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박근혜 의원을 주저 없이 ‘독재자의 딸’이라고 부른다. 사실 ‘독재자의 딸’만큼 역사성이 오롯이 담겨 있고, 박 의원을 함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호칭도 찾기 힘들다. 
그렇다고 꼭 박 의원을 비난할 목적으로 이런 용어를 쓰는 것은 아니다. 그가 ‘독재자의 딸’이기 때문에 대통령이 되어선 안 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이런 용어를 쓰는 것은 그의 정치세계를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그의 정치적 부상이 한국 정치사에서 갖는 의미가 무엇이며, 그가 만약 대통령이 됐을 때 어떤 미래가 전개될 것인지를 추론하는 분석틀로서 ‘독재자의 딸’이란 호칭만큼 적절한 용어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독재자의 딸’이란 용어는 박근혜의 정치세계가 그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웅변한다. 박 의원이 정치에 입문하게 된 동기를 살펴보면 이는 더욱 명확해진다.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7년 12월11일, 그는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보 선대위 고문으로 정치에 첫발을 디뎠다. 그는 “60~70년대 국민들이 피땀 흘려 일으킨 나라가 오늘과 같은 난국에 처한 것을 바라보고 아버님 생각이 나서 목이 멜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며 처음부터 아버지 박정희를 거론하며 정치를 시작했다. “아버지의 꿈이 복지국가였다”는 발언에선 이번 대선의 복지공약도 아버지의 유업을 잇는 것임을 엿보게 한다. 결국 ‘억울하게 죽어간 아버지의 영광스런 업적’을 재현하기 위해 정치를 시작했고, 지금도 여전함을 알 수 있다.
 
5.16 쿠데타에 대한 평가에선 이런 인식이 더욱 두드러진다. 그는 지난 7월16일 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에서 “아버지로서 불가피하게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는 1989년 5월19일, 10.26 박정희 시해사건 뒤 처음으로 언론에 나와 “5.16은 구국의 혁명이었다”고 말한 것과 큰 차이가 없는 것이다.(<문화방송> ‘박경재의 시사토론’) 특히 5.16 당시의 피폐해진 생활상과 불안한 안보상황을 거론하며 5.16의 불가피성을 주장하는 논리 구조는 23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 치도 변함이 없다. 이는 그의 역사인식이 아버지 박정희의 틀 안에 갇혀 있음을 의미한다. 영락없는 ‘독재자의 딸’이다. 
그럼에도 ‘독재자의 딸’인 그가 가장 유력한 대선 후보로 부상한 것은 음미해 볼 만하다. 이는 박정희의 독재정치를 비판하는 ‘반독재 슬로건’이 적어도 현실정치에서는 거의 먹혀들지 않고 있음을 뜻한다. 실제로 박근혜를 ‘독재자의 딸’이라고 아무리 비난해봤자 박근혜 지지자들이 돌아설 리 없고, 구경꾼들도 지금 시대에 무슨 연좌제냐며 시큰둥할 것이다. ‘박정희 향수’가 ‘독재자의 딸’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희석시켰을 수도 있고, 먼 과거인 박정희 독재보다 현재의 박 의원의 정치적 비전이 더 큰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어찌됐든 선거전략상으로만 보면 민주진영의 ‘독재자의 딸’ 딱지붙이기는 박근혜를 깎아내려 선거에서 표를 더 얻기 위한 수단으로는 효력을 상실했다.
 
만약 ‘독재자의 딸’인 박 의원이 대세론을 유지하며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우리 사회는 ‘박정희 독재 18년’에 대해 사실상 면죄부를 주는 셈이 될 것이다. 이는 또 박정희 정권에 뿌리를 둔 수구·냉전적인 원조 보수기득권층이 변신에 성공해 화려하게 부활함을 의미한다. 설사 박근혜의 당선이 ‘독재자의 딸’에 대한 지지가 아니라 그의 뛰어난 정치력과 비전 때문이라 해도 이런 해석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박 의원이 대통령이 되는 순간 그의 지지자들은 유신 독재에 대한 세탁 작업을 본격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의원은 어제 새누리당 대선 후보로 확정됨으로써 정치 입문 15년 만에 대권에 가장 근접한 집권여당 대선 후보에 올랐다. 그는 박정희 사후 범보수정권의 맥을 이었던 전두환-노태우-김영삼-이명박 등과는 달리 ‘박정희 영웅신화’에 젖어 있다. 그런 그가 대통령이 된다면 우리 사회의 역사인식과 민주주의는 한 단계 더 퇴행이 불가피할 것이다. 12월19일 국민의 선택이 한국 정치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또 하나의 이유는 여기에 있다.

