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의 한 해를 기원하며‥ 창간 9주년에 드리는 인사말씀

비정상의 정상화, 믿음 회복과 부흥을 기원
한인사회에도 흐림이 걷히고 원기와 활력을

어언 9년입니다. 강산이 바뀐다는 10년에는 한 해가 적지만, 그 세월 역시 간단치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 한인사회만 보아도 첫 신문을 내던 초창기는 ‘이민자와 유학생’이 제법 많았고 ‘돈’이 돌아 사람들 삶에도, 표정에도 여유와 활력이 있었던 듯 한데, 지금은 참 많이들 무덤덤하고 팍팍해진 듯 합니다.
회원 3천을 헤아리던 실협이 와글댈 때는 생업의 열기가 넘쳤고, 한인회 집행부가 돌연 장소이전을 추진하자 ‘어떤 건물인데 팔아 먹으려느냐’며 들고 일어난 소동에는 동포들 패기가 달아올라 기자들도 바빴던 때였습니다. 갓 인쇄된 신문을 배포할 때면 “뭐 좋은 것 실렸어요?” “아이구 어려운 일, 고생도 많으시네” 하면서 반기던 분들, “우리 광고 하나 실어줘요”하며 적극적인 관심과 응원을 보내던 따스한 풍경이 그 사이 ‘넘쳐나는 인쇄물들‘까지 겹쳐 많이 달라진 듯 느껴지니까요.


하지만 지난 세월만큼 우리 모두가 진화하고 성장했으면 했지, 설마 거꾸로야 가겠습니까. 어쩌면 한층 성숙해진 것은 아닐지요. 다만 주변 세상을 둘러볼 때 예전보다 오히려 험해졌고, 흉흉해져서 우리들 한인사회도 덩달아 불안과 위축의 그림자가 드러워진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다민족사회의 일원으로 세계사회에 연결돼 있고, 배달민족으로 모국의 트렌드에 직결된 우리들의 예민한 존재 특성을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지난 연말 ‘역사는 과연 발전하고 진보하는지 모르겠다’는 의문을 던진 바 있습니다만, 지구촌의 근황과, 모국 한국의 세태에서 우린 그런 불안의 현실을 봅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들리는 소식은 살상과 인간파괴, 갈등과 차별과 적대, 탐욕과 위선 등의 표출입니다. 한마디로 암울 그 자체입니다.


지난 9년간 신문을 만들면서 지면을 장식하는 단어들의 체감빈도를 보면 실감합니다. 밝고 바른 소식, 아름답고 사랑이 넘치는 기사들로 ‘희망의 전령사’가 되겠다는 다짐을 늘 해왔지만, 도로 답답한 스토리들이 지면을 채우곤 합니다. 아무리 사람이 개를 물어야 기사거리라고는 해도, 세상이 바로가면 밝은 소식들이 늘어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권력과 명예에 탐닉하고 사리사욕에 매몰돼 부정과 불의에 기대며, 생명과 평화를 짓밟고 비정상이 떵떵거리는 가슴 아픈 일들이 늘어갑니다. 그래서 소위 정론직필이라는 언론의 양심과 상식에서 분통이 터지고 정의감이 기본인 기자정신으로는 혈기가 돋기도 하는 것입니다.
새해, 그리고 10년을 내다보며 시사 한겨레의 소망은 단 한가지, 모든 것이 ‘회복’을 향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비정상의 모든 것이 정상으로, 막힘이 뚫림으로, 퇴보가 진보로 회복되어 가기를 간절히 염원합니다. 그래서 다시 우리네 가슴과 한인 이민사회에도 흐림이 걷히고 원기와 활력이 되살아나기를 소망합니다.


올 한해 약자와 ‘을’들의 아픈 상처가 치유되고, 염치와 양심들이 돌아오며, 불의가 정의로 바뀌기를 바랍니다. 생각이 다르다고 욕하고 적대하지 말고 역지사지의 공존과 상생의 지혜를 되살렸으면 합니다. 민주정치도 남북관계도 제발 전진하고 풀리길 소원합니다. 교계에도 성도들 믿음이 회복되고 교회마다 초심의 회복과 부흥의 역사가 일기를 기원합니다. 온 세상이 교수들의 지적처럼 사슴을 말이라 우기는 ‘지록위마(指鹿爲馬)’에서 ‘정본청원(正本淸源)’의 제자리로 돌아가기를 간구합니다.
저희 시사 한겨레는 동포의 번영과 겨레의 미래를 생각하며, 성실한 보도로 따뜻한 신문의 길을 걷겠다고 나름 노심초사 해왔습니다. 미흡하고 역부족이었지만, 많은 애독자와 후원인사 여러분의 음덕에 이 아침 다시 또 용기를 냅니다. 올 한해 회복을 외치고 희망을 전하는 ‘회복과 희망의 전령사’로, 의롭고 선한 신문의 외길에 열정을 쏟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힘과 지혜를 부어주소서!

