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세월호와 평균인간의 가슴

● 칼럼 2014. 5. 20. 16:45 Posted by SisaHan
언론사 기자들의 취재대상 기관 가운데 청와대는 ‘선망받는’ 출입처다. 대한민국 최고의 권력기관인데다, 취재대상인 고위인사들과 접촉 기회가 많고 그만큼 고급정보도 다양하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각 신문사나 방송국 정치부에서 경력과 경험이 오랜 유능한 기자이거나 회사측이 각별히 챙기는 기자, 혹은 대통령이나 청와대 고위인사와 연줄이 있는 중견기자를 골라 출입기자로 보내는 게 관례였다. ‘1호 기자’라는 지칭도 그런 연유다. 
청와대 의중과 정보가 정국과 정책을 좌우하는 풍향계가 되는 것은 지금도 여전하지만, 일부 언론 대기업은 과거 독재정권 시절 청와대 고급정보를 이용하거나 고위 인사와의 유착으로 이권을 챙기며 사세를 불리기도 했으니, 출입기자의 역할과 중요성은 단지 취재기자에 그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청와대 기자는 기사자료를 모으고 취재는 하되 기사 쓰는 일 보다는 회사에 정보보고를 하고 연락관 역할을 하는, 흡사 ‘정보원’ 혹은 ‘조정관’ 같은 존재일 수 밖에. 출입기자들 가운데 나중 회사중역이 나오고 때론 정치인도 배출하는 구조가 그런 데서 비롯됐던 것이다.
 
전두환 정권이 막 끝난 무렵, 후배와 동료기자들의 선망 속에 청와대 출입기자가 되어 처음 발을 디딘 청와대는 기대와는 달리 삭막하고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얼마 후 번듯한 춘추관을 지어 시설이 넓고 안락해졌지만, 당시는 비좁은 공간에 몇몇 되지도 않은 기자들이 모여앉아 한담을 나누다가 대변인실에서 브리핑 자료를 챙기는 데 그치는 날이 빈번했다. 기사 쓸 거리도 많지 않은데다 늘 보안을 강조하는 삼엄한 분위기에 모두 근엄한 모습들이어서 다른 출입처 같은 정감도 느낄 수가 없었다. 좀 익숙해지면서 나름 요령이 생기기는 했지만, 취재거리가 있으면 몇몇 비서관에게 전화를 걸거나 면회실을 거쳐야만 하는 비서동으로 건너가서 실장이나 비서관들의 바쁜 시간을 빼앗아 얘기를 나눠야만 했다. 국회와 정당을 출입할 때의 자유분방하던 취재활동이나 법원 검찰청을 드나들 때 사건기자가 느끼는 긴박과 기민, 때로는 통괘 등의 묘미는 도통 찾아 볼 수가 없는 무미건조였다. 그럼에도 늘 만나는 대상이 최고의 권부에 앉아있는 사람들이요, 오가는 이야기가 국정을 망라한 고급스런 내용들이니, 신문사에서는 청와대 소식을 듣고싶어 했고, 주위에서들 공연히 우대를 해주는 바람에 ‘기사로 승부하는 명기자’라기 보다 어줍잖은 ‘출입처 자부’에 안주하는 ‘고위급기자’가 되어가기 쉬웠던 기억이 새롭다. 
 
