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수경 민주당 의원이 탈북 대학생과 새누리당 하태경 의원에 대한 막말로 진보개혁세력에 또다시 치명타를 안겼다. 국회가 문을 열기도 전에 벌써 경솔한 언행으로 대형 사고를 친 행태가 실망스럽다. 비례대표 후보자에 대한 철저한 검증 없이 ‘신인 스타’ 찾기에 급급했던 민주당의 공천 허점도 여실히 드러났다.
 
임 의원은 파문이 커지자 보도자료와 기자회견 등을 통해 사과했으나 아직도 미흡하기 짝이 없다. 우선 가장 중요한 사실관계에서부터 조금도 숨김이 없어야 한다. 문제가 된 ‘변절자’ 발언에 대해 임 의원은 “학생운동, 통일운동을 한 하태경 의원에 대한 표현이었을 뿐 탈북자에게 한 말이 아니었다”고 해명했으나 설득력이 떨어진다. 사건을 터뜨린 백요셉씨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보면 임 의원은 백씨에게도 ‘변절자’라는 욕설을 한 것으로 돼 있다. 하태경 의원을 변절자라고 비난한 것도 앞뒤 문맥상 단순히 하 의원이 학생운동을 그만두고 새누리당으로 간 것만을 지칭한 것 같지는 않다. 임 의원은 더욱 진솔한 설명을 내놓아야 한다.
임 의원이 ‘대한민국 국회의원에게 감히~’ 하는 식의 오만한 태도를 보인 것도 무척 실망스럽다. 어느 면에서 그 발언은 탈북자 비하 발언보다 더 심각할 수도 있다. 임 의원이 벌써 오만한 특권의식과 권위주의적 사고방식에 물든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우기 어렵다. 임 의원이 사과를 하면서도 이 대목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 역시 이해하기 어렵다.
 
임 의원은 남북문제의 상징성을 띠고 비례대표 의원으로 영입됐다. ‘통일의 꽃’으로 불리던 20여년 전의 의식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이제는 탈북자 문제를 비롯해 남북문제 전반에 걸쳐 좀더 심화된 인식과 진중한 접근방식을 보여야 한다. 따라서 이번 실수를 자신을 채찍질하는 좋은 계기로 삼기 바란다. 그저 소나기만 피하고 보자는 식의 태도로는 영영 ‘식물 국회의원’에 머물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민주당도 “당에서 조처할 것이 없다”는 식으로 임 의원을 감싸고도는 것만이 최선인지 자문해볼 일이다.
민주당을 지지한 수많은 유권자들을 실망시키고 당의 얼굴에 먹칠을 한 것만으로도 그냥 넘어가기 어렵다. 새누리당 역시 ‘호재’를 만났다는 듯이 사건을 침소봉대하려는 모습이 볼썽사납다.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 시절부터 의원들이 보여온 각종 저질 발언, 추태, 망언 행진에 당이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유권자들이 잊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2012년 대통령 선거가 200일도 채 안 남았다. 새누리당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박근혜라는 후보가 있는 데 반해 야당엔 그에 필적할 후보가 확실하게 대두되지 못하다 보니 장 밖의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여전히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범야권 후보군 중 지지율 1위인 그가 아직도 정치권 진입에 확실한 입장을 밝히지 않으니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둘러싼 추측과 해석에 어지럼증이 날 지경이다. 지난주에는 ‘안철수 대통령은 없다’는 본지 성한용 선임기자의 칼럼이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하지만 정작 안 원장과 가까운 이들의 칼럼에 대한 반응은 좋은 충고로 여긴다는 것이었다. 칼럼에서 제기한 문제의 상당부분이 그의 고민 지점과 맞닿아 있는 까닭일 터다. 그럼에도 그의 한 측근은 “지금 안 원장의 고민은 여느 정치인의 고민과 다르다. 그는 대통령을 욕망의 대상으로 삼은 적이 없다. 지난해 9월1일 갑작스레 대통령 후보로 여론조사에 등장함으로써 일개 사회인이던 그가 타의로 정치무대에 등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본격 정치인이 될 것인가를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한 게 당연하지 않나”라며 그의 고민의 깊이를 이해해달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실제로 현실정치는 녹록지 않다. 치열한 검증공세를 견뎌내는 일이나 스스로 정의·복지·평화로 간추린 시대의 비전을 실현할 구체적 각론을 제시해 국민의 공감을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정치적 문법도 잘 모르면서 제도권 정치에서 정치력을 발휘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이런 현실정치의 높은 벽을 무시한 채 인기만 믿고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고 덥석 나선다면 오히려 그를 믿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대선이 역사의 퇴행을 막고 87년 체제를 한 단계 높이는 새로운 시대로 도약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고 보는 국민들로선, 안 원장의 계속되는 고민이 그 기회를 무산시키는 역작용을 낼까 우려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렇다고 서둘러 결단을 내려야 하고, 그 결단의 내용이 성 기자의 말처럼 대통령 후보 자리를 비켜주는 일이 돼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치열한 고민과 철저한 준비를 거쳐 너무 늦기 전에 역사의 부름에 응하는 것도 방법이다. 
국민이 안 원장에게 기대하는 것은 자신들의 뜻과 유리된 낡은 정치의 혁파다. 안철수 현상은 기성 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불신의 깊이를 보여줬다. 화들짝 놀란 기성 정치권은 당명을 바꾸느니 외부 수혈을 하느니 호들갑을 떨었지만, 진정한 변화에는 이르지 못했다. 지난 총선에서 아무런 대안도 내놓지 못한 채 정권심판론만 되뇌다 패배를 맛본 야권은 물론이고, 수성에 성공한 새누리당도 선거가 끝나자마자 낡은 색깔론을 다시 끄집어내는 등 수구 본색으로 돌아가고 있다.
 
