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오월에는

● 칼럼 2014. 5. 10. 16:24 Posted by SisaHan
봄비 내리는 토요일 오후, 손녀 서현이와 데이트를 계획한다. 아니 계획이라기보다 불현듯 스친 생각이다. 세 살짜리 아이의 버릇을 바로잡기 위해 회초리를 들었다는 아들 마음이 안쓰럽고, 시시때때 그 앞에서 자지러질 아이를 떠 올리니 마음이 아려서 한 역할 하고 싶었던 게다. 여든 넘도록 성품 좋은 사람이 되려면 이 시기에 꼭 필요한 교육이지만 나에겐 일련의 과정들이 아픔으로 다가온다. 
데이트 장소는 아이가 좋아하는 장난감 가게로 정했다. 호기심에 빠진 아이의 발걸음에 보조를 맞출 수 있을 지 의문이지만 꿈의 궁전을 원 없이 돌다보면 부녀의 신경전이 조금이라도 느슨해 지지 않을까. 이제 겨우 세 번째 봄을 맞는 새싹과 함께 데이트 할 생각하니 고목에 초록물이 드는 것 같다. 
아이를 카시트에 앉히고 옆자리에 좌정했다. 뽀송하고 보드라운 손을 입술에 갖다 대니 녀석은 나 보다 더 어른스런 미소를 짓는다.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란 윌리엄 워즈 워드의 무지개가 그 얼굴에 걸린 듯하다.
 
‘할머니 집 말고 장난감 가게 가는 거지요?’ 아이는 다짐하듯 묻는다. 아뿔싸.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할머니 집 외출이 최고였는데 요즘은 인기가 시들해졌다. 덩달아 할머니 시세도 예전만 못함을 실감한다. 풍요의 시대, 전자기기가 만연한 시대에서 커가는 아이에게 반대 여건을 고집했더니 이제 먹히지 않는 시기가 된 모양이다. 지금 아이가 기억하는 할머니 집은 아마도 고장 난 텔레비전에 몇 안 되는 장난감과 내용을 달달 외우는 동화책 몇 권만이 있는 곳 일 게다. 부엌의 싱크대며 수납장, 화장대, 등 아이가 탐냈던 곳은 아낌없이 개방했고 숨바꼭질이며 춤, 노래까지 몸 개그도 불사했건만……. 무정한 녀석이다. 예전의 인기를 회복하려면 절충안을 고려해야 할 지 말지 고민을 해야 할 것 같다. 차가 쇼핑몰로 진입하자 아이는 ‘여기 아니고 저기!’ 하며 눈에 익은 곳을 손짓하며 조바심을 낸다. 
남편과 나는 카트를 밀기보다 아이의 양손을 하나씩 잡고 매장으로 들어섰다. 부모와 함께 오면 으레 그러는 듯, 두어 번 스윙을 해 달래더니 걸음을 멈춘다. ‘하버지는 요렇게 할머니 손잡아요.’ 아이는 남편과 나의 손을 엮어주고 옆으로 빠져나와 내 손을 잡는다. 그리곤 자유로운 한 손으로 장난감을 짚어가며 영상속의 캐릭터와 조잘거린다. 아이답지 않은 기특한 생각을 한다했더니 나름대로 속셈이 있었던 거다.
 
눈높이 데이트는 의외로 재미있었다. 아직 뭔가를 가지고 싶은 욕망이 적은 연령대라 품에 안는 것 보다 보는 걸 더 좋아했다. 아이가 이끄는 대로 다니며 보아주고 태워주다 보니 함께 즐기는 시간이 되었다. 특히 사내아이만 둘 키운 나는, 무기고 같은 장난감 코너가 삭막하게 각인되어 있는데 비해 여아들의 코너는 아기자기 하면서도 이야기가 있는 공간이어서 다채로웠다. 아이는 과자 한 봉지, 우리는 공주님 드레스와 장난감 노트북과 알파벳 블록 쌓기 한 통을 골라서 차에 올랐다. 
손수 고른 과자 봉지를 안고 흡족한 표정으로 사각거리는 아이의 얼굴은 바로 천사의 모습이다. 밝고 맑은 순수함의 대명사, 저 얼굴을 위해 어른인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아야 하는가. 여객선 참사 이후 묵직하게 누르고 있던 돌덩이가 비로소 흔들리기 시작한다. 자식들 위해 나선 길이지만 오히려 위안을 받는 시간이 되었다. 
 
