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7일 북한의 인천아시아경기대회 응원단 파견 제안을 받아들였다. 남북 단일팀 구성이나 공동 응원 등과는 거리가 있지만 경색된 남북관계의 물꼬를 튼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정부는 이를 계기로 남북관계 개선에 적극 나서기 바란다.
북쪽이 평화공세를 계속하고 있으나 태도가 이전에 비해 그다지 달라진 건 아니다. 북쪽은 이날 발표한 ‘공화국 정부 성명’에서도 핵·경제 병진노선을 고수하고 한-미 군사훈련 중단을 요구하는 등 지금까지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공화국 정부 성명’이라는 형식이 이례적이긴 하지만 내용은 6월30일 내놓은 ‘국방위원회 특별제안’의 연장선에 있다. 자신의 노선을 기정사실화하고 여러 사안에 대한 책임을 남쪽에 돌리면서 남쪽이 굽히고 들어오기를 압박하는 것이다. 북쪽이 정말 남북관계를 풀겠다는 뜻이 있다면 이런 태도부터 바꿔야 한다.
 
그렇더라도 정부가 북쪽과 비슷한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정부는 이날 북쪽에 ‘비합리적 주장을 되풀이할 것이 아니라 우리와의 대화의 장에 조속히 나와야 한다’고 했는데, 정부가 ‘대화의 장’을 마련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의문이다. 실제로 ‘북쪽이 먼저 잘못을 인정해야 대화할 수 있다’는 이제까지 정부 모습은 대화 재개 노력과는 거리가 있다. 남북 사이 신경전을 중단하고 생각 차이를 좁혀보겠다면 남쪽이 먼저 나서야 한다. 2월 한차례 열고 중단한 고위급 회담을 재개하자고 제안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본다.
최근의 동아시아 정세는 남북관계를 개선해야 할 필요성을 높인다. 우리나라는 갈수록 심해지는 미국·일본과 중국 사이 대결 구도에 끼여 운신 폭이 제한되고 있다. 북-일 협상의 진전 역시 한반도 관련 사안에 대한 우리의 주도권을 좁히고 있다. 나아가 우리의 최대 현안인 북한 핵 문제가 뒷전으로 밀리는 현상마저 나타나고 있다. 남북 사이 갈등이 완화되지 않는다면 이런 양상은 더 심해질 것이다. 거꾸로 남북관계가 잘 풀린다면 한반도 관련 현안들에 집중할 수 있는 동력이 생기게 된다.
 
과거 경험을 돌아보더라도 남북관계와 한반도 관련 현안의 진전은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남북관계를 전환하려면 우리 정부의 의지와 창의적인 노력이 가장 중요하다. 북쪽을 비난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그래서는 아무런 문제도 풀리지 않는다. 다른 나라들도 남북관계 개선에 반대하지 않는다. 정부 발상 전환이 시급히 요구되는 상황이다.


6.25 한국전쟁 때문에 북한은 우리에게 상당 기간 무서운 존재였고 배척 대상이었다. 한편 1960~70년대 경제성장 과정에서 빈부격차가 심화되다 보니 사회주의 북한을 대안이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그중에 북한을 찬양하는 언동 때문에 법적 처벌을 받은 사람들도 있었다. 90년대 초 사회주의권 붕괴와 탈냉전 후에는 국가보안법 사건 자체가 많이 줄었다. 그런데 요즘에는 꼭 친북 언행이 아닐지라도 진보 성향의 행동만 해도 법적 조치와는 무관하게 여론재판이 드세게 진행된다. 일단 종북-좌빨이라는 딱지부터 붙는다.
해방 후 60년대 초까지는 북한이 남한보다 군사적,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남북 체제경쟁은 70년대 중반에 남한의 절대적 우위로 끝났다. 남한은 이제 G-15 경제대국이 되었고 국제적 위상도 매우 높아졌다. 반면 90년대 중반에 시작된 탈북행렬이 아직도 이어질 정도로 북한은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다. 핵·미사일 문제 때문에 여러해 국제적 제재를 받고 있다. 국가 이미지도 나쁜 편이다. 이렇게 남한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는 북한을 추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지금 이 시기에도 남한에 있다는 것인가? 종북 논쟁은 참으로 시대착오적이고 비현실적인 정치공세다.
 
