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메이플라워와 한인사회

● 칼럼 2014. 4. 21. 19:19 Posted by SisaHan
미국의 건국 연원은 잘 알려진 것처럼 101명의 영국 이민자들이었다.
대영제국의 권력 전횡과 부패, 종교적 타락에 염증을 느낀 일단의 청교도 그룹은 1620년 일생일대의 결단으로 새 세상을 찾아 떠난다. 
당시 아메리카 신대륙 버지니아에 도착한 메이플라워호의 101명 외에 다른 한척의 배는 남아메리카로 향했다고 한다. 그런데 버지니아에 내린 사람들은 ‘하나님만 믿으면 된다“고 믿는 그야말로 순수한 신앙인들이었던 반면, 남미를 향한 사람들은 ”하나님도 중요하지만 금 은 보화도 필요하다“는 물질주의에 경도된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들을 태운 두 척의 배가 서로 다른 땅에 도착한 뒤 4백년이 흐른 지금, 두 배의 당시 이민자들은 후손들이 사는 모습과 환경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 상상이 가능하다.
 
하나님만 의지한 버지니아의 이민자들은 자신들의 집을 짓기 전에 하나님의 집, 즉 교회를 먼저 짓고 예배를 드린 뒤 삶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들은 전제군주의 권력횡포와 부정부패, 오염된 종교의 사슬을 끊고 인간다운 삶의 새 사대를 열어 가면서 이웃사촌으로 대화와 토론, 논쟁과 협의, 그리고 조정을 거쳐 합의안을 만들고 힘을 모아 외침에 투쟁하며 나라를 건설했다. 조지 워싱턴을 첫 대통령으로 뽑은 당시의 인구는 고작 4백만 명이었다고 한다. 그 소국이 모국인 영국을 제치고 지금 세계를 주름잡는 민주주의 대국, 미국으로 성장했다. 
오늘날 미국이 신앙의 힘으로 강대국이 됐다는 종교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미국을 세운 첫 이민자들의 철저한 각오과 실천의 힘- 바로 그 청교도 정신이 후손에게 남긴 유산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다. 자신들이 피부로 겪은 모국의 부정과 불의를 자계하고 냉철하게 배제한 새 삶과 새 세상을 개척해 나가면서 그들은 신앙에서 비롯된 정신적 무장과 경험적 교훈을 한시도 잊지 않았음을 본다. 
미국의 사례를 들어 이민자 된 우리네 형편을 대비하고 논하는 것은 무리요 비약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통분모가 없지않다는 관점에서, 한번 성찰의 대상으로 삼아볼만 하다는 생각도 든다.
 
무슨 사연이 있든 모국을 떠나 이민의 삶을 택한 기저에는 채워지지 않은, 또는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있었기에 현실을 벗어난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이민 땅이 한국보다는 앞선 나라인 캐나다인 점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우리는 캐나다에서 일군 새 삶에서 지난 날의 부족과 불만들을 변화시킨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일까. 영국의 이민자들이 황무지에 모국을 능가하는 대국을 일궜다는 데, 우리는 뒤진 나라에서 앞선 나라로 옮겼으니 그 몇 배 나름의 ‘유토피아’를 만들었어야 하지 않은가. 정신적으로 든 물질적으로 든, 모든 면에서 옛 시절을 능가하는-.
안타깝게도 반세기를 맞았다는 10수만의 우리에겐 ‘아직’ 그런 자긍심을 찾을 수 없는 것 같다. 아니 모국을 능가하기는커녕 더욱 추종하고 흉내 내고, 때론 못된 짓도 감싸기에 바쁜 잘못된 모국사랑에만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살펴보면 민망한 모습을 도처에서 본다. 
이 곳에서도 우리들 신앙심은 깊어 교회와 사찰은 수두룩하지만, 일제치하 자주 독립정신을 심었고 국난에 분연히 일어섰던 의로움의 기백은 찾아볼 수가 없다. 모국의 세속화된 현실만을 뒤따르는 것일까.
 
