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자식 잃은 이들이 무너지지 않도록 보살펴야

● 칼럼 2014. 5. 20. 16:43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비극은 절망을 낳고 그 절망이 다시 비극을 낳고 있다. 요 며칠 새 세월호 참사로 아들을 잃은 어머니와 딸을 잃은 아버지가 슬픔을 못 이기고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일이 벌어졌다. 자식을 먼저 보낸 아픔은 좀체 멈출 줄을 모른다. 적절한 심리치유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무기력과 허탈로 삶의 의욕을 잃고, 모든 것을 포기하는 태도가 계속될 수 있다. 그런 삶은 언제 어디서 끊어질지 모른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세월호 침몰은 자식과 함께 그 부모까지 데려가게 될 판이다.
 
무엇보다도 부모의 상처 난 가슴에 소금을 뿌리는 짓부터 멈춰야 한다. 페이스북에 유가족을 비난하는 글을 올린 한 사립대 교수나 박승춘 국가보훈처장 같은 망언은 더이상 없어야 한다. 또 해경이 나서서 피해 가족들에게 사고 상황을 설명하는 일도 중단해야 한다. 검찰 수사 내용을 보면, 이제 해경은 구조자가 아니라 아이들의 죽음을 방치한 범인으로 바뀌고 있다. 부모들에게 더는 치욕을 안겨서는 안 된다.
현재 피해 가족에 대한 정신건강 상담과 치료는 안산 정신건강트라우마센터가 맡고 있다. 지금까지 213가구를 찾았지만 상담에 응한 건 110가구뿐이라고 한다. 부모들의 마음이 상담조차 받을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내린 것이다. 사고를 겪으며 느낀 공포, 분노, 슬픔 등의 충격적인 감정들은 표현돼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무조건 억눌린 감정을 드러내도록 유도하는 것 또한 매우 위험하다. 미국에서 9.11테러 뒤 심리치료 결과를 추적조사한 경험이다. 그러니 매뉴얼대로 부모를 상담할 게 아니라, 치유적 차원에서의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심리치유 전문가 정혜신씨는 “집이라도 치워주고 밥이라도 챙겨주면서 이미 깨져버린 일상을 더이상 깨지지 않도록 받쳐주는 일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귀담아들어야 할 대목이다.
 
상처받은 이들이 절망의 늪에서 벗어나 보호받고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사회적 연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세월호 참사로 자식을 잃은 부모에겐 우리 사회가 그 아이를 영원히 기억할 거라는 믿음이 생을 지탱하는 힘이 될 것이다. 정혜신씨는 숨진 아이의 친구들이 아이에 대한 기억과 함께했던 느낌을 편지로 써서 숨진 친구의 부모에게 보내는 운동을 하자고 제안한다. 이런 편지가 부모들에게 최소 10년은 배달되면 좋겠다고도 했다. 어린아이들에게만 맡길 일은 아니다. 이 비극에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리본이든 엽서든 아니 그저 종이쪼가리에라도, 절대 아이를 잊지 않겠다는 표지를 계속해서 남겨야 할 것이다.


[칼럼] 슬퍼해야 한다

● 칼럼 2014. 5. 20. 16:42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내 자식이, 부모형제가 눈앞에서 죽었다. 처음엔 분명히 살아 있었다. 살릴 기회가 충분했다. 하지만 단 한명도 살리지 못했다. 그렇게 300여명이 학살당하듯 수장되는 현장을 수천만명이 느린 화면으로 지켜봤다. 희생자 대부분은 열일곱 꽃봉오리들이었다. 어떻게 잊나. 사고 한달여 만에야 검찰은 ‘해경이 즉각 진입했으면 다 살릴 수 있었다’고 결론 내렸다. 그걸 이제 아나.
세월호 참사에서 사람들 무릎을 꺾은 치명적인 2차 트라우마는 정부의 무책임하고 무능한 대응과 거기에 장단 맞춘 언론의 부도덕함이었다. 내가 눈앞에서 지켜봤고 확인한 사실을 그들은 아니라고 도리질했다. 내가 지각한 사실과 상반된 정보가 계속 입력되면 현재감각에 문제가 생긴다. 내가 이상한 건가, 혼란스럽다. ‘당신 눈을 믿으면 되나. 정부 발표를 믿어야지.’ 그렇게 정부와 언론은 합작해서 겁박하듯 타이르듯 사람들의 분노와 절규를 외면했다. 그 결과 세월호 트라우마는 더 지독해졌다.
 
