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인터넷상 허위사실 유포를 단속하겠다며 위법까지 서슴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12일 공개된 대검찰청의 9월18일 범정부 유관기관 대책회의 자료를 보면, 정치권력의 뜻에 맞추겠다고 법 규정이나 기술적 한계 따위는 깡그리 무시한 검찰의 ‘맨얼굴’이 생생하다.
 
검찰이 내놓은 사이버 명예훼손 대응방안의 상당수는 기술적·법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것들이다. 검찰은 회의자료에서 문제가 되는 글의 삭제를 포털에 직접 요청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보통신망법은 허위사실이나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불법정보를 삭제·차단하려면 방송통신위원회가 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시정요구를 하거나 법원의 판결이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검찰은 이런 정상적인 심의절차나 법원의 판결을 뛰어넘어 자체 판단만으로 포털에 삭제나 차단을 요구하겠다는 것이다. 초법적 발상이라는 비판을 피할 길 없다. 검찰은 또 특정 단어를 검색하거나 조회수가 급증한 글을 찾는 방법으로 실시간 인터넷 모니터링을 하겠다고 밝혔지만, 이 역시 기술적으로나 법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한다. 무엇보다 명예훼손의 당사자도 아닌 검찰이나 경찰이 인터넷 게시글을 검열할 권한이 있는지부터 의문이다. 회의에선 여러 관계자가 이런 점 등을 들어 검찰 쪽 방안에 난색을 표했지만, 검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되레 회의 뒤 포털이 협조하기로 했다고 주장했다. 종주먹을 들이대면서까지 민간업체를 윽박질러 그럴싸하게 포장한 대책을 보란 듯 내놓는 형국이다.
 
검찰이 이렇게나 무리하게 일을 벌이려 드는 이유는 자명하다. 검찰 회의자료에는 대책회의 이틀 전 열린 국무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한 말이 두드러지게 강조돼 있다. 이번 단속이 박 대통령의 말 때문에 서둘러 추진됐음을 스스로 드러낸 셈이다. 우선 단속할 대상이 공적 인물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니, 실시간 인터넷 검열이 주로 대통령에 관한 것에 집중되리라는 점도 불 보듯 뻔하다. 헌법 원칙이나 법 규정은 내팽개친 채 대통령의 ‘호위무사’가 되겠다고 발버둥치는 듯한 검찰의 모습이 민망하기까지 하다.
그렇지 않아도 박근혜 정부 들어 수사기관의 개인신상정보 감시가 크게 늘었다. 이동통신사가 지난해 수사기관에 제출한 개인신상정보 건수는 1000만건이 넘어, 이명박 정부 때 같은 시기의 두 배에 이른다. 카카오톡에 이어 또다른 메신저서비스인 네이버 밴드도 대거 압수수색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무도한 사이버 검열을 대체 어디까지 밀어붙이겠다는 것인가. 


세월호 참사 당일 박근혜 대통령의 행적과 관련한 기사를 쓴 일본 <산케이신문>의 가토 다쓰야 전 서울지국장이 지난 8일 정보통신망법의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뒤 나라 안팎에서 비난과 반발이 거세다.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옥죈 일이니 비판은 당연하다.
 
이번 일은 이미 국제적 논란이 됐다.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유감의 뜻과 강한 우려를 밝혔다. 미국도 “표현의 자유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와 “한국의 관련 법에 대한 염려”를 재확인한다며, 이번 사태를 주시하면서 한국 정부와도 접촉했다고 내비쳤다. 일본은 물론 외국 주요 언론도 한국의 언론 자유에 강하게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유신시대나 군사정권 때 한국을 보는 시선이 꼭 이랬다. 박근혜 정부의 시대착오적인 여론통제 시도가 한국의 국가 이미지를 30~40년 전으로 추락시킨 것이다.
그로 인한 외교적 손실도 만만찮다. 이번 일로 일본은 한국을 공격할 좋은 소재를 얻게 됐다. 군대 위안부 문제 등 한-일 관계의 현안은 한쪽으로 밀쳐지게 됐고, 미국 등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는 데서도 일본이 우월한 위치에 설 가능성이 커졌다. 일본은 이 기회에 한-일 관계의 난항 책임을 한국에 돌리려 할 것이다. 정부가 이런 결과를 염두에 두기나 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산케이 기자 기소는 법리나 판례, 국제적 흐름에도 맞지 않는다. 유엔을 비롯한 많은 국제기구가 명예훼손의 형사처벌 제도를 폐지하도록 권고하고, 폐지하는 나라도 늘고 있다. 대법원도 국가기관과 공직자의 업무에 관련한 의혹 제기는 명예훼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밝혀왔다. 정책 결정이나 업무 수행과 관련된 일은 국민의 감시와 비판의 대상이 돼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공적 관심사에 대한 보도에선 언론 자유에 대한 제한이 완화돼야 한다는 판례도 있다. 산케이 기사가 사실 확인도 제대로 하지 않은 부실한 선정 보도인 것은 분명하지만, 기사가 문제 삼은 대통령의 ‘사라진 7시간’은 공적 업무 수행에 대한 문제제기일 수 있다. 직업윤리에 대한 비난을 넘어 형사처벌의 대상이 될 이유까지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검찰은 대통령의 말이 떨어지자 수사에 착수했고 기소까지 강행했다. 
이번 일이 정치적 기소라는 비판이 나오는 것은 이런 사정들 때문이다. 그 결과가 국제적 망신이다. 명예훼손은 피해자가 원하지 않으면 처벌하지 않는 죄다. 박 대통령은 나라 망신만 시킬 이번 일을 이쯤에서 접어야 한다. 


