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사이버 망명

● 칼럼 2014. 11. 25. 19:06 Posted by SisaHan
한국에서 일어나는 대개의 일이 그러하듯, 한 때는 마치 큰 일이 벌어질 것 처럼 난리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이 시점에 조용히 잊혀져가고 있는 일들이 많다. 그 중 하나가 ‘사이버 망명’이다. 요즘 한국에서는 신조어랄까 새로 생기는 단어들이 많다. 그리하여 떠나 와 사는 사람들에게는 얼핏 대하는 단어의 뜻을 몰라 어리둥절할 때가 많다. 맨 처음 사이버망명이라는 말을 들었을때, 사실 어리둥절했다. 망명이라는 단어의 뜻은 알겠는데, 앞에 사이버라는 단어가 생소했기 때문이다. 얼핏 사이버라는 나라로 망명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망명이라면 흔히들 정치적인 망명을 의미한다. 부득이한 상황에서 타의에 의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른 나라로 피신해 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망명이라는 단어에는 무게가 있고,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비장해지기도 한다.

한국사람들이 스마트폰 같은 휴대전화기로 카카오툭을 사용한다고 한다. 전화기로 무료 통화, 무료 장거리 전화를 사용할 수 있으며, 문자메시지 그리고 사진 전송까지 가능하여 가장 많이 사용하는 소통의 수단이라고 한다. 이곳 캐나다에서도 다운로드를 받아 쓰고 있는 분이 있는데, 그렇게 편리할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이 빠져 나가기 시작하여 ‘Telegram’이라는 독일회사로 사람들이 옮겨가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한국적의 회사에서 독일국적의 회사로 소통수단을 바꾼다는 뜻인데, 망명이라 한다면 좀 지나친 표현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 망명까지의 어떤 심각한 갈등도 없이, 잠시의 불편을 참지 못해, 몇 분 다운로드 받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망명이라면….

일의 발단은 그랬다. 대통령께서 인터넷 상에서 더 이상 자신을 모독하는 일은 못참겠다고 하시자,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검찰에서 사이버 감시단을 만들고 업계 대표들을 불러 들였다. 그 사실이 알려지자 국민들의 반발이 심해졌다. 그러자 검찰이 개인적인 소통수단인 카톡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공개사이트를 말하는 것이라 해명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적인 대화도 감시당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래서 비교적 보안이 철저한, 개인 대화의 내용이 비밀에 부쳐지고, 나중에라도 검찰의 조사를 받지 않을 수 있는 외국회사인 텔레그램으로 옮겨가는 것이었다. 그것이 장난이 아닌 것이 한동안 하루 몇 백만 명이 옮겨가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었다. 텔레그램의 독일 담당자는 갑자기 한국사람들이 고객으로 몰려오는 통에 당황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발빠르게 움직여 한국어 능통자를 구하고 그리고 한글판을 개발해냈다니…. 그리고 빠져들어 온 한국고객들 때문에 별 이름도 없는 회사가 크게 성장했다는 것이 좀 어이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와 반대로 참 우수한 개발품인 카카오툭 한국 본사에서는 고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심각한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사실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검찰이 자신의 개인적인 대화 내용을 볼 수 있다는 말인데, 대부분의 한국민들에겐 상관이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무슨 중대한 비밀 대화들을 한다고, 또 정부로서 그게 과연 기술상으로 실현 가능할지도 의심이 든다. 정부로서도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일부 의심가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표현의 자유와 사생활의 침해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데, 그것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누구나 누려야 하는 권리이다. 창조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여건이기도 하다. 생각을 자유스럽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무엇보다 먼저 조성돼야 창조적인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을까? 아무튼 한국의 남북이 사상으로 갈린 특수한 역사적인 배경 때문인지, 그로 인한 피해의식 때문인지 많은 사람들이 감시받는 것을, 아니 가능성도 두려워하고 있다. 아마 자신의 잘못이 아니더라도 친구 또는 다른 사람의 잘못 때문에 얽혀 들어가 생활에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생기는 것을 두려워하는지도 모른다. 만약에 감시를 당하는 일이 생긴다면, 왜 기본권을 침해하는냐고 항의하기에 앞서 딴 나라의 프로그램을 쓰겠다고 쉽게 돌아서서 우리 회사를 아무런 미련도 없이 버린다는 것도 그렇다. 한국의 대표적인 IT기업인 카카오톡이 그렇게 쓰러질 리도 없겠지만, 쓰러져야 한다면 너무도 억울한 일이다. 한국의 카카오톡이 페이스 북이나 트위터를 넘는 소통의 기구로 발전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램이다.

