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 정계에 ‘안철수 현상’은 마치 외계인의 습격과 같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익숙한 관념들로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이다. 현실의 권력질서를 뒤흔드는 무서운 힘으로 엄습해오고 있다. 
이 외계인은 안철수 원장이 아니다. 안철수 현상을 만들어낸 수많은 시민들이다. 이들에게 정치인과 정당들은 외계인이었다. 선거철만 되면 인간의 말을 하고 심지어 인간을 사랑하기도 하지만, 선거만 끝나면 인간이 알 수 없는 세계에 살면서 인간의 삶을 좌우한다. 참다못한 인간들은 정치를 습격했다. 그들이 외계인이 되어 정치를 덮쳤다. 저비용 고효율의 한국판 점령운동이다. 
이처럼 정치와 시민이 서로에게 외계인이라는 것은 둘 사이에 쌍방적인 낯섦과 소외의 협곡이 놓여 있다는 뜻이다. 정당과 시민의 간극, 정당일체감의 약화, 정당과 정치인에 대한 불신은 많은 선진 민주주의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이다. 그 저변에는 탈산업화, 개인주의화, 정보화, 네트워크화 등의 거대한 사회변동의 흐름이 있다. 시민들은 더 많은 주권, 더 투명한 권력, 더 친근한 정치를 원하고 있고, 그 욕구를 채워주지 못하는 정치현실과 충돌하고 있다.
 
이런 변화들은 각 나라의 전통과 제도에 따라 각기 다른 결과를 낳는다. 유연하고 역동적인 정치체제를 가진 나라에서는 새로운 사회적 욕구가 정당정치로 부드럽게 반영된다. 반면 한국은 제왕적 대통령제, 소선거구제 등의 제도 구조로 인해 구석구석 승자독식의 질서가 지배하는 경직된 체제다. 이런 환경에서 소수정당들은 득표율 부족으로 자연소멸하거나, 집안싸움에 몰두하는 자폐적 단체로 고립됐다. 
현재의 주어진 제도적 조건에선 양대 정당이 변화의 욕구를 반영해야 했다. 하지만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 모두 다수 시민들의 신뢰와 지지를 끌어내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세상은 광속으로 변하고 있는데, 정치는 박정희·전두환 세력과 김대중·노무현 세력의 대결을 반복했다. 안철수 현상은 이제 역사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싶다는 집단적 소망의 표현이다. 
하지만 안철수 현상이 정당정치에 대한 혐오 때문에 생겼다는 단순한 해석은 지난 몇년간의 의미심장한 변화들을 놓치고 있다. 한국은 지금 정당정치의 종언을 앞두고 있는 게 아니라 이제 막 본격적인 정당정치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명박 정권하에서 시민들은 두 가지 의미에서 권력에 눈을 떴다. 정치권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고, 시민권력이 정치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경험했다. 이제껏 시민들이 선거정치에 이토록 열렬히 참여한 적이 없다.
 
민주당 역시 정당정치의 새로운 단계로 들어서는 중요한 변화를 겪고 있다. 민주당은 경제민주화와 보편적 복지 등, 한국 사회의 경제적 균열구조를 반영하는 일련의 정책노선들을 대폭 수용했다. 인적으로도 그동안 당 외부에 있던 유능한 정책통들을 국회의원이나 보좌진으로 대거 영입했다. 차세대 정치계급이 서서히 형성되고 있다. 그러나 혁신은 느리게 진행되고 있고, 패러다임 이동의 결정적 문턱을 아직 넘지 못했다. 
안철수는 계승과 혁신이 함께 가는 이행을 위한 선택이다. 안철수가 운명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국민이 안철수의 운명을 선택한다. 지금 안철수 원장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2040세대’가 원하는 것은 성인도, 초인도, 의인도 아니다. 낡은 판을 흔들어 새 시대에 문을 열어줄 통로다. 그 문을 넘어 외계인들이 정치와 만날 때, 정치와 시민은 더 이상 서로에게 외계인이 아니다. 정당정치가 무너지는 게 아니라, 정당정치의 새로운 역사적 단계를 위한 문턱을 넘는 것이다.

< 신진욱 - 중앙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


새누리당의 공천뇌물 의혹 사건은 박근혜 의원의 국가지도자로서의 자질을 검증하는 중요한 시험대다. 단순히 박 의원이 공천 당시 비상대책위원장으로서 당을 이끈 책임자였다는 이유만은 아니다. 이런 종류의 사안에 대처하는 모습을 통해 정치지도자의 리더십, 책임의식, 조직 운영 능력 등이 상당 부분 드러나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번 사건에 관한 한 박 의원의 성적표는 낙제에 가깝다.
우선 박 의원의 상황 파악 능력의 부재다. 박 의원은 애초 “검찰에서 한점 의혹 없이 밝혀야 할 문제”라는 원론적인 언급을 했다가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발언의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이를 두고는 측근 참모들이 박 의원에게 ‘청와대 기획설’ 등 사건의 실체와는 거리가 먼 보고를 한 탓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그러나 이런 보고에 솔깃한 것부터가 박 의원의 잘못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윗사람에게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인물들을 주변에 포진시킨 박 의원의 조직 운영과 용인술의 실패다.
 
