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책 읽는 사람들

● 칼럼 2012. 4. 23. 09:01 Posted by SisaHan
책은 왜 읽어야하나? 그리고 왜 읽고 싶을까?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책 가운데 어떻게 좋은 책을 찾아낼 수 있을까? 이곳엔 한국의 교보문고 같은 큰 책방도 없다. 인터넷 검색을 하면 좋은 책 소개를 쉽게 접할 수 있으나 내 손에 들어오기까지는 그리 쉽지않다.
차분히 앉아 책 읽을 시간 마련하기 조차 힘든만큼 먹고살기에 바쁜 이민생활 속에서 독서는 차라리 사치 아닌가? 끝도 없는 핑계가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런데 책읽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동아리 모임 같은 것이 우리주변에 조금씩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한인YMCA 또는 커뮤니티센터 또는 문화센터 등에서 진행되는 각종 강의듣기, 책읽기, 글공부하는 소식이 참 반갑기만 하다. 정신적인 빈곤에서 벗어나고 싶은 갈증이 얼마나 큰지 내가 관여하고 있는 모임들에서도 반짝이는 눈동자가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엔 끝없이 배우고 싶어하는 열정과 삶에 대한 애정이 담겨져 있다. 책 읽는 사람들의 공토분모는 겉치장보다 속치장에 더 관심 있는 사람들이요, 보다 나은 삶의 질을 책 속에서 찾아보려는 나름대로의 고매한 정신이 깃들어 있다. 지적인 만족도 채워주지만 감성적인 대리만족도 얻는다. 책 속에서 삶의 경륜을, 인생사에서 풀어나가기 어려운 일을 만날 때 종종 그 해답을 책속에서 찾게되는 경험도 한다. 방향감각이 무디어 헤매일 때도 책은 길 안내 표지판이 되어 주기도 한다. 깨달음의 이치를, 공감의 희열을, 마음 치료사의 역할도 책 속에서 찾는다. 보화를 캐내며 한편의 글을 창출해내려는 고통 후에는 자기성취감의 희열도 있다. 그러나 정신과 마음의 양식을 한권의 책 속에서도 얻을 수 있음에도 책을 읽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여기에 이런 본보기가 있다. 한권의 좋은 책을 선정하여 내가 출석하는 교회 북 클럽에선 첫 번의 시도로 티머시 켈러의 <살아있는 신-The Reason for God)>을 읽기로 했다. 리더의 지도를 받으며 10회에 걸친 토론회가 끝난 후 두 번째로 선정된 스캇 팩의 <거짓의 사람들>을 바탕으로 독후감에 이어 다섯 번에 걸친 열띤 토론회가 끝났다. 두 권의 책 모두가 결코 쉽게 읽혀지는 책은 아니나 글을 씹으며 읽고 나누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거짓의 사람들> 저자 스캇 팩은 ‘이 책을 위험한 책이다’라고 쓰고 있다. 어떤 책이길래 저자 자신이 그의 머리말에서 이런 경고부터 했을까. 추천의 말 가운데 ‘인간을 병들게 하는 거짓의 정체를 밝히는 책’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읽는 이에 따라 위험한 책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닐까 싶어 읽기 시작했다. 또한 자칫 인간성에 내재 되어있는 악마성을 자신에게 보다 내 이웃에게 잣대를 들이댈 수 있는 무기로 쓰여 질 수도 있다는 경고도 해준다. 자신의 거짓된 정체를 뜻밖에도 들여다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자기 파괴 역활도 할 수 있는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악을 직접 들여다 봐야 치유를 꿈 꿀 수 있다고 말하는 저자는 정신과 전문의요 정신분석가다. 인간 속에 내재되어있는 환자들의 사례를 들어 ‘악마와 계약을 맺은 남자’ ‘악의 심리학을 찾아서‘ ’일상생활에 숨어있는 악’ 등 7장에 걸쳐 그간 치료했던 환자들의 사례를 들어 인간 깊이 박혀있는 거짓의 정체를 밝혀주고 있다. 극단적인 사례들도 있으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우리들 자신을 분석해 보는 진지한 순간들이 서로에게 솔직해지는 마음으로 열렸다. 자신 속에 숨어있는 악마성을 다시 들여다보게 되는 계기도 되었다. 스토리를 따라 읽는 즐거움도 있었고 전혀 알 수 없는 병든 인간의 정신세계를 간접 경험케 해주는 아찔함과 황당스럼도 있었으나 한 계단을 뛰어넘어 성숙의 길로 가는 희망도 보여주었다. 병든 인간의 마음치료는 관심과 배려, 이해와 사랑이 치유의 명약이라는 결론은 당연하다 여기겠지만 그 과정이 얼마나 처절하고 끝없는 인내심의 요청을 감내해야 하는가도 가르쳐주고 있다. 
  
