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방송>(MBC) 노동조합이 오늘부터 업무에 복귀한다. 지난 1월 말 김재철 사장 퇴진과 공정방송 회복을 내걸고 시작한 지 170일 만이다. 간판급 앵커를 포함해 대부분의 기자와 PD, 기술직 등 역대 최고의 참여율을 기록했으며, 해고·정직 등 조합원의 희생 또한 역대 최고였다. 그만큼 공정방송에 대한 갈망은 뜨거웠고, 이 정권의 방송장악에 대한 분노는 컸다. 그러나 ‘정권 하수인’ 사장 아래서 회사가 회복 불능 상태로 망가지고 있으니 노조로서도 선택의 여지가 적었을 것이다. 이제 더 치열한 일상투쟁으로 공정방송을 회복하고 지켜내길 바란다.
사실 조합원의 희생은 막대했고 시민의 성원은 뜨거웠지만, 가시적 성과는 없다. 김 사장 퇴진이나 공정방송을 위한 제도 개선 등 어느 것 하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실망할 필요는 없다. 
이번 파업은 통상적 노사분규가 아니다. 김 사장 상대의 투쟁이 아니었다. 그와 같은 하수인을 보내 공영방송을 권력의 나팔수로 전락시키려 한 이 정권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이제 새누리당도 공영방송의 독립성과 자율성 확보 방안을 검토하기로 했고, 김씨의 퇴진은 물론 국회 청문회 개최에도 공감했다. 나름대로 큰 변화를 이끌어낸 것이다.
 
공정방송 회복에 시민의 참여를 이끌어낸 것도 기억해야 한다. 김 사장 구속 촉구 서명에 72만여명이 참여했고, 시민들은 ‘밥차 응원’ 혹은 대규모 플래시몹으로 이들을 격려했으며, 수많은 연예인이 불이익을 감수하고 이들 곁을 지켰다. 아무리 무모한 정권이라도 이제 시민의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MBC 파업을 단순한 노사분규로 간주했던 박근혜 의원의 인식이 공영방송의 독립성과 자율성 문제로 바뀐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 사장 아래서 MBC는 아무도 보지 않는 방송이 되고 있다. 간판 프로그램인 뉴스데스크마저 시청률 2%대로 추락했다. ‘큰집(청와대)에서 쪼인트를 까인’ 꼭두각시 사장이 쥐락펴락했으니 이런 결과는 불가피했다. 권력의 하수인이 아니라도 이제 파국적 경영위기에 책임을 지고 김 사장은 물러나야 할 판이다.
김 사장은 고참 방송인으로서 양심을 회복하기 바란다. 최선은 당장 물러나는 것이지만, 그 전이라도 6명의 해고를 포함해 150여명에 이르는 징계를 원상회복해야 한다. 공정성 확보 장치도 앞장서 마련해야 한다. 자신으로 말미암은 상처를 치유해야 하는 것이다. 보복 인사 따위는 낭설이길 바란다. 종편 등 상업방송을 위해 고의로 MBC를 파괴까지 해서야 되겠는가.


북한이 군 최고 실세인 리영호 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 겸 인민군 총참모장을 모든 직무에서 해임하기로 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어제 보도했다. 전날 노동당 중앙위원회가 정치국 회의를 열어 그를 ‘신병 관계’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정치국 위원,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을 비롯한 모든 직무에서 해임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신속한 보도도 이례적이지만, 김정은 정권의 핵심 실세이자 선군정치의 주축인 그의 전격 경질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다. 북의 상층부에 무슨 큰 변화가 일어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올 법하다.
리영호는 김정은 후계체제가 사실상 외부에 공표된 2010년 9월 제3차 노동당 대표자회에서 신설된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에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와 함께 선출됨으로써 김정일과 김정은 체제를 잇는 군부의 실세로 떠올랐다. 김정일 위원장 영결식 때는 운구차를 호위한 8명 가운데 한 명이었다. 최근까지도 김 제1비서의 군부대 시찰을 수행했고, 지난 8일 김 제1비서의 금수산궁전 참배 땐 그의 왼편을 지켰다. 신병 관계라는 설명이 미덥지 않은 이유다.
 
