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남북 관계 숙고와 의지 있나

● 칼럼 2014. 10. 13. 17:39 Posted by SisaHan
북한 핵심 실세들의 파격적인 남쪽 방문으로 남북 관계가 전기를 맞고 있으나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무엇보다 5·24조치 완화·해제 문제에 대한 정부의 전향적인 입장 정리가 시급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6일 지속적으로 남북 대화를 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면서도 ‘북한도 진정성 있는 행동으로 보여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남북 관계가 개선되기 위해서는 북쪽의 눈에 띄는 행동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조건’을 단 셈이다. 북쪽이 더 굽히고 들어와야 한다는 압박이기도 하다. 교착 국면이 이어진 이제까지와 별로 다를 바 없는 태도다.
 
정부의 이런 모습은 남북 관계를 전반적인 대북 정책 속에 어떻게 위치시킬지에 대한 숙고가 덜 돼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안은 금강산 관광 재개를 포함한 5·24조치 완화·해제 문제다. 이 문제가 풀리면 남북 관계는 지난 7년과는 다른 새로운 차원으로 접어들 가능성이 크다. 반면 이 문제를 풀지 않는다면 어떤 대화도 성과를 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정부는 여전히 강경하다. 정부가 구체적으로 제시한 고위급 회담의 의제 역시 남북 이산가족 상봉뿐이다. 이산가족 상봉은 북쪽으로선 껄끄럽고 급할 게 없는 사안이다.
 
5·24조치를 완화·해제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경제계와 야당은 물론이고 여당 안에서도 높아지고 있다.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인 유기준 의원의 말대로 “5·24조치는 이미 철 지난 옷이고 반 이상 효력을 상실했다”고 할 수 있다. 정부도 이를 모르지 않는다. 정부는 최근 북한 나진·선봉 개발 사업을 벌이는 러시아에 우리 대기업이 투자하는 것을 허용한 바 있다. 정책의 허점을 ‘정치적 결정’으로 메우고 있는 모양새다. 5·24조치는 정부가 추구하는 ‘개성공단의 안정적 발전’에도 걸림돌이 되고 있다. 정부가 5·24조치를 고수하는 태도의 이면에 대북 교류·협력을 핵 문제와 연계하는 경직된 사고가 자리잡고 있다면 문제가 있다. 남북 교류·협력이 폭넓게 이뤄질수록 핵 문제 해법을 찾기가 쉬워진다는 사실은 과거 경험이 잘 보여준다.


[칼럼] 전작권 환수

● 칼럼 2014. 10. 13. 17:38 Posted by SisaHan
9·11 테러 후 부시 정부는 2002년부터 주한미군의 ‘신속기동군화’를 위해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을 한국에 반환하고자 했다. 그래서 2007년 한-미가 합의한 것이 ‘2012년 4월17일 전작권 한국에 반환’이었다. 그걸 이명박 정부가 미국에 간청하여 2015년 말로 연기시켰다. 이제 2015년 말이 1년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오는 23일 워싱턴에서 열리는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의에서는 그 환수 일정을 확정해야 한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은 2012년 대선 후보 때 ‘2015년 전작권 전환 차질 없이 준비’를 공약했다.
‘전략적 유연성’ 때문에 미국은 자진해서 전작권을 반환하려고 한다. 이슬람 강경파 문제 외에 미-중 갈등 때문에도 이 입장은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전작권은 미국이 계속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아직도 나온다. 전작권 환수 연기를 간청하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약화를 보전해 주어야만 한다. 우리 국방비가 그만큼 더 든다. 그런데도 올해 초 한-미 정상회담 후 ‘2020년 환수’설이 나돈 적도 있다. 주권국가의 군사주권과 관련해서 주객이 전도된 해괴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1950년 7월14일, 6·25 동란 발발 19일 만에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유엔군 사령관에게 넘겼다. 한국군이 도저히 북한군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한국의 국력이 북한에 비해 월등해지자 미국은 1994년 8월1일 평시작전통제권(평작권)을 한국에 반환했다. 그날 김영삼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44년 만에 작전권을 환수한 것은 우리 자주국방의 기틀을 확고히 하는 역사적 사건이며 제2의 창군이라고 할 수 있다.” 국방부는 2000년까지 전작권도 환수하겠다고 발표했다. ‘제2의 창군’, ‘전작권 환수’ 같은 말들은 1960년대 말부터 우리의 비원(悲願)이었던 전작권 환수가 가능할 만큼 국력이 커졌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전작권 환수가 왜 우리의 비원이었나?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을 살해하려 한 김신조 사건(1968.1), 아내를 저격한 문세광 사건 (1975. 8) 때 북한을 응징할 수 없었다. 아웅산 사건(1983.10) 때 전두환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우리에게 전작권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작권을 가진 미국은 작은 충돌이 전면전으로 번져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기에 그때마다 우리는 ‘한 대 맞고 끝내는’ 수밖에 없었다. 전작권을 남의 나라에 맡기고 나니 정당방위도 맘대로 못하게 된 것이다.
 
