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행복한 십대들의 나라’

● 칼럼 2014. 5. 4. 20:36 Posted by SisaHan
대학원 학생들과 낮은 출산율을 화제로 이야기를 나누다 깜짝 놀란 적이 있다. 한 여학생이 자기도 “아이를 낳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자, 같이 있던 네 명의 여학생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게 아닌가. “끝없이 경쟁을 강요하는 이 교육지옥 속으로 아이들을 떠밀어 넣을 자신이 없다”는 것이 한결같은 이유였다. “십대 시절 행복했던 기억이 별로 없다”는 말도 모두 같았다.
세월호 사고로 희생된 학생들을 보면서 왜 이 대화가 맨 먼저 떠올랐을까. ‘행복했던 기억이 없는 지옥’ 속에서 살다가, 이제 차갑고 어두운 바닷속에서 죽어간 아이들이 너무도 안쓰럽다. 이런 세상을 만들어놓은 우리 어른들의 죄는 도대체 어떻게 혜량할 것인가.
 
세월호 참사로 숨져간 아이들을 진심으로 애도한다면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그 아이들이 소망했으나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삶을 이제부터라도 우리 청소년들이 살도록 해주는 것이다. ‘행복한 십대’를 돌려주는 것이다.
그러려면 우선 ‘교육’부터 바꿔야 한다. 우리 십대들을 가장 불행하게 하는 것이 바로 우리나라의 잘못된 교육이기 때문이다. 본래 교육(education)이란 학생의 잠재력을 ‘밖으로(e-) 끌어내는(duc-)’ 것이다. 사회적 요구를 일방적으로 쑤셔넣는 우리네 교육은 기실 ‘반교육’에 가깝다. 게다가 그 교육의 결과가 사회적 차별의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 반사회적이기까지 하다.
이렇게 반교육적이고 반사회적인 교육풍토 속에서 우리 학생들은 세계에서 가장 불행하고 우울한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다. 획일화된 학습과 평가 시스템 속에서 개성과 창의성을 잃어가고 있고, 우정과 사랑의 감성은 사라지고 경쟁과 대결의 논리만이 지배하는 살벌한 정글 같은 교실에서 절망과 불안을 내면화하고 있다.
 
학생들은 오로지 공부만 하는 ‘학습기계’로 전락하였고, 정규수업 이외에도 학원, 과외, 야자로 이어지는 엄청난 학습노동은 그 시간과 강도에서 인권유린의 수준을 넘어선 지 오래다.
이제 우리 아이들을 모든 어른들이 공모하여 처박아 넣은 이 끔찍한 노예상태에서 해방시켜야 한다. 이제 어른들은 노예감독관 노릇을 그만두어야 한다. 이제 우리 아이들을 행복한 자유인으로 키워야 한다.
우리 아이들도 행복할 권리가 있다. 그들도 다른 나라 아이들처럼 자유롭게 연애도 하고, 맘껏 독서도 하고, 연극이나 영화도 보고, 박물관이나 미술관에도 가고, 방학 때는 여기저기 여행도 다니면서, 그렇게 자신의 고유한 삶을 향유해야 한다. 그렇게 인간적인 품성을 키우고, 시민적인 자질을 높여야 한다. 자신의 개성과 ‘천재’를 발견할 여유를 가져야 한다. 미래가 아무리 장밋빛이라 해도, 삶은 한순간도 ‘유예’될 수 없다.
 
우리 아이들을 행복한 자유인으로 키우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꿈이 아니다. 우리가 사는 이 유라시아 대륙의 반대편에서는 그것이 상식이요 일상이다. 의지만 있으면 우리도 할 수 있다.
저 침몰하는 배 안에서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던 어른들이 우리 아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듯이, 이런 부조리한 교육, 불합리한 세상을 묵인하는 우리들은 어쩌면 이 땅 위에서 매일매일 조금씩 우리 아이들을 죽여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월호의 아이들’이 갈망했을 그런 세상을 이제 우리 어른들이 열어주어야 한다. 이 시대착오적인 노예상태에서 아이들을 해방시켜 그들의 얼굴에 다시 행복한 미소가 피어나도록 해야 한다. “더러운 대한민국. 이렇게 부끄러운 적이 없었다”, “언니, 오빠 두 번 다시 이런 나라에 태어나지 마세요”라는 저 아이들의 분노와 저주의 외침을 또다시 들어선 안 된다.
< 김누리 - 중앙대 교수 독문학 >


