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14일 만에 대국민 사과를 하면서 국가안전처 신설 등의 대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사과의 형식이나 내용을 보면 사과라는 말을 붙이기조차 민망하다. 예상대로 국민에 대한 직접 사과 대신 국무회의를 통한 간접 사과 방식을 택했다. 미증유의 국가적 대참사에 대해 대통령이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국민 앞에 머리를 조아리면 안 되는가. 죄책감이나 책임의식 등의 단어는 아직도 박 대통령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박 대통령이 사고의 원인을 “과거의 잘못된 적폐” 탓으로 돌린 대목에 이르면 더욱 어안이 벙벙해진다. 박 대통령이 ‘죄송’하다고 말한 것도 실제로는 현 정부의 실책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과거의 적폐를 바로잡지 못해서”라는 이유에서였다. 박 대통령은 ‘내 탓’은커녕 사건의 책임을 철저히 과거 탓으로 돌리고 있는 셈이다.
 
박 대통령에게 묻고 싶다. 눈앞의 배를 뻔히 바라보면서도 제대로 초동대응을 하지 못해 그 많은 아까운 생명을 잃은 것이 과거 적폐 탓인가. 컨트롤타워의 부재로 이 순간까지도 정부가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이 과거 탓인가. 정부가 국정과제 추진상황 평가에서 재난관리체계에 대해 ‘우수’ 판정을 내리고 스스로 대견해한 것은 과거 적폐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박 대통령은 과거 적폐를 말하기 전에 현 정부의 총체적 무능과 무책임에 대해 통렬하게 반성하고 사과했어야 했다. 과거의 적폐를 도려내겠다고 큰소리치기 전에 청와대를 비롯한 현 정부 안에 도사린 적폐부터 도려내겠다고 다짐했어야 옳았다. 박 대통령의 사과에서 아무런 울림이 전해오지 않는 것도 박 대통령의 이런 엉뚱한 현실인식 때문이다.
 
총리실 직속으로 국가안전처를 신설하겠다는 것도 병의 정확한 원인이 나오기 전에 처방전부터 내놓은 격이다. 미국은 9.11 테러 후 초당적 특별조사위원회를 만들어 20개월 동안이나 사건과 관련한 모든 사실관계와 정황, 원인, 대책을 포괄하는 종합보고서를 만들었다. 미국 정부가 마련한 각종 사후대책도 이 위원회에서 내놓은 41가지 권고사항에 기초한 것이었다. 지금 정부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이번 사고의 근인과 원인, 시간대별 조처의 문제점, 부처간 혼선의 원인 등을 광범위하면서도 꼼꼼하게 진단하는 일이다. 
박 대통령은 ‘국가 개조’를 말했으나 이런 식으로 국가 개조는 결코 이뤄지지 않는다. 이런 안이한 현실인식, 책임회피식 미봉책이야말로 청산해야 할 과거 유산이다. 국가 개조가 제대로 시동을 걸려면 우선 국정운영에 임하는 박 대통령 자세부터 일대 변화가 있어야 한다. 바로 ‘대통령의 개조’다. 박 대통령은 이 핵심을 여전히 외면하고 있다.


[칼럼] ‘행복한 십대들의 나라’

● 칼럼 2014. 5. 4. 20:36 Posted by SisaHan
대학원 학생들과 낮은 출산율을 화제로 이야기를 나누다 깜짝 놀란 적이 있다. 한 여학생이 자기도 “아이를 낳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자, 같이 있던 네 명의 여학생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게 아닌가. “끝없이 경쟁을 강요하는 이 교육지옥 속으로 아이들을 떠밀어 넣을 자신이 없다”는 것이 한결같은 이유였다. “십대 시절 행복했던 기억이 별로 없다”는 말도 모두 같았다.
세월호 사고로 희생된 학생들을 보면서 왜 이 대화가 맨 먼저 떠올랐을까. ‘행복했던 기억이 없는 지옥’ 속에서 살다가, 이제 차갑고 어두운 바닷속에서 죽어간 아이들이 너무도 안쓰럽다. 이런 세상을 만들어놓은 우리 어른들의 죄는 도대체 어떻게 혜량할 것인가.
 