< 정석구 - 한겨레 신문 논설위원실장 >


[한마당] 소중한 언론혁명과 시민참여

● 칼럼 2012. 8. 27. 15:10 Posted by SisaHan
42년 전 동아일보사에 들어가 기자가 되었다. 입사해 보니 언론자유는 박정희 독재의 폭압에 압살당했음을 매일매일 온몸으로 느꼈다. 유신 이후는 더욱 참담했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절벽의 가장자리로 내몰린 우리들은 빼앗긴 자유언론을 찾아오기 위해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유신정권과 결탁한 동아일보사 경영진에 의해 쫓겨났다.
6월항쟁 이후 역사의 축복으로 <한겨레>가 탄생하기까지 언론 현장을 떠나 있었으나, 마음 한가운데는 늘 ‘언론’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오면서 기자인 것이 부끄럽지 않은 적이 거의 없었다. 군부독재 시절은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언론자유가 활짝 꽃핀 민주정부 시절에도 언론이라 불리는 무리들이 권력집단이 되어 수구 기득권 세력의 강력한 성채가 되었던 터다.
 
특히 자본의 힘과 시장 약탈로 성장해온 족벌 수구신문들은 신문시장을 독과점하면서 거대권력이 되어 수구·냉전·기득권 세력의 이익을 유지·강화하기 위해 별짓을 다 해왔다. 왜곡·과장은 기본이고, 주요 뉴스까지도 자기 세력에 불리하면 아예 무시해버린다. 날조와 거짓도 서슴지 않는다.
언론이 아니다. 조중동은 말할 필요도 없고, 경제지도 강자와 자본의 편에서 한쪽 논리만 편다. 이런 구조에서 건강한 여론을 위해, 아니 최소한의 여론 균형을 위해 방송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 들어 방송은 정권 친위대에 의해 완벽하게 장악되어버렸다.
이런 절망적인 언론 상황 속에 희망의 불빛이 보인다. 디지털 혁명 덕분이다. 과거에는 신문이나 방송을 하려면 상상을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자본이 필요했다. 방송의 경우 정부 승인까지 필요하다. 디지털 혁명은 이 모든 조건을 바꾸어 놓았다. 큰돈 들이지 않고 방송도 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해직·파업 방송 저널리스트들이 시작한 <뉴스타파>는 조중동 같은 수구언론, 그들이 만드는 삼류 종편 방송, 정권 방송이 되어버린 지상파 방송에 일대 타격을 가할 수 있는 폭발적 가능성을 보였다. 뉴스타파 첫회분은 순식간에 90만명이 조회했다. 수천억원을 들인 조중동 종편의 시청자를 죄다 끌어모아 봐야 기껏 20만가구 안팎인 것에 비하면 뉴스타파의 폭발성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된다. 진정한 방송뉴스에 대한 갈증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지난 7월1일까지 21회 진행되던 뉴스타파에 변화가 생겼다. 노종면 앵커가 YTN 노동조합으로 복귀하게 되고, 파업 언론인들이 방송사로 복귀하면서 제작에도 어려움이 생기고, 재정적인 어려움도 겪게 되었다. 그래서 뉴스타파의 산파이자 제작의 중심역인 이근행 PD(전 MBC노조위원장, 해임 806일째), 박중석 KBS기자(언론노조 파견) 등은 40일 동안 쉬면서 시즌2를 준비, 마침내 지난주 금요일 시즌2의 막이 올랐다. 올림픽 열기에 묻힌 주요 뉴스들이 22회에 담겨 있다. 새 앵커는 용산참사의 기록을 담은 <두 개의 문> 연출자 김일란 감독이 맡았다. “진실을 찾아가고, 이를 우리 사회에 전달하는 작업은 그 형식이 영화장르든 언론이든 연계돼 있다고 판단해 참여를 결심했다”고 그는 인터뷰에서 밝혔다.
수구언론과 제대로 맞짱 뜰 수 있는 뉴스타파의 길이 순탄치만은 않다. 제작인력과 제작비 때문이다. 디지털 혁명 덕분에 기존 방송사와 같은 어마어마한 인프라 구축비야 필요없지만, 방송은 여러 사람이 만드는 것이니 제작비가 만만치 않다. 결국 이 혁명적 방송의 성공 여부는 시민의 참여가 얼마나 적극적인가에 달려 있다.
 