군사회담에서도 북한은 남한을 무시했다. 1984년 1월10일 북한이 미·북·남 3자회담을 제안했다. 미-북 평화협정과 남북 불가침 문제를 협의하자면서 “군사실권을 가진 미국과 먼저 얘기하고 나서 남측과도 할 얘기가 있으니 방청은 해도 좋다”는 식이었다. 1986년 6월9일 북한이 제안한 미·북·남 군사당국자 회담도 같은 논리였다. 남·북·미·중 4자회담이 1997년 제네바에서 몇 차례 열렸을 때도 북한은 미국과만 대화하려 했고, 미국은 그걸 받아 줬다. 전작권이 없다는 이유로 남한은 북한한테 수모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전작권이 우리 수중에 있는데도 북한이 대남 군사위협·도발을 맘놓고 하고, 군사문제 회담에서 한·미를 상하관계로 상대했을까? 북한의 대남 군사위협 때마다 국방장관들은 “원점을 때려부셔버리겠다”고 호언했지만, 아직은 평작권만 있고 전작권은 없는 나라의 국방장관이 독자적으로 대북 군사조치를 취할 수 있을까? 큰소리는 쳤어도 실제로 ‘원점’을 속시원히 때린 적은 아직 없었던 것 같다.
 
박 대통령은 대선 때의 ‘전작권 환수’ 공약을 이행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방장관에게 전작권을 환수해 오라고 지시해야 한다. 전작권을 환수해 오면 내년부터 박 대통령은 명실상부한 주권국가의 대통령이 된다. 앞으로 북한이 군사적으로 우리를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정전협정을 대체할 평화협정도 우리와 체결하자고 할 수밖에 없다.
< 정세현 - 원광대학교 총장 전 통일부 장관 >


온갖 진통과 숱한 곡절 끝에 여야가 세월호 특별법에 합의했다. 세월호 침몰 사고가 난 지 5개월하고도 보름이 지난 시점이다. 여야가 철저한 진상규명을 외쳤는데도 왜 이토록 늦어졌는지 답답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합의 내용을 뜯어보면 우려스러운 대목이 적잖다. 여야는 특별법에 합의했지만 정부조직법과 ‘유병언법’(범죄수익 은닉 처벌법) 합의안이 마련된 이후 10월30일까지 일괄 처리하기로 했다. 새누리당이 특별법과 다른 법안의 연계 처리를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인데, 특별법 입법이 또 다른 암초를 만나면서 더욱 늦어질 가능성도 있다.
 
야당과 유가족의 절충안은 특검 후보군 4명을 추천할 때 여야와 유가족 3자 합의를 거치도록 하는 방안이었다. 하지만 새누리당이 유가족 참여를 강력히 거부하자 새정치연합은 ‘유가족을 뺀 여야 합의 추천’으로 물러섰다가 유족들의 반발 분위기에 다시 ‘유족 참여는 추후 논의’로 돌아섰다. 세월호 국정조사 과정 등에서 정치권에 불신이 쌓인 유족들로선 특검 추천 과정에 직접 참여하지 못하게 돼 아쉬움이 클 것이다. 물론 새정치연합으로서도 할 말이 있을 법하다. ‘특별법 이후’를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는 시점에서 내린 고육책이란 항변도 일리가 있다. 그럼에도 새정치연합은 유가족의 동의를 압박하는 듯한 모양새로 특별법에 합의했다는 아픈 멍에를 벗을 수 없게 됐다.
특별법 합의는 첫걸음을 뗀 것에 지나지 않으며 진상규명을 할 수 있는 틀을 갖춘 것에 불과하다. 여당과 청와대가 협상 과정에서 보인 태도에 비추면 ‘성역없는 철저한 진상규명’이란 목표에 이르려면 앞으로도 숱한 고비와 난관에 부닥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야당은 협상 과정에서 드러낸 무능과 난맥을 거울삼아 처절하게 반성하고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특별법 합의로 ‘개점휴업’ 상태이던 국회가 정상화한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정치권은 국민이 정치에 넌더리를 내도록 세월호 정국을 질질 끌어온 원인이 무엇인지 점검하고 개선점을 모색해야 한다.
 