어쩌면 이번 사이버 망명 소동은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인지 아니면 일종의 해프닝으로 없었던 일이 되었는지 나는 모르겠다. 마치 찻잔 위의 태풍처럼 잠시 불고 갔는지? 왜냐하면 이제 한국신문이나 인터넷 상에서도 더 이상 사이버 망명이라는 말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마치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투다. 비록 가상의 공간이지만 사람들은 독일까지 망명갔다 벌써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


[사설] 문학의 사명과 작가회의 40돌

● 칼럼 2014. 11. 25. 19:04 Posted by SisaHan
한국작가회의가 18일로 창립 40돌을 맞았다. 파란과 곡절의 지난 세월을 거쳐 작가회의는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문학단체로 성장했다. 이런 뜻깊은 날을 맞아 축하의 박수를 보내기에 앞서 엄혹한 시대 현실을 둘러본다.
 
작가회의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가 태어난 1974년 11월18일은 박정희 유신체제가 긴급조치로 온 나라를 질식시키던 때였다. 그날 고은·백낙청·염무웅·박태순·황석영 등 문인들이 광화문에서 기습시위 벌이듯 모여 ‘문학인 101인 선언’을 발표했다. “오늘 우리 현실은 민족사적으로 일대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로 시작하는 이 선언은 긴급조치로 구속된 문인·지식인·종교인·학생의 즉각 석방, 언론·출판·집회·결사와 신앙·사상의 자유 보장을 촉구했다. 그렇게 정치적 폭압을 뚫고 태어난 자실은 1987년 6월항쟁 직후 민족문학작가회의로 거듭났으며, 2007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민족문학작가회의 정신과 역사를 온전히 계승”하는 한국작가회의로 이어졌다.
이 40년 동안 작가회의 문인들은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인간화를 위해 맨 앞에서 싸웠다. 문학은 저항의 언어였고, 희망의 언어였다. 특히 70년대와 80년대의 반독재 민주화 운동 시기에 문인들의 글은 시대를 고발하는 가장 큰 함성이었고 시대의 환부를 도려내는 날카로운 메스였다. 겨레의 화해와 남북의 통일을 위해 온갖 탄압을 무릅쓰고 앞장선 이들도 문인들이었다. 작가회의는 펜으로 시대의 어둠을 헤쳐온 우리 문학정신의 집성체라고 할 것이다. 다만 우리 사회의 절차적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후 작가회의가 문학이 본디 있어야 할 자리에서 벗어나 지나치게 사적이고 소소한 이야기에 한눈팔지 않았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그런 점에서 작가회의 40돌에 젊은 작가들이 문학갱신을 다짐하고 나선 것은 반갑고 고무적이다. 김근·김경주·진은영 시인이 대표 집필한 ‘젊은 문학 선언’은 “지금 우리 문학은 작품 속에서 인간을 버렸다”며 인간 고통을 고발하는 데 게을렀던 문학에 대한 준열한 자기비판을 감행했다. “남쪽 바다에서 침몰한 것은 어쩌면 우리가 인간이었다는 증명인지 모른다”는 젊은 작가들의 언어는 절박하고, ‘문학의 유일한 존재이유는 기억하고 질문하는 데 있다’는 작가들 다짐은 절실하다. 이 다짐이 우리 문학의 새로운 길을 열 수 있기를, 작가회의가 현실과 맞붙어 인간성을 드높이는 문학 고유의 사명을 다하는 데 튼튼한 진지가 되기를 바란다.


[사설] 국민과 국회를 무시하는 FTA협상

● 칼럼 2014. 11. 25. 19:03 Posted by SisaHan
중국에 이어 뉴질랜드와의 협상이 타결돼 14번째 자유무역협정(FTA)을 맺게 됐다. 나라 수로는 모두 52개국에 이른다. 정부는 관세를 물지 않거나 낮게 물면서 교역을 하는 ‘경제 영토’가 대폭 늘어나게 됐다며 자랑한다. 하지만 협정 내용은 물론, 협상 진행방식을 보면 정부의 지나친 비밀주의 탓에 국민 대표인 국회마저 구경꾼 처지로 전락하고 만 게 현실이다. 시쳇말로 무시와 ‘봉’ 취급을 받고 있다.
자유무역협정은 산업과 집단별로 이해관계가 크게 엇갈리는 결과를 낳기 마련이다. 장기적으로는 나라 경제에 긍정적일 수 있지만 단기와 중기에 걸쳐서는 꼭 그렇지만도 않다. 농업과 농민 등 경쟁력이 떨어지는 산업과 집단이 집중적으로 손실을 볼 수 있다. 이는 그간의 경과가 잘 말해준다. 그런 만큼 정부가 전체 국민과, 피해가 예상되는 집단에 협상 진행과정을 제때에 알리고 의견을 듣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적어도 국회에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정부는 “진행중인 협상”을 이유로, 국회 소관 상임위원장의 자료 제출 요구에 성실하게 응하지 않았다. 시간이 꽤 흐른 뒤 내놓은 자료조차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달랑 200자 원고지 3장 정도의 분량에 뻔한 답변을 했다. 상임위원장한테 이럴진대 일반 의원들이야 더 말해 무엇할까 싶다. 이런 상태에서 통상절차법에 따라 의원들이 협상과 관련해 걸맞은 의견을 제시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상대방과 협상중인 내용이 알려지면 불필요한 논란을 낳고 자칫 협상이 깨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설령 그런 면이 있다고 해도 정부의 태도는 납득하기 어렵다. 협상은 정부가 알아서 잘할 테니 국회와 국민은 결과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니, 민의의 무시가 지나치다. 정부는 협상 내용이 일부 공개돼 논란을 빚더라도 그것이 결국 협상력을 높이고 국익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협정으로 손실이 예상되는 집단의 의견을 충실하게 듣고 협상에 반영하는 것은 무엇보다 앞서야 할 원칙이다. 그런 노력을 해야 한-미 자유무역협정 타결 이후 빚어진 것과 같은 사회적 갈등의 분출을 줄일 수 있다.

