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진정성의 위력

● 칼럼 2014. 8. 25. 20:45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사람은 오감(五感)으로만 상황을 판단하는 게 아니다. 육감도 있다. 감각이 아닌 ‘초감각적 지각’인 육감에는 느낌, 심증, 예감 등 여러 형태를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진정성, 진실성을 오감을 넘어 육감으로 그 허실과 진위를 꿰뚫는다. 사랑을 ‘가슴으로’ 읽는 것이 그렇다. 눈물을 보면서도 흘러나오는지, 짜내는 것인지를 분별해 ‘슬픔과 사랑의 눈물’과 ’악어의 눈물’을 알아챈다. 
과거의 전쟁범죄 해결을 놓고 독일과 일본은 극명하게 대비되곤 한다. 독일은 이웃 프랑스, 이스라엘은 물론 나치 피해국들과 격의없는 우호친선을 누리고 있다. 반면 일본은 태평양전쟁으로 피해를 당한 한국과 중국 등으로부터 종전 70년이 되어가도록 제대로 대접을 못받으며 모욕적인 언사를 받고 있다.
 
왜 그렇게 다른가. 바로 ‘진정성’유무가 가름한 것이다. 
독일은 1953년 나치피해 배상법을 만들어 희생자들에게 철저한 배상에 나섰다. 1969년에는 나치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를 없애기로 의회에서 결정, 끝없는 추척과 처벌을 천명했다. 이후 빌리 브란트 총리는 1970년 12월7일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희생자 위령탑 앞에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었다. 현 앙겔라 메르켈 총리에 이르기까지 역대 지도자들은 기회있을 때마다 나치의 잘못을 낱낱이 반성했다. 이들의 사죄는 법적으로, 행동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양심이 반영된 진정성으로 신뢰를 쌓은 것이다.
일본도 여러 번 사죄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들의 말-‘혼네(本音)와 다테마에(建前)’ 즉 속마음과 겉의 행동이 다른 속성 그대로, 입에 발린 시늉의 반복으로 여겨질 뿐이었다. 일본 왕과 역대 총리들의 단골 사죄 단어는 ‘유감’이었다. 수위가 높아진 것이 ‘통절한 반성’과 ‘통석(痛惜)의 념’ 등 말의 유희였다. 요즘 아베 총리는 아예“뭘 반성할 게 있느냐“는 태도다. 지금까지 징용 한인 피해자들이 제대로 보상조차 받지 못하고 있고, 당시 저축했던 임금도 되돌려 받지 못한 상태다. 군대위안부를 부인하기에 기를 쓰는 모습은, 이번에 방한한 교황이 할머니들을 위로의 품에 안아주면서 그들의 양심이 수준 이하요, 진정성도 없는 민족임을 전세계에 알렸다.
 
한국을 단 4박5일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진정성의 위력을 입증해 보였다. 그가 취임 이후 검소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인기를 얻고 있음은 매스컴을 통해 알려진 바 있다. 그래도 반신반의한 것은, 그간 늘 보아온 인기 유명인사들이 대개 그렇듯이, 보이기에 능한 그리고 눈을 적당히 속이는 ‘쇼맨쉽’과 미디어로 만들어지는 허상의 연출이 없지 않을 거란 통념에서다. 그러나 방한기간 전해진 그의 실상과 뒷모습들은, 그의 진정성을 각인시켰고, 그래서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도 사람들은 열광하며 신뢰와 친근감을 보이기에 이른 것이다. 
때 마침 세월호 참사를 덮고 뭉개려는 위정자들이 무능과 불신의 지탄을 받고있을 때이다. 소외되고 핍박받고 외면당하는 사람들과 유족들을 향해 내려가 품에 안은 그의 진정어린 언행에서 피해자는 물론 많은 한국민들이 애타게 찾고있던 따뜻한 가슴의 지도자상과 진정성의 리더쉽을 보게 된 것이다. 
예로부터 위급할 때 가까운 친지, 이웃사촌, 그래도 안되면 고을 원님을 찾고, 극한상황에 몰리면 임금에게 직접 고하는 신문고를 두드렸다. 아무리 억울하고 분통터지는 일이라 해도 나라 안에서 해결지을 수 있도록 최고의 위정자가 백성이 마지막 읍소할 귀는 열어두었던 것이다.
 
오죽하면 나라 밖 종교지도자에게 하소연 하겠느냐며 사람들은 이렇게 자조했다.
“아무리 힘들고, 억울하고, 답답해도 어느 누구 하나 믿고 기댈 만한 사람이 없잖아요. 그래서 교황에게 열광하는 겁니다.” 
“교황은 노란리본을 달고 세월호 유가족을 여기저기서 끌어안는 데, 우리 대통령은 유가족은 피해 다니면서 교황과는 한번이라도 더 만날 생각만 한다. 국민들이 참으로 복도 없다.”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귀를 막은 대통령, 정략에만 정신이 팔려 특별법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여나 야당, 세월이 흐르며 잊어가는 국민들… 그렇게 어디 애원할 데 없고 캄캄한 벽에 가로막힌 애끓는 사람들이 한줄기 소망, 감싸주는 진정성에 매달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방한 내내 노란리본을 달았던 교황은 귀국 비행기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리본을 유족에게서 받아 달았는데 반나절쯤 지나자 어떤 사람이 내게 와서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니 그것을 떼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에게 세월호 유족의 인간적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고 답했다.“
그는 귀국 비행기에서도 세월호 리본을 왼쪽 가슴에 그대로 달고 있었다.
 