< 김종천 - 시사 한겨레 발행인 겸 편집인 >



[1500자 칼럼] 빚진 자의 몫

● 칼럼 2014. 12. 26. 18:42 Posted by SisaHan

오늘도 그 편지를 받았다. 12월에 들어서며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여러 자선단체들이 앞다투어 보내는 기부금 요청서, 그것은 평상시 잊고 지내온 이 사회를 위해 내가 한 일보다 받은 혜택이 더 많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만든다. 우송된 여러 단체 중 너더댓을 선정하여 작은 마음을 담아 보내는 일이 내 연례행사가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나마 한 해의 마무리로 내가 소속한 사회에 빚진 몫을 감당하고 나면 묵직했던 가슴이 한결 가벼워왔다. 이미 상품화되어 진정한 의미를 상실한 주인공 없는 크리스마스도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되었다.


오래 전, 어머니께서 암수술을 받으셨다. 담당의사는 초기 증세인데다 이미 80세 고령이시니 수술 후에 키모 대신 방사선 치료를 권했다. 토론토 다운타운에 있는 암 전문병원에서 1주에 세 번씩 한 달간 방사선치료를 받아야 했다. 당시 우리 삼형제는 모두 시외에 살고 있어 토론토에 계신 어머니를 모시고 다운타운에 있는 그 병원을 왕복하자면 꼬박 하루를 소모해야 할 형편이었다. 더구나 모두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으니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의 어려운 사정을 접한 담당의사는 암환자를 위한 자선기관(Cancer Society)을 소개해줬다. 그곳에서는 치료 스케줄을 검토한 후 쾌히 무료 픽업서비스를 약속해줬다. 환자의 치료를 돕기 위한 무료 픽업서비스라니, 말로만 들어온 그들의 봉사활동이 냉가슴을 녹였던 것이다.


방사선 치료기간 동안 그 단체에 속한 자원봉사자들이 어머니 아파트로 와서 병원에 모시고 갔다가 치료가 끝나면 다시 집으로 모셔다 드렸다. 영어를 못하는 어머니를 위해 이름이 적힌 피켓을 들고 매번 나타났기에 안심하고 모든 치료를 마칠 수 있었다. 그들의 픽업환자는 어머니 혼자만이 아니라 이곳 저곳 들려 다른 환자들도 여럿이었기에 어머니께서는 동병상련의 위로도 받으실 수 있었다. 이 일로 캐나다정부가 자식보다 낫다는 말이 헛말이 아님을 실제로 경험했다. 사실 캐나다에 살면서 의료보험 혜택을 받고 사는 것도 감사한데 이렇게 자원봉사자들의 활약이 사회 전반에 걸쳐 일사불란 하게 펼쳐지는 줄은 전혀 알지 못했으니 말이다. 더욱이 대부분의 운전봉사자들이 칠십이 훨씬 넘은 백발의 은퇴 노인들이었으니 신선한 감동을 받았다. 건강한 사회, 아름다운 사회 뒷면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세심한 배려와 숨은 희생이 있었던 것이다. 그 일은 나로 하여금 소극적이나마 기부문화에 동참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몇 년 전 모국을 방문했었다. 십여 년 만에 만난 친구 J는 물질에 대한 집착을 버린 사람 같았다. 자신이 아끼는 이웃을 위해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면 그랬다. 지인들은 그녀로부터 깜짝 선물을 받는 일이 잦았다. 어느 날 우연히 그녀의 손 지갑에서 작은 사각으로 접힌 지폐들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 아직 손주도 없고 장성한 두 아들뿐인데 이것을 무엇에 쓸 거냐고 물었다. 대답은 의외였다. 어느 장소에서나 쉽게 꺼낼 수 있게 미리 준비해 놓은 거란다. 출퇴근 길에서, 전동차 안에서 만나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건네주려고 가장 편리한 손 지갑 속에 챙겨놓고 다닌다는 나의 친구 J.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길조차 주지 않고 외면하고 지나가는데 유독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는 그녀에게서 훈훈한 사람냄새가 풍겨 나왔던 것이다. 근래에 와서 보편화된 해외여행도 한번 가보지 못한 그녀지만, 충만한 기쁨으로 옹달샘 같은 소박한 삶을 이어가는 모습은 결코 평범하다고 볼 수 없었다.