세월호 참사로 숨져간 아이들을 진심으로 애도한다면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그 아이들이 소망했으나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삶을 이제부터라도 우리 청소년들이 살도록 해주는 것이다. ‘행복한 십대’를 돌려주는 것이다.
그러려면 우선 ‘교육’부터 바꿔야 한다. 우리 십대들을 가장 불행하게 하는 것이 바로 우리나라의 잘못된 교육이기 때문이다. 본래 교육(education)이란 학생의 잠재력을 ‘밖으로(e-) 끌어내는(duc-)’ 것이다. 사회적 요구를 일방적으로 쑤셔넣는 우리네 교육은 기실 ‘반교육’에 가깝다. 게다가 그 교육의 결과가 사회적 차별의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 반사회적이기까지 하다.
이렇게 반교육적이고 반사회적인 교육풍토 속에서 우리 학생들은 세계에서 가장 불행하고 우울한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다. 획일화된 학습과 평가 시스템 속에서 개성과 창의성을 잃어가고 있고, 우정과 사랑의 감성은 사라지고 경쟁과 대결의 논리만이 지배하는 살벌한 정글 같은 교실에서 절망과 불안을 내면화하고 있다.
 
학생들은 오로지 공부만 하는 ‘학습기계’로 전락하였고, 정규수업 이외에도 학원, 과외, 야자로 이어지는 엄청난 학습노동은 그 시간과 강도에서 인권유린의 수준을 넘어선 지 오래다.
이제 우리 아이들을 모든 어른들이 공모하여 처박아 넣은 이 끔찍한 노예상태에서 해방시켜야 한다. 이제 어른들은 노예감독관 노릇을 그만두어야 한다. 이제 우리 아이들을 행복한 자유인으로 키워야 한다.
우리 아이들도 행복할 권리가 있다. 그들도 다른 나라 아이들처럼 자유롭게 연애도 하고, 맘껏 독서도 하고, 연극이나 영화도 보고, 박물관이나 미술관에도 가고, 방학 때는 여기저기 여행도 다니면서, 그렇게 자신의 고유한 삶을 향유해야 한다. 그렇게 인간적인 품성을 키우고, 시민적인 자질을 높여야 한다. 자신의 개성과 ‘천재’를 발견할 여유를 가져야 한다. 미래가 아무리 장밋빛이라 해도, 삶은 한순간도 ‘유예’될 수 없다.
 
우리 아이들을 행복한 자유인으로 키우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꿈이 아니다. 우리가 사는 이 유라시아 대륙의 반대편에서는 그것이 상식이요 일상이다. 의지만 있으면 우리도 할 수 있다.
저 침몰하는 배 안에서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던 어른들이 우리 아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듯이, 이런 부조리한 교육, 불합리한 세상을 묵인하는 우리들은 어쩌면 이 땅 위에서 매일매일 조금씩 우리 아이들을 죽여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월호의 아이들’이 갈망했을 그런 세상을 이제 우리 어른들이 열어주어야 한다. 이 시대착오적인 노예상태에서 아이들을 해방시켜 그들의 얼굴에 다시 행복한 미소가 피어나도록 해야 한다. “더러운 대한민국. 이렇게 부끄러운 적이 없었다”, “언니, 오빠 두 번 다시 이런 나라에 태어나지 마세요”라는 저 아이들의 분노와 저주의 외침을 또다시 들어선 안 된다.
< 김누리 - 중앙대 교수 독문학 >