국민을 섬겨야 할 공무원이 대접받고 군림하려는 구태와, 또 그들을 맴돌며 은덕을 바라는 일부 인사들의 비윗살이 보는 이들을 거북하게 만든다. 관존민비의 ‘전통’이 이민 땅에 기생하는 걸까. 
단체마다 다툼과 말썽이 끊이지 않는다. 사색당쟁에 익숙해진, 그래서 서로 파탄나고 만 속성이 살아있는 걸까. 
갈수록 뒷걸음치고 있는 권력의 오만과 일탈, 역사왜곡을 나무라는 소리는 작아지고, 오히려 두둔하고 대변하는 이들이 큰 소리 치는 이상한 현상이 판친다. 친일의 후예들, 독재의 혜택을 입은 사람들이 이민을 많이 온 것일까. 
잡은 자, 쥔 자들 그들만의 동아리에서 해치우면 오케이, 한탕 지나가면 그만이라는 방자함은 저쪽과 이쪽이 너무도 닮은 꼴이다. 다수권력의 논리가 철칙이 되고 온갖 매체가 한 패거리 한 목소리로 찬양나팔을 불면서, 반대이론에는 눈감기나 종북몰이 둘 중 하나인-.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최근 한 신문사 출신들이 중심이 돼 만들어낸 이민사 작업에서도 얼핏 그런 자태가 보인다. 측근 둘러세워 해치우기에 제머리 깎기, 그리고 자화자찬의 평가까지가 엇비슷하다.
 
다시 메이플라워호의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모국을 과감히 떨쳐냈고, 모국의 불의에 과감히 대적했고, 마침내 능가해 이제 훈수를 두는 그들 이민 대선배들 처럼 왜 우리는 될 수 없는 것일까. 우리네 후손들은 조상을 뭐라고 평할까. 이민 유입이 줄면서 주변에선 “불황에 큰일” 이라는 아우성이 들린다. 어찌 우리는 모국을 떨쳐내고 훈계하고, 능가하지 못하는가. 그저 모국만 쳐다보고 꽁무니만 쫒는다는 이야기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 김종천 편집인 >


인도 뉴델리의 국립기념묘원에 있는 간디의 묘소를 찾았을 때, 묘역 입구 화강암 벽면에 저 유명한 ‘일곱가지 사회악’이 음각되어 있었다. 짧은 일곱마디로 응축된 내용이 매우 인상 깊었는데, 그 인용구 출처는 ‘1925년 <청년 인도>(Young India)에서’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여행자는 원문 기사를 찾아내서 읽어보고 싶었다. 맘먹고 간디기념관을 찾아가 직원에게 사정을 말하고 ‘1925년 <청년 인도>’ 도서대출 신청을 했다.
친절하게도 직원은 1925년에 간행된 <청년 인도> 52주 분량 전체, 곧 세권으로 묶어 제본한 두툼한 자료를 서가에서 꺼내다 주었다. <청년 인도> 몇호인지 명시되어 있지 않았기에 몇시간 동안 뒤져 해당 기사를 찾아냈을 때, 여행자는 마치 보석을 발견이나 한 듯 가슴이 뛰었다. 발행일자는 1925년 10월22일 목요일, 제7권 43호에 실린 글이었다. 일년 구독료가 당시 인도 화폐단위로 5루피라고 적혀 있으니 얼마나 서민들의 사랑을 받던 주간신문이었던가 짐작하게 했다.
 
그런데 그 유명한 ‘일곱가지 사회악’이 실린 글은 기대와는 달리 논설문이 아니었다. ‘범죄가 비도덕적이 아닐 때’라는 제목이 붙은 짧은 글 말미에 적혀 있는 격언 같은 일곱마디 경구였다. 편집주간이었던 간디 이름 약자(M.K.G)를 기사 끝머리에 밝힌 것을 보면 간디가 쓴 글임에는 틀림없었다. 그 경구 일곱마디는 오늘 한국 사회에서 진지하게 경청해야 할 가치가 있다. 이제는 꽤 널리 알려져 있지만 간디가 말하는 ‘일곱가지 사회악’은 이렇다. 원칙 없는 정치, 일함 없는 부의 축적, 양심 없는 쾌락추구, 개성 없는 지식축적, 도덕성 없는 통상교역, 인간성 없는 자연과학, 그리고 자기희생 없는 종교라고 갈파한 것이다.
‘일곱가지 사회악’을 언급하면서 간디가 당시 인도 사회와 세상을 향해 말하려는 의도는 좁쌀영감의 도덕강론 같은 것을 다시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영국의 무력적 식민통치에 맞서 비폭력적 저항운동을 펼쳐가면서 간디가 뼈저리게 느낀 것이 있었다. 국가법이라는 것이 반드시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과 실정법에 따라 양심범들을 범죄자로 몰아세우는 공권력의 남용이 허위의식에 사로잡힌 강자들의 자기기만일 수 있음을 말하려는 것이었다.
 
