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코골이

● 칼럼 2015. 2. 15. 14:51 Posted by SisaHan

한때 남편과 아들은 지독하게 코를 골았다. 특히 아들이 하키와 야구 경기를 한 날이면 그의 방에서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컨비니언스를 운영하던 남편 역시 밤마다 아들 못지 않은 실력이었다. 언젠가는 딸과 작당하여 코를 드르렁대며 골아 떨어진 남편의 코고는 소리를 녹음까지 했었다. 자신이 코를 곤다는 사실을 인정도 안 할뿐더러 그 소리가 얼마나 요란한지, 남의 잠을 얼마나 방해하는지, 증명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불분명하고 요상한 소리가 자신의 코고는 소리라는 것을 잡아떼기는 마찬가지라, 허사였다. 젊은 시절의 나는 가끔 그것을 빌미 삼아 <Good Housekeeping> 잡지에서 읽은 기사로 은근 슬쩍 협박까지 했었다. 옆에서 밤잠을 잘 수 없게 코를 골아 배우자의 정상생활을 방해할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줄 경우 이혼성립의 조건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가 시끄럽게 코를 골지라도 내 단잠을 손해 본 적은 없었지만 알아두면 득이 되는 이 비장의 카드를 놓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 나도 며느리와 사위를 얻었다. 재작년 봄 오랫동안 꿈꿔오던 이태리 여행을 나와 딸과 며느리, 세 여자가 함께 떠났다. 어찌된 일인지 매일 아침마다 그들의 베개가 내 것과 반대 방향에 놓여 있는 게 아닌가.


“왜 그쪽에 베개를 놓고 자니?”
“엄마가 너무 코를 골아서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요”
“내가 코를 곤다고? 그럴 리가...”
옆에서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코를 골고도 정작 당사자는 오리발을 내미니 어이없는 표정이 역력했다. 잠든 사람이 어찌 자신의 코고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단잠을 설친 딸의 불평으로만 여기고 싶었으나 며느리 앞이라 시어미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창피하여 무안해진 나는 여행 내내 복용해온 감기약 때문인 것 같다고 끝내 궁색한 변명까지 늘어놓고 말았다. 그런데 문득 섬광처럼 스치는 일이 있었다.
어느 날 새 소리에 잠을 깬 이른 새벽, 나 홀로 침대에 있었다. 분명히 남편과 함께였는데 언제 그가 나갔는지조차 기억에 없으니 아마도 곤히 잠들었나 보다. 옆방에서 인터넷 기사를 읽고 있는 남편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왜, 이 시간에 그 방에 있어요?”
“당신 코고는 소리가 얼마나 큰지 옆에서 잘 수가 있어야지”
“내가 코를 곤다구요? 코골이는 당신이잖아?” 그때는 생사람 잡는다고 화까지 냈었는데 이제 딸 애기를 듣고 돌아보니 내 코고는 솜씨도 만만치 않은 모양이다.
친우 여럿이서 화사한 하룻밤 봄 나들이를 간 적이 있다. 오랜만에 가게와 집을 떠난 자유부인들은 마치 들판에 풀어놓은 망아지들 같았다. 무한히 펼쳐진 아름다운 경치보다도 자주 목말라하던 정다운 친구들과 만난 유쾌한 시간에 먼저 취했다. 어둠이 깔리기도 전부터 타고난 유머 여왕의 방으로 모여 들었다. 밤이 깊도록 대화는 대화를 낳으며 주제를 바꾸고 웃음보를 터트리며 푼수를 떨었는데 차츰 눈이 아스라해가고 목소리도 잠겨 들어가고 있었다. 드디어 한 쪽에서 코고는 소리가 얌전하게 새어 나오다 점점 더 거세지기까지 하였다. 무엇보다도 코까지 살짝 골다 언제 졸았냐는 듯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고 또 다시 코골기를 계속했으니 재주치곤 비상하였다. 그 모습은 폭소로 이어지곤 했는데 결국은 아침부터 설쳐댄 피곤이 몰려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잠에 빠져 들고 말았다. 새벽녘에 일어나 서로 누가 코를 골았는지 확인하니 그 밤에 코를 골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상대방 코고는 소리만 들었지 자기 자신이 코를 골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런 아이러니가 또 있겠는가.


