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의 공천뇌물 의혹 사건은 박근혜 의원의 국가지도자로서의 자질을 검증하는 중요한 시험대다. 단순히 박 의원이 공천 당시 비상대책위원장으로서 당을 이끈 책임자였다는 이유만은 아니다. 이런 종류의 사안에 대처하는 모습을 통해 정치지도자의 리더십, 책임의식, 조직 운영 능력 등이 상당 부분 드러나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번 사건에 관한 한 박 의원의 성적표는 낙제에 가깝다.
우선 박 의원의 상황 파악 능력의 부재다. 박 의원은 애초 “검찰에서 한점 의혹 없이 밝혀야 할 문제”라는 원론적인 언급을 했다가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발언의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이를 두고는 측근 참모들이 박 의원에게 ‘청와대 기획설’ 등 사건의 실체와는 거리가 먼 보고를 한 탓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그러나 이런 보고에 솔깃한 것부터가 박 의원의 잘못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윗사람에게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인물들을 주변에 포진시킨 박 의원의 조직 운영과 용인술의 실패다.
 
 ‘돈 공천’ 의혹은 친박이 공천 심사를 전횡할 때부터 제기됐다. 일방의 전횡은 밀실, 담합, 부정으로 이어진다. 공천 혁신의 뼈대는 이를 막기 위한 민주성과 투명성의 확보였다. 그러나 여론조사가 조작되고, 전과 경력이 검증에서 누락되는 등의 왜곡이 있었다는 의혹은 초기부터 잇따랐다. 공천의 비민주성이나 일방통행식 경선의 비민주성은 다를 게 없다. ‘돈 공천’이 사실로 확인될 경우 황우여 대표가 책임진다고 합의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 전형적 눈속임이다. 그는 박 후보의 ‘대리인’일 뿐이다. 남경필 의원의 주장대로 공천 의혹과 불공정 경선 책임의 정점엔 박 후보가 있다. 공천을 총괄한 것도 그였고, 현 지도부를 구성한 것도 그였으며, 경선 룰도 마찬가지다. 법적인 책임이 없다며, 마지못한 유감 표시로 발을 빼려고 하는 것은 지도자로서 자격 미달이다.
 
새누리당에 진정성이 있다면, 박 후보의 책임과 함께 문제의 근원인 그의 민주주의 인식을 따져야 한다. 이미 드러난 박 후보의 인식을 용인한다면, 그는 밀실 공천이든 추대용 경선이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쿠데타나 군사변란으로 말미암은 헌정 중단과 국민주권 폐기를 불가피한 선택으로 여기는 신념 아래서, 못할 짓이 무엇이겠는가. 박 후보가 유신의 전체주의적 동원체제를 강제한다고 해도 거부할 수 없다. 쿠데타를 불가피하게 여기는 인식에 따르면서, 당 운영 과정에서 나타난 비민주성과 일방주의를 비난하는 건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과연 새누리당은 민주정당을 지향하는가, 이번 기회에 솔직하게 점검하기 바란다.


[사설] 신음하는 4대강, 어찌할 것인가

● 칼럼 2012. 8. 14. 15:16 Posted by SisaHan
4대강 사업으로 거대한 보에 갇힌 강물이 썩어가고 강 주변이 황폐화돼 가고 있다. 정부는 4대강 공사가 끝나면 맑아진 강물에서 강수욕을 즐기고, 강변공원에선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처럼 선전했지만 말짱 빈말이 돼버렸다. 강 주변 시설을 넘겨받아 관리해야 하는 지방자치단체들은 막대한 유지관리비용 때문에 벌써 골머리를 앓고 있다. 도대체 왜 막대한 혈세를 들여 4대강 사업을 밀어붙였는지 한숨만 나올 뿐이다.
가장 심각한 게 수질 악화다. 이달 초 <한겨레>가 녹색연합과 공동조사한 결과를 보면, 남조류의 일종인 ‘마이크로시스티스’가 낙동강 중류인 대구 주변까지 북상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는 고온현상 탓이라고 하지만 전문가들은 4대강 사업으로 보에 막힌 강물의 흐름이 느려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낙동강 중류에서 남조류가 발견된 것은 4대강 사업 이전에는 없었던 현상이라고 하니, ‘고인 물은 썩는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있는 셈이다.
 
더 큰 문제는 이 남조류가 식수원까지 오염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잘 알려진 대로 마이크로시스티스는 간질환을 일으키는 독성 물질이다. 이를 제대로 정수하지 않고 장기간 마실 경우 인체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현재 낙동강 정수장 중 구미정수장 등 몇몇 정수장은 마이크로시스티스를 걸러낼 장치조차 없다고 한다. 남조류 발생 원인을 원천적으로 제거하기 이전이라도 우선 정수시설만이라도 보완해 수돗물 안전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4대강에 인공으로 조성된 강변공원 234곳도 애물단지다. 수자원공사가 직접 관리하는 곳은 그나마 나은 모양이지만 대부분의 강변공원은 사실상 방치되고 있다고 한다. 애초부터 얼마의 비용을 들여 어떻게 관리할지에 대한 세부적인 계획 없이 우선 만들어 놓고 보자며 밀어붙인 결과다. 이를 넘겨받아 해마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유지관리해야 하는 지자체로서는 답답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앞으로 이런 강변공원을 그대로 유지할지 아니면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게 자연의 흐름에 맡길지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
 
