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에 말뚝을 박았던 스즈키 노부유키는 재차 방한을 공언했다고 한다. 한국 정부가 얼마나 만만했으면 그랬을까. 그는 지난해 8월 독도를 방문하려다 김포공항에서 제지당한 일본 국회의원들과 동행했던 터였다.
이번 만행은 일본 극우단체들이 자신의 존재감을 높이려는 노이즈 마케팅 차원이라는 정부 주장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이 문제가 부각되면 부각될수록 일본에서 그들의 정치적 선명성과 무게감이 더욱 커질 게 분명하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우리 정부가 아예 모른 척 넘어갈 일은 아니다. 그들은 최근 1~2년 사이 위안부 할머니들을 겨냥한 만행의 수위를 계속 높여왔다. 이젠 우리 땅에서 한국인의 자존심에 대못을 박고, 한국의 영토 주권을 부정하는 짓을 저지르기에 이르렀다. 소녀상 말뚝은 그 한 상징일 뿐이다.
 
스즈키는 일본의 우익 정치단체 ‘유신정당, 신풍’의 대표다. 평소 ‘독도는 일본 땅’, ‘대동아전쟁은 아시아 해방 전쟁’ 따위의 주장을 펼치다가 이번엔 ‘위안부는 매춘부’라고 떠들었다. 아무리 미친 자라도 묵과할 수 없는 모욕이다. 게다가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통을 상징하는 소녀상과 전쟁과 여성 인권박물관을 만행의 대상으로 삼았다. 지난해 일본 우익은 정대협에 여성의 성기 사진을 우편으로 보내 관계자들을 경악하게 했다. 모른 척 외면하는 사이 이들은 우리 국민의 자존심과 정신에 심각한 린치를 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만행을 보면 속이 뒤집어지지만, 이를 모른 척하는 이 정부를 보면 마음이 찢어진다.
군대위안부 문제는 일제 병탄기 씻을 수 없는 만행이기에 앞서 용서받을 수 없는 반인륜 범죄다. 13~16살 나이 어린 소녀 십수만명을 일본군 성노리개로 끌고 갔으니, 국가가 있고 인륜이 존재하는 한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 일본과 군사협력을 심지어 군사동맹으로까지 발전시키고 있다. 자위대의 해외파병 및 군비확산을 지원한다. 정한파인 일본 우익의 숙원이다. 만만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며, 일본 우익의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만행이 되풀이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재발을 막는 방법은 군대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를 받는 일이다. 이젠 노이즈 마케팅 운운하면서 외면할 때는 지났다. 이미 우리 정부는 충분히 모욕을 당했다. 한-일 관계를 걸고라도 공식 사죄를 요구하기 바란다. 이 정부는 몰라도 국민과 할머니들까지 또다시 일본 우익의 노리개가 될 순 없다.

 
대통령이 되면 당선자에 대한 대접은 갑자기 달라지지만, 그 본성은 갑자기 달라지지 않는다. 대통령 당선이란 당사자에게 기적 같은 일이지만, 기적은 거기까지이다. 대통령 된다고 갑자기 더 판단력이 좋아지거나, 더 훌륭해지는 기적은 없다. 오히려 권력은 사람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기 쉽다. “저를 대통령으로 뽑아주신다면…”이란 말을 시민들이 심각하게 의심해봐야 하는 이유다.

대선 후보로 나서는 사람들은 보통 50∼60대이다. 주위의 50∼60대 사람을 잠시 떠올려보자. 그 사람이 변할 것 같은가? ‘인생의 관성’이 먹힐 대로 먹힌 상태라, 지금까지 살던 대로 살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기본 철학이나 태도는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이제 25주 남은 대선을 향해 대선 주자들은 ‘상습적’으로 “국민을 위해 ~을 할 것이다”라는 약속을 남발할 것이다. 그런 공약을 믿고 대선 후보를 찍는 것은 순진하거나 어리석은 짓이다.
공약은 갖다 버려라. 그들이 어떤 대통령이 될지를 알아보는 확실한 방법은 딱 한 가지다. 과거 무엇을 어떻게 하면서 살아왔는지 보면 된다. “~을 할 것이다”라고 미래에 대한 거짓말을 하기는 상대적으로 쉽다. 
하지만 “~을 해왔다”는 과거의 경력을 가지고 거짓말을 하기란, 더군다나 집중 검증을 받는 대선 후보들에게는 쉽지 않다. “대통령으로 뽑아주시면… ~을 할 것이다”라고 ‘입’으로 하는 약속보다는 “~을 했다”는, ‘몸’으로 보여주는 ‘실천의 역사’를 믿는 편이 훨씬 낫다.

