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루게릭병 환자를 위한 ‘얼음물 뒤집어쓰기’

● 칼럼 2014. 9. 2. 16:03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프로농구 울산 모비스 코치였다가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박승일씨가 19일 ‘얼음물 뒤집어쓰기’(아이스버킷 챌린지)에 동참했다. 박씨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힘든 몸이라 얼음물을 뒤집어쓰지는 않고 대신 인공 눈꽃송이를 날렸다. 또 “시원하게 얼음물 샤워를 할 수 있는 당신은 행복한 사람입니다”라는 글도 남겼다. 팔다리가 멀쩡하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축복을 받고 있는 건지 새삼 일깨워준 박씨의 ‘분투’였다.
 
‘얼음물 뒤집어쓰기’는 미국 루게릭병협회가 이 병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고 루게릭병 환자를 돕기 위해 미국에서 시작한 모금운동이다. 이 운동이 한국에까지 상륙해 유명 연예인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다. 최근 교황 방문과 세월호 침몰은 우리로 하여금 소외된 이웃들을 한번쯤 되돌아보게 하고 있다. 이 행사가 루게릭병 환자 등 우리 사회의 사회적 약자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계기로 작용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행사에 참여하면서 한번쯤 짚어볼 대목이 있다. 첫째는 행사의 취지를 소홀하게 다뤄서는 안 될 것이다. 차가운 얼음물이 닿으면 마비되는 증상처럼 근육이 잠시 수축하게 된다. 루게릭병 환자들은 이런 고통을 지속적으로 느낀다고 한다. 그래서 그 고통을 묘사하기 위해서 얼음물을 뒤집어쓰는 건데, 유행처럼 올라오는 얼음물 뒤집어쓰기 동영상을 보면 너무 재미 위주로 흘러가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게 한다.
 
둘째는 기부의 한계다. 이런 기부 행사가 약자를 도울 수 있는 건 맞지만, 근본 해결책은 될 수 없다. 루게릭 같은 희소병은 환자 개인이나 가족만의 문제가 아니기에 공공 의료보험 체계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 얼음물 뒤집어쓰기 같은 행사가 일시적인 치유책이 될 수는 있으나, 안정적이고 근본적인 대책이 되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기부에 참여하는 따뜻한 마음들이 부디 일회성 행사로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에서 탄탄한 복지체계와 사회안전망을 갖추는 ‘연대의 힘’으로 승화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설] 세월호 정국과 집권여당의 책무

● 칼럼 2014. 9. 2. 16:02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세월호 유족 대표들이 25일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와 만났지만 특별법 협상의 돌파구는 좀처럼 열리지 않고 있다. 새누리당은 야당이 제의한 ‘유족을 포함한 3자 협의체’ 구성을 거부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3자 협의체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강도 높은 대여 투쟁을 펼치기로 했다. 특별법의 논점이 법안 내용에서 논의 틀로 이동했지만 여야가 또다시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새누리당은 3자 협의체 구성을 ‘입법권 침해’라고 비판했다. 이완구 원내대표는 유족이 특별법 논의에 참여하는 것 자체를 ‘대의민주주의 포기’라고 했고, 김재원 원내수석부대표는 ‘헌정질서 위배’로 규정했다. 논리 비약이 심하다. 3자 협의체는 협상기구이지 의결기구가 아니다. 여야는 유족의 의견을 수렴할 뿐이며 법은 어디까지나 국회가 만든다. 박근혜 대통령도 “여야가 피해자 단체와 잘 협의해 좋은 특별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비슷한 전례도 많다. 지난해 철도파업 때 여야와 철도노조 3자가 만나 해법을 이끌어낸 게 대표적이다.
현실적으로 야당이 특별법 협상을 주도하긴 어렵게 돼버렸다. 세월호 특별법의 꼬인 매듭은 여당이 풀어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새누리당 지도부는 야당을 탓하고 유족을 원망하고 청와대를 감싸기에 바쁘다. 김무성 대표는 “세월호에 발목 잡혀 한국 경제가 풍전등화 위기에 놓였다”며 특별법을 ‘경제위기의 주범’으로 몰았다. 이완구 원내대표는 야당의 사과만 거듭 요구한다. 이정현 최고위원은 “야당은 입법부가 할 일을 전부 대통령에게 해달라고 한다. 장난감을 고를 수 있는 나이임에도 엄마에게 떼를 쓰며 골라달라는 어처구니없는 모습”이라며 대통령 방패막이를 자처했다.
 