4대강 사업은 이제 사실상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 이명박 정부는 4대강을 거대한 ‘물 항아리’로 만드는 데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성과에만 집착해 부작용을 애써 무시할 게 아니라 잘못된 것은 고치고 부족한 것은 보완해야 한다. 보를 아예 없애는 게 옳다면 그렇게라도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4대강 사업에 반대 목소리를 내왔던 환경단체 등과 머리를 맞대야 함은 물론이다.


스포츠가 아름다운 것은 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규칙은 최소한의 예절을 제도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가령 축구에서 오프사이드는 공격자들이 공격해 들어갈 때 골키퍼를 제외한 최종 수비수보다 한 사람이라도 더 미리 앞으로 나가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인데, 매우 예절 바른 인간주의적 규칙이 아닐 수 없다. 실제 전쟁에서 이 오프사이드 규칙이 적용된다고 생각해보면 상상만으로도 재미있다. 
규칙은 모두에게 공정하게 부여된다는 게 스포츠의 첫 번째 절대적 룰이다. 예외는 있을 수 없다. 가령 400m 달리기에 출전한 남아공의 오스카 피스토리우스 선수의 경우, 두 다리 모두 보철의족을 달고 400m에 출전했으나 장애인이라고 해서 그에게 특전을 주진 않는다. 1948년 런던올림픽에선 외팔인 헝가리의 카로이 터카치 선수가 속사권총에서 금메달을 받았는데 그때 역시 특별대우는 전무했다. 예외를 허용하면 전체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스포츠의 두 번째 절대적 룰은 시간이다. 점수로 승부를 제한하지 않는 어느 종목, 어느 선수에게든지 똑같이 일정한 시간이 제공된다. “시간은 만물을 만든다”는 베다경전의 경구처럼, 시간은 “스포츠를 만든다”. 시간 제한이 없다면 스포츠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다. 스포츠에서 시간은 최소한의 모럴(moral)이자 최대한의 전략이다. 시간 제한이 없다면 전술과 작전도 사실상 필요 없으며, 스포츠가 스포츠로서 설 자리를 온전히 잃게 될 수밖에 없다. 
펜싱 에페 4강전에서 1초의 오심으로 분패한 신아람 선수의 경우가 그렇다. 국제펜싱연맹이 “미안하다”며 공식적으로 오심을 인정했는데도 끝내 판정을 번복하지 않은 바르바라 차르 심판이나, 보도된 게 맞다면, 울고 있는 신아람에게 다가와 “나는 1초에도 너를 세 번은 찌를 수 있다”고 말한 독일 선수 브리타 하이데만이나, 스포츠의 모럴을 팽개쳤다는 점에서 보면 그 심판에 그 선수다 싶다. 쿠베르탱 남작의 순수했던 올림픽 정신이 이미 세계 자본의 폭력적 논리에 대부분 유린당한 시대니, 이런 건 어쩌면 소소한 시빗거리에 불과할는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우리가 심판의 오심에 기대어 이겼다면, 불건강한 1초 때문에 승자가 된 독일 선수 입장이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국제펜싱연맹은 물론 독일 선수 브리타 하이데만의 인터넷 누리집까지 우리 네티즌들의 항의성 공격으로 마비됐다는 말이 들린다. 심지어 그녀의 남자친구 홈피까지 그런 상태라고 한다. 애국적인 분노는 당연한 것이지만, 그러나 우리와 독일의 입장이 바뀌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상상해보면 고개가 갸웃해진다. 대선 국면이라 연일 대통령 잠재적 후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생중계받는 때여서 더욱 그렇다. 우리가 지금의 대통령을 뽑을 때, 그분의 도덕성에 대해 깊이 신뢰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생각해본다. 어쩌면 우리는 ‘어떤 결과’를 예감하면서, 그분 개인이 ‘성공신화’를 써왔으므로, 모럴이나 규칙 따위는 슬쩍 탁자 밑으로 내려놓고 오로지 나만의 성공신화를 욕망하며 그분에게 호루라기를 불어줬던 건 아니었을까.
 
바르바라 차르 심판이 의도를 가지고 그랬는지 어쩌다가 실수로 그랬는지는 확언할 수 없다. 어쨌든 오심을 알면서도 끝내 자기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심판과 울고 있는 신아람 선수에게 다가와 자신은 “1초에 세 번”도 찌를 수 있으니 승복하라는 독일 선수의 뻔뻔한 모습에서 나는 요즘의 우리 정치판을 본다. 어찌 정치판뿐이랴. 룰을 지키지 않아도 일단 이기고 보면 지키지 않은 룰에 대해 얼마든 명분을 만들어 미사여구로 덮고 갈 수 있다는 ‘승자중심주의’ 생각이 보편적 관행이 되어버린 것이 우리 사회니 하는 말이다. 
우수한 심판은 모럴에 대한 견고한 자기확신과 더불어 눈이 밝아야 한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자고 오로지 내게 유리한 선수의 손을 들어주고 막상 덕본 게 없으면 하루아침에 딴소리를 하는 것은 죄에 가깝다. 
5년 만에 돌아오는 이번 ‘경기’에서 우리는 “1초의 오심”도 허용해선 안 된다. 나의 심판에 의해 바로 나 스스로가 먼저 억울한 ‘신아람’이 되는 건 최소한 막아야 한다.