[한마당] 내동댕이쳐진 공동체

● 칼럼 2014. 5. 4. 20:33 Posted by SisaHan
한국전쟁 개전 직후 서울시민에게는 결사항전의 메시지를 남겨둔 채 몰래 피난을 떠난 이승만의 일화는 워낙 유명하다.
박명림 교수의 역작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에 피난 과정의 전말이 사뭇 희극적으로 자세하다. 6월27일 서울을 떠나 대구에 합류한 7월9일까지 13일간의 피난 기간에 ‘국가원수’ 이승만은 극소수의 참모, 수행원들만 데리고 사실상 혼자 튀었다. 
이승만은 정부에조차 행선지를 숨긴 채 아직 포탄 한 발 떨어지지 않은 평화로운 삼남 지방을 혼자서 이리저리 도망 다녔다. 
그는 서울이 점령되기도 전에 미국대사관을 통해 일본에 망명정부 수립까지 요청해놓았다. 즉, 일각에서 ‘국부’로 추앙되고 있는 이승만이 이 시기에 한 유일한 일은 인민군 한 명 없는 삼남 지방에서의 가열차고 경이로운 홀로 줄행랑, 이것밖에 없다.
후일 서울로 돌아온 이승만이 자신이 지시한 한강다리 폭파로 인민군 치하에 남아야 했던 서울시민들에게 어떻게 피의 보복을 벌였는지는 잘들 아시리라.
수치심에 떨며 사죄를 해도 모자랄 상황에 오히려 복수의 굿판을 벌였다. 상처받은 공동체의 치유를 위해서는 피를 토하는 사죄가 필요한데, 오히려 적반하장의 선전포고를 통해 상대의 피를 요구했다.
 
이승만이 보여준 이 궁극의 치졸함과 후안무치를 생각하다 보면 한국 사회에서 공동체란, 정의란, 국가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괴로운 질문에 부딪히게 된다. 
한국 사회에서는 이승만처럼 위기의 순간에 공동체를 버리고 정의를 우롱한 자들이 그 후로도 오랫동안 국가권력과 부귀영화를 독점해왔던 탓이다.
세월호 침몰 후의 상황이 더욱 참담하다. 정말로 이게 나라인가 싶다. 평소에는 서로 더 많은 권한을 주장하던 장관, 수석들이 저마다 컨트롤타워가 아니라고 도망치기 바쁘다. 세계 10대 경제대국을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시스템은 힘없고 ‘빽’없는 이들에게 닥친 재난 앞에서 한없이 무능하다. 희생자 구조에 실패한 정부에 국민들이 분노하자, 대통령은 특유의 유체이탈 화법으로 자신이 수장인 정부를 비판하고 있다. 그래도 늦었지만 분향소를 찾았고 국무회의 석상이긴 해도 사과도 했다니. 다행이다.
하지만 막상 그가 이끌고 있는 정부는 국민들의 추모 열기를 축소하는 데 사력을 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유족 사이에 사복경찰을 풀고 분향소 예산과 설치 장소는 최소화하더니 추모의 촛불집회마저 금지했다가 법원에 제동이 걸렸다. 누가 대통령의 진심을 믿겠나? 이 와중에 집권당과 보수세력 일각에서는 좌파의 정부전복작전, 선동꾼 침투, 유족이 미개한 국민, 빨갱이들의 기획 음모, 제2의 5.18 대비 등등 온갖 적반하장, 증오의 언어들이 난무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오랫동안 ‘사고 공화국’이었고, 그 책임을 특정 정치세력 탓으로 돌리기는 어렵다. 
그 비극의 와중에 힘없는 국민들은 비극을 공유하는 정서의 공동체가 되었다. 적어도 과거의 정부와 집권세력은 이 비극의 가상공동체를 위무하는 시늉을 내는 데 최선을 다해왔다. 극복의 대책은 별개로 하더라도 말이다. 이게 한국 사회가 그동안 지켜온 부끄럽고 민망한 최소한의 금도였다. 하지만 현 정부와 보수세력은 아예 적반하장 쪽을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내동댕이쳐진 공동체 앞에서 그들이 최소한의 수치심도 버리고 끊임없이 종북좌파 등 증오의 언어를 호출하는 것은 어쩌면 자신들의 영토와 기득권이라도 보호해야겠다는 탐욕의 발로가 아닐까? 
제발 그러지들 마시라. 애시당초 공동체의 정의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고 해도, 금도는 지켜야 한다. 처연한 봄날이다.
<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


[1500자 칼럼] 부모님의 모습

● 칼럼 2014. 4. 27. 12:34 Posted by SisaHan
이제 곧 가정의 달이 된다. 작년 부모님 주일에 설교하면서 이런 이야기로 시작을 했었다. 부모님이란 어떤 분인가? 하는 말씀을 내 나름대로 설명해보았다. 학자들이나 수필가들 모두가 자신이 느낀, 그리고 자신이 내세우는 가치관에 의해 말씀하겠지만 나는 세 가지를 이야기했었다.
 
