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 청산을 위한 위원회에서 활동할 때 다뤘던 사건을 나중에 수임한 혐의로 변호사들이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상당수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소속이다. 검찰은 몇몇 변호사에게 소환을 통보했고, 금융계좌도 추적중이라고 한다.


변호사법은 공무원·조정위원·중재인으로서 직무상 취급했던 사건의 수임을 금지하고, 이를 어기면 1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원 이하의 벌금으로 처벌하도록 하고 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나 과거사정리위원회 등 국가위원회에서 상임위원, 조사위원 등으로 활동했다면 공무원에 준하는 신분이라고 볼 수 있다. 위원회의 결정에 참여하는 등 직무상 취급했던 사건과 관련해 손해배상 청구소송 등의 대리인으로 나섰다면 변호사법 위반 혐의를 피하기 어렵다. 이를 통해 정해진 액수 이상의 거액 수임료를 받았다면 도덕적 비난도 당연하다. 해당 변호사들이 ‘법에 저촉될 수 있다’는 생각 없이 사건을 맡았다고 하더라도 그 경솔함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상당수 변호사가 법을 어겨가며 쉽게 돈을 번다는 외부의 불신도 이로써 더 깊어질 것이다.


그러나 검찰의 수사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검찰은 과거사 사건에서 과다 지급됐던 손해배상액을 되돌려받기 위해 과거사 피해자들의 금융계좌를 가압류하는 과정에서 위법 정황을 포착해 지난해 9월 수사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공교롭게도 지난해 9월 검찰은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국정원의 증거조작 사실을 드러내 무죄를 이끌어낸 주역은 각종 공안사건에서 검찰과 사사건건 맞섰던 민변 변호사들이었다. 검찰은 11월 이들을 포함한 민변 변호사 7명에 대한 징계를 대한변협에 요청했다. 이번 수사 역시 징계 요구와 마찬가지로 패소한 검찰이 법정 밖에서 어떻게든 티끌을 찾아내 보복의 칼을 뽑은 게 아니냐는 의심이 나올 수밖에 없는 정황이다.


과거사 사건에 대한 국가의 잘못과 책임은 과거사위 등의 활동으로 분명히 드러났지만, 국가는 마땅히 해야 할 사과와 일괄 배상을 미루기만 했다. 기다림에 지친 상당수 피해자들은 사정을 잘 아는 변호사에게 도움을 요청해 소송을 시작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의뢰인인 피해자들이 변호사들을 옹호하고 나선 것도 그런 사정 때문이겠다. 과거사 사건에는 변호사법 수임 제한 규정을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이런 마당에 검찰이 피의사실을 흘려 민변을 겨냥한 여론몰이에 열중하는 건 개운치 않다.



[칼럼] 개천에서 용이 나와야 한다

● 칼럼 2015. 1. 23. 20:47 Posted by SisaHan

나라가 걱정이다. 바야흐로 재벌 3세 시대가 열리고 있다. 그런데 이들에게 창업주나 2세들의 기업가정신을 도무지 찾아보기 어렵다. 계열사에서 몰아주는 운송업을 맡는가 하면, 심지어는 수제맥줏집, 사내 커피숍을 경영하는 이들까지 나타나고 있다.
게다가 이상한 통계들이 자꾸 눈에 띈다. 2013년 신규 임용 법관 중 51.4%가 수도권 출신이고, 현직 법관의 출신 고교 1~3위를 서울의 외고들이 차지했다.
한편 로스쿨의 등장과 함께 판검사나 변호사가 되려면 3년 동안 연간 2000만원에 달하는 등록금을 내줄 부모가 있어야 한다. 최근 들어 사법부가 노동, 언론, 재벌 총수의 비리와 관련된 사건에서 보수적인 판결을 내리고 있는데, 법조계가 부유한 집 자녀들로 채워지면 사법부의 보수성이 더 심화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지 않을까?