[한마당] 내동댕이쳐진 공동체

● 칼럼 2014. 5. 4. 20:33 Posted by SisaHan
한국전쟁 개전 직후 서울시민에게는 결사항전의 메시지를 남겨둔 채 몰래 피난을 떠난 이승만의 일화는 워낙 유명하다.
박명림 교수의 역작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에 피난 과정의 전말이 사뭇 희극적으로 자세하다. 6월27일 서울을 떠나 대구에 합류한 7월9일까지 13일간의 피난 기간에 ‘국가원수’ 이승만은 극소수의 참모, 수행원들만 데리고 사실상 혼자 튀었다. 
이승만은 정부에조차 행선지를 숨긴 채 아직 포탄 한 발 떨어지지 않은 평화로운 삼남 지방을 혼자서 이리저리 도망 다녔다. 
그는 서울이 점령되기도 전에 미국대사관을 통해 일본에 망명정부 수립까지 요청해놓았다. 즉, 일각에서 ‘국부’로 추앙되고 있는 이승만이 이 시기에 한 유일한 일은 인민군 한 명 없는 삼남 지방에서의 가열차고 경이로운 홀로 줄행랑, 이것밖에 없다.
후일 서울로 돌아온 이승만이 자신이 지시한 한강다리 폭파로 인민군 치하에 남아야 했던 서울시민들에게 어떻게 피의 보복을 벌였는지는 잘들 아시리라.
수치심에 떨며 사죄를 해도 모자랄 상황에 오히려 복수의 굿판을 벌였다. 상처받은 공동체의 치유를 위해서는 피를 토하는 사죄가 필요한데, 오히려 적반하장의 선전포고를 통해 상대의 피를 요구했다.
 
이승만이 보여준 이 궁극의 치졸함과 후안무치를 생각하다 보면 한국 사회에서 공동체란, 정의란, 국가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괴로운 질문에 부딪히게 된다. 
한국 사회에서는 이승만처럼 위기의 순간에 공동체를 버리고 정의를 우롱한 자들이 그 후로도 오랫동안 국가권력과 부귀영화를 독점해왔던 탓이다.
세월호 침몰 후의 상황이 더욱 참담하다. 정말로 이게 나라인가 싶다. 평소에는 서로 더 많은 권한을 주장하던 장관, 수석들이 저마다 컨트롤타워가 아니라고 도망치기 바쁘다. 세계 10대 경제대국을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시스템은 힘없고 ‘빽’없는 이들에게 닥친 재난 앞에서 한없이 무능하다. 희생자 구조에 실패한 정부에 국민들이 분노하자, 대통령은 특유의 유체이탈 화법으로 자신이 수장인 정부를 비판하고 있다. 그래도 늦었지만 분향소를 찾았고 국무회의 석상이긴 해도 사과도 했다니. 다행이다.
하지만 막상 그가 이끌고 있는 정부는 국민들의 추모 열기를 축소하는 데 사력을 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유족 사이에 사복경찰을 풀고 분향소 예산과 설치 장소는 최소화하더니 추모의 촛불집회마저 금지했다가 법원에 제동이 걸렸다. 누가 대통령의 진심을 믿겠나? 이 와중에 집권당과 보수세력 일각에서는 좌파의 정부전복작전, 선동꾼 침투, 유족이 미개한 국민, 빨갱이들의 기획 음모, 제2의 5.18 대비 등등 온갖 적반하장, 증오의 언어들이 난무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오랫동안 ‘사고 공화국’이었고, 그 책임을 특정 정치세력 탓으로 돌리기는 어렵다. 
그 비극의 와중에 힘없는 국민들은 비극을 공유하는 정서의 공동체가 되었다. 적어도 과거의 정부와 집권세력은 이 비극의 가상공동체를 위무하는 시늉을 내는 데 최선을 다해왔다. 극복의 대책은 별개로 하더라도 말이다. 이게 한국 사회가 그동안 지켜온 부끄럽고 민망한 최소한의 금도였다. 하지만 현 정부와 보수세력은 아예 적반하장 쪽을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내동댕이쳐진 공동체 앞에서 그들이 최소한의 수치심도 버리고 끊임없이 종북좌파 등 증오의 언어를 호출하는 것은 어쩌면 자신들의 영토와 기득권이라도 보호해야겠다는 탐욕의 발로가 아닐까? 
제발 그러지들 마시라. 애시당초 공동체의 정의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고 해도, 금도는 지켜야 한다. 처연한 봄날이다.
<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


[1500자 칼럼] 부모님의 모습

● 칼럼 2014. 4. 27. 12:34 Posted by SisaHan
이제 곧 가정의 달이 된다. 작년 부모님 주일에 설교하면서 이런 이야기로 시작을 했었다. 부모님이란 어떤 분인가? 하는 말씀을 내 나름대로 설명해보았다. 학자들이나 수필가들 모두가 자신이 느낀, 그리고 자신이 내세우는 가치관에 의해 말씀하겠지만 나는 세 가지를 이야기했었다.
 