세월호 주인이 대통령도 아닌데 왜 정부 탓만 하느냐, 유족이 무슨 벼슬도 아닌데 이렇게 생난리를 쳐도 되느냐고 게거품을 무는 작자들까지 생겼다. 생난리를 친 것도 없지만, 미친 질문에 한번만 정상적으로 대답해준다. 그래도 된다. 그런 때 그런 슬픔과 고통을 충분히 받아주라고 공동체가 있고 국가가 존재하는 것이다.
자식이 눈앞에서 학살당하듯 죽었다. 그런 상황에서 부모로서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 생각하면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지옥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사회라면 무엇보다 먼저 유족을 배려하는 게 옳다. 하지만 정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수재민이나 사회불만세력 정도로 치부했다. 난민수용소 같은 체육관에 방치했고 대통령 면담하러 온 유족들을 경계하며 물대포부터 준비했다. 대통령은 머리를 틀어올리는 중이었어도 아이들 영정을 품에 안은 유족들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산발한 채로라도 달려나와 손잡았어야 했다. 대신 경찰은 학익진 대형으로 유족들을 거리에 가뒀다.
 
자식 잃은 부모들은 이제 아이들과 돼지갈비를 먹으러 갈 수도, 목욕탕을 갈 수도, 용돈을 줄 수도 없다. 다 사라졌다. 그 일상으로 못 돌아간다. 오전에 아이의 사망신고를 한 부모가 오후에 찾아와 ‘내가 미쳤나 보다. 너무 빨리 했다’고 통곡하며 사망신고를 취소해 달라고 한다. 한 엄마는 ‘없는 집에 너같이 예쁜 애를 태어나게 해서 미안해. 엄마가 지옥 갈게 딸은 천국에 가’ 피울음을 토한다.
그런 이들에게 언제까지 슬퍼만 할 수 없지 않으냐며 경제도 위축되었으니 빨리 털고 위기를 극복하자고 말하는 건 미친 짓이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사람 앞에서 유산배분을 논하는 꼴이다. 수백명의 주검이 묻혀 있는 땅 위에 놀이동산 짓는다고 밝은 사회 오지 않는다. 그렇게 잊혀질 일이 아니다. 지금은 더 슬퍼해야 한다. 정상적인 애도의 과정이다. 어느 시인은 울음의 끝에 슬픔이 무너지고 길이 보인다고 했다. 유족들의 슬픔에 합일할 수 있어야 우리가 내놓는 해법은 정확해진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세월호 침몰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다. 세월호 트라우마의 파괴력이 그런 정도다. 이제 우리는 세월호 침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걸 인정하고 그다음에 무얼 할 수 있는지 찾아야 한다. 업보처럼 견뎌내야 한다.
하지만 지금 무엇보다 먼저여야 할 것은 애도다. 아이들이 컴컴하고 차가운 바닷속에서 꽃송이로 훨훨 날아올라야 한다. 남아 있는 사람들 마음속에 그런 느낌이 있어야 한다. 모든 새출발에 대한 논의는 그다음부터다. 거기서 시작돼야 한다.
< 이명수 - 심리기획자 >


[1500자 칼럼] 오월에는

● 칼럼 2014. 5. 10. 16:24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봄비 내리는 토요일 오후, 손녀 서현이와 데이트를 계획한다. 아니 계획이라기보다 불현듯 스친 생각이다. 세 살짜리 아이의 버릇을 바로잡기 위해 회초리를 들었다는 아들 마음이 안쓰럽고, 시시때때 그 앞에서 자지러질 아이를 떠 올리니 마음이 아려서 한 역할 하고 싶었던 게다. 여든 넘도록 성품 좋은 사람이 되려면 이 시기에 꼭 필요한 교육이지만 나에겐 일련의 과정들이 아픔으로 다가온다. 
데이트 장소는 아이가 좋아하는 장난감 가게로 정했다. 호기심에 빠진 아이의 발걸음에 보조를 맞출 수 있을 지 의문이지만 꿈의 궁전을 원 없이 돌다보면 부녀의 신경전이 조금이라도 느슨해 지지 않을까. 이제 겨우 세 번째 봄을 맞는 새싹과 함께 데이트 할 생각하니 고목에 초록물이 드는 것 같다. 
아이를 카시트에 앉히고 옆자리에 좌정했다. 뽀송하고 보드라운 손을 입술에 갖다 대니 녀석은 나 보다 더 어른스런 미소를 짓는다.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란 윌리엄 워즈 워드의 무지개가 그 얼굴에 걸린 듯하다.
 
