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경찰은 왜 그랬을까?

● 칼럼 2014. 6. 17. 11:07 Posted by SisaHan
온 국민들이 세월호 참사에 슬퍼하고 해경의 구조 실패에 분노하고 있던 지난 5월18일, 경찰이 자살한 삼성전자서비스노조 간부의 시신을 탈취해서 화장을 해 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1975년 박정희 정권이 인혁당 처형자들의 시신을 빼돌려 화장을 한 일, 1991년 의문의 죽음을 당한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의 시신을 탈취, 화장한 일은 지난 시절 공권력이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증거인멸의 한 방편으로 그리한 경우였다고 해석할 수 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이번 사건의 사망자는 삼성의 노조탄압에 항의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고 유서에도 시신 수습 및 장례를 노조에 맡겼다. 그런데 경찰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의 시신을 탈취하기 위해 수백명의 병력을 동원했고, 멋대로 화장을 하고 장사를 치렀다. 경찰은 왜 그랬을까?
 
과거 필자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민주정부라고 하지만 실제 한국은 대기업이 공권력을 사실상 지배하는 기업국가가 되어 민주화의 이상은 빛이 바랬다는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거치는 동안 우리 국가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기업국가가 도를 넘어 거의 마피아 국가의 양상까지 보이는 게 아닌가 생각을 하게 된다. 이미 한국 경제학자인 오인규와 터키 정치학자인 와르친(Varcin)은 공저 논문에서 터키와 한국을 재벌의 불안을 국가가 보호해주면서 그 대가를 챙기는 마피아 국가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흔히 마피아 국가라고 하면 이탈리아·러시아·헝가리 등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거대 범죄조직이 지하경제를 움직이면서 경찰, 검찰, 법원, 대통령을 자신의 이익 보호를 위한 방패막이로 이용하는 나라를 말한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러시아에서는 신흥 졸부들의 신변 보호를 위해 사설 용병이 창궐하고, 권력은 이들 신흥 재벌, 마피아와 합작하여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거나 감옥에 가두고 정치자금을 챙긴다. 한국은 물론 그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여당은 재벌을 위한 입법에 앞장서고, 검찰과 법원은 이들의 범죄를 눈감아주며, 세무당국은 탈세를 묵인해온 점은 마피아적 요소가 아니고 무엇일까? 시장이 작동하지 않는 나라에서 소기업은 처음에는 동네 경찰서, 공무원한테 뒷돈을 챙겨주지만 규모가 커지면 경, 검, 국세청 수뇌부, 언론사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대통령과 거래를 해야 한다. 기업국가가 마피아적 요소를 갖게 되면 국가기관이 대기업의 사설 보호자 기능을 하면서 기업 범죄를 눈감아주기 때문에, 민주주의와 법, 국민주권의 원칙이 웃음거리가 된다.
 
기업의 운명을 좌우하는 일에 가담한 법률가들이 상식 이상의 엄청난 액수의 보상을 받을 때, 권력이 저항세력이나 약자에 대해 극히 잔혹한 태도를 보일 때, 우리는 국가와 범죄라는 모순이 공존하는 역설을 감지한다. 삼성의 이재용이 48억을 갖고서 1조원 정도의 자산으로 불린 다음, 삼성 재벌의 총수로 등극하려는 오늘의 이 과정은 정상적인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전직 대법관들이나 검찰 총수들이 퇴임 후 몇개월 동안 받은 수십억원의 수임료,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장관으로 추천, 임명된 전직 관료, 법관들의 엄청난 보수는 누가 왜 준 것일까? 삼성 백혈병 사망 노동자와 자살 노동자 가족들의 피울음이 과연 이런 일들과 무관한 것일까?
 