정치현실이 이렇게 흘러갈수록 새로운 정치에 대한 국민의 갈구는 더 커지고, 현 단계에서 그 갈구가 안 원장을 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의 정치 참여를 원치 않는다는 한 측근이 안 원장이 발을 빼려 해도 뺄 수 없는 상황으로 몰려가는 것 같다고 걱정하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그렇다면 방법은 국민을 믿어보는 일이다.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슬라보이 지제크의 말처럼 대중은 공정한 투표를 통해 승리를 쟁취할 폭발적인 힘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들을 배신해 그 힘을 무력화시키는 건 언제나 정치인들이다. 민주혁명 이후 첫 대선을 치른 이집트를 보자. 이집트 유권자의 65%는 민주세력에 표를 던졌다. 그러나 민주세력의 분열로 표는 분산됐고 이집트인들은 결선투표에서 이슬람근본주의자와 군부정권 잔존인물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막힌 처지가 됐다. 87년 한국에서 우리가 이미 겪었듯이. 
이런 사태가 이 땅에서 되풀이되지 않게 하려면 안 원장이 늘 말했듯이 과정이 중요하다. 목표를 대통령 자체보다 대선으로 가는 과정을 낡은 정치 혁신 과정으로 만드는 데 둔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국민이 그에게 기탁한 정치혁신을 어느 정도 이루는 성과를 낼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의 결과가 안철수 대통령이 되지 말란 법도 없다.
 
< 한겨레신문 권태선 편집인 >


[1500자 칼럼] 부부(夫婦)

● 칼럼 2012. 6. 3. 13:50 Posted by SisaHan
신달자의 소설 <물위를 걷는 여자>를 읽다가 이 한 구절에서 내 눈 길은 잠시 서성거릴 수밖에 없었다. 

