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역지사지의 인격과 국격

● 칼럼 2014. 11. 25. 19:00 Posted by SisaHan
간암 수술의 명의 장기려(1909~1995) 박사가 타계한 지 내년이면 20년이 된다. 그의 인격의 향기가 세월을 넘어 오늘의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그는 평생 맑고 인자한 맘과 무소유의 청빈한 삶을 살고 간 한국의 슈바이처다. 1950년 12월 한국전쟁이 중공군 참전으로 다시 치열해지던 때, 모친과 아내와 다섯 자녀를 남겨둔 채 평양에서 야전병원 구급차를 빌려 타고 중학생 둘째 아들과 남하한 지 45년 만에 이산가족의 한 사람으로서 타계하셨다.
그에겐 초인적인 봉사의 삶을 기려서 막사이사이 사회봉사상(1979)과 국민훈장 등이 주어졌다. 그러나 그 모든 공적과 명예 훈장들도, 역지사지하는 그의 고운 맘이 드러나는 언행 앞에선 모두 빛을 잃고 우리들의 양심은 숙연해진다. 그의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품성이 어쩌면 우리 민족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인지도 모른다.
 
그는 북에 남기고 온 가족을 애타게 그리워했다.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면서 재회의 날을 기다렸던 그는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당신인 듯하여 잠을 깨었소”라고 보낼 길 없는 편지에서 여든살 순정을 밝힌 순애보적 남편이었다. 제자들 중 미국에 이민 간 많은 의사들이 주축이 되어 은사님의 북한 가족 상봉 기회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은사님에게 미국의 제자들은 준비된 평양 방문 기획을 전달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1000만 이산가족 모두의 아픔이 나만 못지않을 텐데 어찌 나만 가족 재회의 기쁨을 맛보겠다고 북행을 신청할 수 있겠는가?”라는 답신이 미국 제자들에게 갔다. 그래서 장기려님은 생전엔 끝내 고향 방문과 가족 상봉을 이루지 못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5년 후 아들 장가용 교수가 이산가족 자원봉사 의료요원 자격으로 2000년 8월 고향을 방문하게 되었다.
마침내 아들은 평양에서 어머니(당시 89)를 상봉하고 생전에 전달 못했던 아버지의 절절한 순애보 편지와 유품을 전했다. “어머니를 부둥켜 안고 젖가슴을 만진 뒤에야 어머니를 만났음을 실감했다”고 환갑도 훨씬 넘은 아들의 모자 상봉 소감의 인터뷰 기사는 신문 독자들의 눈시울을 적시게 했다. 위 실화는 이산가족 중에서 발생한 가족사의 한 작은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의 우리 사회를 이렇게 삭막하게 만들고, 남북관계를 세계인들 앞에서 이렇게 부끄럽도록 만드는 근본 원인은 물질이 부족하거나 군사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이유는 오직 한가지, 우리 모두가 성산 장기려님이 보여준 인간성의 역지사지의 능력을 상실했거나 마비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역지사지할 수 있음은 놀랍고 신비한 인간다움의 특징이다. 역지사지 능력이 곧 휴머니즘의 본질이다. 고등동물에게서 우리는 감정의 교류 같은 것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아예 입장을 바꾸어서 상대편의 자리와 처지에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한다는 것은 인격적 성숙 단계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역지사지의 능력은 사람이 높은 학력을 가졌다거나, 사회적 신분이 높다거나, 교육자나 종교인이라고 해서 당연하게 가능한 인간 능력이 아니다. 
역지사지 행위에서 처지를 바꿔 생각한다(思)는 것은 이해한다(解)는 것인데, 자기비판과 자기성찰의 의지를 전제한다. 언더스탠드(understand)라는 영어단어가 의미하듯이, 상대편 자리에 내려가 아래에 설 때 이해가 가능하다. 역지사지는 상대방에 관한 정보지식만으로는 안 된다. 열린 감성과 소통 의지, 타자 존재성과 차이의 존중, 생명의 연대성 자각, 그리고 인간의 본능적 이기심에 대한 연민의 마음까지 총동원될 때 발현되는 능력이다.
우리 사회의 온갖 문제 발생도 처지와 입장을 바꾸어서 상대편을 이해하는 능력이 거의 마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경제 민주화가 물 건너가고, 사회에서 각종 갑을 계약관계가 항상 분쟁거리가 되고, 대북전단 살포에 대한 정부의 방조 때문에 남북고위급접촉 외교가 무산되고, 주권국가 국민으로서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하는데 한-미 방위조약 관련해서 ‘전작권’ 환수 시기를 정부가 쉽게 연기해 버리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역지사지하는 인간 품성을 상실했기 때문은 아닐까? 오로지 생존보존과 자기번영만 위해 고층건물 사닥다리 오르는 경쟁적 삶을 당연시하는 세상 풍조와 그것을 정당시하는 통치철학 때문이다.
 