우리는 왜 경찰이 개인 노동자의 시신을 탈취하기 위해 전쟁하듯이 공권력을 동원하여 사실상 삼성의 사병 역할을 했는지 잘 모른다. 그러나 경찰이 그 이유를 밝히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그 사건의 성격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나라가 아니다”라고 절규한 세월호 유족들과 여러 대학교수들의 성명은 세월호 참사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세월호 구조에서 해양경찰과 해양수산부, 이 정권이 사설 인양업체한테 ‘구조’를 떠넘기고 스스로 직무를 포기한 일은 삼성 노동자의 시신을 작전하듯이 탈취한 경찰의 행동과 사실상 같은 일이다. 이게 ‘우리’나라다.
<김동춘 -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1500자 칼럼] 눈물, 그리고 인공 눈물

● 칼럼 2014. 6. 9. 20:02 Posted by SisaHan
어느 글에 보니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눈물샘이 있어 어떤 사건이나 문제에 눈물을 흘리게 되어있는데 그 눈물샘 가운데 남자의 눈물샘이 더 크다고 했다. 그런데 남자들은 어릴 때부터 울면 남자답지 못하다면서 어른들이 꾸중을 하시는 바람에 옳게 울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인간이 창조함을 당할 때 하나님은 모든 일에 책임을 져야하는 남자가 울 일이 많기 때문에 더 큰 눈물샘을 주시고 울게 하셨는데 울지 못하니 결국 속으로 흘러 더 많은 아픔을 가지고 산다는 셈이다. 

오래 전에 한국의 어느 방송국에서는 용의 눈물이라는 드라마를 방영한 적이 있었다. 용은 왕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씨 조선의 개국 시 아버지 이성계와 아들 이방원과의 갈등을 이야기하면서 왕도 어떤 어려움과 아픔 속에서 울 수밖에 없었음을 이야기했다.
어쨌던 사람은 울어야 한다. 슬프든지 괴롭든지 또는 기쁘든지 자신의 감정을 눈물로 나타낸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그렇게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나타내 보이라고 울음을 주신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서 더욱 강조된 눈물은 자신의 죄악이나 허물을 생각하면서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하셨고 그 눈물을 귀하게 여기셨다.

부모님 주일을 지나면서 나는 큰 슬픔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다윗이 다른 지방으로 갔다가 돌아오니 자신이 머무는 성에 아말렉 족속이 침공하여 자신의 가족을 비롯하여 모든 부하들의 가족이 포로로 잡혀 갔을 때 저들은 울 기력이 없도록 울었다고 했다. 나는 그 본문을 보면서 자녀의 죽음 앞에 울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하는 마음과 함께 그렇게 부모나 자녀의 육신적 죽음 앞에서 슬피 운다면 내 가족의 영혼을 위한 울음으로는 얼마나 울었을까 하는 반문을 던졌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향해 나가실 때 예루살렘 여인들이 우는 모습을 보고 자신을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를 위해 울라고 하셨다.
그것은 예루살렘의 성민들이나 지도자들이 죄악을 회개하지 않고 끝까지 죄악 가운데 살 때 곧 임박한 환난이 있을 터인데 어찌하여 그대로 죄악 가운데 머물고 있는가 하는 탄식과 함께 여인들과 자식들만 아니라 온 예루살렘 성민이 하나님께 눈물로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강권하시는 말씀이었다.
 
우리에게도 이런 눈물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얼마나 울어봤을까? 자신의 삶을 생각하면서 안타까워서 그리고 나의 자녀들이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이 괴로워서 탄식하며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해 본 적이 과연 몇 번이나 있을까? 그렇게 눈물 흘리며 살지 못하는 것을 본 선지자들은 울음꾼을 불러서라도 울라고 가르쳤다. 오늘의 표현을 빌면 인공 눈물이라도 넣어가면서 울 수 없겠는가? 하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번에 한국의 해양 참사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면서 대통령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았다. 대통령만 아니라 목사나 장로 교회의 지도자들이 먼저 그리고 많이 울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교회의 책임인데. 기독교인의 숫자가 한국 인구의 1/4 이라고 자랑했다면 그것은 기독교회가 한국의 선장이나 마찬가진데 우리도 먼저 달아나고 있지않는가? 무책임하게.

