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부끄러움 모르는 ‘박정희 키즈’ 들

● 칼럼 2014. 11. 11. 19:38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적과 싸워서 이기는 길은 비단 병력의 수, 장비의 우열에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전승의 요체는 군의 정신 전력에 있다. 즉, 엄정한 군기, 왕성한 사기, 그리고 필승의 신념에 있다.” “우리의 국방을 남에게 의존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우리 땅과 우리의 조국은 우리가 지켜야 하고, 우리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해 나가야 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4년 3월29일 육사 제30기 졸업식과 1977년 3월29일 육사 제33기 졸업식에서 한 연설의 일부다. 한민구 국방부 장관이 육사 31기이고, 김요환 육군 참모총장이 육사 34기이니, 사관생도 시절 선배들의 졸업식장에서 이 말을 직접 들었다는 이야기다. 비단 그들뿐 아니다. 김관진 국가안보실장 등 70년대에 초급 장교 생활을 시작한 전·현직 군 수뇌부들은 모두 자주국방의 세례를 받으며 성장한 세대다. 그러니 참으로 역설적이다. 박정희의 딸이 대통령인 시대에, ‘박정희 키즈’들에 의해 자주국방의 날개가 무참히 꺾였으니 말이다.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계획 포기에 대해 우리 군은 “한국군이 아직 북한의 위협에 주도적으로 초동대응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북한에 비해 30배가 훨씬 넘는 국방비에, 최첨단 무기로 무장한 우리 군이 아직도 스스로 허약한 군대임을 자인한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 바로 “엄정한 군기, 왕성한 사기, 필승의 신념” 등 정신 전력에서 북한을 도저히 따라가지 못한다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는다. 하기야 총기 난사, 병영 내 가혹행위, 사단장까지 가세한 성추행, 방산 비리 의혹 등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무슨 엄정한 군기며 왕성한 사기, 필승의 신념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참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다. 그런 말을 하는 군의 태도다. 정신이 온전히 박힌 군 수뇌부라면 부끄럽고 창피해서 얼굴을 못 드는 것이 정상일 텐데 전혀 그런 기색이 없다. 오히려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아온 큰 전공이나 세운 것처럼 의기양양하다. 그리고 고작 하는 말이 “북한의 위협이 진화”하는 상황에서 전작권 전환은 ‘시기’가 아니라 한국군의 대응 능력 등 ‘조건’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연코 말하건대 부끄러움을 모르는 군에게 그 ‘조건’이 충족되는 날은 결코 오지 않는다. 그리고 영원히 다른 나라 군대의 품 안에서 응석받이로 지내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가장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은 김관진 안보실장이다. 그가 합참의장 재직 시절에 전작권 전환을 위한 전략적 이행계획에 서명한 당사자였다가 이번에는 자신의 손으로 그것을 파기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은 아니다. 그는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전작권 전환이 예정대로 진행될 것이라며 상부 지휘구조 개편을 내용으로 하는 국방개혁을 지상과제로 내걸었다. 국방개혁에 “(장관직뿐 아니라) 혼을 걸겠다”는 말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장관직에서 물러나지도 않았을뿐더러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국방개혁 문제는 아예 입 밖에 꺼내지도 않는다.
김 실장은 이번 전작권 환수 포기에 대해 “대통령의 지시”라고 설명했다. 군인이 군 통수권자의 뜻에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의무다. 하지만 일개 장성도 아니고 한 나라의 안보정책을 책임지는 사람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앞선 행동을 스스로 부인하면서 ‘대통령의 뜻’이라는 말 하나로 정당화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그것은 “혼을 거는” 사람이 아니라 “혼이 없는” 사람의 표상이다.
 