그러나 역지사지 능력이 우리 세대에 온통 상실되어 버리지 않았다는 증거를 좋은 방송드라마에 몰입하여 공감하는 시민들의 시청자 반응 현상에서 확인한다. 예를 들면, 요즘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얻고 있는 방송드라마 <미생>에 대한 호평과 시청자들의 반응 능력에서 인간의 역지사지 능력은 겉으론 은폐되어 있을 뿐 건재하다는 것을 재확인한다. 
역지사지 능력과 작은 실천이 곧 그 사람의 인간품격과 그 국가사회의 격을 결정한다. ‘갑을관계’에서 갑이 을의 입장을 역지사지할 수 있을 때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 갑이 을 자리에 내려와 뒤틀린 생명질서를 아픔으로 느끼고, 고통을 분담하면서 고통 원인을 함께 해결할 때, 갑과 을은 세속 한복판에서 함께 초월을 경험한다. 그러한 초월 경험은 인간성을 되찾은 기쁨, 자유, 행복한 뿌듯함을 갑·을 모두에게 선물한다.
< 김경재 목사: 한신대 명예교수 >


[1500자 칼럼] 솔로몬과 여로보암

● 칼럼 2014. 11. 18. 17:52 Posted by SisaHan
어쩜 한 편의 설교를 쓸지도 모르겠다. 제목의 두 이름은 성경에 나오는 이름이고 서로가 연관이 있는 사람이다. 솔로몬이 아버지 다윗의 뒤를 이어 왕이 되고 누구나 다 아는 것처럼 지혜의 왕으로서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나 그의 재위 말년에 그는 이방 나라와 통혼하고 많은 처첩을 두었으니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을 범죄케 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솔로몬으로서는 자신의 재위시나 사후에 나라를 안정시키는 비결이 주변 국가와 좋은 관계를 이루고 사는 것이며 그것은 양국간에 사돈 관계를 맺으면 더욱 안전할 것이라 보았을 것이다. 그 결과 이방 여인들이 가지고 온 우상으로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섬기는 나라가 여호와를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국가가 되었다.
 
