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화평의 원리, 역지사지

● 칼럼 2015. 1. 30. 18:16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이솝우화에는 여우와 두루미의 이야기가 나온다. 여우가 어느 날 두루미를 식사에 초대했다. 여우는 접시에 맛있는 스프와 음식들을 담아 대접했다. 하지만 손님 두루미는 그야말로 그림의 떡, 접시의 맛난 음식들을 긴 부리로는 먹을 수가 없으니 여우의 포식을 보며 분통만을 삼켜야 했다. 잔뜩 화가 난 두루미가 어디 두고보자 벼르다 여우를 초대해 복수에 나선다. 긴 항아리에 음식을 담아 내놓아 넙적한 주둥이로 먹을 수 없는 여우가 고초를 겪은 것은 자업자득에 당연지사.


어쩌면 여우가 자신이 늘 먹던 습관대로 음식을 접시에 담는 바람에, 아니면 다른 그롯이 없어서 두루미에게 뜻하지 않은 곤욕을 안겨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우화가 말하는 풍자의 핵심이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제 실속만 차리는, 그래서 세상을 삭막하게 만드는 못된 사람들을 꼬집는 것임은 명확하다.
태양과 달의 입씨름으로 날씨가 우중충해진 것도 비슷하다. 태양은 나뭇잎 색깔이 파랗다고 큰 소리 치는데, 달은 “나뭇잎은 은색이야” 라고 우겨대는 것이다. 가만히 듣고있던 바람이 손을 저으며 태양과 달을 꾸짖었다. “그게 싸울 일이니! 태양아, 네가 떠있을 때는 파란색으로 보이지, 하지만 달아, 밤에 네가 뜨면 은색으로 보이는 거야!”.

비단 우화 뿐이랴. 세상에는 그런 유사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상대방을 조금만 배려하고 그 편에서 생각해 준다면 아름답게 마무리 될 일들을, 내 생각 내 편할 대로만 고집하는 바람에 뒤틀리고 서로가 불편한 상황이 알게 모르게 이어진다. 때론 고집으로, 혹은 인식의 차이나 분위기에 휩쓸린 외골수로 인간관계가 망가지고 세상이 험악해져 전전긍긍 가슴 아파한다.


치약을 짜는 방법이 달라 하루가 멀다하고 말싸움을 벌이는 부부가 있고, 술 못마시는 친구를 앞에두고 좀 마셔라 남자가 뭘~ 하며 늘 강권하는 통에 깨어진 우정도 있다. 하찮은 개인사들이야 한 두명 맘 상하고 괴로우면 지나갈 일들도 많다. 하지만 범위가 커져 다중의 심적고통과 갈등을 부르는 일들이 갈수록 심화되고 ‘폭증’하는 세태는 정말 불안하고 위태롭다.
허망하게 수장된 자식들의 참사원인을 규명해달라는 애끓는 부모들을 면박하고, 단식하는 그들 앞에서 치킨을 먹으며 냄새를 풍긴 인간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 아들과 딸과 형제가 참변을 당했어도 그랬을까. 4 살배기 아이가 잘 먹지 않고 김치를 뱉어낸다고, 분노의 감정을 온 팔뚝에 모아 아이를 패대기 친 보육교사는 자신의 뱃속 아이가 그렇게 맞아 맥없이 나동그라지면 어떤 심정이 될까.


회사직원들을 평소 종 부리듯 다루며 꼬투리잡아 다그치던 항공재벌 2세의 갑질 습성에서, 부하 직원을 모욕 주고 비행기를 리턴시킨 일이 뭐 그리 엄청난 일인지 도무지 이해될 리가 없다. 내 회사 내 부하를 혼내고 쫓아낸 게 어때? 내 비행기 내가 돌리는데 누가 뭐래? 라는 호사와 독선의 성 안에서 살아 온 심성으로는, 성 밖에서 던지는 돌팔매란 도대체가 이상하고 억울한 것이다. 그녀가 여승무원이 되고 사무장이 돼 본다고 꿈엔 들 생각해 본적이 있을까.
죄 없는 인질들을 참혹하게 살해하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인질되어 목이 잘리는 상황을 생각이나 해볼까. 무고한 여성들을 집단 성폭행해 죽게 만든 인도청년들은 자기 여동생들 생각은 해봤을까?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라는 역지사지(易地思之)는 인간세상에서 정말 중요하고 절실한 금언이요, 꼭 필요한 처세의 원리이며 화평의 지혜라는 생각이다.


