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실제적 진실과 진영논리

● 칼럼 2014. 10. 28. 17:56 Posted by SisaHan
일찍이 헤겔은 어느 책에선가 “신문은 근대인의 아침기도”라는 제법 근사한 말을 남겼다지만, 요즘 현대인의 아침은 스마트폰의 알람 혹은 푸시로 날아오는 뉴스 속보 혹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메시지가 ‘점령’한 지 오래다. 그러니 신문이 온전할 리 없다. 아침기도는 커녕 지는 해를 마주한 나그네처럼 마음만 분주하다.
그래도 신문들이 여태 신줏단지처럼 시렁 위에 모셔두거나 그런 척이라도 하는 게 있다면, 사실의 확인, 확인된 사실의 보도라는 원칙이다. 
“논평은 자유로워야 하지만, 사실은 신성한 것”(<가디언>)이라든가, “신념은 사실을 통해서만 말한다”(<르 몽드>)는 따위 레토릭들은 의견에 앞서 사실이 여론을 이끌어야 한다는 민주적 의사소통을 상징하는 말들로 여겨진다.
그러나 모든 천상의 언어는 지상의 연옥을 만나는 순간 피할 수 없는 ‘시험’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세월호 사고 발생 한 달이 돼가던 5월13일, <한겨레>는 두 면에 걸쳐 ‘세월호 여섯 가지 소문과 사실 확인’ 기사를 내보냈다. 그 소문들은 1)사고 당일 오전 7시20분 <한국방송> 자막에 ‘구조 요청’이 떴다. 2)‘에어포켓’이 있었다. 3)침몰 원인은 잠수함 충돌이거나 어뢰이거나 좌초다. 4)탈출하다 손가락 골절된 시신들 다수 발견됐다. 5)외부 불순세력이 개입해 정치공세를 벌인다. 6)정부가 일부러 ‘다이빙벨’ 투입을 막았다는 것 등이다. 
당시 에스엔에스 등을 온상으로 창궐하던 대표적 풍문들을 꼼꼼히 검증해 무엇이 사실인지를 독자들에게 보여주려 했다.
기사가 나가자 소수의 악플과 비난이 다수의 공감과 격려를 압도하는 듯 보였다. 사실과 의견의 경계를 애써 무시하려는 ‘어떤 사람들’은 기사를 쓴 기자들을 주저없이 ‘기레기’로 매도했다. 그런 반응은 주로 <한겨레>를 ‘자기편’이라고 생각해왔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서 나왔다. 그들 중엔 대놓고 ‘절독’을 들먹이며 ‘위협’하는 부류도 있었다. 사실이야 어떻든 자신들의 확신만을 기사로 쓰라는 노골적인 압력으로 들렸다. 그런 악다구니에 놀라 왜 그런 기사를 썼냐고 은근히 따져 물으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는 일부 ‘내부자’들도 없지 않았다.
그때도 이미 세월호 사건은 진영논리에 휘말리고 있었다. 무엇이든 권력투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 사회에서 이 사건 역시 무사할 수는 없었다.
 
‘기레기’라는 낙인에 괴로워하던 후배 기자들이 지난 11일 이 기사로 큰 상을 탔다. 
카이스트 미래전략대학원이 주는 ‘과학저널리즘 대상’을 수상한 것이다. 56개 출품작을 심사한 전문가 27명은 <한겨레> 기사를 “실제적 진실 확인을 막아온 음모와 거품을 제거”하고, “과학적 분석 및 확인을 통해 여론의 방향을 잡”았으며, “정확한 정보를 국민에게 전달”하고, “진보-보수 진영의 득실을 따지지 않고 균형감각을 잡은 뛰어난 보도”라고 평했다.
재난 기사로 받은 상에 자화자찬을 늘어놓을 일은 아니지만, 적어도 좋은 신문의 미덕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확인받았다고 자평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지면에서 훤히 드러나 보이는 광고 매출 감소, 페이지뷰로 신문들의 온라인 밥줄을 움켜쥔 거대 포털들, 우르르 뭉쳐 다니며 ‘힘’을 쓰는 에스엔에스, 매사에 작동하는 진영논리가 얽혀 돌아가는 현실 앞에서 사실과 의견 사이에 놓인 둑은 조금씩 몰래 허물어지고 있다. 우리는 먼저 사실이 있은 뒤에야 의견이 있는 것이라고 의연하게 언제까지나 말할 수 있을까.
아침에 현관문을 여니 하필 재활용 쓰레기로 내놓을 사과상자 위에 막 배달된 신문 뭉치가 무심히 던져져 있다.
< 한겨레신문 강희철 사회부장 >


검찰이 인터넷상 허위사실 유포를 단속하겠다며 위법까지 서슴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12일 공개된 대검찰청의 9월18일 범정부 유관기관 대책회의 자료를 보면, 정치권력의 뜻에 맞추겠다고 법 규정이나 기술적 한계 따위는 깡그리 무시한 검찰의 ‘맨얼굴’이 생생하다.
 