< 박범신 작가·상명대 석좌교수 >


[1500자 칼럼] 소금 맛

● 칼럼 2012. 8. 1. 15:56 Posted by SisaHan
김치 냉장고를 열었다. 뜻하지 않은 화공약품 냄새가 후각에 와 닿는다. 잘 익은 김치를 기대했는데 가슴이 철렁했다. 열과 성을 다한 노역의 댓가로는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치가 물러서 고생했던 기억은 있어도 이런 경우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여름 편하게 지낼 생각으로 배추 두 상자를 덜컥 담궜는데 이 많은 김치를 어떻게 소화해야 할 지 아득하기만 하다.
대체 그 냄새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일의 경과를 되짚어 보고 재료도 하나씩 점검해 본다. 문득 배추를 절일 때부터 이 냄새가 진동했던 기억이 나서 쓰다 남은 소금봉지를 열어보았다. ‘내가 변하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냐.’는 듯, 소금봉지는 싱그러운 바다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수 십 년 애용 해 온 굵은 바다소금의 변질이 아님을 확인하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리곤 원인 규명은 뒤로 미룬 채 달콤했던 소금밭 여행으로 빠져들었다.
 

최근 토론토 하이킹 그룹 맴버들과 미국 서부 공원들을 하이킹했다. 여행길 초입에서 만난 소금밭은 특이한 자연 환경만큼 특이한 경험을 갖게 했다. 일명 소금호수(Bed Water lake/ 마시기에 좋지 않은 물)라고 명명한 그곳은 모하비 사막 북쪽에 자리한 국립공원 데스 벨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미국에서 가장 기온이 높은 지역으로 메마르고 뜨거우며 고도가 낮은 곳으로 정평이 나 있다. 지면이 해수면보다 무려 86m나 낮은 그곳은 미국뿐만 아니라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곳이기도 하다.
6월초의 덜 영근 여름빛에도 데스 벨리 계곡은 다양한 색깔로 불타고 있었다. 살인적인 더위와 1500여 미터를 단숨에 오르내려야하는 좁은 비탈길로 인해 ‘데스 벨리(Death Valley)’라는 악명 높은 지명이 붙여졌지만 우리의 소금밭 행차는 무난했다. 일행을 실은 차가 계곡 모퉁이를 돌아 나올 때 마다 사막의 신기루는 바다를 연출해 놓았었다. 끝없이 펼쳐진 소금밭을 향하며 바다 밑 용궁을 꿈꾸고 있을 즈음, 뜻밖에 반짝반짝 빛나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우리를 맞아주었다. 소금이 덧칠되어 크리스탈처럼 빛나는 식물, 살아있음이 기적인 듯 했다.
 
거친 언덕과 높은 산세에 둘러싸인 소금밭 분지에 발을 내린 나는 앞산 어깨쯤에 붙여진, ‘sea level -86m’란 표지를 보고 잠시 얼떨떨했다. 마치 바다 속 깊숙이 가라앉은 느낌이랄까. 물고기 떼며 산호초가 이리저리 유영하는 듯한 착각과 함께 소금밭 탐험에 들어갔다. 넓은 분지에 가득 피어올린 소금꽃, 몇 억 겁의 세월이 거쳐 갔는지 모를 일이었다. 원거리의 바닷물이 유입되기에는 불가능한 거리의 사막에 소금층 두께가 1000피트가 넘는다는데 그 형성된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다니 기이한 자연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이를 두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억측 주장을 내어 놓았을까. 덩달아 나도 ‘한 줄..... .’ 하다가 말문을 닫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청색 하늘, ‘태초의 하늘색이 이와 같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일행은 샌들을 벗어들고 까칠한 소금길을 걸었다. 촉촉하고 따끈한 감촉은 온갖 사념이며 잡병을 일시에 물리는 것 같았다. 문뜩 소금 한 조각을 입에 물었다. 여태까지 먹어 본 소금 중에서 가장 깔끔한 맛이었다. 일행 중 S도 그렇게 느꼈던지 가져다가 배추 절였으면 좋겠단다. 기특한 여인의 발상에 잠시 웃다가 배추라는 어휘 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시 착각을 했었나 보다. 좀 전에 안심했던 그 소금은 오래전의 것이었고 근래에 구입한 것은 이미 그때 사용을 다 했으니 냄새의 주범은 아직도 모호한 채다. 제발, 이제나 저제나 한결같은 소금 맛이었으면 여한이 없겠다.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한국문단 등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