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주씩이나 가요 차트 1위를 기록하던 ‘동백아가씨’(이미자 노래)가 ‘왜색’이라는 이유로 돌연 방송에서 퇴출되던 시절, ‘그건 너’ 혹은 ‘거짓말이야’처럼 그들을 뜨끔하게 했던 제목의 노래들이 금지된 것은 당연했다. 그들은 직업군인의 애환을 담은 김민기의 ‘늙은 군인의 노래’까지 퇴행적이라며 금지곡에 올렸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시대의 어둠이 깊어갈수록, 노래는 활개를 쳤다. 비록 방송에서 퇴출되고 음반 발매는 금지되었지만, 노래는 대신 대중의 벗이 되고 위로가 되었다. 어디서건 노래 1발 장전에서 시작해 노래 마구 발사로 모임은 마무리됐다. 시절 좋은 때는 잊혀지고, 삶이 고통스럽고 시대가 암울하면 불러들이는 노래, 그 운명은 얼마나 기구한가.
가수 윤복희는 가사의 마디마다 ‘네가’라는 호칭이 등장하는 ‘여러분’을, 감히 전두환 안전에서 곧이곧대로 불렀다가 그날로 방송에서 퇴출당했다. 그 시절, 한국 대중음악의 살아있는 전설 조용필과 들국화의 명곡들이 줄줄이 금지곡 목록에 그 이름을 올렸으니, 특별한 뉴스도 아니었다. 조용필의 ‘나의 노래’는 가사가 천박하다고, 들국화의 ‘그것만이 내 세상’은 창법이 수준 미달이라는 이유였다. 두 곡 모두 우리 대중음악사를 빛낸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는 것들이었다.
 
그렇게 모욕당하고 능멸당했지만, 노래가 사라지는 법은 없었다. 오히려 더 친근한 대중의 벗이 되었다. 아니 심신의 허기와 갈증 속에서 사람들은 반려가 되는 노래를 찾았다. 노래는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이었다. 놀고 즐기는 대상이 아니라 함께 위로하고 함께 행진했다. 문제의 도종환 시인의 시처럼 노래는 ‘흔들리며 피는 꽃’이었고, 절망의 벽을 타고 넘는 ‘담쟁이’였다.
지난달 29일 집권여당의 ‘오너’ 박근혜 의원이 봄여름가을겨울의 김종진, 프로듀서 황세준 등 대중음악인들을 만났다. 그로서는 아주 특별한 만남이었다. 현안인 음원 사용료 징수 문제에 대한 의견을 듣는 자리였지만, 실은 대중음악계에 대한 러브콜이었다. 남경필 의원은 지난 7일 엠비시 파업 콘서트 ‘나는 그런 사람 아닙니다’에, 이른바 개념 가수들 틈에 게스트로 참석하기도 했다. 이들을 불러낸 것은 돌아온 노래의 강력한 힘이었다. 소비될 뿐인 댄스음악류와 달리, 대중을 움직이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으니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어떻게 외면할까.
잊혀지던 노래의 귀환은 이 정부의 비열함 덕택이었다. 과거 독재자처럼 물리적으로 억압하지는 않았지만 권력기구와 친정부 매체는 인격살인을 밥 먹듯이 하고, 밥그릇으로 굴종을 강요했다. 정적은 그렇다 해도, 눈 밖에 난 대중연예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영혼이 자유로운 연예인들은 거리로 나섰다. 거기서 상처받은 이들과 함께 분노하고 슬퍼하며 행진했다.
 
지난 4년, 역사상 최대의 콘서트 풍년을 이뤘던 것은 이런 까닭이었다. 촛불시위는 게릴라 콘서트를 일상화했고, 용산참사는 콘서트를 체계화했다. 남일당 골목에서 284회에 걸친 종교 행사가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는 동안, 앞뒤로 열린 콘서트는 상처받은 이들이 연대로써 상처를 극복하는 자리였다. 뒤이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죽음의 행렬 그리고 방송인 학살. 노래 없이는 견딜 수 없는 아픔이었고 슬픔이었다. 모든 의례는 노래로 진행됐다. 음악인들이 더이상 두려워할 건 없었다. ‘김재철 헌정 콘서트’에 참석한 ‘나가수’ 진행자이자 출연자인 이은미·박완규는 공정방송 투쟁을 고무했다. 이날 무대는 1980년대의 전설, 전인권과 들국화가 귀환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엊그제 정부는 도종환의 시 삭제 소동을 벌였다. 얼마나 가당찮았으면 곁눈질하던 새누리당조차 발끈했을까마는, 잊혀지던 시가 귀환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행운이다. 다만 시대의 명암에 따라 명멸하는 노래와 시의 운명이 기구하다. 메르세데스 소사와 파블로 네루다와 빅토르 하라, 마리아 파란두리와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고 밥 말리, 밥 딜런, 멜라니 사프카…. 시와 노래가 영혼의 별이 되어 항상 빛나는, 그런 세상을 꿈꾼다. 