돌아보면 우리는 지난 50년 동안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연이어 이루어냈다. 그리고 그 원동력은 ‘개천에서 용 나는’ 것을 가능케 한 높은 사회적 이동성이다.
대한민국 건국 후 실시된 농지개혁으로 다수 농민들이 소작농의 신세에서 벗어났다. 한국전쟁은 왕족과 양반, 지주계층의 몰락을 촉진했다. 그리하여 교육을 통한 계층 상승의 기회가 대다수 대한민국 국민들의 자녀에게 주어졌다.
1960~70년대 부모님과 누이의 희생으로 고등학교와 대학에 진학한 중·소농과 도시 서민의 자녀들이 기업과 정부 관료로 진출하여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 이들에겐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 혹은 가난에 허덕이는 나라를 일으켜야 한다는 절실함과 도전정신, 패기가 있었다.
그렇게 축적된 힘으로 1980년대에는 대학생이 된 농민과 도시 서민·중산층의 자녀들이 지식인들과 연대하여 민주화를 쟁취해냈다. 이들에겐 독재정권을 몰아내고 모두가 나라의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뜨거운 염원이 있었다.


그런데 최근 20년 사이에 부모의 부와 지위가 자녀에게 세습되고 있다. 계층 이동은 멈추었고, 새로운 도전과 성장의 가능성은 벽에 부닥쳤다. 우리 사회의 역동성이 죽어가면서 이제는 개천에서 용이 나오기 어렵게 되었다. 여기에 좌우 이념 대립과 세대간 갈등이 더해져 우리 사회의 통합은 더 멀어져 갔다. 아마 이대로 10년쯤 간다면 대한민국의 위상은 아르헨티나처럼 추락할 수도 있다.
우리 사회의 통합과 역동성을 되살리려면 개천에서 용이 나오도록 도와야 한다. 우선, 사회가 빈곤층 자녀의 보육과 교육을 책임져야 한다. 지금의 열악한 ‘개천’에서는 부모가 생계에 쫓겨 어린아이들을 제대로 돌볼 수 없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가족이나 마을이 담당하던 역할을 이제는 지방자치단체와 지역사회가 감당해야 한다. 현재 몇몇 지자체와 교육청이 협력하여 마을교육공동체나 교육혁신지구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데, 이는 미래의 용들을 길러내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면 취학 이전의 유아 시절에 격차를 줄여주는 것이 효과가 크다. 나아가, 대학입시 제도의 보완이 필요하다.
지금도 저소득층 자녀를 선발하는 기회균등 전형이 있지만 그 규모가 너무 작다. 대학 당국은 공정성·객관성에 얽매일 게 아니라 성적은 다소 낮지만 역경과 좌절을 딛고 일어서는 미래의 용들을 더 적극적으로 발굴해야 한다. 대학이 미래의 인재를 키워야지, 사교육업체와 학부모의 욕심에 힘을 실어줄 수는 없지 않은가?


끝으로 ‘과거의 용’들이 미래의 용들에게 부족한 사회적·문화적 자본을 지원하고, 그들이 새로운 도전에 나설 수 있게 돕는 에인절펀드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 정광필 - 교육활동가, 전 이우학교 교장 >



[한마당] 총과 펜보다 강한 것

● 칼럼 2015. 1. 23. 20:30 Posted by SisaHan

기독교인들이 한번은 가보길 소망하는 이스라엘 예루살렘은 성지의 평화보다는 38선 못지않은 긴장감이 넘친다. 2천년 전 로마에 나라를 잃고 떠난 유대인들이 1948년 돌아와 이스라엘을 세우면서 이 땅은 성스럽기보다는 성난 땅이 됐다. 1500여년간 이곳에 살던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에 의해 궁지에 몰린 끝에 분리장벽에 갇힌 신세로 전락했다.
9년 전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 3대 종교 성지가 집중돼 있는 동예루살렘을 순례했다. 팔레스타인인 집단거주지인 아랍구역에서 팔레스타인 소년의 손에 뭔가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쇠못이었다. 소년은 우리 일행을 향해 그 못을 찌르는 시늉을 했다. 이스라엘 무장 군인이 본다면? 외신을 통해 팔레스타인 아이들에게 조준사격하는 이스라엘군을 봤기에 나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중무장한 이스라엘 군인들은 지나가고 없었다.


