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이런 군, 믿을 수 있나

● 칼럼 2014. 6. 30. 17:05 Posted by SisaHan
총기 난사 뒤 무장 탈영한 강원도 고성군 22사단의 임아무개(22) 병장이 이틀 만인 23일 붙잡혔다. 그의 구체적인 범행 동기가 뭔지는 상세한 조사가 이뤄져야 알겠지만, 이와 별개로 군과 국방부는 이번 사건과 관련해 여러 심각한 문제를 드러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사건 발생 이후의 구멍 뚫린 대응이다. 우선 임 병장이 소총을 난사한 뒤 도주하는 동안 아무런 제지가 없었다. 비상경계령인 진돗개 하나도 사건 발생 2시간 뒤에야 발령됐다. 실전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음을 생각하면 대비태세에서 큰 허점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는 동안 임 병장은 10여㎞나 이동했다. 군은 18시간이나 지나서야 그를 다시 발견했으나 차단선의 30m까지 접근한 그를 놓쳤다. 23일 오전에는 출동한 병력끼리 오인사격을 해 부상자가 나오기도 했다.
국방부의 태도도 문제다. 12명의 사상자가 난 큰 사건임에도 국방부는 다음날 오전에야 김민석 대변인이 간단하게 첫 브리핑을 하는 데 그쳤다. 새 국방부 장관이 지명돼 인사청문회를 기다리는 상황임을 고려하더라도 국민에게 믿음을 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사안의 심각성을 생각하면 더 고위급의 책임자가 대응을 주도하고 국민 앞에 나서야 했다. 현지 상황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자녀를 군대에 보낸 가족들은 계속 마음을 졸여야 했다.
 
그동안 22사단에서 굵직한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으나 적절한 대책이 세워졌는지도 의문스럽다. 군 관계자들은 22사단이 맡고 있는 경계선이 다른 사단보다 훨씬 길고 지형이 험한 점 등을 들어 병사들의 일탈이 생기기 쉽다고 말한다. 2012년 10월 이곳에서 발생한 이른바 ‘노크 귀순’ 이후 과학적인 경계시스템 구축과 경계병력 증강 등의 대책이 발표됐으나 제대로 이행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임 병장은 A급 관심병사였으며, 22사단에 복무하는 관심병사는 1800여명으로 전체 병사의 20%나 된다고 한다. 이런 분류가 정확하다면 이번과 같은 사건·사고 가능성이 상존했던 셈이다. 평상시에는 위험 요소를 방치했다가 큰 사건이 발생한 뒤에야 면피성 대책을 급조해 내놓는 식이어서는 사건·사고 재발을 막기 어렵다.
정부는 이 사건이 군과 국방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얼마나 손상시켰는지 냉정하게 되돌아보기 바란다. 그 신뢰에는 비상사태에 대한 대응 능력뿐만 아니라 군의 일상적인 관리 능력, 수뇌부의 책임있는 자세 등이 모두 포함됨을 명심해야 한다.


[칼럼] 인성검사 받을 대상

● 칼럼 2014. 6. 30. 17:04 Posted by SisaHan
22사단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은 충격적이다. 그러나 더 충격적인 진실이 있다. 이미 오래전에 금이 간 저수지의 둑이 이제껏 터지지 않고 있었다는 참으로 곤혹스러운 진실 말이다. 우리 병영은 이미 오래전부터 무너질 조짐을 보이는 둑과 같이 위태로웠다. 이렇게 보면 2011년 해병 2사단의 총기난사 사건 이후 3년 동안 병영에서 대형 사건이 없었다는 사실이 신기할 뿐이다. 임 병장 사건은 한국군 병영의 갈등 구조가 조직 전체를 붕괴시키는 시한폭탄이 되었다는 걸 알려주는 하나의 비상벨일 뿐이다. 전방에서 소대장과 중대장을 지낸 한 예비역 장교는 “솔직히 요즘 병사들이 무섭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며 심적 고충을 토로한다.
 
