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오후 가까운 숲에 들었다. 땅거미가 내리는 저녁 무렵에다 가을비까지 다녀 간 끝이라 숲속은 몽환적인 분위기로 으스스 했다. 빨강 노랑 원색으로 채색된 단풍 숲 사이로 반쯤 드러난 고목들의 휜 가지며 낮게 깔린 안개는 자연이 연출한 이즈음의 할로윈 풍경이다. 나는 이런 풍경 속에서 움직이는 소품이 되어 가능한 한 빠르고 조용하게 걷는다. 가끔은 물기 머금은 낙엽더미가 나의 발길을 흔들어 나무 둥치와 포옹을 하기도 하고 때론 푹신한 양탄자 위를 구르듯 날렵하게 발길을 옮긴다. 자연 속에서는 모두가 평등하여 주연 조연이 따로 없다. 낮은 자세로 다가서기만 하면 그대로 자연의 일부분이 되는 숲, 안락함과 평온함을 충전하는 소중한 곳이다.
적요하던 숲에 한자락 바람이 일면 우수수 낙하하는 낙엽과 함께 가을 운치가 더 해진다. 여기저기서 툭툭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며 먹을거리를 물어다 나르는 다람쥐들의 움직임은 이 계절에만 느낄 수 있는 풍요로운 풍경이다. 아무런 미련없이 자신들의 한 해 살이 결과물을 서슴없이 내어 놓는 나무들, 그것을 받아 생명을 이어가는 자연의 순환고리가 성스럽다. 나는 내 몸 속의 모든 감각을 활짝 열어 경이로운 순간들을 열심히 저장한다.
가쁜 숨을 헐떡이며 내리막길에 다다르니 잘 익은 도토리가 수없이 깔려 눈길을 사로잡는다. 한 번도 보아준 적 없는 나무가 언제 열매를 맺어 이토록 튼실하게 결실을 냈는지 기특하여 가만히 올려다본다.
‘할머니, 여기 도토리 있어요.’ 입술을 곧추 세워 외쳐대는 서현이 생각에 가던 길 멈추고 자리를 잡는다. 산책 때 마다 한줌 씩 주워 뒤뜰에 뿌려 놓으면 아이는 한동안 도토리 찾아내는 재미로 신바람을 낸다. 이즈음 아이를 집으로 불러들이는 덴 도토리 보다 더 좋은 꺼리가 없다. 상기된 아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도토리를 주워 담다 보니 잠깐 사이 주머니가 두툼해졌다. 이제 그만 일어나야지 하면서도 손은 연신 가랑잎을 헤친다. 좋은 목재를 만나면 집 지을 궁리부터 한다는 어느 목수의 변처럼 지나치기 어려운 식재료를 앞에 두니 주부의 본능이 발동한 탓이다. 큼직한 알맹이들을 보며 갈등하는 내 마음을 알아차린 듯 그이가 손을 내민다. ‘사다 먹어, 괜히 일거리 만들지 말고.’ 견물생심에서 벗어나 꼭 필요한 만큼만 취하고 나니 발걸음이 가볍다. 자연은 욕심을 버리고 다가오라며, 병 주고 약 주며 나 자신을 담금질 하게 한다.
현란하던 숲이 회색으로 바뀔 무렵 반환점을 돌았다. 긴 침묵 속으로 침잠하는 숲을 뒤로 하며 최근 어느 칼럼에서 읽은 P씨의 사연을 떠올린다.
P씨는 어느 회사의 중역으로 일과 가족부양에만 평생을 바친 사람이다. 모든 면에서 완벽주의자였던 그는 업무로 날밤 새우기를 밥 먹듯 하다가 50대 후반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1년이란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았다. 그나마 짧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선 아스피린과 등산뿐이라는 의사의 소견을 듣고 모든 걸 내려놓은 채 오지여행을 떠난다. 환자로 죽기보다 여행자로 죽기를 갈망하며 지팡이에 의지하여 한 걸음씩 나아간 그는 몸을 철저히 혹사시키는 쪽을 택한다. 3개월 만에 병세가 호전되고 삶에 대한 열망이 깊어져 자연에 몸을 던진다. 1년 6개월간의 오지 여행과 천개의 산을 섭렵하는 동안 온전한 건강인이 된 그는 ‘오지 탐험가’ ‘오토 캠핑강사’ ‘레저문화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며 86세의 젊은이가 되어 오늘도 떠나기 위해 배낭을 꾸린다고 한다. ‘나를 산에 버렸더니, 산이 나를 살렸다.’ 는 그는 ‘인간은 모든 허세를 버리고 자연에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며 자연 참살이를 강조한다. 절실하게 공감하는 부분이다.
석식 후 나른해지는 마(魔)의 시간대를 과감하게 떨치고 나오면 천의 얼굴을 가진 숲은 절대 후회하지 않게 한다. 세상에는 거저 얻어지는 게 없듯이 자연이란 친구도 열정과 노력을 바치지 않으면 허락하지 않으니 더 분발해야 할까보다.
‘자연 참살이’의 삶을 동경하며 그 곁을 맴도는 요즘이다.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등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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