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소왕국의 전제군주를 보는 듯하다. 조현아 대한항공 부사장이 5일 미국 뉴욕 케네디공항에서 출발하려고 활주로를 향하던 대한항공기를 돌려세웠다. 일등석에 타고 있던 조 부사장은 승무원의 땅콩과자 서비스가 규정에 맞지 않는다고 고함을 지르고, 규정을 설명하려고 온 수석 승무원(사무장)에게도 소리를 치며 비행기에서 내리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조 부사장의 행태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말하기에도 부적절한 ‘갑질 중의 갑질’이다. 또 항공보안법도 우습게 안 오만방자의 극치다. 승무원의 서비스가 마음에 안 든다고 다짜고짜 소리를 지르고 비행기에서 나가라 한 것은 직원을 종으로 알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짓이다. 조 부사장의 명령에 비행기는 활주로 앞에서 되돌아가 승무원을 내려놓고 20분이나 늦게 출발했다고 한다. 300명이나 되는 승객들은 피해를 보든 말든 안중에도 없는 행패이자 기장의 권한을 멋대로 침해한 월권행위다. 승객의 안전을 책임진 사무장도 없이 비행기를 출발케 했으니 이것도 항공보안법 위반이다.
지난해 대기업 임원이 라면이 덜 익었다며 대한항공 승무원에게 폭력을 행사한 ‘라면 상무 사건’이 벌어졌을 때 조 부사장은 “승무원이 겪었을 당혹감과 수치심이 얼마나 컸을지 안타깝다”며 “승무원의 업무를 방해하는 행위를 처벌할 수 있는 법률 조항이 마련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라면 상무’는 저리 가라 할 횡포를 저지르고, 법은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이 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다. 승무원들이 느꼈을 모욕감이 얼마나 컸겠는가. 그래 놓고도 조 부사장은 일이 커지자 기장과 협의해 결정한 일이라고 발뺌하는 모양이다. 기장을 물고 들어가는 것도 어디서 많이 본 저열한 책임회피다.


조 부사장의 횡포는 이 나라 특권층의 의식구조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권력이든 금력이든 가졌다 하면 인권도 팽개치고 법도 무시하는 것이 대통령 이하 특권층의 모습이다. 조 부사장은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장녀라는 총수 가족 신분으로 고속승진을 거듭해 마흔도 안 된 나이에 대한항공 부사장직에 올랐다. 지난해 5월에는 ‘하와이 원정 출산’의혹을 사기도 했다. 회사 안에서 직원들 위에 군림하다가 물의를 빚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이 천민자본주의의 천민권력 현상이다. 가진 자들에게 사람다움을 바라는 것은 연목구어인가 묻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 씁쓸하기만 하다.



청와대 오찬과 그 이후 새누리당 지도부의 행태를 보면, 시대는 변했어도 박근혜 정권의 당-청 관계는 과거 권위주의 시절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듯하다. 정상적인 판단과 대응이 불가능해 보이는 청와대에 이어 집권여당마저 이런 모습을 보인다면, 현 시국과 민심을 누가 수습하고 국정운영을 제대로 해나갈지 걱정스러울 따름이다.


대통령이 국가원수라고 하지만 이는 외교·국방 분야에서 그러할 뿐, 국내 정치에서 대통령과 여당은 상하 관계가 아니다. 그래서 과거 권위주의 시절 대통령이 겸했던 집권당 총재직을 없애버린 지 오래다. 그런데도 7일 청와대 오찬에서의 새누리당 지도부 발언을 보면, 입법부의 다수당 지도부가 대통령 신하가 되길 자처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주자’ ‘대통령과 새누리당은 한몸’이라는 아부성 발언만 판을 칠 뿐, 국민 관심이 쏠린 대통령의 국정운영 방식과 청와대 운영에 대해선 일언반구 비판의 말이 없다. 심지어 1990년대부터 비공식 자리에서도 사라졌던 ‘대통령 각하’란 표현까지 여당 원내대표는 스스럼없이 썼다.

김무성 대표가 “이번 기회를 통해 잘못된 건 시정하자”고 스쳐 지나가듯 말한 게 거의 유일한 ‘쓴소리’였다고 하는데, 그런 두루뭉술한 말 한마디로 끝나도 될 만큼 새누리당은 지금 상황을 한가롭게 보고 있는 것인가. ‘비선 국정농단 의혹’을 둘러싸고 여론은 악화할 대로 악화하고 있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청와대 진짜 실세는 진돗개”라는 박근혜 대통령 농담에 박장대소나 하는 당 지도부는 대통령의 애완견이라 불려도 딱히 대답할 말이 궁할 것이다.


