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의 친형 이상득 전 새누리당 의원이 검찰 조사를 받았다. 대통령의 멘토라는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과 핵심 측근이라던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에 이어 ‘상왕’으로 불리던 이 전 의원마저 법의 심판대에 섰다. 
지난해 12월 총선 불출마 선언으로 이미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은 이 전 의원이 구속되면 면책특권을 받는 이 대통령을 빼놓고는 주변 실세들이 거의 예외 없이 형사처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가히 역사상 가장 ‘도덕적으로 완벽하게 망가진 정권’임을 만천하에 확인시키는 셈이다. 공인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염치도 없이, 대의보다 개인의 이익을 챙기는 데 골몰해온 집단이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이 전 의원은 단순히 현직 대통령의 친형일 뿐 아니라 이른바 ‘몸통의 몸통’으로서 현 정권의 중요 인사까지 좌지우지하는 상왕적 지위에 있었다는 점에서 역대 대통령 가족들의 범죄와도 차원을 달리한다. 어찌 보면 동생의 양해 내지 방조 속에 대통령 형으로서의 권한을 맘껏 누려온 셈이다. 대통령을 “명박이”라고 부를 정도로 막강한 위세를 부려온 그에 대한 단죄에 이 대통령이 “나 몰라라” 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검찰은 일단 이 전 의원에 대해 솔로몬저축은행과 미래저축은행, 코오롱그룹 등에서 수억원을 받아 쓴 혐의를 집중 조사할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민주통합당이 포스텍의 부산저축은행 500억원 투자 개입 의혹 등 8가지 의혹을 집중 추적하겠다고 밝혔듯이 5년 내내 쌓여온 그의 비리 의혹은 차고 넘친다.   대통령의 ‘측근 법무장관, 후배 검찰총장’ 체제 아래서 이제껏 정권의 눈치를 봐온 검찰이 과연 성역 없이 수사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전직 대통령 친형 수사에선 수백억원 계좌설까지 만들어내며 칼을 휘두르더니, 계좌에서 돈뭉치까지 발견된 현직 대통령 친형한테선 ‘장롱 속’에 묻어뒀던 돈이란 코미디 같은 해명서 한 장 받아놓고 꾸물대던 검찰이기 때문이다.
 
“국가재산을 재테크 수단으로 여긴다”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도덕성이 마비된 대통령과 ‘네 돈이 내 돈이고 내 돈도 내 돈’이라는 듯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받아 쓴 형, 두 형제의 행태가 무더위보다 더 국민을 지치게 한다. 이 전 의원은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지만 민생고에 시달리는 국민들은 두 형제의 파렴치한 모습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이상으로 분노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모든 죄상을 털어놓고 참회 어린 고백으로 국민의 용서를 구하는 것만이 대통령의 형 된 자로서 최소한의 도리다. 


