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새 것은 없다, 변해야 한다

● 칼럼 2014. 9. 11. 18:57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기독교에선 ‘하늘 아래 새것은 없다’고 한다. 불가에서도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건 없다’는 진리 말고는 모든 게 변한다고 한다. 동양의 주역도 ‘변화’의 학문이다. 종교적 수도나 교육도 본성의 회복이든, 더 높은 인격의 함양이든 변화를 위함이다.
그러나 긍정적 변화가 쉽지 않다. 어릴 적 친구들을 만나면 수십년 전 모습 그대로다. 벗들이 볼 때는 나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지난달 다녀 간 프란치스코 교황의 변화가 더 눈에 띈다. 교황은 아르헨티나 군부독재 시절 침묵으로 비판을 받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머물지 않았다. 더구나 나이들 수록 세속과 쉽게 타협하고 보수적이 된다는 통념을 그가 거슬러왔다는 게 중요하다. 그는 1998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관구장이 되자마자 ‘독재자들에게 너무 너그러웠던 점’을 참회한 데 이어 추기경이 되어선 군부 독재정권에 의해 암살된 사제들의 성인 추대에 나섰다. 또한 한국 방문을 마치고 로마로 돌아가는 길엔 엘살바도르에서 군부에 의해 암살당한 로메로 대주교를 성인으로 추대하겠다고 밝혔다.
 
변한 것은 사회참여 사제들과 저항에 대한 관점만이 아니다. 그는 젊은 시절 꽉 막힌 보수주의자로 통했다. 사제가 된 지 4년이 채 안 된 36살에 아르헨티나 예수회의 관구장이 된 그는 ‘남 말 안 듣고 거친 권위주의자’였다. 그는 교황이 된 뒤 한 인터뷰에서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극단적 보수’란 비난을 받고 커다란 내적 위기를 맞았다”며 “미친 짓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걸 배웠다”며 “이제 너무 많이 경청해 그만 좀 들으라고 할 정도”라고 했다.
인간은 변한다. 교황만이 아니다. 해방신학을 ‘증오에 찬 그리스도론’이라고 비판했던 보수주의자 로메로는 무참히 짓밟히는 농민들을 보고 변했다. 함남 덕원신학교에서 공산주의자들의 견디기 어려운 탄압을 겪고 내려와 원수를 갚겠다며 신학생의 신분으로 6.25 때 총을 든 지학순 주교는 유신정권에 의해 유린되는 사람들을 보고 저항에 나섰다.
 
그와 달리 나이 들어 더 약자들에게 폭력적이 되어버린 어버이연합 회원과 같은 노인들에 대해 채현국(효암학원 이사장) 선생은 “저 꼴 되고 싶지 않으면 노인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두어라”고 우리에게 경고했다. 정치권력에 그토록 무력하게 끌려다니며 조종당하는 데 대한 경고는 ‘깨어 있으라’는 교황의 당부와 다름없는 것이다.
그러나 거부였음에도 돈과 권력에 흔들리지 않고 팔십 평생 살아온 채 선생 같은 모습을 모든 노인들에게 기대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대동강변에서 공산당의 따발총에 맞아 숨진 부친의 주검을 부여안고 비명을 지르던 서광선 목사나 6.25 때 부친과 백부를 동시에 잃은 백낙청 선생처럼 역사적 아픔을 직시하고 개인적 상처의 감옥에서 나와 화해에 앞서라고 어떻게 모든 노인들에게 요구한다는 말인가.
어떤 할아버지가 공산당원들에게 가족 모두를 처참하게 잃고 평생 원한에 사무쳐 살아왔을지 모르는데도 교황처럼 안아주거나 공감해주지 못한 채 ‘말 없는 멸시와 증오’만으로 대응한 내가 말이다.
 
변화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일 때 가능해진다. 그래서 교황은 (교리 선포 등에서) 실수하지 않는다는 교황 무오류설이란 갑옷을 벗어버리고 ‘이 세상에 실수 안 하는 사람이 있느냐’며 고해사제 앞으로 걸어가 죄를 고백했다. 죄 없다는 교황보다 그의 행동이 내게 더한 복음과 기쁨이 된 것은 실수투성이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을 쉽게 취하고 마는 내게도 변화의 희망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나는 변해야 한다. 우리도 변해야 한다. 광화문에서 40일 넘게 단식한 세월호 희생자 유민이 아빠에게 위로는커녕 “죽어버려라”고 악을 쓰는 노인에게 느끼는 참을 수 없는 분노조차 연민으로 바꿔야 하는 변화를 지금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그 할아버지에게 먼저 진심으로 절해야 한다. 그것이 “당신들은 한 형제가 아니냐”는 교황의 물음에 대한 응답이다.
< 조현 -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