살아가며 늘 부딪히는 트러블들은 역지사지 결핍증, 곧 자기중심의 아집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특히 가진 자와 쥔 자들의 이기와 독선에서 갈등이 커지고 세상이 험해진다. 인간관계의 삐걱댐, 감정의 격돌, 갑과 을의 간극과 불화, 강자와 약자의 적대 등등이 따지고 보면 상대의 입장을 무시한 결과물들이다.
한번 쯤 돌진을 멈추고 그 쭉 입장이 되어보면 웃음으로 풀릴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내가 한번 부하입장이 되어보고, 근로자가 되어보고, 피해자가 되어보면 달라질 것이다. 대통령은 시민의 입장으로, 여당은 야당 처지에서, 영남은 호남 쪽을 헤아려보고, 남은 북의 입장을, 주인은 고객이 되어, 갑은 을의 처지를 내 것으로 여겨본다면, 수많은 세상만사 다툼의 살벌함이 누그러지지 않을까.


< 김종천 편집인 >



[사설] ‘기득권 구조’ 거부한 그리스 총선의 파장

● 칼럼 2015. 1. 30. 18:14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5일 치러진 그리스 총선에서 긴축정책에 반대하는 급진좌파연합(시리자)이 승리했다. 그리스 사회의 상당한 변화가 예상된다. 유럽 공동통화인 유로의 앞날을 비롯해 유럽 전체의 경제·정치 상황에도 일정한 파장이 불가피하다.


시리자는 2004년 총선 때 처음 등장한 신생 정당이다. 당시에는 군소 정당에 그쳤으나 유럽 경제위기 때인 2010년 구제금융과 함께 강요된 긴축정책에 대해 대중들의 불만이 커지면서 주요 정당으로 부상했다. 가혹한 긴축으로 그리스의 경제 규모와 임금 수준은 4분의 1쯤 줄었고 청년 실업률은 50%를 넘는다. 면세 등 특혜를 누리면서 경제를 장악한 과두재벌과 이들에 영합해온 기존 정당에 대한 불만도 커져 왔다. 변화를 바라는 젊은층이 대거 시리자 쪽으로 몰리면서 시리자의 지지율은 36%를 넘어섰다. 한마디로 많은 유권자가 기득권층 중심으로 완고하게 돌아가는 그리스와 유럽연합의 기존 질서를 거부한 것이다.


시리자는 유로존(유로를 쓰는 19개 나라)에서 선거 승리에 성공한 첫 반긴축 정당이다. 시리자는 긴축 폐지와 더불어 국내총생산의 2배에 가까운 외채 가운데 절반 정도를 탕감해줄 것을 주장하지만 독일·프랑스 등 유로 중심국은 이에 반대한다. 따라서 앞으로 협상이 잘되지 않으면 1999년 유로존 출범 이후 처음으로 탈퇴국이 나오는 ‘그렉시트’(Greece와 exit의 합성어)가 현실화할 수 있다. 또 그리스 상황은 스페인과 이탈리아 등 경제 구조가 취약한 나라들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유럽 여러 나라에선 시리자와 비슷한 주장을 하는 정당이 지지율을 높여왔다.


시리자의 승리는 고통스러운 기존 질서에서 벗어나 새 길을 찾으려는 유권자의 선택이라는 점에서 존중돼야 한다. 새 정권은 유럽연합 쪽과의 어려운 협상과 함께 경제 개혁과 부패 청산을 이뤄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1993년 출범한 유럽연합(EU) 또한 중요한 고비를 맞게 됐다. 그리스 경제가 유럽연합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대에 불과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유럽연합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 따라서 유럽연합도 자체 개혁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지 않아도 이번 선거를 ‘신자유주의 종언의 시작’으로 보는 시각이 힘을 얻고 있다. 국제 경제 질서는 냉혹하지만 구성원의 삶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그 질서 자체가 혼란에 빠질 수 있음을 이번 그리스 사례가 잘 보여준다. 이는 우리나라가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교훈이기도 하다.