간디가 예를 드는데, 현대사회 자체가 거대한 범죄공장 같아서 군국주의자는 살인자와 다름없고, 조폭들은 부패한 정치꾼들과 공생관계에 있는 똘마니들이 아니냐는 것이다. 작은 도둑은 사회가 용인하지 않는 방법으로 빵 몇조각을 훔쳐 배고픔을 충족하려던 사람이지만, 정말 큰 도둑은 사회 전체에 해를 입히면서 자기가 노동하지도 않는 공공자산을 ‘눈먼 돈’으로 간주하고 크게 해먹는 놈들이라는 것이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습이 간디가 지적한 ‘일곱가지 사회악’을 절감하게 한다. 일곱가지 사회악 중에서 오늘의 이 글은 마지막 경구와 관련되어 있다.
희생 없는 종교는 사회악이라고 했다. 본래 ‘희생’이라는 어휘는 종교의 본질을 드러내는 핵심적 단어이지만, 현대인들은 그 본래 의미를 거의 이해하기 어렵게 되었다. 사전을 보면 세가지 의미로 쓰인다. 첫째는 신명(神明)에게 바치는 산 짐승을 말한다. 둘째는 예기치 않은 재난으로 헛되이 목숨을 잃는 것을 말한다. 셋째는 남이나 어떤 일을 위하여 제 몸이나 재물을 바치는 자발적인 행위를 의미한다. 심지어 야구경기에서 희생타에 의하여 주자를 홈인시키는 것도 영어권에서는 ‘희생’(sacrifice)이라는 단어를 쓴다. 종교를 고대인들의 무지의 소산이라고 생각하는 계몽주의 시대 이후 현대인들은 ‘희생’의 본뜻을 간과하여 신들의 분노를 달래거나 환심을 사려는 물질 공여 행동이라고 곡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래 종교가 시작되던 자리에서 보면 생명은 전체로서 하나이며 유기적으로 상통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한 마을 공동체에서 개인이나 특정 집단이 다른 생명을 살상하거나 생채기 내면, 하나이고 조화롭던 생명질서는 흐트러지고 소통이 안되고 평화를 잃게 된다. 그 결과 신적인 것, 인간적인 것, 자연적인 것 그 삼자 사이에 분열이나 간극이 생겨서 마침내 각종 위험과 질병이 발생한다. 생명공동체 안에서 누리던 삶의 기쁨이나 연대감은 사라지고 탄식과 긴장감이 높아간다. ‘생명은 개체이면서도 항상 하나로서 전체이다’라는 자각은 사라지고 사람들은 자기중심적 소유욕과 생존본능으로 마을은 분열되고 살벌해진다.
본래 종교란 같은 종파에 속한 종교인들끼리 모여서 자기들 사이에서만 통하는 주문을 외우며 북 치고 춤추는 종교놀이나 종교사업이 아니었다. 언제나 마을 전체, 사회 전체를 병듦과 분열로부터 ‘건강한 하나의 생명체’로 되살려 내려는 혼신의 몸짓이었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바치는 거룩한 생명의 불태움이 ‘희생’이었다. 김동리의 문학 작품 중 <등신불>에서 독자들은 ‘희생’을 읽는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고 나라가 독재와 부패로 병들었을 때, 베트남 스님들이 네거리 한복판에서 조용히 좌선한 채 ‘소신공양’을 했다. 군부독재 시절 어린 여직공들을 건강하게 살려내려는 전태일의 분신자살과 ‘동아투위’ 언론인들의 고난의 행군은 비인간화된 사회와 병든 민주주의로 하여금 숨쉬기를 계속할 수 있게 했다. 열거한 일들은 그 모두가 ‘희생’의 본래 뜻을 조금이라도 드러낸 사례들이다.
 