[칼럼] 더 이상 아메리칸 드림은 없다

● 칼럼 2012. 7. 10. 16:27 Posted by SisaHan
아는 친구들 중에 아버님의 사업이 기울어 1980~90년대에 빈손으로 미국으로 이민 온 이들이 두어명 있다. 부잣집 도련님이 하루아침에 이국땅에서 가게 점원 또는 빌딩 야간청소부가 되어 하루하루를 보낸 이야기를 들으면 지금도 가슴이 저릿하다. 그러나 20~30여년 지나 그들은 큰 가게를 운영하거나 사업체를 중국, 베트남까지 확장한 사업가가 되어 있다.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 미국이니까, 아버지나 나도 체면 따지지 않고 밑바닥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었지, (시선 많은) 한국에서라면 꼼짝없이 주저앉은 채로 있었을 것”이라며 “미국은 5년만 열심히 일하니 대부분 기반을 잡을 수 있더라”고.
그러나 그 ‘아메리칸드림’의 역사는 20세기로 종말을 고한 것 같다. 최근 로스앤젤레스에서 여러 한인들을 만났는데, 로스앤젤레스에서는 7명 중 1명이 불법체류자(서류미비자)라고 한다. 그리고 “1997년 IMF 외환위기 때 무작정 미국으로 이민 온 사람이 많았는데 그 사람들 중에 지금까지 여전히 어렵게 사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2008년 촉발된 미 금융위기가 미국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지만, ‘아메리칸드림’이 깨지기 시작한 건 이미 그 이전부터였던 것 같다. 70~80년대에 엄청나게 쏟아지던 미국 이민자들도 이제는 매년 그 수가 줄어 한인타운에선 한인들만을 상대로 하는 가게들은 이제 미래가 없다는 이야기가 많다. 열심히 일하면 집 사고, 자동차 사고, 아이들 좋은 대학 보낼 수 있었던 소박한 ‘아메리칸드림’은 이제 대학을 졸업한 자식들이 다시 한인타운으로 유턴해 아버지 가게에서 일하는 형태가 늘면서 빛이 바랜다.
최근 퓨리서치 조사를 보면, ‘자식들이 나보다 나은 삶을 살 것’이라고 답한 미국인은 조사 대상자의 47%로 절반이 안 됐다. 미국 경제위기가 극에 달했을 때인 2009년의 62%보다 더 낮은 수치다. 실질 실직자 2600만명, 국민 8명 중 1명이 ‘푸드 스탬프’(저소득층 식품지원)를 받는 곳에서 ‘희망’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미국은 정서적으로 빈부격차에 덜 분노하는 나라다.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이 출연한 영화 ‘파 앤 어웨이’를 보면, 어느날 사람들이 주인 없는 넓은 벌판(오클라호마)의 출발선에서 총소리에 달려가 깃발을 꽂으면 그 일대의 넓은 땅이 자기 땅이 되던 서부개척의 역사를 지닌 미국은 ‘열심히 하면 성공한다’는 믿음이 오랫동안 이어져왔다.
 
그런데 미국 센서스 통계를 보면, 1979년 이후 지금까지 미국인 소득 상위 1%의 소득은 275% 늘어났는데, 같은 기간 하위 20%의 소득은 18% 늘어나는 데 그칠 정도로 미국 사회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심해지고 있다. 무엇보다 계층 상승 기회가 점점 사라지는 것이 더 큰 문제다. 미국 경제정책연구소(EPI) 자료를 보면, 점수가 낮은 고소득 가정 학생보다 점수가 높은 저소득 가정 학생이 대학을 중도포기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경제학자들은 미국 경제가 회복되더라도 지금의 경제적 불평등은 더욱 심화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2007년 상원의원 시절 “아메리칸드림을 재생시켜야 할 때”라고 말했다. 오바마는 지금도 그 말을 반복하고, 앞으로도 반복하게 될 것 같다.

< 권태호 - 한겨레 신문 워싱턴 특파원 >

 
지난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에게 제기된 의혹은 수없이 많았지만 그중에는 ‘출생의 비밀’도 있었다. 이 후보가 다른 형제들과 다른 핏줄일 가능성,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일본 혈통’일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 후보 쪽은 검찰한테 디엔에이 검사까지 받아 해명하는 소동을 벌였다. 하지만 의혹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부계 혈통을 검사하려면 디엔에이 와이(Y)염색체를, 모계 혈통을 조사하려면 미토콘드리아 디엔에이 염기서열을 조사해야 하는데 검찰이 어떤 방법을 썼는지 밝히지 않았다는 둥 뒷말이 계속 무성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개인적으로 이런 주장에 별로 믿음이 가는 편은 아니다. 지나친 상상력의 발로 아닌가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렇지만 그 뒤 이 대통령의 ‘친일 행보’를 둘러싼 논란이 빚어질 때마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게 이 핏줄 의혹이다. 그러면서 대중의 집단적 예지력이 무섭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이 대통령의 친일 행보를 미리 내다본 대중의 예감이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핏줄에 대한 의혹 제기로 나타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다.
 