[한마당] 아비의 심정으로

● 칼럼 2014. 9. 11. 18:53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요즘 언론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군대 내 폭력 사건과 총기 사고들을 보면서 아비는 가슴을 쓸어내린다. 지난봄에 발생한 일을 새삼스럽게 들춰내는 저의가 무얼까 의문이 들기도 한다만, 그 엽기적이고 잔혹한 당시의 상황을 접하면서 나는 네가 몸이 온전치 못해서 군대에 가지 못한 것이 요즘처럼 다행스럽게 느껴진 적이 없단다.
네가 갓난아기로 서너 가닥 수액 줄에 매달린 채 병실에 갇혀 있던 봄날 담장 밖 창경궁에는 벚꽃이 흐드러졌었지. 그 화사한 모습을 너와 함께 보지 못하던 그때의 야속했던 마음도 이제 봄눈 녹듯 사라졌다. 그때의 안타깝고 불안했던 순간들이 이렇게 보상을 받는구나. 너의 허약한 몸이 우리에겐 오히려 위안이고 너에게는 행운이구나. 우린 그런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구나.
 
지금 많은 사람들이 가해 병사들을 악마라고 비난하려 드는구나. 그러나 피해자와 가해자를 가르고 가해자를 단죄하는 것은 또 얼마나 허망한 일이냐. 
모든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 경쟁과 성취를 향한 억압 속에서 자라나는데 약자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 수 있는 마음을 언제 키울 수 있었겠느냐. 반복되는 패배로 상처가 켜켜이 쌓인 가슴들 속에서 사랑 같은 것이 어떻게 자랄 수 있었겠느냐. 당사자들 뿐 아니라 그런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우리 모두가 피해자 아니겠느냐.
광복절 즈음에 방한한 교황은 세월호 유가족들을 비롯해서 눈물과 고통으로 버티고 있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을 위로했지. 어린아이들의 머리를 일일이 쓰다듬어 축복하고 질병으로 누워 있는 이들을 격려하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위안을 얻었지.
 
난 그 모습을 보면서 한없이 부끄러웠다.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 채 손님에게 모두가 기대려는 모습은 우리가 제 몸뚱이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중증 환자라는 것을 드러내주는 것이 아니냐. 자신이 환자라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기에 치유할 길도 막막한 모습으로 말이다.
우리의 대통령께서는 문명과 교양으로 짙은 화장을 했지만 숙제를 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굳은 표정으로 교황 옆에 앉아 있더구나. 그 밑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사건만 터지면 책임을 떠넘기고, 도마뱀처럼 꼬리를 자르고, 교묘한 핑계로 자신을 합리화하기에 바쁘구나. 
껄끄러운 사람들을 조작과 위조, 뒷조사와 미행으로 입을 틀어막는 이 땅에서 정의가 숨쉬기를 바라는 것은 사치가 되었구나. 두려운 세상이 너무나 빨리, 소리도 없이 다가와 있구나.

아들아, 너도 이제 학교를 졸업할 때가 가까웠지. 의사나 판검사 따위는 우리와 같은 서민들에게는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에 있으니 행여 미련 두지 마라. 커다란 배가 원인도 모르게 뒤집히고 지하철 사고가 잇따르고 밤길을 걷는 부녀자들이 이유도 없이 공격당하는 불안한 세상에서는 신명을 보존하는 것보다 더 큰일이 어디 있겠느냐. 너에게 대운이 트여서 혹시라도 정보기관 같은 데에 일자리가 생기면 앞뒤 보지 말고 악착같이 붙들어라. 경찰도 나쁘진 않겠지. 물정 모르는 아비 눈에도 요즘에는 그런 것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구나.
 
그런데 말이다. 혹시나 이 땅에서 핵발전소가 하나라도 터지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부품의 시험성적표를 조작하고 불량 부품을 쓰며 30년 넘게 가동되는 낡은 핵발전소가 언제까지 버텨줄까. 먼 외국에 나가 살고 있는 친척 하나 없는 너희는 어떻게 될까. 
옛날에는 너희만한 나이들더러 앞길이 구만리라 했는데, 이 불안한 세상에서 너희 앞길이 구천리뿐이라 해도 부디 운 좋은 사람이 되어라. 기를 쓰고 운 좋은 사람이 되어라. 닥치고 운 좋은 사람이 되어라.
< 김계수 - 농부·지역신문 발행인 >


