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첫 손녀의 첫 생일에 부쳐

● 칼럼 2015. 3. 14. 17:43 Posted by SisaHan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첫 손녀가 태어났습니다. 첫째를 결혼 시킨 후 8년 만에. 우리 때와는 달리 아들내외는 친밀한 계산 하에 출산 계획을 세우면서 “늦게 할머니 되게 해 드릴 테니 염려 마시고 젊게 사시라”는 농담을 던졌지만 그렇게 영악스러울 줄은 몰랐습니다.
임신 사실을 알려 오면서, 동시에 문명의 발달을 실감하게끔 뱃속의 아이 사진을 동영상으로 보내왔습니다. 흰 볼이라는 태명과 함께.
빨리 세상 구경을 하고 싶어서인지, 아님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바램을 알았는지 아이는 예정일 보다 두어 주일 빨리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저 신기하고 대견스러웠습니다. 동영상으로 보내지는 모습들을 보면서.

‘생명’ 한 생명이 태어나 안겨 주는 생명의 신비함-. “생겨난 모든 것이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1: 3~4) 그랬습니다. 바로 빛이었습니다. 나날이 다른 모습으로 자라고 있는 생명. 아이는 바로 ‘환희’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부부는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아이들 옷 가게를 기웃거리며 다니는 쏠쏠한 재미를 만끽하며 얼마나 웃고 다니는지 모릅니다.
사내녀석 둘을 낳아 길렀기에 여자아이들 옷을 처음 만져보면서 돌아다니는 그 재미와 기쁨은 정말 대단합니다. 느껴 보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사람이 늙어 간다는 게 그리 슬픈 일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인생의 또 다른 묘미를 만끽하고 있으니까요. 토요일 저녁마다 동영상을 통하여 만나는 손녀의 재롱은 날로 발전되어 이젠 완연한 ‘한 사람의 독립된 인격체’였습니다. 아직 말은 잘못하지만 다 알아 듣고 행동하는 걸 보면, 그저 신기할 뿐이지요. 감정의 변화, 싫고 좋음의 표현과 방법을 확연히 나타내 보이니까요. 아이가 어리다고 함부로 말하고 이야기하면 아이에게 상처가 되고 아이의 인격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치리라 봅니다.
부모를 통하여 아이가 세상에 나왔지만 아이는 스스로의 생각과 판단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소유물이 아닌, 가장 순수하고 깨끗한 영혼을 가진 한 인격체 임이 분명했습니다.

“아가야, 며눌 아가야!” 그러므로 너의 딸인 동시에, 우리의 손녀인 그 어린 새싹에게는 맘껏 사랑하면서 자주 집 앞 공원에 데리고 나가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뭇잎, 햇빛에 반짝이는 개울물, 그 물속에 헤엄치며 노는 송사리 떼들, 또 떨어져 죽은 나무 잎사귀, 공중에 나는 새, 초록의 나무들과 풀, 그리고 공원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손잡고 가는 연인들의 표정도, 우는 아이들의 모습도 보여주며 함께 산책을 많이 하도록 하려 무나. 이 모든 것들이 아이의 선생님이 아니겠나.
부디 이 학원 저 학원으로 아이를 끌고 다니지 말았으면 한다. 우리는 아이에게 사랑만 주자. 그러나 우리의 생각까지 주지는 말자. 단 나누며 살아야 한다는 것은 가리키자. 사과 한 조각, 오이 한 조각이라도 자기 입에만 넣지 말고 “아빠도 엄마도 주세요”라고 하면서 먹이자.
공원이나 밖에 나가서도 자기가 좋아하는 밥풀 튀김을 먹으면서 옆에 앉은 모르는 친구에게도 주는, 나눔을 가리키며 욕심 없는 사람으로, 그리고 감사 할 줄 아는 사람으로 키우자.

늘 기도한다. 그 아이, 그리고 그 “자손 대대로 하나님 믿는 자녀 되게 해 달라”고. 우리는 기다린다. 토요일 저녁을, 그리고 맘껏 웃는다.

