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남북 간에 수시로 발생하는 갈등과 군사적 분쟁에 지쳐 있다. 최근 몇 해 동안 북한군의 연평도 포격, 핵실험, 로켓 발사 등을 겪으면서 화도 많이 나 있다. 그래서 남북이 남남처럼 아예 신경 쓰지 않고 사는 게 더 낫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이들도 많다. 차라리 상대방을 통일이나 화해의 대상으로 생각지 말고 따로 살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보다는 덜 극단적이지만 북한이 남한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이 될 때까지 북한을 점잖게 무시하며 살았으면 좋겠다는 사람들도 꽤 있다. 실제로 국제정치학에는 어떤 일이 해결될 여건이 조성될 때까지 점잖게 상대방을 무시하는 방법으로 선의의 무시(benign neglect)라는 말이 있다. 이는 상대방의 실수와 몰락을 기다리며 무시작전을 펴는 악의의 무시와는 다르다.
 
그렇다면 남북관계에서 선의의 무시 정책이 가능할까? 불가능하다. 북한이 남한에 대해 마찬가지로 선의의 무시 정책을 쓰지 않는 한 성공할 수 없다. 북한 사람들은 남한보다 훨씬 더 통일 지향적인 문화와 규범 속에서 살아왔다. 그들의 머릿속에 남한은 ‘남’이 아니다. 그들은 비록 남한보다 훨씬 못살지만 남쪽의 모든 것에 대해 경쟁 심리에서 혹은 통일의 상대로서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통일을 주도할 능력을 상실한 뒤에는 남한의 흡수통일 의도를 끊임없이 의심한다. 이러한 북한의 대남 관심과 우려는 남북관계에서 도발, 대화, 지원요청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우리가 북한을 무시하고 상관없이 살겠다고 작정을 해도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사실 북한에 대한 선의의 무시 정책은 남한 입장에서도 실현이 어렵다. 그러려면 북한과 대화·협력을 하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정당한 명분이 있더라도 북한을 자극하여 도발을 유발할 수 있는 행동을 자제해야 한다. 예컨대, 북한의 공격에 대비해 실시하는 한-미 연합 군사훈련도 중단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북한이 남한에 대해 호전적으로 반응할 것이며 이는 곧 선의의 무시 정책이 실패했다는 뜻이 된다.
 
외국인의 눈에도 남과 북은 뗄 수 없는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가 2011년 11월에 ‘한류 및 국가 브랜드’에 대한 유럽 젊은이들의 인식을 알아보기 위해 ‘한국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이미지가 무엇이냐’고 묻는 여론조사를 했다. 북한이란 답이 전체의 9.1%로 가장 많았으며 전쟁이 5.4%나 됐다. 2위 케이팝(K-POP)이 6.9%였다. 냉전을 경험하지 않은 유럽 신세대의 한국에 대한 이미지 속에도 북한이 이처럼 깊이 녹아들어 있다. 이로 미루어 대부분의 유럽인들이 한국을 떠올릴 때, 대체로 몇 번째 안으로 북한을 연상한다고 보아야 한다.
2004년에 샌프란시스코 주재 한국 총영사관이 캘리포니아 주민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했다. 한국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을 묻는 항목에 대해 27%가 ‘부정적’이라고 답했는데 그 이유를 물으니 1위가 ‘핵무기 개발 및 독재체제’(20%)였으며 2위가 ‘한국의 주변정세 불안정’(14%)이었다. 많은 미국인이 남한과 북한을 혼동하고 있으며, 적대적인 남북관계가 빚어내는 정세의 불안정 때문에 한국을 싫어한다는 얘기다.
 
이처럼 우리는 남북한이 다르다고 강조하지만 제3자의 눈에 남북한은 구별하기 어려운 하나의 실체 혹은 연결체로 인식되고 있다. 실제로도 북한이 우리를 ‘남’으로 보지 않지만 우리도 북한을 무시하고 살 처지가 못 된다. 강경책으로 북한의 버릇을 고칠 수도 없다. 이는 남북관계를 최악으로 빠뜨리고 한반도 정세를 불안하게 만든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을 통해 입증됐다.
그렇다면 방법은 한가지다. 적극적으로 북한과 관계를 맺어 가는 것이다. 더욱이 이제는 북한과 협력하여 한반도 경제시대를 여는 것이 국운 개척의 길이 되었다. 지하자원 협력 하나로도 남북은 수백억달러의 부를 창출할 수 있다. 남한이 이를 거부하면 중국이 대신하게 되어 있다. 그렇기에 북한과 대화와 협력을 추구하여 남북 대결상태를 종식하고 공동번영의 시대로 나가야 한다. 남북이 따로 살 수 없다면 어렵더라도 함께 사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이종석 - 전 통일부 장관>


