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3·1절에 짓밟힌 중견국가의 꿈

● 칼럼 2015. 3. 7. 18:20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민족감정은 여전히 악용될 수 있고, 정치지도자가 과거의 적을 비난함으로써 값싼 박수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런 도발은 진전이 아니라 마비를 초래한다.”
몇번 곱씹게 되는 웬디 셔먼 미 국무부 정무차관의 말이다.
‘값싼 박수’, ‘도발’과 같은 자극적인 용어는 누굴 향한 것인가? 과거를 부정하는 일본을 꾸짖는 중국과 한국의 정치지도자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시진핑 주석과 박근혜 대통령 말고 누구이겠는가? 졸지에 이 지도자들은 값싼 박수나 받는 도발자가 되고 말았다. 반면 일본의 아베 총리는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가려는 품격 높은 지도자가 되었다.
3.1절 아침에 비수처럼 꽂히는 이 말. 우리의 어깨를 내리치는 죽비 소리다. 작금의 국제정세를 냉철하게 바라보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국가의 생존과 번영의 길을 찾아내라는 소리다. 이 역사의 본질에 정신을 집중하라는 각성의 소리다.


지금 미국은 중국의 부상이 필연적으로 미국의 패권을 위협하게 되어 있고, 그 결과 언젠가 미-중 간에는 분쟁을 피할 수 없다고 본다. 미국은 20세기 초에 유럽에서의 세력균형의 변화를 방관하다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르고 냉전을 감수하는 값비싼 비용을 치러야 했다.
그러니 21세기에는 아시아에서 중국의 부상으로 인한 세력균형의 변화를 방치하지 않고 사전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재균형 전략’, ‘아시아로의 회귀’를 표방한다. 그런데 한국이 과거 역사에 매몰되어 한·미·일 삼각 안보동맹 참여를 주저하고 있으니 이걸 못마땅하게 여기고 나온 거친 협박이다.
어느 정도 한국의 태도 변화를 기다리던 미국은 결국 참지 못하고 한국의 과거사에 대한 인식이 값싼 민족주의 감성이라며 한-일 관계를 개선하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이제 과거 역사라는 중고차는 도매금으로 폐기처분하고 그 대신 값비싸고 안락한 신형차에 탑승하라는 이야기다.


지난해에 미국은 얼마나 급했으면 한·미·일 삼국의 국방차관이 모여 정보공유 약정을 체결하기로 한 계획을 무산시키고 펜타곤의 하급관리를 보내 약정서에 서명을 받아갔다. 조인식도 하지 못한 일종의 ‘택배기사 약정’이다. 그만큼 미국의 호흡이 거칠 뿐만 아니라 급하기까지 하다.
개발에 성공하지도 못했고 한국에 배치할 물량도 없는 사드 요격미사일 체계를 벌써부터 한국에 배치하려는 여론을 조성하는 것도 바로 그런 미국의 조급성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중국의 부상 속도가 너무 빨라 시간이 없다.
 이런 압박이 매일 한국 정부를 옥죄어오는 지금은 역사적 정의에 대한 우리의 진지한 성찰마저도 사치가 되어버렸다.
그래서일까? 3.1절의 태극기가 지금처럼 초라해 보인 적도 없다. 광화문 빌딩마다 내걸린 태극기는 귀퉁이가 풀렸는지 너덜너덜하고 정부청사의 태극기는 바람을 이기지 못해 죽 찢어졌다. 누런 황사바람에 부황이 든 것 같은 태극기 내걸고 정체 모를 애국심 타령을 하는 동안 국제정세는 청나라와 일본의 패권이 충돌하는 100년 전으로 회귀하고 있다.


