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정의구현사제단 40돌 맞이

● 칼럼 2014. 10. 7. 08:39 Posted by SisaHan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박정희 정권은 1천명이 넘는 학생들을 ‘민청학련’의 이름으로 잡아들이고, 혹독한 고문을 통해 반국가사범으로 조작했다. 체포망은 천주교의 지학순 주교에까지 다가왔다. 학생들에게 거사 자금을 건넸다는 혐의였다. 독재정권은 거칠 게 없었다. 그런데 뜻밖의 사태가 일어났다. 지 주교의 구속에 항의하는 거센 물결이 30대의 청년 사제들을 중심으로 퍼져간 것이다. 당황한 정부는 지 주교를 잠시 석방하는 유화책을 썼다.
사제들은 기로에 섰다. 주교 석방의 주장이 이뤄졌으니, 이만 물러설 건가. 그러나 옥중에 있는 양들을 놓아둔 채 혼자 빠져나오는 목자는 있을 수 없는 일. 지 주교는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양심선언을 하고, 이번엔 아예 제 발로 감옥에 들어갔다. 주교의 양심을 앞세우고, 사제들은 정의구현사제단을 결성하였다. 시대의 십자가를 지고,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삶을 결단한 것이다.
 
그로부터 40년. 사제단은 권력에 핍박받는 어려운 이웃과 늘 함께했다. 간첩 낙인이 찍혀 접촉조차 꺼리는 인혁당 가족들을 따뜻이 맞아들인 게 사제단이었다. 인혁당에 대한 사법살인을 규탄하고, 형사자(刑死者)의 시신을 안치하려 한 유일한 곳이 사제단이었다. 32년 뒤 인혁당에 대한 재심-무죄판결로 귀결되기까지 사제단은 늘 이 억울한 가족들과 함께했다.
지난 9월22일 명동성당에서 사제단 40주년 기념미사가 열렸다. 여러 피해자, 희생자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양심수의 가족들. 의문사의 유가족들. 용산참사, 쌍용자동차, 강정, 밀양에서 어려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분들. 그리고 세월호 유족들! 이들이 바로 사제단의 역사다. 정부의 횡포와 여론의 매도에 초토화된 억울한 이들에게 사제단은 먼저 다가서고, 함께 돌팔매를 맞으며, 위로하고 연대했다. 절망 속에 희망을 피워내고, 어둠 속에 불을 밝혔다.
 
독재정권은 사제단 신부들을 감옥으로 위협했다. 1976년 3.1구국선언 사건에 가톨릭 신부들은 사실 관여한 바가 없었다. 그러나 정권이 재야-개신교-가톨릭을 일망타진하듯 엮자, 사제들은 검찰의 기소 내용을 부인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십자가를 껴안았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진범이 조작되었다’는 역사적 문건의 발표에 앞서 함세웅 신부는 김승훈 신부를 만났다. “이번 발표로 감옥에 갈지 모릅니다.” 김 신부는 “응, 알았어”로 간명하게 답했다. 이렇듯 사제들은 감옥을 두려워하기는커녕, 하나의 은총으로 받아들였다. 그런 사제들에게 정권의 위협 따위는 “의를 위해 핍박당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에 다름 아니었다.
사제단에 대한 음해와 낙인은 예나 이제나 마찬가지다. “사제단을 해체하라”는 악성 파파라치는 사제단 활동을 위축시킬까. “사제단 해체의 소음이 높은 그때가, 사제단을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때”라고 한 신부는 답했다. 탄압으로 해체될 조직이라면, 수십번도 더 해체되었을 것이다. 40년의 연륜은 불의한 권력의 필멸성과 훼방행위의 무익성을 깨닫기에 충분하다.
진짜로 사제단을 해체시킬 방법은 없을까. “정의”를 실제로 “구현”해버리면, 사제단의 존재 기반이 쇠퇴할 것이다. 그런데 갈수록 파쇼화, 신유신화, 비인간화하는 지금 같은 분위기는 사제단의 존재 근거를 되려 강화시켜준다.
 