 “결혼은 책임이고 사회적인 구성원으로서 의무  이기도 해. 생활이란 평범한 것에서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구원을 받는 경우가 많지. 결혼은 사랑이고 이해이고 나눔이고 양보야.
  증오도 치욕도 배신도 형편없는 상실감도 결혼 안에 있어” 

결혼연령이 점차 뒤로 물러가고 있다. 20대에서 30대로 심지어는 40대 미혼도 주변에서 흔히 만난다. 결혼이 두려워서일까? 일생을 한사람과 함께 살 자신이 없어서일까?
결혼하기 전 동거형식의 실험 결혼생활은 이젠 별로 낯선 이야기도 아니다. 그렇게 하겠다는 자녀를 나무랄 수만도 없다. 결혼했다가 이혼하는 것 보다 서로를 알아가면서 코드가 맞으면 
부부의 연을 공식으로 맺겠다는 것이다. 이러면서 가족계획을 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 아니냐는 젊은이들의 사고방식이 조금씩 전통적인 결혼관에 젖어있는 구세대를 흔들어놓고 있다.
      
신록의 5월은 결혼의 계절이기도 하지만 가정의 달이기도 하다. 결혼 초년생으로부터 10년 20년 30년…차 부부들이 가족을 이루며 사회 공동체, 국가 공동체 세계 공동체, 일원으로 살고 있다. 단일민족에서 다문화 가족 구성원으로 확대되어 가면서 민족과 민족 간의 혼혈은 더 이상 금기 사항이 아니다. 그만큼 가족 간의 갈등과 상호 불협화음은 커질 수밖에 없다.  
결혼이 연애의 무덤이라 했던가. 가시덤불 속으로 뛰어 들어 가는 모험을 감수해야 한다고 했는가. 아름다운 산책로를 손잡고 걸어가는 낭만의 꿈을 기대했던 신혼초의 꿈은 그리 너그럽지 못한 결혼생활 현실 속에서 낭만의 파편조각만 절망스럽게 바라보길 얼마나 했던가.       
나도 4년이란 세월의 교제 끝에 부부란 인연을 맺고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50년을
살아오고 있다. 두 아이는 장성한 사회인으로 각자의 인생길을 걷고 있다. 이 긴 기간을 살아오면서 사랑과 꿈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가난도 병고의 고통도 배신도 절망도 있었다. 이혼을 왜 생각해 보지 않았던가. 뛰쳐나가고 싶었던 순간인들 한 두 번이었겠는가. 나만 그렸겠나. 남편도 그랬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은 이해이고 양보이고 나눔이란 그 질서를 지키려는 과정 속에서 지속되었다. 남편 속에서 나를, 내 속에서 남편을 발견하며 헌 신발 신고 산골짜기 길 걷는 편안함 때문에 안정감이 있다. 사랑에서 연민으로 이질감에서 동질감으로 부부의 관계도 진화하는가 보다.
 
성서가 가르치는 고린도 전서 13장을 다시 곰곰이 읽어본다. 사랑이 내포하고 있는 모든 엑기스를 뽑아 올려놓았다. 2천 년 전 사도 바울의 사랑에 대한 속성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묘약이 되고 있다. 인간관계의 이치는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다름없음을 말해주고 있다.
 『사랑은 오래 참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모든것을 견디느니라…』
했다. 그리곤 믿음 소망 사랑 이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란 말로 끝을 맺는다. 
가난과 병고도 성격차이로 인한 갈등도 감내할 각오 없이 부부의 연을 맺는다는 것은 모험이요 위험한 것임엔 틀림없다.
서로 사랑할 때 보다 결혼 위기에 직면 할 때 신앙은 중보자의 역할을 해준다. 부부는 작은 교회란 생각을 해본다. 중간 중간 인벤토리도 해 보며 부부의 연을 재점검하다 보면 결혼의 서약이 생활 속에 녹아들어가 끝까지 남는 것은 자식이 아니고 부부밖에 없다는 자각에 이를 것이다. 참고 견디며 살아온 것을 억울해 할 필요 없다. 끝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인생살이 자체가 그러한 것이니까. 
그래도 두 낯선 사람이 부부가 되어 해로(偕老)하면서  ‘평생 함께 살아주어서 고마워’ 이 한마디 나눌 수 있다면 그 결혼은 성공한 것이리라. 두 손 잡고 걸어가는 노(老) 부부의 뒷모습이 저녁 노을만큼이나 멋이 있지 않겠는가?

