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다. 참 많이 슬프다. 80년 5.18 때는 분노가 컸지만, 이번에는 슬픔이 분노보다 크다.
세월호 사고의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데 살릴 수도 있었을 수많은 어린 목숨을 결과적으로 바다에 수장시킨 이 정부의 대처 과정에 대한 의혹이 가중되면서 그 실상도 하나씩 드러나고 있다. 조난 및 구조 과정에 대한 정보는 통제되고 있고, 희생자들의 항의는 경찰력에 의해 봉쇄되고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배는 이미 바닥 틈으로 물이 들어와 서서히 침몰하는 중이었다. 스며드는 물에 의해 매년 1만6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비자연적인 이유로 소리 없이 죽어가고 있지만, 이번처럼 외부의 충격을 받아 배에 작은 구멍이라도 나면 선실 바닥 사람들 수십, 수백명이 한꺼번에 죽기도 한다.
대한민국호의 바닥 틈은 옛날에 생긴 것도 있고, 더러는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만든 것들이다. 그러나 가장 큰 틈은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만들었다. 이 두 정부는 김·노 정부가 틀어막으려 했던 틈을 더 크게 벌려 놓았다. 사고 배에서 탈출한 선장 1호는 이승만이다. 그때 선장과 선원들은 모두 국민들에게 배를 지키자고 거짓말을 한 다음 자신들은 탈출했다. 미국이 우리 배를 구제했다고 주장하면서 책임을 지기는커녕 공을 강조하던 그는 자애로운 아버지 이미지로 연기를 하다가 결국 국민들에 의해 쫓겨났다.
 
이· 박 정부의 핵심 국가기관, 금융기관, 권력자들은 무수한 범법 행위를 했다. 이 모든 범죄의 윗선은 거의 하나도 밝혀지지 않았고 제대로 처벌된 사람도 없다. 이 두 정부의 최고위층 상당수는 거의 크고 작은 범법 이력을 가진 자들로 채워졌고, 공직에 있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재력가들이다. 이 두 정부는 김·노 정부에서 만들어놓은 각종 안보, 재난관리 대책, 중요 국가 정보를 거의 쓰레기통에 처박아 넣거나 필요할 때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해당 분야에 아무리 높은 전문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도 자기편이 아니면 갈아치웠다. 특히 박근혜 정부는 소신을 갖고서 국정원 범죄를 수사하던 검찰 총수를 핵심 국가기관을 거의 총동원하여 찍어낸 혐의가 있다. 국가의 윗자리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람만으로 채웠고, 기업의 아랫자리는 모두 1·2년 계약의 비정규직으로 채웠다. 이·박 정부는 기업범죄는 범죄가 아니라는 신호를 확실히 주고 있기 때문에 기업가들은 사람의 생명과 안전은 안중에 두지 않는다. 소신과 전문성 대신에 오직 충성만이 중요한 세상에서 의인은 사라졌고 아마추어들이 판쳤으며, 국민의 안전을 돌보아야 할 공직자들은 오직 위만 쳐다볼 뿐 2·3등칸 국민들을 관심 밖으로 돌렸다. 혹 몇 사람이 배의 바닥에서 물이 들어온다고 소리지르면 경찰과 검찰이 ‘종북파’라고 겁박을 한다.
 
선상 ‘극장’에서는 파티가 열렸고, 언론은 ‘행정안전’을 ‘안전행정’으로 바꾸었다는 식의 그들의 그럴듯한 말과 연출된 행동만 비췄다. 선상 무대의 주역들은 개인용 구명보트로 탈출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것을 본 대한민국호의 말단 선원들은 자기 일에 대한 자긍심, 직업의식과 책임감을 헌신짝처럼 버렸다.
권력자들이나 대기업의 범죄가 단죄되지 않고, 국민들이 그것에 항의할 수 없는 사회에서 관료조직은 억압기구에 불과하고, 국민의 주권은 상실된 상태이며, 사회는 이미 파괴되었다. 이번 사고에서 도망간 선장·선원은 윗사람들을 보고 따라한 사람일 따름이고 기업이 그들을 대우해준 대로 행동했다. 사회가 파괴되면 작은 사고도 대참사가 되고, 대참사의 희생자들은 주로 선실 바닥의 사람들이다.
그러니 이 배의 본격적인 침몰은 이제부터다.