비통함 속에 어이없이 보낸 사월의 아이들은 가슴에 묻고 오월에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 실추된 우리의 모습을 세우기 위해 그리고 저 어린 새싹들을 위해.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등단 >


[한마당] 우리는 책임이 없는가

● 칼럼 2014. 5. 10. 16:22 Posted by SisaHan
세월호가 산 생명 300여명을 가둔 채 바다로 잠긴 충격 이후 3주가 지났다. 밤낮으로 홍수를 이루는 참사 이후의 소식들은 마치 진흙탕에서 실타래가 풀려나오듯 하나씩 밝혀지는 사실마다 국내외에 너무 큰 수치와 절망과 슬픔을 안겨주고 있다. “그래도 자부심을 갖고 살아왔는데, 설마 이 정도밖에 안되었던가….”
소중한 인명을 속수무책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죄책감에, 너무도 무능하고, 비인간적이고, 무책임한 모습들, 뿌리깊은 부패와 부정의 먹이사슬에 얽힌 치부가 낱낱이 드러나면서 부끄러운 자화상을 똑똑히 보게 된 참담함이다.
 
온통 불신과 적의로 가득 차 곳곳에서 분노의 함성이 터지면서 당연히 참사를 부른 장본인들과 사후 처리 책임자들이 몰매의 대상으로 떠오른 것은 어쩔 수 없다. 선장과 선원들과 선사, 해경과 언딘이라는 구난업체, 정부 관료들과 대통령 등 줄줄이 질타와 한풀이의 제단에 올라있다. 참사와 구난의 직접 책임이 있으니 어차피 과녁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배는 선장의 책임하에 운항하고, 해난구조는 해경에게 맡겨진 책무이며,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 할 정부는 대통령이 최종 책임자이기 때문이다. 선장을 잘 못 만나면 승객은 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다. 원래 지도자가 어리석고 무책임하면 구성원들이 고생을 하고 자칫 목숨도 위태로워지는 것은 세상의 이치다. 임금과 지도자의 무능으로 백성이 고초를 겪은 사례는 우리 역사에도 수없이 기록돼 있다. 죄없는 민초들은 시달리고 죽어가며 원망조차 제대로 못했다. 근대에만 해도 나라를 빼앗기고 학살당한 동학 농민들의 원혼, 일제 식민치하의 핍박과 설움, 6.25 당시 이승만의 철면피한 행보로 죽어간 양민들, 박정희의 철권통치로 스러져간 민주인사들, 전두환의 5.18 만행 등… 그런 기억들이 되살아 나면서 선량한 국민들이 공황상태에 빠져 울분들을 쏟아내는 것이다.
 
그러면, 왕조시대도 아닌 이 시점에 일어난 세월호 참극도 과연 그들 지도자의 책임이요 직접 당사자들만의 ‘죄악’으로 가름하고 말 일인가. 참사의 뒤안길 연원을 파헤칠 때마다, 너무도 뿌리깊고 폭넓은 총제적 부실의 복합체임을 부정할 수 없기에, 모두들 이중 트라우마의 늪에서 가슴을 치게 된다. 사실은 알고도 덮어두었던 화농이 터진 것이요, 오래 전부터 잉태된 부실과 부정의 불량산품이라는 사실을 통절히 되새기고 있는 것이다. 아 세월호는 바로 ‘한국호’ 그 자체였구나, 우리 모두가 껍질만 거대한 불량선박에 타고서 위험한 항해를 즐기지 않았던가 하는 자책의 업습이다. 안전대비가 허술해도 그러려니, 과적을 해도 괜찮겠지, 물 새는 것을 모른 체 하고, 악천후에 출항을 해도 제지하거나 하선하지도, 선장을 나무라지도 않고서는 마침내 죽음의 바다에 이르러 다함께 침몰하니 아우성대고 있는 것이구나…, 민주화 되고 풍요로워졌다는 자만에 빠져 귀중한 표를 바람따라 연줄따라 소홀히 행사해 왔다. 때묻은 인물 걸어온 길이 부도덕해도 찍어주고는 뽑은 뒤 감시에도 태만했다. 그들이 세금을 탕진하든 속이고 분탕질을 하든 모른 체, 권력에 취해 거짓 선전과 편가르기와 차별과 갈등을 부추겨도 에라 귀찮다, 나만 편하고 나 혼자 잘살며 내 자식 잘 되면 그만하지 오불관언, 아니 나라고 질소냐, 더불어 편승하며 살아왔다….
이민 땅에서 사는 우리들은 어떤가. 세월호를 보며 한탄만 하면 그만인, ‘한국호’에는 타고있지 않은 국외자들로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인가?