1.부모님은 기억력이 안 좋으신 분
부모란 원래 자녀들보다 나이가 많으시기 마련이다. 그래서 늙어서 기억이 없다는 말씀이 아니라 그들은 우리의 모든 잘못된 기억들을 잊었거나 일부러 잊고 계신 분들이란 것이다.
나는 한 장로님의 고해성사와 같은 고백을 듣고 고개를 끄덕인 적 있다. 그는 목사님의 아들로 자라면서 가난한 목회자의 가정이요 성도들의 시선을 받는 자리에 있었기에 뭣에라도 반발하고 싶어 집을 뛰쳐나가 공사장에도 그리고 유치장에도 들락거린 적이 있었다. 그럴 때 부모님의 심정은 어떠했겠나?
괜히 미안하고 죄책감을 느끼셨지 않았겠나? 세월이 지나고 그는 장로가 되었고 과거를 돌이켜 보니 죄송하기 그지없었다.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산책을 하다 물었다. 아버님 제가 속을 많이 썩혔지요? 그때 아버님의 말씀이 네가 그랬냐? 하시는데 눈이 시큰했다. 그런 분이 아버지요 부모님이다. 도대체 그 분들은 자식의 잘못에 대해 기억이 없다.
 
2.투자를 잘 못하시는 분이다.
사람은 평생 돈을 관리한다. 그리고 먹을 것을 사든지 뭔가 사고 팔 때 또는 주식을 사거나 어딘가에 투자할 때는 돈을 남기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부모가 자식을 먹이고 공부 시키시며 특별한 예능교육까지 시키실 때는 엄청난 돈이 든다. 그런데 부모님들은 그런 투자에 대해 자녀들에게서 다시 돈을 회수하거나 이득을 보고자 쓰시는 분들은 없다는 말씀이다. 그냥 자식이 좋다면 좋은 옷에 신발에 장난감이며 먹는 것이나 심지어 여행비 등도 아낌 없이 투자한다. 
그러나 한 푼도 다시 되돌려지는 일이 없으니 어디 그게 적당한 투자가 되겠는가? 그래도 부모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즐거워하지 않는가? 도대체 돈을 관리도 잘 못하셔.
 
3.거짓말을 잘 하시는 분
어쩌면 기억력과 맞물리는 이야기가 될지 모른다. 부모는 자식의 과거를 잊어버리시기에 그런 일이 없다고 거짓말도 하시고 또는 배 고프던 시절 자식의 입에 음식 들어가는 모습만 보시고 싶어 당신도 배가 고프시면서도 난 많이 먹었다, 난 아까 실컷 먹었다 하시고 거짓말을 쉽게 하신다. 결코 아프다하시거나 배고프다 힘들다 하시는 말씀을 배우자에게는 하실지 몰라도 자식들에게는 내색을 않고 슬금슬금 거짓말을 하신다.
그런 면에서 우리 어머니도 큰 거짓말장이시다. 때로는 동료되시는 권사님들과 대화를 나누시다 제 이야기가 나오면 우리 아들 아무개는 내 평생에 한 번도 내 가슴을 아프게 한 적이 없다고 하시는 대단한 거짓말을 하신다.
때로는 내가 듣는 옆에서 말씀을 하실 때는 내가 면구스럽다. 사후에 내가 권사가 그런 거짓말을 하시면 안 되지요 하고 책망하면 내가 무슨 거짓말을 했다고 하신다. 그래서 기억력이 없다니깐요.
그런데 나는 내 자녀들에게 어떨까? 나는 기억력도 좋다. 그리고 나는 투자의 귀재가 되려하지 않나? 그리고 난 거짓말을 않으려 한다. 내가 진짜 부모가 맞을까?

< 김경진 - 토론토 빌라델비아 장로교회 담임목사 >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요즘 답답하고 안타깝고 분통터져 하는 한국과 한국인들이 진작 음미하고 새겼어야 할 금언일 것 같다. 더구나 사람들의 실망과 충격은 상식의 초월 범위가 커질수록 심각한 법이다. 세월호 참사로 인한 답답하고 안타깝고 생각할수록 치밀어 오르는 분통이, 어찌보면 ‘자신을 잘 몰랐던 데서 오는’ 착각과 주제넘은 오만의 허상 탓에 더욱 증폭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번 기회에 자신의 위치와 수준과 격(格)과 속성을 깨달아 ‘나 자신을 아는’ 전화위복의 호기로 삼는다면, 그나마 희생자들의 넋이라도 위로가 될지 모르겠다. 
이명박 정권 즈음부터 부쩍 거론되기 시작한 단어가 소위 ‘국격’이었다. 대한민국이 세계 10위권을 넘보는 경제대국이라는 것, 전쟁의 참화에서 반세기여 만에 남의 나라를 돕는 부국이 되었다는 것, 짧은 기간에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민주 모범국 이라는 것, 선진20개국(G20) 정상회담의 의장국을 맡을 정도로 선국지도국 반열에 올라섰다는 것… 거기에 세계를 주름잡는 스마트폰에 자동차에 조선강국에, 한류가 지구촌을 휩쓸게 된 나라-, 대한민국은 이제 잘 사는 선진부국으로 당당히 세계 어디에나 내놓을 수 있고 인정도 받는 ‘고수준 국격’의 가슴 뿌듯한 나라였다.
 