부패한 세상에서 종교는 ‘세상의 소금’이어야 한다. 그런데 소금 역할을 하랬더니 소금장수 노릇만 하고, 각종 비리가 종교계를 좀먹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억울한 이웃을 위한 고난의 짐을 기꺼이 지는 성직자의 존재는 귀하고도 거룩하다. 그간 시행착오도 적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지극히 작은 자”에게 먼저 다가가고, 우리 모두의 인간존엄성을 일깨우고, 정의로운 공동체의 비전을 제시한 사제단에게 우리 사회는 많은 빚을 졌다. 그러기에, 가톨릭 신도가 아닌 나도, 정의구현사제단 40주년을 맞아 꽃 한송이라도 드리고 싶은 심정이다. 
< 한인섭 -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슬픔과 고통에 몸부림치는 세월호 유족들 앞에서 폭식을 하면서 조롱하거나 욕을 퍼붓는 사람들을 보고 공감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인간들이라고 개탄한다.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다고 말하기 어려운 이 극단적인 대립이 과연 어디서 온 것일까? 나는 “세월호 그만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과연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사람들과 같은 ‘사실’에 근거해서 세상을 보는지 의심한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미디어에 의존하고 있는 오늘날 세월호 문제에 대한 극한적 대립은 한국 사회가 TV 종합편성채널(종편)과 조·중·동으로만 세상을 읽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나누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는 종편을 전혀 보지 않지만 식당이나 목욕탕 등 공공장소에서 할 수 없이 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언론계나 지식사회에서 이름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사람들이 갑자기 대단한 논객이 되어 방송사가 작위적으로 만들어놓은 진보/보수의 양 테이블에 나와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의제를 긴 시간 떠드는 것이나 세월호 참사 이후 유병언과 구원파의 동향을 거의 생중계하듯이 계속 보도하는 것을 본 적 있는데, 그걸 보고 왜 종편으로만 세상을 보는 사람들이 유족 공격 담론에 솔깃하게 되는지 약간 이해할 수 있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부르디외는 텔레비전은 “텅 비고 거의 아무것도 아닌 것들로 귀중한 시간을 때우면서, 정작 보여주어야 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보여주고’, 시민이 민주적 권리를 행사하기 위하여 가져야 할 적절한 정보를 멀리하게 만든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는 텔레비전이 소유주나 광고주의 시청률 압박 요구에 완전히 종속되어 권력에 민감한 의제는 의도적으로 피해가면서 중요하지 않은 것을 중요한 것인 양 포장하는 일종의 상징 폭력 기구라고 보았다.
 
이번 한국의 종편과 지상파도 ‘참사’를 교통사고로 만들었고,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분노를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한 다음, 정부나 당국의 구조 책임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세월호 구조 관련 수많은 의혹에 대해서는 질문조차 않고, 농성장의 유족과 생존자들에게 마이크 한번 들이대지 않은 채, 이들이 마치 자식 죽음을 팔아 욕심을 채우려는 탐욕스러운 떼잡이인 양 만들어 버렸고, 유족들 대리기사 폭행 사건이 나오자 잘 만났다는 듯이 뉴스의 머리기사로 띄워 종일 틀어댔다. 이런 걸 칼 안 든 폭력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해방 직후 <동아일보> 등 여러 신문이 미국이 제안한 신탁통치안을 소련이 제안한 것으로 왜곡 보도하여 숨죽이고 있던 친일파를 반탁·반공 투사로 부활시켰고, 나라를 적대적 대립으로 몰고 갔듯이, 그 악명 높던 서북청년단이 다시 나타난 지금도 그 상황과 유사하다. 물론 8.15 직후 하나였던 국민이 6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적대적으로 쪼개진 것은 언론들만의 작품이 아니라 기사회생을 노리던 친일 정치세력들의 공작 혐의가 있듯이, 국민적 공감에서 출발했던 세월호 여론을 적대적 반반으로 돌려놓은 주체도 사실상은 이미지 조작과 허구적 여론지지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현 집권세력일 것이다.
 
가공된 이미지가 ‘여론’이 되고 ‘지지율’이 되어 권력을 재생산해온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이명박 정권과 새누리당은 온갖 무리수와 편법을 써서 종편 허가를 강행했을 것이다. 그들은 세월호 여론을 돌리는 데 성공했다고 좋아할지 모르지만, 공감대와 합의의 기반 위에 서서 비극적 재난 방지를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할 국민들은 폭발 직전의 두 적대 진영으로 쪼개졌고 근본적 대안 마련 작업은 더 멀어졌다. 유신 시절 지식인들이 국내 소식을 알기 위해 외국 신문·잡지를 뒤졌듯이, 21세기에 사는 지금 우리는 일본의 <후지TV>를 통해 침몰 직전 세월호 안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언론환경 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박근혜호의 한국은 국제사회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공감은커녕 폭력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집단이 활개치는 나라에 무슨 미래가 있을까?
<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이 대화는 성경의 <창세기> 제4장에 나오는 야훼 하느님과 카인의 유명한 질의응답이다. 성경학자들은 최초의 ‘형제살인 이야기’라고 부른다.
 