< 한겨레신문 곽병찬 논설위원 >


[1500자 칼럼] 토론토 야외 미술전시회

● 칼럼 2012. 7. 16. 09:13 Posted by SisaHan
토론토 야외 미술전시회 (TOAE: Toronto Outdoor Art Exhibition)가 벌써 51회 째를 맞이한다고 한다. 매년 7월 초에 시청 앞 광장에서 하는 좀 특이해 보였던 그 전시회가 50년이 넘는 역사와 전통의 전시회로 성장한 것이 나에게는 감회가 새롭다. 내가 그 전시회에 대해 일찍부터 30 여년 전에 들어 알고있었던 이유는 그림을 그리던 한 친구 때문이었다. 그 친구는 오래 전 공부를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우리가 대학 1학년 때, 그 친구는 TOAE에 응모를 해 뽑혀서 전시회에 참가했다. 그가 상당히 흥분해 있던 모습이 지금도 눈 앞에 선하다. 나는 그가 자랑스럽기도 했고 한편으로 부러웠다. 이민 온지 몇 해 되지도 않았는데, 그런 큰 규모의 전시회에 당당하게 참석할 수 있다는 사실이…그러나 무슨 이유 때문이었는지 나는 가지 못했다. 전시회가 끝나고 친구는 한 유태인 변호사가 자신의 큰 그림을 사갔다고 아주 기뻐했다. 전혀 무명의 학생의 그림을, 그것도 큰 그림을 사갔다는 사실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나는 그가 전혀 그림을 팔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뙤약볕에 혼자 쭈그리고 앉아 있을, 그의 모습을 보기가 안쓰러워, 그리고 사람들이 그림에 대해 물어왔을 때도 아무 말도 못하고 쩔쩔매고 있을 모습을 보고싶지 않아 안갔는지도 몰랐다.

나는 한 동안 그림에 대해 무관심하게 지냈다. 금년에는 전시회를 6,7,8일에 걸쳐서 했는데, 공교롭게 내가 간 금요일 오후는 금년 들어 가장 무더운 날이었다. 서있기만 해도 숨이 막히고 땀이 흘렀다. 그럼에도 굳이 내가 간 이유는 그 전의 한 야외전시회에서 만난 친구(?) 때문이기도 했다. 그 전시회는 작은 규모의 전시회였는데, 유독 그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잠시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이 꽤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는 옛날의 내 친구처럼 이번 TOAE 전시회에 뽑힌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 그 때 다시 보자고 한 약속을 왠지 나는 꼭 지키고 싶었다. 그런 까닭에 금요일 밖에 시간이 없어 무리해서 간 것이었다. 360개가 넘는 텐트에, 거의 천 편이 넘는 작품을 감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시 작품들도 너무 다양하여, 도예, 유리 공예, 조각, 보석가공, 사진, 조각, 목공, 디지털 미디어, 유화, 수채화…, 없는 쟝르가 없었다. 사실 작품 전체를 감상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나중에 만난 친구의 말에 의하면 사람들은 한 번 오지않고 몇 번이고 다시 온다고 했다. 그림을 사는 사람들도 한 번 보고 결정하지 않고, 다시 와서 결정한다 했다.

