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로 양승태 대법원장이 6년 임기의 절반을 맞는다. 지난 3년은 우리 사회의 양극화와 갈등이 심화하면서 민주주의와 기본권 수호의 최후 보루인 사법부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했던 시기였다. 그런 기대에 대법원이 온전히 부응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한겨레>가 취재해 보도한 내용을 보면, 대법원은 지난 3년 동안 변화와 전진을 꺼리는 모습을 뚜렷이 보였다. 무엇보다 시민적 기본권의 보호와 확대 대신 국가 이익과 기득권을 중시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전임 이용훈 대법원장 시절에는 국가를 상대로 한 사건에서 시민의 권리를 확대하거나 약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취지의 판례 변경이 적지 않았지만, 지금 대법원에선 시민적 권리의 보호·확대로 평가할 만한 판례 변경의 숫자나 비중이 크게 줄었다. 국민에겐 엄격하고 국가에 관대한 판결도 여럿이다. 대표적인 국가폭력 사건인 과거사 사건 등에선 민법 규정을 앞세워 국가의 배상부담을 줄여주더니, 통상임금 사건에선 노동자들의 정당한 권리행사를 신의칙 위반이라는 엉뚱한 이유로 가로막았다. 국가의 절차적 잘못이 문제된 제주해군기지 사건 등에서도 대법원은 하급심과 달리 국가의 손을 들어주었다. 사회적 이목을 끌면서 우리 사회의 가치기준을 높인 판결은 전임자 때에 견줘 크게 줄었다.

그런 모습에서 사법부가 국가권력의 뜻을 따르고 추인하는 데 급급했던 과거 암흑기를 떠올리는 것은 당연하다. 퇴행의 조짐은 대법원에서 다양한 견해와 토론이 줄어든 데서도 확인된다. 대법원이 우리 사회의 보편타당한 기준을 제시하는 최고 법원 본연의 구실을 다하자면 사회의 다양한 의견이 반영되고 토론돼 걸러지는 전원합의체가 활성화돼야 한다. 하지만 지금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선 전임 대법원장 때에 견줘 반대의견이나 별개·보충 의견이 확연히 적다. 다양성을 앞세워 임명된 대법관들도 대부분 대세에 순응하는 쪽이었다. 지역·학교·성별 등 형식적 기준의 다양화로는 ‘비슷한 생각’을 가진 판사 출신들로만 대법원이 채워지고 보수 일색의 판결이 잇따르는 것을 막지 못하는 것이다.
 
이제라도 대법관 구성을 실질적으로 다양화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 다양한 가치관과 경험을 지닌 사람들이 대법원에 진입하지 않는다면 대법원이 우리 사회의 가치와 기준을 제시하는 정책법원으로서 제구실을 하긴 어렵다. 대법원이 정책법원을 지향한다면 획기적인 변화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22일 창립 40돌 기념미사를 올렸다. 정의구현사제단은 엄혹하고 어두운 시절 한 줄기 등불과 같이 나타나 우리 사회를 이끌어온 한국 민주화운동의 증인이고 주역이었다. 1974년 지학순 주교가 ‘유신헌법 무효’ 양심선언을 발표하고 체포돼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은 뒤 김승훈·함세웅 등 젊은 사제들이 중심이 돼 그해 9월26일 결성한 것이 정의구현사제단이었다. 이후 사제단은 반유신독재 싸움에 앞장섰다. 1980년 5·18 직후에는 살기등등한 신군부 군홧발 아래서 광주학살 진상을 발표했으며 1987년 5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 수사조작을 폭로해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사회의 형식적 민주화 이후에도 사제단의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2007년에는 김용철 변호사와 함께 삼성 비자금 사건을 폭로했으며, 2009년 용산 철거민 참사 시국미사 등 이명박 정부의 반민주적·반인권적 역주행을 비판했다. 또 제주 강정마을, 밀양 송전탑, 쌍용차 해고자 등 사회적 약자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사제단이 있었다. 사제단의 예언자적 활동은 박근혜 정부 들어서도 계속됐다. 지난해에는 국가기관의 대선개입과 국정원의 여론조작을 비판하는 시국미사를 잇달아 열었으며,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뒤에는 광화문에서 8월25일부터 열흘 동안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전국 사제·수도자 단식기도회를 열었다.
이렇게 지난 40년 동안 정의구현사제단은 고난의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고통 앞에는 중립이 없다’, ‘교회는 약자들을 돕는 야전병원이 되어야 한다’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했지만, 정의구현사제단이야말로 이 말을 일찍부터 앞장서서 행동으로 실천해왔다고 할 수 있다.
 