이 대통령의 이해할 수 없는 행보는 마침내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밀실 추진으로 정점을 찍었다. 어떤 무리수를 써서라도 협정을 체결하고야 말겠다는 굳은 신념은 도대체 어디서 연유하는 것일까. 미국이 동북아 전략 차원에서 한-일 군사협력을 끊임없이 종용해온 것은 세상이 아는 사실이지만 협정 추진의 속도와 방식은 상식을 뛰어넘는다. 부질없는 생각인 줄 알면서도 다시 핏줄 의혹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하기야 친일 핏줄 문제를 따지자면 이 대통령과는 비교도 안 되는 사람과 집단이 많다. 이 땅의 수구언론, 보수세력들의 혈관 속에는 친일의 피가 맥맥이 흐른다. 한-일 정보협정의 비공개 추진 사실이 드러난 직후의 반응부터가 그렇다. 놀랍게도 28일치 아침 <조선일보>에서는 이 기사가 눈에 잘 띄지도 않았다. 6면의 조그만 상자기사가 고작이었다. <중앙일보> 1면 머리기사는 ‘북 핵·군사 정보 일본과 공유한다’는 제목이 말해주듯 긍정 일색이었다. 그나마 <동아일보>가 1면에서 비공개 처리를 문제 삼았다. 새누리당은 한술 더 떴다. 대변인 논평을 통해 “반일 감정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정부를 두둔했다.
 
이 땅의 평범한 백성들은 한-일 군사협력이라는 말만 들어도 일단 주먹부터 불끈 쥔다. 그것이 보편적 정서다. 국익과 안보에 얼마나 중요한지는 다음 문제다. 게다가 정부의 밀실처리가 들통난 상황에서는 흥분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그럼에도 아무런 분노도, 수치도, 의아스러움도 느끼지 못하는 그 놀라운 무감각의 원천은 어디인가. 일본과의 군사협정이 안보에 불가결한 요소라는 믿음이 너무 굳센 탓인가. 별로 그렇게 보이지도 않는다. 
참여정부 마지막 해 노무현 대통령이 심혈을 기울인 작품은 남북정상회담 성사였다. 임기 말을 맞은 이명박 대통령이 노심초사하는 목표는 한-일 군사협력 성사다. 그것이 두 사람의 본질적 차이를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보수세력이 참여정부 말기 때 자주 쓰던 단어가 ‘대못질’이었는데 이 대통령은 지금 그 대못질의 망치를 높이 들었다. 이 위험천만한 못질이 앞으로 한반도 정세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정부는 스스로 한-일 정보협정 밀실 추진의 절차상 잘못을 인정했다. 하지만 정부 안에서 이번 사태에 대해 ‘나의 책임’이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엊그제 일어난 일도 책임을 지지 않고 뒤꽁무니를 빼는 사람들이 바로 이 정부 사람들이다. 하물며 미래에 일어날 상황에 대해 이들에게 어떤 책임을 기대할 것인가.
 
이제 많은 사람의 시선은 새누리당 박근혜 의원한테 향한다. 이 협정의 향방에 결정적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이 바로 박 의원이기 때문이다. 박 의원은 “국회가 개원했으니 상임위에서 충분히 논의해야 한다”며 절차적 투명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 협정에 대해 찬성인가 반대인가라는 본질적 문제는 의문부호 상태로 남겨두었다. 박 의원의 핏줄은 어디에 맞닿아 있을까.

< 한겨레신문 김종구 논설위원 >


여행은 내게 참으로 귀한 시간을 마련해준다.
전혀 다른 삶 속에 풍덩 빠져 자맥질함으로써 잠들었던 오감이 깨어나고 미지근하던 체온이 올라가며 둔중하던 심장은 빠르게 고동친다. 미지의 세계에서 낯설고도 우발적인 상황에 반응하는 크고 작은 가슴 떨림은 그런 의미에서 말 못할 희열이다.
몇 번을 미루고 벼르다가 떠난 여행이었다. 미국 동북부에 걸쳐있는 몇 개의 주를 돌아오는 여정에서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를 향하자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술렁임은 아직도 내 안에 살아 꿈틀거리는 H.D. 소로의 영향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지역을 여행하면 꼭 들러보리라 마음 먹고 있던 월든 호수. 자연을 통해 세상과 인생을 관조하게 된다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이르러서야 나는 그의 책 <월든>을 만났다. 소로 스스로 자신을 ‘자연관찰자’라 불렀듯이 매일 달라지는 호수의 물빛과 하늘의 변화를 마음의 눈으로 보고 마음의 귀로 들으며 소박하게 꾸려가던 삶의 원형이 책 한 권에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만일 내가 젊어서 그 책을 읽었더라도 뇌리에 이처럼 깊게 새겨졌을까.
 
