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경제민주화에 앞서 할 일

● 칼럼 2012. 9. 2. 16:54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요즘 한국 정치시장에서는 경제민주화 미인 콘테스트가 한창이다. 여당은 지난 총선 때 경제민주화로 화장해서 톡톡히 재미를 봤다고 생각하니 내용이야 있든 없든 이번 대선에도 당연히 ‘어게인’ 경제민주화이고, 야당은 지난 총선에서 바보같이 여당에 빼앗긴 의제와 표를 되찾기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반격을 하고 있다. 경제민주화를 원하는 국민들의 요구가 강하다 보니 유권자들의 표를 좇는 경제민주화 경쟁이 여야 간에 뜨거울 수밖에 없다. 진짜다 가짜다, 성형이다 자연미인이다, 진정성이 있다 없다, 네가 하는 그건 아니고 내가 하는 이게 경제민주화다, 경제민주화를 위해서는 이것만은 꼭 해야 한다, 아니다 그건 해서는 안 된다 등등.
어쨌든 대통령 후보란 사람들이 죄다 경제민주화를 한다고 한다. 여야가 경제민주화라고 내거는 구체적인 내용에 상당한 차이가 있으니 박근혜표 경제민주화가 될지, 민주당표 경제민주화가 될지, 아니면 안철수표 경제민주화가 될지에 따라 결과는 천양지차가 나겠지만, 그래도 무슨 표 경제민주화가 됐든 경제민주화가 되기는 될 것 같다고 해야 하겠다. 누구표 경제민주화가 될지 모르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나으니 우리 경제가 지금보다는 좋아질 것 같다고 해야 하겠다.
 
그러나 현실이 그렇게 만만치만은 않다. 경제민주화는 무엇을 할 것인가 못지않게 누가, 어떻게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경제민주화는 기득권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경제민주화는 보는 시각에 따라 달리 정의할 수 있겠지만, 근본 취지만을 본다면 사회 내에 고착된 부당하고 불공정한 기득권을 혁파하여 그동안 소외되었던 집단에 제 목소리를 찾아주고, 정당한 권리를 되돌려주는 일이다. 우리 사회를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로 바꿈으로써 개인의 자유와 창의를 촉진하여 시장경제의 활력을 높이는 일이다. 그러나 여야 간에 경제민주화를 놓고 표 싸움에만 열중하다 보니 누가, 어떻게 기득권을 깰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안 쓰고 있다. 그 핵심에 있는 관료, 언론, 사법의 문제는 등한시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보수화된 우리나라의 관료·언론·사법집단은 그 행태를 보건대 공기로서의 지위를 망각하는가 하면 스스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기득권 집단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은 재벌과 유착하여 우리 사회 내에 강력한 권력 카르텔을 형성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더욱 강화하는 데 급급한 모양새를 보이곤 하였다. 스스로 기득권을 쌓고, 그것을 지키기에 급급한 이들 집단이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우리 경제의 기득권 구조를 혁파하는 경제민주화를 수행하리라 기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들은 경제민주화를 집행하고 조력해야 할 일을 등한히 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경제민주화를 가로막는 일도 많이 있었다. 누가 다음 대통령이 되든 관료개혁, 언론개혁, 사법개혁 없이 경제민주화는 현실적으로 성공하기 어렵다.
 
노무현 정부는 “6개월이면 새 정부도 우리가 장악한다”고 공공연히 호언장담하던 관료집단에 의해 장악되지 않았던가. 이명박 정부도 관료집단에 포획되기는 매일반이다. 정권 출범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호기롭게 전봇대를 뽑을 때까지만 해도 관료집단은 무능하고 부패한 집단으로 질타의 대상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제1의 개혁 대상은 관료집단이라며 공개적으로 강한 관료개혁 의지를 보이지 않았던가. 그러나 관료개혁은 이명박 정부의 국정 어젠다에서 이내 조용히 사라져버렸다. 다음 정부라고 크게 다르랴.
강한 생존력을 보이며 정권을 넘나드는 많은 고위관료들의 행태, 관료들 간의 강한 인적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다져진 관료집단의 집단 자생력과 자기보호 본능을 보았다. 정권의 비판과 비호를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넘나드는 보수언론의 행태도 보았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라는 미명하에 그 어떤 재벌들의 잘못도 용서해줄 준비가 된 수구 검사와 판사도 보았다. 이들을 개혁하지 않고서 경제민주화는 성공할 수 없다.
여든 야든 진정 경제민주화를 할 생각이 있다면 이제부터는 관료개혁, 언론개혁, 사법개혁도 말하라. 국민들도 관료개혁, 언론개혁, 사법개혁을 요구하라.

