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태극기와 애국가

● 칼럼 2012. 6. 23. 19:29 Posted by SisaHan
‘애국’이니 ‘구국’이니, 해방 전후사에나 등장할 법한 ‘딸國(국)질’이 난무한다. 이 복고적 언어 취향은 주로 극우파나 주사파에게서 발견된다.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난 이 두 세력이 똑같이 ‘조국’을 사랑한다고 떠들어댄다. 
사실 극우파와 주사파에게 ‘조국’이라는 말은 각기 다른 것을 의미한다. 전자에게 ‘조국’은 ‘국가체제’를 의미하고, 후자에게 ‘조국’은 ‘민족국가’를 의미한다. 
결국 극우파나 주사파나 각자 제 ‘조국’에 극성스럽게 충성하는 셈이다. 
극우파는 민족을 가리지 않는다. 그 국가의 주인이 일본이든 미국이든, 그들에게는 충성할 ‘국가체제’만 있으면 된다. 반면, 주사파는 체제를 가리지 않는다. 통일된 ‘민족국가’라면, 설사 그 국가의 체제가 봉건적 전체주의라도 무방하다.
주사파에서 전향한 뉴라이트가 ‘식민지근대화론’으로 일본의 식민주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주사파였다가 전향한 새누리당의 하태경 의원도 몇년 전에 했던 친일 망언으로 구설에 오른 바 있다.
 
반면, 이석기 의원은 애국가를 부정하는 발언으로 세상을 짜증나게 했다. 뒤늦게 자신의 발언이 자유주의적 신념의 표현인 양 위장하나, 그 망언에서 우리는 분단된 나라의 반쪽을 결코 조국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그의 고집을 느낀다. 당권파의 이상규 의원은 ‘백분토론’에서 끝내 방청객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개인에게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가 있다. 하지만 공인, 특히 유권자의 뜻을 대의해야 하는 의원은 다르다. 그 자유를 누리고 싶다면 출마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 논리로 ‘친박’ 의원들 역시 국가관을 검증받을 필요가 있다. 자연인으로서 그들은 쿠데타를 혁명이라 부를 권리를 누린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 헌정을 부정하는 그 생각을 가진 이들이 공인이 되는 일은 허용돼서는 안 된다. 
극우파들은 자기들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한다’고 외친다. 자유민주주의가 뭔지 알기나 할까? 자유주의는 각 개인에게는 국가도 침범할 수 없는 권리를 인정하며, 민주주의는 인민이 통치하는 인민주권의 체제를 가리킨다. 
그런데 극우파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부정하는 국보법으로 ‘자유주의’ 신념을 파괴하고,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대를 이어 독재정권을 찬양함으로써 ‘민주주의’ 이념을 부정한다. 극우파야말로 자유민주주의의 진정한 적인 셈이다.
자유민주주의의 적이 오히려 자유민주주의자 행세를 하니, 진보진영에서는 역편향으로 자유민주주의라는 말 자체를 냉소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진정으로 부정해야 할 것은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다. 극우파에 의한 자유민주주의의 ‘오염’이다.
 
극우파들은 진보진영에서 ‘대한민국’을 부정한다고 비난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진보 쪽에서 부정하는 것은 ‘대한민국’ 자체가 아니다. 이승만이 세우고, 박정희가 살찌우고, 전두환이 구했다는, 대한민국에 대한 극우세력들의 해괴한 ‘해석’이다. 
헌법에 명시된 대로 대한민국은 독립운동의 정신으로 세워졌고, 몸 바쳐서 열심히 일한 민초의 노동으로 발전했고, 민주화 운동을 통해 군사독재의 사슬에서 구원받았다. 우리가 긍정하는 것은 바로 ‘이런’ 대한민국이다. 
태극기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부정하는 것은 태극기가 아니라, 시도 때도 없이 태극기를 들라고 강요하는 억압적인 군사문화다. 
강요되는 태극기는 국가의 상징이 아니라 특정한 정권, 즉 독재정권이 우리 입에 물린 재갈일 뿐이다. 
우리가 부정하는 것은 조회시간에 억지로 부르던 애국가, 전두환을 연호하라고 억지로 들려주던 그 태극기다. 
우리가 긍정하는 것은 80년 금남로에 펼쳐졌던 그 태극기, 도청 광장에 울려 퍼지던 그 애국가다.

< 진중권 동양대 교양학부 교수 >


화장대 정리를 하다말고 거울 속을 들여다본다. 나이가 들수록 딸은 친정어머니를 닮아간다더니 오십대의 어머니가 거울 속에서 빙긋이 웃고 있다. 한가닥 굵은 주름을 미간에 세운 채 다소 거칠어 보이는 여인, 차분히 앉아 화장을 해 본지가 언제인지 모른다. 
그래도 여자이고 싶었던 듯 수시수시 장만한 매니큐어가 설합이며 화장대 위에 꽤 많이 놓여 있다. 하나씩 흔들어 가며 존폐 여부를 가늠한다. 이미 딱딱하게 굳어서 못 쓰게 된 놈, 주인의 손길 따라 흐르듯이 미끄러지는 놈, 버려야할지 말아야 할지 얼른 감이 오지 않는 걸쭉한 놈 등 각양각색이다. 
‘그래 이 놈들에게 마지막 소임을 부여하자.’ 머리 아래 감춰 놓은 비상의 붓을 든다. 색깔의 조화쯤은 중요하지 않다. 빨 주 노 초 파 남 보 ....... 열 개의 발톱이 삐툴 빼툴 모두 제 각각으로 화려하게 반짝인다. 
 
