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슬픔 속에서 희망 보여주는 시민들

● 칼럼 2014. 5. 5. 17:54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고은 시인의 시구대로 지금 온 나라가 상중이다. 수백명의 어린 생명들을 눈앞에서 잃어버렸다. 가슴을 치며 통곡해도 바다는 단 하나의 목숨도 돌려주지 않는다.
나라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세월호 침몰 이래 지금껏 정부는 허둥지둥, 우왕좌왕, 갈팡질팡이었다. 희생자·실종자 가족들의 고통은 몇 배로 커졌고, 피가 말라붙는 그들의 아픔은 온 국민의 아픔이 됐다. 시민들은 서로 모여 슬픔을 함께한다. 전남 진도 팽목항과 경기 안산엔 자원봉사자들이 줄을 잇고 희생자 합동분향소엔 추모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희생자·실종자 가족들이 절망에 꺾이지 않도록 작은 힘이라도 모아 서로 돕는 모습에서 어둠 속 희망을 본다.
 
인터넷과 트위터는 노란 리본으로 넘실거린다.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이루어진 노란 리본 달기에는 기적을 바라는 모든 이의 마음이 담겼다. 노란 리본 캠페인은 전쟁터에 나간 사람의 무사귀환을 바라며 노란 리본을 나무에 매단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지금 노란 리본은 단 한 사람이라도 살아 돌아와 주기를 바라는 온 국민의 간절한 기도를 상징한다. “돌아와주렴… 돌아와주렴… 제발 우리 품으로 돌아오렴….” 노란 리본 캠페인에 동참하여 남긴 인터넷 글들은 세월호 참사의 고통을 서로 감싸안으려는 시민들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많은 학생을 참사로 잃어버린 안산에는 임시 합동분향소가 설치된 뒤로 조문객이 밀려들고 있다. 잠깐의 헌화와 묵념을 위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1㎞가 넘는 긴 행렬을 이루어 몇 시간씩 기다린다. 슬픔을 함께할 수 있다면 한두 시간씩 서서 기다리는 일쯤은 조금도 힘들지 않다는 마음들이다. 시민들의 조문을 돕는 사람도 조문객과 같은 마음으로 찾아온 자원봉사자들이다. 이웃의 깊은 슬픔을 위로하는 이 조문행렬, 봉사행렬에서 성숙해져 가는 우리 사회 시민의식을 본다.
 
슬픔을 안고만 있으면 병이 된다. 시민들이 슬픔을 표출하고 서로를 위로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정홍원 총리는 지난 23일 전국에 합동분향소를 설치하라고 지시했다는데, 안전행정부는 26일에야 전국 지자체에 분향소 설치 지침을 내렸다고 한다. 미리 서두른 서울시는 27일 오후부터 서울광장에 분향소를 차렸지만, 다른 광역 시·도에는 28일에야 분향소가 설치된다고 한다. 정부가 시민의 추모 열기 확산을 막으려고 일부러 늑장을 부린다는 말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정부는 이제라도 시민들의 마음을 잘 헤아려 불필요한 의구심을 씻어내기 바란다.


[사설] 시늉뿐인 사과에 ‘과거 타령’만 한 대통령

● 칼럼 2014. 5. 5. 17:53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14일 만에 대국민 사과를 하면서 국가안전처 신설 등의 대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사과의 형식이나 내용을 보면 사과라는 말을 붙이기조차 민망하다. 예상대로 국민에 대한 직접 사과 대신 국무회의를 통한 간접 사과 방식을 택했다. 미증유의 국가적 대참사에 대해 대통령이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국민 앞에 머리를 조아리면 안 되는가. 죄책감이나 책임의식 등의 단어는 아직도 박 대통령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박 대통령이 사고의 원인을 “과거의 잘못된 적폐” 탓으로 돌린 대목에 이르면 더욱 어안이 벙벙해진다. 박 대통령이 ‘죄송’하다고 말한 것도 실제로는 현 정부의 실책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과거의 적폐를 바로잡지 못해서”라는 이유에서였다. 박 대통령은 ‘내 탓’은커녕 사건의 책임을 철저히 과거 탓으로 돌리고 있는 셈이다.
 
박 대통령에게 묻고 싶다. 눈앞의 배를 뻔히 바라보면서도 제대로 초동대응을 하지 못해 그 많은 아까운 생명을 잃은 것이 과거 적폐 탓인가. 컨트롤타워의 부재로 이 순간까지도 정부가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이 과거 탓인가. 정부가 국정과제 추진상황 평가에서 재난관리체계에 대해 ‘우수’ 판정을 내리고 스스로 대견해한 것은 과거 적폐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박 대통령은 과거 적폐를 말하기 전에 현 정부의 총체적 무능과 무책임에 대해 통렬하게 반성하고 사과했어야 했다. 과거의 적폐를 도려내겠다고 큰소리치기 전에 청와대를 비롯한 현 정부 안에 도사린 적폐부터 도려내겠다고 다짐했어야 옳았다. 박 대통령의 사과에서 아무런 울림이 전해오지 않는 것도 박 대통령의 이런 엉뚱한 현실인식 때문이다.
 