고대 부족사회에서는, 생명을 죽이거나 상하게 하면 동등한 생명값으로만 보상해야 하는 것이 생명원칙이었다. 그런데 보상해주어야 할 사람의 생명은 두개가 아니고 하나뿐이기 때문에, 자기 생명을 죽이는 대리적 상징행위와 생명은 생명체의 피 속에 있다는 신념이 하나로 통합되어, 반드시 산 짐승을 피 흘리게 죽여 ‘희생’으로서 불살라 바쳤던 것이다. 본래 ‘희생’은 주술도 아니고 ‘대신 때우기’도 아니다. 전문 종교인들이 특별한 권위를 가지고 집례하는 법회, 미사, 예배에서만 발효되는 기적행위도 아닌 것이다.
희생제사는 ‘희생물’과 ‘제물 바치는 당사자’와 ‘전체 생명’ 그 삼자가 ‘하나 됨의 일치 경험’을 가져야 한다. 예를 들면 십자가 위에서 처형당한 예수의 죽음을 ‘희생제사’로 기독교 교인들이 받아들인다면, ‘예수 생명’과 ‘신자 생명’과 ‘진리이신 하느님’과의 삼자 회통의 일치 경험이 동반되어야 한다. 속죄를 영어로 ‘어톤먼트’(atonement/at-one-ment)라고 하는데, 본래 그 어휘 자체가 ‘대신’이라는 의미보다는 ‘하나 될 때에’라는 의미가 핵심이다. 바로 희생제사의 요체이다. 요즘 한국 개신교가 신뢰성과 영적 능력을 잃어버린 것은 민족 전체 생명과 하나 됨의 희생을 외면할 뿐 아니라, 희생물과 희생제사 드리는 자 사이의 ‘하나 됨의 사건’ 없이 대속교리(代贖敎理)를 입으로만 남발하기 때문이다.
 
4월엔 제주 4.3 민간학살 사건, 4.19 민주학생의거,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고난주간과 부활절이 있다. 5월엔 어버이날, 5.16 쿠데타, 5.18 민주항쟁, 그리고 불교의 석탄절이 있다. 모두 ‘희생’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야 할 생명의 계절이다. 알고 보면 지금 살아 있는 생명은 과거나 오늘 그 누군가의 ‘희생’ 위에서만 가능하다. 특히 사람 생명은 그 누군가의 희생 위에 핀 대리적 꽃이다. 동학의 해월 선생께서 “하늘로써 하늘을 먹는다”는 ‘이천식천’(以天食天)의 도리를 설파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 엄연한 생명의 이치와 실상을 부인하거나 절감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 철없는 사람이다. 좀 심하게 직설적으로 말하면 아직 사람이 덜 된 짐승 단계 인간이다. 오늘의 종교는 더 청빈해지고, 더 단순성을 사랑하고, 더 희생을 통하여 전체 민족 상처를 감싸는 종교로 환골탈태해야 한다. ‘희생’은 종교의 한가지 덕목이 아니라 종교의 진위를 판가름하는 핵심 본질이기 때문이다.

< 김경재 목사 - 한신대 명예교수 >


[사설] 대통령은 국정원장 해임해야

● 칼럼 2014. 4. 21. 19:12 Posted by SisaHan
국가정보원의 간첩혐의 증거조작 사건과 관련해 검찰이 국정원 수뇌부의 책임은 묻지 않고 3급 직원 선에서 사건을 종결했다. 하지만 이런 검찰 수사가 남재준 국정원장에게 면죄부를 줬다고 생각한다면 커다란 착각이다.
국정원은 특정인을 간첩으로 몰아가기 위해 재판에 제출할 증거를 위조하고 조작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이를 감추려고 또다른 거짓말로 덮었고, 언론 공작까지 서슴지 않았다. 재판 증거 조작은 그 자체로 중대한 문제지만 사건을 은폐하려 한 것은 정치적으로 훨씬 죄질이 나쁘다.
 
검찰 발표대로 국정원 직원들이 남 원장 등 국정원 최고 수뇌부의 지시 또는 묵인 없이 사건의 은폐까지 주도했다고 상상하긴 어렵다. 특히 증거조작 의혹이 불거진 이후에도 국정원이 계속 거짓말을 하고 책임 회피에 급급했던 대목은 남 원장 책임이 크다. 사건이 공론화된 이후엔 남재준 원장이 전반적인 대응책을 지휘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설사 이런 국기문란 범죄가 수뇌부도 모른 채 벌어졌다고 해도 심각한 문제이긴 마찬가지다. 국정원이 통제불능의 콩가루 집안이라는 얘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수사 결과 문제가 드러나면 반드시 바로잡을 것”이라고 약속한 바 있다. 3급이라곤 하지만 국정원 직원들이 사법체계를 흔드는 증거조작에 개입한 사실이 검찰 수사를 통해 밝혀진 이상,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 이 부분에서도 남재준 원장의 책임이 가볍지 않다. 법적 책임은 논외로 하더라도 남재준 원장은 국정원 직원들의 불법행위에 대한 지휘·감독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당장 도의적·정치적 책임을 지고 스스로 사퇴하는 것이 국정원장으로서 품위를 지키는 최소한의 태도일 것이다. 그가 그대로 직을 유지하는 것은 하급자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비겁하고 옹졸한 짓이다.
 