그 ‘실천의 역사’에서 다섯 가지를 주목하자. 첫째, 공정한 삶. 그가 정치인·언론인·법조인·기업인·교수 등 무엇이었든 간에, 그가 ‘입으로’ 공정사회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공정한 삶을 ‘몸으로’ 살아왔는지 살펴보자. 특히 그가 사회의 강자와 약자들을 어떻게 대해왔는지 볼 일이다. 
둘째, 사람에 대한 판단력. 대통령은 국가의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의사결정을 해야 하기 때문에 장관이나 비서 등 주위의 다양한 사람들의 조언을 참고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리더의 판단력에 대한 연구를 수행한 워런 베니스와 노엘 티시는 리더의 판단력 중 으뜸이 사람에 대한 판단력이라고 결론 내린 바 있다. 소위 대선 후보의 핵심 멘토가 누구인지를 보면 그를 알 수 있다. 
셋째, 말과 행동. 그가 과거에 한 말과 행동이 일치해 왔는가이다. 그가 말로 한 약속을 몸으로 지켜온 사람이라면,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그럴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이다. 
넷째, 위기상황에서의 의사결정이다. 대선 후보에 나설 정도의 인물이라면 살면서 여러 가지 개인 혹은 조직의 위기를 경험했을 것이다. 대통령은 국가 차원의 위기를 관리해야 할 사람으로 그가 과거 위기상황에서 어떤 의사결정을 했는지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자신의 실수나 잘못으로 인한 위기 속에서 어떤 행태를 보였는지 주목하자. 부인했는지 투명하게 밝혔는지.
마지막으로 좋은 결과. 리더란 모름지기 공정하고, 약자를 보호하면서도, 위기를 극복하고 결국에는 구성원을 위해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더군다나 위기의 시대에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능력은 중요하다.

19세기 미국 작가인 제임스 프리먼 클라크는 “작은 정치인은 다음 선거를 생각하지만, 큰 정치인은 다음 세대를 걱정한다”고 말했다. 
사실 요즘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는 후보군을 보면 20~30대 ‘잉여세력’을 걱정하는 후보는 아직 보이질 않는다. 20~30대가 결정적 정치세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자. 그리고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점도 잊지 말자. ‘삶의 궤적’은 ‘미래 약속’보다 중요하다. 

< 김호 더랩에이치 대표 >


[1500자 칼럼] 다음 세대 다음 세대

● 칼럼 2012. 6. 24. 19:00 Posted by SisaHan
지난 주간 한국에 부흥회를 다녀왔다. 조크로 ‘등산을 갔다 왔다’고 했는데 부산이라는 산과 울산이라는 두 산이었다.
두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했는데 교단도 다르고 두 교회의 목사님이 서로를 전혀 모르는데 두 교회의 공통적인 교회 표어가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교회’였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다른 교회에서도 그런 표어를 읽고 들어본 적이 있었다. 실제로 나도 표어로 삼지는 않았으나 나 역시 은퇴하기 전 우리 교회도 앞으로 5 년간 교육에 투자하자며 외치던 시점이다.
 