< 이동걸 한림대 재무금융학과 객원교수 >


[1500자 칼럼] 눈물과 다이애나 효과

● 칼럼 2012. 8. 27. 15:57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슬픔에는 눈물이 명약이라 했다. 웃음이 파도라면 눈물은 해일이란 말도 있다. 
눈물을 많이 흘릴수록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해지고 행복해진단다.
헨리 나운(Henry Nouen)은 “눈물은 유해적인 호르몬을 몸 밖으로 배출하여 건강에 이롭게 하고 평상심을 회복하며 긍정적인 마음을 가져다 준다”고 했다. 
1997년 교통사고로 다이애나 황태자비가 사망했을 때 영국 내 우울증 환자수가 절반으로 줄었다고 한다. 영국시민 대다수가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며 눈물을 흘린 까닭이라고 한다. 이를 전문가들은 ‘다이애나효과’라 부른다. 
삼성그릅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 사망 전 24개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쓰여진 신동엽 신부의 「잊혀진 질문」 파트 원 ‘생명의 몸살’을 읽으면서 얻은 눈물이야기다. 

15년 전(1997년) 성인장애인 공동체가 세워진 다음해 두 번째 여름캠프 때였다. 
라이스 레이크 골든 비치 3박 4일간 우리는 장애인과 가족, 봉사자가 한 덩어리 되어 여름 나들이를 즐기고 있었다. 캠프 둘째 날 오후 숙소로 돌아오고 있는 내 귀에 처절한 남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소리 따라 문을 열고 보니 남편과 P씨 두 남자는 서로 손을 잡고 그리도 설게 울고 있었다. 남편은 교통사고로 P씨는 질병으로 이민 생활 한 중턱에서 장애인이 되고 말았다. 가슴이 뭉클해 오며 그 분들을 바라보는 내 눈 속의 뜨거운 물이 볼을 타고 내려왔다. 그런데 실컷 울고 난 후 그분들의 표정은 차라리 맑기만 했다. 이 두 분의 교분은 지금까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고통을 이겨낸 그분들의 삶의 모습은 평화로움이다.

여성은 남성들보다 감정표현이 자유롭다. 눈물 흘리는 모습을 남에게 보인다는 것이 남성들에게는 약한 자의 태도요 부끄러운 일이란 통념이 있다. 우는 일은 다분히 여성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분명 여자들은 잘 운다. 여성의 눈물 앞에 남성들의 마음도 약해진다. 
분명 눈물은 기쁠 때 보다 슬플 때, 평안할 때 보다 고통스러울 때, 공평스러울 때 보다 억울함을 당할 때 울면서 나온다. 눈물은 다분히 삶의 극한상황과 연관이 있다. 이런 가운데 실컷 울고 나면 마음이 후련해지는 경험을 한다. 감동과 고마움의 눈물은 또 다른 차원의 눈물이다. 

런던 올림픽이 한창일 때, 한 검객이 털컥 주저앉아 눈을 가리고 울고 있었다. 바로 동메달을 획득한 직후 정진선이 그 주인공이다. 보도에 의하면 감정이 그토록 복받쳐 오름은 지난달 담석 수술을 받았던 아버지와 펜싱의 재미를 알게 해준 양달식 화성시청 감독, 그리고 주말도 없이 함께 훈련에 매진한 이상기 코치 때문이었다고 한다. 12년 만에 동메달을 따낸 그 순간 이분들의 얼굴이 스쳐가며 자신도 모르게 흘린 눈물이었다. 
출전 선수들의 움직임 하나 하나 눈 깜짝할 시간보다 짧은 순간에 승부가 결정되고 탈락의 아픔을 겪기도 한다. 박태환 선수 실격 선언 이후 뒤바뀐 은메달 획득의 스토리도 온 국민을 실망의 순간에서 환호의 순간으로 바뀌게 한 명장면 중의 한 장면이다. 올림픽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환호와 눈물의 교감을 유감없이 들어내 주고 있다. 
인정없는 사람을 피도 눈물 한방울도 없는 인간이라 말한다. 
고통스럽고 억을하고 답답한 일 가슴에 묻어두면 병이 생긴다. 절제된 감정표현은 아름답다.
때론 웃음보다 눈물이 사람 마음을 움직인다. 한데 묶어주는 힘이 있다. 눈물은 감정을 순화시키는 힘이 있기에 울어야 할 때 우는 모습도 치유의 힘을 가지고 다가서기도 한다.