두 권의 책 중에 <거짓의 사람들>을 그 예로 소개했지만 이런 방식의 북 클럽 독서회가 성공리에 이루어졌던 것은 적극적인 참여의식과 한권의 책이라도 깊이있게 읽고 토론하고 나누고 자신의 내면의 세계와 다시 만나는 경험 등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다음엔 어떤 책이 선정되어 읽게 될까 궁금하다.

<수필가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전 회장>


동포사회를 안타깝게 했던 온주 실협 선거가 끝났다. 그동안 깊게 패인 감정의 골과 적대적 대응으로 일관했던 양측이 법원감독이라는 수모를 겪기는 했지만 선거 후 깨끗이 승복하고 정상화의 길을 걷는 모습은 일단 다행스럽다. 선거 기간에도 서로 불법시비에 채증(採證)을 밝혀 혹여 선거 후 다시 후폭풍이 일지않을까 우려가 있었던 게 사실이다. 
특히 일부 신문의 특정 후보 밀어주기와 상대후보 폄하라는 지나친 편파보도에 다른 후보들이 반발하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기이한’ 상황도 벌어졌기에, 실협 뿐만 아니라 동포 언론계에도 후유증이 미치지 않을까 걱정됐던 게 사실이다. 타 후보들은 물론 많은 한인 동포들도 너무 노골적인 신문의 편향을 걱정하는 소리를 전해와 같은 언론으로 솔직히 민망하고 언짢았던 기억이다.
 
그런데 이번 실협 선거에서 보인 그 신문의 보도행태는 묘하게도 모국의 지난 4.11 총선에서 보여준 일부 신문과 방송의 정도(正道)를 벗어난 ‘친여 편향-야권 죽이기’ 보도행태와 너무 닮았다는 데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된다.  시민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대변하며 아름답게 아우르고 보살펴야 할 언론이 마치 피고와 원고를 다루는 판사나 검사처럼 사안에 직접 개입해 ‘감 놔라 배 놔라’ 하면서 쥐고 흔드는 모양새는 글자 그대로 ‘작태’라는 말을 듣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언론의 원론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금도(襟度)를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 여당의 과반 확보로 선거가 끝나니 마치 자기들 잔치가 벌어졌던 것 마냥 승리감에 도취된 보도를 양산해내는 이른바 ‘조·중·동’의 금도를 팽개친 모습은 그야말로 ‘조폭적 행태’에 다름 아니다. 한국을 대표한다는 신문들이기에 더더욱 국격과 ‘언격(言格)’을 논할랴치면 수준이하의 낯뜨거움을 절감할 수 밖에 없다.         
선거 후 쏟아지는 승-패인 분석들은 거의 여당에 후하고 야당에는 혹독하다. 야권에 대한 기대치가 컸고 그만큼 상실감도 크기에 그럴 수 있다지만, 정말 야당이 그렇게 뒤집어 쓸 정도로 잘못만을 저질렀던 것일까.
 
선거정국의 흐름과 역학을 한번 찬찬히 따져본다면, 이번 총선의 승패를 가른 최대 요인은 첫째 언론, 둘째 강고한 지역구도, 셋째 물타기와 궤변의 엎어치기 전략…, 그리고 박근혜 영향력과 김용민 파문 등은 그 다음 변수들이었다는 감이 든다. 
‘조중동’ 등 보수언론들은 ‘김용민 막발’이 승패를 가른 최대 요인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막말 그 자체 보다는 그런 파문을 최대이슈로 만든 언론들의 행태가 승패를 갈랐다고 봐야한다. 뒤집어 말하면 여권이 ‘기를 쓰고 밀어부친’ 언론장악의 덕을 톡톡히 누린 선거판이었다.  
“표절-성폭행 문제와 막말문제가 대립할 때, 전통 미디어는 한쪽은 덮고 막말 파문은 마치 국가가 뒤집어지는 일인 양 포장하고 확대했다. 그리고 그게 먹혔다..”(최영묵 성공회대 신방과 교수)
맞는 말이다. 선거 와중에 터진 개별 이슈는 많았다. 8년 전 내뱉었다는 김용민의 막말 말고도, 제수 성폭행 의혹이 터진 김형태, 박사학위 논문 이중 표절의 문대성, 친일발언의 하태경, 불법사찰 의혹의 기무사 수장 출신 등…문제후보가 한둘이 아니었다. 이들 중 김용민만 야당이었고, 집중포화를 받은 것도 그 뿐이었다. 김형태·문대성 모두 보수언론들은 크게 다루지 않았고, 그들은 당선됐다.
 