항상 이렇게 외세에 강점당하고 주권을 유린당했던 한민족이 자기방어의 기제로 간직해왔던 민족주의는 쓰레기 취급을 받고 있다. 진영 논리를 초월하여 모든 국가와 선린의 우호관계를 도모하려는 중견국가 평화한국의 꿈도 짓밟히고 있다. 열광적으로 미국을 숭배하고 동맹을 외치던 저 보수정권도 미국으로부터 귀싸대기를 맞고 갈 길을 찾지 못해 거리를 헤매고 있다.
이 깡패들의 틈바구니에서 우리는 각성해야 한다. 자존감마저 잊어버리고 함부로 줄서는 순간 우리는 산과 들과 하늘까지도 빼앗긴다. 그것이 3.1절에 부르는 우리의 만세 소리이며 민족자존의 함성이다.
< 김종대 - 디펜스21 플러스 편집장 >



[한마당] 스마트폰과 인간의 퇴화

● 칼럼 2015. 3. 7. 18:04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얼마 전에 시내에서 저녁을 사 먹을 일이 있었다. 작은 식당에 들어가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청소년 남매와 어머니로 보이는 일가족이 들어왔다.
그들은 음식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각자 스마트폰을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고 말없이 무언가에 열중했다. 음식이 나오고 그것을 다 먹을 때까지 30여분 동안 그 가족은 아무런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조용히 음식값을 치르고 식당 문을 나설 때까지 그 가족에게서 들을 수 있었던 말은 음식을 주문하는 소리와 어머니가 작업 중에 외부의 누군가와 통화한 것뿐이었다.
그들은 ‘함께’ 저녁을 먹는 것이 아니라 같은 자리에 앉아 귀찮은 밥 문제를 각자 해결하고 있었던 셈이다.


스마트폰 보급률이 70%를 넘었다거나 이미 5천만대가 보급되어 있다고 하는 우리 현실에서 이런 풍경은 이제 더 이상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고 훨씬 충격적인 일들도 다반사다.
대학 1학년인 딸아이가 방학 동안 집에 와서 하는 일을 보면 이해가 될 듯하다. 녀석은 자정이 넘도록 친구들과 문자를 주고받다가 머리맡에 둔 전화기에 연결된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들으면서 잠자리에 드는 게 생활화되어 있다. 농촌의 겨울인지라 아침 식사가 늦음에도 녀석은 가족과 함께 밥 먹는 것을 귀찮게 여기는 것 같았다. 가족이라면 머리를 맞대고 밥을 함께 먹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기는 나로서는 꽤 당황스런 일이었다.
스마트폰이 생활화된 아이들에게는 함께 살아가는 가족도 식구가 아닌 것 같다. 삶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밥 먹는 일조차도 함께해야 할 일로 여기지 못하는 이들에게 연대나 공동체, 더 근본적으로는 타인과의 ‘관계’와 같은 낱말들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스마트폰이 일반화되면서 사람들은 참고 기다리거나 궁금해하는 것을 잘 견디지 못하는 것 같다. 궁금한 것들은 무엇이든 자판기처럼 즉석에서 답을 얻을 수 있다. 누군가에게 전한 소식에 응답을 기다리는 일이나 낯선 곳을 찾는 것도 그렇고 모르는 지식을 알고자 할 때도 마찬가지다.
불과 한 세대 전에 그랬듯 친구에게 편지를 띄우고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 그의 삶을 궁금해하며 그를 그리워하는 것은 마냥 헛된 일일까. 목적지를 찾지 못해 주민에게 길을 묻고 그의 친절한 안내에 고마워하는 일은 없어져야 할 불편일까.
고성능 카메라를 겸하고 있는 스마트폰은 사람들로 하여금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한다. 맛있게 차려진 음식을 보면 그 맛을 음미하기보다는 사진 찍기에 바쁘고, 아름다운 경관 앞에서나 문서화된 지식 앞에서도 그렇다. 누군가에게 전하기 위해, 나중에 다시 꺼내보기 위해 눈앞의 것들에 몰입한 뒤 놓아주는 대신 자신만의 창고에 쌓아두느라 바쁘다.