[1500자 칼럼] 도라지꽃

● 칼럼 2014. 9. 2. 16:10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팔월의 폭염 아래 도라지꽃이 절정을 이루었다. 수줍은 듯 고개를 꺾어 핀 모습이 고혹적이다. 여름 하늘을 머금은 듯 청아한 청 도라지꽃이 만개하기까지 이 공간에서 적잖은 소요가 있었다. 
차고 진입로를 따라서 대 여섯 평 크기의 기다란 화단이 있다. 해마다 다채롭게 변화를 주는 옆집 화단과 맞붙어 있어 솜씨없는 우리에겐 여간 부담되는 곳이 아니지만 집 미관을 위해 뭔가 시도는 해야 했다. 
이사 온 이듬해부터 출사표를 던졌다. 첫해는 여러 종류가 혼합된 야생화를 뿌렸다. 잘 가꾸어진 이웃집 화단에 대항하듯 자연스러움을 추구하자는 심산이었다. 붓꽃, 양귀비, 마가렛, 백일홍 등 등……. 여름 내내 가지가지 꽃들이 쉼 없이 피고 지는 열의가 대단했다. 다양한 꽃들이 어울려 피어나는 융통성이 볼만해서 한동안 누렸지만 두 해를 못 넘기고 싫증이 났다. 무질서와 왕성한 번식력에 질린 탓이었다.
 
다음엔 코스모스 씨앗을 뿌렸다. 일손도 덜 겸 때가 되면 가을의 정취를 온 동네에 뿌리리라는 야심에서였다. 웬걸, 초여름부터 개화가 시작되더니 더운 계절 내내 만개한 코스모스 밭에서 철 이른 가을을 느껴야 했다. 빠른 세월 늦추지는 못해도 앞서고 싶지 않은 마음에 이 또한 퇴출시켜야 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느라 고심하고 있을 때 친구로부터 잘 여문 해바라기 한 송이가 전해져 왔다. ‘옮거니. 반 고흐의 해바라기를 내 뜰에다 놓아 보자.’ 하지만 이듬해 봄엔 뜻하지 않은 삼파전에 몸살을 부려야 했다. 야생화, 코스모스, 해바라기의 기 싸움이 대단한 탓이었다. 대세는 곧 떡잎 좋은 해바라기로 기울어졌지만 다른 두 종도 포기하지 않고 그들 나름대로 자리보전을 했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나는 해바라기 군락은 좀 위협적이긴 해도 싱싱해서 좋았다. 키가 건너 집 처마 가까이 차올랐을 때부터 꽃이 피기 시작하더니 이내 장관을 이루었다. 이웃의 화단을 가소롭단 듯이 내려다보며 해시계 얼굴을 갸우뚱거릴 때는 아담형인 나는 대리 만족까지 느꼈다. 하지만 개화가 끝나고 씨앗이 영글기 시작하면서 마무리 작업이 고민되었다. 굵직한 밑동을 뽑아내는 일이며 수거 규칙에 맞추어 자르고 묶는 일이 만만치 않게 보여서다. 수확과 동시에 이 작업을 하리라 벼르고 있는데 하루는 온 동네에 소동이 났다. 까마귀 떼들이 몰려들어 순식간에 씨앗을 수확해 간 것이다. 거기다가 결실을 앞둔 이웃의 과수며 채소에까지 벌집을 만들어 놓았다. 한 동안 원망의 눈길을 참아내야 했다. 
참으로 우연한 기회에 도라지꽃이 거명됐다. 대 여섯 살 때 도라지 춤을 곧잘 추었던 기억이 어슴푸레 떠오르며 구미가 돌았다. 짤막한 키에 함초롬한 꽃은 이미 실패한 세 종류의 단점을 모두 보완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초봄, 씨앗을 뿌린지 삼 주일 정도 되었을까. 찬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화단 귀퉁이에서 새순이 꼬물꼬물 올라오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눈 맞추기를 했다. 옆집에서도 의문의 눈빛이 자주 넘어왔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잡초 속에 파묻힌 그놈들은 내내 운신을 못했다. 여름해가 기울자 우리의 기대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봄이 되었다. 말라붙은 몸통 아래로 부터 강한 기운이 감지되었다. 변변찮은 한 해를 살고 난 녀석들이 날씨가 채 풀리기도 전에 태동을 시작한 것이었다. 얼었던 땅을 헤집고 꾸역꾸역 나오기가 무섭게 옆으로 위로 영역을 넓혀 나갔다. 한 해 착실히 쌓은 내공으로 거침없는 몸짓을 하더니 칠월이 되자 보란 듯이 줄줄이 피어났다. 두 해 만에 청 빛으로 도색된 비밀의 문을 열어 의심쩍어 하던 눈길을 사로잡는다. 
사나흘 햇살을 품었다가 주저앉는 꽃, 주된 역할에 충실하려는 자연의 이치가 신통하기만 하다. 큰 키에 덩치까지 앞세운 본토박이들을 옆으로 밀어내고 야멸치게 자리 잡아 가는 도라지꽃이 어쩐지 낯설지 않다. 이국땅에 뿌리내리는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등단 >


