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사화가 그리운 사람들

● 칼럼 2016. 10. 25. 19:31 Posted by SisaHan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지 4년째, 조선은 왕권의 기반이 다져진 반면, 당파싸움이 심화되면서 빠른 속도로 쇠락의 길을 향하는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른바 훈구파와 사림파의 치열한 권력공방이 공존이 아닌 사생결단으로 치닫고 있었다. 훈구파의 유자광과 이극돈 등은 사림파 김종직과 김일손 등이 요직을 꿰차며 득세하자 큰 위기를 느낀다. 김종직은 세조의 왕위찬탈을 옛 중국의 초나라 항우가 의제를 죽이고 서초패왕이 된 것을 빗대어 비판하는 내용의 ‘조의제문’을 쓴 기개있는 인물이었다. 김종직의 제자였던 김일손은 세상을 떠난 스승의 글을 자신이 사관으로 있으면서 사초에 옮겨 실었다. 그런데 이 글이 훗날 자파를 몰락시키는 피바람의 단초가 될 줄이야.


사림(士林)들을 아니꼽게 보던 훈구파는 자파 이극돈이 마침 성종실록을 만드는 당상관으로 임명되자 대반격의 꼬투리를 잡아낸다. 김종직의 조의제문과 이에 동조하며 사초에 올린 김일손의 글들을 발굴해낸 유자광 등 훈구파는, 때마침 사림의 훈계를 귀찮아 하던 연산군에게 이를 고해바치며 역모를 품은 것이라고 덮어 씌운다. 사림파가 하루아침에 역적으로 몰리게 되고, 연산은 기다렸다는 듯 이들을 대역죄인으로 몰아 처형한다. 김종직은 무덤이 파헤쳐져 시신이 목이 잘리는 부관참시를 당했고, 김일손은 능지처참을, 또 수많은 사림들이 죽거나 유배를 당했다. 그렇게 어이없이 모반죄로 몰린 사림 사단이 초토화되고 말았다. 세조의 왕위찬탈 40여년이 지난 뒤 1498년에 벌어진 무오사화의 스토리이다.
그 뒤에 벌어진 1504년의 갑자사화, 이어 중종 때의 기묘사화(1519), 명종 즉위년의 을사사화(1545) 등 조선시대 4대 사화(士禍·史禍) 모두가 하찮은 트집을 잡아 정치적 반대세력을 몰살시킨 비극적 앙갚음의 참화였다.

그로부터 500년이 흐른 현대 한국 땅, 민주주의가 발전했다는 이 시절에 정치권의 수준낮은 대립상을 보며 조선의 사화가 떠오른 것은 과도한 비약일까?
전직 장관이 무슨 의도로 썼는지는 모르나, 회고록에서 까발린 10년 전의 정부 외교시책 결정 내용을 두고 느닷없는 소동에 탄식이 나온다. 북한과 내통했느니, 북의 종이 되었느니 하며 원색적인 색깔론으로 호들갑을 떠는 여당, 그들은 야당은 물론 유력 대선 예비 주자를 깎아내리고 상처를 주기위해, 지금 당장 하늘이 무너져 내리기라도 할 것처럼 법석을 떨고 있다.
유엔에서 의사표시를 하는 북한인권에 대한 정부결정을 대통령을 제쳐놓고 청와대 비서실장이 최종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 중에서도 상식이다. 더구나 지금처럼 남북관계가 절벽인 것과는 달리 당시는 남북간 지극히 우호적으로 공식왕래가 잦았던 때였기에, 대통령의 기권 결정에 대해서도 시비를 걸기에는 무리임이 명백하다. 그런데도 그때의 비서실장을 애먼 표적으로 삼아 ‘국기문란’이니 ‘주권포기’요 ‘반역행위’라고 바락바락 악을 쓰는 형국은 참으로 가관이고 저질이다.