나는 최소한 중학교까지는 컴퓨터나 스마트폰이 아이들의 생활은 물론 학습에서도 쓰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정신과 육체는 별개로 나눌 수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아이들은 몸과 마음이 조화롭게 자라야 한다. 글씨는 손으로 써야 하고 몸을 부딪치며 뛰놀아야 하고 도구를 손에 쥐고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이 길게 보면 아이의 지적 성장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학교의 교육과정은 절반 이상이 예체능을 포함해서 몸을 쓸 수 있는 활동으로 채워져야 마땅하다.
 나는 어려서 중학교를 다닐 때까지 연필을 참 많이 깎았다. 연필 깎는 일은 단순해 보이지만 칼과 연필을 쥔 양손이 유기적인 협조를 이루어야 멋지게 해낼 수 있다. 샤프 연필이 나오면서 연필을 깎아야 하는 수고는 사라지게 됐지만 오랫동안 연필을 깎았던 손놀림은 어린 시절에 균형과 조화에 대한 감각을 기르는 데 꽤 도움이 되었으리라 믿는다.
< 김계수 언론인 >



[1500자 칼럼] 코골이

● 칼럼 2015. 2. 15. 14:51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한때 남편과 아들은 지독하게 코를 골았다. 특히 아들이 하키와 야구 경기를 한 날이면 그의 방에서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컨비니언스를 운영하던 남편 역시 밤마다 아들 못지 않은 실력이었다. 언젠가는 딸과 작당하여 코를 드르렁대며 골아 떨어진 남편의 코고는 소리를 녹음까지 했었다. 자신이 코를 곤다는 사실을 인정도 안 할뿐더러 그 소리가 얼마나 요란한지, 남의 잠을 얼마나 방해하는지, 증명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불분명하고 요상한 소리가 자신의 코고는 소리라는 것을 잡아떼기는 마찬가지라, 허사였다. 젊은 시절의 나는 가끔 그것을 빌미 삼아 <Good Housekeeping> 잡지에서 읽은 기사로 은근 슬쩍 협박까지 했었다. 옆에서 밤잠을 잘 수 없게 코를 골아 배우자의 정상생활을 방해할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줄 경우 이혼성립의 조건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가 시끄럽게 코를 골지라도 내 단잠을 손해 본 적은 없었지만 알아두면 득이 되는 이 비장의 카드를 놓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 나도 며느리와 사위를 얻었다. 재작년 봄 오랫동안 꿈꿔오던 이태리 여행을 나와 딸과 며느리, 세 여자가 함께 떠났다. 어찌된 일인지 매일 아침마다 그들의 베개가 내 것과 반대 방향에 놓여 있는 게 아닌가.


“왜 그쪽에 베개를 놓고 자니?”
“엄마가 너무 코를 골아서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요”
“내가 코를 곤다고? 그럴 리가...”
옆에서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코를 골고도 정작 당사자는 오리발을 내미니 어이없는 표정이 역력했다. 잠든 사람이 어찌 자신의 코고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단잠을 설친 딸의 불평으로만 여기고 싶었으나 며느리 앞이라 시어미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창피하여 무안해진 나는 여행 내내 복용해온 감기약 때문인 것 같다고 끝내 궁색한 변명까지 늘어놓고 말았다. 그런데 문득 섬광처럼 스치는 일이 있었다.
어느 날 새 소리에 잠을 깬 이른 새벽, 나 홀로 침대에 있었다. 분명히 남편과 함께였는데 언제 그가 나갔는지조차 기억에 없으니 아마도 곤히 잠들었나 보다. 옆방에서 인터넷 기사를 읽고 있는 남편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왜, 이 시간에 그 방에 있어요?”
“당신 코고는 소리가 얼마나 큰지 옆에서 잘 수가 있어야지”
“내가 코를 곤다구요? 코골이는 당신이잖아?” 그때는 생사람 잡는다고 화까지 냈었는데 이제 딸 애기를 듣고 돌아보니 내 코고는 솜씨도 만만치 않은 모양이다.
친우 여럿이서 화사한 하룻밤 봄 나들이를 간 적이 있다. 오랜만에 가게와 집을 떠난 자유부인들은 마치 들판에 풀어놓은 망아지들 같았다. 무한히 펼쳐진 아름다운 경치보다도 자주 목말라하던 정다운 친구들과 만난 유쾌한 시간에 먼저 취했다. 어둠이 깔리기도 전부터 타고난 유머 여왕의 방으로 모여 들었다. 밤이 깊도록 대화는 대화를 낳으며 주제를 바꾸고 웃음보를 터트리며 푼수를 떨었는데 차츰 눈이 아스라해가고 목소리도 잠겨 들어가고 있었다. 드디어 한 쪽에서 코고는 소리가 얌전하게 새어 나오다 점점 더 거세지기까지 하였다. 무엇보다도 코까지 살짝 골다 언제 졸았냐는 듯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고 또 다시 코골기를 계속했으니 재주치곤 비상하였다. 그 모습은 폭소로 이어지곤 했는데 결국은 아침부터 설쳐댄 피곤이 몰려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잠에 빠져 들고 말았다. 새벽녘에 일어나 서로 누가 코를 골았는지 확인하니 그 밤에 코를 골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상대방 코고는 소리만 들었지 자기 자신이 코를 골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런 아이러니가 또 있겠는가.