총리실 직속으로 국가안전처를 신설하겠다는 것도 병의 정확한 원인이 나오기 전에 처방전부터 내놓은 격이다. 미국은 9.11 테러 후 초당적 특별조사위원회를 만들어 20개월 동안이나 사건과 관련한 모든 사실관계와 정황, 원인, 대책을 포괄하는 종합보고서를 만들었다. 미국 정부가 마련한 각종 사후대책도 이 위원회에서 내놓은 41가지 권고사항에 기초한 것이었다. 지금 정부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이번 사고의 근인과 원인, 시간대별 조처의 문제점, 부처간 혼선의 원인 등을 광범위하면서도 꼼꼼하게 진단하는 일이다. 
박 대통령은 ‘국가 개조’를 말했으나 이런 식으로 국가 개조는 결코 이뤄지지 않는다. 이런 안이한 현실인식, 책임회피식 미봉책이야말로 청산해야 할 과거 유산이다. 국가 개조가 제대로 시동을 걸려면 우선 국정운영에 임하는 박 대통령 자세부터 일대 변화가 있어야 한다. 바로 ‘대통령의 개조’다. 박 대통령은 이 핵심을 여전히 외면하고 있다.


[칼럼] ‘행복한 십대들의 나라’

● 칼럼 2014. 5. 4. 20:36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대학원 학생들과 낮은 출산율을 화제로 이야기를 나누다 깜짝 놀란 적이 있다. 한 여학생이 자기도 “아이를 낳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자, 같이 있던 네 명의 여학생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게 아닌가. “끝없이 경쟁을 강요하는 이 교육지옥 속으로 아이들을 떠밀어 넣을 자신이 없다”는 것이 한결같은 이유였다. “십대 시절 행복했던 기억이 별로 없다”는 말도 모두 같았다.
세월호 사고로 희생된 학생들을 보면서 왜 이 대화가 맨 먼저 떠올랐을까. ‘행복했던 기억이 없는 지옥’ 속에서 살다가, 이제 차갑고 어두운 바닷속에서 죽어간 아이들이 너무도 안쓰럽다. 이런 세상을 만들어놓은 우리 어른들의 죄는 도대체 어떻게 혜량할 것인가.
 
세월호 참사로 숨져간 아이들을 진심으로 애도한다면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그 아이들이 소망했으나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삶을 이제부터라도 우리 청소년들이 살도록 해주는 것이다. ‘행복한 십대’를 돌려주는 것이다.
그러려면 우선 ‘교육’부터 바꿔야 한다. 우리 십대들을 가장 불행하게 하는 것이 바로 우리나라의 잘못된 교육이기 때문이다. 본래 교육(education)이란 학생의 잠재력을 ‘밖으로(e-) 끌어내는(duc-)’ 것이다. 사회적 요구를 일방적으로 쑤셔넣는 우리네 교육은 기실 ‘반교육’에 가깝다. 게다가 그 교육의 결과가 사회적 차별의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 반사회적이기까지 하다.
이렇게 반교육적이고 반사회적인 교육풍토 속에서 우리 학생들은 세계에서 가장 불행하고 우울한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다. 획일화된 학습과 평가 시스템 속에서 개성과 창의성을 잃어가고 있고, 우정과 사랑의 감성은 사라지고 경쟁과 대결의 논리만이 지배하는 살벌한 정글 같은 교실에서 절망과 불안을 내면화하고 있다.
 
학생들은 오로지 공부만 하는 ‘학습기계’로 전락하였고, 정규수업 이외에도 학원, 과외, 야자로 이어지는 엄청난 학습노동은 그 시간과 강도에서 인권유린의 수준을 넘어선 지 오래다.
이제 우리 아이들을 모든 어른들이 공모하여 처박아 넣은 이 끔찍한 노예상태에서 해방시켜야 한다. 이제 어른들은 노예감독관 노릇을 그만두어야 한다. 이제 우리 아이들을 행복한 자유인으로 키워야 한다.
우리 아이들도 행복할 권리가 있다. 그들도 다른 나라 아이들처럼 자유롭게 연애도 하고, 맘껏 독서도 하고, 연극이나 영화도 보고, 박물관이나 미술관에도 가고, 방학 때는 여기저기 여행도 다니면서, 그렇게 자신의 고유한 삶을 향유해야 한다. 그렇게 인간적인 품성을 키우고, 시민적인 자질을 높여야 한다. 자신의 개성과 ‘천재’를 발견할 여유를 가져야 한다. 미래가 아무리 장밋빛이라 해도, 삶은 한순간도 ‘유예’될 수 없다.
 
