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색깔론’의 이중성과 허구

● 칼럼 2012. 6. 24. 18:58 Posted by SisaHan
선거 때마다 터져 나오는 색깔론을 보면서 분단체제가 수구세력에게는 역시 화수분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국가와 민족의 미래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내놓고 승부하기보다는 경쟁자에게 부정적인 딱지 붙이기를 통해서 이기려는 야비한 술수가 색깔론이다. 색깔론은 건강한 사회의 바탕이 되는 상식과 합리주의를 파괴하려 든다는 점에서 망국적인 존재다.
비근한 예로 ‘종북’ 문제를 보자. 색깔론자들이 주장하듯이 그렇게 나라를 위태롭게 만드는 ‘종북’이 있으면 법으로 잡아넣으면 될 일이다. 일반 형법도 모자라 국가보안법까지 갖추고 있는 나라에서 국가 안위를 위협하는 ‘종북주의자들’이 있다면 정치인이나 언론이 주야장천 법석을 떨 일이 아니라 법으로 처리하면 될 일이다. 만약 처벌할 만한 위험한 행동을 찾아내지 못했다면 그것은 종북이 양심의 문제이거나 과장된 표현이라는 뜻이다. 법적 제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종북 문제가 있다면 마녀사냥식이 아니라 사회적 공론의 장에서 건전한 토론을 통해 정리해 나가는 것이 순리다. 북한을 찬양만 해도 잡혀가는 나라에서 연일 대서특필되는 종북 얘기는 국민을 혼란스럽게 한다.
 
우리 현대사는 색깔론이 얼마나 기만적인지를 잘 보여준다. 역대 군부독재정권은 숱한 젊은이들을 용공으로 몰아 박해했다. 또한 많은 젊은이가 가족의 좌익 이력 때문에 사관학교나 국가 주요기관에 원서조차 낼 수 없었다. 연좌제 때문이다. 이 야만적인 제도가 얼마나 많은 청년들의 날갯죽지를 꺾어놓았는지 모른다.
지금은 널리 알려졌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젊은 시절 남로당 간부였으며, 중앙정보부를 창설한 김종필씨의 장인이 ‘대구폭동’ 때 피살된 남로당 거물인 박정희의 형이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들이 권력자가 되도록 용인한 한국 현대사의 관용도에 놀랐으며, 무엇보다도 연좌제에 걸려 고통을 받던 내 또래 젊은이들과 달리 박지만씨가 버젓이 육사에 들어갈 수 있는 모순적인 현실에 분노했다. 국가를 지킨다는 구실로 만들어진 연좌제가 정작 국가를 지킬 가장 큰 의무가 지워진 자들에게는 효력 불능이었다는 이 기막힌 불평등이 법을 파괴하고 상식을 유린하며 반칙과 특권이 활개를 칠 수 있는 자양분이었다.
색깔론의 비합리적인 이중성은 북한 인권 문제에서 잘 나타난다. 색깔론자들은 자유권을 억압받는 북한 주민들의 삶에 대해 우려를 표시한다. 그 연장선에서 인도주의적 대북 식량지원은 반인권적 통치를 하고 있는 북한 정권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일이라며 반대한다. 때로는 북한의 도발적 행동을 이유로 반대한다. 한쪽에서는 북한 주민의 인권을 고창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인권의 기초인 북한 주민의 생존권 보호를 위한 식량지원을 반대하는 것이다. 자기모순이다.
 
이들은 북한 인권문제 제기에 신중한 자세를 보이는 사람들을 서슴지 않고 ‘종북주의자’로 몰기도 한다. 북한 주민의 인권 현실에 가슴 아파하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적대적 대결을 하면서도 평화공존을 추구해야 하는 한반도 현실에서 인권문제 제기를 내정간섭으로 여기는 북한의 특성을 고려하여 신중을 기하자는 주장은 충분히 나올 수 있다. 이 주장에 동의하건 않건 관계없이, 국민의 안전과 한반도 평화를 위해 나온 의견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색깔론자들은 이를 엉뚱하게 ‘종북’으로 몰아간다. 우리 공동체의 안전과 이익을 기준으로 북한을 보려는 상식적인 관점을 찍어 누르고 북한에 유리한지 불리한지를 잣대로 세상을 보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그들이 정치가라면 어리석게도 주객전도의 정치를 하자는 것이다.
대선 국면을 맞이해서 색깔론이 기승을 부릴 조짐을 보인다. 민주주의와 평화, 민족화해를 추구하는 후보라면 이번에는 당당히 색깔론과 정면 대결해야 한다. 자신과 다르면 ‘종북’으로 몰고 자신만이 북한 인권의 옹호자인 양 처신하며 우리 사회를 호령하려는 이 이중적인 얼굴에 당당히 침을 뱉어야 한다. 그래서 2013년부터는 북한을 가장 미워하는 척하면서도 기실은 북한 때문에 먹고살며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색깔론이 설 자리를 없애야 한다.