이렇듯 자기 자신을 모르고 착각하며 사는 일은 다반사이다. 마치 내가 전혀 코를 골지 않는 사람으로 알고 남편만 성가시게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착각은 분명 자유다. 잘 다스리면 득이 되기도 하고, 넘치면 해가 되기도 한다. 남들이 해주는 억지 칭찬도 진실로 받아들이면 자기 능력 이상의 일을 해낸다.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한 노력이 오히려 자신감을 불러일으키며 큰 결실을 맺게 된 그 모습이 감동을 줄 때도 많다. 가끔은 그런 모습이 푼수로 보일 때도 있지만 절대로 밉지는 않다. 모두 제 잘난 맛에 사니까 귀여운 착각으로 여겨질 뿐이다.
어느 새 비상(飛翔)을 꿈꿨던 나의 젊은 날은 지나갔다. 내 마음을 흔들어대던 남편의 코고는 소리도 예측불허 한 삶과 맞물리며 정다운 생명의 노래로 들려오기 시작했다면, 이것도 귀여운 착각일까?


< 원옥재 - 수필가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원, 전 회장 >



[한마당] 리더와 추종자들

● 칼럼 2015. 2. 15. 14:48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털어서 먼지 안나오는 사람 있나?“
세상에 흠없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자조섞인, 그리고 합리화하고 동정적인 말의 하나다. 간음한 여인을 쳐죽이자고 기세등등한 군중에게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예수의 말씀에 어느 누구하나 감히 돌을 던지지 못했다. 남의 눈의 티끌만을 보다가 자기 눈에 씌인 대들보를 보지못했던 사실을 그제서야 깨닫고 죄인 아닌 자가 없음을 자인한 것이다.
모두가 죄인이라는 기독교적 인간관이 아니어도, 완벽할 수 없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실수나 허물을 만들지 않는다면 이상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크고 작음의 질적 수준에 있다는 사실이다. 차를 몰고 가다 접촉사고를 낼 수는 있지만, 파란 불에 횡단보도를 건너는 행인을 치었다면 법적제재의 기준이 달라진다. 그렇게 사람을 친 후 더구나 뺑소니를 쳤다면 또 처벌은 무거워진다. 거기에 달아난 사람이 교수나 목사나, 시장 군수 혹은 장관이었다면, 문제는 더 심각하게 변한다.
인사청문회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비리가 ‘양파껍질’ 혹은 ‘고구마 줄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벗기고 들출 때마다 끝이 없이 드러나는 것을 보는 사람들 심경이 복잡하다. “도대체 일국의 지도자라는 작자들 수준이 하나같이 그 정도인가” “병역과 부동산투기, 논문표절, 세금탈루는 필수 4대 세트” 등 힐난하는 소리가 비등하다. 그런가하면 “신상털기가 지나치다, 털어서 먼지 안나오는 사람 있나”고 동정적이며 감싸려는 여당측 엄호사격에 동조하는 이들도 많다.