그가 국방장관 시절 내걸었던 구호는 ‘싸우면 이기는 전투형 강군’이었다. 하지만 실제 나타난 현실은 ‘싸우기 겁내는 종이호랑이 군대’가 됐다. 그렇다고 그가 외교안보 분야에 대한 폭넓은 시야와 유연한 전략적 사고로 한반도 평화 정착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기를 기대하기도 어려워 보인다. 다른 모든 것을 떠나, 자신의 손으로 서명한 전작권 환수 계획을 스스로 백지화했다면 최소한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도리이고 상식이다. 
그를 보면서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 대한민국에 과연 진정한 무인(武人)이 있는가. 그저 권력의 바람 부는 대로 정치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출세지향주의자들뿐!
< 한겨레신문 김종구 논설위원 >


[1500자 칼럼] 비빔밥 가족

● 칼럼 2014. 11. 3. 19:33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한식에 대한 인기가 북미에서 나날이 높아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한식 세계화’를 위한 다양한 행사가 국내외에서 자주 열리고 있다. 우리 고유의 전통 음식을 만드는 경연대회는 물론이고 한식의 우수성과 색채의 다양화에 착안한 강습회도 눈에 띄게 많아졌다. 어떻게 하면 한국 음식도 일본의 스시, 타이의 패타이, 이태리의 스파케티와 피자처럼 세계인이 즐겁게 자주 찾을 수 있게 만드느냐가 관건일 것이다. 한식 본연의 모습을 갖추고도 외국인의 입맛에 맞게 조리와 세팅(setting)에 중점을 두고 한식의 독특한 맛과 향을 내어 고유의 맛을 살리는데 주력해야 하리라. 특히 세계 만방에 한국기업들이 진출하고, 싸이 김연아 박세리 같은 월드 스타들을 배출하며, 세계 경제를 이끌어가는 G20국에 속하여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치솟고 있는 현실이니 국가 이미지 상승과 직결될 수 있는 한식의 인기를 드높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의 며느리와 사위는 한식을 특별히 좋아하는 서양인들이다. 우리 가족이 모이는 자리에서는 한결같이 한식을 기대하고 있어 장거리에 살고 있는 그들을 방문할 때마다 내 몸은 분주하고 고달프다. 그러나 마음만은 날아갈 듯이 가볍다. 결혼한 자식들로부터 한국음식 조리법에 대한 문의를 들을 때나 함께 한식을 나눌 때만큼 보람된 일은 없다. 저절로 신바람이 나서 손이 많이 가는 음식들을 준비하면서도 입은 함박만하게 벌어진다. 그들 역시 우리 식구가 되어 실수를 반복하면서도 이제는 한식 몇 가지는 자신 있게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한식의 맛도 제법 낼 줄 알아 자신감이 붙은 며느리는 김치 담그는 일에 도전장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한 집안에 동, 서양의 혼합문화가 있으니 조심스러운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언어 소통이 수월치 않은 나와 음식을 공유할 수 있음은 천만다행이다. 한식의 독특한 맛을 즐기는 그들과 적어도 음식문화의 벽은 허물었으니 말이다. 만약 한식에 손을 대지도 않고 관심조차 두지 않는 가족 구성원이 한자리에 있다면 밥상머리에서 나누는 가족애가 정상적으로 자라날 수가 없지 않은가. 서로 음식 냄새에 신경을 쓰다 보면 모처럼 마련한 그 자리가 불편하기만 할 것이다. 
 
비빔밥은 우리 애들이 자주 만드는 한식 메뉴다. 갖은 색상의 나물을 썰고 볶아 그 위에 계란 후라이를 보기 좋게 얹어 내 놓으면 먹기 아깝다고 근사하다고 사위는 사진기를 들이댄다. 고추장과 참기름 소스로 그 나물들을 비벼 먹으면 맛이 최고다. 그 맛에 빠져 건강식 메뉴인 비빔밥에 관심을 둔 아들 내외에게 몇 해 전 돌솥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었다. 그들은 고슬고슬하고 따끈한 돌솥비빔밥을 지으며 한식의 우수성을 말하곤 한다. 우선 맛있고 모양있는 건강식이란다. 한 가지를 더 추가한다면 온 가족 사랑이 담긴 음식이 아닌가 한다. 서로 다른 개성들이 가족으로 모여 양보하고 신뢰하고 배려하며 마치 각종 나물들이 고추장 소스를 통해 하나가 되듯 서로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가족 같은 비빔밥이니 말이다. 음식만큼 서로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자리는 없을 것이다. 입이 즐거우면 자연히 마음이 열리고 따뜻한 정감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언젠가부터 돌솥비빔밥은 아들 집의 손님상 메뉴로 당당하게 자리잡게 되었다. 우리 가정의 인기 메뉴인 비빔밥이 한식 세계화 메뉴로 선택되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로 여겨진다. 다만 한식 메뉴의 서비스와 요리사의 청결위생에 대한 의식과 한국인의 정서를 드러내는 인테리어 구상에도 힘쓴다면 ‘한식 세계화’의 전망은 밝다고 본다. 
 