내치에 있어서는 자신의 신하 가운데 여로보암이 문제였다. 그는 솔로몬에게 충직한 신하였고 백성들의 신임을 받으며 개인적으로 하나님에게서 장차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까지 받았다. 이후 왕위의 두려움을 느낀 솔로몬이 그를 죽이려 했으니 이것을 피해 여로보암은 애급으로 달아난다. 솔로몬의 사후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되자 애급에서 돌아와 백성들과 함께 르호보암에게 와서 솔로몬 당시에 가졌던 부역과 세금을 감면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거절 당하자 백성들과 함께 나라를 세웠으니 그것이 북왕국 이스라엘이다. 
북왕국의 시조가 된 여로보암 역시 나라를 세우고 보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의 통치하에 있는 백성들이 비록 나라는 갈라졌으나 민족의 절기인 유월절 같은 때 제사를 위해 성전이 있는 남왕국의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면 나라가 무너질 것이라는 불안감이 그에게 생겼다. 그래서 대안과 같은 꼼수를 부렸으니, 절기도 바꾸고 자기가 만든 금신상을 단과 벧엘에 두고 꼭 예루살렘에 가서 제사드릴 필요 없이 여기에서 제사를 드려도 같은 제사가 된다고 역설한다. 또 그 제사를 집례해야 할 제사장도 레위 지파 사람이 아닌 평범한 사람으로 세웠으니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저질렀던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 나오는 두 사람의 이야기다. 여기서 문제는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을 크게 신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솔로몬의 경우 하나님을 그렇게 신뢰하고 지혜로웠던 왕인데, 어찌 그의 지혜가 세상적인 방식으로 나가 이방 여인들과 통혼함으로 우상을 섬기는 나라를 만들었으며, 자신의 신하를 믿지 못해 박해하다 죽이려 한 결과 그의 나라가 갈라지고 말지 않았는가. 
여로보암의 경우도 그렇다. 하나님이 그를 세우셨고 그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조건 그대로 여호와만을 섬기는 왕이 되었더라면 나라는 그냥 정상적으로 잘 돌아갈 수 있었을 터인데, 인간적인 방식을 도입하여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났을 때 그에게 주어진 것은 후손들이 모두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았다는 악한 오명을 남기게 된 것이다. 
솔로몬과 여로보암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을 버리고 인간의 수단과 방법을 쓰다 실패한 왕들이고 오명을 남긴 자들이 되었다. 한국영화 ‘명량’이나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보면서 느낀 것도 바로 그것이다. 지도자는 신하를 믿어야 하고, 지도자는 어떤 꼼수로 위기를 모면하려 하지 말고 진실되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특히 그것은 신앙인에게는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오늘날이 과거 시대와 많이 다르다고 해도 성경적인 삶에서 달라져서는 안된다. 그런데도 자신의 위치나 주변의 여건이 만족스럽지 못하고 일들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세상적인 방식, 인간적인 어떤 방식이나 이벤트를 통해 성도들의 마음을 모으고 교회를 이끈다면 거기에는 또 다른 폐해가 생기는 것이다.

< 김경진 - 토론토 빌라델비아 장로교회 담임목사 >

 

[한마당] 자존심에 자신이 없을 때

● 칼럼 2014. 11. 18. 17:51 Posted by SisaHan
이민을 결행한 사람들의 많은 사연들이 있겠지만, 조국에 대한 실망과 자존감이 무너진 경우도 드물지 않다. 아이들이 억울하게 불에 타죽고 수학여행 길에 수장되는 참사는 다른 나라에서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발단이 된 배후의 부패와 비리의 커넥션을 들춰내 원인을 명백히 규명하고 재발을 차단하려는 줄기찬 노력이 허사로 돌아갈 때, 지친 부모들은 “이 땅을 떠나겠다” 고 절규했다. 억울함이 없는 사회, 생명이 최우선인 나라, 진실과 정의가 바로 서고 승리하는 국가를 소원하건만, 아무리 용을 써도 물거품이 되고 외면당하고 결국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만다면, “우리 후손들은 어떻게 키우나” 절망하며 내 나라 내 조국을 향한 애정이 사그러들 수밖에 없다. 
반만 년 유구한 역사에 자부심을 가진 한국인으로 해외에서 쳐다보는 시각과 인식에 당황하고 불쾌할 때가 있다. 중국인 혹은 일본인이냐고 묻는 것은 흔하다해도, 아예 중국의 오랜 속국이 아니었느냐는 ‘왜곡된’ 동아시아 역사관을 가진 사람들을 만날 때다. 그게 아니라고 적극 우겨보지만, 찜찜한 것은 한국 역사에서 상당기간을 중국에 조공바치며 살아왔으니, 왜 우리 조상들은 고구려의 기상을 이어받지 못하고 사대(事大)에 빠졌던 것인지, 어쩔 수 없이 자존이 자신을 잃곤 한다.
 