한국에 인사청문 제도가 도입된 것은 2000년 6월, 16대 국회에서 ‘인사청문회법’을 제정하면서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당시 이한동 국무총리 후보자가 처음으로 청문을 거쳤다. 그 뒤 노무현 대통령 당선 직후인 2003년 1월 국가정보원장, 검찰총장, 국세청장, 경찰청장 등 이른바 4대 권력기관장도 국회의 청문회를 거치도록 법이 바뀌었고, 2005년 7월에 다시 법이 개정되어 모든 국무위원 내정자가 인사청문 대상이 됐다. 당시의 청문회 대상 확대는 이헌재 경제부총리가 부동산투기 논란으로 낙마하자 한나라당 대표이던 박근혜 현 대통령이 모든 국무위원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해 이뤄졌다.
그런데 그 당시의 낙마자들은 지금에 비하면 ‘좀도둑 수준’이라고나 해야 했다. MB(이명박) 정부 들어서면서부터 소위 ‘비리세트’가 등장하여 장관 후보자들이 ‘세트’를 갖추지 못한 사례는 그야말로 가뭄에 콩 나듯 드물게 되고 말았다. 최근 도마에 오른 이완구 총리후보자에 이르기까지. 오죽하면 현 정부 초대총리 내정자가 맥없이 사퇴해 버리자 ‘청문대상 확대’를 외쳤던 박 대통령이 “그런 식 신상털기 청문회 하면 누가 나서겠나”며 청문회 축소를 주장하고 나왔겠는가. 총리를 물색해도 ‘공개망신 당할 일 있느냐’며 서로 안하겠다고 사양한다는 이야기까지 나돌 정도다.


‘털기’식 청문회나 대상자들의 비리수준도 문제지만, 근래들어 깨끗하고 존경받을 만한 장관감이 거의 없다보니 아예 당사자나 국민들의 비리불감증이 보편화 된 게 진짜 심각한 문제가 되어 버렸다. 어지간한 먼지는 먼지로 보이지도 않아서, 나라 안이 온통 미세먼지로 가득차도 무덤덤해져 ‘뭐 나라고 어때?’하는 온 국민의 도덕수준 저하증세가 갈수록 심해지는 중인 것 같다.
누가 뭐래도 그 가장 큰 공로자는 MB 정권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분방’한 건설족 출신이어선지 그가 대통령이 되면서 고위공직자들 도덕수준이 형편없이 추락했다. 수많은 낙마자를 내는 바람에 어지간한 비리는 문제 삼기조차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다. 그 저급한 전통이 지금까지 맹위를 떨치고 있으니 참, 나라 꼴이 우스워졌다. ‘ㄱ에서 ㅎ까지’ 비리열전이 펼쳐진 이완구 후보자가 버티고 있는 것을 보며 ‘서구나라 같으면 국회의원도 사퇴해야 할 수준’이라는 여당 비대위원을 지낸 이상돈 교수의 지적에 쓴웃음이 나오는 까닭이다.


성인군자를 찾는 것은 아니지만, 무릇 국민 앞에 서겠다는 지도자라면 최소한의 도의적·윤리적 몸가짐은 필요한 법이다. 그런 지도자들 주변에는 또 그런 추종자들이 따르게 마련이다. ‘근묵자흑(近墨者黑)’에 ‘새들도 같은 깃털끼리’라는 말마따나 비리에 무딘 사람이 대통령이다 보니 참모나 인재풀 등 주변인물도 그런 부류가 모여든 것이다. 순진한 국민들 양심과 도덕수준까지 오염시킬 정도로 나라를 멍들게 한 죄과를 누가 책임질 것인가.
멀리 갈 것도 없다. 요사이 토론토에서는 차기 한인회장 선거를 앞두고 공식 선거일정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과열양상이 나타나 동포들을 상심시키고 있다. 어느 후보 진영의 운동원격인 사람은 지역감정을 조장하고 언론사의 편향을 요구하는 상식이하의 행동으로 지탄을 받아 캠프내에서도 골머리를 앓고있다 한다. 본격 선거전에 앞서 진용을 재정비한다니 두고 볼 일이다. 주변 사람들은 후보자, 곧 리더의 성향과 수준으로 인식될 수 밖에 없고, 뜻있는 동포들은 한인회와 한인사회의 명예에 걸맞는 최소한의 자질을 지켜 볼 것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MB의 교훈’을 되새겨 볼 일이다.


< 김종천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