< 이종석 - 전 통일부 장관 >


[사설] 산 넘어 산 유로존 위기

● 칼럼 2012. 6. 24. 18:57 Posted by SisaHan
그리스 재선거에서 구제금융 수용을 공약한 신민당이 파기를 주장한 시리자를 누르고 승리했다. 이로써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갔던 유럽 재정위기는 일단 봉합됐다. 유로화도 강세를 보이는 등 시장도 안도하는 분위기다. 신민당이 연정에 참여할 뜻을 비친 사회당과 손을 잡으면 과반 의석으로 연정을 구성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번 총선 결과만으로 그리스의 위기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며 유럽 재정위기의 불씨는 여전히 살아 있다. 그리스 새정부는 국민이 수용할 수 있을 만큼 구제금융 조건을 완화하고 가시적인 경제회복의 성과를 내야 한다. 그러나 구제금융의 열쇠를 쥔 독일은 구제금융 이행기간 연장은 검토할 수 있으나 조건 변경은 불가하다고 쐐기를 박았다. 그리스는 마이너스 성장이 장기화하면서 세입이 줄고 국고는 고갈되고 있다. 구제금융을 받아봐야 빚을 갚고 나면 남는 게 거의 없어 선택의 폭은 매우 좁다. 총선 결과에 관계없이 그리스 진출 외국 기업과 은행들이 출자 지분을 처분하거나 철수하는 상황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유로존 위기가 그리스를 넘어 경제규모가 훨씬 큰 스페인과 이탈리아로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스페인의 경우 국가 신용등급이 투기등급 직전 수준까지 떨어진 상태다. 스페인이 제한적 구제금융에 그치지 않고 전면적 구제금융을 신청할 가능성은 끈질기게 제기되고 있다. 만에 하나 그렇게 될 경우 스페인의 빚을 갚아줄 돈이 유럽에 없다는 점, 핵심국들이 스페인 국채를 대거 보유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더 큰 위기가 올 수 있다.
 
그리스 총선은 산 하나를 넘은 정도이며, 스페인과 이탈리아 등 넘을 과제들이 아직 많아 이제 1부 능선을 지난 데 불과하다는 신중론에 귀를 기울일 만하다. 오는 28일 열리는 유럽연합 정상회의에서 획기적 해법이 나오지 않을 경우 글로벌 금융시장은 언제든 다시 요동을 칠 수 있다.
유럽 재정위기가 진정된 게 아니고 중장기 불안요인이 잠복해 있는 만큼 예상 밖의 국제금융시장 불안에 대비해야 한다. 이미 유로존 재정위기는 유럽연합의 경기침체로 이어지면서 우리 수출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유럽연합 수입이 10% 줄면 우리나라의 대유럽연합 수출이 5.5% 줄어든다고 한다. 
유럽 위기가 미국, 중국의 동반 침체로 전이될 경우 하반기 우리 경제는 회복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 봉착할 수 있다. 실물경제 하락을 막으려 경기부양책을 쓸 게 아니라 중장기적 체질개선에 집중해야 한다.


새누리당이 18일 의원총회를 열어 6월 세비 전액을 반납하기로 의결했다. 총선 때 내건 ‘무노동 무임금’ 공약을 지키고 국회 공전 사태에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겠다는 뜻이다. 새누리당은 의원총회 뒤 세비 반납 동의서를 돌려 의원들한테 서명도 받았다. 
소속 의원들의 적지 않은 반발을 무릅쓰고 세비 반납을 강행했으나 속으로는 무척 골머리를 앓는 모습이다. 무노동 무임금이 애초부터 ‘잘못된 약속’이라는 데는 새누리당 안에서도 별다른 이견을 다는 사람이 없다. 지금 와서 약속을 물릴 수도 없는 처지여서 세비를 반납하지만 자충수를 두었다는 탄식도 무성하다.
 
새누리당의 무노동 무임금 약속은 국민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겉치레 정치, 포퓰리즘의 전형이다. 의정활동에 ‘무노동 무임금’이라는 용어를 끌어다 쓴 것부터가 적절치 않다. 국회가 열리지 않아도 국회의원들은 정책 연구나 이해당사자 면담, 법안 제출 등의 의정활동을 한다. 상임위나 본회의 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무조건 무노동이라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 국회의원에 대한 불신을 부추기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세비 반납 결정은 새누리당에 만연한 권위주의적 풍토를 다시 한번 보여줬다. 겉으로는 자발적인 세비 포기라고 하지만 실제 내용은 울며 겨자 먹기로 따른다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불만을 토로하던 많은 의원들도 막상 의총이 열리자 대부분 입을 닫았다. 당의 실질적 주인인 박근혜 의원이 세비 반납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마당에 세비 반납이 싫다고 말할 간 큰 의원이 어디 있겠는가.
 