신문시장의 5할이상을 장악하고 있다는 ‘조중동’은 선거기간 내내 보수결집과 거야(巨野)불안감 조성에 나서는 등 여당 편향으로 일관했다. 영향력이 큰 KBS·MBC·연합뉴스 기자들의 공정보도를 외친 파업이 공교롭게도 선거기간 지속되면서 간부중심으로 만든 뉴스들 역시 여당 홍보에 치중했다. 
언론파업이 야당에는 악재였던 것이다. 당연히 선거 캠페인 기사의 ‘여대야소, 여후야박(與厚野薄)’이 이어졌다. 엄밀히 따져보면 공천에서 잘잘못은 여-야 오십보 백보였다. 일사불란한 일인체제의 효율성이 좋아 보일터이나, 민주적 리더쉽은 논박 속에서 조화를 이뤄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똑같은 실수에 한쪽은 감싸주고 한쪽은 침소봉대 되곤했다. 
그래서 정부에 장악된 언론들이 이번 여당 승리의 공신들이었다는 분석은 극히 타당하다. 
하지만 그들의 자아 도취가 얼마나 갈까. 신뢰를 잃은 언론은 존재 의미가 없다. 벌써 언론시장에서 영향력이 급속히 떨어지고 있는 게 그걸 말해준다.

< 김종천 편집인 >


[칼럼] 사찰당한 자의 슬픔

● 칼럼 2012. 4. 7. 14:45 Posted by SisaHan
“저녁 9시 정도 된 것 같다. 진찰이 모두 끝나고 소파에 앉아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피로를 풀기 위해 마티아스 그뤼네발트에 대한 책을 읽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내 방이 사라지더니, 곧 아파트가 사라져버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두렵게도 내 시야가 미치는 곳 어디에도 아파트 벽들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스피커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벽을 제거하라는 이번달 17번째 포고령에 따라….’”
1934년 한 독일인 의사가 기록한 꿈의 내용이다. 나치가 개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나가던 숨막히는 체제에서 그 의사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아주 잠깐 ‘자유로운’ 개인적 취향(16세기 종교화가인 마티아스 그뤼네발트를 탐닉하는 것)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감시당할 수 있고 그로 인해 불이익에 처해질 수 있다는 강박이 그를 짓눌렀던 게다.

“꿈을 기록한 뒤에 그 의사는 또 한 번 이 꿈을 기록한 사실 때문에 고발당하는 꿈까지 꾸었다. 이제 잠조차 사적 영역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상은 <한겨레21> 편집장 시절이던 2009년 9월 권두칼럼 ‘만리재에서’에 쓴 이야기다. 따옴표로 묶인 부분은 유럽 현대사를 다룬 책 <암흑의 대륙>에서 인용했는데, 사찰당하는 사회에 대한 공포를 잘 보여준다. 당시 이런 글을 쓴 이유는, 끔찍하게 묘사된 저 파시즘 사회가 우리에게도 전조를 드리우고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촛불정국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를 거치며 날로 시민의 자유를 옥죄어 오는 공권력의 횡포에서 이 정부의 ‘파시즘적 경향’을 읽어낼 때였다.

바로 그즈음인 2009년 11월9일 작성된 민간인 사찰 문건에 <한겨레21> 편집장의 이름이 올라 있다. 당시 수많은 민간인에 대한 사찰이 진행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우려는 이미 현실이었다. 우리도 모르게 아파트의 벽들이 투명해지고, 징그러운 사찰의 눈빛이 기본권의 벽을 뚫고 들어와 ‘자유로운’ 개인의 영역을 훑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2009년 6월 <한겨레21> 764호 표지이야기에는 미국 사회비평가 나오미 울프가 제시한, 민주주의에서 파시즘으로 넘어가는 이행기의 특성이 소개돼 있다. △일반 시민을 사찰한다. 개인의 전과와 정치성향, 사생활 등을 기록한 개인자료를 활용한다. △교수·공무원·언론인·문화예술인 등 비판적 인사들을 직장에서 쫓아내거나 경력을 파괴한다. △비판적 검사(판사)를 해임하는 등 법의 지배 방식을 뒤엎는다. △정치적 압박으로 자유언론을 탄압한다. △시민들의 사상·행위·표현을 ‘법의 이름으로’ 처벌한다…. 최근 우리 앞에 펼쳐진 현실과 소름 돋도록 일치한다.