비단 뉴스타파 뿐만이 아니다. 국내에서 소위 진보 언론들은 정부와 대기업 광고에서 소외되는 경영상의 어려움 뿐만 아니라, 보수 극우세력들의 폄훼로 고난에 직면할 때가 많다. 해외에서도 열악한 환경속에서 언론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작지만 소중한 한인 신문·방송들의 사례가 많다. 
어느 곳에서든 참된 언론이 무시되는 사회에는 거짓과 불의가 기생하게 마련이다. 사회의 감시자는 언론이며, 언론의 감시자는 시민들이다. 시민들의 의식이 언론에 투영되고 시민들의 정성과 참여가 언론의 성쇠를 가름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 정연주: 언론인 >


[1500자 칼럼] 손 편지의 숨소리

● 칼럼 2012. 8. 20. 16:59 Posted by SisaHan
소리 없이 내리는 이슬비에 마음까지 축축한 듯했다. 물어물어 찾아간 그곳은 전주에 와서 <혼불>의 작가를 만나지 않을 수 없다며 들른 문학관이었다. 날씨를 핑계 삼아 아늑한 곳에 들어가 따끈한 커피나 마셨으면 하는 마음을 달래주려는 듯 밝게 웃는 커다란 사진이 우리를 맞이했다. 최명희는 1990년대에 한 고등학교에 근무할 때 알게 된 작가였다. 
당시 나는 도서실 관리 업무를 맡고 있어 수업이 없는 시간에는 도서실에 상주하며 자연스럽게 신간 서적을 읽을 수 있었다. 도서실에서는 학생들뿐 아니라 마음이 맞는 교사들이 책을 돌려가며 읽은 후에 이따금씩 감상을 나누고 토론을 하기도 했다. 기억도 아득한 일이지만 그때 만난 책이 <혼불>이었다. 요즈음과는 달리 그때만해도 대하소설이 꽤 읽히던 때라 열 권이라는 부피가 그리 부담스러운 줄 모르고 읽던 시절이었다.
 
실은 최명희 문학관에 들어서면서 큰 기대는 없었다. 여느 문학관처럼 비슷한 형태로 작가 소개와 작품, 원고지 등을 전시해놓았겠지 싶었기 때문이다. <혼불>을 연구한 논문들이 유리 진열장 아래 한 줄로 놓여있고 정면에 간단한 약력이 적혀있었다. 그 보다는 전시실 중앙에 작가가 누군가에게 보낸 엽서에 더 관심이 가서 그 앞을 서성이는데 바로 옆 진열장에서 뭔가 강렬하게 시선을 잡아당기는 게 있었다. 옛 선비들이 서신용으로 주고받던 둘둘 말린 한지를 길게 펼쳐 놓은 듯한 종이의 염력(念力)에 아마 나도 모르게 끌렸나 보았다. 
조금 바랜 듯한 하얀 종이에 왼편에서 시작해 세로로 써 내려간 글, 그건 작가가 친구에게 육필로 쓴 편지였다. A4 용지만한 크기의 종이를 2미터 이상 늘어놓은 길이인데 여러 장을 이어 붙인 게 아니라 온전한 한 장이었다. 대체 어디에서 그렇게 긴 종이를 구했는지 몰라도 모나지 않은 글씨들이 정스럽게 조근조근 무슨 말인가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작가에 대한 선입견 때문인지 예민한 필체를 예상했는데 의외로 부드럽고 편안한 글씨체였다. 어떤 마음으로 썼기에 그렇게 긴 글을 한결 같은 필체로 이어갈 수 있었을까. 단숨에 썼을까, 며칠을 두고 썼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나는 그 앞에서 발이 붙은 것처럼 서 있었다. 원고지 위에서 사각거리던 만년필 소리가 들려오고 종이에 배어든 잉크 냄새가 나는 듯한 환각이 일었다. 편지를 쓰고 있는 작가 바로 곁에 앉아있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그 긴 종이에 끝도 없이 조용조용 풀어놓았을 작가의 마음이 만져지는 것 같아 나는 감히 발을 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문득 어디선가 찬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내 다음 다음 세대쯤 되는 작가의 문학관은 어떤 광경일까, 펜을 사용하지 않고 컴퓨터로 글을 쓰는 차세대 작가의 타이핑한 편지가 전시되어 있다면 관람객의 마음에 어떤 파장이 일까 상상해보았다. 친필이 아닌 인쇄된 편지를 보고도 내가 느끼는 것처럼 작가와 같은 공간에서 호흡하며 감정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듯한 착각으로 가슴이 뛸 수 있을까 싶었다. 
요즈음은 전화도 음성보다는 문자를 선호하는 세대이다. 삶의 질을 높여준다는 기계문명에 기대어 문화 성향이 음성에서 문자로 바뀌어간다는 것은 주관보다는 객관에, 감성보다는 이성에, 이해보다는 책임 쪽으로 무게가 더해간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육필도 육성도 사라져가는 문명 사회에서, 희미해져 버린 아날로그적 흔적을 그리워하며 한쪽 귀퉁이가 무너진 듯한 불균형을 느끼는 것이 비록 나 한 사람뿐일까. 기계문명의 편함을 누리는 대신에 어쩌면 우리는 그 이상의 소중한 무엇인가를 잃어버리고 있는 지도 모른다.
손으로 쓴 편지에서는 세월이 지나도 숨결이 느껴진다. 영혼의 숨결이 스며든 살구빛 체온을 글자마다 품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녀의 체온이 묻어있는 편지를 받은 행운의 주인공이 누구였을까. 작가가 쓴 문학적인 글이라서 감동을 받은 게 아니기에 내용이 어땠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편지에 배어있던 살 냄새를, 그 따스한 숨결을 오래 기억하고 싶을 따름이다.
 