후에 안 일이지만 그는 대학을 졸업하여 짧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25년 동안 30여 권의 일기를 썼고, 강연이나 글을 쓸 때 자신의 일기에서 자료를 얻었다고 했다. 나 역시 대부분 글의 소재를 일기에서 얻고 있다는 그 작은 유사함만으로도 그에게 갑작스러운 친근감을 느꼈고, 아주 먼 곳에 있다고 생각하던 작가와 공유하는 ‘어떤 것’이 내게도 있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콩코드에 다가가며, 호숫가에 두 평 남짓한 통나무 오두막을 짓고 자연친화적 삶을 실천한 <월든> 속의 그를 상상 속에 한껏 부풀려서 그려보았다. 그의 발자국을 따라 호숫가 숲길을 걷고 싶었다. 160여 년 전에 그가 심었을 호두나무와 소나무들의 안부를 묻고 싶고 고요 속에 즐겨 들었다는 티티새의 노랫소리도 들어보고 싶었다. 
문명을 잠시 내려놓고 육체 노동을 이끌어주던 그의 정직한 두 손을, 더 없이 간소한 생활 속에서도 넉넉하던 그의 가슴과 숨결을 만나는 꿈을 꾸었다. 입으로는 소박한 삶을 동경한다 하면서도 막상 거추장스러운 겉옷 하나 벗어놓지 못하고 사는 내 삶의 모습이 추레해 보여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월든>을 읽고 이곳 호숫가를 찾았다는 법정스님 생각이 났다. 소로의 삶을 먼발치에서라도 마주치고 싶다는 갈망에 스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을 것이다.
 
콩코드 박물관에는 시대를 함께한 에머슨 시인과 작가 호손이, 육신을 버린 영혼만으로도 우정을 지킬 수 있음을 과시하듯 소로 곁에 나란히 서 있었다. 당대의 콩코드를 주름잡던 그들의 입김이 구석구석 스며들지 않은 곳이 없겠지만 소로를 보러 갔다가 그들 모두를 한꺼번에 만나고 나니 행운의 호위를 받기나 하는 것처럼 흐뭇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큰 바위의 얼굴>과 <주홍글씨>로 잘 알려진 호손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고독 속에 살다간 호손의 생애를 염두에 둔 탓에 내게만 그리 보였던 것일까. 에머슨이 냉혹해 보인 것 또한 소로의 탁월함은 인정하면서도 칭찬을 아끼던 그의 속마음에 대한 의구심과, 영적인 스승이면서도 제자인 소로와 묘한 경쟁 관계였다는 이유 때문에 본의 아니게 개입한 나의 선입견 탓이었으리라. 
이번 여행 역시 내게 많은 사색거리를 안겨주었다. 여행은 사람이든 풍경이든 낯선 것들과의 만남 이외에도 그 ‘떠남’과 ‘돌아옴’ 사이에 방황을 통한 사색이 있어 소중할 것이다. 길들여져 익숙해진 곳에서는 건성으로 지나치기 쉽다. 그래서 우리는 여행이라는 낯선 시선을 택하고 그것을 통해 스스로 가치를 부여한 것들을 자신만의 글이나 사진으로 간직하려 드는 것이 아닐까.
 
진정한 ‘길 떠남’이란 몸만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영혼도 함께 떠나는 것이다. 길 위에서 영혼의 떨림을 경험한 후 작은 흔적이라도 오래 간직하고 싶은 열망 때문에 나 역시 글의 힘에 기대는지도 모른다. 특별한 계획이 없는데도 언제라도 떠날 수 있게 작은 손가방 하나는 늘 곁에 챙겨둔다. 여행은 내게 무엇일까. 익숙함이 그리워 돌아온 이곳을, 낯섦을 찾아 다시 떠나는 것이 아닐까.

< 김영수 수필가 - 캐나다 한인문협 회원, 한국 문인협회 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