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참으로 어려운 것

● 칼럼 2012. 5. 14. 10:03 Posted by SisaHan
이 세상에는 쉬운 일도 있고 힘든 일도 있어 사람들이 자기 생각대로 또는 어떤 논리에 따라 이렇다 저렇다 하고 정의를 내리며 말씀들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 가운데 어렵다고 이야기하면 단연 인간관계가 아닐까? 모두에게 나라는 자아와 그 자존심 때문에 이리저리 부닥치고 그래서 우정도 의리도 사라지고 백년해로하겠다고 했던 부부 사이도, 주님을 향한 뜨거운 충성을 약속하면서도 어느 날 교회를 떠나고 불신앙의 길에 들어서는 게 오늘의 우리들이 아닌가.
인간관계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가 부부라고 할 수 있다. 부부란 무엇인가? 결혼하기 전의 자신과 함께 했던 가족 보다 더 많은 시간을 지나면서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대화를 나눈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갈라설 수 있다는 그 사실이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면서 결국 인간관계가 가장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에는 거기에 자신이 문제의 핵이라는 결론을 내려 보면서 자신이 분명히 알고 지켜야 할 어떤 룰 또는 기준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런 일화를 읽은 적이 있다. 중국의 고사에 누군가가 질문을 했다. 다른 사람이 알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고 자신이 반드시 알아야 할 일이 있고 또한 잊지 말아야 할 일이 있고 반드시 잊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잠시 이 글을 읽는 것을 멈추시고 한 번 생각해 보실 수 있겠는가? 과연 나는 이 두 가지 질문에 각각 무엇이라 대답할 수 있을까? 이미 위에서 이야기한 그대로 인간관계에서만 생각해 보자.
머뭇거리며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상대를 향해 그는 다음과 같은 답을 주었다. 사람이 나를 미워하는 것은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하고 반면에 내가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절대로 다른 사람이 알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내게 베푼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되고 내가 남에게 베푼 은혜는 잊어버려야 한다고 했다.
내가 가졌던 답과 비교하면 어떨까? 사람이 나를 미워할 때 이유가 있을 것인데 그것을 기억하면서 앞으로 조심하자는 말과 함께 자신이 남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추어졌는지를 생각하고 사람을 대할 때 조심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나를 힘들게 하고 진정으로 미워하는 마음까지 생길 때 남에게 이런저런 소문을 냄으로 사람을 함부로 폄하하지 말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도 문제를 일으킬 소지를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내게 은혜를 베풀었을 때 그 고마움을 잊어서는 안 된다. 상대방은 어쩌면 고맙다는 소리를 듣기 원하는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에게 실망을 주어서는 안 되겠고 나 자신 역시 고마움을 알아야 한다. 모든 일들에 감사한 마음이 없고 당연한 듯이 생각하면 그의 인간관계는 뻔하다. 또한 내가 남에게 은혜를 베풀었을 때는 속히 잊어버려야 한다. 그래야 상대방에 대해 바램도 없어지고 보상이 없어도 섭섭하지 않는 것이다.
어렵다고 말하는 인간관계, 그것이 부부 사이든 형제 사이든 같은 교회의 성도끼리든 한 번 적용해 볼 만하지 않는가? 이민 사회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교회 내의 갈등 또는 한인 단체간의 문제들이 모두 어디서 생길까? 우리 한 번 이 룰을 적용해서 자신을 추스르면 어떨까? 그런데 이 룰을 적용하면서 살아가기는 어떨까? 적용 자체가 어렵다. 그래서 참으로 어렵다고 말해 보는 것이다.

<김경진 - 토론토 빌라델비아 장로교회 담임목사>


프랑스 대통령선거에 프랑수아 올랑드 사회당 후보가 승리를 거뒀다. 프랑스에 좌파 대통령이 선출된 것은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이래 무려 17년 만이다. 2차 대전 이후 2번째이다. 그만큼 프랑스 국민이 어느 때보다 절박하게 현상 타파를 원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집권세력에 대한 응징 투표는 비단 프랑스만의 일이 아니다. 2009년 유럽 금융위기 발생 이후 이번까지 유럽연합 국가들 중에서 11명의 집권자가 교체됐고,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최근 1년여 사이에 유로존에서 실권한 8번째 지도자이다. 프랑스 대선과 같은 날 실시된 그리스 총선, 독일 지방선거, 세르비아 총선 등에서도 집권당이 줄줄이 패하거나 부진한 성적을 거뒀다. 복지 축소와 무한경쟁을 핵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정책과, 유로 위기 이후 더욱 심화한 복지 축소와 긴축정책이 서민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한 데 대한 반발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의 정권교체는 프랑스가 세계무대와 유럽연합에서 차지하는 정치·경제·외교의 비중을 고려할 때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당장 주목할 대목은 ‘메르코지’(독일의 메르켈 총리와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의 합성어) 연합으로 불리는 유로존의 긴축정책 수정 여부이다. 이제까지는 독일과 프랑스가 긴축으로 재정개혁을 꾀해 경쟁력을 회복한다는 유로위기 타개책을 주도해왔는데, 이에 대해 프랑스가 ‘아니오’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올랑드 당선자는 이외에도 고율의 법인세와 재산세 부과, 청년과 노인 고용 기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 사르코지 연금개혁의 재검토, 2017년까지 재정균형 달성 등을 주요 공약으로 내걸었다. 시장과 얼마나 조화를 이루며 공약을 실현할지가 주목된다.
 