검찰이 내놓은 사이버 명예훼손 대응방안의 상당수는 기술적·법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것들이다. 검찰은 회의자료에서 문제가 되는 글의 삭제를 포털에 직접 요청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보통신망법은 허위사실이나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불법정보를 삭제·차단하려면 방송통신위원회가 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시정요구를 하거나 법원의 판결이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검찰은 이런 정상적인 심의절차나 법원의 판결을 뛰어넘어 자체 판단만으로 포털에 삭제나 차단을 요구하겠다는 것이다. 초법적 발상이라는 비판을 피할 길 없다. 검찰은 또 특정 단어를 검색하거나 조회수가 급증한 글을 찾는 방법으로 실시간 인터넷 모니터링을 하겠다고 밝혔지만, 이 역시 기술적으로나 법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한다. 무엇보다 명예훼손의 당사자도 아닌 검찰이나 경찰이 인터넷 게시글을 검열할 권한이 있는지부터 의문이다. 회의에선 여러 관계자가 이런 점 등을 들어 검찰 쪽 방안에 난색을 표했지만, 검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되레 회의 뒤 포털이 협조하기로 했다고 주장했다. 종주먹을 들이대면서까지 민간업체를 윽박질러 그럴싸하게 포장한 대책을 보란 듯 내놓는 형국이다.
 
검찰이 이렇게나 무리하게 일을 벌이려 드는 이유는 자명하다. 검찰 회의자료에는 대책회의 이틀 전 열린 국무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한 말이 두드러지게 강조돼 있다. 이번 단속이 박 대통령의 말 때문에 서둘러 추진됐음을 스스로 드러낸 셈이다. 우선 단속할 대상이 공적 인물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니, 실시간 인터넷 검열이 주로 대통령에 관한 것에 집중되리라는 점도 불 보듯 뻔하다. 헌법 원칙이나 법 규정은 내팽개친 채 대통령의 ‘호위무사’가 되겠다고 발버둥치는 듯한 검찰의 모습이 민망하기까지 하다.
그렇지 않아도 박근혜 정부 들어 수사기관의 개인신상정보 감시가 크게 늘었다. 이동통신사가 지난해 수사기관에 제출한 개인신상정보 건수는 1000만건이 넘어, 이명박 정부 때 같은 시기의 두 배에 이른다. 카카오톡에 이어 또다른 메신저서비스인 네이버 밴드도 대거 압수수색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무도한 사이버 검열을 대체 어디까지 밀어붙이겠다는 것인가. 


세월호 참사 당일 박근혜 대통령의 행적과 관련한 기사를 쓴 일본 <산케이신문>의 가토 다쓰야 전 서울지국장이 지난 8일 정보통신망법의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뒤 나라 안팎에서 비난과 반발이 거세다.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옥죈 일이니 비판은 당연하다.
 
이번 일은 이미 국제적 논란이 됐다.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유감의 뜻과 강한 우려를 밝혔다. 미국도 “표현의 자유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와 “한국의 관련 법에 대한 염려”를 재확인한다며, 이번 사태를 주시하면서 한국 정부와도 접촉했다고 내비쳤다. 일본은 물론 외국 주요 언론도 한국의 언론 자유에 강하게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유신시대나 군사정권 때 한국을 보는 시선이 꼭 이랬다. 박근혜 정부의 시대착오적인 여론통제 시도가 한국의 국가 이미지를 30~40년 전으로 추락시킨 것이다.
그로 인한 외교적 손실도 만만찮다. 이번 일로 일본은 한국을 공격할 좋은 소재를 얻게 됐다. 군대 위안부 문제 등 한-일 관계의 현안은 한쪽으로 밀쳐지게 됐고, 미국 등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는 데서도 일본이 우월한 위치에 설 가능성이 커졌다. 일본은 이 기회에 한-일 관계의 난항 책임을 한국에 돌리려 할 것이다. 정부가 이런 결과를 염두에 두기나 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산케이 기자 기소는 법리나 판례, 국제적 흐름에도 맞지 않는다. 유엔을 비롯한 많은 국제기구가 명예훼손의 형사처벌 제도를 폐지하도록 권고하고, 폐지하는 나라도 늘고 있다. 대법원도 국가기관과 공직자의 업무에 관련한 의혹 제기는 명예훼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밝혀왔다. 정책 결정이나 업무 수행과 관련된 일은 국민의 감시와 비판의 대상이 돼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공적 관심사에 대한 보도에선 언론 자유에 대한 제한이 완화돼야 한다는 판례도 있다. 산케이 기사가 사실 확인도 제대로 하지 않은 부실한 선정 보도인 것은 분명하지만, 기사가 문제 삼은 대통령의 ‘사라진 7시간’은 공적 업무 수행에 대한 문제제기일 수 있다. 직업윤리에 대한 비난을 넘어 형사처벌의 대상이 될 이유까지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검찰은 대통령의 말이 떨어지자 수사에 착수했고 기소까지 강행했다. 
이번 일이 정치적 기소라는 비판이 나오는 것은 이런 사정들 때문이다. 그 결과가 국제적 망신이다. 명예훼손은 피해자가 원하지 않으면 처벌하지 않는 죄다. 박 대통령은 나라 망신만 시킬 이번 일을 이쯤에서 접어야 한다. 