< 김종천 편집인 >


[사설] 군의 정치개입을 이렇게 마무리하나

● 칼럼 2014. 8. 25. 20:44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국방부 조사본부가 19일 국군 사이버사령부 심리전단의 대선개입 의혹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지난해 12월 중간 수사결과 발표 때보다 형사입건자만 10명 늘었을 뿐 결론은 거의 그대로다.
군의 발표는 ‘사이버사 요원들의 정치적 중립 의무 위반은 확인됐지만 조직적 대선개입은 없었으며, 김관진 당시 국방장관에게도 보고되지 않았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하나하나 따져보면 사실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요원들이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비판하거나 지지한 글은 이번 발표로 확인된 것만 7100여건이다. 이것 말고도 정치관련 게시글이 5만여건이다. 모두 중간 수사결과 발표 때보다 2~3배 더 많이 발견된 것이다. 이들 글은 대선후보 텔레비전 토론이나 후보 단일화 등 민감한 선거국면에 집중적으로 게시됐다. 그런데도 조사본부는 ‘대선개입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눈 감고 아웅’ 하는 꼴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범죄행위를 개인적 일탈로 본 것은 더 억지스럽다. 조사본부는 이번 일이 “극우·보수 성향인 심리전단장의 부당한 지시” 탓에 벌어진 일이라고 발표했다. 윗선인 사이버사령관과 당시 국방장관에 대해선 ‘몰랐을 것’이라며 한사코 ‘면죄부’를 고집했다. 군 조직의 특성상 윗선 지시 없이는 정치개입 같은 불법행위가 불가능할 것인데도 3급 군무원에 불과한 단장이 선거개입의 몸통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조사본부는 사이버사령관들이 적절한 조처를 취하지 않은 책임이 있다면서도, 사령관이 정치개입에 직접 관여하거나 지시하지는 않았다고 설명했다. 나아가 사령관 자신도 위법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으므로 김관진 장관은 보고도 못 받고 알 수도 없었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래서 장관을 조사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김 장관이 일일 사이버동향과 심리전 대응작전 결과를 계속 보고받은 사실이 나중에 드러났는데도 버젓이 이런 결론을 내놓았으니 기가 막힐 따름이다. 김 장관이 보고받은 것은 북한의 대남 사이버전 대응작전 결과라는 게 군의 설명이지만, 그런 식으로 선별 보고를 받았다는 게 더 어색하다. 명백한 증거와 분명한 정황조차 무시한 채 진상을 축소한 ‘꼬리 자르기’라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게 됐다.
애초부터 군의 자체 수사에 대해선 한계가 분명하다는 지적이 적지 않았다. 마치 그만 덮어버리자고 종주먹을 들이대는 듯한 이번 수사결과 발표로 군에 대한 불신은 더 깊어졌다. 이제는 특검이 불가피해 보인다.


[사설] 서로 마주앉지도 못하는 남북한

● 칼럼 2014. 8. 25. 20:43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정부가 제안한 19일 남북 고위급 접촉이 일단 날짜를 넘기게 됐다. 남북 당국이 서로 마주앉는 것도 쉽지 않은 상황임을 잘 보여준다. 이렇게 된 데는 양쪽 모두 책임이 있다.
북쪽은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5주기를 맞아 북쪽 조화를 전달받으러 방북한 박지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등에게 자신의 속내를 내비쳤다.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 겸 대남비서는 ‘한-미 군사훈련, 북한 핵 폐기 요구, 남쪽 언론들의 북쪽 비난 등의 문제를 강하게 얘기했다’고 박 의원은 전했다. 김 부장은 그러면서 “왜 이렇게 전제조건이 많냐, 실천 가능한 것을 지도자가 결단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남쪽 정부가 5.24 조치 완화 해제나 금강산관광 재개 문제 등에서 먼저 전향적인 모습을 보여달라는 뜻으로 읽힌다. 북쪽의 이런 요구는 나름대로 일리가 있지만 이것이 고위급 접촉을 피하는 이유는 되지 못한다. 할 말이 있으면 만나서 하면 된다. 5.24 조치와 금강산관광 문제를 완전히 풀기 위해서는 북쪽이 해야 할 일이 있기도 하다.
 
