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설마를 상상할 자신있나?

● 칼럼 2017. 2. 23. 19:34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의혹사건이 터진 뒤 해외 주요 언론은 하루가 멀다하고 이를 대서특필했다. 권위지 뉴욕타임즈는 이렇게 보도했다. ‘한국 대통령 둘러싼 스캔들 불거져, 리더십 총체적 위기’라는 제하에 “마치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났다는 의혹의 한 가운데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이 서 있다. 비선에서 대통령을 조종하는 실세, 정실 인사와 파벌주의, 부정 축재, 거기에 믿기 어려운 문란한 소문까지. 한국의 라스푸틴이라는 평을 받는 인물이 등장하고…”
그 뒤 뉴욕타임즈는 ‘heng on the Choi Scandal in South Korea’라는 제목의 만평을 게재하기도 했다. 만평은 ‘PARK GEUN-HYE’라고 적힌 로봇을 그려놓고 로봇의 머릿속에 ‘CHOI SOON-SIL’이라고 적힌 여성이 의자에 앉아 로봇을 조종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박 대통령은 로봇에 불과했고, 사실상 최순실의 조종과 농간에 의해 국정이 운영되었음을 생생하게 묘사한 것이다.


전세계 언론과 SNS에 넘쳐난 실황중계로 대한민국은 졸지에 우스꽝스런 나라로 전락해버렸고, 해외 한인들은 사상 유례없는 수치와 모멸감으로 가슴을 쳐야했다. 그래도 위안이랄까. 1천만 명을 넘어선 대규모 촛불집회가 이어지면서 박근혜 정권의 무능과 부패와는 달리 정의를 외치는 평화시위의 국민 수준과 민주의식에 찬사가 쏟아지기도 했다.
하지만 전 세계인과 지구촌 언론에는 한국 국회가 탄핵한 박근혜 대통령에 얼키고 설킨 국기문란 스캔들이 이미 핫 이슈로 자리잡았다. 이후 특검의 수사가 진행되면서 국내언론 못지않게 굵직한 뉴스들이 수시로 보도됐다. 형사재판이 열리고, 헌법재판소가 탄핵안을 심리하는 한국의 정정불안과 박근혜의 추락은 세계인들의 뇌리에 깊이 박히고 말았다. 글로벌 기업 삼성의 뇌물의혹도 겹쳤으니 세계적인 매체들이 관심을 두는 건 당연했다.


워터게이트의 닉슨처럼, 결국 물러날 것이라는 시각도 번졌다. 촛불민심이 박근혜 대통령의 헌재 탄핵결정을 기정사실화 한 것처럼, 외국의 주요 언론도 탄핵이 불가피함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탄핵의 증거들은 차고 넘친다”는 검찰의 확신과 1천만이 넘는 촛불 민의에 당연히 새롭고 정의로운 민주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공통의 분석과 상식적인 기대가 한국인은 물론 세계인 사이에도 공감대가 확산된 것이다. 쉬운 예로 최근 중국 정부의 한국정부 무시 태도를 보면 그런 심증이 뚜렷함을 본다. 설마 이 엄청난 사건의 중심 인물인 박근혜가 앞으로도 권좌에 앉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국정을 운영해 나갈 수가 있겠는가 하는, 맹신그룹인 친박세력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부인 못할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화장실 갈 때하고 나올 때 마음 다르다’는 말이 경험론적인 진실이듯, 역시 시간이 가다보니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려는 발버둥이 보이기 시작했다. 숨었던 비선 부역자들과 친위세력들이 꿈틀거리며 마각을 드러낸 것이다. 그들은 촛불집회가 거쳐간 궤적을 흉내 내면서 전혀 어울리지 않게 태극기와 성조기까지 꺼내들고 궐기하기에 이르렀다. 숨을 죽이고 잔뜩 주눅들어 있던 사람들이 요즘은 “탄핵은 기각된다”는 이상한 자신감까지 들춰 보이면서 차츰 목청을 키운다. ‘어느 쪽이든’ 헌재결정에 승복하라고 당당하게 압박도 한다.
탄핵에 찬성하는 국민이 80%선에서 별다른 동요가 없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수사기관은 대통령의 뇌물죄를 확신하고, 헌재 심리에서도 탄핵증거가 충분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런데, 시간이 가다보니 상황이 반전되고 있단다. 시간이 가면 흑이 백으로 바뀌는 것인가? 왜 불안심리가 스며드는 것인가.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왜 슬슬 신경을 건드리는 거지? 참 이상한 나라요, 겁나는 현상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하지 않은가. 만에 하나 탄핵이 기각된다면…?
그러면 ‘로봇’은 은밀한 마수의 인공지능에 의지해 다시 기계적으로 꿈틀대게 되나? 국가적 위기상황에 아무 조처없이 미용시술을 즐기며 관저만 맴돌았다는 지도자가 국정을 계속한다? 궁지에 몰렸던 비선 권력이 되살아나 활개를 치며 힘자랑을 한다? 잠시 수모를 당해 응어리졌던 보복의 칼을 휘두르겠다고 설친다?, 권력과 재벌의 검은 밀월은 공인된 합법의 거래가 되어버린다?
결국 80%의 국민이 참패하고 진실은 거짓이, 정의는 불의의 음모론과 꼼수에 제압당해세상이 잿빛 절망으로 뒤덮여 버린다? 국정농단과 헌정파괴가 “뭐 그럴 수도 있지“라고 공인되는 뒤죽박죽인 나라, 사리분별도 모르는 국민, 그리고 그런 우스꽝스런 나라 출신 이민자들의 누추한 몰꼴이라니? 숨이 막히고 낯이 뜨거워 상상만 해도 암담하다. 설마 그런 일을 상상할 자신이 있는가?


