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치러진 그리스 총선에서 긴축정책에 반대하는 급진좌파연합(시리자)이 승리했다. 그리스 사회의 상당한 변화가 예상된다. 유럽 공동통화인 유로의 앞날을 비롯해 유럽 전체의 경제·정치 상황에도 일정한 파장이 불가피하다.


시리자는 2004년 총선 때 처음 등장한 신생 정당이다. 당시에는 군소 정당에 그쳤으나 유럽 경제위기 때인 2010년 구제금융과 함께 강요된 긴축정책에 대해 대중들의 불만이 커지면서 주요 정당으로 부상했다. 가혹한 긴축으로 그리스의 경제 규모와 임금 수준은 4분의 1쯤 줄었고 청년 실업률은 50%를 넘는다. 면세 등 특혜를 누리면서 경제를 장악한 과두재벌과 이들에 영합해온 기존 정당에 대한 불만도 커져 왔다. 변화를 바라는 젊은층이 대거 시리자 쪽으로 몰리면서 시리자의 지지율은 36%를 넘어섰다. 한마디로 많은 유권자가 기득권층 중심으로 완고하게 돌아가는 그리스와 유럽연합의 기존 질서를 거부한 것이다.


시리자는 유로존(유로를 쓰는 19개 나라)에서 선거 승리에 성공한 첫 반긴축 정당이다. 시리자는 긴축 폐지와 더불어 국내총생산의 2배에 가까운 외채 가운데 절반 정도를 탕감해줄 것을 주장하지만 독일·프랑스 등 유로 중심국은 이에 반대한다. 따라서 앞으로 협상이 잘되지 않으면 1999년 유로존 출범 이후 처음으로 탈퇴국이 나오는 ‘그렉시트’(Greece와 exit의 합성어)가 현실화할 수 있다. 또 그리스 상황은 스페인과 이탈리아 등 경제 구조가 취약한 나라들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유럽 여러 나라에선 시리자와 비슷한 주장을 하는 정당이 지지율을 높여왔다.


시리자의 승리는 고통스러운 기존 질서에서 벗어나 새 길을 찾으려는 유권자의 선택이라는 점에서 존중돼야 한다. 새 정권은 유럽연합 쪽과의 어려운 협상과 함께 경제 개혁과 부패 청산을 이뤄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1993년 출범한 유럽연합(EU) 또한 중요한 고비를 맞게 됐다. 그리스 경제가 유럽연합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대에 불과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유럽연합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 따라서 유럽연합도 자체 개혁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지 않아도 이번 선거를 ‘신자유주의 종언의 시작’으로 보는 시각이 힘을 얻고 있다. 국제 경제 질서는 냉혹하지만 구성원의 삶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그 질서 자체가 혼란에 빠질 수 있음을 이번 그리스 사례가 잘 보여준다. 이는 우리나라가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교훈이기도 하다.



대법원이 22일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 등에 대해 내란음모는 무죄, 내란선동 및 국가보안법 위반은 유죄로 각각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대법원이 내란죄에 대해 엄정한 법리를 세우려 한 점은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억지스러운 논리로 선동죄라도 씌우려 한 데서는 부작용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대법원은 그동안에도 내란음모죄가 성립하려면 내란 실행의 합의와 실질적 위험성이 있어야 한다고 판례를 통해 밝혀왔다. 이번 사건에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를 더욱 구체화했다. 대법원은 내란음모의 합의는 단순히 내란을 논의하는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밝혔다. 폭동의 대상과 목표가 설정돼 있고, 실행계획 등 주요 사항의 윤곽을 공유하고, 실제 실행으로 이어지리라고 다들 생각하는 정도의 ‘확정적 합의’여야 한다는 것이다. ‘실질적 위험성’도 내용의 구체성이나 합의의 강도, 사전 준비나 사후 후속조처 여부 등이 고려돼야 한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이런 기준에 따라 말만 한차례 오갔을 뿐 아무런 준비나 추가 조처도 없었던 이석기 그룹의 행동은 내란음모일 수 없다고 밝혔다. 검찰이 내란 주체로 지목한 ‘아르오’(RO)도 실체가 없다고 판단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이나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등 과거의 내란죄 조작 사건도 이 기준에선 당연히 무죄다.


