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입가경이다. 메르스 공포에 국민은 공황 상태인데 청와대는 쓸데없는 싸움만 걸고 있다. 국회법 개정안을 두고 국회·여당과 대립하더니 박원순 서울시장을 비판했다. 정부와 국회, 지방자치단체가 한몸이 되어 총력을 기울여도 모자랄 판에 이런 대립과 갈등을 보는 국민은 억장이 무너질 지경이다. 박 시장 회견을 비판하기 전에 정상적인 정부라면 서울의 대형병원 의사가 메르스 증상이 의심되는데도 1500여명이 모인 재건축조합 총회에 참석한 사실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대처했어야 마땅했다. 그 장소에 모인 사람에게 정확한 상황을 알려서 추가 감염 가능성을 차단하는 게 옳다.


하지만 보건복지부는 조합원 명단도 입수하지 못해 쩔쩔맸다. 이 의사에게 메르스를 옮긴 환자가 시외버스를 타고 병원 응급실로 왔다고 하는데, 정확한 이동 경로와 버스에 함께 탔던 승객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전염병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신속·철저하게 대응하는 게 생명인데, 정부 대응은 메르스 바이러스보다 몇 배나 굼뜨고 비체계적이다.
왜 그런가. 지금 정부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메르스와의 전쟁을 지휘하는 사령탑이 없다는 점이다. 메르스와 싸우는 최일선의 책임자는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이다. 그러나 그는 잇단 판단 잘못과 능력 부족으로 전선에 여러 차례 구멍을 냈고, 국민과 의료계의 신뢰를 잃었다. 국무총리는 공석이다. 부총리라도 중심이 되어 모든 부처 역량을 동원해야 하는데, 현 정부는 그렇게 하지도 못했다.


궁극적으로 메르스와 같은 국가재난 수준의 전염병 대처는 대통령과 청와대가 중심에 서서 지휘하는 게 맞다. 그래야 국민이 안심하고 정부·민간의 역량을 효율적으로 동원할 수 있다. 국회의 법적·제도적 지원을 신속하게 받고, 지방자치단체와 긴밀하게 공조하며 지역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청와대는 뒷짐만 지고 상황을 지켜보는 것처럼 비치는 게 현실이다. 한 예로, 김성우 청와대 홍보수석은 5일 박 시장을 비판하면서 “서울시와 복지부가 서로 긴밀하게 협조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런 ‘긴밀한 협조’가 이뤄지게 할 주체가 다름 아닌 청와대와 대통령이란 사실을 망각한 채 마치 제3자처럼 말하고 있다. 청와대 참모들이 이런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으니 부처간 협조가 발 빠르게 진행될 리가 없고, 대응도 체계적일 리 없다. 골든타임에 보건복지부가 환자의 동선과 접촉자 파악에만 며칠을 허비하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겠는가.


거듭 말하지만, 대통령이 최일선에서 진두지휘해야 한다. 필요하면 중앙대책본부에서 직접 회의를 주재하고, 현장을 찾아가 국민을 안심시켜야 한다. 믿음을 잃은 장관 뒤에서 보고만 받고 있어서는 메르스와의 전쟁에 이길 수 없다.



[칼럼] ‘각자 도생’

● 칼럼 2015. 6. 12. 16:33 Posted by SisaHan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라고 큰소리치던 이승만의 심복 신성모 국방부 장관은 6·25 북한군의 기습을 맞아 총 한번 대포 한번 제대로 쏴 보지 못하고 허둥지둥 내빼다가, 결국 모든 군인은 “각기 양식대로 행동하라”라고 명령을 내렸다. 한 나라의 국방부 장관이라는 사람이 전쟁 중 ‘각자도생’의 지시를 내린 어처구니없는 순간이었다.
인민군의 기습으로 정작 본인은 이미 대전으로 내려가 놓고 국민들에게 서울을 사수하라고 거짓 방송을 내보낸 대통령 이승만은 한국은행 창고에 은행권을 그대로 두고 내려갔다. 국회 부의장 조봉암이 도망간 ‘대한민국’의 뒷수습을 하고서 서울을 떴지만 시민들까지 데려갈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승만 정부는 그 혼돈의 피난 상황에서도 전국의 특무대 요원과 헌병, 경찰을 총동원하여 위협세력이라고 간주했던 보도연맹원 수십만명을 구금, 학살하는 일만은 치밀하고 철저하게 수행했다. 국가 경제, 국민 안전과 생명은 나 몰라라 했지만, 권력 안보에는 그렇게 철저했던 정권이었다.

