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무한도전’보다 소중한 것

● 칼럼 2012. 5. 20. 17:41 Posted by SisaHan
오늘 <한겨레>가 창간 24돌을 맞는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24년을 견디며 민주언론의 길을 걸어온 우리 스스로를 격려하고 축하해야 할 날이건만, 묵직한 통증이 가슴을 짓누른다. 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의 폭압에 맞서 언론자유 투쟁을 벌인 선배 언론인들과 그들을 지지해준 국민들 덕에 한겨레가 태어난 뒤 4반세기 가까이 흘렀음에도, 언론 현실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사회의 공기인 언론을 사유화하려는 권력과 자본의 행태는 오히려 더 뻔뻔해졌다. 특히 공적 가치에 대한 인식이 결여돼 있는 이명박 정권한텐 언론의 공공성 따윈 애초부터 안중에 없었다. 언론정책의 유일한 목표는 언론을 정권 안보의 도구로 만드는 것이었다. 정권을 등에 업고 제 뱃속만 불려온 것으로 드러난 최시중·신재민 같은 사람이 언론정책 담당자로 중용되고, 대통령의 언론특보 출신들이 공영방송 사장 자리를 꿰차게 된 것은 이런 인식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중 압권은 ‘청와대 조인트설’이나 특정 무용인과의 부적절한 유착 의혹 등으로, 도덕 불감증, 공공성 불감증 정권의 아바타가 된 김재철 문화방송 사장이다. <문화방송> <한국방송> <연합뉴스> <와이티엔> 등 공영(성)언론들의 파업은 이런 몰염치한 정권과 그 지킴이로 나선 낙하산 사장들의 전횡에 대한 분노의 표출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도 19대 국회를 이끌 새누리당의 이한구 원내대표는 이번 파업을 ‘불법 정치파업’이자 각 언론사 내부문제라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공정성과 객관성은 공영매체의 알파와 오메가다. 하지만 낙하산 사장이 들어선 이래 공영(성) 매체에선 그 알파와 오메가가 다 흔들렸다. 지난 주말 문화방송 노조가 연 방송대학에 나온 김태호 피디는 ‘무한도전’을 못 봐 아쉽다는 시민들에게 “그런 말을 들으면 가슴이 먹먹해진다”면서도 “7년 동안 첫 시청자로서 즐기고 사랑했던 무한도전보다 더 소중한 것을 지켜야 하기에” 그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고 했다. ‘무한도전보다 더 소중한 것’은 물론 공정방송이다. 이 정권에 의한 공정방송 훼손은 여당 관계자도 부인하지 못한다. 이상돈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은 4대강 사업 등 주요 현안에 대한 공영방송의 보도를 보면 정권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언론을 통제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인정했다. 
우려스러운 점은 이 대표의 발언이 새누리당의 실세인 박근혜 의원의 의중을 반영하고 있을 가능성이다. 박 의원은 지금까지 언론파업에 대해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언론파업으로 쏟아져 나온 이 정권의 비리에 대한 보도가 부실해졌던 덕분에 총선에서 예상외의 압승을 거뒀으니, 파업을 방치하는 게 대선에 유리할 것이라고 주판알을 튀기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는 국민들이 근심걱정 없이 살면서 생업에 즐겁게 종사하는 안거낙업(安居樂業)을 이루는 것을 자신이 정치를 하는 이유라고 밝힌 박 의원이 취할 태도는 아니다. 아버지(박정희) 때 못 이룬 이 나라 민주정치를 꽃피우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정치인의 자세도 아니다. 분열과 갈등을 치유하는 화합의 리더십을 보여주겠다는 지도자의 모습은 더더욱 아니다.
사실 우리 국민들 중 상당수는 박 의원의 민주적 지도자 자질에 의구심을 갖고 있다. 그의 측근인 김무성 의원조차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이 부족하다고 지적하는 실정이다. 박 의원에 대한 젊은층의 지지가 낮은 것은 이런 부분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이번 언론파업은 민주주의에 대한 박 의원의 진정성을 증명해 보일 수 있는 호기다. 자유언론을 실천한 언론인들을 거리로 내몬 아버지 박정희와 달리 진정 이 나라 민주정치를 꽃피울 뜻이 있다면, 새 국회 개원 전에 새누리당이 주도적으로 파업 해결에 나서게 해야 한다. 박 의원이 힘을 쏟아 김태호 피디가, 서수민 피디가 ‘안거낙업’할 수 있다면, 젊은 시청자들도 박 의원을 다시 보지 않을까.
 