예수가 십자가형을 선고받고 숨져 묻힌 곳까지 14개의 지점을 순례하는 ‘비아 돌로로사’(슬픔의 길)는 상인들과 순례객들로 발 디딜 틈 없는 시장통이다. 그 북새통에서 일행을 놓치고 서둘러 인파 속을 헤치고 나갈 때였다. 한 팔레스타인 청년이 내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그 순간 테러의 공포가 엄습했다. 실제 그 직후 한 한국인 특파원이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에 인질로 잡혔다. 우여곡절 끝에 골고다언덕에서 일행들과 재회하자 마치 사지에서 벗어난 기분이었다.
나처럼 직접적인 위협을 경험하지 않는 이들도 이제 무슬림들에 대한 경계심을 당연시한다. 프랑스의 <샤를리 에브도> 테러로 전세계 매스컴에 의해 ‘무슬림=테러’란 이미지는 더 선명해지고 있다. ‘무슬림공포증’으로 ‘무슬림들이 왜 그러는지’에 대한 질문은 사라진다. 나 또한 무슬림 청년에 의한 주먹질에만 압도될 당시엔, 이슬라엘과 한 몸인 양 행동하는 미국의 우산 아래서 남의 땅을 제 안방인 양 휘젓고 다니며 자존심에 상처를 낸 한국인의 자화상을 볼 수 없었다.


서방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인 가운데서도 역지사지하는 인물이 있다. 세계적인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이다. 그는 이스라엘이 노벨상에 버금가는 상으로 제정한 울프상을 2004년 수상하면서 “남(팔레스타인)의 땅을 점령하고 그들을 지배하는 것이 (이스라엘) 독립 정신이냐?”고 물었다.
바렌보임을 깨운 것은 예루살렘 출신의 팔레스타인인 에드워드 사이드 하버드대 교수였다. <오리엔탈리즘>의 저자로 유명한 사이드는 “동양(오리엔탈)의 이미지란 동양을 약탈 대상으로 여기며 인종차별 의식을 지닌 서구인들의 편견과 왜곡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렇다. 샤를리는 전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당했지만, 무슬림들은 아무도 모르게 지속적으로 당해왔다. 그러면서도 피해자들이 아니라 공격자와 테러범이란 이미지가 더욱 부각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잔혹한 무슬림 근본주의자들의 보복 테러와 살상에 동의할 수는 없다. 어떤 테러도 반대하고 혐오한다.

하지만 그 테러를 계기로 무슬림 근본주의자들을 격리시킨다면서 결국은 대다수 무슬림들을 더 높은 분리장벽 안에 가두려는 서구의 집단의식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왕따의 분리장벽은 근본주의자들과 다수 무슬림들을 하나로 단결시켜줄 뿐이다.
2001년엔 샤를리 테러보다 더한 무슬림 극단주의자들의 9.11테러가 있었다. 당시 미국인들이 무슬림들을 다 때려죽일 듯 증오감에 치를 떨 때 전혀 다른 행동을 취한 이들이 있었다. 기독교 종파 미국퀘이커봉사위원회였다. 그들은 무슬림들을 초청해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물었다.


이제 샤를리도 무슬림들도 더 이상 죽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표현의 자유란 이름으로 불난 집에 기름을 붓기 전에 먼저 이렇게 물어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그리고 우리가 핍박하거나 그에 동조함으로써 상처 입은 이들에게 용서를 청해야 한다. 강자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약자들의 예언자를 조롱하는 것만이 아니다. 관용과 포용으로 평화를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강자만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다.
< 한겨레신문 조현 논설위원 >



[1500자 칼럼] 다른 생각

● 칼럼 2015. 1. 16. 19:38 Posted by SisaHan

오래 전 이야기지만 여기 처음 이민 와서 학교를 다닐 때, 한국학생들과 캠핑을 간 적이 있었다. 그 중 아직도 기억에 남는 프로그램 하나가 있다. 토론을 하는 순서였는데, 토론이라고 하면 나는 어떤 주제를 가지고 찬반으로 두팀으로 갈라져 논쟁을 벌이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시작하기 전에 한 주제에 찬성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을 물었고 앞에 나가서 몇 사람이 대표로 토론을 하고, 나중에 다시 찬반을 묻는다는 것이었다. 얼마나 찬성과 반대가 바뀌느냐로 토론의 결과를 묻는 것이었다. 그러니 앞에 나와 토론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지지자가 몇 명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토론 과정을 걸쳐 몇명의 반대자를, 다시 말해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설득하느냐가 문제였다. 그 이전의 내가 알고 있는 한국에서의 토론은 나중에 찬성과 반대를 손들게 하여, 다수결인 쪽이 토론에 이기는 것이었다. 누가 토론 과정을 거쳐 생각이 바뀌었다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많은 사람이 지지하는 생각, 그것은 무조건 옳은 것이었다. 그리고 소수 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사람도 그 다수결에 따라야만 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대다수의 의견에 반대를 표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무얼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눈치 보다가 남 따라 손들기도 했다. 무슨 대단한 정책을 결정하거나 그런 일이 아닌, 어쩌면 형식적인 학교내의 토론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트이는 행동을 한다는 것은 왠지 불편한 일이었다.