<김동춘 - 성공회대 사회학부 교수>


[사설] 시스템은 없고 질타만 있다

● 칼럼 2014. 4. 27. 12:29 Posted by SisaHan
박근혜 대통령이 21일 세월호 선장과 일부 승무원의 승객 구조 방기 행태를 ‘살인과도 같은 행위’라고 질타했다. “강력히 책임을 묻겠다”며 공무원들도 질책했다. 대통령의 강경한 발언은 전반적으로 질책과 처벌에 방점이 찍혀 있다. 그런데 왠지 공허하다. 뭔가 초점이 맞지 않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번에 침몰한 것은 세월호만이 아니다. 정부의 재난구호 시스템과 위기관리 능력에도 구멍이 숭숭 뚫렸다. 초동대처는 미흡했고 부처들 간에 협업은 이뤄지지 않았으며, 재난대응 매뉴얼들은 결정적 순간에 멈춰버렸다. 정부는 일사불란해야 할 때 허둥대고 일목요연해야 할 때 오락가락했다. 이 점에서 청와대도 결코 예외일 수 없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남 얘기 하듯 선장 욕하고 공무원 질책하기에 바쁘다.
 
박 대통령은 ‘강력한 재난대응 컨트롤타워’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정부의 위기대응시스템과 초동대처에 대해 반성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먼저 반성해야 할 곳은 다름 아닌 청와대다. ‘재난관리 업무 일원화를 위한 통합시스템 구축’은 박 대통령의 공약이었고, 이는 취임 뒤 안전행정부 산하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가 컨트롤타워를 맡는 것으로 구체화됐다. 하지만 요즘 날마다 목도하고 있는 바대로 이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대통령이 시급히 해야 할 일은 비판과 질책이 아니라 이 시스템을 수리하는 일일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안보 외에 재난사태 위기관리 사령탑 기능도 지니고 있었다. 그때 청와대 지하 벙커에 설치된 첨단 상황실에는 주요 정부기관으로부터 실시간으로 전송되는 재난 현장의 상황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자상황판이 돌아갔다. 재난에 대한 신속하고 체계적인 대처가 가능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의 ‘참여정부 흔적 지우기’로 이 기능은 없어지고 말았고, 박근혜 정부 들어서도 복원되지 않고 있다. 청와대 안에 이런 시스템이 있었다면 ‘천금 같은 93분’이 속수무책으로 허비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상상해보는 것은 비약일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박 대통령의 강성 발언이 지지율 관리엔 득이 될지 모르나 상황 수습엔 얼마나 도움이 될지 의문이다. 선장•승무원을 욕하는 것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다. 대통령이 ‘강력한 처벌’을 거론하며 현장 구석구석 깨알 같은 문제들을 지적하는 데 몰두하면 공무원들은 대통령의 입만 바라보고 움츠러든다. 당연히 사고 수습이나 대책 마련의 효율성도 떨어진다. 관료사회에선 오히려 책임질 일은 회피하고 책임질 필요가 없는 일만 하려 드는 ‘복지부동의 논리’가 작동할 수밖에 없다. 일부 관료들이 국민 정서나 상식과 동떨어진 행태를 보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사설] 우리를 슬프게 하는 자들