[1500자 칼럼] 선비의 지조가 그립다

● 칼럼 2014. 10. 21. 15:50 Posted by SisaHan
“지난번에 만나고 싶다는 바람을 이루기는 했어도, 한순간 꿈처럼 짧아서 의견을 깊이 물을 겨를이 없었습니다.” 1559년 1월 58살의 퇴계 이황이 32살의 고봉 기대승에게 편지를 보냈다. 조선 지성사의 최대 사건으로 불리는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의 시작이었다.
 
사단칠정 논쟁은 유례없는 사건이었다. 성리학의 종장인 퇴계가 26살 연하의 신참 유학자 고봉에게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의견을 구했다는 것도 유례가 없었고, 영남과 호남을 편지로 넘나들며 논쟁이 8년이나 지속됐다는 점에서도 유례가 없었다. 사단(측은지심·수오지심·사양지심·시비지심)이라는 마음과 칠정(희·로·애·구·애·오·욕)이라는 감정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가 핵심 쟁점이었다. 성리학의 인간관으로 보면, 우리 본성은 본디 선하지만 그것이 욕망으로 분출될 때 세상사의 탁한 기운과 섞여 본래의 선함을 잃어버리기 쉽다. 어떻게 하면 이 욕망을 다스려 본성의 인의예지를 바르게 실현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두 사람의 근본 관심사였다.
지난달 <한국방송>(KBS) 이사장이 된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의 발언들이 우리의 역사의식을 흔들었다. 이 이사장은 친조부 이명세의 친일 행위를 변호하는 중에 “할아버지는 유학의 세를 늘려가기 위해 일제 통치 체제하에서 타협하며 사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를 보면 이 이사장의 조부 이명세는 천황을 떠받드는 황도유학을 주창하고 일제의 한반도 침략을 찬양했다. 일제 말기 징병제를 환영하기도 했다. 이명세의 친일은 타협이 아니라 명백한 부역이다. 매국행위와 다를 바 없다. 더 곱씹어볼 것은 조부의 친일 행위가 ‘유학의 세’를 늘리려는 것이었다고 변명한 대목이다. 유학의 세를 늘릴 수만 있다면 일제에 충성하는 것도 괜찮다는 뜻일 터인데, 아무리 봐도 이것은 유학의 정신에 맞지 않는 말이다.
유학의 정신, 다시 말해 선비정신이란 게 뭔가. 인의예지, 더 줄이면 인과 의를 목숨 걸고 지키는 것이다. 조선 성리학자들이 사단칠정을 놓고 그토록 치열하게 싸운 것은 세상의 더러움에 휘말려 인과 의, 측은지심과 수오지심을 잃어버리지 말자는 뜻이었다. 
독립지사들을 잡아들여 고문하고 죽인 일제에 빌붙어 유학의 세를 키우려 했다니, 유학의 속을 파내버리고 껍데기를 키우겠다는 얘기다. 자가당착이고 언어도단이다. 유학자의 지조로 일제에 항거한 동농 김가진, 심산 김창숙 같은 분들을 농락하는 말이다. 이 뒤틀린 사고가 보여주는 건 ‘유학의 세’를 명분으로 삼아 자기 자신의 세를 키우겠다는 권세욕 아니겠는가. 퇴계가 “인욕(人慾)을 천리(天理)로 잘못 아는 병통”을 경계한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사사로운 욕망을 하늘의 뜻인 양 윤색하는 것이야말로 유학자가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이 이사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전경련 강연에서는 해방 후 친일 청산이 소련의 지령에 따른 것이었다는 주장까지 했다. 한민족 절대다수의 염원이 한순간에 스탈린의 하명이 되고 말았다. 이쯤 되면 브레이크 없는 망언의 폭주다. 친일 청산이 소련의 지령이면 스탈린과 손잡고 일제와 싸운 미국의 루스벨트도 소련의 지령을 받은 것인가. 광복군도 소련의 지령에 따라 움직인 것인가. 집안의 명예를 지키겠다며 당치도 않은 말을 끌어다 대는 것은 조상을 두 번 치욕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일이다. 
퇴계는 고봉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한다. “참된 강직함과 진실한 용기는 기세를 높여 억지를 부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고치는 데 인색하지 않고 의(義)를 들으면 바로 따르는 데 있습니다.” 선비의 지조가 그리운 시절이다. 
< 고명섭 -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