이 야외 전시회가 좋은 점은 많은 중진 내지는 무명(?)의 예술가들과 직접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아직 유명화가가 아니어서 그런지 누군가 자신의 작품에 관심을 보이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물어보는 멍청한 질문에도 아주 성심성의껏 대답을 해주었다. 또 대부분의 화가들이 자신의 대표작을 그림엽서로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무료로 주었다. 그 엽서들을 모우는 재미도 보통이 아니었다. 그 엽서에는 자신의 홈페이지와 이 메일 주소가 있어, 그 들의 작품도 볼 수 있고 원하면 그들과 소통할 수가 있다. 그 전시장을 지나는 한 중간에서 눈에 확 띄는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전형적인 한옥 마을의 골목길이었다. 무엇에 끌린 듯 그 앞으로 간 나는 그 안에 앉아 있는 검은 머리의 학생(?)에게 한국분이냐고 물었다. 아주 친절한 여자분이었는데, 고향과 어린시절을 생각하며 그린 그림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대부분의 다른 그림들도 선이 굵은데다 원색적이고 밝은 색을 주로 쓴 개성있는 그림들이었다. 주로 사용하는 색들이 색동저고리의 색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왠지 다른 장소도 아니고 미술전시회에서 한국사람을 만났다는 사실이 기뻤다. 나중에 집에 와서 프로그램을 차분히 살펴보니 그 분외에도 대 여섯명의 한국 분이 있는데도 내가 날씨를 탓하며 대충 보고 지나쳤기에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년에는 꼭 다시 가서 그 분들 뿐만 아니라 전시된 작품들을 차분히 감상하고 싶다. 그 친구는 말했다. 전시된 작품들 중에 좋은 작품들이 너무 많다고….

<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


[칼럼] 일본이 평양을 폭격하는 날

● 칼럼 2012. 7. 16. 09:11 Posted by SisaHan
작년 12월 미국의 F-35 전투기를 자국에서 조립생산한다고 발표한 직후 내친김에 일본 정부는 나토 회원국 또는 한국과 오스트레일리아(호주)에 일본 무기를 수출할 수 있도록 ‘무기수출 3원칙’을 완화한다고 발표했다. 이제 한국이 F-35를 선정하기만 하면 일본은 한국에 전투기 부품 기지가 될 수도 있다. 
일본은 올해 4월 북한이 미사일 발사 시험을 하자 기다렸다는 듯 ‘우주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족쇄를 벗고 대륙간 탄도탄을 개발하기 위한 로켓의 대기권 재진입 시험을 한다고 발표했다. 이어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는 상황이 조성되면 우리 서해에 자위대의 이지스함을 파견한다는 발표도 나왔다. 올해 6월 “국가안전보장에 이바지”하기 위해 원자력을 개발한다는 ‘원자력규제위원회 설치법’을 일본 중의원이 통과시켰다. 걸핏하면 핵과 미사일 무장을 예고하고 당당히 무기 수출을 추진하겠다는 일본에게 평화헌법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그들의 최대 관심사는 한반도에서 유사사태가 발생하면 군대를 파견하여 자국민을 보호하고, 북한의 미사일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해 한국군과 합동작전을 수행하는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통일된 한반도는 과거 1차 세계대전의 배경이 된 통일독일의 출현과 유사한 위협이라는 게 일본의 인식이다. 북한의 위협이 고조되는 것은 일본이 군사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명분이기 때문에 그들은 한국의 보수우익과 연대하여 강압적인 대북정책을 통해 한국을 대륙으로부터의 위협을 차단하는 방파제로 삼으려 한다. 즉 분단은 더 고착되는 것이다. 
이런 일본의 재무장 움직임이 한국 안보와 더 나아가 통일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 순진한 사람들이 청와대, 총리실, 국방부, 외교부에 득실득실하다. 그들이 한반도 정세를 주도하는 데 얼마나 자신감이 없었으면 일본까지 끌어들였는지 모르겠지만, 일본에 한반도 문제 개입의 명분과 발언권을 높여주는 것은 우리의 안보를 증진하는 것과 관련이 없다. 일본과 군사협정을 체결하려다 들통이 나자 “절차가 잘못되었지 군사협정은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가소로운 변명을 펼쳐놓는다. 자신들이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의 환생, 즉 현대적 개화파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한-미-일 3국이 밀실에서 진행했다. 미국의 군사력이 약화됨에 따라 일본이 그 공백을 메우고 한국이 그 뒤를 따라가기로 밀약이 있었던 것이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은 4년 전부터 은밀히 논의되던 한-일 준동맹을 구축하기 위한 핵심 수단이다. 미사일로 북한을 노골적으로 위협하고, 한국은 이에 대해 아무 말도 못하거나 고마워하는 그런 한-미-일 삼각동맹이 최종 목표다. 이미 이들이 일본의 군사위성과 이지스 구축함이 한국의 안보에 결정적으로 기여할 것이라는 희망적 사고를 피력하는 동안 우쭐해진 일본이 북한 폭격을 가정한 작전계획을 수립하지 말란 법도 없다. 
태평양의 림팩 해상훈련에서는 우리 해군이 일본 지휘관의 작전통제를 받는다는 보도도 나오고 있다. 미사일 방어에 대한 한-미-일의 공조가 깊숙이 논의된 정황도 드러나고 있다. 이제 일본은 평화헌법의 국가가 아니다. 미국의 중국 견제 의도를 실현하는 아시아의 행동대장이자 군기반장이다. 일본이 미사일과 전투기를 동원해 북한에 체벌을 가하는 징벌자로서 얼굴을 드러내려고 하고, 우물쭈물하다가 국권을 상실한 100년 전의 무능한 왕조는 지금 서울에서 부활하고 있다. 자주적으로 위기를 관리하고 한반도 정세를 주도하지 못한 이명박 정부는 그렇게 국가의 운명을 미국과 일본에 아웃소싱하고 말았다. 이제 우리는 의병이라도 일으켜야 할 판이다.
 