 “어머니, 제가 페티큐어 발라 드릴께요.”
 “아, 이거? 그냥 심심풀이로 발라본거야. 색스럽지 않아?” 씩 웃는 며느리, 금방 지우리라 여겼나보다. 
 “그래두, 여름엔 맨발보다 칠 하는 게 더 예뻐요.”

느닷없이 알록달록하게 발톱에 물들이고 나온 나를 보고 눈빛을 반짝이던 며느리, 어느 사이 화장품 통을 들고 뒤곁으로 나온다.
 “어머니, 발을 여기다 올려보세요.”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고추장 항아리를 발아래 당겨 놓으며 머뭇거리는 나를 재촉한다. 냄새나는 발을 며느리에게 맡긴다는 게 좀 석연찮지만 몇 번 빼다가 못 이기는 척 시키는 대로 한다. 
아이는 아세톤으로 나의 불량한 전작을 지우느라 애를 쓰더니 빨강, 녹색, 황금색 등등 이것저것 색상을 맞추어 본다. 이내 흑장미 빨강으로 낙찰하곤 호호 불어가며 못생긴 발톱 호사 시키느라 골똘하다. 그런 아이를 보며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문다. 
만약 같은 상황이었다면 나도 이 아이처럼 행동 할 수 있었을까, 나의 시어머니도 나처럼 발을 내밀고 계셨을까? 답은 서로 불가능이었을 것 같다. 며느리는 어른이 어려워 감히 이런 제안도 못 했을 게 뻔하고 어른은 체통 운운하며 애써 피했으리라.
 
신세대 며느리를 들이고부터 나는 시시때때 적잖이 당황한다. 
시가와 친가를 구분 않는 언행이며 자신의 의사를 똑 바로 표현하는 당당함, 그런가하면 며느리 역할이란 단어가 존재하는지 애매할 때가 많다. 시집살이를 제대로 한 시어미가 보기에 사사건건 흠이지만 그래도 품어야 서로 편하다. 
그러다가 슬며시 시어미 근성이 발동하면 아이는 네, 네 건성 대답으로 무마한다. 그것만으로도 꼬였던 마음은 슬슬 풀린다. 
여아로 태어남이 죄송했던 우리 세대와 남, 여 구별없이 당당하게 태어나 왕처럼 군림하며 자란 세대와의 차이가 아닌가 한다. 
어느 사이 아이의 손아래 흑장미 두 송이가 수줍은 듯 벌어졌다. 나는 함빡 웃음으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앞으로 계속 책임지라는 협박(?)과 함께 시어미의 권위도 며느리에의 요구도 하나씩 내려놓는다.

< 임순숙 수필가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에세이스트’로 한국문단 등단 >


해마다 5월에서 6월초까지는 미국의 졸업시즌이다. 이 즈음엔 교육도시인 보스턴의 호텔은 방이 완전히 동이 난다. 자식들의 인생의 새로운 출발을 축하하기 위해 전세계에서 날아온 학부모들 때문이다. 이런 미국의 졸업식에서 내가 유독 부러워하는 것이 있다. 졸업식축사다. 이것은 내가 생각하는 미국대학의 가장 훌륭한 전통중 하나다.
전현직 대통령부터 뉴스앵커, 소설가, 대법관, 기업인, 영화배우, 코미디언까지 다양한 분야의 명사들이 미국전역의 대학에서 새롭게 세상에 도전하는 젊은이들을 축복하고 인생의 선배로서 조언을 한다. 더구나 요즘은 유튜브를 통해 이들의 축사가 학교울타리를 넘어 더 많은 이들에게 전달돼 감동을 주고 있다. 그래서 나도 이맘때에는 이런 훌륭한 졸업식 축사를 인터넷에서 찾아 보며 인생의 지혜를 배우곤 한다.
명사들의 축사가 감동을 주는 것은 이들이 유명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다. 이들은 판에 박힌 공자님 말씀을 되풀이 하지 않는다. 이들은 인생경험에서 우러난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신의 성공담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다. 대신 실패담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역경과 고난을 어떻게 극복해냈는지를 말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무엇을 배웠는가를 졸업생들과 공유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역사상 가장 훌륭한 졸업식축사  중 하나인 2005년 스탠포드대의 스티브 잡스 졸업식축사다. 유명한 극작가인 애론 소킨에게 졸업식축사작성을 부탁했던 그는 소킨이 마지막까지 도와주지 않자 할 수 없이 졸업식 직전 어느날 밤 직접 축사를 작성한다. 암투병을 포함한 그의 인생에서의 3가지 역경이야기를 담은 그 졸업식축사는 가슴을 때리는 진실된 내용을 담은 것이었다. 그는 “애플에서 해고된 것은 내게 일어난 최고의 일이었다”고 말했다. 해리 포터시리즈의 작가인 JK롤링의 2008년 하버드대 축사  도 그렇다. 그녀는 애딸린 실직 이혼녀로서 바닥까지 떨어졌던 자신의 인생을 회상하며 “실패를 겪고 나서 더 강인하고 현명해졌다. 실패를 통해 얻은 깨달음은 그 어떤 자격증보다도 가치있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학부모들에게도 졸업식축사는 소중한 시간이다. 올해 보스턴대에서 있었던 아들의 졸업식에 참석했던 월드뱅크의 이기훈씨는 “축사를 맡은 구글의 에릭 슈미트회장이 얼마나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는지 학생과 학부모들 모두 폭소를 터뜨리며 들었다”고 말했다. 슈미트회장은 이날 축사  에서 “하루 한시간은 스마트폰을 끄고 진짜 사람과 대화하라”고 충고했다. 이씨는 특히 전체 졸업식외에도 단과대별로 졸업식이 따로 있는데 아들이 속한 단과대에서는 7살때 교통사고로 반신불수가 됐으나 평생의 노력으로 장애의 역경을 딛고 일어선 동문이 와서 축사  를 해 숙연해지기도 했다고 말했다.
 
