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도라지꽃

● 칼럼 2014. 9. 2. 16:10 Posted by SisaHan
팔월의 폭염 아래 도라지꽃이 절정을 이루었다. 수줍은 듯 고개를 꺾어 핀 모습이 고혹적이다. 여름 하늘을 머금은 듯 청아한 청 도라지꽃이 만개하기까지 이 공간에서 적잖은 소요가 있었다. 
차고 진입로를 따라서 대 여섯 평 크기의 기다란 화단이 있다. 해마다 다채롭게 변화를 주는 옆집 화단과 맞붙어 있어 솜씨없는 우리에겐 여간 부담되는 곳이 아니지만 집 미관을 위해 뭔가 시도는 해야 했다. 
이사 온 이듬해부터 출사표를 던졌다. 첫해는 여러 종류가 혼합된 야생화를 뿌렸다. 잘 가꾸어진 이웃집 화단에 대항하듯 자연스러움을 추구하자는 심산이었다. 붓꽃, 양귀비, 마가렛, 백일홍 등 등……. 여름 내내 가지가지 꽃들이 쉼 없이 피고 지는 열의가 대단했다. 다양한 꽃들이 어울려 피어나는 융통성이 볼만해서 한동안 누렸지만 두 해를 못 넘기고 싫증이 났다. 무질서와 왕성한 번식력에 질린 탓이었다.
 
다음엔 코스모스 씨앗을 뿌렸다. 일손도 덜 겸 때가 되면 가을의 정취를 온 동네에 뿌리리라는 야심에서였다. 웬걸, 초여름부터 개화가 시작되더니 더운 계절 내내 만개한 코스모스 밭에서 철 이른 가을을 느껴야 했다. 빠른 세월 늦추지는 못해도 앞서고 싶지 않은 마음에 이 또한 퇴출시켜야 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느라 고심하고 있을 때 친구로부터 잘 여문 해바라기 한 송이가 전해져 왔다. ‘옮거니. 반 고흐의 해바라기를 내 뜰에다 놓아 보자.’ 하지만 이듬해 봄엔 뜻하지 않은 삼파전에 몸살을 부려야 했다. 야생화, 코스모스, 해바라기의 기 싸움이 대단한 탓이었다. 대세는 곧 떡잎 좋은 해바라기로 기울어졌지만 다른 두 종도 포기하지 않고 그들 나름대로 자리보전을 했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나는 해바라기 군락은 좀 위협적이긴 해도 싱싱해서 좋았다. 키가 건너 집 처마 가까이 차올랐을 때부터 꽃이 피기 시작하더니 이내 장관을 이루었다. 이웃의 화단을 가소롭단 듯이 내려다보며 해시계 얼굴을 갸우뚱거릴 때는 아담형인 나는 대리 만족까지 느꼈다. 하지만 개화가 끝나고 씨앗이 영글기 시작하면서 마무리 작업이 고민되었다. 굵직한 밑동을 뽑아내는 일이며 수거 규칙에 맞추어 자르고 묶는 일이 만만치 않게 보여서다. 수확과 동시에 이 작업을 하리라 벼르고 있는데 하루는 온 동네에 소동이 났다. 까마귀 떼들이 몰려들어 순식간에 씨앗을 수확해 간 것이다. 거기다가 결실을 앞둔 이웃의 과수며 채소에까지 벌집을 만들어 놓았다. 한 동안 원망의 눈길을 참아내야 했다. 
참으로 우연한 기회에 도라지꽃이 거명됐다. 대 여섯 살 때 도라지 춤을 곧잘 추었던 기억이 어슴푸레 떠오르며 구미가 돌았다. 짤막한 키에 함초롬한 꽃은 이미 실패한 세 종류의 단점을 모두 보완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초봄, 씨앗을 뿌린지 삼 주일 정도 되었을까. 찬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화단 귀퉁이에서 새순이 꼬물꼬물 올라오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눈 맞추기를 했다. 옆집에서도 의문의 눈빛이 자주 넘어왔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잡초 속에 파묻힌 그놈들은 내내 운신을 못했다. 여름해가 기울자 우리의 기대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봄이 되었다. 말라붙은 몸통 아래로 부터 강한 기운이 감지되었다. 변변찮은 한 해를 살고 난 녀석들이 날씨가 채 풀리기도 전에 태동을 시작한 것이었다. 얼었던 땅을 헤집고 꾸역꾸역 나오기가 무섭게 옆으로 위로 영역을 넓혀 나갔다. 한 해 착실히 쌓은 내공으로 거침없는 몸짓을 하더니 칠월이 되자 보란 듯이 줄줄이 피어났다. 두 해 만에 청 빛으로 도색된 비밀의 문을 열어 의심쩍어 하던 눈길을 사로잡는다. 
사나흘 햇살을 품었다가 주저앉는 꽃, 주된 역할에 충실하려는 자연의 이치가 신통하기만 하다. 큰 키에 덩치까지 앞세운 본토박이들을 옆으로 밀어내고 야멸치게 자리 잡아 가는 도라지꽃이 어쩐지 낯설지 않다. 이국땅에 뿌리내리는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등단 >