이웃들과 마음을 나누는 사랑과 평화의 절기, 크리스마스를 맞으며 새삼 그녀 앞에 부끄러움으로 선다. 나날이 나와 내 가족만을 챙기는 근시안적 사랑에 파묻혀 타인에게는 따듯한 눈길조차도 건네지 못하는 메마른 내 얼굴이 확대돼오니 말이다. 이 시간만이라도 촉촉하고 넉넉한 사랑을 향해, 타오르는 열망을 가득 품는다. 더한층 아름다운 새해를 꿈꾸며.

< 원옥재 - 수필가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원, 전 회장 >



역사는 발전하고 진보하는가? 올 한해 끊임없이 의문을 가져온 질문이다.
2014년의 대미를 맞이하면서 다시 묻게 된다. “지난 1년 동안 세상은 발전하고 진전을 이뤘는가?”. 불행히도 플러스 마이너스를 따져본다면 전혀 진전이 아닌 퇴보와 퇴행의 한 해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원시 이래 물질적 풍요와 과학의 발달, 질병치료와 생명연장, 인권신장 등 모든 부분에서의 발전을 인류역사의 진보라고 표현한다면, ‘시간과 역사발전은 정비례한다’는 계몽주의적 시각은 맞다.


그러나 학문적인 역사발전의 의미를 떠나 단순하게 우리들 삶의 가치로, 나아가 소시민들의 생활철학-, 아니 그냥 생활감각에서 조망해 보자. 가령, 자연과 벗하고 싸운 원시적 삶에서 누린 심적·정신적 평안과 행복감이 오히려 지금의 그 것보다 훨씬 나았다는 말들을 한다. 그렇다면 과연 ‘발전’의 소산들인 요즘의 풍요와 편리와 정치·사회의 현대적 시스템들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불안과 스트레스들을 인류사의 진보로 인한 혜택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단순한 예로 저 네팔이나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지구상에서 행복지수가 가장 높다는 말을 떠올려보라. 귀가 아프게 듣는 “기름진 음식과 정크 푸드류를 먹지말고 ‘원시인처럼’ 채소와 과일을 즐기라”는 건강비결을 보아도, 현대 우리의 처지가 결코 발전이나 진보한 삶이라고 큰소리 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간단히 말해 『사람답게, 마음 편하게, 얼마나 더 행복감을 느끼게 되었느냐』는 척도를 인류사의 진보와 발전의 가치로 삼아보자는 이야기다. 그렇게 본다면, 올 한해는 그야말로 뒷걸음질 뿐인 한해가 아니었나 하는 답답함과 회한이 스칠 뿐이다. 그것도 사람들이 발전과 진보의 결실들로 자랑하는 가치기준과 정치·사회·문화·과학 등의 산물(産物)에 의해 퇴행이 두드러졌으니, 그야말로 자승자박이며 자업자득이라고 해야할까. 구체적으로는 전쟁과 테러, 감시와 압박, 갈등과 적대가 한층 심화된 사실들만 보아도 그렇다.


지구촌을 돌아보면, 에볼라라는 공포의 질병이 인류 의술의 한계와 불안을 통감하게 한 것을 비롯해, 정치체제와 힘의 대결에서 이른바 ‘신냉전’기류가 먹구름으로 밀려왔고, 테러가 일상화 되다시피 하면서 IS라는 기형적 세력이 맹위를 떨쳤다. 스노든의 폭로로 가시화된 감시와 감청이 더욱 폭넓고 교묘하게 사생활을 옥죄는 현실은 사람들을 신경쇠약으로 몰아갔다. 인간성을 말살하는 비인간적 고문이 ‘인권 선진국’ 미국에 의해 자행됐다는 배신감은 친미주의자들의 뒤통수를 쳤다.
한국은 어떤가. 충격적인 세월호 참사와 그 이후의 행태는 국가와 정치의 존재의의에 의문부호를 던졌다. 오만방자한 지도자의 불통과 위선에, 또한 비선들의 권력 주무르기에 모두가 피곤하고 나라는 방황했다. 국가기관의 정치개입과 권력 시녀화, 곡학아세 언론의 횡행에 국민들은 두통과 심통을 겪으며 분열하고 다퉜다. 국민 권익의 수호자요 민주주의의 보루여야 할 사법기관 마저 권력의 입김에 놀아나는 실망과 유전무죄·권력만능의 현상들, 부익부 빈익빈에 졸부들의 꼴사나운 작태들이 소시민과 근로자들의 가슴을 치고 눈물을 쏟게 했다. 밖으로는 극으로만 치달은 남북관계과 외교력 부재까지….