좌익 빨갱이도 실체가 없는 공격용 용어다. 6.25를 전후하여 북한 체제가 좋다고 자진 월북한 사람들이 제법 된다. 그들은 스스로도 좌익임을 자처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사람이 남한에는 없다고 본다. 다만, 정부 정책에 대해서 비판적인 사람이 없을 수 없다. 우리나라가 민주주의이기 때문에. 그러나 그들도 북한을 기준으로 삼지는 않는다. 자본주의의 폐단을 지적하더라도 북한이 아니라 서유럽 사회민주주의 수준의 복지나 분배를 요구한다. 이 정도면 좌익이라 할 수도 없고 빨갱이는 더더욱 아니다.
김영삼 정부 때까지는 통일 문제가 담론 차원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남남갈등이라는 말 자체가 없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 들어 햇볕정책이 추진되자 우리 사회 내부에 이념갈등이 일기 시작했다. 이전과는 패러다임이 완전히 다른 대북정책으로 남북 교류협력이 일상화되면서 담론 차원에 머물러 있던 통일 문제가 현실 차원의 문제로 다가왔다. 그러자 분단체제하에서 누리던 기득권이 위협받게 될 것을 우려한 보수층의 저항이 시작됐다. 대북지원은 ‘퍼주기’, 대북협상은 ‘끌려다니기’로 매도됐다. 남북갈등과 차별화하기 위해 남남갈등이라는 표현이 쓰이기 시작했다. 보수층에서는 햇볕정책이 기본적으로 친북적이기 때문에 안보를 소홀히 할 수밖에 없고, 결과적으로 한-미 동맹을 훼손할 수밖에 없다고 비난했다. 동맹이 외교수단이 아니라 국가목표처럼 되어 버렸다.
 
남북관계 개선 노력 대(對) 분단체제하에서 구축된 기득권 유지 욕망 간의 충돌, 그것이 남남갈등의 출발점이고 친북-종북-좌빨 논쟁의 뿌리다. 노무현 정부 때까지만 해도 친북-반북 논쟁에 그쳤던 남남갈등은 이명박 정부 들어 종북-좌빨 논쟁으로 판이 커졌다. 정부가 아무것도 안 하는 상황에서 민간 차원의 대북지원 노력이나 대북정책 비판까지도 종북-좌빨로 매도됐다. 박근혜 정부 들어 그 정도가 좀더 심해지는 것 같다.
종북-좌빨 논쟁이 우리 사회를 풍미하는 한, 남북 대화와 교류는 할 수 없다. 화해와 협력은 더더욱 어렵다. 그러나 남북관계 원리상, 이런 과정과 절차를 밟지 않으면 박근혜 정부 대북정책은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종북 논쟁에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는 한 박근혜 정부는 임기 내내 통일 관련해서 아무런 업적도 남길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종북 논쟁은 실로 무서운 반통일·분단 이데올로기이고, 남북관계에는 북핵 문제보다 더 강력한 족쇄다. 한반도신뢰프로세스를 정치적 수사가 아니라 진심으로 제기했다면, 박 대통령은 자기 대북정책의 족쇄인 종북 논쟁부터 끝장내주어야 한다. 통일대박론을 제기할 때처럼 직접 나서야 한다.
< 정세현 - 원광대 총장, 전 통일부장관 >


[1500자 칼럼] 주고 싶은 한 마디

● 칼럼 2014. 6. 30. 17:10 Posted by SisaHan
차고 안을 정리 하다가 빈 맥주병 상자에 눈이 갔다. 평소 같으면 우선순위로 내어놓을 터이지만 오늘은 조금 더 안쪽으로 밀어 넣는다. 혹시 또 올지도 모를 그들을 위해 당분간 보관하기로 한다. 건조한 일상에 잔잔한 여운을 남기고 간 그들, 다시 기회가 온다면 기꺼이 함께 하리라는 마음에서다. 빈 맥주병으로 ……. 
몇 주 전 어느 일요일 아침이다. 밀린 일들을 처리하며 느긋하게 여유를 부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벨을 눌렀다. 나는 주말 아침의 여유를 깬 불청객을 어찌하랴 생각하며 마지못해 현관으로 갔다. 밖의 동정을 살피며 막 문을 열려는데 십여 살 정도의 여자아이가 급하게 지나가는 모습이 창으로 보였다. 안에서 주춤거리는 사이 아이는 빈집으로 여긴 모양이었다.
 아이를 돌려 세운 미안함에 황급히 문을 열었지만 그사이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이가 간 방향을 지켜보며 다시 올 지를 가늠하며 섰는데 가까운 거리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생경한 소리에 그 쪽을 보니, 까만 중형 트럭이 서행해 오고 있었고 흰 목장갑을 낀 백인 청년이 근엄한 표정으로 양쪽 주택들을 두리번거리며 뒤 따르고 있었다. 또한 그와 비슷한 또래의 말쑥하게 생긴 청년이 여자 아이를 대동한 채 건너 집들을 들락거리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이른 시간에 그토록 의미심장한 행렬은 무엇이며 동네안의 술렁임은 또 무엇인지 얼른 감이 오지 않았다. 
곧이어 나의 호기심을 자극 하듯 각양각색의 맥주병 상자를 실은 트럭이 집 앞을 서서히 지나갔다. 설마 이동식 맥주 판매대는 아닐테고 저건 뭐지? 하는 순간 호위무사 같던 그 청년이 벙글거리며 옆집에서 빈맥주병 상자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나왔다. 그제야 가가호호 돌며 빈 맥주병을 수거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유추해보니 얼마 전 다녀간 아이는 그들과 일행으로 빈병의 유, 무 혹은 주민들의 협조를 구하는 전령인 셈이었다.
 