< 김종천 편집인 >


[1500자 칼럼] 무너지는 마음을 바라보는 힘

● 칼럼 2017. 2. 23. 19:32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나는 암울한 일제강점기와 혼란기를 기도와 찬송의 힘으로 살아낸 분들 속에서 자랐다. “빈들에 마른 풀같이 메마른 나의 영혼, 주님이 허락한 성령 간절히 기다리네.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시듯 성령의 단비를 부어 새 생명 주옵소서” 그분들이 즐겨 부르신 찬송가다.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된 ‘주권국가’에서 태어나 점점 좋아지기만 할 세상에서 살 것이라 믿었던 나/우리는 비틀스와 작년 노벨 평화상을 탄 밥 딜런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세계 평화를 구가했다. 꿈에 부풀어 문명개화, 민족 해방, 조국 근대화와 민주화를 이루는 역사의 시간에 몸을 맡기고 우울이라는 것을 모른 채 달려왔다. 역사가 개인을 배반하지 않은 진보의 시대를 말이다. 그런데 지금, 진리나 사실보다 감정이나 신념이 더 중요한 탈계몽의 ‘포스트-진실’ 시대를 맞아 곧잘 우울에 빠진다.


사회학자 김홍중은 최근 저서에서 대한민국 국민들이 앓고 있는 정치적 우울 현상을 ‘파상’의 개념으로 풀고 있다. 파상은 개인이나 집단을 사로잡고 있던 꿈이 깨지면서 삶의 근거가 부정되는 체험을 말한다. ‘세월호’라는 파국의 시간을 목격하고 마음이 부서지면서 그간 꿈꾸었던 세상의 붕괴를 참담하게 바라보게 되는 그런 체험 같은 것이다. 그는 섣부른 대안을 찾아 나서지 않고 파국 속에 던져지는 것, 현실의 고통과 비참을 마주하는 것, ‘무너지는 마음’을 바라볼 것을 당부한다. 그 무너짐의 과정이 도덕적 인지적 종교적 힘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 전환의 힘은 그간 사회를 지탱했던 꿈과 욕망 구조가 만들어낸 허상을 깨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


내게 광화문 광장의 촛불은 바로 이 파상의 경험을 공통적으로 하게 했다는 점에서 주목받을 사건이다. 그 광장에서 시민들은 그간 홀로 겪은 ‘파상’의 경험을 다른 시민들과 공유하며 도덕적 인지적 종교적 힘을 키울 수 있었다. 그리고 공론장에 대한 감을 회복하게 되었다. 광화문의 촛불 집회와 태극기 집회가 다른 점은 바로 이 점이며 이 둘이 힘겨루기 판이 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간 대통령 탄핵이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줄 것같이 달려왔지만 실은 긴 흐름의 단층일 뿐, 시간 자체를 바꾸어가는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모두가 서로에게서 떨어져 나가서 각자 자기에게 가장 고유한 피로 속으로 빠져드는 “피로사회”(한병철)의 시간, “역사를 불신하고 절망하게 만드는 감각을 생산하는 장치를 벗어난”(엄기호) 시간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긴다고 해도 또 다른 광야를 지날 준비를 해야 한다. 작은 오아시스 하나씩 만드는 거로 견디어진 지난 경험을 떠올리며 마음을 모으고 있다”는 광화문 청년의 말은 그래서 미덥다.


