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산 넘어 산 유로존 위기

● 칼럼 2012. 6. 24. 18:57 Posted by SisaHan
그리스 재선거에서 구제금융 수용을 공약한 신민당이 파기를 주장한 시리자를 누르고 승리했다. 이로써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갔던 유럽 재정위기는 일단 봉합됐다. 유로화도 강세를 보이는 등 시장도 안도하는 분위기다. 신민당이 연정에 참여할 뜻을 비친 사회당과 손을 잡으면 과반 의석으로 연정을 구성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번 총선 결과만으로 그리스의 위기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며 유럽 재정위기의 불씨는 여전히 살아 있다. 그리스 새정부는 국민이 수용할 수 있을 만큼 구제금융 조건을 완화하고 가시적인 경제회복의 성과를 내야 한다. 그러나 구제금융의 열쇠를 쥔 독일은 구제금융 이행기간 연장은 검토할 수 있으나 조건 변경은 불가하다고 쐐기를 박았다. 그리스는 마이너스 성장이 장기화하면서 세입이 줄고 국고는 고갈되고 있다. 구제금융을 받아봐야 빚을 갚고 나면 남는 게 거의 없어 선택의 폭은 매우 좁다. 총선 결과에 관계없이 그리스 진출 외국 기업과 은행들이 출자 지분을 처분하거나 철수하는 상황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유로존 위기가 그리스를 넘어 경제규모가 훨씬 큰 스페인과 이탈리아로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스페인의 경우 국가 신용등급이 투기등급 직전 수준까지 떨어진 상태다. 스페인이 제한적 구제금융에 그치지 않고 전면적 구제금융을 신청할 가능성은 끈질기게 제기되고 있다. 만에 하나 그렇게 될 경우 스페인의 빚을 갚아줄 돈이 유럽에 없다는 점, 핵심국들이 스페인 국채를 대거 보유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더 큰 위기가 올 수 있다.
 
그리스 총선은 산 하나를 넘은 정도이며, 스페인과 이탈리아 등 넘을 과제들이 아직 많아 이제 1부 능선을 지난 데 불과하다는 신중론에 귀를 기울일 만하다. 오는 28일 열리는 유럽연합 정상회의에서 획기적 해법이 나오지 않을 경우 글로벌 금융시장은 언제든 다시 요동을 칠 수 있다.
유럽 재정위기가 진정된 게 아니고 중장기 불안요인이 잠복해 있는 만큼 예상 밖의 국제금융시장 불안에 대비해야 한다. 이미 유로존 재정위기는 유럽연합의 경기침체로 이어지면서 우리 수출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유럽연합 수입이 10% 줄면 우리나라의 대유럽연합 수출이 5.5% 줄어든다고 한다. 
유럽 위기가 미국, 중국의 동반 침체로 전이될 경우 하반기 우리 경제는 회복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 봉착할 수 있다. 실물경제 하락을 막으려 경기부양책을 쓸 게 아니라 중장기적 체질개선에 집중해야 한다.


새누리당이 18일 의원총회를 열어 6월 세비 전액을 반납하기로 의결했다. 총선 때 내건 ‘무노동 무임금’ 공약을 지키고 국회 공전 사태에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겠다는 뜻이다. 새누리당은 의원총회 뒤 세비 반납 동의서를 돌려 의원들한테 서명도 받았다. 
소속 의원들의 적지 않은 반발을 무릅쓰고 세비 반납을 강행했으나 속으로는 무척 골머리를 앓는 모습이다. 무노동 무임금이 애초부터 ‘잘못된 약속’이라는 데는 새누리당 안에서도 별다른 이견을 다는 사람이 없다. 지금 와서 약속을 물릴 수도 없는 처지여서 세비를 반납하지만 자충수를 두었다는 탄식도 무성하다.
 
새누리당의 무노동 무임금 약속은 국민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겉치레 정치, 포퓰리즘의 전형이다. 의정활동에 ‘무노동 무임금’이라는 용어를 끌어다 쓴 것부터가 적절치 않다. 국회가 열리지 않아도 국회의원들은 정책 연구나 이해당사자 면담, 법안 제출 등의 의정활동을 한다. 상임위나 본회의 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무조건 무노동이라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 국회의원에 대한 불신을 부추기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세비 반납 결정은 새누리당에 만연한 권위주의적 풍토를 다시 한번 보여줬다. 겉으로는 자발적인 세비 포기라고 하지만 실제 내용은 울며 겨자 먹기로 따른다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불만을 토로하던 많은 의원들도 막상 의총이 열리자 대부분 입을 닫았다. 당의 실질적 주인인 박근혜 의원이 세비 반납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마당에 세비 반납이 싫다고 말할 간 큰 의원이 어디 있겠는가.
 