그의 정확한 경질 이유가 무엇인지 알 도리는 없다. 김 위원장의 사망 사실조차 며칠씩 숨길 정도로 북의 정보통제가 철저한데다 이명박 정부 들어 남북의 대화 통로가 꽁꽁 막혀 있는 탓도 크다.
그래도 몇 가지 추론은 가능하다. 첫째는 강온 노선투쟁의 결과일 가능성이다. 야전군 출신의 리영호는 군부 안에서도 보수강경파로 분류된다. 반면 지난 4월 제4차 당대표자회에서 총정치국장에 임명된 최룡해는 상대적으로 개혁·개방파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주목되는 것은 최근 부쩍 자주 보도되는 김 제1비서의 자유분방한 모습이다. 각종 행사에 부인으로 보이는 양장 차림의 젊은 여성을 대동하거나, 미키 마우스와 로키 영화가 배경으로 등장하는 모란봉악단의 공연을 관람하는 모습을 바깥세계에 공개하며 변화와 개방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또 김 위원장 세대의 인물을 자신에 맞는 젊은 세대로 교체하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물론 말 그대로 신병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북 상층부의 변화는 중·단기적으로 남북관계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정부는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 북 내부 움직임을 주시하고, 북의 변화가 정세 불안 요인이 되지 않도록 상황 관리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이 나라를 이끌겠다는 각 당의 대선 주자들도 북의 변화를 면밀히 관찰하고 올바른 대북정책을 고민해야 한다.


35주씩이나 가요 차트 1위를 기록하던 ‘동백아가씨’(이미자 노래)가 ‘왜색’이라는 이유로 돌연 방송에서 퇴출되던 시절, ‘그건 너’ 혹은 ‘거짓말이야’처럼 그들을 뜨끔하게 했던 제목의 노래들이 금지된 것은 당연했다. 그들은 직업군인의 애환을 담은 김민기의 ‘늙은 군인의 노래’까지 퇴행적이라며 금지곡에 올렸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시대의 어둠이 깊어갈수록, 노래는 활개를 쳤다. 비록 방송에서 퇴출되고 음반 발매는 금지되었지만, 노래는 대신 대중의 벗이 되고 위로가 되었다. 어디서건 노래 1발 장전에서 시작해 노래 마구 발사로 모임은 마무리됐다. 시절 좋은 때는 잊혀지고, 삶이 고통스럽고 시대가 암울하면 불러들이는 노래, 그 운명은 얼마나 기구한가.
가수 윤복희는 가사의 마디마다 ‘네가’라는 호칭이 등장하는 ‘여러분’을, 감히 전두환 안전에서 곧이곧대로 불렀다가 그날로 방송에서 퇴출당했다. 그 시절, 한국 대중음악의 살아있는 전설 조용필과 들국화의 명곡들이 줄줄이 금지곡 목록에 그 이름을 올렸으니, 특별한 뉴스도 아니었다. 조용필의 ‘나의 노래’는 가사가 천박하다고, 들국화의 ‘그것만이 내 세상’은 창법이 수준 미달이라는 이유였다. 두 곡 모두 우리 대중음악사를 빛낸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는 것들이었다.
 