[한마당] 세월호 참사와 민주주의

● 칼럼 2014. 9. 2. 16:07 Posted by SisaHan
세월호 참사의 일차적인 충격은 우리 사회 곳곳에 깊이 뿌리박힌 안전불감증이었다. 물질만능주의에 젖어 국민 안전과 생명보다 돈을 우선시하는 우리 사회에 대한 경고였던 셈이다. 성숙한 사회였다면 이를 겸허히 받아들여 철저한 진상 규명과 함께 확실한 대비책을 마련하는 선에서 마무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권이 세월호 특별법에 대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유족들의 단식과 농성이 이어지면서 세월호 참사는 민주주의에 대한 여러 논란을 촉발시켰다. 세월호 특별법을 놓고 전개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첨예한 갈등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갖게 한다.
가장 먼저 제기된 건 국가와 국가권력에 관한 문제의식이었다. 300여명의 생때같은 목숨이 눈앞에서 수장되는데도 구조작업을 제대로 못한 정부에 ‘이건 국가도 아니다’는 매서운 비판이 쏟아졌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주지 못한 국가는 국가라고 부를 수 없다는 당연한 질책이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 이후에 제기됐다. 철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유족들을 정부는 매정하게 외면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 부근에서 농성 중인 유가족들의 면담 요청을 며칠째 모른 척하고 있다. 그사이 경찰들은 유족들을 차벽으로 겹겹이 에워싸서 일반 국민으로부터 고립시켰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국가권력은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할 때 그 정당성을 갖는다. 그래야 할 국가권력이 세월호 참사 이후 보인 행태는 국민이 아닌 국가 자체를 보호하고 있는 양상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국가는 어떤 국가인가. 그 국가 안에 세월호 유가족과 그들을 지지하는 국민은 제외된 것인가. 국가권력이 국민 개개인을 보호하지 않고 국가 자체를 보호하려 할 경우 그런 국가는 소수 지배층의 권력 유지만을 위한 독재체제로 전락한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에서 봐왔던 익숙한 모습이다.
 
정부나 의회가 국민을 대변해 정책을 결정하는 대의민주주의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은 세월호 특별법 제정 협상에 나섰지만 두 차례 합의가 유족들에 의해 거부되면서 대의민주주의가 표류하고 있다. 이는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 모두 유족들의 이해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앞으로 이런 일이 지속되면 힘없는 사회적 약자는 계속 소외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정치권이 똘똘 뭉쳐 이를 밀어붙일 경우 허울뿐인 대의민주주의는 국민들의 이해와 동떨어진 채 대리인(정부와 의회)들끼리의 이해관계에 따라 작동하게 될 것이다.
 
여야 합의가 무산되자 새정치민주연합은 유족 대표가 참여하는 ‘3자 협의체’를 제안했지만 새누리당은 대의민주주의에 어긋난다며 반대했다. 국민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대의민주주의가 세월호 유족의 요구를 묵살하는 논리로 동원되는 이 역설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
민주주의 기본 원리 중 하나인 법치주의는 또 어떤가. 민주사회에서 법이란 기본적으로 국가권력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국민을 통제하고 억압하기 위해 만든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새누리당은 그 법치를 앞세워 수사권과 기소권을 보장하는 특별법 제정 요구가 사법체계를 흔든다며 반대하고 있다. 사실과도 부합하지 않는 억지 주장이다.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하기 위한 법치가 거꾸로 자식들의 죽음의 진상을 알고 싶다는 유족의 요구를 가로막는 수단으로 변질된 것이다.
 
새누리당이 신줏단지 모시듯 하는 기존의 사법체계 안에서 이득을 보는 계층은 누구일까. 유족을 제외한 다수 일반 국민인가. 아니면 세월호 진상 규명을 두려워하는 소수 권력층인가. 법치주의에 대한 기본 개념부터 되돌아봐야 할 상황이다.
초유의 세월호 참사는 우리에게 기존 방식과는 전혀 다른 대응을 요구한다. 그것은 형해화한 우리의 민주주의를 한 단계 진전시키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한국 민주주의는 지금 시험대에 올라 있다.
< 한겨레신문 정석구 편집인 >


프로농구 울산 모비스 코치였다가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박승일씨가 19일 ‘얼음물 뒤집어쓰기’(아이스버킷 챌린지)에 동참했다. 박씨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힘든 몸이라 얼음물을 뒤집어쓰지는 않고 대신 인공 눈꽃송이를 날렸다. 또 “시원하게 얼음물 샤워를 할 수 있는 당신은 행복한 사람입니다”라는 글도 남겼다. 팔다리가 멀쩡하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축복을 받고 있는 건지 새삼 일깨워준 박씨의 ‘분투’였다.
 