그런데 허망하게도, 세월호 침몰 참사와 그 이후는 그런 ‘국격’의 허상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말았다. 자부와 자만이 얼마나 헛된 것이었는지, 사상누각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린 것처럼, 한국의 초라한 치부와 총제적 부실의 현주소가 우리들 스스로에게는 물론 세계 구석구석까지 순식간에 전파된 것이다.
국제사회 주요 외신들은 ‘후진국형 사건’ ‘부실대처’ ‘무능정부’라는 말로 비꼬며 연일 대서특필하고 있다. 5백명 가까운 승객을 태운 대형 여객선이, 먼 바다나 악천후도 아닌데 갑자기 침몰한 것도 의아하거니와, 선장과 선원들이 생명구조는 나 몰라라 하고 맨 먼저 탈출해 버린 희대의 무책임성도 토픽감이 됐다. 말로는 구조를 외치면서 허둥대다 결국은 시신만을 하나 둘씩 건져내고 있는 현장의 탄식과, 대통령에 총리가 나서 큰 소리 치고도 야유나 받는 정부의 난맥과 무능, 거기에 참다못해 청와대에 읍소하겠다는데 진압병력으로 가로막고 채증에 나선 경찰까지, 진짜 ‘전쟁이 터졌다면’ 어찌될지 아찔하기만 한, 총체적인 후진과 불신의 속살이 낱낱이 드러났다.
“그동안 구조작업한다고 했는데 이제는 믿을 수 없어서 직접 나왔습니다. 당신들은 누구를 위한 정치를 하고 있는 건가요. 1분 1초가 아깝다던 대통령은 어디 갔나요. 나도 지치고 힘들고 이러는 모습 보여 창피합니다. 그런데 이 나라 국민이라는 게 창피합니다. 부모로서 아무것도 못 해줘서 창피합니다. 이 사회를 움직이는 어른들이 창피합니다.” 어느 실종자 가족은 경찰벽 앞에서 그렇게 울부짖었다.
 
참사 이후 SNS에 회자되며 우리에게 스스로의 참 모습을 깨닫게 해주는 그런 자조의 질책들은 끝없이 쏟아지고 있다.
“승객에게는 선실이 안전하다면서 도망간 선장에게 누가 돌을 던지랴, 6.25 때 국민들에게 안심하래놓고 서울을 몰래 빠져나가 한강다리를 폭파했던 이승만도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세상인데…” “천안함 침몰로 46명의 병사가 죽었는데도 책임져야 할 함장이며 지휘책임자들이 처벌은커녕 승진을 거듭하며 당당히 살고있지 않는가” “민주선거를 짓밟은 댓글 공작, 대화록 불법유출, 간첩사건 조작 등 국기문란의 책임자들도 꼬리자르기로 면피하고, 모르쇠 대통령은 감싸기만 하는데…” 
지도자들이 책임은 피하면서 말만 앞세워 국민을 속이고 강압을 일삼는 현실, 사회전반의 도덕적 해이와 권모술수의 풍토가 이번 참사에 오버랩 되어 국민적 성토로 나타난 것이다. 이같은 권력에 대한 불신에 더해 그들에 장악되고 영합하며 실상을 외면하는 언론에 대한 반감 또한 극명하게 표출됐다. 오죽하면 실종자 가족들이 “방송카메라를 내려놓고 자원봉사자들 뒷바라지나 하라”고 기자들을 힐난하면서 BBC·CNN이나 중국 언론 인터뷰에 기꺼이 나선다니, 불신의 도가 그야말로 하늘을 찌르는, ‘한국호의 침몰’ ‘언론의 침몰’ 자화상이다.
 
불신이 불신을 부르고 적대화 하는 사회는 글자 그대로 사상누각이다. 언제 무너질지, 폭발할지 알 수 없다. 선진국에 진입했다고 믿는 이 시절까지도 우리가 외화내빈(外華內貧)의 늪을 헤어나지 못한다는 이 현실은 정말 참담한 일이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이며 고난은 축복이라고 했다. 우리 모두가 그동안 잊고 지낸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꺼내놓고, 깊이 되씹어야 한다. 국민적인 각성 위에 무엇보다 지도자들의 참회와 솔선이 화급하다. 뼈를 깎는 분발로 하나씩 바로잡고, 원칙과 정의를 세워나간다면 우리의 저력은 다시 빛을 발하리라 믿고 싶다.
 
< 김종천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