< 한겨레신문 권태선 편집인 >


[1500자 칼럼] 참으로 어려운 것

● 칼럼 2012. 5. 14. 10:03 Posted by SisaHan
이 세상에는 쉬운 일도 있고 힘든 일도 있어 사람들이 자기 생각대로 또는 어떤 논리에 따라 이렇다 저렇다 하고 정의를 내리며 말씀들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 가운데 어렵다고 이야기하면 단연 인간관계가 아닐까? 모두에게 나라는 자아와 그 자존심 때문에 이리저리 부닥치고 그래서 우정도 의리도 사라지고 백년해로하겠다고 했던 부부 사이도, 주님을 향한 뜨거운 충성을 약속하면서도 어느 날 교회를 떠나고 불신앙의 길에 들어서는 게 오늘의 우리들이 아닌가.
인간관계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가 부부라고 할 수 있다. 부부란 무엇인가? 결혼하기 전의 자신과 함께 했던 가족 보다 더 많은 시간을 지나면서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대화를 나눈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갈라설 수 있다는 그 사실이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면서 결국 인간관계가 가장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에는 거기에 자신이 문제의 핵이라는 결론을 내려 보면서 자신이 분명히 알고 지켜야 할 어떤 룰 또는 기준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런 일화를 읽은 적이 있다. 중국의 고사에 누군가가 질문을 했다. 다른 사람이 알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고 자신이 반드시 알아야 할 일이 있고 또한 잊지 말아야 할 일이 있고 반드시 잊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잠시 이 글을 읽는 것을 멈추시고 한 번 생각해 보실 수 있겠는가? 과연 나는 이 두 가지 질문에 각각 무엇이라 대답할 수 있을까? 이미 위에서 이야기한 그대로 인간관계에서만 생각해 보자.
머뭇거리며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상대를 향해 그는 다음과 같은 답을 주었다. 사람이 나를 미워하는 것은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하고 반면에 내가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절대로 다른 사람이 알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내게 베푼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되고 내가 남에게 베푼 은혜는 잊어버려야 한다고 했다.
내가 가졌던 답과 비교하면 어떨까? 사람이 나를 미워할 때 이유가 있을 것인데 그것을 기억하면서 앞으로 조심하자는 말과 함께 자신이 남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추어졌는지를 생각하고 사람을 대할 때 조심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나를 힘들게 하고 진정으로 미워하는 마음까지 생길 때 남에게 이런저런 소문을 냄으로 사람을 함부로 폄하하지 말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도 문제를 일으킬 소지를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내게 은혜를 베풀었을 때 그 고마움을 잊어서는 안 된다. 상대방은 어쩌면 고맙다는 소리를 듣기 원하는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에게 실망을 주어서는 안 되겠고 나 자신 역시 고마움을 알아야 한다. 모든 일들에 감사한 마음이 없고 당연한 듯이 생각하면 그의 인간관계는 뻔하다. 또한 내가 남에게 은혜를 베풀었을 때는 속히 잊어버려야 한다. 그래야 상대방에 대해 바램도 없어지고 보상이 없어도 섭섭하지 않는 것이다.
어렵다고 말하는 인간관계, 그것이 부부 사이든 형제 사이든 같은 교회의 성도끼리든 한 번 적용해 볼 만하지 않는가? 이민 사회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교회 내의 갈등 또는 한인 단체간의 문제들이 모두 어디서 생길까? 우리 한 번 이 룰을 적용해서 자신을 추스르면 어떨까? 그런데 이 룰을 적용하면서 살아가기는 어떨까? 적용 자체가 어렵다. 그래서 참으로 어렵다고 말해 보는 것이다.

<김경진 - 토론토 빌라델비아 장로교회 담임목사>


프랑스 대통령선거에 프랑수아 올랑드 사회당 후보가 승리를 거뒀다. 프랑스에 좌파 대통령이 선출된 것은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이래 무려 17년 만이다. 2차 대전 이후 2번째이다. 그만큼 프랑스 국민이 어느 때보다 절박하게 현상 타파를 원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집권세력에 대한 응징 투표는 비단 프랑스만의 일이 아니다. 2009년 유럽 금융위기 발생 이후 이번까지 유럽연합 국가들 중에서 11명의 집권자가 교체됐고,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최근 1년여 사이에 유로존에서 실권한 8번째 지도자이다. 프랑스 대선과 같은 날 실시된 그리스 총선, 독일 지방선거, 세르비아 총선 등에서도 집권당이 줄줄이 패하거나 부진한 성적을 거뒀다. 복지 축소와 무한경쟁을 핵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정책과, 유로 위기 이후 더욱 심화한 복지 축소와 긴축정책이 서민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한 데 대한 반발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의 정권교체는 프랑스가 세계무대와 유럽연합에서 차지하는 정치·경제·외교의 비중을 고려할 때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당장 주목할 대목은 ‘메르코지’(독일의 메르켈 총리와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의 합성어) 연합으로 불리는 유로존의 긴축정책 수정 여부이다. 이제까지는 독일과 프랑스가 긴축으로 재정개혁을 꾀해 경쟁력을 회복한다는 유로위기 타개책을 주도해왔는데, 이에 대해 프랑스가 ‘아니오’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올랑드 당선자는 이외에도 고율의 법인세와 재산세 부과, 청년과 노인 고용 기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 사르코지 연금개혁의 재검토, 2017년까지 재정균형 달성 등을 주요 공약으로 내걸었다. 시장과 얼마나 조화를 이루며 공약을 실현할지가 주목된다.
 