< 김경진 - 토론토 빌라델비아 장로교회 담임목사 >

 

[한마당] ‘개나 소’, 그 질긴 DNA

● 칼럼 2014. 6. 9. 20:00 Posted by SisaHan
“개나 소나 내는 성명서!”
서울대 치과대학 교수가 다른 교수들로부터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과 철저한 개혁을 요구하는 성명서에 동참할 것을 독려받자 “교통사고에 불과한 일을 가지고 서울대 교수명의의 성명서를 낸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됩니다. 개나 소나 내는 성명서! 자제해 주기 바랍니다”라며 언급했다는 충격적인 대목으로 전해진다. 이에 대해 동료교수 한 사람은 “내가 인간인 게 부끄럽다”고 탄식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연일 서울의 주요대학을 비롯해 전국의 수많은 대학 교수들, 심지어 해외의 한인교수들 1천5백여명도 시국성명을 내 희생자와 가족들을 위로하고 진상규명과 무능·무책임한 정부의 책임 추궁, 사후 대책 등을 촉구하고 나섰다. 일선교사들도 1만5천여명이 성명을 발표하고 대통령 사퇴를 요구하기도 했다. 교육계 뿐 아니라 문학인 8백명은 “생명과 존엄을 외치는 국민들의 분노를 진압하고 통제하는 권력을 더 이상 허용할 수 없다”는 강경 성명을 냈다. 그 치대교수에게는 이들 모두가 희극적인 ‘개나 소들의 짖어 댐’에 다름 아닌 것이다.
서울대 치과대학은 수능 최고점수 학생들이 지망하는 곳이다. 그러니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수재들이 들어가 공부하는 대학이다. 그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가 동료 대학교수들을 ‘개나 소’로 지칭했으니, 휘하의 가르치는 학생들은 개나 소의 새끼들일 터이요, 아예 그만도 못한 야생 짐승들은 아닐까. 그의 시각과 정신상태가 정말 경이롭다.
 
서울대 치과대학 교수라면 그야말로 일류학부의 최고급 학자로 인정받고 선망받는 명예로운 자리다. 비단 명예 뿐만 아니라 재력으로도 월등한 생활이 뒤따른다. 전혀 남부럽지 않게 풍요롭고 윤택한 상류의 삶을 살고 있다고 봐야한다. 항상 고급차에 일등석, 화려한 생활인의 안락이 몸에 밴 그에게 진료실에 누워 입을 벌리는 환자들은 자신에게 꼬리치는 강아지나 맘대로 부리는 송아지 쯤으로 보였는지 모른다. 지하철과 시내버스로 콩나물 출퇴근하는 시민들, 제주도를 가면서 배멀미를 참아가며 밤샘 여행하는 학생들도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사람이 아닌 짐승들이나 그렇게 산다고. 그렇게 저질인 사람들이 배가 뒤집혀 수백명 죽었다고 뭐가 그리 대수인가. 수시로 발생하는 교통사고에 비하면 별 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왜들 난리인가, 왜 정부가 책임을 져야하고 성명은 무슨 씨나락 까먹은 소리냔 말이다…라는, 한국을 대표하는 방송국 보도국장이 내뱉었다는 말과 생각이 어찌 그리 같은지, 서울시장에 출마한 재벌가 아들의 ‘미개인’ 발언도, 눈물로 지새는 이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망언시리즈 들도, 그 배경을 보면 오십보 백보다. 대한민국의 상류 지배계층 상당수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 일반 국민들이 짐승같은 존재로 여겨진다는 시각이 드러난 게 아닐까. 근래 입만 벙끗하면 ‘종북’이니 ‘좌파’니 ‘빨갱이’라고 매도하는 흐름과도 결코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런데 그런 류의 시각과 매도는 또 다른 데서 그 연원이 떠올라 소름이 돋는다. 
일본이 메이지유신으로 개화하고 제국주의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이른바 ‘정한론(征韓論)이 발호하던 때,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坦退助)라는 자는 “아시아는 우민과 야만인들의 집합장”이라고 싸잡아 비하했고, 오이 겐타로(大井憲太郞)라는 자는 “조선은 아프리카 나라들과 다름없는 야만국이고 중국은 민족성이 가축이나 마찬가지”라며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 근린국들은 소나 돼지와 같은 사람들의 나라라고 멸시했다. 또 을사늑약의 숨은 주역인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는 “한국인의 습성은 이리처럼 잔인 혹독한 본성을 아첨과 가식의 양가죽 속에 감추고 있다”고 업수히 묘사하며 일본이 경영해야만 한다고 외쳤다. (필자 1997년 졸저 「일본의 망령, 우익 그 뿌리와 번식」 P181~182)
바로 일본 우익의 원류들이며, 지금도 극우들의 시각이다. 그런데 그들의 시각이 한국의 상류 지배층 한 부류의 흐름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일제에서 해방된 뒤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친일세력에 그 연원이 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분단현실과 반공을 등에 업고 수십년 권력을 지탱해 온 일제잔재들, 그들의 뇌 속에는 선량한 시민과 동족까지 개나 소로 여기는 반인륜·반민족적 DNA가 질긴 생명을 이어가고 있음이 증명되는 것이다.
 