눈여겨볼 것은 정의구현사제단이 젊은 사제들의 끊임없는 충원으로 저변을 넓히며 노장청의 조화를 이루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 사제단의 활동에 천주교 수도자들이 적극 동참하는 것도 주목할 대목이다. 광화문 세월호 단식기도회에 100명이 넘는 수녀들이 내내 함께한 것이 단적인 사례다.
한국 민주주의·인권 역사에서 정의구현사제단은 중차대한 구실을 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사제단에 요구하는 바는 여전히 많다.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사제단이 탄생했는데, 40년 뒤 다시 나라가 그 시절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는가. 사제단이 우리 사회의 빛과 소금으로 기여해주기를 기대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사제단의 올곧은 실천 40년에 경의의 박수를 보낸다.


[한마당] 공감능력과 좋은 지도자

● 칼럼 2014. 9. 29. 14:26 Posted by SisaHan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간 지 겨우 한 달 지났는데 마치 아득한 옛일처럼 느껴진다. 
교황이 머무는 동안 사람들 마음은 잠시나마 먹구름이 걷힌 맑은 하늘이었다. 교황의 말 한마디, 눈짓과 손짓 하나에까지 온 나라의 눈과 귀가 쏠렸던 걸 보면 한국에 머무는 동안 프란치스코 교황은 사실상 우리 국민의 최고지도자였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은 대통령한테나 바랄 법한 관심과 배려를 교황에게 요구했고, 교황은 그 요구에 하나하나 응답했다. 
그랬던 교황이 서울을 떠나자마자 나라가 방한 전으로 되돌아갔다. 언제 그랬냐는 듯 대통령은 고통 속에 뼈가 삭아가는 세월호 유가족의 진실규명 요구를 매몰차게 차버렸다. 교황 방한은 지도자가 누구냐에 따라 나라의 분위기와 사람들 삶의 표정이 확연히 달라진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해주었다.
 
지난해 한국을 다녀간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방한 대담에서 지도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발언을 했다. 전제적인 지배자는 당연히 거부해야 하지만, 지도자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되며, 누가 지도자가 되느냐 하는 것은 여전히 정치의 핵심을 이루는 문제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바디우는 또 지도자와 대중이 ‘정신분석학적 전이 관계’에 있음을, 다시 말해 모범과 모방의 관계에 있음을 강조했다. 사람들은 좋은 지도자에게 찬사를 보낸다. 찬사는 모방 욕구로 이어진다. 지도자는 삶의 모델이 되고, 사람들은 지도자에게서 삶의 자세를 배운다. 그것이 ‘전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야말로 좋은 지도자의 사례라 할 만하다. 
교황은 어디를 가든 자기를 낮추는 태도로 일관했다. 몸도 움직이지 못하는 장애아들을 일일이 껴안고 볼을 비비고 입을 맞췄다.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는 말은 겸허해서 더 큰 감동을 주었다. 경청과 섬김의 리더십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우리는 교황 방한 중에 그런 리더십이 중생의 고통과 함께하는 모습을 보았다.
 
지도자와 대중의 ‘전이 관계’가 좋은 결과만 낳는 것은 아니다. 반대 경우도 있다. 얼음덩어리 같은 지도자가 들어서게 되면 그 지도자의 지배력 아래 있는 사람들도 가슴속에 얼음을 품는다. 세상은 비정하고 무감각한 곳이 된다.
스코틀랜드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인간 본성’을 다룬 저작에서 다른 사람들의 아픔과 슬픔을 느낄 줄 아는 공감능력이야말로 도덕성의 바탕이라고 선언했다. 흄은 우리의 공감능력을 현악기의 떨림에 비유했다. “현 하나의 떨림이 나머지 현들에 전달되듯이 감정은 다른 사람에게 쉽게 옮아가며 결국 모든 사람에게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현과 현이 함께 떨려 소리를 내는 것, 이것이 공감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호응할 줄 아는 공감능력이 세상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든다.
 
그런데 지도자가 처음부터 공감능력이 없거나 스스로 공감능력을 말살했다면, 그 지도자를 따르는 사람들도 공감능력을 억누르고 차단한다. 현이 끊어지면 동정심도 끊어진다. 그런 환경에서는 멀쩡하던 사람도 감정 없는 사람이 되고 소시오패스도 차가운 본능을 거리낌없이 드러낸다. 나치 지도자와 추종자 사이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흄의 벗이었던 장자크 루소는 <에밀>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만드는 것은 인간의 약함이다. 우리의 마음에 인간애를 심어주는 것은 우리들 공통의 비참함이다.” 
약함도 비참도 모르는 지도자 밑에서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사람, 타인의 고통을 비웃고 즐기는 사람들이 번성한다. ‘일베’의 폭식투쟁 같은 반인륜 행위는 난데없이 나온 것이 아니다. 그런 야만을 목격할 때마다 좋은 지도자에 대한 그리움이 커진다. 
< 한겨레신문 고명섭 논설위원 >

 

[1500자 칼럼] 당신의 리차드 파커는

● 칼럼 2014. 9. 11. 19:08 Posted by SisaHan
요즘은 뉴스를 접하기가 겁이 난다. 연일 세계적인 자연재해와 수많은 인명피해로 이어진 대형사고가 넘쳐나니 말이다. 잠시도 두려움과 긴장을 풀 수 없는 불확실한 세상이 오늘이다. 모처럼 그간 깊숙하게 쌓인 우울증을 명쾌하게 다스려줄 감동적인 영화를 찾아 나선다. 