외교정책에는 공공연하게 친미주의를 표방했던 사르코지와 달리, 미국을 견제하고 유럽 중심주의를 강조하는 전통적인 프랑스 외교로 선회할 것이 확실시된다. 오는 20~21일 미국 시카고에서 열리는 나토 정상회의와 주요 8개국(G8) 정상회의는 올랑드 프랑스의 외교노선을 가늠할 수 있는 첫 무대가 될 것이다.
사르코지는 이명박 대통령과 너무 닮은꼴이었다. 미국식 경쟁과 효율, 복지 축소와 규제 철폐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신자유주의를 무리하게 도입하고, 친기업·친부자 정책을 밀어붙였다. 대외적으로는 프랑스 사상 가장 친미적인 외교·군사노선을 취했다. 돈 많은 사람과 힘센 사람들을 위한 사르코지 5년이 프랑스에서 ‘레드카드’를 받은 사실은 12월 대선을 앞둔 우리에게도 큰 교훈을 던져준다.


대한민국 언론사에서 2012년은 전대미문의 해로 기록될 게 분명하다. <문화방송> <한국방송> <와이티엔> <연합뉴스> <국민일보> 등 방송·통신·신문사가 일제히 유례없는 총파업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파업의 지향점도 낙하산 사장 퇴진과 공영성 회복, 편집권 독립 등 공익적 가치로 모아져 있다. 이 대파업의 선두에 선 문화방송 노조의 투쟁이 오늘로 100일째를 맞았다.
 
문화방송 구성원들은 지난 1월30일 마이크와 카메라를 놓았다. 김재철 사장 체제의 편파·불공정 방송에 더는 굴종할 수 없다는 각성이 마침내 활화산처럼 터져나온 것이다. 김 사장이 이끈 지난 2년여 동안 문화방송은 권력 감시와 견제를 통해 ‘국민의 방송’으로 자리매김하기는커녕 정권의 이해에 충실한 편파보도로 ‘정권의 앵무새’라는 오명만 얻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김 사장은 파업 100일 동안 문화방송을 더욱 만신창이로 만들고 있다. 정영하 위원장 등 노조 간부 3명을 해고하고, 30명가량에겐 정직 이상의 중징계를 내렸다. 노조 집행부의 집과 통장까지 가압류하는 손해배상 소송도 불사했다. 그런 와중에 간판 시사프로그램인 ‘피디수첩’과 ‘시사매거진 2580’ 등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조직개편을 밀어붙이고, 회사 요직에 대거 측근들을 앉혔다. 4.11 총선에선 “역사에 길이 남을 최악의 편파뉴스”(노조 민실위 보고서)라고 평가받는 불공정 보도를 서슴지 않았다.

공영방송이 100일 넘게 불구 신세를 면치 못하는 상황은 국가적 중대사태가 아닐 수 없다. 국민 시청권의 훼손을 이처럼 아랑곳하지 않는 나라는 정상적인 민주국가가 아니다. 이 정권이 민주주의의 근간인 언론자유의 중요성을 조금이라도 인식하고 있다면 이런 사태를 수수방관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과 집권 새누리당은 언론파업 사태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한다. 언론사 파업으로 쏟아지는 정권 비리 보도들이 제대로 국민에게 전달되지 않는 상황을 오히려 즐기고 있는 듯도 하다. 정권 재창출을 위해 무슨 비난이 쏟아지더라도 현재의 언론장악 상태를 연말 대선까지 끌고 가겠다는 속셈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다.
이제 중요한 것은 야당의 역할이다. 비상대책위원회 구성 등으로 전열을 정비한 민주통합당의 제1과제는 언론파업 해결이 돼야 한다. 정부 여당이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도록 다각적인 압박을 해야 한다. 그 해결책의 첫 단추는 당연히 김 사장의 사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