대법원이 22일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 등에 대해 내란음모는 무죄, 내란선동 및 국가보안법 위반은 유죄로 각각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대법원이 내란죄에 대해 엄정한 법리를 세우려 한 점은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억지스러운 논리로 선동죄라도 씌우려 한 데서는 부작용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대법원은 그동안에도 내란음모죄가 성립하려면 내란 실행의 합의와 실질적 위험성이 있어야 한다고 판례를 통해 밝혀왔다. 이번 사건에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를 더욱 구체화했다. 대법원은 내란음모의 합의는 단순히 내란을 논의하는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밝혔다. 폭동의 대상과 목표가 설정돼 있고, 실행계획 등 주요 사항의 윤곽을 공유하고, 실제 실행으로 이어지리라고 다들 생각하는 정도의 ‘확정적 합의’여야 한다는 것이다. ‘실질적 위험성’도 내용의 구체성이나 합의의 강도, 사전 준비나 사후 후속조처 여부 등이 고려돼야 한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이런 기준에 따라 말만 한차례 오갔을 뿐 아무런 준비나 추가 조처도 없었던 이석기 그룹의 행동은 내란음모일 수 없다고 밝혔다. 검찰이 내란 주체로 지목한 ‘아르오’(RO)도 실체가 없다고 판단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이나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등 과거의 내란죄 조작 사건도 이 기준에선 당연히 무죄다.


내란선동에 대한 유죄 논리는 실망스럽다. 내란 사건에서 음모와 선동의 유·무죄가 갈린 것은 이번이 사실상 처음이다. 대법원은 내란음모에 적용했던 엄격한 법리를 내란선동에선 외면했다. 대법원은 선동에선 내란의 구체적 내용을 제시할 필요도 없고, 선동의 대상자들이 실제 그런 행동을 할 개연성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라고 밝혔다. 이들의 내란 결의를 유발하거나 높일 위험성만 있으면 처벌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란음모죄에 적용했던 ‘실질적 위험성’과는 판이하게 낮은 기준이다. 이런 식이라면 정치적 소수파의 정부 비판이나 과격한 선동도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 헌법상 표현의 자유를 크게 침해할 수 있는 것이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정치선동에 대해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있어야 처벌한다고 거듭 밝혀온 것도 이를 우려한 때문이었다. 이 의원의 연설이나 장난감 총 따위를 언급한 모임 참석자의 발언 등에 그런 ‘명백한 위험’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러니 ‘억지 절충’이란 말이 나올 만하다. 대법원 판결이 다소 실망스럽기는 해도 헌법재판소의 얼토당토않은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에 비할 바는 아니다. 대법원이 ‘RO’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은 것과 달리, 헌재는 정체도 불분명한 ‘주도세력’의 성향을 들어 당 전체가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헌재는 또 ‘실질적 위험성’을 엄격하게 판단하기는커녕 주도세력의 ‘숨은 목적’을 ‘추정’해 정당의 강제해산을 정당화했다. 대법원의 이번 판결로 헌재는 더욱 정당성과 존립 근거가 흔들리게 됐다.



[칼럼] 사이버로 확장한 미국의 ‘패권’

● 칼럼 2015. 1. 30. 18:12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지난달 발생한 소니픽처스에 대한 사이버 공격 사건은 전형적인 추리물이다.
셜록 홈스 역을 맡은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가상의 범죄현장을 찾아가 증거를 수집했고, 잠재적 범인의 범죄동기를 규명하려 했다. 연방수사국의 수사 뒤 오바마 행정부는 북한이 범인이라고 선언했다. 범죄동기도 분명해 보였다. 북한은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의 암살을 묘사한 영화 <인터뷰>가 거슬렸다. 해커들은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들을 공격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아주 간단한 사건이었다. 오바마 행정부는 추가 대북 제재 조처를 취했고, 의회 강경파들은 북한을 테러 지원국으로 재지정하라고 압박했다.