< 수필가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전 회장 >


[칼럼] ‘독재자의 딸’ 무대에 오르다

● 칼럼 2012. 8. 27. 15:55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필자는 박근혜 의원을 주저 없이 ‘독재자의 딸’이라고 부른다. 사실 ‘독재자의 딸’만큼 역사성이 오롯이 담겨 있고, 박 의원을 함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호칭도 찾기 힘들다. 
그렇다고 꼭 박 의원을 비난할 목적으로 이런 용어를 쓰는 것은 아니다. 그가 ‘독재자의 딸’이기 때문에 대통령이 되어선 안 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이런 용어를 쓰는 것은 그의 정치세계를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그의 정치적 부상이 한국 정치사에서 갖는 의미가 무엇이며, 그가 만약 대통령이 됐을 때 어떤 미래가 전개될 것인지를 추론하는 분석틀로서 ‘독재자의 딸’이란 호칭만큼 적절한 용어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독재자의 딸’이란 용어는 박근혜의 정치세계가 그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웅변한다. 박 의원이 정치에 입문하게 된 동기를 살펴보면 이는 더욱 명확해진다.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7년 12월11일, 그는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보 선대위 고문으로 정치에 첫발을 디뎠다. 그는 “60~70년대 국민들이 피땀 흘려 일으킨 나라가 오늘과 같은 난국에 처한 것을 바라보고 아버님 생각이 나서 목이 멜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며 처음부터 아버지 박정희를 거론하며 정치를 시작했다. “아버지의 꿈이 복지국가였다”는 발언에선 이번 대선의 복지공약도 아버지의 유업을 잇는 것임을 엿보게 한다. 결국 ‘억울하게 죽어간 아버지의 영광스런 업적’을 재현하기 위해 정치를 시작했고, 지금도 여전함을 알 수 있다.
 
5.16 쿠데타에 대한 평가에선 이런 인식이 더욱 두드러진다. 그는 지난 7월16일 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에서 “아버지로서 불가피하게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는 1989년 5월19일, 10.26 박정희 시해사건 뒤 처음으로 언론에 나와 “5.16은 구국의 혁명이었다”고 말한 것과 큰 차이가 없는 것이다.(<문화방송> ‘박경재의 시사토론’) 특히 5.16 당시의 피폐해진 생활상과 불안한 안보상황을 거론하며 5.16의 불가피성을 주장하는 논리 구조는 23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 치도 변함이 없다. 이는 그의 역사인식이 아버지 박정희의 틀 안에 갇혀 있음을 의미한다. 영락없는 ‘독재자의 딸’이다. 
그럼에도 ‘독재자의 딸’인 그가 가장 유력한 대선 후보로 부상한 것은 음미해 볼 만하다. 이는 박정희의 독재정치를 비판하는 ‘반독재 슬로건’이 적어도 현실정치에서는 거의 먹혀들지 않고 있음을 뜻한다. 실제로 박근혜를 ‘독재자의 딸’이라고 아무리 비난해봤자 박근혜 지지자들이 돌아설 리 없고, 구경꾼들도 지금 시대에 무슨 연좌제냐며 시큰둥할 것이다. ‘박정희 향수’가 ‘독재자의 딸’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희석시켰을 수도 있고, 먼 과거인 박정희 독재보다 현재의 박 의원의 정치적 비전이 더 큰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어찌됐든 선거전략상으로만 보면 민주진영의 ‘독재자의 딸’ 딱지붙이기는 박근혜를 깎아내려 선거에서 표를 더 얻기 위한 수단으로는 효력을 상실했다.
 