[한마당] 삶을 구속하는 사회

● 칼럼 2012. 5. 14. 09:20 Posted by SisaHan
1989년 12월20일, 파나마를 침공한 미군의 험비차량들이 파나마시티 주재 바티칸 대사관 앞을 둘러쌌다. 이곳으로 도망친 파나마의 독재자 마누엘 노리에가를 체포하기 위해서였다. 국제 마약거래 혐의였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하수인이었던 노리에가의 마약 거래가 미국의 니카라과 우익 반군 지원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들통난데다, 노리에가가 제멋대로 굴면서 미국의 중남미 전략에 걸림돌이 됐기 때문이다.
미군 험비차량들은 총이나 로켓포가 아니라 고성능 스피커로 무장했다. 귀청을 찢을 듯한 헤비메탈 음악이 대사관 주변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로큰롤 폭격’의 위력은 엄청났다. 극심한 소음과 스트레스를 견디다 못한 노리에가는 14일 만에 미군에 투항했다.
국제법상 외교 공관은 주재국이 아닌 파견국의 영토로 간주되며 치외법권을 인정받는다. ‘외교관계에 관한 빈(비엔나) 협약’(1961년)에서 확립된 외국 공관 불침해 원칙이다. 노리에가가 바티칸 대사관으로 도망친 것도, 미군이 이곳에 한 발짝도 들여놓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다.
 
외국 대사관은 모든 정치적 난민이나 피억압자들의 피난처 1순위다. 헝가리의 요제프 민첸티 추기경은 1956년 공산독재에 항거한 헝가리 혁명이 실패하자 부다페스트 주재 미국 대사관으로 피신해, 1971년 오스트리아로 망명하기까지 15년이나 더부살이를 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직전에는 수백명의 동독인들이 폴란드와 체코의 서독 대사관으로 몰려들었다. 북한을 탈출한 난민들은 목숨을 걸고 중국 주재 외국 대사관의 담을 넘는다.
지금은 중국의 시각장애 인권변호사 천광청이 뜨거운 현안이다. 그는 2005년 중국 산아제한 정책의 야만적인 실태를 폭로했다가 4년간 옥살이를 했다. 그 뒤 가택연금 중이던 그가 지난달 베이징 주재 미국 대사관으로 탈출해 망명을 요청했다. 중국이 발칵 뒤집혔다. 미국은 곤혹스러웠다. 그의 운명은 ‘중국 잔류’와 ‘미국 망명’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다. 두 나라는 천광청의 ‘미국 유학’을 허용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중국은 ‘나쁜 선례’를 차단했고, 미국은 ‘인권 외면’이라는 비난을 피했다.
빈외교협약은 이후 유엔 인권규약이나 유럽연합 인권규약 등을 통해 인권보호 차원으로까지 확장됐다. 사법기관의 합법적 체포·구금이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자유권과 안전권을 박탈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빈협약 가입국의 재외 공관들은 정치적 피난자를 해당 국가에 넘겨줄 경우 그의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의무가 있다. 대사관 피난은 법적 문제라기보다 정치적 문제에 가깝다.
 
이즈음에서, 근본적인 의문들이 꼬리를 문다. ‘반체제’란 무엇인가. 국가가 모든 자연인에게 ‘국민’(시민)의 지위를 부여하고 체제 귀속을 강제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아나키즘(무정부주의)은 위험한 공상인가…. 법철학과 정치학, 사회철학과 문화인류학이 나름의 설명을 해왔다. 그러나 그건 설명과 해석일 뿐, 자발적 동의의 근거는 아니다. 아나키즘의 이론적 전망도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꼭 300년 전에 태어난 장자크 루소(1712~1778)는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어디에서나 사슬에 묶여 있다”고 한탄했다. 인간이 공동체 생활을 포기하지 않는 한, 사회적 속박은 숙명인지 모른다. 루소는 “각 개인이 자신을 구성원 전체에 양도함으로써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을 양도하지 않는” 이상주의적 사회계약을 꿈꿨다.
최근 몇년 새 우리 사회는 국가권력의 억압이 삶의 구석구석까지 침투하면서 ‘누구든 걸리면 손해’라는 나쁜 학습효과가 팽배해졌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일상을 압도하는 현실에서, 자꾸만 루소의 꿈을 기웃거린다.

