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교육혁신과 한국의 미래

● 칼럼 2014. 12. 4. 14:10 Posted by SisaHan
수능이 끝나자 어김없이 또 출제 오류가 드러나고, ‘물수능’ 논란이 제기된다. 그런데 문제를 비틀어서 다섯 개 중 하나의 답안 맞히라는 시험에서 100% 정답이 있을까 의문이다. 그리고 이런 수능에서 ‘오류’ 논란은 예고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물수능’ 공격은 상위 1, 2% 학부모들의 관심을 표현한 것인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결국 변별력이라는 명분으로 본고사를 부활하자는 이야기가 하고 싶은 것일 게다. 모든 사람이 “수능 이대로는 안 된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이유와 대안은 완전히 다르다.
‘미신’은 자연력이 인간의 운명을 지배하던 시대의 일이라고들 말하지만, 이 문명사회에서도 인간이 자신이 만든 세상을 마치 불가항력의 자연처럼 믿고 따르는 일이 있는데 한국에서 ‘일류 대학’이라는 미신이 바로 그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상당수의 학부모들은 남들이 모두 ‘거름 지고 장에 가니’ 자신도 ‘거름 지고 장에 갈 수밖에 없다’고 습관처럼 수천만원을 사교육과 대학 등록금으로 쏟아부을 것이다. 64만명의 수험생 중 63만명은 최상위 1만명들에게 해당되는 ‘게임’에 들러리 서고, 그 1만명의 지위 세습을 위한 게임에 온 국가와 사회가 심각한 홍역을 치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 중고등학교는 ‘교육 불능’ 상태가 된 지 오래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행복감이 가장 낮은 수백만명의 청소년들은 학교가 감옥이며, 가정 경제를 마비시키고서 대학 졸업장을 가져도 실업자로 전락한다. 그런데 혹독한 입시경쟁의 승리자들은 과연 행복할까? 서울대 학생들 중 약 7%가 자해 또는 자살 충동을 지닌다는 연구 결과가 있으며 3~8%의 학생들은 전문적인 도움이 필요한 상태이며, 수백명이 여러 이유로 자퇴를 한다고 한다.
한국의 일류 대학들은, 잠재력은 있으나 입시 성적은 떨어지는 학생들을 잘 교육해서 국가나 인류문명에 기여할 수 있는 인재로 길러내야 진정한 일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적 우수 학생 싹쓸이하는 데 온 신경이 곤두서 있는 ‘학부’ 대학은 우리의 대안이 아니다. 더구나 지식융합, 지식팽창의 시대, 세계 유명대학 교수들의 강의를 온라인으로 들을 수 있는 시대에 지금과 같은 한국의 대학이 30년 이후에도 남아 있을지도 의문이다.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한 문제다. 그러나 사람이 만들어낸 세상을 사람이 못 바꾼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우리는 한국에서 교육 문제는 노동 문제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노동의 가치를 존중하고 땀 흘리는 노동자를 사람대접하는 일이 대학 문제, 곧 교육 문제 해결의 기본 원칙이요 길이라고 본다. 노동시장에서의 학력별 임금 격차 축소와 차별 철폐, 공기업이나 대기업의 고졸자 특례 채용의 활성화 등을 통해 대학 진학의 유인을 확 줄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능은 기초학력 평가 정도의 시험으로 정착시키고, 내신 성적으로만 단일화해서 입학생 선발을 하되 졸업정원제를 실시해서 대학을 학문하는 곳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지방 국립대학을 무상으로 하고 계층 할당을 확대하여 잠재력 있는 학생을 흡수하되, 전국의 모든 국립대학을 통합운영해서 학생, 교수 이동을 활성화하여 자연스럽게 특성화하도록 해야 한다. 서울대의 학부는 없애고 대학원 대학으로 육성해야 한다. 전국 단위 대학평가는 대학 단위가 아니라 학과 단위로 해서 지원을 차등화하면 학벌 간판의 폐해도 줄일 수 있다. 학령인구가 크게 줄어드는 시대에 상당수 대학은 평생교육기관으로서 기능을 해야 할 것이다.
‘대입성적 = 능력 = 높은 보상’이라는 신화에 사로잡힌 기성세대, 특히 우리 사회의 상층 사람들의 생각과 기득권을 건드리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그분들의 게임’의 허구성을 간파한 청소년들이 이미 거리에 넘쳐난다. 국민의 99%가 피해자인 이 대입, 교육 제도를 근본적으로 혁신하기 해서 국민들이 주체로 나서야 한다.
<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


[1500자 칼럼] 사이버 망명

● 칼럼 2014. 11. 25. 19:06 Posted by SisaHan
한국에서 일어나는 대개의 일이 그러하듯, 한 때는 마치 큰 일이 벌어질 것 처럼 난리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이 시점에 조용히 잊혀져가고 있는 일들이 많다. 그 중 하나가 ‘사이버 망명’이다. 요즘 한국에서는 신조어랄까 새로 생기는 단어들이 많다. 그리하여 떠나 와 사는 사람들에게는 얼핏 대하는 단어의 뜻을 몰라 어리둥절할 때가 많다. 맨 처음 사이버망명이라는 말을 들었을때, 사실 어리둥절했다. 망명이라는 단어의 뜻은 알겠는데, 앞에 사이버라는 단어가 생소했기 때문이다. 얼핏 사이버라는 나라로 망명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망명이라면 흔히들 정치적인 망명을 의미한다. 부득이한 상황에서 타의에 의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른 나라로 피신해 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망명이라는 단어에는 무게가 있고,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비장해지기도 한다.

