일본의 사과와 반성을 촉구하는 의례적인 요구조차 하지 않은 것은 그의 의도를 잘 보여준다. ‘한·중·일 모두 똑같이 문제가 있으니 이제 과거사 문제를 제기하지 말아달라’는 주문인 것이다.


그가 왜 이런 발언을 했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패권국 위상이 떨어진 상황에서, 중국을 겨냥한 아시아 재균형 정책을 밀어붙이기 위해 일본과 적극적으로 손잡겠다는 것이다. 한국에 대해서는 미국·일본 쪽에 확실히 서라는 요구로 읽힌다. 4월 방미를 앞둔 아베 총리에게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협상을 빨리 마무리하라는 압박의 뜻이 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반역사적인데다 과거사 문제 해결을 더 어렵게 만들어 갈등을 심화시킬 뿐이다. 자국 전략적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의 처지가 어떻든 무슨 행동도 할 수 있다는 오만한 발상이기도 하다.


미국은 ‘한·중·일이 과거 교훈을 거울삼아 상처를 치유하고 미래지향적인 협력 관계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지속적으로 표명해왔다’고 우리 정부에 해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셔먼 차관의 발언 내용과 어긋난다. 이 정도 설명에 그친다면 많은 한국인은 미국이 일본 과거사 문제를 부인하고 과거 일제의 잘못을 옹호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다. 한국인들은 미국이 이제까지 ‘일본의 진정한 사과와 반성을 통해 과거사 문제를 풀고 미래로 나아가자’라는 입장인 것으로 믿어왔다.
북한 핵 등 동북아 현안에 대한 관련국의 협력은 당연히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현실적인 요구가 과거사 문제 자체를 대체할 수는 없다. 미국은 ‘치고 빠지기’식 발언으로 한-미 관계를 흔들지 말고 무엇이 옳은 모습인지를 다시 생각해보기 바란다.



대통령에서 감사원장까지 국가 의전서열 10위 안에 든 11명 가운데 8명이 영남권 출신이다. 검찰·경찰·국세청을 비롯한 이른바 5대 권력 기관장은 모두 영남이 싹쓸이했고, 공기업과 준정부기관, 여러 공공기관장도 역시 영남 일색이다. 박근혜 정부 편중인사의 심각성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새정치민주연합이 2일 발표한 현 정부 고위직 인사들의 출신 지역 실태조사 보고서에서 나타난 대한민국의 권력지도 모습은 참담하기만 하다.


윗자리가 특정 지역 출신 인사들로 채워지면 밑의 노른자위 자리들도 자연히 그쪽 동네 사람들의 차지가 되는 법이다. 지금 정부 각 부처와 주요 기관들의 핵심 요직에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거의 ‘영남향우회’ 수준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들이 끼리끼리 밀어주고 끌어주면서 축배를 들고 있는 한쪽 편에서는 소외된 지역 사람들의 울분과 원망이 차곡차곡 쌓여 간다. 이런 인사의 빛과 그늘 속에서 국가의 통합이며 화합 따위는 아득히 먼 나라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박근혜 정부의 편중인사 특징의 하나는 염치며 체면 따위를 과감히 벗어던졌다는 점이다. 과거 정부에서도 편중인사니 코드인사니 하는 논란이 있었으나, 그래도 형식적 균형이라도 유지하려 애썼다. 검찰총장이 호남이면 법무부 장관은 영남 하는 식으로 모양새라도 갖추려 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이제 그런 시늉도 하지 않는다. 예전에 흔히 쓰이던 지역안배라는 말이 사라진 지도 오래다.


