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때마다 터져 나오는 색깔론을 보면서 분단체제가 수구세력에게는 역시 화수분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국가와 민족의 미래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내놓고 승부하기보다는 경쟁자에게 부정적인 딱지 붙이기를 통해서 이기려는 야비한 술수가 색깔론이다. 색깔론은 건강한 사회의 바탕이 되는 상식과 합리주의를 파괴하려 든다는 점에서 망국적인 존재다.
비근한 예로 ‘종북’ 문제를 보자. 색깔론자들이 주장하듯이 그렇게 나라를 위태롭게 만드는 ‘종북’이 있으면 법으로 잡아넣으면 될 일이다. 일반 형법도 모자라 국가보안법까지 갖추고 있는 나라에서 국가 안위를 위협하는 ‘종북주의자들’이 있다면 정치인이나 언론이 주야장천 법석을 떨 일이 아니라 법으로 처리하면 될 일이다. 만약 처벌할 만한 위험한 행동을 찾아내지 못했다면 그것은 종북이 양심의 문제이거나 과장된 표현이라는 뜻이다. 법적 제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종북 문제가 있다면 마녀사냥식이 아니라 사회적 공론의 장에서 건전한 토론을 통해 정리해 나가는 것이 순리다. 북한을 찬양만 해도 잡혀가는 나라에서 연일 대서특필되는 종북 얘기는 국민을 혼란스럽게 한다.
우리 현대사는 색깔론이 얼마나 기만적인지를 잘 보여준다. 역대 군부독재정권은 숱한 젊은이들을 용공으로 몰아 박해했다. 또한 많은 젊은이가 가족의 좌익 이력 때문에 사관학교나 국가 주요기관에 원서조차 낼 수 없었다. 연좌제 때문이다. 이 야만적인 제도가 얼마나 많은 청년들의 날갯죽지를 꺾어놓았는지 모른다.
지금은 널리 알려졌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젊은 시절 남로당 간부였으며, 중앙정보부를 창설한 김종필씨의 장인이 ‘대구폭동’ 때 피살된 남로당 거물인 박정희의 형이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들이 권력자가 되도록 용인한 한국 현대사의 관용도에 놀랐으며, 무엇보다도 연좌제에 걸려 고통을 받던 내 또래 젊은이들과 달리 박지만씨가 버젓이 육사에 들어갈 수 있는 모순적인 현실에 분노했다. 국가를 지킨다는 구실로 만들어진 연좌제가 정작 국가를 지킬 가장 큰 의무가 지워진 자들에게는 효력 불능이었다는 이 기막힌 불평등이 법을 파괴하고 상식을 유린하며 반칙과 특권이 활개를 칠 수 있는 자양분이었다.
색깔론의 비합리적인 이중성은 북한 인권 문제에서 잘 나타난다. 색깔론자들은 자유권을 억압받는 북한 주민들의 삶에 대해 우려를 표시한다. 그 연장선에서 인도주의적 대북 식량지원은 반인권적 통치를 하고 있는 북한 정권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일이라며 반대한다. 때로는 북한의 도발적 행동을 이유로 반대한다. 한쪽에서는 북한 주민의 인권을 고창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인권의 기초인 북한 주민의 생존권 보호를 위한 식량지원을 반대하는 것이다. 자기모순이다.
이들은 북한 인권문제 제기에 신중한 자세를 보이는 사람들을 서슴지 않고 ‘종북주의자’로 몰기도 한다. 북한 주민의 인권 현실에 가슴 아파하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적대적 대결을 하면서도 평화공존을 추구해야 하는 한반도 현실에서 인권문제 제기를 내정간섭으로 여기는 북한의 특성을 고려하여 신중을 기하자는 주장은 충분히 나올 수 있다. 이 주장에 동의하건 않건 관계없이, 국민의 안전과 한반도 평화를 위해 나온 의견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색깔론자들은 이를 엉뚱하게 ‘종북’으로 몰아간다. 우리 공동체의 안전과 이익을 기준으로 북한을 보려는 상식적인 관점을 찍어 누르고 북한에 유리한지 불리한지를 잣대로 세상을 보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그들이 정치가라면 어리석게도 주객전도의 정치를 하자는 것이다.
대선 국면을 맞이해서 색깔론이 기승을 부릴 조짐을 보인다. 민주주의와 평화, 민족화해를 추구하는 후보라면 이번에는 당당히 색깔론과 정면 대결해야 한다. 자신과 다르면 ‘종북’으로 몰고 자신만이 북한 인권의 옹호자인 양 처신하며 우리 사회를 호령하려는 이 이중적인 얼굴에 당당히 침을 뱉어야 한다. 그래서 2013년부터는 북한을 가장 미워하는 척하면서도 기실은 북한 때문에 먹고살며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색깔론이 설 자리를 없애야 한다.
< 이종석 - 전 통일부 장관 >
'●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설] 일, 위안부 사죄 없이는 우익 만행 못 막는다 (0) | 2012.07.02 |
---|---|
[한마당] 대통령 된다고 변하지 않는다 (0) | 2012.07.02 |
[1500자 칼럼] 다음 세대 다음 세대 (0) | 2012.06.24 |
[사설] 산 넘어 산 유로존 위기 (0) | 2012.06.24 |
[사설] 세비 반납 정치 쇼 보다 국회 개원부터 (0) | 2012.06.24 |
[한마당] 태극기와 애국가 (0) | 2012.06.23 |
[1500자 칼럼] 시어미 발가락을 흔드는 며느리 (0) | 2012.06.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