다양과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이견과 비판을 질시하며 차별하고 적대하는 중병의 고질화에 국민들은 짜증나고 근로자들은 고통스럽고, 나라는 찢기고 대립했다. 심지어 그 중증의 전염성이 이민사회에도 전염돼 심하게 발호할 정도에 이르지 않았는가.
그렇게 한 해가 흘러갔다. 그래도 덩달아 눈물 흘리고 아파하고 외친 사람들, 더 많은 소리없는 함성들에게서나마 위안을 얻을까.
이제 이 어둠에 다시 송년의 촛불을 켜며, 제발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고 상생하며, 마음도 정신도 화평하게, 모두가 행복한 세상으로 발전·진보하는 새 날들이 오기를 간절히 기원해본다.


< 김종천 편집인 >



[사설] 뻥 뚫린 원전 보안, 커지는 불신

● 칼럼 2014. 12. 26. 18:38 Posted by SisaHan

한국내 원자력발전소를 관리하는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의 내부 문서가 해킹당해 연일 인터넷에 공개되고 있다. 문서를 해킹한 해커는 고리 1·3호기와 월성 2호기에 대한 사이버 테러까지 경고하고 있어, 국민 불안이 커지고 있다. 정부는 최대한 신속하게 대응해 해킹 실상을 밝히고 범인을 검거해야 할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것은 한수원의 안일하기 짝이 없는 행태다. ‘원전반대그룹’이라고 자처하는 한수원 전산망 해커는 15일부터 21일까지 무려 네 차례에 걸쳐 해킹한 자료를 인터넷에 올렸다. 첫날에는 블로그와 트위터를 통해 전체 임직원 개인정보가 담긴 엑셀파일 등을 공개했다. 당시 해커는 원전 기밀을 유출하겠다는 협박 메시지도 띄웠다. 그러나 한수원은 이틀이 지난 17일에야 정보 유출 사실을 알았다. 또 18일 2차로 월성·고리 원전 내부자료 등이 공개된 뒤에야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그러면서 한수원은 “원전 설계도면과 같은 기밀서류가 유출된 것은 아닌 것으로 파악된다”고 밝혔다. 늑장 대응에다 사실 은폐라 아니 할 수 없는 행태다. 또 19일에 이어 21일에는 네 번째로 한수원을 조롱하는 글과 함께 원전 도면을 포함한 내부문서 4개의 압축파일이 공개됐다. 해커가 끊임없이 한수원을 조롱하며 협박을 가하고 있는데도 한수원은 뭐 하나 제대로 대응하는 것이 없는 양상이다.


한수원은 이번 해킹 사태 말고도 과거 원전 비리와 원전 가동 중단으로 전 국민의 원성을 산 바 있다. 지난해 원전에 시험성적표를 조작한 불량 부품을 사용한 사실이 밝혀졌고, 이 과정에서 뇌물 상납 구조가 드러나 충격을 주었다. 그러고도 한수원은 원전의 잦은 고장과 내부의 허술한 보안의식이 끊임없이 도마에 올랐다. 9일에도 이미 악성코드 유포로 사이버 공격을 당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그런데도 한수원은 안일한 대응만 계속했다. 국민 불신이 극에 달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이번 해킹을 주도한 것으로 보이는 해커는 ‘한수원 악당들은 원전을 즉시 중단하고 갑상선암에 걸린 1300여명의 주민과 국민에게 직접 사죄 보상하라’고 요구하는 글을 올렸다. 이런 내용으로 보았을 때 해커가 원전의 위험성을 알리려는 차원에서 사이버 소동을 벌인 것이라고 추정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방식이 너무나 위험하고 자칫 사태가 잘못 진전되면 원전의 기밀이 알려져 2차, 3차 범죄로 이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정부는 서둘러 범죄의 진상을 밝히고 범인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