그런데 그 사대의 망령은 지금도 여전히 설쳐대고 있다. 세계 15위권 경제대국이라는 이 시대의 위상은 어디로 가고… 전시작전통제권, 이른바 ‘전작권’ 반환을 미국에 사정사정해서 무기 연기시킨 일은, 새삼 국민적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다. 사실상 포기나 다름없는 ‘역사적 사건’의 파장이 나라 안팎으로 번지면서, 사대의 수준을 넘어 군사주권을 넘겨버린 ‘영혼없는 정권’이라는 힐난이 이어진다. “차라리 미국의 주로 편입해 버려라” 라고 미국인들이 손가락질을 해댈 정도니, 나라 꼴, 국민들의 얼굴이 말이 아니다. 그렇잖아도 대미일변도 외교와 의존으로 미국에 예속된 나라라는 현대판 사대주의 논란이 가슴 아픈데, 전작권을 갖다 바치고 그 것도 수십조 원어치의 무기를 사줘가며 ‘달성’했다고 의기양양해 하는 국방책임자들은 두뇌구조가 어찌된 걸까, 역시 조공을 바치며 왕권을 지켰던 고려나 조선의 피가 흐른다고 자부할 텐가.
 
순진한 국민들은 월드컵 축구가 승승장구할 때 ‘대~한민국’을 외치며 가슴 뿌듯해 했고, LPGA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린 골프낭자들에 박수를 보내면서 조국을 대견스레 생각한다. IT와 스마트폰과 자동차와 조선 강국에, 한류가 각광받는 다이나믹한 나라, 한때는 OECD가입을 내세우기도 했는데, 이젠 G20소속 국가라고 뽐내는 정권에 늘 맞장구 쳐준 국민들이다.  
번지르르한 겉모습의 이면에 부끄럽게도 멍들고 썩고 문드러진, 줏대없는 속살이 감춰져 있는 것을 몰라서인가. 아니다. 그래도 내 나라 내 조국, 미워도 내 핏줄이라고 삭였다. 일제와 일본을 타도하며 극일을 외치면서도 친일세력이 득세하는 현실을 참았다. 국가기관의 불법개입으로 선거민의를 왜곡했어도 반성이나 당선 무효는 커녕 더욱 강권을 발동하는 집권세력도 눈 감았다. “정치활동이지만 선거개입은 아니”라는 궤변으로 정부 비호에 급급한 사법부가 건재한 몰꼴도, 그러려니 친다. 어디 그게 한국만의 특수현상인가. 여전히 지구촌 구석구석에는 더 못한 나라들이 많으니까. 
그런데, 그 정도는 약과였다, 군권(軍權)을 남의 나라에 바치고도 좋아하는 습벽을 제대로 된 나라라면 이해할 수 있는가. 국방비를 30배 이상이나 더 쓰면서도 북한에 열세라고 기가 죽어있는 장군들은 분명 ‘똥별’들이라고 지탄해야 맞다. 자존심 깔아뭉개고 군권을 줬으니 식민이나 예속이 아니냐는 규탄도 틀린 말이라고 할 수가 없다.
 