이런 범죄행위는 박근혜 대통령과 남재준 원장 취임 이후에 벌어진 일들이다. 국정원은 수시로 대통령에게 보고를 하고, 대통령의 지시와 감독을 받는 대통령 직속 기관이다. 남 원장이 책임을 회피한다면 임면권자가 적절한 책임을 묻는 게 합당하다. 박 대통령이 남 원장을 해임하지 않는다면 그 책임은 오롯이 박 대통령에게 돌아갈 것이다.
박 대통령이 직접 감당해야 할 책임도 있다. 박 대통령은 국정원의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와 지난해 대선개입 사건으로 국정원 개혁 요구가 빗발쳤을 때 남 원장에게 이른바 ‘셀프개혁’을 주문하며 남 원장을 감쌌다. 새누리당에서조차 ‘남재준 경질론’이 불거졌지만 외면한 채 끝내 침묵했다. 국정원의 최악의 국기문란 사건은 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이 14일 ‘소형 무인기 추락 사건’을 공동으로 조사하자고 제안한 데 대해 청와대가 즉각 거부 의사를 밝혔다. 공동조사 제의를 대남 선전전으로 보고 말려들지 않겠다는 태도다. 그러나 상황을 좀더 진지하게 볼 필요가 있다. 남북이 함께 사건의 진상규명에 나서면 실체에 더 가깝게 다가갈 수도 있고, 서로 접촉하는 과정에서 악화일로의 남북 경색 국면을 뚫고 나갈 기회를 열 수도 있다. 북한의 제안을 내치기만 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북한의 공동조사 제안이 정부의 분석대로 심리전일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하지만 제안의 형식과 내용으로 가늠해볼 때 나름의 무게가 있어 보인다. 북한은 14일 하루에만 두 차례 공식기구를 통해 우리 정부의 무인기 조사 결과에 적극 반응했다. 특히 북한의 최고권력기구인 국방위원회가 직접 나서 발표를 반박하며 공동조사를 제의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북한은 또 진상조사의 남쪽 대표로 김장수 청와대 안보실장을 특정하고 “북남관계를 악화시키는 장애물을 제거할 의사가 있다면 공식석상에 나와 문제해결에 당당히 임하라”고 말했다. 공동조사의 상대를 구체적으로 지명한 것을 볼 때 북쪽의 제의를 단순한 선전공세로만 보기 어려운 요소가 있다. 그런데도 청와대는 “범죄 피의자가 범죄 수사의 증거를 조사하는 일은 없다”며 단칼에 거부했다. 지혜로운 대응이라고 하기 어렵다.
사실 이번 무인기 사건은 북한의 소행임을 입증하는 명백한 증거가 새로 드러나지 않는 한 추정만 남긴 채 미제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11일 무인기 사건 중간조사결과를 발표하면서 국방부는 정황증거만 내놓고 직접증거는 제시하지 못했다. 국방부는 무인기에 내장된 지피에스(GPS)의 복귀 좌표가 훼손될 것을 우려해 해독하지 못했다고 했는데, 이 지피에스를 해독한다면 사건을 해결할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있다. 북한이 공동조사에 참여해 지피에스 해독을 함께 한다면, 사건은 의외로 깨끗하게 정리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나아가 무인기 사건 공동조사를 계기로 삼아 남과 북이 서로 접촉면을 넓힌다면 그 자체로 남북 경색을 완화하고 대화의 문을 여는 구실도 할 수 있다. 북한은 천안함 사건 때도 남쪽에 공동조사를 제의한 바 있다. 그때 남쪽이 북의 제의를 거절하지 않고 조사에 동참시켰다면, 그 뒤에 벌어진 남북간·남남간의 엄청난 소모적 갈등을 처음부터 완화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악재는 대응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호재로도 바꿀 수 있는 법이다. 정부는 이제라도 북한의 무인기 사건 공동조사 제안을 진지하게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