부흥회를 다녀온 바로 그 주일 저녁 몇 목사님들과 식사를 하며 담소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때 가장 중요하게 나눴던 대화의 주제가 다음의 세대를 위한 걱정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잘알고 있는 그대로 현재 이민 사회는 미국이나 캐나다 할 것 없이 이민이 줄어지고 있다. 이민이 들어와야 기존 교회가 성장도 하고 부흥도 하는데 오히려 역이민이 늘어나는 상태에서 이민 1세대는 점점 사그러지고 있다. 그렇게 애써 교회당도 건축하고 좌석도 늘이곤 했지만 이제는 자리를 채우는 일마저 힘들고 자연 교회 예산도 긴축으로 갈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이제 교회가 어떻게 살아남는가 하는 문제에 봉착한다. 교회를 개척하는 일은 요원해졌고 살아남기 위해 예산을 줄이고 힘들여 건축했던 예배당을 매각하는 경우가 흔해졌다. 그렇게 이민 1 세대는 사라지는데, 1 세는 그렇게 된다 해도 그 뒤를 이을 2 세들은 어찌 될 것인가? 마냥 교회를 떠나도록 방치할 것인가?
진정 목회자들로서는 심히 걱정되는 문제가 바로 다음 세대가 아니겠는가? 
지금 우리의 시대는 지나간다 해도 이민 사회만 아니라 한국 교회도 그렇고 세계 교회가 다 걱정스러운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민이 안 들어오는 것도 그렇지만 한국 교회도 교회를 떠나는 젊은이들을 보면 걱정하며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예전에 우리는 유럽의 교회들이 문을 닫고 있는 현실에 개탄을 하면서 한국 교회를 보라고 했는데, 이제는 우리 스스로 한국 교회를 걱정할 때가 온 것이다.

영국 교회를 방문했던 한 목회자가 늙은이 몇 명으로 명맥을 유지하는 교회를 개탄하면서 어떻게 영국 교회가 이렇게 되었는가 하고 물었더니 세상이 변하는데 교회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서글픈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
한국 교회도 역시 같은 길을 걷지 않는가? 세상이 그렇게도 변하는데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지금 이민 사회나 한국의 변화를 보라. 역이민이 늘어나는 지금 그리고 경제가 곤두박질을 치는 이 시점, 한국은 진보적인 정치가 신학자들이 설치고 심지어 종북주의자들이 국회에 입성하는 현실을 보면서 과연 앞으로 교회는 온전히 믿음을 지킬 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앞선다. 공산당에 의해 교회가 순교의 피를 뿌렸는데 그 피의 색깔이 점점 퇴색되고 추종하는 목회자도 있으니. 교회는 점점 늙어가면서 젊은이들은 교회를 떠나고 더 이상 들어올 생각도 않는다. 앞의 두 교회를 보면서 그리고 우리 교회를 생각하면서 진짜 다급하기는 다급하구나 하는 마음이 든다.
그러면서 목사님들에게 물었다. 다음 세대를 위한 어떤 프로그램이나 준비된 계획이 있는가 하고 물었을 때 빙그레 웃기만 하셨다. 그럼 어쩔 것인가? 마음은 급한데 뭔가 따라주지 않는 게 더 걱정이다.
우리 함께 울고 걱정해야 할 것이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우리는 이제 사그러지는 세대지만 우리의 2 세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투자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교회가 젊은이로 가득 찬 교회를 그리면서.

< 김경진 - 토론토 빌라델비아 장로교회 담임목사 >


[칼럼] ‘색깔론’의 이중성과 허구

● 칼럼 2012. 6. 24. 18:58 Posted by SisaHan
선거 때마다 터져 나오는 색깔론을 보면서 분단체제가 수구세력에게는 역시 화수분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국가와 민족의 미래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내놓고 승부하기보다는 경쟁자에게 부정적인 딱지 붙이기를 통해서 이기려는 야비한 술수가 색깔론이다. 색깔론은 건강한 사회의 바탕이 되는 상식과 합리주의를 파괴하려 든다는 점에서 망국적인 존재다.
비근한 예로 ‘종북’ 문제를 보자. 색깔론자들이 주장하듯이 그렇게 나라를 위태롭게 만드는 ‘종북’이 있으면 법으로 잡아넣으면 될 일이다. 일반 형법도 모자라 국가보안법까지 갖추고 있는 나라에서 국가 안위를 위협하는 ‘종북주의자들’이 있다면 정치인이나 언론이 주야장천 법석을 떨 일이 아니라 법으로 처리하면 될 일이다. 만약 처벌할 만한 위험한 행동을 찾아내지 못했다면 그것은 종북이 양심의 문제이거나 과장된 표현이라는 뜻이다. 법적 제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종북 문제가 있다면 마녀사냥식이 아니라 사회적 공론의 장에서 건전한 토론을 통해 정리해 나가는 것이 순리다. 북한을 찬양만 해도 잡혀가는 나라에서 연일 대서특필되는 종북 얘기는 국민을 혼란스럽게 한다.
 