여당 내부엔 집권세력으로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작지 않다. 김태호 최고위원은 “청와대와 정부가 적극 고민하고 이해와 설득을 구해야 한다”며 청와대를 겨냥했다. 의원 연찬회에서도 여당이 책임 있게 나서 유족과 대화하라는 목소리가 표출된 바 있다. 이완구 원내대표가 뒤늦게나마 유족을 만나 대화한 것은 일단 평가할 만하다. 진전된 결론이 도출된 건 아니지만 자꾸 얼굴을 맞대고 얘기를 하다 보면 절충점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기존 법으로는 정의와 형평을 구현하기 어려운 특별한 상황에 적용하려고 만드는 게 특별법이다. 이에 비춰 특별법 논의에 임하는 새누리당의 태도는 너무 소극적이며 옹졸하다. 새누리당 지도부가 집권세력으로서 책임을 되새기기 바란다.


[칼럼] 슬픔의 힘

● 칼럼 2014. 9. 2. 16:01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올여름 ‘베트남 평화 기행’을 다녀왔다. 한국군과 미국군에 의해 민간인 학살이 행해졌던 지역을 돌아보며 참배하고 사죄하고, 우리의 내일이 서로에게 평화이기를 진심으로 소망하는 시간이었다.
 
여행을 통해 조금이나마 알게 된 이 나라는 아주 놀라웠다.
베트남은 1858년부터 프랑스의 침략을 받기 시작해서 1885년 완전히 그 지배하에 놓였고, 이후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의 지배 아래 잠시 들어갔다가 일본 패전 뒤 다시 지배권을 욕심낸 프랑스로 인해 1946년 제1차 베트남 전쟁인 항불전쟁을 치른다. 1954년 결국 승전하여 프랑스를 베트남에서 철수시키지만 이 사이를 치고 들어와 남베트남에서 실력을 행사하던 미국으로 인해 1964년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다시 제2차 베트남 전쟁인 항미전쟁을 치르게 된다. 
이때 미국의 공세는 엄청났다. 이 나라를 석기시대로 돌려놓겠다고 공언하고는 제2차 세계대전의 3배에 달하는 폭탄을 퍼부었다. 그러나 전쟁은 1975년 미국의 패배와 베트남 남북통일로 끝이 났다. 약 100년에 걸친 식민지배, 약 30년에 걸친 강대국과의 전쟁. 그 전쟁을 결국 승리로 끝낸 베트남이었다. 놀라울밖에.
무려 130년. 학대와 수탈 100년, 폭탄과 함께 자고 깨며 ‘내일’이란 단어도 잊고 살아야 했던 30년. 지하로 토굴을 3층까지 파들어 가서 빛 한번 못 보고 살아도 포기하지 않은 시간들. 
베트남 사람들이 지닌 이 힘이 진심으로 궁금했다. 그들은 ‘위트와 낙관’이라고 답했다. ‘전쟁과 함께 살자!’는 표어로 30년 전쟁을 견뎌냈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들은 ‘끝’을 꿈꾸지 않았던 것임을 알았다. 해피엔딩을 꿈꿨다면 미국과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비교 자체가 안 되게 초라한 자신들의 현실을 보면서 그래도 한번 가 보리라 결심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베트남 기행 내내 윤동주 시인의 ‘팔복’이란 시가 떠올랐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시인은 원래 ‘저희가 위로함을 받을 것이오’라고 썼다가 다시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라고 고쳐 썼다. 
슬픔으로 가득한 땅에서 해피엔딩을 바라던 시인은 슬픔에 참여하는 것으로 마음을 바꾸었다.
해피엔딩을 바라는 마음은 외려 슬픔으로 가득한 이 순간을 직시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리곤 한다. 끝에 대한 기대가 클수록 지치는 속도도 더 빠르다. 시인은 슬픔의 오늘을 온전히 함께하는 것으로 슬픔을 극복한다.
세월호의 진실을 제대로 알고 진심으로 아파하기도 전에 각종 여론 매체들이 자꾸 ‘일상 복귀’를 종용한다. 그들이 말하는 일상이란 대체 무엇이기에 동년배의 죽음을 잊지 않고 슬퍼하며 살아가는 것이 학생들의 일상이 아니며, 자식 같은 아이들의 죽음을 잊지 않고 슬퍼하며 살아가는 것이 어른들의 일상이 아니라 말하는 것인가?
 
용산참사도, 쌍용차 사태도, 밀양 송전탑도, 철도민영화도, 의료민영화도, 4대강도, 세월호도 그 어떤 슬픔도 끝나지 않았다. 이 모든 슬픔이 우리의 일상이다. 해피엔딩으로 되레 절망을 가르치며 어쩔 수 없는 포기가 우리가 살아야 할 일상인 양 말하지 말라. 지금 흐르는 슬픔을, 끝나지 않은 슬픔을 일상으로 가져와 우리도 30년쯤 함께 걷다 보면 돈과 힘이 아닌, 꿈이 결국 승리의 깃발을 삶의 복판에 꽂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함께하는 슬픔의 힘이 이제 나의 일상이다.