이렇듯 자기 자신을 모르고 착각하며 사는 일은 다반사이다. 마치 내가 전혀 코를 골지 않는 사람으로 알고 남편만 성가시게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착각은 분명 자유다. 잘 다스리면 득이 되기도 하고, 넘치면 해가 되기도 한다. 남들이 해주는 억지 칭찬도 진실로 받아들이면 자기 능력 이상의 일을 해낸다.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한 노력이 오히려 자신감을 불러일으키며 큰 결실을 맺게 된 그 모습이 감동을 줄 때도 많다. 가끔은 그런 모습이 푼수로 보일 때도 있지만 절대로 밉지는 않다. 모두 제 잘난 맛에 사니까 귀여운 착각으로 여겨질 뿐이다.
어느 새 비상(飛翔)을 꿈꿨던 나의 젊은 날은 지나갔다. 내 마음을 흔들어대던 남편의 코고는 소리도 예측불허 한 삶과 맞물리며 정다운 생명의 노래로 들려오기 시작했다면, 이것도 귀여운 착각일까?


< 원옥재 - 수필가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원, 전 회장 >



[한마당] 리더와 추종자들

● 칼럼 2015. 2. 15. 14:48 Posted by SisaHan

“털어서 먼지 안나오는 사람 있나?“
세상에 흠없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자조섞인, 그리고 합리화하고 동정적인 말의 하나다. 간음한 여인을 쳐죽이자고 기세등등한 군중에게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예수의 말씀에 어느 누구하나 감히 돌을 던지지 못했다. 남의 눈의 티끌만을 보다가 자기 눈에 씌인 대들보를 보지못했던 사실을 그제서야 깨닫고 죄인 아닌 자가 없음을 자인한 것이다.
모두가 죄인이라는 기독교적 인간관이 아니어도, 완벽할 수 없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실수나 허물을 만들지 않는다면 이상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크고 작음의 질적 수준에 있다는 사실이다. 차를 몰고 가다 접촉사고를 낼 수는 있지만, 파란 불에 횡단보도를 건너는 행인을 치었다면 법적제재의 기준이 달라진다. 그렇게 사람을 친 후 더구나 뺑소니를 쳤다면 또 처벌은 무거워진다. 거기에 달아난 사람이 교수나 목사나, 시장 군수 혹은 장관이었다면, 문제는 더 심각하게 변한다.
인사청문회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비리가 ‘양파껍질’ 혹은 ‘고구마 줄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벗기고 들출 때마다 끝이 없이 드러나는 것을 보는 사람들 심경이 복잡하다. “도대체 일국의 지도자라는 작자들 수준이 하나같이 그 정도인가” “병역과 부동산투기, 논문표절, 세금탈루는 필수 4대 세트” 등 힐난하는 소리가 비등하다. 그런가하면 “신상털기가 지나치다, 털어서 먼지 안나오는 사람 있나”고 동정적이며 감싸려는 여당측 엄호사격에 동조하는 이들도 많다.


한국에 인사청문 제도가 도입된 것은 2000년 6월, 16대 국회에서 ‘인사청문회법’을 제정하면서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당시 이한동 국무총리 후보자가 처음으로 청문을 거쳤다. 그 뒤 노무현 대통령 당선 직후인 2003년 1월 국가정보원장, 검찰총장, 국세청장, 경찰청장 등 이른바 4대 권력기관장도 국회의 청문회를 거치도록 법이 바뀌었고, 2005년 7월에 다시 법이 개정되어 모든 국무위원 내정자가 인사청문 대상이 됐다. 당시의 청문회 대상 확대는 이헌재 경제부총리가 부동산투기 논란으로 낙마하자 한나라당 대표이던 박근혜 현 대통령이 모든 국무위원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해 이뤄졌다.
그런데 그 당시의 낙마자들은 지금에 비하면 ‘좀도둑 수준’이라고나 해야 했다. MB(이명박) 정부 들어서면서부터 소위 ‘비리세트’가 등장하여 장관 후보자들이 ‘세트’를 갖추지 못한 사례는 그야말로 가뭄에 콩 나듯 드물게 되고 말았다. 최근 도마에 오른 이완구 총리후보자에 이르기까지. 오죽하면 현 정부 초대총리 내정자가 맥없이 사퇴해 버리자 ‘청문대상 확대’를 외쳤던 박 대통령이 “그런 식 신상털기 청문회 하면 누가 나서겠나”며 청문회 축소를 주장하고 나왔겠는가. 총리를 물색해도 ‘공개망신 당할 일 있느냐’며 서로 안하겠다고 사양한다는 이야기까지 나돌 정도다.