대선주자들은 “국민은 공짜를 원하지 않는다”거나 “과외 금지 국민투표”, ‘대연정’과 같은 단어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사회가 어떻게 무참하게 깨져나가는지를 통감하고 있을까? 개발독재 시대의 시간성에서 벗어나기나 한 걸까? 여론조사를 둘러싼 킹메이킹 놀이로 분주한 그들은 대한민국의 촛불 시민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 어떤 나라보다 급속도로 경제성장을 이루어냈고 그렇기에 어느 나라보다 급속도로 추락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는 대단한 파상력을 가진 시민들이 아주 많다. 그들이 만들어낸 시대 용어와 유튜브 작업만 봐도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정치 대연정은 시민정치가 꽃피는 곳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청년들이 팬클럽 멤버가 아니라 밴드를 만들고 신문사를 만들고 정당을 만들어 시민정치의 장을 활짝 열어갈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탄핵 정국에 자극을 받아 ‘제1회 부끄러운 동문상’이 대학별로 제정되고 있는 모양이다. 바야흐로 부끄러움을 아는 세상이 돌아오는 것일까? 짐작하건대 이 능동적 청년 국민들은 공짜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과 바람과 물과 흙을 포함한 공유재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지구를 망치는 것에 대한 정당한 세금을 매기고 지구를 살릴 시간을 벌기 위한 시민배당을 청구할 것이다.
‘1인 1표 대의제’를 ‘1인 1주 시민배당제’로 보완하는 것은 붕괴하는 중산층을 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 정도는 대선 후보들이 기본으로 알고 시작하면 좋겠다.
다음 대통령은 파상력과 공론의 감각을 가진 사람이 당선되기를! 그렇지 않다 해도 언제든 탄핵할 수 있는 시민력을 충분히 키워가기를!

< 조한혜정 - 문화인류학자, 연세대 명예교수 >


[칼럼] 수상한 ‘특검 때리기’

● 칼럼 2017. 2. 23. 19:30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박영수 특별검사에 대한 보수 언론의 공격이 심상찮다. 박근혜 대통령을 겨냥한 수사 때는 특검의 활약상을 앞다퉈 전하던 보수 언론들이 이재용 삼성 부회장 수사를 계기로 ‘특검 때리기’로 선회했다. 대통령 앞에서도 꺾이지 않던 ‘붓’이 삼성 앞에서는 힘이 빠지는 듯하다.
이 부회장이 재소환된 지난 13일 <조선일보>는 이 부회장을 다시 부른 것을 ‘먼지떨이’ 수사인 양 묘사한 사설을 내보냈다. 사설은 “특검이 직권남용과 강요라는 검찰 수사 결론에서 한발 더 나아간 결과를 내놓겠다는 의욕에서 ‘뇌물수수’라는 심증을 밀어붙이려 든다면 수사 정도에서 벗어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박영수 특검이 출범한 이유가 검찰 수사가 미흡한 때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검찰 수사 결과를 그대로 인정할라치면 무엇 때문에 혈세를 들여가며 특검을 만들었는가. 뇌물이 의심되는데도 그대로 덮는다면 특검은 오히려 ‘혈세만 낭비했다’는 비난을 받아야 한다.


이 신문의 삼성 출입기자는 같은 날 칼럼에서 “특검이 촛불 정서라는 ‘빽’을 등에 업고” 이 부회장을 수사하는 것은 문제라고 주장했다.
물론 증거가 없는데도 여론에만 기대어 수사한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칼럼을 쓴 기자가 특검을 취재하는 회사 동료들의 기사만 제대로 읽었어도 특검이 촛불만 믿고 수사하는 게 아님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혐의를 의심할 만한 진술과 증거가 있기 때문에 이 부회장을 재소환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특검은 촛불에 기대는 게 아니라 촛불의 열망에 부응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한파에도 여전히 뜨거운 ‘촛불 정서’는 고질적인 정경유착의 고리가 이번 기회에 끊어지기를 갈망하고 있다. 이 또한 검찰이 해야 할 일이지만, 그동안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촛불집회에서 가장 많이 나온 구호 중 하나가 ‘검찰개혁’이었음이 이를 방증한다. 촛불이 없었다면 과연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의 실체가 제대로 드러날 수 있었겠는가.