내란선동에 대한 유죄 논리는 실망스럽다. 내란 사건에서 음모와 선동의 유·무죄가 갈린 것은 이번이 사실상 처음이다. 대법원은 내란음모에 적용했던 엄격한 법리를 내란선동에선 외면했다. 대법원은 선동에선 내란의 구체적 내용을 제시할 필요도 없고, 선동의 대상자들이 실제 그런 행동을 할 개연성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라고 밝혔다. 이들의 내란 결의를 유발하거나 높일 위험성만 있으면 처벌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란음모죄에 적용했던 ‘실질적 위험성’과는 판이하게 낮은 기준이다. 이런 식이라면 정치적 소수파의 정부 비판이나 과격한 선동도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 헌법상 표현의 자유를 크게 침해할 수 있는 것이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정치선동에 대해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있어야 처벌한다고 거듭 밝혀온 것도 이를 우려한 때문이었다. 이 의원의 연설이나 장난감 총 따위를 언급한 모임 참석자의 발언 등에 그런 ‘명백한 위험’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러니 ‘억지 절충’이란 말이 나올 만하다. 대법원 판결이 다소 실망스럽기는 해도 헌법재판소의 얼토당토않은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에 비할 바는 아니다. 대법원이 ‘RO’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은 것과 달리, 헌재는 정체도 불분명한 ‘주도세력’의 성향을 들어 당 전체가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헌재는 또 ‘실질적 위험성’을 엄격하게 판단하기는커녕 주도세력의 ‘숨은 목적’을 ‘추정’해 정당의 강제해산을 정당화했다. 대법원의 이번 판결로 헌재는 더욱 정당성과 존립 근거가 흔들리게 됐다.



지난달 발생한 소니픽처스에 대한 사이버 공격 사건은 전형적인 추리물이다.
셜록 홈스 역을 맡은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가상의 범죄현장을 찾아가 증거를 수집했고, 잠재적 범인의 범죄동기를 규명하려 했다. 연방수사국의 수사 뒤 오바마 행정부는 북한이 범인이라고 선언했다. 범죄동기도 분명해 보였다. 북한은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의 암살을 묘사한 영화 <인터뷰>가 거슬렸다. 해커들은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들을 공격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아주 간단한 사건이었다. 오바마 행정부는 추가 대북 제재 조처를 취했고, 의회 강경파들은 북한을 테러 지원국으로 재지정하라고 압박했다.


보안업계 전문가들이 북한의 소행으로 단정한 정부의 주장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의문이 불거졌다. 해커들이 한 언론인에게 보낸 쪽지 속 한글 문장은 문법에 맞지 않았다. 김정은에 대한 존칭도 제대로 쓰지 않았다. 불만을 품은 소니의 내부 직원, 자신들을 ‘리저드 스쿼드’(도마뱀단)라고 자칭한 집단도 잠재적 범인으로 떠오르면서 북한 소행설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때 <뉴욕 타임스>가 거대한 ‘반전’을 폭로했다. 미국이 먼저 북한을 해킹해 오고 있었다. 그 시기는 201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국가안보국(NSA)은 단순히 기웃거린 게 아니었다. 국가안보국은 북한에서 사이버 공격을 담당하는 것으로 추정돼온 정찰총국 산하 121국 같은 기관의 활동을 감시하기 위해 북한 컴퓨터들에 악성프로그램을 심었다.
그게 처음도 아니다. 사이버해킹을 지원한다고 다른 나라들을 비난하면서 미국은 똑같은 사이버해킹을 해왔다. 이란의 핵 시설을 공격하려고 몇 종류의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투입했다. 또 사이버상에서 새로운 군비경쟁을 하며 중국과 정면으로 부딪치고 있다. ‘전방위 지배’를 확보하려는 미국의 목표는 사이버상으로까지 확장됐다. 미 국방부는 이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민간 부문에서 전문가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국방부는 ‘플랜 X’를 통해 평범한 군 관계자가 비디오 게임을 하듯 쉽게 사이버 전쟁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


아무튼 북한에 대한 미국의 선제공격에는 몇가지 흥미로운 허점이 있다. 국가안보국이 북한을 감시하고 있었다면, 왜 소니에 미리 경고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미 정부는 소니의 전산망이 뚫리는 것을 막기보다 북한의 능력을 시험해보는 데 더 관심을 가졌을 수 있다.
이 사건에서 흥미로운 또 하나의 의문점은 남한의 역할이다. <뉴욕 타임스> 보도를 보면, 국가안보국은 남한의 도움을 받아 북한의 인터넷망을 해킹했다. 하지만 에드워드 스노든이 공개한 다른 문서들에는 국가안보국이 한국 정보 시스템에 잠입해 북쪽 시스템에 접근한 것으로 나온다. 자, 그렇다면 한국은 동맹국인가 표적인가?
거기에 사이버세계의 가장 도발적인 도전이 도사리고 있다. 적도 동지도 없다는 점이다. 정보당국들은 적들의 비밀만큼이나 동맹국의 비밀에도 관심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스노든의 폭로가 파괴적일 수밖에 없었다. 독일은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휴대전화가 도청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브라질은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의 이메일과 휴대전화가 도청당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독일과 브라질은 미국의 동맹국들이지만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나라들이기도 하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그들에 대한 감시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에 더해 미국은 스노든이 문서들을 폭로하자 미국인들에 대한 감시망도 구축할 필요성을 느꼈다. 혹여나 미국 시민들의 개인적 관심이 국가 이익과 배치될까 우려했다.