강자 카인이 약자 아벨을 살해하는 이야기를 통하여, 약소국 이스라엘을 침탈하여 인간 살육을 자행한 근동 고대제국들의 무력적 횡포와 인간의 심성에 자리잡고 있는 파괴적 공격성을 비판하고 있다. 양의 피를 제물로 쓰는 유목민의 종교의례, 제주(祭主) 아벨이 죽임당하는 희생제,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 죽음, 그 상징적 의미들을 융합시키면서 기원후 50년께 새로운 관점이 출현했다. 십자가 사건이 정치와 종교의 비극적 스캔들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인간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죄성을 정화속량(淨化贖良)하고, 모든 형태의 절대권력을 비신격화시키는 ‘근원적 인간해방 사건’이라고 예수 제자 공동체는 확신했다.
불공정한 차별대우는 인간 소외와 인격장애를 낳고, 그것은 분노와 생명 살해의 씨앗을 잉태한다. 현대 문명사회에서 불공정성의 원인제공자는 종교적 신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큰 힘들’ 곧 패권국가들의 야망, 타락한 정치권력, 기득권자들의 집단이기심, 그리고 사회 구조악인 것이다. 카인의 형제살인이 정당하다는 말이 아니라, 이해가 가고 현대판 카인들을 양산하는 보이지 않은 큰 힘들한테도 책임있다는 말이다. 카인은 도덕적 죄의식은커녕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라는 냉소적 반응을 보이며, 인간성과 도덕률 그 자체를 부정하는 인면수심의 괴물이 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힘을 행사하는 권력집단들이 있다. 그들은 옛날 카인처럼 “우리가 사회의 말단 구석에서 발생한 희생자들까지 지키고 책임져야 하는가?”라고 속으로는 항변한다. 지난 18개월 동안 슬프고도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국가정보원과 국가기관의 대선개입, 세월호 침몰과 특별법 제정 난항, 그리고 군 병영내 구타살인 사건 등이 대표적 사례다. 그 모든 사건 발생의 근본원인에 정의롭지 못한 ‘불공정성’이 있고, 공통점으로는 진실을 감추고 축소하려는 ‘은폐 본성’이 자리잡고 있다.
힘 가진 자들의 불공정성, 불법행위에 대한 은폐심리, 선악 이분법 진영논리, 그 3가지가 우리 사회의 전진과 인간화를 가로막고 있는 핵심 걸림돌이다. 민생문제 해결하자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마치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이 경제와 정치의 발목을 잡고 있는 책임자들이나 되는 것처럼 여론몰이를 하는 형국이다. 윤 일병 구타살인 사건은 병영에서 주먹과 군홧발로 일어났다. 그런데 ‘피로감 담론’을 퍼뜨리는 수구언론과 권력집단은 나치가 유대인들 가슴에 ‘다윗별’을 붙여 사회로부터 왕따시켜버린 것처럼, 여론으로 위장한 사회 막사 안에서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을 말과 글로써 구타하고 소외시키는 모양새로 변해 버렸다. 그러나 “평화는 정의의 결과”이기 때문에, 진실이 밝혀진 후에라야 비로소 불의를 잊지 않되 용서, 치유, 평화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중국인들이 <후한서>와 <산해경> 등 그들의 고대 역사책에서 우리 민족 심성을 평가하기를 “용감하지만 착한 품성을 지녔고, 즐겨 양보하고 다투지 않는다”(强勇而謹厚, 好讓不爭)고 했다. 그것이 우리들의 본래 모습이다. 삶에 여유로움이 없고 ‘피로사회’가 된 원인은 해방 후 70년 동안 강요된 ‘평화의 부재’ 때문이다. 국가안보를 빌미로 하여 반민주적 권위통치나 국정원 같은 국가기관의 정치관여가 더 이상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분노감정은 불가에서 ‘탐욕, 분노, 어리석음’ 삼독(三毒)의 하나로 여길 만큼 인간성을 황폐화한다. 광화문 광장과 우리 사회가 양 진영의 분노로 가득 차 있다. 분노는 가정, 사회, 민족, 문명을 파괴로 이끌 수 있는 매우 위험한 것이다.
 