만약 ‘독재자의 딸’인 박 의원이 대세론을 유지하며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우리 사회는 ‘박정희 독재 18년’에 대해 사실상 면죄부를 주는 셈이 될 것이다. 이는 또 박정희 정권에 뿌리를 둔 수구·냉전적인 원조 보수기득권층이 변신에 성공해 화려하게 부활함을 의미한다. 설사 박근혜의 당선이 ‘독재자의 딸’에 대한 지지가 아니라 그의 뛰어난 정치력과 비전 때문이라 해도 이런 해석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박 의원이 대통령이 되는 순간 그의 지지자들은 유신 독재에 대한 세탁 작업을 본격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의원은 어제 새누리당 대선 후보로 확정됨으로써 정치 입문 15년 만에 대권에 가장 근접한 집권여당 대선 후보에 올랐다. 그는 박정희 사후 범보수정권의 맥을 이었던 전두환-노태우-김영삼-이명박 등과는 달리 ‘박정희 영웅신화’에 젖어 있다. 그런 그가 대통령이 된다면 우리 사회의 역사인식과 민주주의는 한 단계 더 퇴행이 불가피할 것이다. 12월19일 국민의 선택이 한국 정치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또 하나의 이유는 여기에 있다.

< 정석구 - 한겨레 신문 논설위원실장 >


[사설] 독도를 잘 지키는 법

● 칼럼 2012. 8. 27. 15:53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일본 정부가 어제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ICJ)에 공동 제소하자는 외교서한을 우리 정부에 보내왔다. 일본 쪽은 1965년 한일협정 때 맺은 분쟁해결 조약에 따른 조정도 요청했다. 우리 정부는 독도는 국제법·지리·역사적으로 우리 고유 영토이므로 영토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며 일본의 제안을 일축했다. 여기까진 마치 태권도의 약속 대련처럼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공방이다.
일본의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는 한쪽 당사국이 동의하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실효성이 없는 외교공세다. 법리적으로도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는 ‘양국 정부는 별도로 규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양국 간의 분쟁이면서 외교상의 경로를 통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양국 정부가 합의하는 제3국에 의한 조정에 의해 그 해결을 도모한다’는 65년 분쟁해결조약과 모순된다. 일본이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를 ‘별도로 규정이 있는 경우’라고 우길 순 있겠지만 제소든 조정이든 우리 쪽이 거부하면 일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국제사회를 상대로 한 홍보전밖에 없다.

그렇다고 일본 쪽의 공세가 전혀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일본이 50년 동안 잠자고 있던 국제사법재판소 카드를 꺼내들고 총력 공세를 하는 것 자체가 큰일이다. 노다 총리는 어제 관계장관회의에서 독도 문제에 대한 대외 발신의 강화, 영토 문제에 대한 체제 강화, 추가 대항조처 검토를 지시함으로써 독도를 장기적으로 집요하게 국제분쟁지화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일본 쪽이 그동안 거론했던 통화스와프협정 연장 중단이나 차관급 이상 교류 중단 같은 강경책은 당장 들고나오지 않았지만, 긴장을 늦출 상황은 아니다. 총선을 앞두고 낮은 인기로 고전하고 있는 노다 정권에 이 대통령 독도 방문과 일왕 발언은 울고 싶었던 차에 뺨을 때려준 꼴이 됐기 때문이다. 차기 총리감으로 거론되는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이 93년 고노 담화가 명백히 인정하고 있는데도 ‘한국 쪽이 일본군 위안부를 일본군이 강제연행했다는 증거를 내놓으라’고 한 것과 같이, 국내 여론에 영합하는 정치인들의 역사 망언이 잇따를 가능성이 크다.

커다란 국익이 걸린 사안일수록 감정과 애국주의에 기댄 접근은 역효과를 내기 쉽다. 우리 쪽이 상대보다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는 독도 같은 사안은 더욱 그렇다. 정부는 이제라도 일본의 무차별 공세에 휘말리지 말고 실효지배의 이점을 살리면서 법·논리적으로 당당하게 대응해야 한다. 아울러 전략도 준비도 없는 돌출행동이 어떤 부작용을 낳았는지도 뼈저린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