● 칼럼 2014. 4. 27. 12:29 Posted by SisaHan
어떤 공동체의 수준을 알려면, 그 공동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 구성원들의 언행을 보면 된다. 구성원들이 저열하게 행동하면 그 공동체는 저열한 공동체일 것이고, 구성원들이 연대와 절제, 품위를 유지한다면 그 공동체는 필경 훌륭한 공동체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세월호 여객선 대참사라는 전대미문의 충격에 휩싸여 있는 우리 사회는 지금 그 수준을 시험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불행한 것은 우리 사회가 정신적으로 큰 병에 든 것이 아닌가 하는 징후가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 및 가족과 아픔을 나누기는커녕 그들을 모멸하고 이용하는 ‘참 나쁜 사람들’의 존재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를 비롯한 몇몇 인터넷 동호인 사이트에 올라온 글들이다. 일베와 디시인사이드 ‘국내야구갤러리’에는 사망자 가족을 ‘유족충’이라고 비하하는 글들이 다수 올라와 있다고 한다. 일베에는 이준석 세월호 선장과 선사인 청해진해운을 “전라도인, 전라도 회사”라며 지역감정을 유발하는 허위 글까지 출현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선장은 부산 출신이고, 청해진해운의 본사는 인천에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저열함을 욕하기에 앞서 그런 자들을 낳은 우리 사회의 수준이 부끄러울 뿐이다.
 
그뿐만 아니다. 일부 모리배는 ‘여객선(세월호) 침몰 사고 구조현황 동영상’이라는 글과 함께 인터넷 주소를 올려놓고, 여기에 접속하는 사람의 개인정보를 빼가고 있다고 한다. 구호를 빙자한 사기모금의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그 뿐이 아니다. ‘제2의 5.18을 경계 하라’느니, ‘미개한 국민’ 운운에, 정부 무능을 지적하는 시민들을 ‘북괴에 놀아나는 좌파’라며 종북 낙인찍기 상투숫법이 또 등장해 분노를 자아낸다. 
정치권은 어떤가. 새누리당의 한 시장 후보는 당 차원의 금주령이 내려진 가운데 청년당원들과 ‘폭탄주 술자리’를 한 사실이 드러났다. 군 출신의 새누리당 최고위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참에 좌파를 발본색원해야 한다는 요지의 글을 올렸다 비난이 쏟아지자 내렸다.
모두들 제정신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제발 제 얼굴에 침 뱉는 짓은 그만두자.


[한마당] 메이플라워와 한인사회

● 칼럼 2014. 4. 21. 19:19 Posted by SisaHan
미국의 건국 연원은 잘 알려진 것처럼 101명의 영국 이민자들이었다.
대영제국의 권력 전횡과 부패, 종교적 타락에 염증을 느낀 일단의 청교도 그룹은 1620년 일생일대의 결단으로 새 세상을 찾아 떠난다. 
당시 아메리카 신대륙 버지니아에 도착한 메이플라워호의 101명 외에 다른 한척의 배는 남아메리카로 향했다고 한다. 그런데 버지니아에 내린 사람들은 ‘하나님만 믿으면 된다“고 믿는 그야말로 순수한 신앙인들이었던 반면, 남미를 향한 사람들은 ”하나님도 중요하지만 금 은 보화도 필요하다“는 물질주의에 경도된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들을 태운 두 척의 배가 서로 다른 땅에 도착한 뒤 4백년이 흐른 지금, 두 배의 당시 이민자들은 후손들이 사는 모습과 환경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 상상이 가능하다.
 
하나님만 의지한 버지니아의 이민자들은 자신들의 집을 짓기 전에 하나님의 집, 즉 교회를 먼저 짓고 예배를 드린 뒤 삶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들은 전제군주의 권력횡포와 부정부패, 오염된 종교의 사슬을 끊고 인간다운 삶의 새 사대를 열어 가면서 이웃사촌으로 대화와 토론, 논쟁과 협의, 그리고 조정을 거쳐 합의안을 만들고 힘을 모아 외침에 투쟁하며 나라를 건설했다. 조지 워싱턴을 첫 대통령으로 뽑은 당시의 인구는 고작 4백만 명이었다고 한다. 그 소국이 모국인 영국을 제치고 지금 세계를 주름잡는 민주주의 대국, 미국으로 성장했다. 
오늘날 미국이 신앙의 힘으로 강대국이 됐다는 종교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미국을 세운 첫 이민자들의 철저한 각오과 실천의 힘- 바로 그 청교도 정신이 후손에게 남긴 유산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다. 자신들이 피부로 겪은 모국의 부정과 불의를 자계하고 냉철하게 배제한 새 삶과 새 세상을 개척해 나가면서 그들은 신앙에서 비롯된 정신적 무장과 경험적 교훈을 한시도 잊지 않았음을 본다. 
미국의 사례를 들어 이민자 된 우리네 형편을 대비하고 논하는 것은 무리요 비약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통분모가 없지않다는 관점에서, 한번 성찰의 대상으로 삼아볼만 하다는 생각도 든다.
 