새누리당이 세비 반납으로 생색을 내며 국회 공전 사태의 책임을 야당에 전가하려는 태도는 더욱 볼썽사납다. 국회가 열리지 않는 것은 여야의 공동책임이지만 따지고 보면 새누리당의 책임이 더 크다. 현재 국회 개원 협상의 최대 난제는 민간인 사찰 사건, 방송사 파업 등 쟁점 현안들에 대한 국정조사 개최 문제로 좁혀지는 양상이다. 민주당은 국정조사가 받아들여지면 문방위 등 3개 상임위원장 자리를 양보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으나 새누리당은 거부하고 있다. 야당에 공격의 멍석을 깔아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무척 완강하다.   새누리당은 세비 반납으로 국민이 크게 감동했다고 착각하지 말기 바란다. 세비 반납으로 국회 공전 사태의 책임을 모면할 생각이라면 오산이다. 지금 새누리당이 해야 할 일은 이런 정치적 쇼가 아니다. 개원 협상에 더욱 적극적이고 유연한 자세로 임하는 것이 세비 반납보다 훨씬 국민을 위하는 길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한마당] 태극기와 애국가

● 칼럼 2012. 6. 23. 19:29 Posted by SisaHan
‘애국’이니 ‘구국’이니, 해방 전후사에나 등장할 법한 ‘딸國(국)질’이 난무한다. 이 복고적 언어 취향은 주로 극우파나 주사파에게서 발견된다.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난 이 두 세력이 똑같이 ‘조국’을 사랑한다고 떠들어댄다. 
사실 극우파와 주사파에게 ‘조국’이라는 말은 각기 다른 것을 의미한다. 전자에게 ‘조국’은 ‘국가체제’를 의미하고, 후자에게 ‘조국’은 ‘민족국가’를 의미한다. 
결국 극우파나 주사파나 각자 제 ‘조국’에 극성스럽게 충성하는 셈이다. 
극우파는 민족을 가리지 않는다. 그 국가의 주인이 일본이든 미국이든, 그들에게는 충성할 ‘국가체제’만 있으면 된다. 반면, 주사파는 체제를 가리지 않는다. 통일된 ‘민족국가’라면, 설사 그 국가의 체제가 봉건적 전체주의라도 무방하다.
주사파에서 전향한 뉴라이트가 ‘식민지근대화론’으로 일본의 식민주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주사파였다가 전향한 새누리당의 하태경 의원도 몇년 전에 했던 친일 망언으로 구설에 오른 바 있다.
 
반면, 이석기 의원은 애국가를 부정하는 발언으로 세상을 짜증나게 했다. 뒤늦게 자신의 발언이 자유주의적 신념의 표현인 양 위장하나, 그 망언에서 우리는 분단된 나라의 반쪽을 결코 조국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그의 고집을 느낀다. 당권파의 이상규 의원은 ‘백분토론’에서 끝내 방청객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개인에게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가 있다. 하지만 공인, 특히 유권자의 뜻을 대의해야 하는 의원은 다르다. 그 자유를 누리고 싶다면 출마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 논리로 ‘친박’ 의원들 역시 국가관을 검증받을 필요가 있다. 자연인으로서 그들은 쿠데타를 혁명이라 부를 권리를 누린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 헌정을 부정하는 그 생각을 가진 이들이 공인이 되는 일은 허용돼서는 안 된다. 
극우파들은 자기들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한다’고 외친다. 자유민주주의가 뭔지 알기나 할까? 자유주의는 각 개인에게는 국가도 침범할 수 없는 권리를 인정하며, 민주주의는 인민이 통치하는 인민주권의 체제를 가리킨다. 
그런데 극우파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부정하는 국보법으로 ‘자유주의’ 신념을 파괴하고,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대를 이어 독재정권을 찬양함으로써 ‘민주주의’ 이념을 부정한다. 극우파야말로 자유민주주의의 진정한 적인 셈이다.
자유민주주의의 적이 오히려 자유민주주의자 행세를 하니, 진보진영에서는 역편향으로 자유민주주의라는 말 자체를 냉소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진정으로 부정해야 할 것은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다. 극우파에 의한 자유민주주의의 ‘오염’이다.
 
극우파들은 진보진영에서 ‘대한민국’을 부정한다고 비난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진보 쪽에서 부정하는 것은 ‘대한민국’ 자체가 아니다. 이승만이 세우고, 박정희가 살찌우고, 전두환이 구했다는, 대한민국에 대한 극우세력들의 해괴한 ‘해석’이다. 
헌법에 명시된 대로 대한민국은 독립운동의 정신으로 세워졌고, 몸 바쳐서 열심히 일한 민초의 노동으로 발전했고, 민주화 운동을 통해 군사독재의 사슬에서 구원받았다. 우리가 긍정하는 것은 바로 ‘이런’ 대한민국이다. 
태극기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부정하는 것은 태극기가 아니라, 시도 때도 없이 태극기를 들라고 강요하는 억압적인 군사문화다. 
강요되는 태극기는 국가의 상징이 아니라 특정한 정권, 즉 독재정권이 우리 입에 물린 재갈일 뿐이다. 
우리가 부정하는 것은 조회시간에 억지로 부르던 애국가, 전두환을 연호하라고 억지로 들려주던 그 태극기다. 
우리가 긍정하는 것은 80년 금남로에 펼쳐졌던 그 태극기, 도청 광장에 울려 퍼지던 그 애국가다.

< 진중권 동양대 교양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