보안업계 전문가들이 북한의 소행으로 단정한 정부의 주장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의문이 불거졌다. 해커들이 한 언론인에게 보낸 쪽지 속 한글 문장은 문법에 맞지 않았다. 김정은에 대한 존칭도 제대로 쓰지 않았다. 불만을 품은 소니의 내부 직원, 자신들을 ‘리저드 스쿼드’(도마뱀단)라고 자칭한 집단도 잠재적 범인으로 떠오르면서 북한 소행설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때 <뉴욕 타임스>가 거대한 ‘반전’을 폭로했다. 미국이 먼저 북한을 해킹해 오고 있었다. 그 시기는 201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국가안보국(NSA)은 단순히 기웃거린 게 아니었다. 국가안보국은 북한에서 사이버 공격을 담당하는 것으로 추정돼온 정찰총국 산하 121국 같은 기관의 활동을 감시하기 위해 북한 컴퓨터들에 악성프로그램을 심었다.
그게 처음도 아니다. 사이버해킹을 지원한다고 다른 나라들을 비난하면서 미국은 똑같은 사이버해킹을 해왔다. 이란의 핵 시설을 공격하려고 몇 종류의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투입했다. 또 사이버상에서 새로운 군비경쟁을 하며 중국과 정면으로 부딪치고 있다. ‘전방위 지배’를 확보하려는 미국의 목표는 사이버상으로까지 확장됐다. 미 국방부는 이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민간 부문에서 전문가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국방부는 ‘플랜 X’를 통해 평범한 군 관계자가 비디오 게임을 하듯 쉽게 사이버 전쟁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


아무튼 북한에 대한 미국의 선제공격에는 몇가지 흥미로운 허점이 있다. 국가안보국이 북한을 감시하고 있었다면, 왜 소니에 미리 경고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미 정부는 소니의 전산망이 뚫리는 것을 막기보다 북한의 능력을 시험해보는 데 더 관심을 가졌을 수 있다.
이 사건에서 흥미로운 또 하나의 의문점은 남한의 역할이다. <뉴욕 타임스> 보도를 보면, 국가안보국은 남한의 도움을 받아 북한의 인터넷망을 해킹했다. 하지만 에드워드 스노든이 공개한 다른 문서들에는 국가안보국이 한국 정보 시스템에 잠입해 북쪽 시스템에 접근한 것으로 나온다. 자, 그렇다면 한국은 동맹국인가 표적인가?
거기에 사이버세계의 가장 도발적인 도전이 도사리고 있다. 적도 동지도 없다는 점이다. 정보당국들은 적들의 비밀만큼이나 동맹국의 비밀에도 관심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스노든의 폭로가 파괴적일 수밖에 없었다. 독일은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휴대전화가 도청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브라질은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의 이메일과 휴대전화가 도청당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독일과 브라질은 미국의 동맹국들이지만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나라들이기도 하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그들에 대한 감시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에 더해 미국은 스노든이 문서들을 폭로하자 미국인들에 대한 감시망도 구축할 필요성을 느꼈다. 혹여나 미국 시민들의 개인적 관심이 국가 이익과 배치될까 우려했다.


외국 정상들을 엿보고, 자국민을 감시한다? 갑자기 미국이 북한과 무척 닮아 보인다. 북한은 인민들에 대한 강도 높은 감시를 하는 걸로 유명하니까. 북한 정권은 중국과 러시아 같은 최근까지 동맹이었던 나라들의 움직임에도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물론, 북한이 미국에 손을 뻗치기 전에 미국이 먼저 나서 북한에 대한 해킹 공격을 했다.
소니 해킹 사건은 북한의 특기인 ‘비대칭전’의 예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들은 주로 미국과 같은 강대국을 상대할 때는 약자의 무기에 의존한다. 하지만 사이버상에서는 스파이웨어라는 동등한 무기가 숨어 있었다. 스파이웨어는 곳곳에 널려 있다.
< 존 페퍼 - 미국 외교정책 포커스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