메르스 첫 환자가 확인된 지 14일이 지나서야 첫 관계장관회의를 개최하는 등 허둥대기만 한 박근혜 정권과 종편은 온 국민이 공포감으로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던 이 위급한 상황에도 박원순 시장 공격하는 일은 빼놓지 않았다. 4일 밤 청와대는 국회법 통과를 두고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의 발언을 반박하는 내용의 전화를 기자들에게 돌렸다고 한다. 전염병 확산 막는 것보다 도전 세력 견제하는 일이 더 다급한 일이었던 모양이다.
정권이 어디에 최대의 주안점을 두고 있는지가 드러난 장면이었다. 연출한 사진을 언론에 보내거나, 국민을 위한다는 담화로 한두번은 국민을 설득할 수 있지만, 그런 제스처가 계속 먹힐 수는 없다. 애국가를 4절까지 외우고, 입만 열면 태극기 게양을 강조한다고 해서 애국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종북 세력 제거한다면서 촛불시위 단순 가담 대학생들까지 치밀한 사진 채증을 거쳐 찾아내어 300만원이라는 거액의 벌금을 때리는 이 공권력이 왜 메르스 방역에는 이렇게 우왕좌왕했는지 생각해 보자. 그것은 무능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정확히 말하면 강한 관심과 완전한 무관심이 공존한다.

우선 장관인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그 분야의 전문가, 공직자로서 도덕성을 갖춘 자를 찾아내서 각료로 임명하지 않고, 공인으로서는 너무나 많은 흠을 갖고 있지만 충성심만은 확실한 사람들을 고르는 것을 여러 번 보고 나서 우리는 다 알았다.
6·25 당시 그렇게 도망갔던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뒷수습을 했던 조봉암을 결국 간첩으로 조작하여 처형했다. 조봉암은 사형 직전 “이승만은 소수 잘사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를 했고, 나는 사람들이 골고루 잘사는 정치를 하려다가 결국 죽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런 조봉암이 사형당하는 것을 본 모든 국민들은 “이 나라에서 사회와 약자를 위하는 것은 ‘빨갱이’ 것이며 오직 자신의 이익에만 충실해야 한다”고 속으로 다짐했을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더 나은 삶 지수’ 조사에 의하면 “정작 어려울 때 의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응답한 한국 사람의 비율이 오이시디 회원국 가운데 가장 낮았다고 한다. 위급할 때 달려와 보살펴주는 정치가나 관리가 없고, 힘들어하는 사람을 도와주려는 이웃 사람들을 찾기 힘든 세상의 스산한 풍경이다. 그래서 과거 전쟁 중에 ‘각자도생’해야 했던 국민들은 전염병이 창궐한 오늘 ‘자가격리’ 할 수밖에 없다.
각자도생의 세상은 사람이 만들어낸 ‘사회적 지옥’이다. 그런데 우리는 혼자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다. 21세기 고도위험사회에서 전염병, 탄저균, 방사능을 완벽하게 피할 수 있는 장소는 아무 데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와 정치를 완전히 개조해서 모두가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권한만 쥐고서 책임은 지지 않으려는 권력을 책임지게 만들어야 한다.
< 김동춘 -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