새누리당이 세비 반납으로 생색을 내며 국회 공전 사태의 책임을 야당에 전가하려는 태도는 더욱 볼썽사납다. 국회가 열리지 않는 것은 여야의 공동책임이지만 따지고 보면 새누리당의 책임이 더 크다. 현재 국회 개원 협상의 최대 난제는 민간인 사찰 사건, 방송사 파업 등 쟁점 현안들에 대한 국정조사 개최 문제로 좁혀지는 양상이다. 민주당은 국정조사가 받아들여지면 문방위 등 3개 상임위원장 자리를 양보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으나 새누리당은 거부하고 있다. 야당에 공격의 멍석을 깔아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무척 완강하다.   새누리당은 세비 반납으로 국민이 크게 감동했다고 착각하지 말기 바란다. 세비 반납으로 국회 공전 사태의 책임을 모면할 생각이라면 오산이다. 지금 새누리당이 해야 할 일은 이런 정치적 쇼가 아니다. 개원 협상에 더욱 적극적이고 유연한 자세로 임하는 것이 세비 반납보다 훨씬 국민을 위하는 길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한마당] 태극기와 애국가

● 칼럼 2012. 6. 23. 19:29 Posted by SisaHan
‘애국’이니 ‘구국’이니, 해방 전후사에나 등장할 법한 ‘딸國(국)질’이 난무한다. 이 복고적 언어 취향은 주로 극우파나 주사파에게서 발견된다.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난 이 두 세력이 똑같이 ‘조국’을 사랑한다고 떠들어댄다. 
사실 극우파와 주사파에게 ‘조국’이라는 말은 각기 다른 것을 의미한다. 전자에게 ‘조국’은 ‘국가체제’를 의미하고, 후자에게 ‘조국’은 ‘민족국가’를 의미한다. 
결국 극우파나 주사파나 각자 제 ‘조국’에 극성스럽게 충성하는 셈이다. 
극우파는 민족을 가리지 않는다. 그 국가의 주인이 일본이든 미국이든, 그들에게는 충성할 ‘국가체제’만 있으면 된다. 반면, 주사파는 체제를 가리지 않는다. 통일된 ‘민족국가’라면, 설사 그 국가의 체제가 봉건적 전체주의라도 무방하다.
주사파에서 전향한 뉴라이트가 ‘식민지근대화론’으로 일본의 식민주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주사파였다가 전향한 새누리당의 하태경 의원도 몇년 전에 했던 친일 망언으로 구설에 오른 바 있다.
 
반면, 이석기 의원은 애국가를 부정하는 발언으로 세상을 짜증나게 했다. 뒤늦게 자신의 발언이 자유주의적 신념의 표현인 양 위장하나, 그 망언에서 우리는 분단된 나라의 반쪽을 결코 조국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그의 고집을 느낀다. 당권파의 이상규 의원은 ‘백분토론’에서 끝내 방청객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개인에게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가 있다. 하지만 공인, 특히 유권자의 뜻을 대의해야 하는 의원은 다르다. 그 자유를 누리고 싶다면 출마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 논리로 ‘친박’ 의원들 역시 국가관을 검증받을 필요가 있다. 자연인으로서 그들은 쿠데타를 혁명이라 부를 권리를 누린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 헌정을 부정하는 그 생각을 가진 이들이 공인이 되는 일은 허용돼서는 안 된다. 
극우파들은 자기들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한다’고 외친다. 자유민주주의가 뭔지 알기나 할까? 자유주의는 각 개인에게는 국가도 침범할 수 없는 권리를 인정하며, 민주주의는 인민이 통치하는 인민주권의 체제를 가리킨다. 
그런데 극우파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부정하는 국보법으로 ‘자유주의’ 신념을 파괴하고,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대를 이어 독재정권을 찬양함으로써 ‘민주주의’ 이념을 부정한다. 극우파야말로 자유민주주의의 진정한 적인 셈이다.
자유민주주의의 적이 오히려 자유민주주의자 행세를 하니, 진보진영에서는 역편향으로 자유민주주의라는 말 자체를 냉소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진정으로 부정해야 할 것은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다. 극우파에 의한 자유민주주의의 ‘오염’이다.
 