< 김선 - 오타와 거주 >



[사설] 리퍼트 대사 ‘위문 과공’

● 칼럼 2015. 3. 14. 17:41 Posted by SisaHan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의 병실을 우리 정치인과 정부 고위인사들이 줄지어 찾고 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여당 의원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일행, 그리고 이완구 국무총리와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일찌감치 병실을 찾았다. 어제는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문병을 했고, 박근혜 대통령이 중동 순방을 마치자마자 귀국 첫 일정으로 세브란스병원을 방문했다. 그밖에도 너무 많은 사람이 주말에 방문하여 리퍼트 대사가 피로를 느낀다며, 더는 면회를 받지 않겠다고 미 대사관 쪽이 공식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흉기로 공격당해 상처 입은 피해자를 찾아 위로하는 것은 미덕이고 예의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상대가 외국을 대표하는 외교사절인 만큼 위로의 형식을 정중하게 갖추는 것은 필요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각각의 문병 행차는 한 건씩 놓고 볼 때는 이해가 간다. 하지만 여야 대표와 소속 의원들, 각 부처 장관과 총리, 대통령까지 한 외국 대사의 병실에 줄을 잇는 모습을 보면 이건 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질서가 없고, 외국에서 볼 때 강대국 대사에 대한 과잉 대우로 비칠 수 있다. 가령 정부 대표로 주무 장관이든 누구든 한 사람을 지정해 위문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위로 전문이나 화분을 보내는 것으로 조율을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문병 때 위로의 말도 잘 골라서 할 필요가 있다. 김무성 대표는 “종북좌파들이 한-미 동맹을 깨려는 시도였지만 오히려 한-미 동맹의 굳건함을 확인하고 더 결속시키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고 한다. 다친 사람을 위로하는 데 집중하는 게 옳지, 거기까지 가서 정치적 이득을 셈하며 사건을 부풀리려는 것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리퍼트 대사는 병상에서 “김치를 먹었더니 더욱 힘이 나는 것 같다”며 ‘한국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그의 주가도 날로 솟고 있다. 외교관이 위기 상황에서 소통 전략을 잘 구사하여 우호적 여론을 조성하는 좋은 사례를 보는 듯하다. 반면에 우리 정부와 정치권의 태도에선 원숙함을 찾기 어렵고, 과공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뉴욕타임스>가 오죽하면 한국의 과잉반응을 꼬집어 “한미동맹을 오히려 훼손하는 역풍이 분다” 고 지적했을가. 이 신문은 피습사건을 박근혜 정부와 그 지지자들이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고 비판했다.



[사설] 일본은 왜 독일에서 못 배우나

● 칼럼 2015. 3. 14. 17:39 Posted by SisaHan

과거사 문제를 회피하는 아베 신조 일본 정부를 향해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준엄한 충고를 했다. 일본 정부는 부끄러움과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그리고 군대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과거사 현안의 해결에 적극 나서는 것이 옳다.
일본을 방문한 메르켈 총리는 9~10일 “위안부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는 것이 좋다”, “과거에 대한 정리는 (가해국과 피해국 사이) 화해를 위한 전제다” 등 진심 어린 충고를 했다. 그의 말이 큰 울림을 갖는 것은 똑같은 2차대전 전범국인 독일과 일본의 자세가 크게 대비되기 때문이다. 과거사 문제를 풀기 위한 독일의 일관된 노력은 유럽 전체의 화해와 통합의 밑거름이 됐다. 메르켈 총리도 2005년 취임 이후 기회가 날 때마다 과거사 반성의 중요성과 자국의 책임을 강조해왔다.


일본 정부의 태도는 여전히 가증스럽다. 이번에도 기시다 후미오 외무상은 10일 ‘일본과 독일의 전후 처리를 단순 비교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고 발을 뺐다. 아베 총리는 패전일(8월15일) 무렵 나올 전후 70년 담화에서 ‘식민지배와 침략’ ‘통절한 반성’ ‘마음으로부터의 사죄’ 등 이전 담화의 핵심 표현조차 빼려 한다. 나아가 지구촌의 공분을 사고 있는 위안부 문제에서는 문제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몰역사적 태도를 나타낸다. 일본은 최근 외무성 누리집에서 “(한국과 일본은) 자유와 민주주의, 시장경제 등의 기본적 가치를 공유한다”는 표현을 삭제하는 몰지각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가해국인 일본이 이런 태도를 고수하는 한 한국·중국 등 피해국과의 진정한 화해는 있을 수가 없다.


일본은 미국이 자신의 입장을 지지할 것으로 믿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웬디 셔먼 미국 국무부 정무차관은 최근 ‘과거사 갈등은 한·중·일 모두의 책임’이라는 엇나간 발언을 했다. 하지만 군대위안부나 난징대학살을 부정하는 일본에 침묵한다면 미국 또한 전쟁범죄자가 될 뿐이다.(미국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 데니스 핼핀 연구원) 미국이 아무리 중국의 부상을 우려해 일본과의 협력을 중시하더라도 이런 선택을 하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일본이 가야 할 길은 하나뿐이다. 역사를 직시하고 자신의 책임을 분명히 인정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위안부 문제는 해결이 시급하다. 올해는 2차대전 종전 70돌이 되는 해다. 일본이 올해마저 역주행을 하면서 흘려보낸다면 화해는 더욱 멀어질 것이다.