[1500자 칼럼] 너구리에게 배운 한 수

● 칼럼 2015. 5. 29. 16:39 Posted by SisaHan

포근한 봄빛이 잔잔하게 퍼져가는 아침녘, 모처럼 눈 먼 시간이 아주 조금 주어졌다. 연중 가장 좋아하는 오월을 제대로 느끼지 못해 아쉽던 참인데 끝자락이나마 잡을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싶다. 모카커피 한 잔을 찐하게 내려서 창가에 앉았다. 연초록 화사함으로 치장한 뜰 안 풍경이 프레임 가득 들어온다. 보랏빛 향기를 뿜어내는 라일락 군락, 가지마다 꽃술을 늘어뜨린 떡갈나무, 잔잔하게 깔린 야생화 무리 등등, 내가 늘 동동거리며 무신경하게 드나드는 사이 자연은 성찬을 준비하고 있었나보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멀리 있는 자연만을 동경하면서 쫒아 다닌 내 자신이 좀 미안하다. 조그만 텃밭과 쭉쭉 뻗은 전나무 숲 그리고 그 사이로 이웃들의 통나무 헛간이 얼기설기 자리 잡고 있는 풍경이 한 폭의 수채화다. 우리의 삶속으로 들어온 자연, 자연 속으로 들어 간 삶, 자연과 삶의 잔재들이 자유롭게 조화를 이룬 광경이 오늘따라 정겹게 다가온다. 최근에 겪은 너구리와의 전쟁을 떠 올리며 야생동물들과도 이런 관계가 유지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은 해 본다.


얼마 전부터 침실 머리맡 천장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감지됐다. 잠이 들 만 하면 무언가가 바스락 거려 어렵게 청한 잠을 깨워놓기 일쑤더니, 얼마 안가서 묵직한 발자국 소리를 내며 천정 안을 휘젓고 다녔다. 처음엔 지붕 위에 있는 공기 정화용 팬 사이로 침입한 새나 다람쥐 정도로 가볍게 생각했다가 점점 커져가는 움직임에 긴장하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면 너구리가 분명했다. 녀석은 이웃집 지하실에 들어서 말썽 피우는 스컹크 보다야 낳겠지만 사람과 동거하기엔 거북한 존재임은 말해서 무엇 하랴. 우리 부부는 이 대책 없는 무단 침입자를 내 쫒기 위해 수시로 천장 안을 살펴보았다. 천장과 지붕 사이, 한 길도 안 되는 캄캄한 공간에는 온열재로 뒤덮인 석면과 아래 위에서 뿜어대는 더운 열기뿐 별다른 기미를 찾아낼 수 없었다. 틈만 나면 랜턴을 비추며 답답한 공간 뒤지기를 한 지 며칠째, 큼직한 움직임 속에서 재재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아마도 그 사이 새끼를 낳은 게 틀림없었다. 순간 귀밑머리가 쭈뼛 섰다. 얇은 널빤지 한 장을 사이에 두고 부부의 가장 은밀한 침실이 너구리에게로 향하고 있었음에 모골이 송연해짐은 물론, 우리가 곤히 잠들었을 엊그제 밤, 어미의 산통과 출산이 머리 위에서 이루어졌음을 상상하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며칠 후, 너구리 일가를 퇴출시키고야 말겠다는 짝꿍의 의지 끝에 들려나온 새끼 세 마리, 아직 세상을 향해 눈도 못 뜬 채 머리를 처박고 서로 엉켜있었다. 막상 단서를 잡고 나니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게 아니었다. 새 생명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가 첫 관문이었다. 정부에서는 너구리 개체수가 너무 늘어나서 예산을 들여 줄이고 있다지만 우리의 영역 안에 들어 온 새 생명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고민 끝에 어미가 다시 새끼를 이끌고 본가로 회귀하기 불가능한 곳에다 유기시키기로 작정하고 집에서 먼 숲에다 놓아주었다.