외교정책에는 공공연하게 친미주의를 표방했던 사르코지와 달리, 미국을 견제하고 유럽 중심주의를 강조하는 전통적인 프랑스 외교로 선회할 것이 확실시된다. 오는 20~21일 미국 시카고에서 열리는 나토 정상회의와 주요 8개국(G8) 정상회의는 올랑드 프랑스의 외교노선을 가늠할 수 있는 첫 무대가 될 것이다.
사르코지는 이명박 대통령과 너무 닮은꼴이었다. 미국식 경쟁과 효율, 복지 축소와 규제 철폐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신자유주의를 무리하게 도입하고, 친기업·친부자 정책을 밀어붙였다. 대외적으로는 프랑스 사상 가장 친미적인 외교·군사노선을 취했다. 돈 많은 사람과 힘센 사람들을 위한 사르코지 5년이 프랑스에서 ‘레드카드’를 받은 사실은 12월 대선을 앞둔 우리에게도 큰 교훈을 던져준다.


대한민국 언론사에서 2012년은 전대미문의 해로 기록될 게 분명하다. <문화방송> <한국방송> <와이티엔> <연합뉴스> <국민일보> 등 방송·통신·신문사가 일제히 유례없는 총파업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파업의 지향점도 낙하산 사장 퇴진과 공영성 회복, 편집권 독립 등 공익적 가치로 모아져 있다. 이 대파업의 선두에 선 문화방송 노조의 투쟁이 오늘로 100일째를 맞았다.
 
문화방송 구성원들은 지난 1월30일 마이크와 카메라를 놓았다. 김재철 사장 체제의 편파·불공정 방송에 더는 굴종할 수 없다는 각성이 마침내 활화산처럼 터져나온 것이다. 김 사장이 이끈 지난 2년여 동안 문화방송은 권력 감시와 견제를 통해 ‘국민의 방송’으로 자리매김하기는커녕 정권의 이해에 충실한 편파보도로 ‘정권의 앵무새’라는 오명만 얻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김 사장은 파업 100일 동안 문화방송을 더욱 만신창이로 만들고 있다. 정영하 위원장 등 노조 간부 3명을 해고하고, 30명가량에겐 정직 이상의 중징계를 내렸다. 노조 집행부의 집과 통장까지 가압류하는 손해배상 소송도 불사했다. 그런 와중에 간판 시사프로그램인 ‘피디수첩’과 ‘시사매거진 2580’ 등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조직개편을 밀어붙이고, 회사 요직에 대거 측근들을 앉혔다. 4.11 총선에선 “역사에 길이 남을 최악의 편파뉴스”(노조 민실위 보고서)라고 평가받는 불공정 보도를 서슴지 않았다.

공영방송이 100일 넘게 불구 신세를 면치 못하는 상황은 국가적 중대사태가 아닐 수 없다. 국민 시청권의 훼손을 이처럼 아랑곳하지 않는 나라는 정상적인 민주국가가 아니다. 이 정권이 민주주의의 근간인 언론자유의 중요성을 조금이라도 인식하고 있다면 이런 사태를 수수방관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과 집권 새누리당은 언론파업 사태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한다. 언론사 파업으로 쏟아지는 정권 비리 보도들이 제대로 국민에게 전달되지 않는 상황을 오히려 즐기고 있는 듯도 하다. 정권 재창출을 위해 무슨 비난이 쏟아지더라도 현재의 언론장악 상태를 연말 대선까지 끌고 가겠다는 속셈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다.
이제 중요한 것은 야당의 역할이다. 비상대책위원회 구성 등으로 전열을 정비한 민주통합당의 제1과제는 언론파업 해결이 돼야 한다. 정부 여당이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도록 다각적인 압박을 해야 한다. 그 해결책의 첫 단추는 당연히 김 사장의 사퇴다. 