우리 아이들을 행복한 자유인으로 키우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꿈이 아니다. 우리가 사는 이 유라시아 대륙의 반대편에서는 그것이 상식이요 일상이다. 의지만 있으면 우리도 할 수 있다.
저 침몰하는 배 안에서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던 어른들이 우리 아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듯이, 이런 부조리한 교육, 불합리한 세상을 묵인하는 우리들은 어쩌면 이 땅 위에서 매일매일 조금씩 우리 아이들을 죽여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월호의 아이들’이 갈망했을 그런 세상을 이제 우리 어른들이 열어주어야 한다. 이 시대착오적인 노예상태에서 아이들을 해방시켜 그들의 얼굴에 다시 행복한 미소가 피어나도록 해야 한다. “더러운 대한민국. 이렇게 부끄러운 적이 없었다”, “언니, 오빠 두 번 다시 이런 나라에 태어나지 마세요”라는 저 아이들의 분노와 저주의 외침을 또다시 들어선 안 된다.
< 김누리 - 중앙대 교수 독문학 >


[한마당] 내동댕이쳐진 공동체

● 칼럼 2014. 5. 4. 20:33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한국전쟁 개전 직후 서울시민에게는 결사항전의 메시지를 남겨둔 채 몰래 피난을 떠난 이승만의 일화는 워낙 유명하다.
박명림 교수의 역작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에 피난 과정의 전말이 사뭇 희극적으로 자세하다. 6월27일 서울을 떠나 대구에 합류한 7월9일까지 13일간의 피난 기간에 ‘국가원수’ 이승만은 극소수의 참모, 수행원들만 데리고 사실상 혼자 튀었다. 
이승만은 정부에조차 행선지를 숨긴 채 아직 포탄 한 발 떨어지지 않은 평화로운 삼남 지방을 혼자서 이리저리 도망 다녔다. 
그는 서울이 점령되기도 전에 미국대사관을 통해 일본에 망명정부 수립까지 요청해놓았다. 즉, 일각에서 ‘국부’로 추앙되고 있는 이승만이 이 시기에 한 유일한 일은 인민군 한 명 없는 삼남 지방에서의 가열차고 경이로운 홀로 줄행랑, 이것밖에 없다.
후일 서울로 돌아온 이승만이 자신이 지시한 한강다리 폭파로 인민군 치하에 남아야 했던 서울시민들에게 어떻게 피의 보복을 벌였는지는 잘들 아시리라.
수치심에 떨며 사죄를 해도 모자랄 상황에 오히려 복수의 굿판을 벌였다. 상처받은 공동체의 치유를 위해서는 피를 토하는 사죄가 필요한데, 오히려 적반하장의 선전포고를 통해 상대의 피를 요구했다.
 
이승만이 보여준 이 궁극의 치졸함과 후안무치를 생각하다 보면 한국 사회에서 공동체란, 정의란, 국가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괴로운 질문에 부딪히게 된다. 
한국 사회에서는 이승만처럼 위기의 순간에 공동체를 버리고 정의를 우롱한 자들이 그 후로도 오랫동안 국가권력과 부귀영화를 독점해왔던 탓이다.
세월호 침몰 후의 상황이 더욱 참담하다. 정말로 이게 나라인가 싶다. 평소에는 서로 더 많은 권한을 주장하던 장관, 수석들이 저마다 컨트롤타워가 아니라고 도망치기 바쁘다. 세계 10대 경제대국을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시스템은 힘없고 ‘빽’없는 이들에게 닥친 재난 앞에서 한없이 무능하다. 희생자 구조에 실패한 정부에 국민들이 분노하자, 대통령은 특유의 유체이탈 화법으로 자신이 수장인 정부를 비판하고 있다. 그래도 늦었지만 분향소를 찾았고 국무회의 석상이긴 해도 사과도 했다니. 다행이다.
하지만 막상 그가 이끌고 있는 정부는 국민들의 추모 열기를 축소하는 데 사력을 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유족 사이에 사복경찰을 풀고 분향소 예산과 설치 장소는 최소화하더니 추모의 촛불집회마저 금지했다가 법원에 제동이 걸렸다. 누가 대통령의 진심을 믿겠나? 이 와중에 집권당과 보수세력 일각에서는 좌파의 정부전복작전, 선동꾼 침투, 유족이 미개한 국민, 빨갱이들의 기획 음모, 제2의 5.18 대비 등등 온갖 적반하장, 증오의 언어들이 난무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오랫동안 ‘사고 공화국’이었고, 그 책임을 특정 정치세력 탓으로 돌리기는 어렵다. 
그 비극의 와중에 힘없는 국민들은 비극을 공유하는 정서의 공동체가 되었다. 적어도 과거의 정부와 집권세력은 이 비극의 가상공동체를 위무하는 시늉을 내는 데 최선을 다해왔다. 극복의 대책은 별개로 하더라도 말이다. 이게 한국 사회가 그동안 지켜온 부끄럽고 민망한 최소한의 금도였다. 하지만 현 정부와 보수세력은 아예 적반하장 쪽을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내동댕이쳐진 공동체 앞에서 그들이 최소한의 수치심도 버리고 끊임없이 종북좌파 등 증오의 언어를 호출하는 것은 어쩌면 자신들의 영토와 기득권이라도 보호해야겠다는 탐욕의 발로가 아닐까? 
제발 그러지들 마시라. 애시당초 공동체의 정의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고 해도, 금도는 지켜야 한다. 처연한 봄날이다.
<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