< 김종대 - 디펜스21 플러스 편집장 >


박근혜 새누리당 의원이 어제 대선 도전을 공식 선언하면서 발표한 출마선언문은 그의 국정운영 철학과 비전을 담은 청사진의 성격을 지닌다. 그는 ‘국민행복’을 핵심 키워드로 내걸고 경제민주화 실현, 일자리 창출, 한국형 복지의 확립 등을 약속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정책 기조와 방향이 5년 전 대선 후보 출마 때와는 크게 달라진 점이다. 당시에는 ‘성장과 작은 정부’에 방점이 찍혔으나 이번에는 분배와 복지, 정부의 역할 등을 강조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이는 중도 외연을 넓히려는 대선 전략이자, 그동안의 시대 변화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의미도 있다. 앞으로 이런 청사진을 실현할 구체적이고 현실성 있는 정책을 얼마나 내놓을지는 지켜볼 일이지만 어쨌든 그가 전향적인 방향으로 노선을 수정한 것은 높이 평가할 대목이다.
 
그럼에도 박 의원의 출마선언문을 접하면서 몇 가지 의문과 아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선, 박 의원은 누가 뭐래도 집권여당의 대선 후보다. 따라서 이명박 정권의 지난 4년여의 공과와 무관할 수 없다. 박 의원이 출마선언문에서 지적한 대로 현 정권은 민생과 안보를 파탄낸 정권이다. 박 의원의 대선 전략이 이명박 대통령과의 철저한 ‘차별화’에 있다고 해도 집권여당의 대선 주자로서 현 정권의 실패와 이에 따른 책임에 대해 일언반구 없는 것은 너무 무책임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따지고 보면 박 의원이 5년 전에 대표공약으로 내건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세우자)야말로 지난 4년여 동안 집권여당을 지탱해온 정책 지표였다. 이런 기조에 따라 부자감세가 도입됐고, 재벌규제는 완화됐으며, 국민은 법과 질서의 채찍으로 엄히 다스려야 할 객체로 전락했다. 정부 못지않게 이런 정책을 앞장서 주창해온 게 바로 새누리당이었다.
박 의원이 내건 경제민주화나 복지 확대 공약에 반가움 못지않게 의아스러움을 느끼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이런 정책은 ‘작은 정부와 큰 시장을 통한 성장’을 중시한 줄푸세 공약과는 양립되기 힘들다. 박 의원은 새로운 공약 설명도 좋지만 줄푸세 공약에 대해 뭔가 한마디라도 하고 넘어가는 게 도리가 아닌가 한다. 박 의원이 말하는 경제민주화가 재벌의 비정상적인 소유구조에 본격적인 메스를 들이대는 수준인지 아니면 무늬만 재벌개혁에 그칠지를 따져보는 것은 그다음 문제다.
 
박 의원이 출마선언문에서 강조한 ‘공개와 공유, 소통과 협력’ 등의 단어도 그동안 보여온 행보에 비춰보면 진정성에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당장 정몽준·이재오 의원 등이 당내 경선에 불참하면서 새누리당 전당대회는 ‘이변 제로’의 ‘박근혜 추대 대회’로 흘러가고 있다. 그럼에도 박 의원은 출마선언 뒤 기자회견에서 “불통이란 말을 그렇게 별로 들은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 마치 꽉 막힌 벽을 바라보는 심정이다. 박 의원이 앞으로 경선 과정 등을 통해 이런 의구심과 지적에 대해 좀더 성실하게 답해주는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