“성실함 아니면 아무것도 되는 일 없다”(不誠無物)고 했다. 성실함의 첫걸음은 약속을 지키는 일이요 둘째 걸음은 진실 앞의 용기이다. 세월호 정국도 대통령이 유가족과 국민에게 한 약속을 지키면 금방 풀린다. 진실 앞에 용기 있는 법조인이라면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라는 궤변 같은 법논리를 펴지 않을 것이다. 대통령이 약속을 안 지키고, 법조인이 진실의 용기를 잃고, 여의도가 정치력을 포기한다면, 국민의 국가신뢰는 무너지고 분노가 우리 모두를 삼킬지 모른다. < 전문 발췌 >
 
< 김경재 목사 - 한신대 명예교수 >


[칼럼] 오만과 나라망신

● 칼럼 2014. 9. 29. 15:30 Posted by SisaHan
모든 게 분명해졌다. 박근혜 대통령의 본심이 무엇인지, 그리고 박 정권의 속성이 어떤 것인지 백일하에 드러났다. 그에 대한 해석과 판단은 국민 각자의 몫이겠지만 적어도 박 대통령에 대한 막연한 기대는 접을 때가 된 것 같다.
세월호 특별법에 대해 박 대통령은 엊그제 국무회의와 새누리당 수뇌부들과의 청와대 회동에서 분명하게 밝혔다. 여야가 마련한 ‘2차 합의안’이 최종안이라고. 유족과 시민들이 기약없는 단식을 하고, 눈물을 흘리며 애원해도 박 대통령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것이다. 세월호대책회의가 박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후안무치하고 적반하장”이라고 질타했는데, 박 대통령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본색을 드러낸 새누리당도 마찬가지다. 지방선거와 재보궐선거에서 사실상 압승한 여당은 이제 제 갈 길로 가고 있다. 친여 언론의 우호적인 여론을 등에 업고 반쪽 국회를 열어 법안 통과를 밀어붙일 태세다. 야당까지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그들이 원하는 방향이 무엇인지도 솔직하게 드러냈다. 대기업과 부자들의 주머니는 그대로 놔둔 채(때로는 두둑이 채워주면서) 담뱃값이나 주민세 등을 올려 서민의 호주머니를 털어내겠다고 노골적으로 나오고 있다. 새누리당의 이런 행태가 새삼스럽거나 이상한 것은 아니다. 그들의 지지 기반을 생각하면 당연하다. 선거에서 서민 표를 얻으려고 마음에도 없는 경제민주화, 복지 운운했지만 이제 그런 ‘양의 탈’도 다 벗어던지고 본모습으로 돌아갔다.
대통령과 여당이 이런 마당이니 권력기관이라고 다를까. 이미 청와대 ‘하수인’이 돼 버린 검찰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법원도 국정원 댓글 사건에 대해 ‘정치 개입’은 맞지만 ‘선거 개입’은 아니라는 기상천외의 판결을 내놓았다. 그 뒤 벌어지는 양상은 더 가관이다. 국정원장은 유죄 받은 정치 개입 부분에 대해서도 다투겠다며 기세등등하게 항소했는데 검찰은 청와대 심기를 살피는지 항소 여부를 장고했다.
 
이것이 박 정권의 실체다. 그리고 박 정권의 이런 폭주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40%대 고착 지지율에다 친여 언론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고, 야당까지 지리멸렬한 마당에 거치적거릴 게 뭐가 있겠는가. 더구나 선거가 2년 가까이 남았으니 국민 눈치 볼 필요조차 없는 상황이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박 대통령이 바라는 대로 민생경제가 살아나고, ‘100% 국민행복 시대’가 열릴까. 대통령에 대한 ‘조롱과 모독’이 사라지고,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이 올라갈까. 그렇게 되리라고 믿는 국민은 많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가 될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박 대통령은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국민으로부터 국정운영 권한을 위임받은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이지 전제왕조의 여왕이 아니다. 박 대통령으로서야 자기 뜻대로 나라를 끌고 가는 게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건 오만이고 오산이다. 지금처럼 간다면 그 끝은 파국이다.
 
힘없고 돈없는 사회적 약자와 세월호 유족 같은 가슴 아픈 국민들을 억압하고 배제하면 그 자신이 불행한 대통령이 된다. 저주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 현대정치사에서 그런 경우를 한두번 봐 왔는가. 절대권력을 휘둘렀던 이승만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말로가 어찌됐는지를 되돌아보는 걸로 충분하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지금 그런 파국을 재촉하고 있다. 그럴수록 국민들의 저항은 더욱 거세지고, 그 와중에 민생도, 복지도, 국민 안전도 다 실종된다. 박 대통령이 진정 바라는 것도 이건 아닐 것이다.
 박 대통령이 방문한 캐나다와 미국의 동포들은 <뉴욕 타임스>에 세월호 관련 광고를 싣고, 박 대통령의 일정을 따라다니며 규탄 시위에 나섰다. 나라 망신 운운하는 지적이 나올 게 뻔해 미리 분명히 해 둔다. 나라 망신 시키는 장본인은 동포들이 아니라 박 대통령 자신이다. 왜 나라 밖에서까지 이런 대접을 받는지 곰곰 생각해보기 바란다.
< 정석구 - 한겨레신문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