요즘에야 백명을 헤아린다는 청와대 기자실 분위기가 달라졌겠거니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엊그제 청와대 기자단이 세월호 참사 와중의 이른바 ‘황제라면’ 교육장관 기사 보도를 이유로 몇몇 신문사 기자들을 출입정지 시켰다니, 세월은 가도 여전히 ‘청와대 공무원급’ 기자들이 득세하는 춘추관(기자실) 분위기가 읽혀진다. 오프 더 레코드(비보도 전제)를 깬 괘씸죄로 청와대가 제재를 가했다 해도 어불성설일 텐데, 기자들이 기자를, 그것도 무능으로 질타를 받는 정부고위직들의 경망스런 언행을 보도한 것을 ‘왜 했느냐’고 동료 정죄한 것이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방송사의 보도국장이 억울하게 생수장 당한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교통사고에 비유했다 해서 직을 떠났다. 그런데 ‘공영’이라는 또 다른 방송의 전국부장이 유족들을 비판 한데 이어 보도국장은 아예 ‘깡패’라고 까지 희생자 유족을 모독했다는 보도다. 비판받는 정부와 대통령을 보호하는 것이 언론의 책무는 아니다. 오히려 약자편에서 권력을 감시하는 것이 본령이다. 무엇보다 언론인도 직업인이기에 앞서 가슴 따뜻한 인간이 되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취재와 기사작성에 아무리 탁월한 솜씨를 가졌다 해도, 감동과 눈물이 없다면 한낱 기계적인 작문가 밖에 더 되겠는가. 언론인의 덕목으로 철학과 품성…인간 됨됨이가 중요함은 고위지도자들 못지않은 공공적 영향력 때문이기도 하다.
 
엄마 품을 벗어난 병아리 한 마리, 어미를 잃은 강아지 한 마리만 죽어도 가슴 아파하는 게 정상적인 사람의 감정이다. 하물며 3백명이 넘는 어린 학생과 희생자들이 살 기회를 외면당한 채 귀한 생명을 죽임 당했는데 그 부모와 가족의 심정, 온 국민이 슬퍼하는 상황을 이해 못한다면 평균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시간이 좀 지나면서 다시 고개드는 ‘정치선동’이니 ‘깡패’니 ‘종북’이니 매도하는 정신상태들이 기이할 뿐이다. 
얼마나 일처리가 무능하고, 제대로 알지도 알리지도 않고, 조작만 일삼는데 울화가 치밀었으면, 4천여명이 거액을 모아 남의 나라 신문에 대문짝만한 광고로 하소연을 했을까. 국제적 웃음거리가 된 것보다, 웃겨놓고 웃었다고 화내는 게 진짜 어리석고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 김종천 편집인 >



김시곤 전 <한국방송>(KBS) 보도국장의 사퇴 후폭풍이 심상찮다. 공영방송 전반의 정상화 운동으로 이어지는 모양새다. 8일 세월호 유족들이 희생자 영정을 들고 KBS을 방문한 다음날 김 전 보도국장은 길환영 KBS 사장이 “권력의 눈치만 보며 사사건건 보도본부의 독립성을 침해해 왔다”며 즉각 사퇴할 것을 요구했다. 길 사장은 12일 백운기 시사제작국장을 새 보도국장에 임명했으나, KBS 기자협회 소속 기자들은 길 사장과 임창건 보도본부장이 퇴진하지 않으면 제작거부에 들어가겠다고 결의했다. <문화방송>(MBC)에서도 이날 차장급 이하 기자 120여명이 집단으로 ‘세월호 보도 사죄문’을 발표했고, 전국 18개 지역 계열사 기자들도 본사 기자들의 움직임에 동참하고 있다. KBC와 MBC 에서 한꺼번에 아래로부터 쇄신 운동이 분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KBS는 공영방송으로서 제 모습을 잃고 정권 보위 방송으로 전락했다는 말을 숱하게 들었다. 세월호 참사 보도 과정에서 참담하게 망가진 그 속살이 낱낱이 드러났을 뿐이다. KBS보도국장이 다른 방송(<JTBC>)와 인터뷰하면서 자사 사장을 ‘공영방송 사장을 해서는 안 될 인물’로 지탄한 것만 보아도 KBS의 병증이 얼마나 깊은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런 문제는 MBC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MBC의 김장겸 보도국장은 세월호 유족을 “깡패”라고 부르며 비하하는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다른 고위 간부는 세월호 유족들에 대해 ‘그런 ×들은 (조문)해줄 필요 없어’라고 막말을 했다고 MBC 노조가 12일 공개했다. 이런 몰상식한 행태들이 결국 공영방송을 정권에 빌붙은 ‘종박방송’, ‘청영방송’이라는 굴욕적인 말을 듣는 지경으로까지 몰아간 것이다.
 