‘할머니 집 말고 장난감 가게 가는 거지요?’ 아이는 다짐하듯 묻는다. 아뿔싸.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할머니 집 외출이 최고였는데 요즘은 인기가 시들해졌다. 덩달아 할머니 시세도 예전만 못함을 실감한다. 풍요의 시대, 전자기기가 만연한 시대에서 커가는 아이에게 반대 여건을 고집했더니 이제 먹히지 않는 시기가 된 모양이다. 지금 아이가 기억하는 할머니 집은 아마도 고장 난 텔레비전에 몇 안 되는 장난감과 내용을 달달 외우는 동화책 몇 권만이 있는 곳 일 게다. 부엌의 싱크대며 수납장, 화장대, 등 아이가 탐냈던 곳은 아낌없이 개방했고 숨바꼭질이며 춤, 노래까지 몸 개그도 불사했건만……. 무정한 녀석이다. 예전의 인기를 회복하려면 절충안을 고려해야 할 지 말지 고민을 해야 할 것 같다. 차가 쇼핑몰로 진입하자 아이는 ‘여기 아니고 저기!’ 하며 눈에 익은 곳을 손짓하며 조바심을 낸다. 
남편과 나는 카트를 밀기보다 아이의 양손을 하나씩 잡고 매장으로 들어섰다. 부모와 함께 오면 으레 그러는 듯, 두어 번 스윙을 해 달래더니 걸음을 멈춘다. ‘하버지는 요렇게 할머니 손잡아요.’ 아이는 남편과 나의 손을 엮어주고 옆으로 빠져나와 내 손을 잡는다. 그리곤 자유로운 한 손으로 장난감을 짚어가며 영상속의 캐릭터와 조잘거린다. 아이답지 않은 기특한 생각을 한다했더니 나름대로 속셈이 있었던 거다.
 
눈높이 데이트는 의외로 재미있었다. 아직 뭔가를 가지고 싶은 욕망이 적은 연령대라 품에 안는 것 보다 보는 걸 더 좋아했다. 아이가 이끄는 대로 다니며 보아주고 태워주다 보니 함께 즐기는 시간이 되었다. 특히 사내아이만 둘 키운 나는, 무기고 같은 장난감 코너가 삭막하게 각인되어 있는데 비해 여아들의 코너는 아기자기 하면서도 이야기가 있는 공간이어서 다채로웠다. 아이는 과자 한 봉지, 우리는 공주님 드레스와 장난감 노트북과 알파벳 블록 쌓기 한 통을 골라서 차에 올랐다. 
손수 고른 과자 봉지를 안고 흡족한 표정으로 사각거리는 아이의 얼굴은 바로 천사의 모습이다. 밝고 맑은 순수함의 대명사, 저 얼굴을 위해 어른인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아야 하는가. 여객선 참사 이후 묵직하게 누르고 있던 돌덩이가 비로소 흔들리기 시작한다. 자식들 위해 나선 길이지만 오히려 위안을 받는 시간이 되었다. 
 
비통함 속에 어이없이 보낸 사월의 아이들은 가슴에 묻고 오월에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 실추된 우리의 모습을 세우기 위해 그리고 저 어린 새싹들을 위해.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등단 >


[한마당] 우리는 책임이 없는가

● 칼럼 2014. 5. 10. 16:22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세월호가 산 생명 300여명을 가둔 채 바다로 잠긴 충격 이후 3주가 지났다. 밤낮으로 홍수를 이루는 참사 이후의 소식들은 마치 진흙탕에서 실타래가 풀려나오듯 하나씩 밝혀지는 사실마다 국내외에 너무 큰 수치와 절망과 슬픔을 안겨주고 있다. “그래도 자부심을 갖고 살아왔는데, 설마 이 정도밖에 안되었던가….”
소중한 인명을 속수무책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죄책감에, 너무도 무능하고, 비인간적이고, 무책임한 모습들, 뿌리깊은 부패와 부정의 먹이사슬에 얽힌 치부가 낱낱이 드러나면서 부끄러운 자화상을 똑똑히 보게 된 참담함이다.
 