온 지구촌의 벽이 허물어지고 있는 추세이다. 세계 방방곡곡은 인종을 초월한 여행객들로 넘쳐나고 다른 문화와 종교, 음식과 언어에 대한 관심의 열기가 더해가고 있지 않은가. 아마도 머지않아 각 나라의 고유문화를 뛰어넘으며 세계인이 하나로 큰 조화를 이루는 비빔밥 시대가 올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 원옥재 - 수필가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원, 전 회장 >

 

[한마당] 불안한 세상과 선한 권력

● 칼럼 2014. 11. 3. 19:31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위기일발이란 바로 그런 찰나를 묘사하는 말이다.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총리와 장관·국회의원 등이 한자리에서 괴한의 총을 맞을 뻔했다. 자칫 나라의 수뇌부가 몰살 당해, 무정부 상태에 빠질 수도 있었던 위험한 장면이었다. 의사당에서 국정을 논의 중인 회의장 바로 문밖에 총을 든 괴한이 난입해 총격전을 벌였다. 그 자리에 있던 인사들이 얼마나 놀랐으면 책상과 의자를 쌓아 문쪽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깃대를 뽑아 여차하면 창처럼 무기삼아 찌르겠다고 작정했겠는가.
정정이 불안한 아프리카나 중동에서 있었던 일이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 톱10에 드는 캐나다의 심장부 국회의사당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다행히 범인이 국회 경위에게 사살되어 다들 무사했지만, 캐나다의 국가 운명이 좌우될 뻔한 엄청난 쑈크요 가슴 쓸어내릴 해프닝이었다.
 
라이플총을 든 한명의 괴한이 뛰어든 이 사건은 그러나 단순한 해프닝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는 사안이어서 충격파가 크다. 단 한 두명의 도발에도 나라가 휘청대고 위기에 처할 수 있음을 실감나게 보여주었고, 요인경호와 국가기관 방호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드러내 탄식을 자아냈다. 특히 잔혹성으로 소문난 IS 이슬람국가의 비수가 마침내 이쪽을 겨냥한 것 아니냐는 위기의식을 돋게 했다. 우리는 안전하다고 방심했던 국민들에게 결코 테러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불안감이 번졌다. 한마디로 캐나다의 안전신화에 의문부호를 던지는 전환점이 된 것이다.
하지만 정확히 짚어보면 ‘캐나다는 안전하다’고 믿어온 그간의 생각들이, 사실은 허상을 믿었던 것은 아닐까. 대테러 전쟁의 선봉에 나선 미국이 바로 이웃이고, 미국을 항상 뒤따르며 참전하고 적극 협력하는 나라가 캐나다다. 그런데도 미국은 어디든 접근 자체가 철통보안을 유지하는 나라인데, 그 바로 인접국임에도 허술하기 짝이 없는, 아니 태평스런 모습이 캐나다가 아니었나. 최강국 미국이 옆에 있어서 안심이라고 마음을 놓은 것일까.
 
정보당국이 이른바 ‘외국인 테러전투원’ 혹은 IS 등 테러단체에 가담한 것으로 보이는 백여 명을 추출해 감시 중이라는 소식도 있었다. 그렇다면 일찍이 국내테러를 예상한 대비태세를 갖췄어야 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총리와 정계 거물들이 피격 위기를 겪고서야 보안강화에 나서는 것은 정보판단과 위기관리 능력에 의문을 던지고도 남는다. 
토론토 도심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발생하는 총격과 피살사건에서 느끼는 시민들의 불안과는 차원이 다르다. 국민들이 무차별 테러를 내 이웃, 혹은 내 문밖과 앞마당에서 당할 수도 있다고 위기감을 갖는 것은, 삶의 질과 정신건강과 행복지수를 무너뜨리는 후진적 불행요인이다. 국가와 국정 지도자들의 준엄한 책무요, 결연한 방비태세가 필요한 이유다.
사실 온 세계가 극과 극으로 대립하고 처참한 보복으로 점철되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지구촌 어디든 안전한 곳은 갈수록 찾기가 어렵게 되어간다. 총칼과 무단 권력의 폭압이 아니어도 일상의 모든 것이 감시당하고 추적당하는 엄혹한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전화와 인터넷과, 스마트폰과 SNS, 그리고 거리의 CCTV들…
그렇다고 심심 산골에 쳐박혀 원시인처럼 살 수는 없는 노릇… 어차피 사면초가의 행로요 불안한 삶이라면, 최선의 길은 ‘충직한 보호자’와 ‘착한 감시자’를 만나는 것 말고 달리 방법이 있겠는가.
 