불란서계 캐나다인 작가 얀 마텔(Yann Martel)의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라이프 오프 파이(Life of Pi)’. 이 영화는 태평양 한 복판에서 227일 동안을 표류하면서도 결코 절망하지 않는 파이 소년의 강한 모험심과 삶을 향한 인간의 의지를 보여준다. 파이는 인도 남단에 있는 프랑스령 폰드체리 지역에서 살았다. 가족이 운영하던 동물원에 대한 정부 지원금이 끊기자 캐나다로 이주를 결정하고, 그들이 소유한 진귀한 동물들을 배로 이송하던 중 험한 폭풍우를 만난다. 배가 침몰하여 가족을 모두 잃고 파이만이 겨우 생명을 건진다. 가까스로 탄 구명보트 안에는 바나나 뭉치를 갖고 있는 원숭이, 다리 다친 얼룩말, 굶주린 사자, 리차드 파커라 불리는 뱅갈 호랑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성난 파도와 찌는 듯한 무더위, 갈증과 배고픔보다도 구명보트 안에서 동물들끼리 서로 공격하며 싸우는 일이 더 위험했다. 그 중에서도 호시탐탐 파이의 생명을 노리고 있는 뱅갈 호랑이 리차드 파커와 생사를 걸고 맞서 싸우는 이야기가 주제다. 이안(Lee Ang)감독의 3-D촬영으로 바다 밑의 환상적인 정경도 한 몫을 한다. 배에서 발견한 생존지침서로 리차드 파커와 바다 위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습득하는 과정도 인상적이다. 팽팽한 긴장 속에서도 기지를 발휘하여 막대기와 호루라기로 호랑이를 길들이며 잡혀 먹히지 않으려고 맞서는 필사적인 도전정신이 활기를 준다. 특히 자신이 살아남기 위하여 생명의 적(敵)인 리차드 파커에게도 먹이를 공급해야 하는 아이러니는 개인주의에 빠져든 현대인에게 깊은 의미를 남긴다. 

내 인생의 바다에서 만난 리차드 파커의 정체는 무엇인지, 되돌아본다. 그 어떤 외적 요소보다도 내 안에서 거센 풍랑을 일으켰던 또 하나의 나 자신이 바로 나의 적(敵)이었던 것 같다. 이 땅에서 생업인 코너 스토어를 30년간 운영했었다. 한창 자라나던 유년기 아이들 양육과 코너 스토어와 집안 일을 병행하면서 나는 나날이 빈 껍데기가 되어갔다. 당시만 해도 넘치는 자신감과 뜨거운 열정을 지녔으나 아무 것도 도전할 수 없는 단단한 철창으로 막혀있던 현실이 깊은 상실감을 빚었던 것이다. 끝내 삶의 의욕과 의지마저 상실했는데 그 위태로운 역풍(逆風) 끝자락에서 글과 우정을 만났다. 휘청대던 신앙도 바로잡고 삶의 원동력도 되찾아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은퇴 후, 상황이 현저하게 달라졌다. 언젠가부터 나의 리차드 파커는 정체성을 잃은 상실감에서 변화를 거부하는 안주(安住)로 자리바꿈하고 말았다. 장성한 자녀들의 출가와 은퇴로 여가와 평안을 누리자 새로운 도전과 열망을 잠재우며 안정의 길을 택한 결과이다. 꿈과 비전을 버린 생활은 젊음을 잃은 것같이 건조할 뿐만 아니라 목적지를 잃고 제자리걸음만 하기 십상이 아닌가.
 
이럴 땐 싱싱한 메기가 필요하다. 냉장시설이 없던 과거에 북해어장의 유럽 어민들이 청어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썼던 방법 말이다. 청어수조에 천적인 메기를 한 마리 넣으면 청어들이 잡아 먹히지 않으려고 도망 다니면서 더욱 건강해진다는 현상에서 비롯된 <메기효과>. 적당한 도전정신은 긴장과 자극을 주며 생동감을 일으킨다. 그래서 나도 삶의 보람을 키워가는 것들을 되찾아 생활에 윤활유를 치며 에너지를 충전하고자 한다. 아직도 내 선택에 따라 남은 내 삶의 내용과 질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위로를 주는 말인가. 당신의 리차드 파커는 무엇인가? 거센 풍랑을 만난 당신에게 영화 <Life of Pi>는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 원옥재 - 수필가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원, 전 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