 ‘돈 공천’ 의혹은 친박이 공천 심사를 전횡할 때부터 제기됐다. 일방의 전횡은 밀실, 담합, 부정으로 이어진다. 공천 혁신의 뼈대는 이를 막기 위한 민주성과 투명성의 확보였다. 그러나 여론조사가 조작되고, 전과 경력이 검증에서 누락되는 등의 왜곡이 있었다는 의혹은 초기부터 잇따랐다. 공천의 비민주성이나 일방통행식 경선의 비민주성은 다를 게 없다. ‘돈 공천’이 사실로 확인될 경우 황우여 대표가 책임진다고 합의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 전형적 눈속임이다. 그는 박 후보의 ‘대리인’일 뿐이다. 남경필 의원의 주장대로 공천 의혹과 불공정 경선 책임의 정점엔 박 후보가 있다. 공천을 총괄한 것도 그였고, 현 지도부를 구성한 것도 그였으며, 경선 룰도 마찬가지다. 법적인 책임이 없다며, 마지못한 유감 표시로 발을 빼려고 하는 것은 지도자로서 자격 미달이다.
 
새누리당에 진정성이 있다면, 박 후보의 책임과 함께 문제의 근원인 그의 민주주의 인식을 따져야 한다. 이미 드러난 박 후보의 인식을 용인한다면, 그는 밀실 공천이든 추대용 경선이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쿠데타나 군사변란으로 말미암은 헌정 중단과 국민주권 폐기를 불가피한 선택으로 여기는 신념 아래서, 못할 짓이 무엇이겠는가. 박 후보가 유신의 전체주의적 동원체제를 강제한다고 해도 거부할 수 없다. 쿠데타를 불가피하게 여기는 인식에 따르면서, 당 운영 과정에서 나타난 비민주성과 일방주의를 비난하는 건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과연 새누리당은 민주정당을 지향하는가, 이번 기회에 솔직하게 점검하기 바란다.


[사설] 신음하는 4대강, 어찌할 것인가

● 칼럼 2012. 8. 14. 15:16 Posted by SisaHan
4대강 사업으로 거대한 보에 갇힌 강물이 썩어가고 강 주변이 황폐화돼 가고 있다. 정부는 4대강 공사가 끝나면 맑아진 강물에서 강수욕을 즐기고, 강변공원에선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처럼 선전했지만 말짱 빈말이 돼버렸다. 강 주변 시설을 넘겨받아 관리해야 하는 지방자치단체들은 막대한 유지관리비용 때문에 벌써 골머리를 앓고 있다. 도대체 왜 막대한 혈세를 들여 4대강 사업을 밀어붙였는지 한숨만 나올 뿐이다.
가장 심각한 게 수질 악화다. 이달 초 <한겨레>가 녹색연합과 공동조사한 결과를 보면, 남조류의 일종인 ‘마이크로시스티스’가 낙동강 중류인 대구 주변까지 북상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는 고온현상 탓이라고 하지만 전문가들은 4대강 사업으로 보에 막힌 강물의 흐름이 느려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낙동강 중류에서 남조류가 발견된 것은 4대강 사업 이전에는 없었던 현상이라고 하니, ‘고인 물은 썩는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있는 셈이다.
 
더 큰 문제는 이 남조류가 식수원까지 오염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잘 알려진 대로 마이크로시스티스는 간질환을 일으키는 독성 물질이다. 이를 제대로 정수하지 않고 장기간 마실 경우 인체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현재 낙동강 정수장 중 구미정수장 등 몇몇 정수장은 마이크로시스티스를 걸러낼 장치조차 없다고 한다. 남조류 발생 원인을 원천적으로 제거하기 이전이라도 우선 정수시설만이라도 보완해 수돗물 안전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4대강에 인공으로 조성된 강변공원 234곳도 애물단지다. 수자원공사가 직접 관리하는 곳은 그나마 나은 모양이지만 대부분의 강변공원은 사실상 방치되고 있다고 한다. 애초부터 얼마의 비용을 들여 어떻게 관리할지에 대한 세부적인 계획 없이 우선 만들어 놓고 보자며 밀어붙인 결과다. 이를 넘겨받아 해마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유지관리해야 하는 지자체로서는 답답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앞으로 이런 강변공원을 그대로 유지할지 아니면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게 자연의 흐름에 맡길지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
 
4대강 사업은 이제 사실상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 이명박 정부는 4대강을 거대한 ‘물 항아리’로 만드는 데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성과에만 집착해 부작용을 애써 무시할 게 아니라 잘못된 것은 고치고 부족한 것은 보완해야 한다. 보를 아예 없애는 게 옳다면 그렇게라도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4대강 사업에 반대 목소리를 내왔던 환경단체 등과 머리를 맞대야 함은 물론이다.