[한마당] 세월호 참사와 민주주의

● 칼럼 2014. 9. 2. 16:07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세월호 참사의 일차적인 충격은 우리 사회 곳곳에 깊이 뿌리박힌 안전불감증이었다. 물질만능주의에 젖어 국민 안전과 생명보다 돈을 우선시하는 우리 사회에 대한 경고였던 셈이다. 성숙한 사회였다면 이를 겸허히 받아들여 철저한 진상 규명과 함께 확실한 대비책을 마련하는 선에서 마무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권이 세월호 특별법에 대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유족들의 단식과 농성이 이어지면서 세월호 참사는 민주주의에 대한 여러 논란을 촉발시켰다. 세월호 특별법을 놓고 전개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첨예한 갈등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갖게 한다.
가장 먼저 제기된 건 국가와 국가권력에 관한 문제의식이었다. 300여명의 생때같은 목숨이 눈앞에서 수장되는데도 구조작업을 제대로 못한 정부에 ‘이건 국가도 아니다’는 매서운 비판이 쏟아졌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주지 못한 국가는 국가라고 부를 수 없다는 당연한 질책이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 이후에 제기됐다. 철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유족들을 정부는 매정하게 외면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 부근에서 농성 중인 유가족들의 면담 요청을 며칠째 모른 척하고 있다. 그사이 경찰들은 유족들을 차벽으로 겹겹이 에워싸서 일반 국민으로부터 고립시켰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국가권력은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할 때 그 정당성을 갖는다. 그래야 할 국가권력이 세월호 참사 이후 보인 행태는 국민이 아닌 국가 자체를 보호하고 있는 양상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국가는 어떤 국가인가. 그 국가 안에 세월호 유가족과 그들을 지지하는 국민은 제외된 것인가. 국가권력이 국민 개개인을 보호하지 않고 국가 자체를 보호하려 할 경우 그런 국가는 소수 지배층의 권력 유지만을 위한 독재체제로 전락한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에서 봐왔던 익숙한 모습이다.
 
정부나 의회가 국민을 대변해 정책을 결정하는 대의민주주의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은 세월호 특별법 제정 협상에 나섰지만 두 차례 합의가 유족들에 의해 거부되면서 대의민주주의가 표류하고 있다. 이는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 모두 유족들의 이해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앞으로 이런 일이 지속되면 힘없는 사회적 약자는 계속 소외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정치권이 똘똘 뭉쳐 이를 밀어붙일 경우 허울뿐인 대의민주주의는 국민들의 이해와 동떨어진 채 대리인(정부와 의회)들끼리의 이해관계에 따라 작동하게 될 것이다.
 
여야 합의가 무산되자 새정치민주연합은 유족 대표가 참여하는 ‘3자 협의체’를 제안했지만 새누리당은 대의민주주의에 어긋난다며 반대했다. 국민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대의민주주의가 세월호 유족의 요구를 묵살하는 논리로 동원되는 이 역설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
민주주의 기본 원리 중 하나인 법치주의는 또 어떤가. 민주사회에서 법이란 기본적으로 국가권력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국민을 통제하고 억압하기 위해 만든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새누리당은 그 법치를 앞세워 수사권과 기소권을 보장하는 특별법 제정 요구가 사법체계를 흔든다며 반대하고 있다. 사실과도 부합하지 않는 억지 주장이다.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하기 위한 법치가 거꾸로 자식들의 죽음의 진상을 알고 싶다는 유족의 요구를 가로막는 수단으로 변질된 것이다.
 
새누리당이 신줏단지 모시듯 하는 기존의 사법체계 안에서 이득을 보는 계층은 누구일까. 유족을 제외한 다수 일반 국민인가. 아니면 세월호 진상 규명을 두려워하는 소수 권력층인가. 법치주의에 대한 기본 개념부터 되돌아봐야 할 상황이다.
초유의 세월호 참사는 우리에게 기존 방식과는 전혀 다른 대응을 요구한다. 그것은 형해화한 우리의 민주주의를 한 단계 진전시키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한국 민주주의는 지금 시험대에 올라 있다.
< 한겨레신문 정석구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