< 김종천 편집인 >


새누리당의 광역단체장 후보들은 서울역에 모여 “박근혜 대통령에게 힘과 기회를 한번 주시라”고 읍소했다. 정진석 충남도지사 후보는 이 자리에서 이번 선거를 ‘박근혜 구하기’ 대 ‘박근혜 버리기’의 싸움이라고 규정했다. 여당의 ‘지방 일꾼론’과 야당의 ‘정부 심판론’이 맞서는 게 역대 지방선거의 공식이었는데, 6. 4 지방선거 막바지에 여당이 대통령의 눈물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기이한 양상이 전개되고 있다. 새누리당의 ‘박근혜 마케팅’은 전방위적이다. 눈물 흘리는 대통령 사진 옆에 ‘박근혜 대통령을 지켜주세요’라는 큼직한 글자가 적힌 펼침막을 곳곳에 내걸었다. 대통령의 눈물 장면을 편집한 동영상을 제공하며 선거에 적극 활용하라는 지침도 전국 시·도당에 내려보냈다. 지도부는 ‘대통령에게 힘이 되어 주세요’라고 쓰인 피켓을 들고 릴레이 1인 유세도 시작했다.

새누리당이 전면적 ‘박근혜 마케팅’에 나선 까닭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이 불을 댕긴 ‘세월호 심판론’의 바람을 막아보려는 시도다. 야심 차게 꺼내든 ‘안대희 총리 카드’마저 물거품으로 돌아가자 대통령의 눈물을 앞세우며 국민의 감성을 자극하는 쪽으로 방향을 튼 것 같다. 
새누리당의 ‘박근혜 눈물 마케팅’은 이번 선거의 본질을 호도하고 유권자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행위다. 세월호 참사의 슬픔 속에서 치러지는 이번 선거엔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을 수밖에 없다. 총체적으로 망가진 우리 사회의 문제를 낱낱이 드러내는 선거, 온갖 병폐를 바로잡을 방책을 놓고 경쟁하는 선거가 돼야 한다는 점은 새누리당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박 대통령이 흘린 눈물의 의미도 다른 것일 수 없다. 다시는 이런 잘못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우리 사회를 개조하겠다는 다짐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저 대통령을 지켜달라는 호소에서 세월호가 남긴 상처와 아픔의 흔적을 찾아내긴 어렵다. 유족과 실종자의 울분으로부터 지켜달라는 건지, 국민의 분노로부터 지켜달라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눈물 흘리는 박 대통령 사진 옆에 ‘우리가 눈물을 닦아 드리겠습니다’라고 쓴 펼침막은 할 말을 잊게 한다. 세월호 참사로 흘린 유가족과 국민의 눈물은 누가 닦아줘야 하는가. 참으로 물구나무선 현실인식이요, 퇴행적 선거전략이다. 이번 선거를 ‘박근혜 구하기 대 박근혜 버리기의 싸움’이라는 구도로 몰아가면 세월호의 비극을 계기로 다져야 할 각오와 새겨야 할 성찰은 온데간데없어지고 만다. 새누리당의 기대에 부응하는 선거결과가 나오면 국민이 박 대통령과 정부의 세월호 대처에 박수를 보냈다고 봐야 하는가. 반대로, 기대 이하의 성적이 나오면 새누리당은 국민이 대통령을 버렸다고 동네방네 외치고 다닐 셈인가. 세월호 사고에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는 집권당으로서 무책임하고 몰염치한 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