한국군은 간부 위주의 선진 군대와 달리 징집된 병사 위주의 조직이다. 이들은 똑같은 제복을 입혀 외형적으로는 단일 집단의 구성원으로 통일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한국 사회의 갈등 구조가 그대로 녹아 있다. 학벌 갈등, 성별 갈등, 세대 갈등, 지역 갈등도 있지만 가장 큰 갈등은 빈부 갈등이다. 이를 관리해야 할 부사관이나 소대장도 병사들과 같은 또래의 경험 없는 20대로 그 자신이 갈등의 당사자가 되기도 한다. 관심병사만 문제가 아니라 ‘관심 간부’도 있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군대 내 약자나 부적응자를 상대로 하는 신종 ‘왕따 놀이’가 판을 친다. 기수문화라면 자다가도 일어난다는 해병대조차 ‘기수 열외’란 악습을 전통으로 삼는 걸 3년 전에 우리는 목격한 바 있다. 전방의 생활관에서는 사흘만 따돌림을 당하고 가혹행위를 겪으면 잠을 설치며 헛소리를 하게 된다. 이런 일이 매일 어디선가 벌어지고 있다. 그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임계상황을 넘어서면 인간 본성에 잠복한 야수성이 폭발한다.
 
많은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면서 과중한 임무를 부여받은 전방의 군부대에서 지난 3년간 용케도 대형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달랐다. 세월호 참사가 벌어지고 장병의 외출, 외박, 휴가, 음주가 제한되었으며 간부들의 골프와 회식도 금지시켰다. 전쟁 중에도 휴가는 갈 수 있는 법이다. 가장 기본적인 일상조차 빼앗긴 지난 두 달을 장병들은 ‘암흑의 시간’이라고 부른다. 찬물도 남이 뿌리면 더 시린 법이다. 조용히 일상을 유지하면서 자발적으로 추모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것저것 하지 말라고 윽박지르고 조여붙이는 건 군 수뇌부 위신을 세우기 위한 권위적 조처들이지 추모와는 거리가 멀다. 이로 인해 형성된 불만의 용암은 가장 얇은 지각을 찾아 분출하게 되어 있는데, 그것이 바로 22사단이다.
 
병영의 부조리마저 애국심으로 포장하면서 장병 기본권 증진을 위한 병영의 안전장치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갔던 게 지난 보수정권 7년이었다. 참여정부 시절의 병영문화 개선 대책이나 장병 기본권 증진 기본계획은 육군 장성들의 반발로 어디론가 증발해버렸다. 장병들이 사회에서 오염된 사상에 물들었다고 생각하는 군 수뇌부는 신세대에게 국가관과 애국심을 반복적으로 주입하는 교화와 징벌의 사고 위에서 움직인다. 그들은 사회가 망쳐놓은 국민교육을 완결하는 최종 교육기관인 것처럼 행세하기도 한다. 모든 책임을 관심병사 개인 또는 사회 탓으로 전가하면서 병영의 구조적 문제와 부조리는 적절히 은폐한다. 정작 인성검사를 받아야 할 당사자는 그런 군의 고급 간부들이다. 그들이 병영문화를 개선하고 간부 위주의 군 인력구조로 전환하기 위한 국방개혁 목표를 확실히 견지했더라면 이처럼 엉망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관심 간부’들의 굴절된 애국심이야말로 철저히 검사받아야 할 인성들이다.

< 김종대 - 디펜스21 플러스 편집장 >


[한마당] ‘문창극 사태’의 교훈

● 칼럼 2014. 6. 30. 16:48 Posted by SisaHan
‘문창극 막장 드라마’가 보름 가까이 이어지다 끝났다. 6일 만에 끝난 ‘안대희 드라마’에 비해 꽤 질긴 편이었다. 또 다른 ‘막장 드라마’들도 아직 진행 중이다. 이병기 국정원장, 김명수 교육부 장관 겸 사회부총리, 정종섭 안전행정부 장관 후보자 등도 문 후보자 못지않은 오점들을 안고 있다. 그런데도 연출자는 드라마 진행을 강행하고 출연자들은 꿋꿋이 버틴다. 도대체 국민의 눈높이가 어디까지 낮아지길 기다리는 것일까.
이번 사태를 지켜보는 내내 당혹감과 분노, 그리고 참담함이 교차했지만 전혀 의미가 없었던 일은 아니었다. 박근혜 정권의 속성과 기득권층의 적나라한 민낯을 볼 수 있는 좋은 계기였다.
 