스포츠가 아름다운 것은 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규칙은 최소한의 예절을 제도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가령 축구에서 오프사이드는 공격자들이 공격해 들어갈 때 골키퍼를 제외한 최종 수비수보다 한 사람이라도 더 미리 앞으로 나가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인데, 매우 예절 바른 인간주의적 규칙이 아닐 수 없다. 실제 전쟁에서 이 오프사이드 규칙이 적용된다고 생각해보면 상상만으로도 재미있다. 
규칙은 모두에게 공정하게 부여된다는 게 스포츠의 첫 번째 절대적 룰이다. 예외는 있을 수 없다. 가령 400m 달리기에 출전한 남아공의 오스카 피스토리우스 선수의 경우, 두 다리 모두 보철의족을 달고 400m에 출전했으나 장애인이라고 해서 그에게 특전을 주진 않는다. 1948년 런던올림픽에선 외팔인 헝가리의 카로이 터카치 선수가 속사권총에서 금메달을 받았는데 그때 역시 특별대우는 전무했다. 예외를 허용하면 전체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스포츠의 두 번째 절대적 룰은 시간이다. 점수로 승부를 제한하지 않는 어느 종목, 어느 선수에게든지 똑같이 일정한 시간이 제공된다. “시간은 만물을 만든다”는 베다경전의 경구처럼, 시간은 “스포츠를 만든다”. 시간 제한이 없다면 스포츠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다. 스포츠에서 시간은 최소한의 모럴(moral)이자 최대한의 전략이다. 시간 제한이 없다면 전술과 작전도 사실상 필요 없으며, 스포츠가 스포츠로서 설 자리를 온전히 잃게 될 수밖에 없다. 
펜싱 에페 4강전에서 1초의 오심으로 분패한 신아람 선수의 경우가 그렇다. 국제펜싱연맹이 “미안하다”며 공식적으로 오심을 인정했는데도 끝내 판정을 번복하지 않은 바르바라 차르 심판이나, 보도된 게 맞다면, 울고 있는 신아람에게 다가와 “나는 1초에도 너를 세 번은 찌를 수 있다”고 말한 독일 선수 브리타 하이데만이나, 스포츠의 모럴을 팽개쳤다는 점에서 보면 그 심판에 그 선수다 싶다. 쿠베르탱 남작의 순수했던 올림픽 정신이 이미 세계 자본의 폭력적 논리에 대부분 유린당한 시대니, 이런 건 어쩌면 소소한 시빗거리에 불과할는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우리가 심판의 오심에 기대어 이겼다면, 불건강한 1초 때문에 승자가 된 독일 선수 입장이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국제펜싱연맹은 물론 독일 선수 브리타 하이데만의 인터넷 누리집까지 우리 네티즌들의 항의성 공격으로 마비됐다는 말이 들린다. 심지어 그녀의 남자친구 홈피까지 그런 상태라고 한다. 애국적인 분노는 당연한 것이지만, 그러나 우리와 독일의 입장이 바뀌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상상해보면 고개가 갸웃해진다. 대선 국면이라 연일 대통령 잠재적 후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생중계받는 때여서 더욱 그렇다. 우리가 지금의 대통령을 뽑을 때, 그분의 도덕성에 대해 깊이 신뢰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생각해본다. 어쩌면 우리는 ‘어떤 결과’를 예감하면서, 그분 개인이 ‘성공신화’를 써왔으므로, 모럴이나 규칙 따위는 슬쩍 탁자 밑으로 내려놓고 오로지 나만의 성공신화를 욕망하며 그분에게 호루라기를 불어줬던 건 아니었을까.
 
바르바라 차르 심판이 의도를 가지고 그랬는지 어쩌다가 실수로 그랬는지는 확언할 수 없다. 어쨌든 오심을 알면서도 끝내 자기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심판과 울고 있는 신아람 선수에게 다가와 자신은 “1초에 세 번”도 찌를 수 있으니 승복하라는 독일 선수의 뻔뻔한 모습에서 나는 요즘의 우리 정치판을 본다. 어찌 정치판뿐이랴. 룰을 지키지 않아도 일단 이기고 보면 지키지 않은 룰에 대해 얼마든 명분을 만들어 미사여구로 덮고 갈 수 있다는 ‘승자중심주의’ 생각이 보편적 관행이 되어버린 것이 우리 사회니 하는 말이다. 
우수한 심판은 모럴에 대한 견고한 자기확신과 더불어 눈이 밝아야 한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자고 오로지 내게 유리한 선수의 손을 들어주고 막상 덕본 게 없으면 하루아침에 딴소리를 하는 것은 죄에 가깝다. 
5년 만에 돌아오는 이번 ‘경기’에서 우리는 “1초의 오심”도 허용해선 안 된다. 나의 심판에 의해 바로 나 스스로가 먼저 억울한 ‘신아람’이 되는 건 최소한 막아야 한다.

< 박범신 작가·상명대 석좌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