과거 군사독재 시절엔 모국의 잘못을 깨우치며 민주화 운동을 적극 뒷받침한 열정과 애국혼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모국의 폐습을 나무라고 호통치기는커녕 오히려 흉내내고 따라하며 무조건적인 부화뇌동에 급급하지 않는가. 모국의 불의한 모습들이 그대로 재연되고 있는 우리들 아닌가. 근래 국가기관의 선거개입 등 불법적 행태에 대한 비판을 적대시 하고 종북몰이에 영합하는 모습들에서 선진국에 사는 민주시민답지 않은 상식의 침몰과 변질된 애국의 민낯을 본다. 재외국민을 길들이려는 예산지원에 몸달아하며 몇푼 더, 연줄대기에 바쁘고 꼭두각시 노릇 하기에 익숙한 모습들은 세월호로 입증된 민-관 유착고리의 그 것과 다를 바 없다. 피땀 어린 국민의 세금이라고 생각한다면 모국에서 생활고로 자살하는 숱한 생활보호 대상자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충정은 배부른 망상인가. 빛과 소금이라는 본질을 잊은 채 물량주의에 현혹되고 권력을 맴돌며 다툼과 질시를 서슴지 않는 종교계는 모국의 현실과 무엇이 다른가.
 
엄청난 참사에서 이제 지도자는 물론 온 국민이 회개하고 새롭게 태어나야 하듯이, 해외의 디아스포라 한인들도 모국의 비정상과 불의를 방관하고 동조하고, 때론 감싼 책임을 통감하며 참회해야 한다. 조국과 아픔을 함께하며 재도약을 소망한다면, 친정을 거들듯이 조국이 잘못되고 혼탁할 때 매섭게 호통치고 나무라는 것이 ‘참 애국’의 발로임을 명심하고 실천해야 한다.
 
< 김종천 편집인 >


[칼럼] 세월호와 에밀레종

● 칼럼 2014. 5. 10. 16:19 Posted by SisaHan
권력 서열로 치자면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사람이 주인공인 이야기다. 석달 전쯤 신문을 보다 속에서 열불이 났다고 한다. 현대제철에서 사고로 1년 반 사이 노동자 13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보도를 본 것이다. 마침 현대자동차 임원이 안부전화를 걸어왔길래, 마구 퍼부어댔다.
“아니, 현대제철은 지금 에밀레종을 만드는 겁니까? 종소리를 내려고 아이를 끓는 쇳물에 넣었다고 하던데, 현대자동차에 쓸 고급 강판을 만들려고 근로자를 용광로 안에서 죽게 만드는 거예요? 정몽구 회장한테 꼭 좀 전해주세요. 한번만 더 사고가 나면 구속될 수도 있다고요.”
눈 하나 깜짝 않던 정 회장이 급히 서울 양재동 본사 옥상에서 헬기를 탔다. 당진제철소에 도착한 건 20분 만이었다. “사고가 재발하면 엄중문책하겠다”고 불호령을 내렸다. 안전 관련 예산도 5000억원으로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그 뒤 ‘죽음의 공장’이 안전지대로 바뀌었다. 누구 하나 무릎 까졌다는 소식조차 없다. “모든 임원들이 조를 짜서 휴일, 야간 가리지 않고 순찰을 돌고 있습니다. 회장님이 나서니 다들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거죠.” 현대제철 관계자가 밝힌 이유다. 돈 많은 재벌에게는 감옥이 제일 무서운 법이다.
 