우선, 박근혜 대통령은 이번 2기 내각 구성 과정에서 스스로 무능 정권임을 국민에게 각인시켜 주었다. 청와대의 인사 검증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음이 재확인됐고, 사후 대처 과정에서도 좌고우면하면서 시간만 끌다 사태를 악화시켰다. 문 후보자에 대한 국민 여론이 돌아섰으면 과감하게 지명 철회를 했으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자진 사퇴만 기다리다 문 후보자의 버티기에 속수무책으로 끌려다녔다.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이라는 박 대통령의 이미지가 얼마나 과장되고 허구였는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이번 사태를 통해 박 대통령이 꿈꾸는 대한민국의 모습이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그려볼 수 있었던 것도 성과라면 성과다. 종교 편향에다 친일, 반민족적인 역사인식을 갖고 있는 총리, 차떼기 대선 자금 사건에 연루된 국정원장, 제자들의 논문을 자신의 연구 성과로 내세우고 연구비까지 가로챈 교육부 장관, 군 복무 중 석·박사까지 딴 안행부 장관 등으로 내각을 꾸리면 이 나라의 품격은 어떻게 될까. 굳이 나라의 품격까지 들먹일 것도 없이 그건 정상적인 정부가 아니다. 대통령 하나 잘못 뽑아놓으면 나라 꼴이 어떻게 되는지를 온 국민이 체감하게 해줬다.
 
이번 사태는 또, 우리 사회의 이른바 주류 기득권층이 겉으로는 그럴듯한 외피로 포장돼 있지만 한 꺼풀만 벗기면 친일적 역사관과 극우적 사고에 젖은 부패 군상들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입으로는 국민을 위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그들만의 잔치를 벌여왔음도 곧 드러나게 될 것이다.
추악한 실상의 일단이 드러났음에도 남 탓만 하며 아무 일 없다는 듯 넘어가려는 박근혜 정부를 보고 있노라면 오염된 언어가 풍기는 썩은 냄새로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문창극 총리 후보자에 대해 “소신 있고 강직한 언론인 출신”이라며 “그동안 냉철한 비판의식과 합리적 대안을 통해 우리 사회의 잘못된 관행과 적폐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온 분”이라고 치켜세웠다. 하지만 문 후보 자신이 ‘잘못된 관행과 적폐’의 화신임을 국민은 이미 꿰뚫어 봐 버렸다. 그런데도 미사여구로 치장한 추천 이유에 대해 해명이나 사과 한마디 없이 은근슬쩍 넘어가는 뻔뻔함이 참으로 놀랍다.

중국 북송의 유학자였던 소강절은 <황극경세서>에서 “천하가 어지러워지려 하면 사람들이 말을 숭상한다. 말을 숭상하면 속고 속이는 풍속이 행해진다”며 “말이 아닌 행위를 숭상해야 천하가 다스려진다”고 했다. 온갖 교언요설로 추악한 실상과 행태를 호도하려는 요즘 세태를 되돌아보게 하는 경구이다.
그렇다고 박 대통령이 개과천선해 국민 상식에 맞는 총리 후보를 지명하고, 부패 덩어리인 장관 후보들을 교체할 것 같지는 않다. 이해관계로 똘똘 뭉쳐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는 무리에게 ‘정치의 목적은 사익 추구가 아니라 공공선의 실현’이라는 말이 귀에 들어올까.
 