17년전 내가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할 때는 가족과 기념사진을 찍은 것 이외에는 어떤 기억도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요즘은 졸업식풍경이 어떤지 트위터를 통해서 물어보았다. 돌아온 대답은 “요즘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학교 높으신 분들의 틀에 박힌 이야기만 이어져 졸업식장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경우도 있었다. 더 가슴아프게 느꼈던 것은 취업에 실패한 졸업생의 경우 아예 졸업식에 가지 않는 일이 많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대학졸업식에서도 미국의 경우처럼 이런 멋진 전통이 생겨나고 졸업생과 학부모들이 축사연사의 이야기를 즐겼으면 좋겠다. 적어도 졸업식때만큼은 한국의 대학졸업생들도 앞으로 다가올 인생의 고단함을 잠시 잊고 긍정과 도전의 에너지로 가득찬 희망의 시간을 갖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임정욱 - 전 라이코스 대표 >

 
‘국가반란 수괴’인 전두환씨가 최근 육군사관학교에서 열린 육사발전기금 200억원 달성 행사에 반란 종범들과 함께 참석해 생도들의 사열을 받는 사태가 벌어졌다. 우선, 육사 누리집(홈페이지)의 교장 인사말에 ‘국가와 군을 위해 헌신하는 정예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오늘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적어 놓은 박종선 육사교장에게 그가 말하는 국가와 군은 과연 누구를 위한 국가와 군인지 묻고 싶다.
육군과 육사는 강한 비판 여론이 일자, “사열이 아닌 참관이다” “일반인과 똑같은 상황에서 참석한 것이고, 누구나 참석할 수 있다”고 얼렁뚱땅 넘어가려 하고 있다. 전씨를 위한 의자를 따로 마련한 것에 대해서도 고령자를 위한 예우 차원이라고 둘러대고 있다. 군이 아직도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거나 알고도 국민을 속이려는 작태로 볼 수밖에 없다.
 
전씨가 누구인가. 12·12 군사쿠데타와 광주 민간학살의 원흉으로, 1997년 대법원에서 반란수괴죄 등 무려 13가지 죄목에 대해 유죄가 인정되어 무기징역이 확정된 자이다. 비록 김영삼 정권 말에 사면복권이 됐지만, 잔형 면제와 공민권 회복만 대상이 되었을 뿐이다. 벌금형만 해도 2205억원을 선고받았으나 일부만 내고, 전재산이 29만1000원밖에 없다며 1672억원을 미납한 채 버티고 있다. 또 간간이 골프장과 호화 음식점에 측근들과 떼를 지어 몰려다니거나 초호화판 자손 결혼식을 했다는 등의 소식을 뿌리면서 서민들의 부아를 돋우는 대표적인 ‘국민화합 저해 사범’이다.
이런 수준 이하의 범법자를 국가의 간성을 양성하는 신성한 마당에 불러 칙사 대접한 육사와, 이를 두둔한 군 당국은 국민과 역사 앞에 사죄를 하고, 책임자를 가려 엄중한 처벌을 해야 마땅하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어이없는 일의 발생이 최근 정치권에서 일고 있는 과도한 이념논쟁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새누리당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인 박근혜 의원이 지난 1일 “기본적으로 국가관을 의심받는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돼서는 안 된다”고 발언하면서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경선 부정을 종북논쟁으로 바꿨고, 이후 새누리당이 조직적으로 이념공세를 펴면서 ‘종북은 악, 종북이 아닌 것은 선’이라는 광적인 분위기가 형성됐다. 전씨를 자신의 ‘정치생활의 멘토’라고 하는 사람이 친박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국회의장 후보가 된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전씨의 육사 사열은 ‘민주주의의 위기’를 상징하는 사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