국민 몇몇은 당해도 상관없다며 권력안보에만 급급한 정권책임자들이 아닌, 한 사람 한 시민을 소중히 섬기고 든든히 지키는 신뢰의 권력을 찾아야 한다. 국민들 일거수일투족을 감찰하며 정권안보에 위해요소를 잡아내고 트집 잡기에 혈안인 못된 감시권력이 아닌, 국민의 행복과 평안을 지키는 데만 관심을 둔 선한 권력을 만나는 것 말이다. 
결국은 우리들이 택하고 우리 손으로 창출해 내야하는 과제이긴 하지만…!
 
< 김종천 편집인 >


[사설] 부실 덩어리 ‘MB 자원개발’, 철저히 조사해야

● 칼럼 2014. 11. 3. 19:29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참여연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정의당이 27일 공동 기자회견을 열어 이명박 정부의 자원개발 관련 의혹에 대한 국회 국정조사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문제가 드러난 관련 공기업의 경영진에 대한 검찰 고발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명박 정부 때 이뤄진 국외 자원개발 사업의 총체적 부실과 비리 의혹은 이번 정기국회 국정감사에서도 여러 건 불거진 만큼 엄정하고도 전면적인 조사는 마땅히 뒤따라야 한다.
국외 자원개발은 이명박 정부가 내세운 최대 치적 가운데 하나다. 이 전 대통령 스스로 국외 순방 때마다 자원외교의 선봉에 섰고 이상득 전 의원과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 등 측근 인사를 특사로 내세우는 등 야심차게 사업을 추진했다. 여기에는 광물자원공사, 석유공사, 가스공사 등 에너지 관련 공기업들이 총동원됐다. 양해각서(MOU)를 맺는 정도의 유아적인 성과를 마치 사업이 다 성공한 것처럼 과장되게 홍보하면서 국민들을 기대에 부풀게 하기도 했다.
 
그런데 결과는 참담하다. 에너지 공기업들이 5년 동안 대략 21조원이 넘는 사업비를 투입했지만 이제까지 성과를 내 회수한 돈은 1조원가량에 머물고 있다. 확정 손실만 이미 1조원을 넘어선 대형 ‘부실 덩어리’들만 속속 드러나고 있다. 광물자원공사의 멕시코 볼레오 광산 투자, 석유공사의 캐나다 하베스트사 인수 뒤 매각, 가스공사의 캐나다 셰일가스 개발 사업 등이 대표적인 경우다.
원래 자원개발 사업은 회수 기간이 오래 걸리고 실패 위험도 높다. 그런 만큼 더욱 신중하면서도 치밀하게 추진해야 한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에서 이뤄진 대부분의 사업은 현장조사와 같은 기본적인 절차조차 생략한 채 졸속으로 추진하다 낭패를 초래했다. 이사회의 심의 등 각 공기업들의 내부검증 및 감시제도는 무시됐다. 정권의 비호와 묵인 아래 사업을 추진한 공기업들은 적자 누적에다 부채 급증으로 추가적인 재정지원 없이는 견디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이명박 정부의 자원외교는 국민에게 엄청난 빚만 남기는 대국민 사기극으로 끝날 가능성이 농후하다.
 
국민에게 부담을 주는 대규모 부실 국책사업의 재발을 막으려면 관련 부처의 당국자는 물론이고 해당 공기업의 경영진에게 법적 책임을 철저히 물어야 한다. 국회의 국정조사와 청문회는 당연하다. 정부와 공기업이 국민 세금을 제대로 썼는지를 사후적으로도 엄중히 따지는 것은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서 국회의 기본적인 임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