[한마당] 3.1은 운동이 아니라 혁명

● 칼럼 2015. 3. 14. 17:30 Posted by SisaHan

지난 3월1일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라는 단체의 기념행사에 참석한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특강을 했는데 메시지에 울림이 담겼다. 그는 3.1운동을 3.1혁명으로 이름을 바꾸자고 주장했다. 제헌절, 광복절, 한글날, 개천절은 이름이 확연한 의미를 지니는 반면에 왜 3.1절만 의미가 거세되어 단순한 숫자로만 표현되느냐는 것이다. 1919년 3~4월에 일어난 세계사적으로 위대한 혁명적 거사를 ‘3.1운동=스리 콤마 원 스포츠’로, 외국인이나 어린이가 오인하도록 만들 이유가 없다는 문제제기였다.

3.1혁명은 중국 신해혁명, 러시아혁명과 함께 유라시아의 3대 혁명으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겠다. 무엇보다 기본가치로 볼 때 체제를 완전히 변혁하고자 했다.


첫째로 자주독립을 선언하고 일제 식민지배를 거부하였으며, 둘째로 4000년 동안 내려온 봉건왕조를 거부하고 민주공화주의를 주창했다. 셋째, 여성이 역사 현장에 주체적으로 등장하여 신분, 세대를 넘는 범민족적 항쟁을 벌였다. 당시 피검자 1만9525명 중 학생과 교원이 2355명인데, 이 가운데 여성이 218명이었다. 여성의 취학률이 남성의 100분의 1도 안 될 때이니 대단한 숫자다. 넷째, 전근대적 신민의식이 근대적 시민의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3.1혁명은 역사의 여러 흐름이 유입되었다가, 새로운 흐름을 발생시키는 발원지이며, 거대한 호수로 비유되기도 한다. 실제로 동학혁명, 갑오개혁, 만민공동회, 의병전쟁, 의열투쟁 등의 흐름이 3.1혁명으로 만나, 무장투쟁, 임시정부, 조선의용대, 광복군 등의 독립전쟁 흐름을 만들어냈다. 대한민국의 정체가 된 민주공화주의는 3.1혁명에서 발아했다.


1930년대 이후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3.1혁명이라 불렀다고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1941년 조소앙이 기초한 건국강령 제정 이후 3.1혁명 또는 3.1대혁명을 공식 호칭으로 썼다. 중국 역사가와 언론매체들도 모두 혁명이라 하였다. 다만, 일본 언론이 소요, 폭동 따위로 불온시하다 간혹 ‘운동’이란 말을 썼다고 한다.

혁명이 운동으로 공식 격하된 것은 엉뚱하게도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다. 당시 헌법기초위원회는 전문위원 유진오가 마련한 초안을 중심으로 논의했다. 초안은 전문에서 “3.1혁명의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라고 했고 30명의 헌법기초위원이 모두 동의했다.
그러나 한민당 계열 일부 의원들이 혁명이란 용어에 거부반응을 보이면서 5인 소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고, 친일파 출신 이종린 등이 주도한 소위가 3.1혁명을 기미 3.1운동으로 고친 수정안을 국회 본회의에 상정했다. 제헌국회 실세이던 이승만은 “혁명이라면 우리나라를 전복하자는 것”이므로 부당하다는 엉뚱한 발언을 하고, 일본 제국대학 출신 이주형 의원의 찬성 발언만을 허용한 다음 표결에 부쳤다. 친일세력과 역사의식이 박약한 이승만의 농간으로 3.1혁명이 박제화된 것이다.


앞으로 3.1운동을 3.1혁명으로 공식 수정하면 좋겠다. 무엇보다 사물의 실체와 이름이 맞아떨어져야 한다. 공자는 정명사상을 주장했다. 아울러 식민지 근대화론, 뉴라이트 인사들의 건국절 지정론 따위의 그릇된 역사관을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승만은 3.1혁명을 격하시킨 것을 봐도 건국의 아버지로 높임을 받을 자격이 없다.
일본 아베 정권이 전쟁 책임을 부인하고, 그 행태를 미국이 은근히 두둔하고 있다(웬디 셔먼 미 국무부 정무차관). 재균형이라는 이름 아래 중국 포위망을 짜려는 미국과 신형 대국관계를 추구하는 중국이 맞서 동아시아에 갈등의 파고가 높아지고 있다. 올바른 역사인식은 갈등 대신 균형과 평화의 질서를 만들기 위한 노력의 출발점이다. 3.1혁명 이름 되찾기는 동아시아 차원의 의미도 크다.
< 한겨레신문 박창식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