우리는 남북 간에 수시로 발생하는 갈등과 군사적 분쟁에 지쳐 있다. 최근 몇 해 동안 북한군의 연평도 포격, 핵실험, 로켓 발사 등을 겪으면서 화도 많이 나 있다. 그래서 남북이 남남처럼 아예 신경 쓰지 않고 사는 게 더 낫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이들도 많다. 차라리 상대방을 통일이나 화해의 대상으로 생각지 말고 따로 살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보다는 덜 극단적이지만 북한이 남한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이 될 때까지 북한을 점잖게 무시하며 살았으면 좋겠다는 사람들도 꽤 있다. 실제로 국제정치학에는 어떤 일이 해결될 여건이 조성될 때까지 점잖게 상대방을 무시하는 방법으로 선의의 무시(benign neglect)라는 말이 있다. 이는 상대방의 실수와 몰락을 기다리며 무시작전을 펴는 악의의 무시와는 다르다.
 
그렇다면 남북관계에서 선의의 무시 정책이 가능할까? 불가능하다. 북한이 남한에 대해 마찬가지로 선의의 무시 정책을 쓰지 않는 한 성공할 수 없다. 북한 사람들은 남한보다 훨씬 더 통일 지향적인 문화와 규범 속에서 살아왔다. 그들의 머릿속에 남한은 ‘남’이 아니다. 그들은 비록 남한보다 훨씬 못살지만 남쪽의 모든 것에 대해 경쟁 심리에서 혹은 통일의 상대로서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통일을 주도할 능력을 상실한 뒤에는 남한의 흡수통일 의도를 끊임없이 의심한다. 이러한 북한의 대남 관심과 우려는 남북관계에서 도발, 대화, 지원요청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우리가 북한을 무시하고 상관없이 살겠다고 작정을 해도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사실 북한에 대한 선의의 무시 정책은 남한 입장에서도 실현이 어렵다. 그러려면 북한과 대화·협력을 하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정당한 명분이 있더라도 북한을 자극하여 도발을 유발할 수 있는 행동을 자제해야 한다. 예컨대, 북한의 공격에 대비해 실시하는 한-미 연합 군사훈련도 중단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북한이 남한에 대해 호전적으로 반응할 것이며 이는 곧 선의의 무시 정책이 실패했다는 뜻이 된다.
 
외국인의 눈에도 남과 북은 뗄 수 없는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가 2011년 11월에 ‘한류 및 국가 브랜드’에 대한 유럽 젊은이들의 인식을 알아보기 위해 ‘한국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이미지가 무엇이냐’고 묻는 여론조사를 했다. 북한이란 답이 전체의 9.1%로 가장 많았으며 전쟁이 5.4%나 됐다. 2위 케이팝(K-POP)이 6.9%였다. 냉전을 경험하지 않은 유럽 신세대의 한국에 대한 이미지 속에도 북한이 이처럼 깊이 녹아들어 있다. 이로 미루어 대부분의 유럽인들이 한국을 떠올릴 때, 대체로 몇 번째 안으로 북한을 연상한다고 보아야 한다.
2004년에 샌프란시스코 주재 한국 총영사관이 캘리포니아 주민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했다. 한국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을 묻는 항목에 대해 27%가 ‘부정적’이라고 답했는데 그 이유를 물으니 1위가 ‘핵무기 개발 및 독재체제’(20%)였으며 2위가 ‘한국의 주변정세 불안정’(14%)이었다. 많은 미국인이 남한과 북한을 혼동하고 있으며, 적대적인 남북관계가 빚어내는 정세의 불안정 때문에 한국을 싫어한다는 얘기다.
 
이처럼 우리는 남북한이 다르다고 강조하지만 제3자의 눈에 남북한은 구별하기 어려운 하나의 실체 혹은 연결체로 인식되고 있다. 실제로도 북한이 우리를 ‘남’으로 보지 않지만 우리도 북한을 무시하고 살 처지가 못 된다. 강경책으로 북한의 버릇을 고칠 수도 없다. 이는 남북관계를 최악으로 빠뜨리고 한반도 정세를 불안하게 만든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을 통해 입증됐다.
그렇다면 방법은 한가지다. 적극적으로 북한과 관계를 맺어 가는 것이다. 더욱이 이제는 북한과 협력하여 한반도 경제시대를 여는 것이 국운 개척의 길이 되었다. 지하자원 협력 하나로도 남북은 수백억달러의 부를 창출할 수 있다. 남한이 이를 거부하면 중국이 대신하게 되어 있다. 그렇기에 북한과 대화와 협력을 추구하여 남북 대결상태를 종식하고 공동번영의 시대로 나가야 한다. 남북이 따로 살 수 없다면 어렵더라도 함께 사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이종석 - 전 통일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