같은 날 <한국경제>의 1면 기사는 더욱 고약하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의 핵심인력들이 최근 대거 사의를 밝혔는데, 마치 특검 수사 탓인 양 읽히도록 제목을 뽑았다.
기사에서 언급한 대로 기금운용본부는 오는 25일 전북 전주시로 이전한다. 직원들이 그만두려는 주된 이유는 본부 이전 탓이다. 서울에 거주하는 직원들이 전주까지 매일 출퇴근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자녀 학업 등을 생각하면 전주로 이사하기도 어렵다. 이들은 거액의 연기금을 굴려본 경험이 있어 자산운용사 등으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다. 이런 사정을 잘 알면서도 마치 기금운용본부에 대한 특검의 “강도 높은 수사” 탓에 직장을 옮기는 것처럼 편집한 것은 왜곡에 가깝다. 이 신문은 이튿날에도 이 부회장에 대한 수사를 “시한부 특검의 도박”으로 묘사하며 특검을 공격했다. 이미 박 정권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실상을 파헤치는 등 성과를 거둔 특검이 삼성을 상대로 도박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만에 하나 이 부회장의 영장이 또 기각된다면 보수 언론의 뭇매를 맞을 게 뻔한데 그런 무모한 짓을 왜 할까.


물론 특검이 언론의 성역일 순 없다. 당연히 감시와 비판의 대상이 돼야 한다. 그러나 그 비판은 철저하게 ‘팩트’에 근거해야 한다. 근거와 논리가 부실한 비판은 그 의도를 의심받는다.
언론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보도로 ‘기레기’의 오명에서 벗어난 게 불과 얼마 전이다. 몇몇 언론의 근거 없는 ‘특검 때리기’가 간신히 회복한 언론의 신뢰를 또다시 추락시킬까 걱정된다.

< 이춘재 - 헌겨레신문 법조팀장 >


[1500자 칼럼] 지리산 채옥 할머니의 메시지

● 칼럼 2017. 2. 14. 21:40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손녀 리아에게 몇 살이냐고 물으면 아이는 검지와 중지로 브이 자를 만들며 “두 샬” 하고 자신 있게 외친다. 이를 본 어른들이 엄지를 세워주며 세 살임을 강조해도 아이는 부자연스런 손가락을 접으며 “아니야, 리아는 두 샬이야.” 하며 팔을 더 높이 치켜든다. 숫자 3 으로 도배된 생일잔치를 한 지 두어 달이 지났건만 아이의 인지는 아직도 세 살 안으로 들어서지 못했나 보다. 아이의 생떼가 요즈음 내 마음과 같아서 “그래 세 살은 하고 싶을 때 하자.” 며 아이를 안아서 볼을 부빈다.


새해가 되면 떡국과 함께 자연스레 한 살씩 더해지던 나이를 몇 년 전부터 생일날로 미루곤 한다. 서양에 살면서 나이도 여기의 관습에 맞춰야 한다는 지론에서다. 하지만 막상 생일이 되면 ‘한 달 남짓 남은 새해에, 그러다가 설날에… ’ 하면서 고무줄 늘어뜨리듯 나이를 마음대로 늘려 잡기 일쑤다. 그러다 때때로 정확한 내 나이를 읊어보곤 우울한 기분에 들기도 한다. 수명 백세시대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지만 쇠퇴해 가는 신체의 기능은 작년과 올해가 다르고,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가능했던 일들이 하나 둘 줄어드는데 대한 상실감 내지 무력감에서 애꿎은 나이만 탓하는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다. 이런 나를 꾸짖기라도 하듯 최근 모 방송국 ‘인간극장’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방영한 지리산 어느 할머니의 일상은 죽비로 내리치듯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시리즈로 방영된 일주일 동안 잔잔한 여운과 함께 끌어 올려진 긍정의 힘은 앞으로의 삶에서 나이는 큰 제약이 아님을 일깨워 준 계기가 된 셈이다.