그렇게 모욕당하고 능멸당했지만, 노래가 사라지는 법은 없었다. 오히려 더 친근한 대중의 벗이 되었다. 아니 심신의 허기와 갈증 속에서 사람들은 반려가 되는 노래를 찾았다. 노래는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이었다. 놀고 즐기는 대상이 아니라 함께 위로하고 함께 행진했다. 문제의 도종환 시인의 시처럼 노래는 ‘흔들리며 피는 꽃’이었고, 절망의 벽을 타고 넘는 ‘담쟁이’였다.
지난달 29일 집권여당의 ‘오너’ 박근혜 의원이 봄여름가을겨울의 김종진, 프로듀서 황세준 등 대중음악인들을 만났다. 그로서는 아주 특별한 만남이었다. 현안인 음원 사용료 징수 문제에 대한 의견을 듣는 자리였지만, 실은 대중음악계에 대한 러브콜이었다. 남경필 의원은 지난 7일 엠비시 파업 콘서트 ‘나는 그런 사람 아닙니다’에, 이른바 개념 가수들 틈에 게스트로 참석하기도 했다. 이들을 불러낸 것은 돌아온 노래의 강력한 힘이었다. 소비될 뿐인 댄스음악류와 달리, 대중을 움직이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으니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어떻게 외면할까.
잊혀지던 노래의 귀환은 이 정부의 비열함 덕택이었다. 과거 독재자처럼 물리적으로 억압하지는 않았지만 권력기구와 친정부 매체는 인격살인을 밥 먹듯이 하고, 밥그릇으로 굴종을 강요했다. 정적은 그렇다 해도, 눈 밖에 난 대중연예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영혼이 자유로운 연예인들은 거리로 나섰다. 거기서 상처받은 이들과 함께 분노하고 슬퍼하며 행진했다.
 
지난 4년, 역사상 최대의 콘서트 풍년을 이뤘던 것은 이런 까닭이었다. 촛불시위는 게릴라 콘서트를 일상화했고, 용산참사는 콘서트를 체계화했다. 남일당 골목에서 284회에 걸친 종교 행사가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는 동안, 앞뒤로 열린 콘서트는 상처받은 이들이 연대로써 상처를 극복하는 자리였다. 뒤이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죽음의 행렬 그리고 방송인 학살. 노래 없이는 견딜 수 없는 아픔이었고 슬픔이었다. 모든 의례는 노래로 진행됐다. 음악인들이 더이상 두려워할 건 없었다. ‘김재철 헌정 콘서트’에 참석한 ‘나가수’ 진행자이자 출연자인 이은미·박완규는 공정방송 투쟁을 고무했다. 이날 무대는 1980년대의 전설, 전인권과 들국화가 귀환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엊그제 정부는 도종환의 시 삭제 소동을 벌였다. 얼마나 가당찮았으면 곁눈질하던 새누리당조차 발끈했을까마는, 잊혀지던 시가 귀환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행운이다. 다만 시대의 명암에 따라 명멸하는 노래와 시의 운명이 기구하다. 메르세데스 소사와 파블로 네루다와 빅토르 하라, 마리아 파란두리와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고 밥 말리, 밥 딜런, 멜라니 사프카…. 시와 노래가 영혼의 별이 되어 항상 빛나는, 그런 세상을 꿈꾼다. 

< 한겨레신문 곽병찬 논설위원 >


[1500자 칼럼] 토론토 야외 미술전시회

● 칼럼 2012. 7. 16. 09:13 Posted by SisaHan
토론토 야외 미술전시회 (TOAE: Toronto Outdoor Art Exhibition)가 벌써 51회 째를 맞이한다고 한다. 매년 7월 초에 시청 앞 광장에서 하는 좀 특이해 보였던 그 전시회가 50년이 넘는 역사와 전통의 전시회로 성장한 것이 나에게는 감회가 새롭다. 내가 그 전시회에 대해 일찍부터 30 여년 전에 들어 알고있었던 이유는 그림을 그리던 한 친구 때문이었다. 그 친구는 오래 전 공부를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우리가 대학 1학년 때, 그 친구는 TOAE에 응모를 해 뽑혀서 전시회에 참가했다. 그가 상당히 흥분해 있던 모습이 지금도 눈 앞에 선하다. 나는 그가 자랑스럽기도 했고 한편으로 부러웠다. 이민 온지 몇 해 되지도 않았는데, 그런 큰 규모의 전시회에 당당하게 참석할 수 있다는 사실이…그러나 무슨 이유 때문이었는지 나는 가지 못했다. 전시회가 끝나고 친구는 한 유태인 변호사가 자신의 큰 그림을 사갔다고 아주 기뻐했다. 전혀 무명의 학생의 그림을, 그것도 큰 그림을 사갔다는 사실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나는 그가 전혀 그림을 팔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뙤약볕에 혼자 쭈그리고 앉아 있을, 그의 모습을 보기가 안쓰러워, 그리고 사람들이 그림에 대해 물어왔을 때도 아무 말도 못하고 쩔쩔매고 있을 모습을 보고싶지 않아 안갔는지도 몰랐다.