‘털기’식 청문회나 대상자들의 비리수준도 문제지만, 근래들어 깨끗하고 존경받을 만한 장관감이 거의 없다보니 아예 당사자나 국민들의 비리불감증이 보편화 된 게 진짜 심각한 문제가 되어 버렸다. 어지간한 먼지는 먼지로 보이지도 않아서, 나라 안이 온통 미세먼지로 가득차도 무덤덤해져 ‘뭐 나라고 어때?’하는 온 국민의 도덕수준 저하증세가 갈수록 심해지는 중인 것 같다.
누가 뭐래도 그 가장 큰 공로자는 MB 정권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분방’한 건설족 출신이어선지 그가 대통령이 되면서 고위공직자들 도덕수준이 형편없이 추락했다. 수많은 낙마자를 내는 바람에 어지간한 비리는 문제 삼기조차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다. 그 저급한 전통이 지금까지 맹위를 떨치고 있으니 참, 나라 꼴이 우스워졌다. ‘ㄱ에서 ㅎ까지’ 비리열전이 펼쳐진 이완구 후보자가 버티고 있는 것을 보며 ‘서구나라 같으면 국회의원도 사퇴해야 할 수준’이라는 여당 비대위원을 지낸 이상돈 교수의 지적에 쓴웃음이 나오는 까닭이다.


성인군자를 찾는 것은 아니지만, 무릇 국민 앞에 서겠다는 지도자라면 최소한의 도의적·윤리적 몸가짐은 필요한 법이다. 그런 지도자들 주변에는 또 그런 추종자들이 따르게 마련이다. ‘근묵자흑(近墨者黑)’에 ‘새들도 같은 깃털끼리’라는 말마따나 비리에 무딘 사람이 대통령이다 보니 참모나 인재풀 등 주변인물도 그런 부류가 모여든 것이다. 순진한 국민들 양심과 도덕수준까지 오염시킬 정도로 나라를 멍들게 한 죄과를 누가 책임질 것인가.
멀리 갈 것도 없다. 요사이 토론토에서는 차기 한인회장 선거를 앞두고 공식 선거일정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과열양상이 나타나 동포들을 상심시키고 있다. 어느 후보 진영의 운동원격인 사람은 지역감정을 조장하고 언론사의 편향을 요구하는 상식이하의 행동으로 지탄을 받아 캠프내에서도 골머리를 앓고있다 한다. 본격 선거전에 앞서 진용을 재정비한다니 두고 볼 일이다. 주변 사람들은 후보자, 곧 리더의 성향과 수준으로 인식될 수 밖에 없고, 뜻있는 동포들은 한인회와 한인사회의 명예에 걸맞는 최소한의 자질을 지켜 볼 것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MB의 교훈’을 되새겨 볼 일이다.


< 김종천 편집인 >



새정치민주연합의 새 대표에 8일 문재인 의원이 선출됐다. 새정치연합 당원과 지지자들이 문 의원을 새 대표로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지난 대선에서 1400만표를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정권교체의 희망을 보여달라는 뜻일 것이다. 문 대표는 앞으로 130석의 제1야당을 이끌며 박근혜 정권을 견제하고 내년 4월 총선에서 지지자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할 책임이 있다.


우선, 새 대표 선출을 계기로 새정치연합은 집권 비전을 국민에게 보여주는 믿음직한 야당이 되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이 20%대로 떨어졌는데도 이번 전당대회가 국민의 기대와 관심을 끄는 데 실패한 이유를 뼈저리게 되새길 필요가 있다. 야당이 대안세력으로서 분명한 자리매김을 했다면 지금과 같은 정치상황에서 이렇게 전당대회를 치르진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현재 처한 정확한 현실이고, ‘정치인 문재인’이 야당 대표로서 첫발을 내디뎌야 할 출발점이다. ‘야당이 정권을 잡으면 더 나은 정치를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국민에게 줘야 하며, 이런 경쟁을 여야가 벌여나갈 때 야당도 살고 우리 정치도 정상화될 것이다. 현 정권의 실수에 기대 어부지리를 얻으려는 생각을 버리고, 스스로 국민의 마음을 얻고 믿음을 되찾아야 한다.