온통 불신과 적의로 가득 차 곳곳에서 분노의 함성이 터지면서 당연히 참사를 부른 장본인들과 사후 처리 책임자들이 몰매의 대상으로 떠오른 것은 어쩔 수 없다. 선장과 선원들과 선사, 해경과 언딘이라는 구난업체, 정부 관료들과 대통령 등 줄줄이 질타와 한풀이의 제단에 올라있다. 참사와 구난의 직접 책임이 있으니 어차피 과녁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배는 선장의 책임하에 운항하고, 해난구조는 해경에게 맡겨진 책무이며,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 할 정부는 대통령이 최종 책임자이기 때문이다. 선장을 잘 못 만나면 승객은 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다. 원래 지도자가 어리석고 무책임하면 구성원들이 고생을 하고 자칫 목숨도 위태로워지는 것은 세상의 이치다. 임금과 지도자의 무능으로 백성이 고초를 겪은 사례는 우리 역사에도 수없이 기록돼 있다. 죄없는 민초들은 시달리고 죽어가며 원망조차 제대로 못했다. 근대에만 해도 나라를 빼앗기고 학살당한 동학 농민들의 원혼, 일제 식민치하의 핍박과 설움, 6.25 당시 이승만의 철면피한 행보로 죽어간 양민들, 박정희의 철권통치로 스러져간 민주인사들, 전두환의 5.18 만행 등… 그런 기억들이 되살아 나면서 선량한 국민들이 공황상태에 빠져 울분들을 쏟아내는 것이다.
 
그러면, 왕조시대도 아닌 이 시점에 일어난 세월호 참극도 과연 그들 지도자의 책임이요 직접 당사자들만의 ‘죄악’으로 가름하고 말 일인가. 참사의 뒤안길 연원을 파헤칠 때마다, 너무도 뿌리깊고 폭넓은 총제적 부실의 복합체임을 부정할 수 없기에, 모두들 이중 트라우마의 늪에서 가슴을 치게 된다. 사실은 알고도 덮어두었던 화농이 터진 것이요, 오래 전부터 잉태된 부실과 부정의 불량산품이라는 사실을 통절히 되새기고 있는 것이다. 아 세월호는 바로 ‘한국호’ 그 자체였구나, 우리 모두가 껍질만 거대한 불량선박에 타고서 위험한 항해를 즐기지 않았던가 하는 자책의 업습이다. 안전대비가 허술해도 그러려니, 과적을 해도 괜찮겠지, 물 새는 것을 모른 체 하고, 악천후에 출항을 해도 제지하거나 하선하지도, 선장을 나무라지도 않고서는 마침내 죽음의 바다에 이르러 다함께 침몰하니 아우성대고 있는 것이구나…, 민주화 되고 풍요로워졌다는 자만에 빠져 귀중한 표를 바람따라 연줄따라 소홀히 행사해 왔다. 때묻은 인물 걸어온 길이 부도덕해도 찍어주고는 뽑은 뒤 감시에도 태만했다. 그들이 세금을 탕진하든 속이고 분탕질을 하든 모른 체, 권력에 취해 거짓 선전과 편가르기와 차별과 갈등을 부추겨도 에라 귀찮다, 나만 편하고 나 혼자 잘살며 내 자식 잘 되면 그만하지 오불관언, 아니 나라고 질소냐, 더불어 편승하며 살아왔다….
이민 땅에서 사는 우리들은 어떤가. 세월호를 보며 한탄만 하면 그만인, ‘한국호’에는 타고있지 않은 국외자들로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인가?

과거 군사독재 시절엔 모국의 잘못을 깨우치며 민주화 운동을 적극 뒷받침한 열정과 애국혼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모국의 폐습을 나무라고 호통치기는커녕 오히려 흉내내고 따라하며 무조건적인 부화뇌동에 급급하지 않는가. 모국의 불의한 모습들이 그대로 재연되고 있는 우리들 아닌가. 근래 국가기관의 선거개입 등 불법적 행태에 대한 비판을 적대시 하고 종북몰이에 영합하는 모습들에서 선진국에 사는 민주시민답지 않은 상식의 침몰과 변질된 애국의 민낯을 본다. 재외국민을 길들이려는 예산지원에 몸달아하며 몇푼 더, 연줄대기에 바쁘고 꼭두각시 노릇 하기에 익숙한 모습들은 세월호로 입증된 민-관 유착고리의 그 것과 다를 바 없다. 피땀 어린 국민의 세금이라고 생각한다면 모국에서 생활고로 자살하는 숱한 생활보호 대상자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충정은 배부른 망상인가. 빛과 소금이라는 본질을 잊은 채 물량주의에 현혹되고 권력을 맴돌며 다툼과 질시를 서슴지 않는 종교계는 모국의 현실과 무엇이 다른가.
 
엄청난 참사에서 이제 지도자는 물론 온 국민이 회개하고 새롭게 태어나야 하듯이, 해외의 디아스포라 한인들도 모국의 비정상과 불의를 방관하고 동조하고, 때론 감싼 책임을 통감하며 참회해야 한다. 조국과 아픔을 함께하며 재도약을 소망한다면, 친정을 거들듯이 조국이 잘못되고 혼탁할 때 매섭게 호통치고 나무라는 것이 ‘참 애국’의 발로임을 명심하고 실천해야 한다.
 
< 김종천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