형제라서인가. 요즘은 정몽준 의원의 현대중공업이 난리다. 불에 타고 철판에 깔리고 바다에 떨어져 8명이 숨졌다. 두 달 사이에 벌어진 일이니, 형의 회사보다 훨씬 심각하다. 시기도 민감하다. 세월호 침몰로 배의 안전성에 관심이 모이고 있다. 여객선은 안 만든다지만 현대중공업은 세계 1위의 조선회사다. 비정규직 선원이 비극의 원인으로 꼽히고 있는데, 현대중공업의 비정규직 비율은 50%를 훌쩍 넘는다. 군산공장의 경우 직원 3700여명 가운데 499명만 정규직이다.
그런데도 정 의원은 둔하기 그지없다. 토론회에 나와 태연하게 “서울 시정의 최우선 순위를 시민의 안전에 두겠다”고 한다. 상대방이 기업인의 탐욕을 문제 삼자 “전체 기업인을 두들겨 잡는 것은 실망”이라고 역공을 펼치기도 했다. 현대 가문만 탓할 건 아니다. 삼성도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이 상영될 때만 해도 보상을 해줄 것 같더니, 다시 고개가 뻣뻣해진 느낌이다.
우리나라에서 해마다 사고로 숨지는 노동자는 2000명가량이다. 부동의 세계 1위다. 세월호로 따지면 매년 7대 정도가 침몰하는 셈이다. 그런데도 기업인들은 꿈쩍도 않는다. 안전에 돈을 들이느니 차라리 처벌받는 게 훨씬 싸게 먹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어도 구속되는 법은 없다. 대부분 몇백만원 정도의 벌금으로 끝난다.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기업인이 되면 사람 목숨을 가볍게 여길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정몽구 회장이 화들짝 놀라 ‘생돈’ 5000억원을 내놓은 건 권력자가 잔뜩 겁을 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번 그럴 수는 없다. 법으로 만들고 제도화해야 한다. 당장 산업안전보건법부터 강화할 일이다. 안전기준을 어긴 기업인은 구속하고, 기업이 휘청거릴 정도로 손해배상금을 물려야 한다. 그러지 않았기에 세월호의 실소유주 유병언은 슬그머니 선실을 증축하고 화물을 과적하고 평형수를 빼버렸다. 싸구려 선장을 고용한 건 낙타의 등뼈를 부러뜨린 마지막 지푸라기였다. 그리고 아이들은 깊은 물속에 잠겨버렸다.
세월호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에밀레종이다. 우리는 그 종을 심장에 달고 살아야 한다. 반칙과 편법을 저지르고 싶을 때마다, ‘에밀레 에밀레’(엄마 엄마)라고 외치는 아이들의 절규를 들어야 한다. 그게 아이들에게 지은 죄를 천분의 일, 만분의 일이라도 갚는 길이다. ※써야 하기에 썼지만, 다 쓸데없는 짓이다.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미안하고 미안할 뿐이다.
< 김의겸 -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


도올 김용옥 교수의 <한겨레> 기고문이 일파만파를 일으키고 있다. 그의 글이 게시된 지난 주말 이후 주요 포털에선 수만건씩 댓글이 달리고, 페이스북·트위터에서도 폭발적인 반응이 일었다. 세월호 사태의 무책임을 질타하며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한 김 교수의 발언에 수많은 누리꾼들이 ‘이 시대 지식인으로서 해야 할 말을 용기 있게 해줬다’며 호응했다. 민심의 동요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박 대통령과 정부는 직시해야 한다.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박 대통령의 사태 인식이 근본적으로 바뀔 것이라는 기대는 난망해 보인다. 4월29일 국무회의 사과 발언 이후 여론이 오히려 나빠지자 박 대통령은 지난 2일 ‘앞으로 대국민 사과를 하겠다’고 추가 사과를 예고했다. 도대체 사과 예고부터 하는 건 어디에 있는 법도인가. 국무회의 ‘착석 사과’로 비난이 거세지자 ‘그건 사과가 아니었고 진짜 사과는 따로 하겠다’고 스스로 부정하고 나선 꼴이다. 이런 식으로는 사과를 되풀이해도 진정성을 느낄 수 없다.
 
민심의 동요를 걱정한 탓인지 박 대통령은 4일 두 번째로 진도 세월호 참사 현장을 찾았다. 그는 “사고 발생부터 수습까지 무한한 책임을 느낀다”며 처음으로 자기 책임을 거론했지만, 이번에도 유가족의 마음을 얻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유가족들과의 30분 비공개 면담에서 쏟아져나온 것은 울음소리와 항의의 외침이었다.
세월호 사고 이후 정부가 보여준 무능과 무책임은 도대체 국가는 뭣 때문에 있나 하는 회의감이 들게 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대통령과 정부는 사태의 잘못이 유언비어 때문이라는 듯 틈만 나면 ‘유언비어 엄단’을 외친다.
 
청소년과 아기 엄마들까지 시위에 참여하는 것도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보여준다. 지난달 30일 서울 강남역에 유모차를 끌고 나왔던 엄마들은 어린이날인 5일에도 서울 홍대입구역에서 ‘엄마니까 말할 수 있다’ 2차 행진을 벌였다. 엄마들은 물속에서 차갑게 식어간 생명들을 두고 내 아이와 즐거운 시간을 보낼 자신이 없었다고 했다. 앞서 3일에는 중고등학생 수백명이 서울 청계광장에서 세월호 희생자 추모 촛불집회를 열었다. 참가 학생들은 “정부의 대처에 의혹을 제기하면 종북으로 몰리는 게 옳은가” “잘못 말했다가 아무도 모르게 사라질까봐 무섭다”고 했다. 정부에 대한 불신이 어디까지 이르렀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새누리당 서울시장 예비후보로 나섰던 한 인사는 “학생들이 일당 6만원을 받고 동원됐다”는 막말을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올렸다가 엄청난 항의를 받고 사과하는 추태를 보였다. 이 정부와 집권세력의 인식 수준을 보는 것 같다. 이래서는 민심이 더욱 험악해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