< 민혜기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전 회장 >


[칼럼] 기자정신을 더럽히지 말라

● 칼럼 2012. 6. 3. 13:47 Posted by SisaHan
진짜 기자인지를 가리는 것은 비교적 단순하다. 
우선 존경하는 선배 언론인이 누구인지를 물어본다. 어떤 직업이든 처음 시작할 때에는 긍지와 보람으로 설렜을 것이다. 특히 전문직일 경우 더욱 그렇다. 투옥과 해직에도 주눅들지 않고 온갖 회유에도 흔들리지 않으면서 당당히 기자 정신을 온몸으로 실천한 선배 언론인처럼 살고 싶은 기자들이 대다수였을 것으로 믿는다.
처음부터 기자 자리를 발판 삼아 출세의 길을 달려가는 사람처럼 기자 생활을 하겠다는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있다면 그런 기자는 처음부터 이른바 ‘폴리널리스트’가 될 싹이다. 그들은 권력에 대한 감시나 비판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권력의 눈에 들어 발탁될지를 머릿속에 그리며 기삿거리를 선별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기자직에 대한 긍지의 근거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물어본다. 기자들은 자부심과 긍지가 높은 직업집단이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영향력 있는 언론사의 기자가 되었다는 나름의 선민의식이 그런 자부심의 근거라면 위험하다. 그런 기자들은 시대와 사회의 아픔을 제대로 느끼기 어렵다. 더더욱 언론의 영향력에 기대어 달콤한 권력을 누리는 맛 때문이라면 이는 진정한 기자가 아니다. 
진실의 수호자로서의 긍지가 기자로서 자랑스러움의 근거이어야 참된 기자이다.

언론직을 이용하여 정계나 공직 자리에 올라 언론 자유를 억압한 이들은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언론인을 지망했을까 궁금하다. 
특히 최시중씨를 비롯하여 이 정권 들어와 권력의 핵심에 들어갔던 언론인 출신들은 줄줄이 감옥행이었다. 이들에겐 기자란 진실을 전달하기 위한 소명이 아니라 욕망을 채우기 위한 한낱 수단에 지나지 않았던 것인가. 아직 사법적 처리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언론인로서는 이제 사망 선고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 언론사에 적잖이 있다. 
현재 언론에 몸담고 있으면서 언론 자유를 억압하는 데 앞장선 자들이다. 언론의 독립이 위협받을 때 이를 막아내는 울타리 구실을 하기는커녕 트로이 목마가 되었다. 
권력을 대신하여 언론에 재갈을 물리는 대가로 알량한 자리를 차지했다. 때로는 언론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요건인 사실마저 왜곡하기도 한다. 
얼마 전 <문화방송>(MBC)은 “보도본부장이 노조원들의 저지를 받는 과정에서 신체에 일부 충격을 입어 방송 진행을 할 수 없게 됐다”고 보도했다. 노조가 폭력으로 방송 진행을 방해한 것으로 몰아가기 위함이다. 그러나 관련 동영상이 공개되고 일체의 신체적 접촉이 없었다고 하자 신체적 접촉이 아닌 정신적 충격으로 인한 두통 등의 진단을 받았다고 몇번이나 말을 바꾸었다고 한다. 사실조차 왜곡한다면, 이미 기자 자격이 없다. 

물론 모든 언론인들이 투철한 기자 정신으로 무장된 지사가 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최소한의 정직성은 유지해야 한다. 그런데 사실 자체를 왜곡하고 거짓말을 한다면 기자 자리를 내놓아야 한다. 
기자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이 그 정체성에 적합한지를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기자로 위장한 출세주의자들은 이제 커밍아웃해야 한다. 
더는 기자직을 더럽히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이 적어도 자신이 오랫동안 몸담은 언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

<정연우 - 세명대 광고홍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