나는 아예 자리를 잡고앉아 그들의 추이를 한동안 지켜보았다. 꽤 많은 이웃들이 그들의 바람에 호응하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상자를 트럭으로 직접 날라다 주기도 했다. ‘저런 사람들이 내 이웃이었던가’ 할 정도의 생소한 이들이 담소를 나누며 열의를 다하는 모습도 보였다. 주민들의 잔잔한 움직임은 썰렁하던 골목 안에 생기를 돌게 했다. ‘이것들을 비어 스토어에 가지고 가면 몇 푼 챙길 텐데’ 하는 소심형 주(酒)군의 셈 같은 것은 끼어들 여지가 없는 분위기였다. 그들이 지나는 곳은 마치 운동경기장에서 파도타기 응원을 하는 것처럼 잠시 술렁였다가 가라앉고 다시 술렁이곤 하였다. 
고요한 휴일 아침을 흔드는 그들의 행위가 과히 밉지 않았음은 물론, 그토록 높은 호응을 이끌어 내는 저력은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승리의 깃발을 흔들 듯 박스를 출렁이며 멀어져 가는 그들을 보며 기획성, 진정성, 차별성, 유연성 같은 단어들이 자연스레 어울려서 빚어 낸 무채색 화병 같다는 생각을 했다. 
휴일을 반납한 채 두 가족이 이루고자 한 목표는 휴가 경비 조달을 위해서 혹은 그것보다 더 절실한 무엇일 수도 있을 것이다. 목표의 경중을 떠나 한결같은 자세로 다가서는 모습이 주민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원동력이 아닐까.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건 저 할 탓에 달렸다.’ 던 옛 어른들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고 싶다. 더도 덜도 말고 그 모습 그대로 라면 무슨 일에서건 백발백중이라는 덕담과 함께.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등단 >


보름 가까이 지루하게 끌어온 ‘문창극 드라마’가 막을 내렸다. 그런데 그 끝마저도 씁쓸하다.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의 ‘사퇴의 변’은 비판과 원망, 변명과 핑계로 가득 차 있다. 자신의 결격 사유에 대한 성찰도, 자신 때문에 빚어진 나라의 혼란과 국정 공백에 대한 사과도 없었다. 사퇴 기자회견은 역설적으로 그가 얼마나 총리 부적격자인지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 무대였다.
 
문 후보자의 ‘국민 무시, 언론 폄하, 정치권 증오’는 실로 놀라운 수준이었다. 그는 자신에 대한 반대 여론을 “포퓰리즘”으로 규정하고, 언론을 향해서는 “진실을 외면한 보도”를 했다고 꾸짖었다. 국민 압도적 다수가 자신을 총리 부적격자로 결론 내린 게 단지 교회 강연 동영상 하나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은 외면한 채 오직 ‘남 탓’ 하기에만 바빴다. 국민을 어리석은 존재로 얕잡아보는 그런 사람이 총리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란 생각을 하면 오싹할 정도다. 문 후보자가 국회를 향해 “법 절차에 따라 청문회를 개최할 의무를 지키지 않았다”고 비난한 대목은 더욱 어처구니없다. 엄밀히 말해 국회 청문회가 열리지 못한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 임명동의요청안을 재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문 후보자의 중도하차가 형식상으로만 ‘자진사퇴’일 뿐 실제로는 청와대한테 ‘등 떠밀린’ 결과라는 것은 세상이 아는 일이다. 더욱 쓴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것은 박 대통령을 대하는 그의 말투다. “저를 불러주신 분도 그분이고 거두어들일 수 있는 분도 그분”이라는, 주로 ‘신’한테나 쓰는 표현까지 동원했다. 박 대통령을 신으로 경배하고, 국민을 포함해 나머지는 모두 안중에도 없는 사람, 문창극 후보자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박 대통령은 문 후보자의 중도하차에 대해 “국회 인사청문회를 하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 검증을 해서 국민들의 판단을 받기 위해서인데 인사청문회까지 가지 못해서 참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문 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가 열리지 않은 것이 박 대통령 자신이 임명동의요청안을 재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벌써 까맣게 잊은 듯하다. 새누리당에서까지 반대하는 사람을 총리 후보자로 잘못 지명한 것에 대한 후회나, 문 후보자와의 밀고 당기기로 국정을 하염없이 공백상태에 몰아넣은 데 대한 반성은 눈곱만큼도 없다.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이나 감독이나 남 탓만 하기는 마찬가지인 셈이다.
 
박 대통령이 번번이 총리 지명에 실패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문제는 아무리 소를 잃어도 외양간을 고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다.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을 비롯한 인사 책임자들을 문책하라는 요구가 새누리당에서조차 분출하는데도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이번 기회에 인사 시스템을 완전히 뜯어고쳐 외양간을 새로 지어야 한다는 호소 역시 쇠귀에 경 읽기일 뿐이다. 박 대통령은 새 총리 후보자 물색에 들어갈 것이다. 그 기간도 지루하게 이어지겠지만 문제는 성공할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는 점이다. 오만과 아집이 변하지 않는 한 인사 실패는 다람쥐 쳇바퀴 돌기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럴수록 국정운영의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더욱 깊은 늪 속으로 빠져들 뿐이다. 안타까운 것은 박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