심지어 박근혜 대통령은 새해 기자회견에서 편중인사에 대한 질문을 받고 “능력과 도덕성을 겸비한 인재를 찾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답변했다. 잘못된 인사에 대한 국민의 걱정을 조금이라도 귀담아듣겠다는 자세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그처럼 능력있는 사람들만 발탁하는데도 이 정부가 역대 최악의 무능한 정부라는 평을 듣는 이유는 무엇이며, 지금까지 임명한 장관 중 어느 누구 하나 도덕성 흠집이 없는 사람을 발견하기 힘든 이유는 또 무엇인지 궁금할 뿐이다.
‘동종교배 퇴화의 법칙’이 동물뿐 아니라 인간 사회에도 적용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같은 고향 사람들, 같은 사투리를 쓰는 사람들, 비슷한 학교와 배경을 지닌 사람들만 옹기종기 모인 조직이 걸어갈 길은 뻔하다. 더 나은 진화와 발전은커녕 퇴보만을 거듭할 뿐이다.
지금 이 정부가 총체적 난조에 빠져 있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민족감정은 여전히 악용될 수 있고, 정치지도자가 과거의 적을 비난함으로써 값싼 박수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런 도발은 진전이 아니라 마비를 초래한다.”
몇번 곱씹게 되는 웬디 셔먼 미 국무부 정무차관의 말이다.
‘값싼 박수’, ‘도발’과 같은 자극적인 용어는 누굴 향한 것인가? 과거를 부정하는 일본을 꾸짖는 중국과 한국의 정치지도자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시진핑 주석과 박근혜 대통령 말고 누구이겠는가? 졸지에 이 지도자들은 값싼 박수나 받는 도발자가 되고 말았다. 반면 일본의 아베 총리는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가려는 품격 높은 지도자가 되었다.
3.1절 아침에 비수처럼 꽂히는 이 말. 우리의 어깨를 내리치는 죽비 소리다. 작금의 국제정세를 냉철하게 바라보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국가의 생존과 번영의 길을 찾아내라는 소리다. 이 역사의 본질에 정신을 집중하라는 각성의 소리다.


지금 미국은 중국의 부상이 필연적으로 미국의 패권을 위협하게 되어 있고, 그 결과 언젠가 미-중 간에는 분쟁을 피할 수 없다고 본다. 미국은 20세기 초에 유럽에서의 세력균형의 변화를 방관하다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르고 냉전을 감수하는 값비싼 비용을 치러야 했다.
그러니 21세기에는 아시아에서 중국의 부상으로 인한 세력균형의 변화를 방치하지 않고 사전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재균형 전략’, ‘아시아로의 회귀’를 표방한다. 그런데 한국이 과거 역사에 매몰되어 한·미·일 삼각 안보동맹 참여를 주저하고 있으니 이걸 못마땅하게 여기고 나온 거친 협박이다.
어느 정도 한국의 태도 변화를 기다리던 미국은 결국 참지 못하고 한국의 과거사에 대한 인식이 값싼 민족주의 감성이라며 한-일 관계를 개선하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이제 과거 역사라는 중고차는 도매금으로 폐기처분하고 그 대신 값비싸고 안락한 신형차에 탑승하라는 이야기다.


지난해에 미국은 얼마나 급했으면 한·미·일 삼국의 국방차관이 모여 정보공유 약정을 체결하기로 한 계획을 무산시키고 펜타곤의 하급관리를 보내 약정서에 서명을 받아갔다. 조인식도 하지 못한 일종의 ‘택배기사 약정’이다. 그만큼 미국의 호흡이 거칠 뿐만 아니라 급하기까지 하다.
개발에 성공하지도 못했고 한국에 배치할 물량도 없는 사드 요격미사일 체계를 벌써부터 한국에 배치하려는 여론을 조성하는 것도 바로 그런 미국의 조급성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중국의 부상 속도가 너무 빨라 시간이 없다.
 이런 압박이 매일 한국 정부를 옥죄어오는 지금은 역사적 정의에 대한 우리의 진지한 성찰마저도 사치가 되어버렸다.
그래서일까? 3.1절의 태극기가 지금처럼 초라해 보인 적도 없다. 광화문 빌딩마다 내걸린 태극기는 귀퉁이가 풀렸는지 너덜너덜하고 정부청사의 태극기는 바람을 이기지 못해 죽 찢어졌다. 누런 황사바람에 부황이 든 것 같은 태극기 내걸고 정체 모를 애국심 타령을 하는 동안 국제정세는 청나라와 일본의 패권이 충돌하는 100년 전으로 회귀하고 있다.


항상 이렇게 외세에 강점당하고 주권을 유린당했던 한민족이 자기방어의 기제로 간직해왔던 민족주의는 쓰레기 취급을 받고 있다. 진영 논리를 초월하여 모든 국가와 선린의 우호관계를 도모하려는 중견국가 평화한국의 꿈도 짓밟히고 있다. 열광적으로 미국을 숭배하고 동맹을 외치던 저 보수정권도 미국으로부터 귀싸대기를 맞고 갈 길을 찾지 못해 거리를 헤매고 있다.
이 깡패들의 틈바구니에서 우리는 각성해야 한다. 자존감마저 잊어버리고 함부로 줄서는 순간 우리는 산과 들과 하늘까지도 빼앗긴다. 그것이 3.1절에 부르는 우리의 만세 소리이며 민족자존의 함성이다.
< 김종대 - 디펜스21 플러스 편집장 >