문제는 그날 밤, 초저녁부터 어미가 새끼를 찾느라 천장에선 난리가 났었다. 공범인 짝꿍과 나는 새끼 찾아 헤매는 어미의 처절함에 밤잠을 설쳤다. 모성 본능은 인간 뿐 아니라 미물도 다를 바 없음을 절실히 느낀 긴 긴 밤이었다. 어미와 새끼를 갈라놓은 장본인 짝꿍에겐 어미의 거친 숨소리까지 들렸다니 그 죄책감이 나보다 훨씬 더 했나보다. 유기한 새끼들을 데려다가 어미가 잘 다니는 통로에 놓아줌으로써 우리들의 전쟁은 종지부를 찍었다. 평온해진 지금도 자리에 누우면 온몸을 던져 새끼들을 구해 낸 어미의 모성애가 천장에 느껴진다. 너구리에게 배운 한 수가 나의 지난날들을 돌아보게 한 사건, 그래서 자연은 위대하다고 하나보다.
향긋한 커피 향에 연둣물을 입힌 나의 망중한은 막 개화하기 시작한 송화(松花)를 보며 종지부를 찍는다. ‘송홧가루 날리는 유월이 오면 솔잎주를 담궈서 내 좋은 사람들에게 달려가리라’ 다짐하며.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등단 >



[사설] 한-일 외교 정상화의 조건

● 칼럼 2015. 5. 29. 16:38 Posted by SisaHan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왜곡 중단을 촉구하는 일본 역사학자들의 성명이 25일 발표됐다. 최근 한-일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상황에서 나온 것이어서 더 뜻깊다. 아베 신조 일본 정부는 이를 계기로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과거사 해결에 적극 나서기 바란다.
성명에 참여한 단체는 역사학연구회 등 4개 대형 역사단체를 비롯해 16개 역사 연구·교육 단체를 망라한다. 반년 정도의 준비기간 동안 ‘일치를 본 의견’을 모았다고 하니 성명 내용에 무게가 느껴진다.


핵심은 위안부 강제연행은 역사적 사실이며 일본 정부는 이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은 인정하면서도 강제연행을 부정하거나 교묘하게 책임을 회피해온 아베 정부의 태도가 잘못이라는 얘기다. 이 성명은 지난 6일 지구촌 역사학자 187명이 낸 위안부 관련 성명과 맥락을 같이한다. 아베 정부는 자국 학자들도 인정하는 사실에 대해 애써 눈감으려는 자세에서 빨리 벗어나야 마땅하다.
아베 정부의 ‘과거사 뭉개기’에도 불구하고 지난달 말 미-일 정상회담 등을 계기로 한-일 외교관계를 정상화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23일 일본 도쿄와 필리핀 보라카이에서 두 나라 재무장관 회담과 통상장관 회담이 열렸다. 둘 다 2년 이상 중단됐던 회담이다. 특히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박근혜 정부의 부총리급 이상 고위관료로는 처음 일본을 찾았다. 오는 30일에는 싱가포르 아시아안보회의(샹그릴라 대화)를 계기로 한-일 국방장관 회담이 열린다. 언뜻 보면 두 나라가 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수순을 밟는 것 같기도 하다.


일본은 한-미-일 삼각 협력 강화를 추구하는 미국을 등에 업고 한-일 관계 개선을 밀어붙인다. 하지만 아베 정부가 과거사 해결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한 진정한 한-일 외교 정상화는 있을 수가 없다. 부분적으로 정경분리나 실용외교가 시도되더라도 일본의 진의에 대한 의심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가 과거사 문제에서 중립적인 듯하면서 사실상 일본 편을 드는 것도 잘못이다. 2차대전 이후 역사를 돌아볼 때 미국은 진실에 근거한 과거사 해결에 적극 나서야 할 의무가 있다.
역사에 묶여 아무것도 못하면 안 된다는 말은 맞다. 과거보다 현실과 미래가 중요하다는 주장도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그 자체로 현실과 미래를 규정한다. 편법으로 구축된 관계는 사상누각처럼 기반이 취약하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