이러니 오찬 다음날부터 여당 대응이 강경 일변도로 치닫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8일 아침 열린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의에선 비선 의혹을 어떻게 해소할지에 대한 논의 없이 야당을 향한 세찬 공세만 무성했다. 전날 ‘각하’란 표현으로 대통령에게 코드를 맞췄던 이완구 원내대표는 “야당이 청와대 비서실까지 무더기로 검찰에 고발한 건 정치 금도를 넘은 것이고 국정마비라는 상황까지 염두에 둔 것”이라고 말했다. 다수당 원내대표가 대통령 방패를 자처하는 행위 자체가 삼권분립의 ‘금도’를 넘었고, 국정마비를 가져오는 핵심 원인 중 하나가 집권여당의 무능·무소신이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는 듯하다. 그나마 “이번 논란이 국정운영 투명성을 높이고 소통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초·재선 의원 모임 ‘아침소리’의 기자회견이 여권 내 거의 유일한 다른 목소리인 것으로 보인다. 새누리당은 지금 상황이 야당의 정치공세만 그치면 평온해질 거라고 정녕 믿고 있는 것인가. 민심엔 귀를 닫고 대통령 해명만 가슴에 품는 태도를 국민이 어떻게 평가할지 생각해 보았는가. 여당 지도부는 스스로 물어보고,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



[칼럼] 나를 어루만져준 두 젊음

● 칼럼 2014. 12. 16. 20:31 Posted by SisaHan

죽음이 이렇게 내 곁으로 숱하게 지나간 해는 없었던 것 같다. 연초에 동갑내기 둘이 세상을 뜨더니 봄에는 세월호에서 여리디여린 학생 수백명의 참혹한 죽음을 몸이 저며지는 듯한 고통 속에서 보아야 했다. 가을 들어 선배 후배 친지 학자 시인 등 인생에 깊은 울림을 주었던 사람들을 줄줄이 떠나보냈다. 죽음을 많이 볼 나이가 되었구나 싶었지만 죽음이 나이순이었던 것도 아니어서 황망함 또한 커져갔다.
아침 산책길에 청운동 자치회관 앞에서 세월호에서 진 어린 학생들의 사진이 찬바람에 흔들린다. 그 사이로 방긋이 웃고 있는 얼굴들을 눈에 익혀두고 싶어 찬찬히 들여다본다. 어찌 저리 여리고 해맑은 아이들을. 하늘도 무심하시지라는 탄식을 매번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세상 또한 그들을 잊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절망 때문에 지금 우리 사회의 값싸고 너절하기 짝이 없는 권력싸움과 세상살이의 모진 사연들이 허망하기도 해서 하루하루가,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다가올 한해가, 두렵기만 했다.
그런데 젊고 따뜻한 두 남녀를 만났다. 이런 사람들과 같이 사는 세상이라면…. 그들은 황폐한 내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영화 <쿼바디스>를 보고 나오는데 젊은 여자가 쫓아왔다. 머뭇머뭇하며 다가온 여자는 추운 겨울 칼바람 속에 서 있는 성냥팔이 소녀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 눈빛이 너무 간절해서 무슨 일이냐 물었더니 “혹시 교회 다니셔요?”라고 아주 작은 소리로 물었다. 대형 교회와 장사꾼 목사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토해내고 있는 영화를 보고 나서도 전도할 생각이 날까라는 생각이 스쳐 안 다닌다고 단호하게 말했더니 쭈뼛쭈뼛하며 더욱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작은 교회로 나오셔요 대형 교회만 그래요 작은 교회로 오면 돼요……, 여자는 울먹거렸다. 영화를 보고 아마 영혼이 통째로 뒤집어졌을 젊은 여자는 그래도 저건 하나님과 예수님과 상관없는 교회와 목사들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민망함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말하는 거니까 들어달라고 간절한 눈길로 호소하고 있었다.
그 여자의 눈길 때문에, 그 간절하고 슬픈 눈길 때문에, 만약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앞을 혼자 지나가야 하는 절대적 순간이 올 때 그 눈빛을 기억하고 존재의 소멸보다 따뜻한 빛 같은 것을 느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또 다른 젊은이, 그는 스물다섯살의 신학생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목숨>은 호스피스센터에서 마지막을 준비하는 이들의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가족과 본인의 허락을 얻어 찍은 말 그대로 가감 없는 현실이었다.


신학생은 속세에서 어떤 상처를 받았다고 했고 그래서 휴학을 하고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온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과 함께 살며 기타 치고 노래 부르고 곳곳에서 유쾌한 바이러스를 전파한다. 외로운 사람과 말벗도 해주고 마술을 가르치기도 하고 간간이 막걸리도 나누어 마시면서 평균 21일 정도의 시간밖에 안 남은 사람들에게 행복한 순간을 마련해주고 웃음을 이끌어낸다. 그는 말한다. 나는 신앙에 대한 회의가 없다. 확신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호스피스 병동에서 지내면서 보잘것없는 자신에게 신뢰를 보내고 착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이 살았을 속세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겠다는 마음을 굳힌다.
몇몇 돌보던 이들이 죽은 다음에 그는 호스피스 병동을 나온다. 신발끈을 조여매고 배낭 하나 메고 다시 저 속세의 모두 죽을 날을 받아놓은 거나 다름없는 인간들과 다시 부딪쳐 보자고 다짐한다. 그가 다시 신학교에 돌아갔는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온갖 장식과 불빛으로 예수님 오신 날을 한달 내내 기리는 도시의 풍경 속에서 우연히 만난 두 젊음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생각한다.
2000년 전의 예수가 아닌, 바로 지금 여기 이 땅에서 같이 사는 누군가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고야 마는 그 진정한 마음이 예수의 의미이고 그것이야말로 기적이 아닌가 싶다는 생각을 한다.
< 김선주 - 언론인 >