한국사람들이 스마트폰 같은 휴대전화기로 카카오툭을 사용한다고 한다. 전화기로 무료 통화, 무료 장거리 전화를 사용할 수 있으며, 문자메시지 그리고 사진 전송까지 가능하여 가장 많이 사용하는 소통의 수단이라고 한다. 이곳 캐나다에서도 다운로드를 받아 쓰고 있는 분이 있는데, 그렇게 편리할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이 빠져 나가기 시작하여 ‘Telegram’이라는 독일회사로 사람들이 옮겨가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한국적의 회사에서 독일국적의 회사로 소통수단을 바꾼다는 뜻인데, 망명이라 한다면 좀 지나친 표현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 망명까지의 어떤 심각한 갈등도 없이, 잠시의 불편을 참지 못해, 몇 분 다운로드 받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망명이라면….

일의 발단은 그랬다. 대통령께서 인터넷 상에서 더 이상 자신을 모독하는 일은 못참겠다고 하시자,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검찰에서 사이버 감시단을 만들고 업계 대표들을 불러 들였다. 그 사실이 알려지자 국민들의 반발이 심해졌다. 그러자 검찰이 개인적인 소통수단인 카톡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공개사이트를 말하는 것이라 해명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적인 대화도 감시당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래서 비교적 보안이 철저한, 개인 대화의 내용이 비밀에 부쳐지고, 나중에라도 검찰의 조사를 받지 않을 수 있는 외국회사인 텔레그램으로 옮겨가는 것이었다. 그것이 장난이 아닌 것이 한동안 하루 몇 백만 명이 옮겨가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었다. 텔레그램의 독일 담당자는 갑자기 한국사람들이 고객으로 몰려오는 통에 당황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발빠르게 움직여 한국어 능통자를 구하고 그리고 한글판을 개발해냈다니…. 그리고 빠져들어 온 한국고객들 때문에 별 이름도 없는 회사가 크게 성장했다는 것이 좀 어이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와 반대로 참 우수한 개발품인 카카오툭 한국 본사에서는 고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심각한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사실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검찰이 자신의 개인적인 대화 내용을 볼 수 있다는 말인데, 대부분의 한국민들에겐 상관이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무슨 중대한 비밀 대화들을 한다고, 또 정부로서 그게 과연 기술상으로 실현 가능할지도 의심이 든다. 정부로서도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일부 의심가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표현의 자유와 사생활의 침해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데, 그것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누구나 누려야 하는 권리이다. 창조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여건이기도 하다. 생각을 자유스럽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무엇보다 먼저 조성돼야 창조적인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을까? 아무튼 한국의 남북이 사상으로 갈린 특수한 역사적인 배경 때문인지, 그로 인한 피해의식 때문인지 많은 사람들이 감시받는 것을, 아니 가능성도 두려워하고 있다. 아마 자신의 잘못이 아니더라도 친구 또는 다른 사람의 잘못 때문에 얽혀 들어가 생활에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생기는 것을 두려워하는지도 모른다. 만약에 감시를 당하는 일이 생긴다면, 왜 기본권을 침해하는냐고 항의하기에 앞서 딴 나라의 프로그램을 쓰겠다고 쉽게 돌아서서 우리 회사를 아무런 미련도 없이 버린다는 것도 그렇다. 한국의 대표적인 IT기업인 카카오톡이 그렇게 쓰러질 리도 없겠지만, 쓰러져야 한다면 너무도 억울한 일이다. 한국의 카카오톡이 페이스 북이나 트위터를 넘는 소통의 기구로 발전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램이다.

어쩌면 이번 사이버 망명 소동은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인지 아니면 일종의 해프닝으로 없었던 일이 되었는지 나는 모르겠다. 마치 찻잔 위의 태풍처럼 잠시 불고 갔는지? 왜냐하면 이제 한국신문이나 인터넷 상에서도 더 이상 사이버 망명이라는 말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마치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투다. 비록 가상의 공간이지만 사람들은 독일까지 망명갔다 벌써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


[사설] 문학의 사명과 작가회의 40돌

● 칼럼 2014. 11. 25. 19:04 Posted by SisaHan
한국작가회의가 18일로 창립 40돌을 맞았다. 파란과 곡절의 지난 세월을 거쳐 작가회의는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문학단체로 성장했다. 이런 뜻깊은 날을 맞아 축하의 박수를 보내기에 앞서 엄혹한 시대 현실을 둘러본다.
 