[1500자 칼럼] 선비의 지조가 그립다

● 칼럼 2014. 10. 21. 15:50 Posted by SisaHan
“지난번에 만나고 싶다는 바람을 이루기는 했어도, 한순간 꿈처럼 짧아서 의견을 깊이 물을 겨를이 없었습니다.” 1559년 1월 58살의 퇴계 이황이 32살의 고봉 기대승에게 편지를 보냈다. 조선 지성사의 최대 사건으로 불리는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의 시작이었다.
 
사단칠정 논쟁은 유례없는 사건이었다. 성리학의 종장인 퇴계가 26살 연하의 신참 유학자 고봉에게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의견을 구했다는 것도 유례가 없었고, 영남과 호남을 편지로 넘나들며 논쟁이 8년이나 지속됐다는 점에서도 유례가 없었다. 사단(측은지심·수오지심·사양지심·시비지심)이라는 마음과 칠정(희·로·애·구·애·오·욕)이라는 감정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가 핵심 쟁점이었다. 성리학의 인간관으로 보면, 우리 본성은 본디 선하지만 그것이 욕망으로 분출될 때 세상사의 탁한 기운과 섞여 본래의 선함을 잃어버리기 쉽다. 어떻게 하면 이 욕망을 다스려 본성의 인의예지를 바르게 실현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두 사람의 근본 관심사였다.
지난달 <한국방송>(KBS) 이사장이 된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의 발언들이 우리의 역사의식을 흔들었다. 이 이사장은 친조부 이명세의 친일 행위를 변호하는 중에 “할아버지는 유학의 세를 늘려가기 위해 일제 통치 체제하에서 타협하며 사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를 보면 이 이사장의 조부 이명세는 천황을 떠받드는 황도유학을 주창하고 일제의 한반도 침략을 찬양했다. 일제 말기 징병제를 환영하기도 했다. 이명세의 친일은 타협이 아니라 명백한 부역이다. 매국행위와 다를 바 없다. 더 곱씹어볼 것은 조부의 친일 행위가 ‘유학의 세’를 늘리려는 것이었다고 변명한 대목이다. 유학의 세를 늘릴 수만 있다면 일제에 충성하는 것도 괜찮다는 뜻일 터인데, 아무리 봐도 이것은 유학의 정신에 맞지 않는 말이다.
유학의 정신, 다시 말해 선비정신이란 게 뭔가. 인의예지, 더 줄이면 인과 의를 목숨 걸고 지키는 것이다. 조선 성리학자들이 사단칠정을 놓고 그토록 치열하게 싸운 것은 세상의 더러움에 휘말려 인과 의, 측은지심과 수오지심을 잃어버리지 말자는 뜻이었다. 
독립지사들을 잡아들여 고문하고 죽인 일제에 빌붙어 유학의 세를 키우려 했다니, 유학의 속을 파내버리고 껍데기를 키우겠다는 얘기다. 자가당착이고 언어도단이다. 유학자의 지조로 일제에 항거한 동농 김가진, 심산 김창숙 같은 분들을 농락하는 말이다. 이 뒤틀린 사고가 보여주는 건 ‘유학의 세’를 명분으로 삼아 자기 자신의 세를 키우겠다는 권세욕 아니겠는가. 퇴계가 “인욕(人慾)을 천리(天理)로 잘못 아는 병통”을 경계한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사사로운 욕망을 하늘의 뜻인 양 윤색하는 것이야말로 유학자가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이 이사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전경련 강연에서는 해방 후 친일 청산이 소련의 지령에 따른 것이었다는 주장까지 했다. 한민족 절대다수의 염원이 한순간에 스탈린의 하명이 되고 말았다. 이쯤 되면 브레이크 없는 망언의 폭주다. 친일 청산이 소련의 지령이면 스탈린과 손잡고 일제와 싸운 미국의 루스벨트도 소련의 지령을 받은 것인가. 광복군도 소련의 지령에 따라 움직인 것인가. 집안의 명예를 지키겠다며 당치도 않은 말을 끌어다 대는 것은 조상을 두 번 치욕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일이다. 
퇴계는 고봉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한다. “참된 강직함과 진실한 용기는 기세를 높여 억지를 부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고치는 데 인색하지 않고 의(義)를 들으면 바로 따르는 데 있습니다.” 선비의 지조가 그리운 시절이다. 
< 고명섭 -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