이런 토론 방법의 실질적인 효과를 위해서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무엇보다 열린 마음으로, 상대방의,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의 의견을 듣는 것이다. 그런 마음이 없다면 사실 이런 토론은 하나마나 한 것 이었다. 한국의 전통 문화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남의 말을 듣고 바꾸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한다. 어렸을 때부터 받은 교육자체가 그랬다. 한번 품은 뜻이나 가진 생각을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는 것이 미덕이라고 은연중 가르치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얼마나 남의 의견을 마음 문을 열고 들을 준비가 되어있고, 또 다른 의견이 옳다면 그것을 인정하고 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러기 보다는 자기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 하고, 자기 편한대로 해석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는 말꼬리 하나라도 붙들고 물어 뜯으려 하지 않는가? 자기 생각이 옳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이런 상황이라면 토론은 단지 말싸움뿐 일 것이다. 만약에 토론이 끝난 뒤에 자신의 생각이 바뀌었으면 이를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그 또한 한국사회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라 생각한다. 과장된 말이지만 같은 편을 버리고 반대편에 서는 게 되어, 배를 갈아타는 것으로 간주되어 일종의 배신행위가 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다고 한다 해도 따돌림 받기 십상이다. 대부분의 토론 자체가 하나를 선택하게, 사실은 대다수의 의견을 따르게 만들었다.

내가 지난 해 오래 전의 토론을 종종 생각했던 이유는 인터넷을 통해 만난 한국사회 때문이었다. 같은 한국 내에서도 무슨 사건이 터질 때마다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 심하게 드러났다. 누구나 말 할 수 있고 때로는 가명을 사용할 수 있다는 인터넷 특성 때문에 싸움은 더 치열했고 비난의 도가 지나치는 경우도 많았다. 단식투쟁을 하는 사람 앞에서 일부로 먹는 모습을 보여주는 극단적인 경우도 있었다. 서로 생각이 다르더라도 상대방의 입장을 존중해주는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똑 같은 사건을 놓고 보면서도 지극히 극한적인 대립을 하며 양자 간 한 치의 타협도 없었다.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는 것은 고사하고 말도 들으려 하지 않았고 적대적인 감정만 보여주었다. 다른 사람의 다른 생각이란 존재도 없었다. 오로지 자기 생각만 옳은 것이었다.


나 자신은 어느 쪽인가 한 번 생각해보았다. 여기 사람들이 보기에는 분명 나는 보수다. 사회적인 이슈에 내가 서있는 쪽은 분명 옛날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사람이 보기에는 진보로 보일 것이다. 요즘 한국에서도 문제가 되기 시작한 이슈들에 비교적 관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고 앞서 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당연한 이유가 소수자의 문제나 동성애 같은 이슈는 여기서는 오래 전에 사회적인 이슈로 거쳐 간 일들이기 때문이다. 오랜 캐나다 생활 때문에 한국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는 알게 모르게 변한 셈이다. 정치 문제도 여기가 선진국이라서가 아니라, 미국과 같은 자본주의, 민주주의 국가이면서도 캐나다는 사회주의적인 성격도 가진 나라다. 그리고 글을 쓰는 사람은 자유스러운 혼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개인적으로 믿고 있다. 그리하여 표현의 자유를 누구보다 굳게 믿고 있다. 물론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다는 말이지 실천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나는 개인적인 성격 탓이겠지만 한쪽만 있는 사회를 건전하다고 바람직하다고 보지 않는다. 보수가 중심을 잡고 진보가 앞으로 나가는 그런 사회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보수가 있기에 진보가 있다고, 그러므로 서로 싸워 상대방을 없애려 하기보다 함께 가는 사회여야 한다고…. 지금 20대는 60대를 향해 보수라 부르지만 그들이 60대가 됐을 때 20대에게 같은 말을 듣지 않을까? 결국 오늘의 진보는 내일의 보수인 셈이다.
마치 사람의 두 눈과 같지 않을까? 젊은 날 내가 제일 좋아했던 가수, 죤 바에즈가 한 말이 생각난다. “우리는 세상을 두 눈으로 보아야 한다. 왼쪽 눈, 오른쪽 눈, 하나로가 아니라…”

<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