성찰이 필요한 것은 정치권뿐만이 아니다. 우리 모두 4월16일의 시점으로 돌아가 ‘세월호 이전과 이후가 달라야 한다’고 했던 그날의 다짐과 각오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그때만 해도 세월호는 진보-보수의 문제도, 친정부-반정부의 쟁점도 아니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고 모두가 공감했던 문제의식에서 출발할 때 사안의 본질이 명확해지고 무엇을 고치고 어떤 부분을 먼저 손대야 할지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검찰이 인터넷 허위사실 유포를 엄단하겠다며 전담팀까지 꾸려 상시 감시에 나섰다. 16일 국무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대통령에 대한 모독적 발언이 도를 넘었다”고 말한 직후 급하게 정해진 일이다.
검찰이 하겠다는 일은 폐기돼 마땅한 과거 행태의 답습이다. 검찰은 포털사이트 등의 허위사실 유포를 감시해 피해자의 고소·고발이 없어도 직접 수사에 나서겠다는 방침이다. 최우선 수사 대상은 ‘공적 인물’에 대한 명예훼손이라고도 밝혔다. 이대로라면 인터넷에 공개된 모든 글이 잠재적인 수사와 감시 대상이 된다. 상시적 검열과 다를 바 없다. 대표적인 ‘공적 인물’인 대통령이나 정부·여당을 비판하는 글들이 당장 감시를 받고, 검찰의 수사 대상이 될 것이다. 이를 겁내 입을 다무는 것이 바로 ‘표현의 자유’ 위축이다. 긴급조치로 국민의 입과 귀를 틀어막았던 1970년대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유신독재가 바로 이랬다.
 
허위사실 유포를 앞세운 여론 봉쇄는 진작에 위헌으로 판정됐다. 허위사실 유포를 금지한 유신 시절 긴급조치 1호는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에서 모두 위헌 선고됐고, ‘미네르바 사건’ 등에서 인터넷을 통한 정부 정책 비판을 억누르는 데 악용됐던 옛 전기통신기본법도 헌재의 위헌 결정을 받았다. 인터넷을 통한 허위사실 유포를 처벌할 근거는 이미 모호해졌다. 명예훼손에 대해서도, 대법원과 헌재는 공직자나 국가기관의 업무에 관련된 의혹 제기 혹은 대통령의 사생활에 대한 의혹 제기는 명예훼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유엔 인권위원회는 명예훼손죄의 폐지를 권고했고, 상당수 선진국은 이를 범죄로 삼지 않는다. 이들 혐의가 권력자 비판을 탄압하는 데 악용됐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검찰은 이런 법률적 배경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고소·고발이 있어야만 명예훼손 수사에 나섰던 일반적 사건처리 절차도 무시하겠다고 한다. 대통령의 한마디에 법리나 판례, 절차를 모두 내팽개친 꼴이다. 그렇게 졸속으로 강행하다 보니 검찰 스스로 무엇을 수사나 감시 대상으로 삼을지부터 우왕좌왕이다.
 
그 해악은 이미 가시화했다. 인터넷을 감시할 검찰 전담팀이 만들어졌다는 것만으로도 인터넷 이용자들의 ‘자기검열’이 번질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 걱정은 해외 사이트로 활동공간을 옮기는 ‘사이버 망명’으로 이어지고 있고, 포털 업계는 이로 인한 경제적 피해를 걱정하고 있다. 대통령과 검찰의 ‘시대착오’가 헌법상 표현의 자유는 물론 IT강국의 위상까지 위협하고 있는 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