< 한겨레신문 조일준 국제부 기자 >


[1500자 칼럼] 피카소(Picasso)

● 칼럼 2012. 5. 5. 09:51 Posted by SisaHan
4월 28일(토), 온타리오 미술관에서 하는 피카소 특별전을 갔다 왔다. 원래 전시 기간은 5월 1일 부터 8월 26일 까지인데, 회원들을 위해 특별히 문을 연 날이었다. 먼저 이 글은 전문가로서의 글이 아니라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전시회에 대한 소개의 글임을 밝혀둔다. 사실 피카소처럼 잘 알려진 화가(예술가)는 없다. 그와 동시에 미술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잘못 알려진 화가도 없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 단편적으로 본 몇 점의 그림만 보고, 섣부른 판단을 내렸던 것이 사실이다. 흔히들 심한 말로 어린애가 그린 것 같은 그림을 그리지만, 그가 워낙 유명해서 그림이 비싸게 팔린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나 자신도 그는 아름다움을 창조하기 보다 파괴하지 않나 생각했다. 사실 내 그림 감상 수준이라는 것이 아름답고 따뜻하고 사실적인 것을 좋아하는 수준 밖에 되지 못하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사실이다. 더욱이 개인적으로 빈센트 반 고호를 좋아했는데, 그 와는 반대되는 삶을 산 피카소를 은근히 싫어하기조차 했다. 그러나 그의 작품세계가 어떤 과정을거쳐 왔으며, 그가 부분적인 성공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의 작품을 보는 나의 눈이 달라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욱이 예술가란, 화가이든 작가이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해야 하고 부닥칠 수 있는 극한상황까지 가야한다는 사실을 깨달고는 그를 한 예술가로서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창작이란 새로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피카소를 다시 보기 시작한 것은 몇 해전 오타와의 미술관에서 그의 특별전을 했을 때였다. 친구 따라 우연히 간 전시회였고 그 때만 해도 피카소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그 때도 꽤 많은 작품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가 그린 소들의 그림이었다. 일부러 그런 것인지 여러 점의 소를 한 곳에 모아 전시했는데,깜작 놀란 것은 처음에 그린 소일수록 정말 소 같았다. 마치 투우처럼 날카로운 뿔을내세운 것이 당장이라도 뛰쳐나올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갈수록 선이 줄어들어 마지막에 그린 것은 어린애가 장난으로 선 몇 개 그려놓은 것이었다. 사실 보통사람의 눈에는 초기에 그린 소가 진짜 소같고 그리고 사실적으로 잘 그린 것이었다. 그때서야 나는 그가 이 모든 과정을 걸쳐 초현실적인 소같지 않은 소에 도달했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이번 전시회에도 그 소 그림이 있었지만 단 두 점만 있는 것이 아쉬웠다. 작품들을 그의 시대별로 구분해서 전시해 놓아 그의 작품의 변천사를 쉽게 알아 볼 수 있어 좋았다.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그의 초기 작품이라할 청색시대(Blue Period)의 작품이 적었다는 게 조금 아쉬웠다. 그리고 도예 작품이 없었던 점도. 피카소가 정말 부러운 것은 거의 70여년 작품활동을 하면서, 미술 전 분야를 다루었다는 점이다. 조각, 도예, 발레 벽화까지…이번 전시회의 특징은 파리의 피카소 박물관 소장품답게 유명한 작품들이 많았고, 작품도 다양했다. 그 작품들을 언급하기엔 지면이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인상적인 작품들은 그의 여인들의 초상화였다. 첫, 공식적인 부인인 러시아의 발레리나 올가의 초상화로 시작하여, 도라 마, 그리고 마지막 여인이자 부인이었던 재크린 로게.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내가 한국인이어서 그런지 ‘한국전쟁의 학살(The Massacre in Korea)’이었다. 전시 작품중 가장 큰 작품이어 한 쪽 벽을 다 차지하고 있었다. 전에 사진으로 본 적이 있는데 이상하게 보는 순간 소름이 끼쳤다. 기계나 로봇같은 군인들이 총을 겨누고 있는 앞에 무방비로 서있는 여인들과 아이들의 모습이 충격적이었다. 
 온타리오 미술관에서는 1964년에 피카소의 특별전을 한 이래 이번이 두 번째로 하는 전시회라고 한다. 그림을 애호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꼭 가볼만한 전시회라고 생각한다. 한 화가의 작품이 어떻게 변했냐를 보는 이상으로 미술세계가 나아가서는 에술세계가 20세기에 들어 어떻게 변했는 가를 한 눈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남북관계가 이토록 나빠진 적은 없었다. 지난 20년래 최악이다. 최근 이명박 대통령은 ‘통중봉북’이라는 말로 북한을 더욱 자극했다. 북한 농지개혁 발언은 생뚱맞기 그지없다. 북을 압도하는 남의 군사력 발언도 국방장관이라면 몰라도 대통령이 할 말은 아니다. 특히 ‘통중봉북’은 제정신으로 한 말인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인데, 이쯤 되면 대통령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그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 도무지 모르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첫째, 북한이 국제공조의 압박 속에서도 그나마 버틸 수 있는 것은 북-중 간의 관계가 깊고 열려 있기 때문이다. ‘통중봉북’은 북의 숨통을 끊어 놓겠다는 것이다. 북이 경기를 일으키는 흡수통일이란 말보다 더 직설적으로 위협하는 표현이다. 극단적인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다.
 