나는 한 동안 그림에 대해 무관심하게 지냈다. 금년에는 전시회를 6,7,8일에 걸쳐서 했는데, 공교롭게 내가 간 금요일 오후는 금년 들어 가장 무더운 날이었다. 서있기만 해도 숨이 막히고 땀이 흘렀다. 그럼에도 굳이 내가 간 이유는 그 전의 한 야외전시회에서 만난 친구(?) 때문이기도 했다. 그 전시회는 작은 규모의 전시회였는데, 유독 그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잠시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이 꽤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는 옛날의 내 친구처럼 이번 TOAE 전시회에 뽑힌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 그 때 다시 보자고 한 약속을 왠지 나는 꼭 지키고 싶었다. 그런 까닭에 금요일 밖에 시간이 없어 무리해서 간 것이었다. 360개가 넘는 텐트에, 거의 천 편이 넘는 작품을 감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시 작품들도 너무 다양하여, 도예, 유리 공예, 조각, 보석가공, 사진, 조각, 목공, 디지털 미디어, 유화, 수채화…, 없는 쟝르가 없었다. 사실 작품 전체를 감상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나중에 만난 친구의 말에 의하면 사람들은 한 번 오지않고 몇 번이고 다시 온다고 했다. 그림을 사는 사람들도 한 번 보고 결정하지 않고, 다시 와서 결정한다 했다.

이 야외 전시회가 좋은 점은 많은 중진 내지는 무명(?)의 예술가들과 직접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아직 유명화가가 아니어서 그런지 누군가 자신의 작품에 관심을 보이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물어보는 멍청한 질문에도 아주 성심성의껏 대답을 해주었다. 또 대부분의 화가들이 자신의 대표작을 그림엽서로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무료로 주었다. 그 엽서들을 모우는 재미도 보통이 아니었다. 그 엽서에는 자신의 홈페이지와 이 메일 주소가 있어, 그 들의 작품도 볼 수 있고 원하면 그들과 소통할 수가 있다. 그 전시장을 지나는 한 중간에서 눈에 확 띄는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전형적인 한옥 마을의 골목길이었다. 무엇에 끌린 듯 그 앞으로 간 나는 그 안에 앉아 있는 검은 머리의 학생(?)에게 한국분이냐고 물었다. 아주 친절한 여자분이었는데, 고향과 어린시절을 생각하며 그린 그림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대부분의 다른 그림들도 선이 굵은데다 원색적이고 밝은 색을 주로 쓴 개성있는 그림들이었다. 주로 사용하는 색들이 색동저고리의 색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왠지 다른 장소도 아니고 미술전시회에서 한국사람을 만났다는 사실이 기뻤다. 나중에 집에 와서 프로그램을 차분히 살펴보니 그 분외에도 대 여섯명의 한국 분이 있는데도 내가 날씨를 탓하며 대충 보고 지나쳤기에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년에는 꼭 다시 가서 그 분들 뿐만 아니라 전시된 작품들을 차분히 감상하고 싶다. 그 친구는 말했다. 전시된 작품들 중에 좋은 작품들이 너무 많다고….

<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