우리 현대사는 색깔론이 얼마나 기만적인지를 잘 보여준다. 역대 군부독재정권은 숱한 젊은이들을 용공으로 몰아 박해했다. 또한 많은 젊은이가 가족의 좌익 이력 때문에 사관학교나 국가 주요기관에 원서조차 낼 수 없었다. 연좌제 때문이다. 이 야만적인 제도가 얼마나 많은 청년들의 날갯죽지를 꺾어놓았는지 모른다.
지금은 널리 알려졌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젊은 시절 남로당 간부였으며, 중앙정보부를 창설한 김종필씨의 장인이 ‘대구폭동’ 때 피살된 남로당 거물인 박정희의 형이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들이 권력자가 되도록 용인한 한국 현대사의 관용도에 놀랐으며, 무엇보다도 연좌제에 걸려 고통을 받던 내 또래 젊은이들과 달리 박지만씨가 버젓이 육사에 들어갈 수 있는 모순적인 현실에 분노했다. 국가를 지킨다는 구실로 만들어진 연좌제가 정작 국가를 지킬 가장 큰 의무가 지워진 자들에게는 효력 불능이었다는 이 기막힌 불평등이 법을 파괴하고 상식을 유린하며 반칙과 특권이 활개를 칠 수 있는 자양분이었다.
색깔론의 비합리적인 이중성은 북한 인권 문제에서 잘 나타난다. 색깔론자들은 자유권을 억압받는 북한 주민들의 삶에 대해 우려를 표시한다. 그 연장선에서 인도주의적 대북 식량지원은 반인권적 통치를 하고 있는 북한 정권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일이라며 반대한다. 때로는 북한의 도발적 행동을 이유로 반대한다. 한쪽에서는 북한 주민의 인권을 고창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인권의 기초인 북한 주민의 생존권 보호를 위한 식량지원을 반대하는 것이다. 자기모순이다.
 
이들은 북한 인권문제 제기에 신중한 자세를 보이는 사람들을 서슴지 않고 ‘종북주의자’로 몰기도 한다. 북한 주민의 인권 현실에 가슴 아파하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적대적 대결을 하면서도 평화공존을 추구해야 하는 한반도 현실에서 인권문제 제기를 내정간섭으로 여기는 북한의 특성을 고려하여 신중을 기하자는 주장은 충분히 나올 수 있다. 이 주장에 동의하건 않건 관계없이, 국민의 안전과 한반도 평화를 위해 나온 의견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색깔론자들은 이를 엉뚱하게 ‘종북’으로 몰아간다. 우리 공동체의 안전과 이익을 기준으로 북한을 보려는 상식적인 관점을 찍어 누르고 북한에 유리한지 불리한지를 잣대로 세상을 보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그들이 정치가라면 어리석게도 주객전도의 정치를 하자는 것이다.
대선 국면을 맞이해서 색깔론이 기승을 부릴 조짐을 보인다. 민주주의와 평화, 민족화해를 추구하는 후보라면 이번에는 당당히 색깔론과 정면 대결해야 한다. 자신과 다르면 ‘종북’으로 몰고 자신만이 북한 인권의 옹호자인 양 처신하며 우리 사회를 호령하려는 이 이중적인 얼굴에 당당히 침을 뱉어야 한다. 그래서 2013년부터는 북한을 가장 미워하는 척하면서도 기실은 북한 때문에 먹고살며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색깔론이 설 자리를 없애야 한다.

< 이종석 - 전 통일부 장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