< 수필가 - 캐나다 한인문협 회원, 한국 문인협회 회원 >


런던올림픽은 끝났지만 아직도 자리에 누우면 가끔씩 박주영의 감각적인 드리블, 양학선의 그림 같은 착지 장면이 아른거릴 때가 있다. 장미란, 손연재의 눈물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이보다 더 전이긴 하지만 개막행사 2부, 병상 위에서 뛰어놀던 영국 아이들 모습도 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일부에선 좌파 올림픽이라 비난했다지만 무상의료제도(NHS)에 대한 영국의 자부심이 오롯이 담겨 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상징되는 영국 복지제도는 지식인사회의 정책 개발과, 정치권의 타협을 몰아붙인 대중들의 힘이 결합해 만들어낸 작품이다. 전문가들의 복지국가 청사진이 자유당 사회개혁가 윌리엄 베버리지 주도로 1942년 발간한 ‘베버리지 보고서’에 담겼고, 그 핵심이 무상의료였다. 수십만부나 팔릴 정도로 보고서가 대중들의 열광적 지지를 받았는데도 기득권 세력을 대변한 처칠의 보수당은 이를 외면했다가 총선에서 쓴맛을 봐야 했다. 보수당과 영국의사협회의 저항을 무력화시킨 건 노동당에 대한 지지로 복지사회에 대한 기대를 폭발시킨 유권자들이었다. 이후 1979년 대처의 보수당 정부가 들어선 뒤 89년부터 일부 시장원리를 도입하는 등 변화가 있었으나 무상의료의 큰 틀은 흔들림이 없었다.

좀 다른 얘기지만, 핀란드의 교육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시민들의 압도적 지지가 바탕이 됐다. 1966년 제1당이 된 사회민주당은 인민민주당과 연립정부를 꾸렸고 다른 정당까지 가세해 범정파적으로 ‘교육개혁’을 최우선 목표로 정했다. 이후 정권은 바뀌었으나 ‘평등과 협동’ 원칙은 손대지 않았다. 초당적으로 교육개혁의 방향과 원칙에 합의한 뒤 세부 설계는 국가교육청장을 비롯한 교육전문가들에게 맡겼다. 교사 출신의 에르키 아호는 1972년부터 1991년까지 20년간 국가교육청장을 연임하며 오늘날 세계 제1로 평가받는 핀란드 교육개혁을 완성해냈다.

올림픽뿐 아니라 이제는 우리 정치에서도 ‘양학선2’ 같은 남부럽잖은 정책이 나올 때가 됐다. 대선을 앞두고 일자리와 복지, 경제민주화가 최대 쟁점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지만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는 게 교육문제다. 우리 교육은 ‘위기’에서 ‘붕괴’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사교육비는 살인적 수준으로 치솟고 청소년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1위다. 그런데도 교육정책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평등’에서 ‘경쟁’으로 냉·온탕을 오가는 바람에 학생들만 실험실 모르모트처럼 피해를 보고 있다. 백낙청 교수가 이미 갈파했듯이 2013년 체제에서 가장 달라져야 할 것도 교육이다. 이제는 혁명적 수준의 개혁이 필요하고 초당적 대책이 나오지 않으면 안 될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

정파를 넘어 교육개혁기구를 설치하자는 제안이 나온 지는 10년 이상 됐고, 여야와 진보·보수단체 모두 사실 비슷한 얘기를 해왔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도 한나라당과 민주당, 전교조와 한국교총 모두 국가교육위나 교육개혁국민회의 등 이름만 달랐지 초당적 기구가 필요하다고 했다. 지난해 6월 진보교육감들의 교육혁신 선언에 이어 최근 교육개혁100인위원회 등 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초당적인 국가교육위원회 설치 운동을 벌이고 있다. 국회에 교육계획위원회를 두어 정권과 무관하게 장기계획을 세우자는 심상정 통합진보당 의원의 제안은 검토할 만하다.

교육혁명의 초석을 놓는 데는 이번 국회가 적기다. 대통령 선거 뒤엔 임기 안에 실적을 내려는 욕심 때문에 장기적 계획도, 초당적 접근도 어렵다. 여야가 협력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 힘은 유권자들만이 갖고 있다. 깨어 있는 시민들이 움직일 때다.
 
< 김이택 -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