사실 공영방송이 이런 참담한 상황까지 몰락하지 않고 정상화할 길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12년 MBC 기자들이 170일 넘도록 파업을 벌인 것은 공정방송의 위상을 회복하겠다는 절치부심의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하의 김재철 사장 체제는 이들을 철저히 탄압하고, 박근혜 정부도 해직기자들을 복직시키는 정상화 조처를 팽개쳤다. 김재철 사장의 후예들이 사장 자리를 꿰차고 반언론적 행태를 이어갔다. 이런 사정은 KBS라고 결코 다르지 않다.
지금 KBS와 MBC 기자들의 집단 반발은 침몰한 공영방송을 구출하겠다는 몸부림이다. 이 몸부림이 또다시 무위로 끝난다면 공영방송은 영원히 국민의 버림을 받고 말 것이다. 기자들의 움직임이 어느 때보다 주목받는 이유다.


비극은 절망을 낳고 그 절망이 다시 비극을 낳고 있다. 요 며칠 새 세월호 참사로 아들을 잃은 어머니와 딸을 잃은 아버지가 슬픔을 못 이기고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일이 벌어졌다. 자식을 먼저 보낸 아픔은 좀체 멈출 줄을 모른다. 적절한 심리치유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무기력과 허탈로 삶의 의욕을 잃고, 모든 것을 포기하는 태도가 계속될 수 있다. 그런 삶은 언제 어디서 끊어질지 모른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세월호 침몰은 자식과 함께 그 부모까지 데려가게 될 판이다.
 
무엇보다도 부모의 상처 난 가슴에 소금을 뿌리는 짓부터 멈춰야 한다. 페이스북에 유가족을 비난하는 글을 올린 한 사립대 교수나 박승춘 국가보훈처장 같은 망언은 더이상 없어야 한다. 또 해경이 나서서 피해 가족들에게 사고 상황을 설명하는 일도 중단해야 한다. 검찰 수사 내용을 보면, 이제 해경은 구조자가 아니라 아이들의 죽음을 방치한 범인으로 바뀌고 있다. 부모들에게 더는 치욕을 안겨서는 안 된다.
현재 피해 가족에 대한 정신건강 상담과 치료는 안산 정신건강트라우마센터가 맡고 있다. 지금까지 213가구를 찾았지만 상담에 응한 건 110가구뿐이라고 한다. 부모들의 마음이 상담조차 받을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내린 것이다. 사고를 겪으며 느낀 공포, 분노, 슬픔 등의 충격적인 감정들은 표현돼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무조건 억눌린 감정을 드러내도록 유도하는 것 또한 매우 위험하다. 미국에서 9.11테러 뒤 심리치료 결과를 추적조사한 경험이다. 그러니 매뉴얼대로 부모를 상담할 게 아니라, 치유적 차원에서의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심리치유 전문가 정혜신씨는 “집이라도 치워주고 밥이라도 챙겨주면서 이미 깨져버린 일상을 더이상 깨지지 않도록 받쳐주는 일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귀담아들어야 할 대목이다.
 
상처받은 이들이 절망의 늪에서 벗어나 보호받고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사회적 연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세월호 참사로 자식을 잃은 부모에겐 우리 사회가 그 아이를 영원히 기억할 거라는 믿음이 생을 지탱하는 힘이 될 것이다. 정혜신씨는 숨진 아이의 친구들이 아이에 대한 기억과 함께했던 느낌을 편지로 써서 숨진 친구의 부모에게 보내는 운동을 하자고 제안한다. 이런 편지가 부모들에게 최소 10년은 배달되면 좋겠다고도 했다. 어린아이들에게만 맡길 일은 아니다. 이 비극에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리본이든 엽서든 아니 그저 종이쪼가리에라도, 절대 아이를 잊지 않겠다는 표지를 계속해서 남겨야 할 것이다.