 

[칼럼] 이상한 북한이상설

● 칼럼 2014. 10. 21. 15:47 Posted by SisaHan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이 사라지면, 찌라시가 가운데 자리를 차지한다. 북한의 젊은 지도자가 공식 석상에서 사라진 지 40여일 동안 ‘김정은 이상설’을 실어 나르는 찌라시가 넘쳐났다. 지난 9월 최고인민회의에 김정은이 불참한 것을 ‘권력이상설’의 근거로 드는 전문가도 있었다. 과연 근거가 있을까? 지금까지 최고지도자는 반드시 최고인민회의에 참석하진 않았다. 김정일의 경우, 불참한 적이 적지 않다. 참석을 권력 행사로 보고, 불참을 권력 이상의 근거로 보는 시각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북한 붕괴론을 믿는 사람들은 대체로 확인되지 않은 소문으로 권력 이상을 추측한다. 그러나 북한 정보에 대한 판단은 그 정도로 허접하게 이뤄지지 않는다. 북한의 공식 매체에 대한 징후적 독해, 주변국과의 정보 공유, 그리고 기술정보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현재 미국과 중국은 ‘이상 징후가 없다’고 판단한다.
 
부끄러워하지 않고, 궤변을 말하는 시대가 왔다. 예를 들어 인천에 온 북한 인사들이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지 않은 이유와 관련해, 그럴 경우 한국 대표단이 북한을 방문하면 김정은이 남쪽 대표를 만나야 하는데 이를 피하려 했다는 말이 있다.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한국의 국방부 장관, 국가정보원장, 그리고 당 고위직이 함께 북한을 방문하면, 김정은 면담이 100% 가능하다. 장담한다. 다만 우리 정부가 그럴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
현재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정보는 한민구 국방부 장관이 지난주 국정감사에서 한 말이다. 그는 김정은의 소재를 묻는 질문에, “평양 북방 모처에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왜 저 말은 믿지 않는가? 김정은 제1비서가 공식 석상에서 사라지기 전에, 북한은 다리를 절뚝거리는 방송을 내보낸 바 있다. 그래서 다리 수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개인숭배 체제에서 지도자가 목발을 짚고, 혹은 깁스를 한 채로 공식 석상에 나타나기 어려웠을 것임에도 그는 나타났다. 그는 겨우 30대 초반의 젊은이다. 권력 공백으로 이어질 정도의 건강 이상으로 보기 어렵다.
 
찌라시가 난무할 때마다, ‘접촉 제로’인 남북관계의 현실이 안타깝다. 얼마 전 평양에 계엄령이 내려졌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평양에 주재하는 중국의 신화통신과 일본의 교도통신은 곧바로 ‘평온한 평양 시내의 일상’을 전했다. 우리는 현재 평양에 통신사도, 정부 관계자도, 기업인도, 하물며, 인도적 지원단체도 없다. 평양에 무슨 일이 일어나면, 곧바로 알 수 있을 만한 아무런 접촉이 없는 현실, 이상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가?
북한 이상설은 또한 무능한 대북정책의 핑계이다. 삐라 문제를 보자. 올해 2월 남북 고위급 회담의 핵심 합의가 바로 ‘비방 중상 금지’다. 그러나 보수단체가 백령도에서 삐라를 날리면서, 남북관계는 대결 국면으로 전환했다. 북한은 최근에도 삐라를 살포하면, 군사적으로 공격하겠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이번 사건은 우발적이 아니라, 예고된 충돌이다. 총질을 한 북한이 이상하다고 말하기 전에, 뻔히 그럴 줄 알면서 삐라를 보내는 것이 정상인가? 전쟁을 각오하고, 심리전을 계속하겠다는 사람들을 과연 정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정부는 말한다. 표현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고.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사이버 망명이 벌어지는 현실에서, 그런 말은 또 얼마나 낯부끄러운가?
 
남북관계는 상호관계다. 거울 앞에 서 보면, 그 말의 뜻을 알 수 있다. 웃어봐라. 그러면 거울 속 사람도 웃는다. 주먹을 들면 마찬가지로 그도 따라한다. 거울 앞에서 주먹을 들고, 욕을 하면서, 왜 거울 속의 사람이 웃지 않느냐고 화를 내는 당신, 그러는 당신이 참으로 이상할 뿐이다. 
< 김연철 -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