문재인 새 대표는 도를 넘은 박근혜 정권의 일방통행식 국정운영을 제대로 비판하고 견제해야 한다. 누가 뭐라 해도 야당의 기본 사명은 정권의 독주를 견제하는 일이다. 여당이 청와대 거수기 노릇을 하는 우리 정치현실에서, 야당마저 대통령과 행정부를 견제하지 못하면 국정 난맥을 막을 도리가 없다.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다. 국정운영 방식을 바꾸고 인사 쇄신을 하라고 그토록 얘기해도 듣지 않는 대통령을 제대로 이끌 책임은 제1야당 대표에게도 있다. 무조건 비판과 반대만 하라는 게 아니다. 필요하면 대통령을 만나서 담판을 짓든 또는 치열한 투쟁을 하든, 야당이 정치를 이끌어가는 한 축이 돼야 한다. 대통령은 저 높은 데서 ‘국정’을 논하고 야당은 여당과만 경쟁하는 식이 돼선 야당이 대안 정치세력으로 설 수가 없다.


이번 전당대회는 네거티브 공방으로 국민에게 실망을 안겨준 게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 ‘친노-비노’ 를 둘러싼 뿌리깊은 갈등과 불신이 확인됐다. 문 대표는 높은 국민 지지에도 불구하고 당원·대의원 투표에서 고전한 사실을 아프게 받아들여야 한다. 계파를 뛰어넘는 포용력과 헌신성을 먼저 보여줘야 당내 통합을 이룰 수 있다. 박지원·이인영 후보 역시 분열이 아닌 화합의 출발점이 될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한다. 그래야 여러 갈래로 나뉜 범야권의 맏형으로서 새정치연합이 제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제1야당에 거는 국민의 기대가 매우 무겁다는 걸 문 대표를 비롯한 새 지도부 모두가 마음에 새기길 바란다.



2012년 대통령선거 당시 국정원 조직을 동원해 후보들을 지지·비방하는 댓글·트위터 활동을 벌인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항소심 재판에서 공직선거법과 국정원법 위반 혐의에 대해 유죄를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국정원 정치개입 사건에 대한 항소심 판결은 박근혜 대통령의 정통성에 큰 흠이 있음을 사법적으로 확인한 것이다. 18대 대선이 심각한 불공정 선거로 치러졌고, 박 대통령이 불법선거의 최대 수혜자였음도 분명해졌다. 그런데도 청와대는 철저히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10일 기자들의 잇따른 질문에 “대변인에게도 아무 말을 안 할 자유와 권리를 주면 좋겠다”며 언급을 피했다.


청와대의 당혹감과 충격이 얼마나 큰지를 미뤄 짐작할 수 있다. 가뜩이나 대통령의 지지도가 곤두박질치는 상황에서 정통성마저 도마 위에 올랐으니 정신이 아득할 것이다. 그렇지만 무작정 외면하고 침묵한다고 해서 지금의 상황이 해결될 수는 없다. 청와대가 ‘아무 말을 안 할 자유와 권리’가 있다고 여기는 것부터가 큰 착각이다. 정치인, 그것도 한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라면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 “민주당의 모략”이니 “국정원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다”느니 하는 발언들에 대해 우선 사과부터 하는 것이 도리다.


박 대통령의 잘못은 단지 말뿐이 아니다. 이 정권은 그동안 국정원이 저지른 국기문란 행위의 실상을 호도하고 진상규명을 막는 데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국정원장의 선거법 위반 혐의가 무죄임을 확신한다”는 말을 한 사람들이 아직도 권력 곳곳에 포진해 있다. 황교안 법무부 장관을 비롯해 진상규명을 방해한 사람들의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한 후속조처다. 국정원 정치개입 사건에 대한 추가 수사 역시 피할 수 없는 과제다. 원세훈 전 원장에게 누가 그런 지시를 내렸는지를 밝히기 위해 필요하면 이명박 전 대통령도 수사 대상에 올려야 한다.


사실 이 사건이 불거졌을 때 박 대통령이 걸어가야 할 길은 정해져 있었다. 선출 과정의 흠을 인정하고 더욱 겸허한 자세로 국민에게 다가갔어야 했다. 민주주의를 훼손하면서 탄생한 대통령이니 민주주의를 더 소중히 가꾸는 데 혼신의 힘을 쏟아야 했다. 만약 박 대통령이 그랬다면 ‘정통성의 흠이 있기에 오히려 더 훌륭한 대통령이 됐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180도 반대의 길만 걸었다. 그리고 이런 참담한 상황을 맞닥뜨린 것이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아직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다는 미몽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점점 더 깊은 늪에 빠져들 뿐이다. ‘부정선거가 아니었으면 당선되지도 못했을 최악의 대통령’이라는 역사의 냉엄한 평가가 정녕 두렵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