작가회의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가 태어난 1974년 11월18일은 박정희 유신체제가 긴급조치로 온 나라를 질식시키던 때였다. 그날 고은·백낙청·염무웅·박태순·황석영 등 문인들이 광화문에서 기습시위 벌이듯 모여 ‘문학인 101인 선언’을 발표했다. “오늘 우리 현실은 민족사적으로 일대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로 시작하는 이 선언은 긴급조치로 구속된 문인·지식인·종교인·학생의 즉각 석방, 언론·출판·집회·결사와 신앙·사상의 자유 보장을 촉구했다. 그렇게 정치적 폭압을 뚫고 태어난 자실은 1987년 6월항쟁 직후 민족문학작가회의로 거듭났으며, 2007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민족문학작가회의 정신과 역사를 온전히 계승”하는 한국작가회의로 이어졌다.
이 40년 동안 작가회의 문인들은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인간화를 위해 맨 앞에서 싸웠다. 문학은 저항의 언어였고, 희망의 언어였다. 특히 70년대와 80년대의 반독재 민주화 운동 시기에 문인들의 글은 시대를 고발하는 가장 큰 함성이었고 시대의 환부를 도려내는 날카로운 메스였다. 겨레의 화해와 남북의 통일을 위해 온갖 탄압을 무릅쓰고 앞장선 이들도 문인들이었다. 작가회의는 펜으로 시대의 어둠을 헤쳐온 우리 문학정신의 집성체라고 할 것이다. 다만 우리 사회의 절차적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후 작가회의가 문학이 본디 있어야 할 자리에서 벗어나 지나치게 사적이고 소소한 이야기에 한눈팔지 않았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그런 점에서 작가회의 40돌에 젊은 작가들이 문학갱신을 다짐하고 나선 것은 반갑고 고무적이다. 김근·김경주·진은영 시인이 대표 집필한 ‘젊은 문학 선언’은 “지금 우리 문학은 작품 속에서 인간을 버렸다”며 인간 고통을 고발하는 데 게을렀던 문학에 대한 준열한 자기비판을 감행했다. “남쪽 바다에서 침몰한 것은 어쩌면 우리가 인간이었다는 증명인지 모른다”는 젊은 작가들의 언어는 절박하고, ‘문학의 유일한 존재이유는 기억하고 질문하는 데 있다’는 작가들 다짐은 절실하다. 이 다짐이 우리 문학의 새로운 길을 열 수 있기를, 작가회의가 현실과 맞붙어 인간성을 드높이는 문학 고유의 사명을 다하는 데 튼튼한 진지가 되기를 바란다.


[사설] 국민과 국회를 무시하는 FTA협상

● 칼럼 2014. 11. 25. 19:03 Posted by SisaHan
중국에 이어 뉴질랜드와의 협상이 타결돼 14번째 자유무역협정(FTA)을 맺게 됐다. 나라 수로는 모두 52개국에 이른다. 정부는 관세를 물지 않거나 낮게 물면서 교역을 하는 ‘경제 영토’가 대폭 늘어나게 됐다며 자랑한다. 하지만 협정 내용은 물론, 협상 진행방식을 보면 정부의 지나친 비밀주의 탓에 국민 대표인 국회마저 구경꾼 처지로 전락하고 만 게 현실이다. 시쳇말로 무시와 ‘봉’ 취급을 받고 있다.
자유무역협정은 산업과 집단별로 이해관계가 크게 엇갈리는 결과를 낳기 마련이다. 장기적으로는 나라 경제에 긍정적일 수 있지만 단기와 중기에 걸쳐서는 꼭 그렇지만도 않다. 농업과 농민 등 경쟁력이 떨어지는 산업과 집단이 집중적으로 손실을 볼 수 있다. 이는 그간의 경과가 잘 말해준다. 그런 만큼 정부가 전체 국민과, 피해가 예상되는 집단에 협상 진행과정을 제때에 알리고 의견을 듣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적어도 국회에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정부는 “진행중인 협상”을 이유로, 국회 소관 상임위원장의 자료 제출 요구에 성실하게 응하지 않았다. 시간이 꽤 흐른 뒤 내놓은 자료조차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달랑 200자 원고지 3장 정도의 분량에 뻔한 답변을 했다. 상임위원장한테 이럴진대 일반 의원들이야 더 말해 무엇할까 싶다. 이런 상태에서 통상절차법에 따라 의원들이 협상과 관련해 걸맞은 의견을 제시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상대방과 협상중인 내용이 알려지면 불필요한 논란을 낳고 자칫 협상이 깨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설령 그런 면이 있다고 해도 정부의 태도는 납득하기 어렵다. 협상은 정부가 알아서 잘할 테니 국회와 국민은 결과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니, 민의의 무시가 지나치다. 정부는 협상 내용이 일부 공개돼 논란을 빚더라도 그것이 결국 협상력을 높이고 국익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협정으로 손실이 예상되는 집단의 의견을 충실하게 듣고 협상에 반영하는 것은 무엇보다 앞서야 할 원칙이다. 그런 노력을 해야 한-미 자유무역협정 타결 이후 빚어진 것과 같은 사회적 갈등의 분출을 줄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