앞서 정부가 한-미 을지프리덤가디언 훈련 기간인 19일을 고위급 접촉 날짜로 제안한 것은 문제가 있다. 이번 훈련에는 두 나라가 공동으로 마련한 ‘맞춤형 억제전략’이 처음으로 실행되며, 북쪽은 이를 ‘핵전쟁 선전포고’라고 주장해왔다. 북쪽으로선 훈련 기간에는 남쪽과 만나기 어려운 것이다. 정부 고위관계자들이 5.24 조치나 금강산관광 문제 등과 관련해 강경한 발언을 해온 것도 대북 제안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린다. 박근혜 대통령도 광복절 경축사에서 두 사안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지금 정부는 북쪽이 먼저 굽히고 들어오지 않는 한 관계 개선에 큰 뜻이 없어 보이며, 북쪽은 관계 개선을 바라면서도 공격적인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 멀리 내다보는 결단은 실종되고 일종의 자존심 싸움이 부각되는 상황이다. 이런 식이어서는 고위급 접촉이 이뤄지더라도 성과를 내기 어렵다.
 
지금처럼 한-미 군사훈련이 시행될 때마다 한반도 긴장이 높아지고 남북관계가 볼모가 되는 상황은 빨리 바뀌어야 한다. 남북이 상대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고 신경전을 하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일도 그만둬야 한다. 양쪽의 결단을 촉구한다.


[칼럼] ‘방관사회’의 위기

● 칼럼 2014. 8. 25. 20:42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윤 일병 폭행치사 사건에서 이 병장의 잔혹하고 엽기적인 폭력행위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동료 병사들이 보인 태도였다. 그들은 극단적인 폭력이 자행되는 ‘곁에서 보고만’ 있었다. 말리거나 저지하지 않고, 방조하거나 동조했다. 무엇이 이 평범한 젊은이들이 시민적 용기는 차치하더라도 최소한의 전우애조차 발휘하지 못하게 했을까?
이들이 윤 일병에게 보인 ‘방관’의 태도는 세월호 선원들이 승객에게 보인 태도와 다르지 않다. 수백명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준석 선장과 선원들은 ‘유유히’ 배를 빠져나왔다. 맞아 죽어가는 동료를 외면한 병사들이나 수장돼가는 승객을 두고 도망친 선원들이나 모두 인간의 생사가 좌우되는 결정적인 순간에 싸늘한 방관자의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이 사건들이 보여주는 것은 특정한 개인의 일탈이나 무책임이 아니다. 이 병장의 잔혹성이나 이 선장의 비열함이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이 사회가 구조적으로 그런 폭력성과 비열성에 기대어 돌아간다는 사실이고,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의 감수성을 잃어버린 채 방관자가 돼버렸다는 사실이다.
윤 일병 사건과 세월호 사건의 사회적 여파가 이리도 큰 것은 그것이 우리 사회의 감추어진 본성을 드러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시민이 격분하는 이유도 스스로 이 사건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무의식적으로’ 느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병사들이 윤 일병에게, 선원들이 승객에게 보였던 동일한 태도를 우리도 일상에서 매일매일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대해 보이고 있지 않은가? 병사들과 선원들이 보인 방관의 태도는 우리가 우리 사회에 대해 보이는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예외가 아니라 보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사건들은 단순한 윤리적 차원을 넘어 고도의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우리 헌법 제1조가 규정하는 ‘민주공화국’이 얼마나 허약한 토대 위에 서 있는지를 서늘하게 보여준다. 방관자들로는 민주공화국을 존속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민주공화국은 알다시피 시민의 참여에 의해 유지되는 국가체제이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따르면, 공화국이란 “개인들의 인격이 모두 결합된 공적 인격”이고, 시민이란 “공화국의 주권에 참여하는 개인”이다. 즉 ‘주권에 참여하는 시민’이 없으면 공화국도 없다. 방관자들의 집단은 공화국이 될 수 없다는 얘기다.
한국 사회는 방관사회다. 시민들은 참여하지 않고 방관한다. 방관은 군대 내무반이나 세월호 선상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네 일상이다. 사회 구석구석에 만연한 것이 ‘나만 빼고’, ‘나와는 상관없다’는 사고방식이다. ‘공적 정의’를 위해 참여하는 시민은 극소수다. 대학의 학생회든, 기업의 노조든, 시민단체든 공적 이해를 위한 기구에 참여하는 시민의 수가 우리처럼 적은 나라는 드물다.
 
특히 정치의 경우 시민들의 ‘방관’은 극단적이다. 모두가 정치에 관심을 보이지만, 아무도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 정치평론가는 넘쳐나지만, 정치활동가는 보이지 않는다. 소수의 진보정당을 제외하면 한국 정당의 본색은 ‘당원 없는 정당’이다. 
이는 매력 없는 정당 탓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방관하는 시민 탓이기도 하다. 모두 곁에서 훈수만 둘 뿐 참여하지 않는 사회, 정치혐오를 좀더 세련된 정치적 취향인 양 조장하는 방관사회에서 민주공화국의 이념이 실현될 수는 없다. 한국 사회가 위대한 정치혁명의 전통을 지녔음에도 여전히 민주적인 사회를 이루지 못한 것은 참여사회로 나아가지 못한 채 방관사회에 고착돼버렸기 때문이다.
< 김누리 - 중앙대 독문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