지리산 해발 700 m 고지의 어느 골짜기에 한 평생 억새풀처럼 살아가는 채옥(76세) 할머니가 살고 있다. 지리산에서 나고 자라 현재의 지리산 자락에 일가를 이룬 할머니는 이십 초반에 아들 하나를 얻자마자 청상과부가 되었다. 지리산 하면 산세 험한 것은 기본이요, 자연 또한 여자의 힘만으로 대항하기 벅찬 그곳에서 바람이 불면 바람결 따라 누웠다가 일어서고 한파가 몰아치면 그 속에서 강인함을 키워 새움으로 발돋움하기를 칠십 여년, 지금은 지리산의 일부분이 되어 어두운 주변을 환하게 밝히며 쉼 없이 달리고 있는 할머니이다.
카메라 앵글은 할머니의 사계절 활동영역을 가감 없이 잡아주었다. 가을철이면 자신의 인생역정을 닮았다는 억새풀을 베어다 말리고 간수하여 간편한 플라스틱 지붕 대신 억새 지붕만을 고집하는 우직함, 눈 쌓인 산야를 돌며 나무 삭정이를 주워 나르면서도 야생동물이 지나는 자리에 먹을거리를 놓아주는 따뜻함, 산비탈을 개간하여 힘들여 지은 농산물을 거동이 불편한 형제자매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나눠주고 돌보아 주는 가족애, 기억자로 굽은 허리를 지팡이에 의지하며 봄에는 산나물 채취, 여름엔 지리산을 찾는 등산객들에게 음식과 쉼터를 제공하며 삶을 영위해 가는 꿋꿋함 등에서 노년기의 허망함 따위는 발붙일 틈이 없어보였다. 할머니의 일상사를 들여다보며 문득 이런 말이 스쳐 지나갔다. ‘아무렇게나 사는 마흔 살 사람보다 열심히 일하는 일흔 살의 노인이 더 명랑하고 희망적이다.’ 라는.


할머니의 일상에서 특이한 점은 세상과 단절된 환경이나 노령에 굴하지 않고 의욕과 노력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있음이다. 다른 사람들이 운전대를 놓을 시기에 어렵게 운전면허를 따서 자신은 물론 이웃들의 불편함을 해소하는가 하면, 겨우 한글을 터득한 수준으로 컴퓨터를 배워 블로그를 운영하기도 한다. 철철이 주변 환경을 사진 찍어 블로그에 올리면 그녀의 팔로워들은 지리산 자연을 간접으로 접하며 감사의 댓글을 올린다. 담당 PD에게 답글을 일일이 올려주고 싶어도 글 쓰는 실력이 부족하다는 하소연은 애잔함을 넘어 찐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어디 그뿐인가. 평생 노동으로 인해 굳고 뭉툭해진 손으로 피아노를 배운다. 그리고 매일 밤 방바닥에 엎드려 일기 쓰기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시시때때 ‘바쁘다 바빠’ 하고 외치면서도 피아노 연습과 일기 쓰기에 열중인 할머니의 궁극적인 목표는 노래 한곡 제대로 쳐 보는 것과 어설프지만 자신의 삶을 시로 표현해 보는 것이라 한다. 앞으로도 배우고 싶은 것과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힘은 들어도 신이 난다는 그녀는 발그레한 볼을 감싸며 열일곱 소녀의 모습으로 잠시 카메라를 응시하다가 방바닥에 납작 엎드린 낡은 전자오르간에 손을 올린다. 지리산 눈 속에 파묻힌 조그만 초가에서 할머니의 숨결 같은 피아노 소리가 한음 한음 따뜻하게 이어지며 끝을 맺었다.


소박하면서도 담백하게 엮어낸 다큐멘터리가 감동을 주는 건 주인공 할머니의 진솔하고 희망적인 메시지가 전면에 포진하고 있었음이리라. 물리적인 거리, 신체적 불편함, 고령의 나이 등 모두 무시하고 자신의 삶을 열심히 개척해 가는 긍정적인 할머니의 모습에서 나의 미래를 꿈꾼다. 나이는 그냥 숫자일 뿐, 불모지를 개척하듯 다방면으로 꾸준히 일구어 가꾸는 일에 매진하리라 다짐하면서.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등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