이제 비로소 “잠조차 사적 영역이 아니”라는 표현의 절실함을 알겠다. 그것은 공포를 넘어선 것, 실존의 심연을 덮는 슬픔이다. 인간의 외피를 입고 있으되, 모든 인간에게 부여된 기본권의 경계 밖, 짐승의 영토로 내동댕이쳐졌다는 깨달음은 온몸과 정신을 구정물로 적시는 듯하다. 슬픔의 깊이를 더하는 건 이 추잡한 현실을 되돌리는 것조차 순조롭지 않다는 점이다. 불법사찰의 책임자도, 그를 처벌해야 할 검찰도, 민주주의 파괴를 개탄해야 할 상당수 언론도 방관하거나 오히려 물타기에 급급하다. 과거 우리나라나 외국에서 유사한 일들이 벌어졌지만 제도적으로 단죄와 교정 과정을 거쳤기에 민주주의가 살아남았다. 이것이 불가능한 사회는 이행기를 지나 본격적인 파시즘의 도래라는 절망을 마주해야 할지 모른다.

그래도 마지막 희망을 붙잡는다. 우리에게 선거가 다가와 있다는 것, 인간의 존엄과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파시스트 세력을 민주주의의 전당에서 축출할 기회가 한번은 남아 있다는 것이다. 

<박용현 - 한겨레 신문 오피니언넷 부장>


세계적인 환경단체 그린피스 간부 3명이 엊그제 ‘밝힐 수 없는 관계기관’의 요청에 따라 인천공항에서 쫓겨났다. 국익유해자로 분류됐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이달 중순 희망에너지 선박 투어를 통해 원전 반대 운동을 할 계획이었다. 결국 이 정부의 원전 확대 정책을 둘러싼 논란을 억제하려는 것이었으니, 원전 마피아의 이익과 독선 앞에선 국민의 체면도 국가의 품격도 없다.
일본의 후쿠시마 사고 이후 원전에 대한 국익 판단은 뿌리째 흔들렸다. 현재 우리 국민이 동의하는 수준은 원전의 안전성과 효율성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증이다. 원전 확대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쪽에 가깝다. 따라서 국민을 어렵게 생각하고 그 뜻을 존중하는 정부라면 기존의 정책을 밀어붙일 순 없다. 당대와 미래세대의 안전을 고려해 지속가능한 에너지 대책을 새로이 수립해야 한다. 불과 60년 안에 초대형 원전사고가 3건이나 터졌는데, 원전의 안전 신화를 맹신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지금까지 숨겨왔거나 누락시켰던 사회적 비용 혹은 폐로 및 폐기물 처리 비용까지 합친다면 원전의 저비용 신화 역시 의심받아 마땅하다.
 
그린피스는 이번 희망에너지 투어를 통해 ‘에너지 혁명’ 한국판 보고서인 한국의 지속가능한 에너지 전망을 발표할 계획이다. 원전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지만 한국적 에너지 대안을 제시한다니, 정부로서는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그린피스의 제안이 오히려 원전 마피아의 독선적인 확대 정책보다 국익에 더 부합할 수 있다. 그럼에도 훼방만 놓고 있으니 이보다 더 국익에 반할 순 없다. 캠페인을 위한 에스페란사호의 입항을 허가해줄지도 의문이다.  게다가 이번 입국 봉쇄는 탈원전 논란을 떠나 국가의 품격을 현저히 훼손하는 짓이었다. 정부는 이들에게 입국 금지의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도 않았다. 핵안보정상회의를 앞두고 사토 다이스케 반핵아시아포럼 사무국장의 입국을 불허했을 때처럼 사실상 막무가내로 입국을 거부했다. 국제적 기준에서 볼 때 이런 한국은 열린 사회도, 민주국가도 아니다. 유엔인권이사회에 제소되어 국제적 망신을 사도 할 말이 없다.
 
한국은 올해 열릴 리우+20회의 등 각종 환경회의의 의장국을 수임했다. 지속가능한 개발과 보존의 의제에서 합의를 이끌어내는 국제적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상황에서 합법적 캠페인조차 봉쇄한다면 지도력은 커녕 조롱거리만 될 수 있다. 당장 입국 금지부터 풀고 캠페인을 방해하지 말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