극우파들은 진보진영에서 ‘대한민국’을 부정한다고 비난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진보 쪽에서 부정하는 것은 ‘대한민국’ 자체가 아니다. 이승만이 세우고, 박정희가 살찌우고, 전두환이 구했다는, 대한민국에 대한 극우세력들의 해괴한 ‘해석’이다. 
헌법에 명시된 대로 대한민국은 독립운동의 정신으로 세워졌고, 몸 바쳐서 열심히 일한 민초의 노동으로 발전했고, 민주화 운동을 통해 군사독재의 사슬에서 구원받았다. 우리가 긍정하는 것은 바로 ‘이런’ 대한민국이다. 
태극기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부정하는 것은 태극기가 아니라, 시도 때도 없이 태극기를 들라고 강요하는 억압적인 군사문화다. 
강요되는 태극기는 국가의 상징이 아니라 특정한 정권, 즉 독재정권이 우리 입에 물린 재갈일 뿐이다. 
우리가 부정하는 것은 조회시간에 억지로 부르던 애국가, 전두환을 연호하라고 억지로 들려주던 그 태극기다. 
우리가 긍정하는 것은 80년 금남로에 펼쳐졌던 그 태극기, 도청 광장에 울려 퍼지던 그 애국가다.

< 진중권 동양대 교양학부 교수 >


화장대 정리를 하다말고 거울 속을 들여다본다. 나이가 들수록 딸은 친정어머니를 닮아간다더니 오십대의 어머니가 거울 속에서 빙긋이 웃고 있다. 한가닥 굵은 주름을 미간에 세운 채 다소 거칠어 보이는 여인, 차분히 앉아 화장을 해 본지가 언제인지 모른다. 
그래도 여자이고 싶었던 듯 수시수시 장만한 매니큐어가 설합이며 화장대 위에 꽤 많이 놓여 있다. 하나씩 흔들어 가며 존폐 여부를 가늠한다. 이미 딱딱하게 굳어서 못 쓰게 된 놈, 주인의 손길 따라 흐르듯이 미끄러지는 놈, 버려야할지 말아야 할지 얼른 감이 오지 않는 걸쭉한 놈 등 각양각색이다. 
‘그래 이 놈들에게 마지막 소임을 부여하자.’ 머리 아래 감춰 놓은 비상의 붓을 든다. 색깔의 조화쯤은 중요하지 않다. 빨 주 노 초 파 남 보 ....... 열 개의 발톱이 삐툴 빼툴 모두 제 각각으로 화려하게 반짝인다. 
 
 “어머니, 제가 페티큐어 발라 드릴께요.”
 “아, 이거? 그냥 심심풀이로 발라본거야. 색스럽지 않아?” 씩 웃는 며느리, 금방 지우리라 여겼나보다. 
 “그래두, 여름엔 맨발보다 칠 하는 게 더 예뻐요.”

느닷없이 알록달록하게 발톱에 물들이고 나온 나를 보고 눈빛을 반짝이던 며느리, 어느 사이 화장품 통을 들고 뒤곁으로 나온다.
 “어머니, 발을 여기다 올려보세요.”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고추장 항아리를 발아래 당겨 놓으며 머뭇거리는 나를 재촉한다. 냄새나는 발을 며느리에게 맡긴다는 게 좀 석연찮지만 몇 번 빼다가 못 이기는 척 시키는 대로 한다. 
아이는 아세톤으로 나의 불량한 전작을 지우느라 애를 쓰더니 빨강, 녹색, 황금색 등등 이것저것 색상을 맞추어 본다. 이내 흑장미 빨강으로 낙찰하곤 호호 불어가며 못생긴 발톱 호사 시키느라 골똘하다. 그런 아이를 보며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문다. 
만약 같은 상황이었다면 나도 이 아이처럼 행동 할 수 있었을까, 나의 시어머니도 나처럼 발을 내밀고 계셨을까? 답은 서로 불가능이었을 것 같다. 며느리는 어른이 어려워 감히 이런 제안도 못 했을 게 뻔하고 어른은 체통 운운하며 애써 피했으리라.
 
신세대 며느리를 들이고부터 나는 시시때때 적잖이 당황한다. 
시가와 친가를 구분 않는 언행이며 자신의 의사를 똑 바로 표현하는 당당함, 그런가하면 며느리 역할이란 단어가 존재하는지 애매할 때가 많다. 시집살이를 제대로 한 시어미가 보기에 사사건건 흠이지만 그래도 품어야 서로 편하다. 
그러다가 슬며시 시어미 근성이 발동하면 아이는 네, 네 건성 대답으로 무마한다. 그것만으로도 꼬였던 마음은 슬슬 풀린다. 
여아로 태어남이 죄송했던 우리 세대와 남, 여 구별없이 당당하게 태어나 왕처럼 군림하며 자란 세대와의 차이가 아닌가 한다. 
어느 사이 아이의 손아래 흑장미 두 송이가 수줍은 듯 벌어졌다. 나는 함빡 웃음으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앞으로 계속 책임지라는 협박(?)과 함께 시어미의 권위도 며느리에의 요구도 하나씩 내려놓는다.

< 임순숙 수필가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에세이스트’로 한국문단 등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