[1500자 칼럼] FTA와 통상정책의 현주소

● 칼럼 2014. 12. 4. 15:35 Posted by SisaHan
필자는 그동안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한 대외개방의 필요성을 역설해왔다. 한-중 자유무역협정은 우리 경제의 장기 성장과 외교적 실리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번 한-중 자유무역협정 협상 과정을 통해 드러난 치명적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무역협정이란, 원래 두 개의 협상을 거쳐야 하는 게임(two level game)이다. 상대국과의 대외협상을 펼치기 전에 자국 내 이해관계 산업 사이의 이해조정을 위한 대내협상을 먼저 거쳐야 한다. 상대국으로부터 특정 부문의 관세철폐 양보를 얻어내려면 우리도 다른 쪽을 양보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국내 산업 가운데 자유무역협정으로 이익을 보는 쪽과 손해를 보는 쪽 사이의 대차대조표를 완성해야 한다는 말이다.
대내협상이라고 의견수렴 과정만 거치면 되는 게 아니다. 관련 산업 종사자들을 설득하고 압박해 실질적인 양보를 이끌어내야만 한다. 한-중 자유무역협정 협상은 이런 대내협상 과정을 온전히 거치지 않고, 대외협상 테이블로 향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지금의 사태가 벌어졌다. 협상 테이블에서 우리가 중국 쪽에 줄 게 없으니 중국 쪽으로부터도 얻어낼 게 없는 것이 당연했다. 우리가 농수산물 민감품목 리스트를 고집하면서, 중국 쪽에 제조업 품목에 대한 관세 철폐를 요구하니 합의가 이루어질 리 만무했다. 그러자 상품 시장 접근 분야는 추후협상 과제로 미루고 규범 분야 협상을 진행했다. 그러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성과가 필요해지자, 민감 품목들을 협정 적용 대상에서 서로 제외하는 것으로 손쉽게 합의를 도출했다. 그러고는 농수산물 분야를 방어해낸 것이 최대 성과인 것으로 발표했다. 이것은 협상이 아니고, 협상 모습을 연출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조업 분야와 농수산업 분야 사이의 이해관계 조정의 의지와 능력이 결여된 것이 우리 대내협상 메커니즘의 실체이다. 청와대가 부처간의 이견을 표출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려놓고 있는 상황이니 더욱 그렇다. 정치적 효과를 최우선시해 통상정책의 타이밍을 잡는 현 정권의 행태도 문제다.
대외정책이 국내 정치의 수단으로 손쉽게 전락할 때, 장기적 비용은 국민의 몫으로 돌아온다. 인사 추문과 세월호 정국을 ‘통일대박론’과 ‘일본 때리기’ 대외정책으로 버텨온 박근혜 정부가, 이제 통상정책마저 그 제물로 삼고 있다.

통상정책 전문가의 권위가 올바로 서지 못한 점도 이번 사태에 한몫을 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 협상의 무수한 논쟁을 겪으며, 통상협상 전문가들은 ‘국익의 첨병’이 아니라 경제민주화에 역행하는 ‘외세의 앞잡이’라는 악평에 시달렸다. 정권교체와 더불어 통상교섭 권한은 갑자기 외교부에서 산업부로 옮겨졌고, 그동안 통상협상에서 뛰었던 관리들은 영혼 없는 공무원이 되어 국내 정치가 안내하는 길로 통상정책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있다.
이제 한-중 자유무역협정을 넘어 환태평양동반자협정(TPP), 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RCEP), 그리고 대통령이 적극 지지의사를 표명한 아태자유무역협정(FTAAP) 등 더 높은 수준의 개방을 추구하는 광역경제통합 협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지금과 같은 대내협상 체제로 광역 자유무역협정 협상으로 나가는 것은 탄약 없는 총을 들고 전쟁에 나서겠다는 이야기다.
이번 기회에 통상정책의 기능적 독립성을 다시 세우고 대내협상 메커니즘을 철저히 재정비해야 한다. 집권세력이 못한다면, 차라리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가 나서 정권을 일깨워줘야 한다. 한-중 자유무역협정 비준 동의 과정을 다소 지연시켜서라도.
< 최원목 - 이화여대 교수, 싱가포르국립대 방문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