< 임자헌 - 한국 고전번역원 번역위원 >


[1500자 칼럼] 교황이 떠난 자리

● 칼럼 2014. 8. 25. 20:48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중 단연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광화문 시복식에서의 한 장면이었다. ‘비바 파파’를 외치는 신도들 속에서도 교황은 가장 연약한 한 사람 앞에서 차를 멈추게 했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 규명을 위해 34일째 단식중인 김영오씨였다. 그의 간절한 호소에 교황은 애틋한 눈빛과 따뜻한 손길로 답했다. 시간은 1분 남짓이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방한 동안 교황은 세월호에 집중했다. 비행기 트랩을 내려선 순간부터 유족의 눈물을 가슴에 담았고, 십자가를 지고 온 유족들을 위로했고, 명동성당 미사에서도 다른 간절한 사연을 지닌 피해자들과 더불어 만났다. 팽목항에 붙들린 실종자와 가족들을 위해서는 절절한 기도편지를 전했다.
 
교황의 공식 방한 목적은 124위 순교자들의 시복성사였지만, 교황은 옛날을 기리는 일에 멈추지 않았다. 지금 이 땅의 고난과 눈물을 대하며 진심으로 아파하고, 위로하고 연대하는 모습을 확실히 한 것이다. 종교 행사는 저세상으로의 도피가 아니라, 이 세상의 아픔을 껴안는 것임을 명료한 말씀과 섬세한 몸짓으로 일깨웠다.
교황이 준 감동이 아무리 컸더라도, 이 땅의 착잡한 현안은 여전하다. 세월호의 진실 규명은 첫 단추조차 끼우지 못하고 있다. 우리 손으로 문제를 풀어내지 못한 집단적 무기력과 무능력에 대해 자괴감을 금할 수 없다.
교황은 바쁜 일정 중에 매일같이 세월호 유족들을 보살폈다. 그러나 4개월 동안 한국의 대통령은 유족들과 딱 한번, 그것도 마지못해 만났을 뿐이다. 8·15 경축사에도 한마디 언급이 없다. 대통령의 복심으로 꼽힌 한 국회의원은 “대통령이 바빠서”라고 둘러댄다. 광화문은 청와대에서 저녁 산책 할 거리에 불과하다. 마음이 있으면 천리지간도 지척지간인 반면, 마음이 없으면 지척지간도 몇만리다. 마음이 있으면, 단 1분의 소통으로도 넉넉함을 교황은 보여주었다. 대통령과 집권층의 이 소통부재, 외면전략에는 진저리가 날 지경이다. 제도와 입법 논쟁 이전에 진정 어린 마음과 다가가는 자세가 선행되었다면, 이렇듯 무대책 속의 악화일로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 국민의 마음 한편은 광화문에 사로잡혀 있다. 사십일에 다가서는 유민 아빠의 단식에 대해, 정말 단식을 그만두십사 하는 애원 행렬이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물어볼 일이다. 왜 자식 잃은 부모가 단식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아도 견디기 힘든 유족들을 단식으로 몰아댄 자는 누군가. 단식으로 참회할 자들은 참사의 원인 제공자들, 구조할 의지도 능력도 없던 공직자들, 그리고 위기관리의 총책임자인 대통령 자신이 아니던가.
특별법 제정을 둘러싼 정국 표류의 기본 책임은 정부·여당에 있음은 물론이다. 야당의 무능력은 그것대로 혹독한 비판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국면에서 누가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낼 수 있을까. 궁극적으로는 국민의 관심과 압력이겠지만, 이를 매개할 지도적 역량이 나서야 한다.
교황의 관심과 복음을 받아들일 일차 집단은 무엇보다 가톨릭교회다. 교황은 한차례 쇼를 하고 떠나간 게 아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란 것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특별한 강조점이다. 아울러 교황은 정치의 문제를 외면하지 말라고 한다. 더욱이 세월호 참사는 정치 이전의, 인간 존엄성에 직결된 것이다.
 
교황은 세월호 십자가를 로마로 갖고 갔다. 거기서도 세월호의 슬픔과 연대하고, 십자가의 기도로써 마음을 잇겠다는 뜻이리라. 이 점을 잘 알고 있을 가톨릭 성직자들, 특히 그동안 사회정의의 문제에 등한시한 것으로 보인 두 추기경부터 이제 앞으로 나서시라.
명동성당 미사에 함께했던 종교지도자들이 온전한 진실 규명을 위한 과업에 결연하게 합세하면 어떨까. 우리가 평화를 바란다면, 그것은 그저 주어지는 시혜물이 아니라 “정의의 결과”라는 교황의 말씀을 되새기면서. 아니면 단식하는 어버이가 떠맡은 고난의 짐을 나누어 지는 마음으로 말이다.
< 한인섭 -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