외국 정상들을 엿보고, 자국민을 감시한다? 갑자기 미국이 북한과 무척 닮아 보인다. 북한은 인민들에 대한 강도 높은 감시를 하는 걸로 유명하니까. 북한 정권은 중국과 러시아 같은 최근까지 동맹이었던 나라들의 움직임에도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물론, 북한이 미국에 손을 뻗치기 전에 미국이 먼저 나서 북한에 대한 해킹 공격을 했다.
소니 해킹 사건은 북한의 특기인 ‘비대칭전’의 예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들은 주로 미국과 같은 강대국을 상대할 때는 약자의 무기에 의존한다. 하지만 사이버상에서는 스파이웨어라는 동등한 무기가 숨어 있었다. 스파이웨어는 곳곳에 널려 있다.
< 존 페퍼 - 미국 외교정책 포커스 소장 >



국가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특히 인종적 특성으로 국가를 규정하려는 방식은 세계 각국이 다문화 국가가 되면서 그 정당성을 잃었다. 반만년 역사의 한민족이라는 국가정체성은 2015년 대한민국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
2013년을 기준으로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은 150만명을 넘어섰다. 광주광역시 인구를 훌쩍 넘는 수치다. 국민 100명 중 3명이 외국인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여기에 75만명 내외의 귀화한 다문화 가족이 존재한다. 국제결혼이 전체 결혼의 10분의 1에 육박하고, 농촌지역 결혼의 절반이 국제결혼이다. 신생아 20명 가운데 1명은 다문화 가정 출신이고, 그 결과 다문화 가정 자녀 수는 20만명에 이른다.


2020년이 되면 청소년 인구의 20%가 다문화 가정 출신이 될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한국은 급격한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으며, 출산율 최저의 고학력 사회다. 당분간 이주노동자의 유입이 줄어들 기미는 보이지 않으며, 이로 인한 한국 사회의 변화는 불가피하다. 다문화 정책은 국가 생존의 필수요소가 되었다.

셰리프와 사이드 쿠아시 형제, 프랑스 샤를리 에브도 테러의 범인들이다. 언론은 테러의 폭력성과 프랑스의 분노만을 다루고 있을 뿐, 테러범들이 어떤 사회적 배경을 지니고 있는지에 주목하지 않는다. 쿠아시 형제가 태어나 자란 곳은 파리 10구와 19구, 그리고 방리외 지역이며 바로 여기가 프랑스 다문화 정책의 적폐가 누적된 장소다. 프랑스의 이민자 비율은 약 10%로 추산된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촉발된 이민의 물결은 1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북아프리카 식민지의 대규모 이민을 포함해 20세기 말까지 꾸준히 이어져 지금에 이르렀다.


프랑스의 동화주의 이민정책은 한계에 봉착했다고 평가된다. 방리외 지역의 거대 공공아파트는 빈곤의 상징이 되었고, 이를 모티브로 한 영화가 여러편 제작되었을 정도다. 한 영화의 제목은 <증오>다. 방리외 지역의 청년실업은 33%에 달한다. 실제로 몇년 전 프랑스 청년들의 폭력봉기 사태도 이 지역을 중심으로 발생했다. 동화주의의 실패는 프랑스 저소득층에 광범위하게 퍼진 무슬림과 아프리카 문화로 증명된다. 방리외 지역의 젊은이들은 유사한 문화를 공유하고 있으며 이들의 가난은 사회계급 간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다. 쿠아시 형제는 이런 곳에서 태어나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하고 소매치기로 삶을 연명하다 지하디스트, 즉 무슬림 급진주의자가 되었다. 그들의 폭력은 용서받을 수 없으나, 테러의 사회적 배경 또한 무시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사건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보도한 아까이소라의 말처럼 “프랑스 사회 역시 이 사건의 원인제공자라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뜻이다.
경기도 안산시 원곡동엔 39개국에서 모여든 3만5000여명의 외국인이 집단 거주한다. 정부는 이곳을 ‘다문화 1번지’로 소개하며 다문화 정책의 홍보수단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곳을 오랫동안 연구한 오경석에 따르면 원곡동은 모순의 공간이다. “원곡동은 한국의 다문화 1번지라기보다는 한국 다문화주의의 이중성을 가장 극명하게 표출하는 공간적 사례”라는 것이다. 이주 노동자의 대부분이 거쳐가는 원곡동이 관용의 공간이 아니라 차별과 관료주의 포장의 공간으로 변질된다면, 그 적폐는 용서받을 수 없는 결과로 나타날지 모른다.
이주 노동자들과의 일자리 경쟁이 심화되고, 학교에서 다문화 출신들이 차별받고, 그들이 게토로 소외되고, 분노가 증오로 폭발하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우리에게 샤를리 에브도 테러가 없으리라 보장할 수 없다.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는 분명하다. 다문화 국가는 피할 수 없는 길이다.
< 김우재 - 초파리 유전학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