둘째, ‘통중’이란 표현은 중국을 어리둥절하게 하고 또 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수 있다. 중국과 수교한 지 이미 20년이다. ‘통중’은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 새삼 그걸 강조하는 건 이때까지 중국과의 관계를 소홀히 해왔다는 것인가? 하기야 이 대통령이 취임 직후 강조한 한-미 군사동맹은 냉전적·시대착오적 외교정책이었으니, 중국은 ‘통중’을 강조하는 이 대통령에게 냉전적 한-미-일 동맹에서 벗어나겠다는 뜻인가를 묻고 싶을지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요새 흔히 하는 말로 일종의 ‘꼼수’로 볼 것이다. 
셋째, 통중을 강조하는 건 워싱턴을 당혹스럽게 만들 수 있다. 임기 말에 다급하니까 중국과도 가까이 지내려나 보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미국은 통중이 봉북을 위해 필요하다고 이해해 줄 수 있다. 문제는 그 실효성이다. 이미 여러번 미국은 중국이야말로 북한에 대해 가장 효과적이고 강력한 지렛대를 갖고 있는 국가임을 강조하면서 중국의 협조를 구했다. 그러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워싱턴도 제대로 못했는데 서울이 독자적으로 해낼 수 있다고 보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역작용을 염려할 것이다.
 
넷째, ‘봉북’이라는 발상의 위험성이다. 북의 ‘통미봉남’에 맞불을 놓겠다는 것인데, 통미봉남을 비웃음거리로 삼아온 게 누군가? 게다가 현 정부는 출범 때부터 실제로 봉북 정책을 취했는데, 임기 말에 와서 새삼스럽게 그것을 봉북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은 그간 자기들이 뭘 하는지도 몰랐다는 뜻인가? 그것도 아니면 비장의 수단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개성공단마저 폐쇄하겠다는 것이라면 누가 더 손해를 보게 될까? 
마지막으로 가장 염려스러운 것은 이런 강경발언이 남북간 ‘적대적 의존관계’를 더 부추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의 강경발언은 역설적으로 북 강경파의 입지를 강화시켜준다. 미국과 북한은 베이징에서 어렵사리 2.29 합의를 이뤘다. 그건 북한 외무성의 성과였다. 
그런데 ‘태양절’을 맞은 4월13일 ‘은하 3호’ 로켓이 발사됐다. 북의 강경 군부는 그 합의를 식은 죽 먹듯 뒤집을 수 있는 힘이 있음을 대내외에 과시한 셈이다. 실험에 성공하면 군부는 입지를 더욱 강화할 것이고, 설령 실패해도 위기의식을 고조시켜 김정은 체제를 유지시키는 힘이 여전히 군부에 있음을 보여줄 또 다른 기회라고 여길 것이다. 그리고 ‘구실’만 있으면 핵실험도 시도할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이 강경발언에 앞장서고 있으니, 북한 군부는 얼씨구 좋다는 식으로 더욱 강경한 선택을 할 것이다.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부’라는 말도 그렇지만 대통령이 극단적 발언을 하면 장차관은 침묵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의 침묵이야말로 금과 같은 가치가 있고 역사적인 무게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다음 대통령은 제발 평화와 인권을 소중히 여기기에 그만큼 입이 무거운 분이 되었으면 한다.

< 한완상 - 전 부총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