무슨 사연이 있든 모국을 떠나 이민의 삶을 택한 기저에는 채워지지 않은, 또는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있었기에 현실을 벗어난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이민 땅이 한국보다는 앞선 나라인 캐나다인 점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우리는 캐나다에서 일군 새 삶에서 지난 날의 부족과 불만들을 변화시킨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일까. 영국의 이민자들이 황무지에 모국을 능가하는 대국을 일궜다는 데, 우리는 뒤진 나라에서 앞선 나라로 옮겼으니 그 몇 배 나름의 ‘유토피아’를 만들었어야 하지 않은가. 정신적으로 든 물질적으로 든, 모든 면에서 옛 시절을 능가하는-.
안타깝게도 반세기를 맞았다는 10수만의 우리에겐 ‘아직’ 그런 자긍심을 찾을 수 없는 것 같다. 아니 모국을 능가하기는커녕 더욱 추종하고 흉내 내고, 때론 못된 짓도 감싸기에 바쁜 잘못된 모국사랑에만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살펴보면 민망한 모습을 도처에서 본다. 
이 곳에서도 우리들 신앙심은 깊어 교회와 사찰은 수두룩하지만, 일제치하 자주 독립정신을 심었고 국난에 분연히 일어섰던 의로움의 기백은 찾아볼 수가 없다. 모국의 세속화된 현실만을 뒤따르는 것일까.
 
국민을 섬겨야 할 공무원이 대접받고 군림하려는 구태와, 또 그들을 맴돌며 은덕을 바라는 일부 인사들의 비윗살이 보는 이들을 거북하게 만든다. 관존민비의 ‘전통’이 이민 땅에 기생하는 걸까. 
단체마다 다툼과 말썽이 끊이지 않는다. 사색당쟁에 익숙해진, 그래서 서로 파탄나고 만 속성이 살아있는 걸까. 
갈수록 뒷걸음치고 있는 권력의 오만과 일탈, 역사왜곡을 나무라는 소리는 작아지고, 오히려 두둔하고 대변하는 이들이 큰 소리 치는 이상한 현상이 판친다. 친일의 후예들, 독재의 혜택을 입은 사람들이 이민을 많이 온 것일까. 
잡은 자, 쥔 자들 그들만의 동아리에서 해치우면 오케이, 한탕 지나가면 그만이라는 방자함은 저쪽과 이쪽이 너무도 닮은 꼴이다. 다수권력의 논리가 철칙이 되고 온갖 매체가 한 패거리 한 목소리로 찬양나팔을 불면서, 반대이론에는 눈감기나 종북몰이 둘 중 하나인-.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최근 한 신문사 출신들이 중심이 돼 만들어낸 이민사 작업에서도 얼핏 그런 자태가 보인다. 측근 둘러세워 해치우기에 제머리 깎기, 그리고 자화자찬의 평가까지가 엇비슷하다.
 
다시 메이플라워호의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모국을 과감히 떨쳐냈고, 모국의 불의에 과감히 대적했고, 마침내 능가해 이제 훈수를 두는 그들 이민 대선배들 처럼 왜 우리는 될 수 없는 것일까. 우리네 후손들은 조상을 뭐라고 평할까. 이민 유입이 줄면서 주변에선 “불황에 큰일” 이라는 아우성이 들린다. 어찌 우리는 모국을 떨쳐내고 훈계하고, 능가하지 못하는가. 그저 모국만 쳐다보고 꽁무니만 쫒는다는 이야기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 김종천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