[한마당] 스마트폰과 인간의 퇴화

● 칼럼 2015. 3. 7. 18:04 Posted by SisaHan

얼마 전에 시내에서 저녁을 사 먹을 일이 있었다. 작은 식당에 들어가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청소년 남매와 어머니로 보이는 일가족이 들어왔다.
그들은 음식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각자 스마트폰을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고 말없이 무언가에 열중했다. 음식이 나오고 그것을 다 먹을 때까지 30여분 동안 그 가족은 아무런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조용히 음식값을 치르고 식당 문을 나설 때까지 그 가족에게서 들을 수 있었던 말은 음식을 주문하는 소리와 어머니가 작업 중에 외부의 누군가와 통화한 것뿐이었다.
그들은 ‘함께’ 저녁을 먹는 것이 아니라 같은 자리에 앉아 귀찮은 밥 문제를 각자 해결하고 있었던 셈이다.


스마트폰 보급률이 70%를 넘었다거나 이미 5천만대가 보급되어 있다고 하는 우리 현실에서 이런 풍경은 이제 더 이상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고 훨씬 충격적인 일들도 다반사다.
대학 1학년인 딸아이가 방학 동안 집에 와서 하는 일을 보면 이해가 될 듯하다. 녀석은 자정이 넘도록 친구들과 문자를 주고받다가 머리맡에 둔 전화기에 연결된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들으면서 잠자리에 드는 게 생활화되어 있다. 농촌의 겨울인지라 아침 식사가 늦음에도 녀석은 가족과 함께 밥 먹는 것을 귀찮게 여기는 것 같았다. 가족이라면 머리를 맞대고 밥을 함께 먹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기는 나로서는 꽤 당황스런 일이었다.
스마트폰이 생활화된 아이들에게는 함께 살아가는 가족도 식구가 아닌 것 같다. 삶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밥 먹는 일조차도 함께해야 할 일로 여기지 못하는 이들에게 연대나 공동체, 더 근본적으로는 타인과의 ‘관계’와 같은 낱말들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스마트폰이 일반화되면서 사람들은 참고 기다리거나 궁금해하는 것을 잘 견디지 못하는 것 같다. 궁금한 것들은 무엇이든 자판기처럼 즉석에서 답을 얻을 수 있다. 누군가에게 전한 소식에 응답을 기다리는 일이나 낯선 곳을 찾는 것도 그렇고 모르는 지식을 알고자 할 때도 마찬가지다.
불과 한 세대 전에 그랬듯 친구에게 편지를 띄우고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 그의 삶을 궁금해하며 그를 그리워하는 것은 마냥 헛된 일일까. 목적지를 찾지 못해 주민에게 길을 묻고 그의 친절한 안내에 고마워하는 일은 없어져야 할 불편일까.
고성능 카메라를 겸하고 있는 스마트폰은 사람들로 하여금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한다. 맛있게 차려진 음식을 보면 그 맛을 음미하기보다는 사진 찍기에 바쁘고, 아름다운 경관 앞에서나 문서화된 지식 앞에서도 그렇다. 누군가에게 전하기 위해, 나중에 다시 꺼내보기 위해 눈앞의 것들에 몰입한 뒤 놓아주는 대신 자신만의 창고에 쌓아두느라 바쁘다.


나는 최소한 중학교까지는 컴퓨터나 스마트폰이 아이들의 생활은 물론 학습에서도 쓰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정신과 육체는 별개로 나눌 수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아이들은 몸과 마음이 조화롭게 자라야 한다. 글씨는 손으로 써야 하고 몸을 부딪치며 뛰놀아야 하고 도구를 손에 쥐고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이 길게 보면 아이의 지적 성장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학교의 교육과정은 절반 이상이 예체능을 포함해서 몸을 쓸 수 있는 활동으로 채워져야 마땅하다.
 나는 어려서 중학교를 다닐 때까지 연필을 참 많이 깎았다. 연필 깎는 일은 단순해 보이지만 칼과 연필을 쥔 양손이 유기적인 협조를 이루어야 멋지게 해낼 수 있다. 샤프 연필이 나오면서 연필을 깎아야 하는 수고는 사라지게 됐지만 오랫동안 연필을 깎았던 손놀림은 어린 시절에 균형과 조화에 대한 감각을 기르는 데 꽤 도움이 되었으리라 믿는다.
< 김계수 언론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