‘얼음물 뒤집어쓰기’는 미국 루게릭병협회가 이 병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고 루게릭병 환자를 돕기 위해 미국에서 시작한 모금운동이다. 이 운동이 한국에까지 상륙해 유명 연예인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다. 최근 교황 방문과 세월호 침몰은 우리로 하여금 소외된 이웃들을 한번쯤 되돌아보게 하고 있다. 이 행사가 루게릭병 환자 등 우리 사회의 사회적 약자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계기로 작용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행사에 참여하면서 한번쯤 짚어볼 대목이 있다. 첫째는 행사의 취지를 소홀하게 다뤄서는 안 될 것이다. 차가운 얼음물이 닿으면 마비되는 증상처럼 근육이 잠시 수축하게 된다. 루게릭병 환자들은 이런 고통을 지속적으로 느낀다고 한다. 그래서 그 고통을 묘사하기 위해서 얼음물을 뒤집어쓰는 건데, 유행처럼 올라오는 얼음물 뒤집어쓰기 동영상을 보면 너무 재미 위주로 흘러가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게 한다.
 
둘째는 기부의 한계다. 이런 기부 행사가 약자를 도울 수 있는 건 맞지만, 근본 해결책은 될 수 없다. 루게릭 같은 희소병은 환자 개인이나 가족만의 문제가 아니기에 공공 의료보험 체계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 얼음물 뒤집어쓰기 같은 행사가 일시적인 치유책이 될 수는 있으나, 안정적이고 근본적인 대책이 되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기부에 참여하는 따뜻한 마음들이 부디 일회성 행사로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에서 탄탄한 복지체계와 사회안전망을 갖추는 ‘연대의 힘’으로 승화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세월호 유족 대표들이 25일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와 만났지만 특별법 협상의 돌파구는 좀처럼 열리지 않고 있다. 새누리당은 야당이 제의한 ‘유족을 포함한 3자 협의체’ 구성을 거부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3자 협의체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강도 높은 대여 투쟁을 펼치기로 했다. 특별법의 논점이 법안 내용에서 논의 틀로 이동했지만 여야가 또다시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새누리당은 3자 협의체 구성을 ‘입법권 침해’라고 비판했다. 이완구 원내대표는 유족이 특별법 논의에 참여하는 것 자체를 ‘대의민주주의 포기’라고 했고, 김재원 원내수석부대표는 ‘헌정질서 위배’로 규정했다. 논리 비약이 심하다. 3자 협의체는 협상기구이지 의결기구가 아니다. 여야는 유족의 의견을 수렴할 뿐이며 법은 어디까지나 국회가 만든다. 박근혜 대통령도 “여야가 피해자 단체와 잘 협의해 좋은 특별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비슷한 전례도 많다. 지난해 철도파업 때 여야와 철도노조 3자가 만나 해법을 이끌어낸 게 대표적이다.
현실적으로 야당이 특별법 협상을 주도하긴 어렵게 돼버렸다. 세월호 특별법의 꼬인 매듭은 여당이 풀어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새누리당 지도부는 야당을 탓하고 유족을 원망하고 청와대를 감싸기에 바쁘다. 김무성 대표는 “세월호에 발목 잡혀 한국 경제가 풍전등화 위기에 놓였다”며 특별법을 ‘경제위기의 주범’으로 몰았다. 이완구 원내대표는 야당의 사과만 거듭 요구한다. 이정현 최고위원은 “야당은 입법부가 할 일을 전부 대통령에게 해달라고 한다. 장난감을 고를 수 있는 나이임에도 엄마에게 떼를 쓰며 골라달라는 어처구니없는 모습”이라며 대통령 방패막이를 자처했다.
 
여당 내부엔 집권세력으로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작지 않다. 김태호 최고위원은 “청와대와 정부가 적극 고민하고 이해와 설득을 구해야 한다”며 청와대를 겨냥했다. 의원 연찬회에서도 여당이 책임 있게 나서 유족과 대화하라는 목소리가 표출된 바 있다. 이완구 원내대표가 뒤늦게나마 유족을 만나 대화한 것은 일단 평가할 만하다. 진전된 결론이 도출된 건 아니지만 자꾸 얼굴을 맞대고 얘기를 하다 보면 절충점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기존 법으로는 정의와 형평을 구현하기 어려운 특별한 상황에 적용하려고 만드는 게 특별법이다. 이에 비춰 특별법 논의에 임하는 새누리당의 태도는 너무 소극적이며 옹졸하다. 새누리당 지도부가 집권세력으로서 책임을 되새기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