 

[칼럼] 과두정치, 이제 끝내야 한다

● 칼럼 2014. 11. 25. 19:02 Posted by SisaHan
한스디트리히 겐셔는 1974년부터 1992년까지 무려 18년 동안 독일의 외무장관을 지낸 전설적인 정치가다. 사민당 헬무트 슈미트 정부에서 8년, 기민당 헬무트 콜 정부에서 10년간 활약했다. 겐셔가 이렇게 유럽 최장수 외무장관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대표였던 자민당이 연정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1949년 서독이 세워진 이후 지금까지 65년 동안 최장기 집권당이 소수당인 자민당이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다. 40%대의 득표율을 가진 거대 정당인 기민당과 사민당 사이에서 5~10%의 득표율을 가진 자민당은 늘 캐스팅보트 구실을 했고, 이들과 번갈아 연합정부를 구성하며 무려 50년 가까이 집권했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자민당이 한국에 있었다면 집권은커녕 정당으로서 존재할 수도 없었으리라는 사실이다. 지난 65년 동안 자민당은 지역구에서 단 한 명의 의원도 당선시키지 못했다. 자민당 의원은 전원이 정당의 득표율에 따라 배분되는 정당명부 비례대표 의원이었다.
오늘날 한국 정치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 위기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것은 ‘대의’(representation) 위기다. 한국 정치는 국민의 의사를 대변하지 못하고, 오히려 왜곡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잘못된 선거제도가 문제다. 지역구에서 다수 득표자 1인을 뽑는 단순 소선거구제는 민의를 왜곡하는 악명 높은 제도다. 생각해보라. 국회의원 선거에서 평균 투표율을 60%, 당선 득표율을 40%로 가정해보면, 전체 유권자 대비 당선자가 얻는 득표는 25% 정도에 불과하다. 당선자는 25%의 득표를 가지고 100%의 국민을 대의한다. 이처럼 한국 정치는 1/4 대의정치다. 나머지 3/4 국민의 의사는 무시된다. 그러니 대의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할 리 없다.
여기서 자라난 것이 현재의 과두정치 체제다. 한국의 거대 양당은 1/4 대의정치, 승자독식 정치, 민의왜곡 정치의 최대 수혜자다. 이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선거에서 자신의 정치적 의사가 반영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기권하거나 최악의 정당을 저지하기 위한 ‘차악투표’를 한다. 그 수혜는 또다시 거대 양당한테 돌아가고, 대의의 왜곡은 또 한번 심화한다. 이런 악순환이 한국 정치 위기의 본질이다.
사실 한국 정치의 기본구도는 보수정당과 진보정당의 경쟁도, 우파와 좌파의 대결도 아니다. 그것은 보수언론과 기득권 세력이 마치 지금의 질서가 공정한 경쟁의 결과인 양 보이기 위해 꾸며낸 ‘거대한 기만’에 불과하다. 한국 정치의 본질은 여야로 불리는 두 기득권 세력이 결탁하여 권력을 분점하고 있는 과두정치다. 따라서 정권이 교체된다 해도, 사회의 구조적 변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울어진 운동장은 여당과 야당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과두지배세력과 미래의 개혁세력 사이에 있다. 야당은 한국 정치의 을이 아니라 영원한 갑이다. 여야의 차이는 권력을 6:4로 분점한 갑인가, 4:6으로 분점한 갑인가의 차이일 뿐이다.
단순 소선거구제가 낳은 과두정치의 폐해는 크다. 대의의 왜곡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적 무관심과 무력감을 심화시키고,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의제를 대변할 정치세력의 등장을 원천봉쇄한다. 따라서 현재의 과두정치 아래서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는 불가능하다.
과두정치를 끝내지 못하는 한 대한민국에 희망은 없다. 변화의 첫걸음은 선거제도 개혁이다. 국민의 의사를 온전히 대의할 수 있는 정당명부 비례대표제가 답이다. 
<김누리 - 중앙대 교수 전독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