1.부모님은 기억력이 안 좋으신 분
부모란 원래 자녀들보다 나이가 많으시기 마련이다. 그래서 늙어서 기억이 없다는 말씀이 아니라 그들은 우리의 모든 잘못된 기억들을 잊었거나 일부러 잊고 계신 분들이란 것이다.
나는 한 장로님의 고해성사와 같은 고백을 듣고 고개를 끄덕인 적 있다. 그는 목사님의 아들로 자라면서 가난한 목회자의 가정이요 성도들의 시선을 받는 자리에 있었기에 뭣에라도 반발하고 싶어 집을 뛰쳐나가 공사장에도 그리고 유치장에도 들락거린 적이 있었다. 그럴 때 부모님의 심정은 어떠했겠나?
괜히 미안하고 죄책감을 느끼셨지 않았겠나? 세월이 지나고 그는 장로가 되었고 과거를 돌이켜 보니 죄송하기 그지없었다.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산책을 하다 물었다. 아버님 제가 속을 많이 썩혔지요? 그때 아버님의 말씀이 네가 그랬냐? 하시는데 눈이 시큰했다. 그런 분이 아버지요 부모님이다. 도대체 그 분들은 자식의 잘못에 대해 기억이 없다.
 
2.투자를 잘 못하시는 분이다.
사람은 평생 돈을 관리한다. 그리고 먹을 것을 사든지 뭔가 사고 팔 때 또는 주식을 사거나 어딘가에 투자할 때는 돈을 남기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부모가 자식을 먹이고 공부 시키시며 특별한 예능교육까지 시키실 때는 엄청난 돈이 든다. 그런데 부모님들은 그런 투자에 대해 자녀들에게서 다시 돈을 회수하거나 이득을 보고자 쓰시는 분들은 없다는 말씀이다. 그냥 자식이 좋다면 좋은 옷에 신발에 장난감이며 먹는 것이나 심지어 여행비 등도 아낌 없이 투자한다. 
그러나 한 푼도 다시 되돌려지는 일이 없으니 어디 그게 적당한 투자가 되겠는가? 그래도 부모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즐거워하지 않는가? 도대체 돈을 관리도 잘 못하셔.
 
3.거짓말을 잘 하시는 분
어쩌면 기억력과 맞물리는 이야기가 될지 모른다. 부모는 자식의 과거를 잊어버리시기에 그런 일이 없다고 거짓말도 하시고 또는 배 고프던 시절 자식의 입에 음식 들어가는 모습만 보시고 싶어 당신도 배가 고프시면서도 난 많이 먹었다, 난 아까 실컷 먹었다 하시고 거짓말을 쉽게 하신다. 결코 아프다하시거나 배고프다 힘들다 하시는 말씀을 배우자에게는 하실지 몰라도 자식들에게는 내색을 않고 슬금슬금 거짓말을 하신다.
그런 면에서 우리 어머니도 큰 거짓말장이시다. 때로는 동료되시는 권사님들과 대화를 나누시다 제 이야기가 나오면 우리 아들 아무개는 내 평생에 한 번도 내 가슴을 아프게 한 적이 없다고 하시는 대단한 거짓말을 하신다.
때로는 내가 듣는 옆에서 말씀을 하실 때는 내가 면구스럽다. 사후에 내가 권사가 그런 거짓말을 하시면 안 되지요 하고 책망하면 내가 무슨 거짓말을 했다고 하신다. 그래서 기억력이 없다니깐요.
그런데 나는 내 자녀들에게 어떨까? 나는 기억력도 좋다. 그리고 나는 투자의 귀재가 되려하지 않나? 그리고 난 거짓말을 않으려 한다. 내가 진짜 부모가 맞을까?

< 김경진 - 토론토 빌라델비아 장로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