조선 후기 실학자였던 성호 이익은 “이해관계로 뭉친 당파의 폐습이 고질화되면 자기 당 사람이면 어리석고 못난 자도 관중이나 제갈량처럼 여기고, 가렴주구를 일삼는 자도 공수나 황패(중국 한나라 때의 이름난 목민관들)처럼 여기며 자기 당이 아니면 모두 이와 반대로 한다”고 했다.(이덕일, <성공한 개혁 실패한 개혁>) 의(義)보다 이(利)를 앞세우는 천박한 정치 풍토가 언제쯤 바뀌려나.
< 한겨레신문 정석구 편집인 >


세월호 참사를 거치며 한국에 망언을 일삼는 이들이 많음이 드러났다. 국회의원, 장관, 목사, 교수에서부터 서울시장 후보의 막내아들에 이르기까지 망언을 하는 이들의 범위는 넓고 깊었다. 이번엔 고르고 골랐을 국무총리 후보자까지도 망언 대열에 합류했다. 사회에서 일정한 권위를 가진 이들의 망언 역시 그 수준에서 결코 ‘일베’에 뒤지지 않음이 증명되었다.
‘상식에서 벗어난 말’이라고 다 망언은 아니다. 상식은 진리가 아니며 허상일 때가 많다. 상식에서 벗어나는 사고나 말은 오히려 창조적인 사유를 위한 디딤돌이기도 하다. 니체의 독백이나 데이비드 허버트 로런스의 에세이에는 비상식적 발언이 넘쳐나지만, 깊은 공부와 독창적 시각이 낳은 이들의 비상식적 사유는 상식을 넘어서는 새로움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최근 문제가 된 이들의 망언에서 인식의 새로움을 거론하기란 낯뜨거운 일이며, 느껴지는 것은 인식의 천박성뿐이다. 세월호 참사에 대고 ‘왜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갔느냐’거나 ‘시체장사에 한두 번 당해 보았느냐’는 말을 지껄이고, 한국 현대사를 오직 신의 뜻으로만 파악하는 국무총리 후보자 앞에서는 분석이나 고민을 할 만한 ‘깊이’ 자체를 찾기가 힘들다.
망언을 한 이들은 대개 ‘사석에서 튀어나온 말’이었지 진심은 아니었다고 변명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그렇게 갑자기 튀어나온 말이야말로 진심임을 증명해준다. 오히려 망언은 이를 가능케 한 어떤 세계관 속에 존재하며, 이 세계관을 공유하는 담론의 공동체가 있음을 드러낸다.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은 제국주의적 세계관을 공유한 일본인들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망언을 하는 목사의 설교를 듣는 신자들, 망언의 교과서가 된 극우논객을 따르는 네티즌들의 존재가 있다. 이 담론의 공동체 속에서 망언은 꾸준히 생산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들의 가치관, 세계관, 역사관 등이 일종의 ‘표현의 자유’로 수용된다는 데 있다. 광주학살의 북한 개입설을 주장하는 극우논객은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는데 뭐가 문제냐’고 언성을 높인다. 역사를 해석에 따른 복수적 서사로 보는 포스트모더니즘도 한국에 오면 이렇게 일차원적인 ‘자유론’으로 둔갑한다. 공통의 역사적 인식을 정립하지 못한 채 역사 자체가 자유와 표현의 문제로 변질될 때, 그 사회는 영원히 역사의 유령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한국의 보수적 ‘망언가’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미국이야말로 갈등을 통한 진보의 역사를 소중히 간직한다. 가령 아무리 보수적인 공화당 국회의원도 마틴 루서 킹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으며, 그의 생일은 국경일이기까지 하다.
 
우리의 광주항쟁은 어떤 대접을 받는가? 최근 애인과의 전화통화에서 인종차별 발언을 했음이 드러난 LA 클리퍼스 농구단의 구단주 도널드 스털링은 미국프로농구협회에서 영구제명을 당하고 고액의 벌금까지 물었다. 아예 트위터와 페이스북, 교회에서 대놓고 하는 한국의 ‘공적인’ 망언들은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는다. 반면, 한 국회의원이 당원모임에서 했다는 발언은 순식간에 무리하게 사법처리되는 중이다.
망언은 사실 ‘자유’가 아니라 ‘권력관계’에 불과함을 여기서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망언자들, 나아가 일부 진보 지식인들조차 망언에 대해 ‘표현의 자유’를 들먹인다. 자유의 역설은 그것이 보장되기 위해서라도 자유의 규제를 요청한다는 데 있다. 실제로는 권력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자유로 포장되어 팔리는 망언 앞에서, 진짜 자유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따져볼 때가 되었다.
< 문강형준 - 문화 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