그런데 더욱 기가 막힐 일은, 그런 중대한 결정을 국민과 상의하는 공론화 과정도 없이, 심지어 국무회의에서도 전혀 논의한 바 없이 정부 수뇌 몇몇이서 결정해 뚝딱 해치웠다는 것이다. 그리곤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의 동의를 구할 일이 아니라고 우긴다. 대통령은 반드시 회수하겠다는 공약을 손바닥 뒤집듯 깨버리고도 일언반구 말이 없다. 국민을 무시하고 나라를 ‘내 것이니 내 마음대로’ 라고 착각하는 오만과 독선의 극치가 아니라고 할 수가 없다. 
군권을 청국에, 러시아에, 또 일제에 맡기고 정권만을 지키려다가 나라가 망한 조선말의 비극이 불과 1백여년 전이다. 여전히 사대와 외세의존의 두뇌구조가 맹위를 떨치니, 그야말로 국제 호구요, 과대 포장된 허상을 그대로 드러낸 민낯에 한국사람 낯이 뜨거울 뿐이다. 
갈수록, 모든 면에서 예속되어 있고, 더 예속되어 가는 나라라면 사실상 미국의 식민지가 아니냐고 우기는 말에 어떻게 변명할 생각인가. 대만이 중국 군사력이 두렵다며 군지휘권을 미국에 맡겼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다. ‘외화내빈-속빈 강정’이라는 국제사회의 비웃음 속에 자주외교란 헛구호일 뿐이다. 결코 자학의 비아냥이 아니다. 5천년 역사의 문화민족이요 자주독립의 정체성을 지닌 한민족의 자존심을 품었다면, 냉정히, 그리고 후세를 생각하며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짚어보고 참회해야 옳지 않은가.
 
< 김종천 편집인 >


정홍원 국무총리가 7일 최근 논란이 된 독도입도지원센터 건립 취소 문제와 관련해 ‘혼선을 일으킨 것처럼 비친 데 대해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하지만 국익 훼손과 외교 실패라는 점에서 말로 사과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이 혼란은 정부의 외교적 무능과 잘못된 정책에서 빚어진 일이다. 사안의 성격과 진행 과정 등을 국민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거짓말을 한 것도 비난받아 마땅하다.
 
독도입도지원센터를 둘러싼 혼란은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합작품이다. 이 입도시설은 이명박 정부 초기인 2008년 일본의 역사왜곡 행태에 맞선다는 이유로 독도 영유권 강화 사업의 하나로 추진돼왔다. 그동안 정부의 기본 입장은 독도가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나 명백한 우리 고유 영토인 만큼 쓸데없는 행동으로 일본의 분쟁지역화 전략에 빌미를 줄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 기본 입장을 거슬러 독도에 시설물 확충을 하겠다고 한 것부터가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예상되는 환경 훼손 우려도 가볍게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상황이 이 지경이 되지 않도록 사전에 조율해 조처를 했어야 했다. 그러나 정부는 2017년까지 100억원을 들여 2층 높이의 입도시설을 세우기로 하고 올해 예산으로 30억원을 책정했다. 이어 지난달 1일 첫 입찰공고를 내보냈다. 그러다 입찰 마감일(4일)을 며칠 앞두고 일본과의 분쟁 악화가 우려되자 갑자기 입찰을 취소했다. 외교적 미숙과 무원칙으로 인한 망신스럽기 짝이 없는 갈팡질팡 행보라 아니할 수 없다.
 
상황이 이렇게 됐으면 국민 앞에 사실대로 알렸어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오히려 관계 장관 회의에서 사실을 감추자고 각본을 짜기까지 했다. 입도시설 건립계획을 사실상 백지화하면서도 언론에는 ‘안전 관리, 환경, 문화재 경관 등에 문제점 또는 추가 검토할 사항’이 있어 ‘보류’하기로 했다는 식으로 알리기로 한 것이다. 중요한 정책 결정을 내리면서 거짓말로 내용을 은폐하려 했다니 국민을 우롱하는 짓이 도를 넘었다. 관련 부처 사이 조율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외교적 참사에 가까운 행위를 하다 보니 상대국 일본만 득의양양해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이번 입도시설 건립 취소로 외교적 성과를 거뒀다고 자화자찬하고 있다. 일관성있는 전략도 정책도 없이 우왕좌왕하다가 오히려 일본에 영유권 주장의 빌미를 제공하고 만 셈이다. 국익을 크게 훼손한데다 사태의 진실을 은폐한 이번 소동에 대해 정부와 관계 장관은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