[칼럼] 슬퍼해야 한다

● 칼럼 2014. 5. 20. 16:42 Posted by SisaHan
내 자식이, 부모형제가 눈앞에서 죽었다. 처음엔 분명히 살아 있었다. 살릴 기회가 충분했다. 하지만 단 한명도 살리지 못했다. 그렇게 300여명이 학살당하듯 수장되는 현장을 수천만명이 느린 화면으로 지켜봤다. 희생자 대부분은 열일곱 꽃봉오리들이었다. 어떻게 잊나. 사고 한달여 만에야 검찰은 ‘해경이 즉각 진입했으면 다 살릴 수 있었다’고 결론 내렸다. 그걸 이제 아나.
세월호 참사에서 사람들 무릎을 꺾은 치명적인 2차 트라우마는 정부의 무책임하고 무능한 대응과 거기에 장단 맞춘 언론의 부도덕함이었다. 내가 눈앞에서 지켜봤고 확인한 사실을 그들은 아니라고 도리질했다. 내가 지각한 사실과 상반된 정보가 계속 입력되면 현재감각에 문제가 생긴다. 내가 이상한 건가, 혼란스럽다. ‘당신 눈을 믿으면 되나. 정부 발표를 믿어야지.’ 그렇게 정부와 언론은 합작해서 겁박하듯 타이르듯 사람들의 분노와 절규를 외면했다. 그 결과 세월호 트라우마는 더 지독해졌다.
 
세월호 주인이 대통령도 아닌데 왜 정부 탓만 하느냐, 유족이 무슨 벼슬도 아닌데 이렇게 생난리를 쳐도 되느냐고 게거품을 무는 작자들까지 생겼다. 생난리를 친 것도 없지만, 미친 질문에 한번만 정상적으로 대답해준다. 그래도 된다. 그런 때 그런 슬픔과 고통을 충분히 받아주라고 공동체가 있고 국가가 존재하는 것이다.
자식이 눈앞에서 학살당하듯 죽었다. 그런 상황에서 부모로서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 생각하면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지옥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사회라면 무엇보다 먼저 유족을 배려하는 게 옳다. 하지만 정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수재민이나 사회불만세력 정도로 치부했다. 난민수용소 같은 체육관에 방치했고 대통령 면담하러 온 유족들을 경계하며 물대포부터 준비했다. 대통령은 머리를 틀어올리는 중이었어도 아이들 영정을 품에 안은 유족들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산발한 채로라도 달려나와 손잡았어야 했다. 대신 경찰은 학익진 대형으로 유족들을 거리에 가뒀다.
 
자식 잃은 부모들은 이제 아이들과 돼지갈비를 먹으러 갈 수도, 목욕탕을 갈 수도, 용돈을 줄 수도 없다. 다 사라졌다. 그 일상으로 못 돌아간다. 오전에 아이의 사망신고를 한 부모가 오후에 찾아와 ‘내가 미쳤나 보다. 너무 빨리 했다’고 통곡하며 사망신고를 취소해 달라고 한다. 한 엄마는 ‘없는 집에 너같이 예쁜 애를 태어나게 해서 미안해. 엄마가 지옥 갈게 딸은 천국에 가’ 피울음을 토한다.
그런 이들에게 언제까지 슬퍼만 할 수 없지 않으냐며 경제도 위축되었으니 빨리 털고 위기를 극복하자고 말하는 건 미친 짓이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사람 앞에서 유산배분을 논하는 꼴이다. 수백명의 주검이 묻혀 있는 땅 위에 놀이동산 짓는다고 밝은 사회 오지 않는다. 그렇게 잊혀질 일이 아니다. 지금은 더 슬퍼해야 한다. 정상적인 애도의 과정이다. 어느 시인은 울음의 끝에 슬픔이 무너지고 길이 보인다고 했다. 유족들의 슬픔에 합일할 수 있어야 우리가 내놓는 해법은 정확해진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세월호 침몰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다. 세월호 트라우마의 파괴력이 그런 정도다. 이제 우리는 세월호 침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걸 인정하고 그다음에 무얼 할 수 있는지 찾아야 한다. 업보처럼 견뎌내야 한다.
하지만 지금 무엇보다 먼저여야 할 것은 애도다. 아이들이 컴컴하고 차가운 바닷속에서 꽃송이로 훨훨 날아올라야 한다. 남아 있는 사람들 마음속에 그런 느낌이 있어야 한다. 모든 새출발에 대한 논의는 그다음부터다. 거기서 시작돼야 한다.
< 이명수 - 심리기획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