근래 정권이 곤경에 처할 때마다 어거지를 쓰는 말이 곧 ‘국기문란’인데, 이번에도 전가의 보도처럼 들고 나왔다. 하지만 어떤 게 진짜 국기문란일까. 수사를 받는 피의자인 민정수석이 수사감독을 하고 수사보고를 받는 검찰의 수사야 말로 변명할 수 없는 국기문란 아닌가? 대통령 비선실세라는 한 여인이 공무원을 동원해 이상한 재단들을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고, 전경련을 시켜 기업들로부터 수백억원을 긁어모으더니, 자신의 딸 해외 승마훈련에 쏟아붓는 정황, 그리고 명문 여대 입학과 학점비리를 압박해 학사관리를 엉망으로 만들어 학교망신은 물론 학생들의 분노를 자아내고 있는 것들이야 말로 국가와 대학을 사유화한 국기문란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런 부패 흑막은 극력 덮으면서 엉뚱한 트집으로 극한 정쟁과 국론분열을 꾀하고 있으니, 도저히 국정을 책임진 세력의 수준과 양심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저급하고 비열한 행태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유력 대선주자라 할지라도 정말 그렇게 적과 내통하고 반역행위를 했다고 믿는다면,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대공 수사당국이 왜 당장 잡아들여 치도곤을 가하지 않는가? 속이 빤히 보이는 정치공세요, 북풍공작이며 추잡한 색깔론의 재탕이다. 정치적 매장까지를 노리는 현대판 사화 획책의 술수라고나 하면 맞을 수준이다.
그러니 이 답답한 뉴스들 속에 시달리는 국민들은 얼마나 불쌍한가. 나라를 이 꼴로 만드는 지도자를 둔 국민들은 얼마나 불행한가. 시대가 수백년 변해도, 내우외환의 격랑이 이는데도 한치 변함없는 파당과 적대의 정치악습에 골병드는 나라가 정말 걱정이다.


< 김종천 편집인 >


회고록은 철저히 집필자의 기억과 관점 그리고 감정으로 작성된 글이다. 회고록만 의존하여 집필한 학술논문은 학술지에 출판을 할 수 없다. 저자의 “회고”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회고는 참고 정도로 활용한다.
최근 참여정부 시절 외교부 장관을 지낸 송민순 북한대학원대학교 총장이 회고한 2007년 노무현 정부의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표결 기권 과정이 정쟁화되고 있다. 여당은 이를 두고 내통, 국기문란, 북한결재라고 원색 비난을 하고 있다. 이 회고록만 진실로 믿고 있는 여당은 야당의 유력 대선주자인 문재인 전 대표를 그들의 극장안보 무대에 세워 놓고 색깔론을 상영하고 있는 중이다.
정말 여당한테 안보가 중요할까라는 우문이 든다. 이들은 한반도 안보위기가 엄중한 상황에서 김제동씨의 방송 발언을 국회 국방위 감사에서 쟁점화하였다. 이것 때문에 우리의 대북 감시체계가 얼마나 빈약한지, 국방예산이 얼마나 육해공 합동성을 뒷받침하고 있는지, 방산비리가 얼마나 국방력을 갉아먹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의 대북 군사억지 체계가 원활히 작동하고 있는지에 관한 논의를 부실하게 하였다.

이들은 이제 개인의 회고록을 진실로 둔갑시킨 후 종북몰이와 색깔론을 원색적으로 상영하는 극장안보를 개봉한 것이다. 그런데 이 극장안보에는 진짜 안보가 없다. 한국의 안보가 왜 악화되었는지에 대한 반성도, 이 악화된 안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도, 한반도의 평화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라는 계획도 없다. 오로지 이들에게 “너희들은 종북이야”라는 광기 어린 매도만 있을 뿐이다. 이 극장안보는 늘 “통일은 대박”이라는 원칙적 구호로만 그 막을 내린다. 통일에 이르는 복잡한 여정에 대한 고민은 없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극장안보처럼 쉬운 것이 없다. 적대적 분단구조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여정을 고민하는 정책과 행동은 일탈로 규정하고 빨갱이라고 갖은 욕지거리를 내뱉는다. 사실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이들에게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를 달성하기 위해 심각히 고민하고 몸소 부딪쳤던 “안보 현장의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평화적 비핵화와 남북 화해 그리고 한반도 안정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고 관리해야 하는 남북 줄다리기 현장은 원론적인 이야기를 무색하게 하는 모순된 상황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다. 북한 주민의 인권을 실질적으로 개선시키면서, 한편으로는 그 유일한 창구인 북한 정권을 대화 상대로서 놓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이것은 덧셈 뺄셈의 1차원적 마인드로는 풀 수 없는 고차 방정식과 같다. 이것이 바로 외교안보 현장이다.
현실적으로 외교안보가 이루어지는 현장에서는 일도양단식으로 딱 잘라서 일을 진행할 수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목소리만 높이기는 쉽다. 남북관계의 모순은 압박과 함께 북한과 협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편하게 원론에 기대기에는 남북 화해협력의 무게가 막중하다는 것이 바로 외교안보 현장의 논리이며 이는 여전히 유효하다. 천박한 색깔론만 방영하는 극장안보에는 자극적인 언사와 저질스런 몸짓밖에 없다.

그 가짜 극장안보가 흥행될 것 같은가? 지난 9년간 종북몰이만 했던 여당의 극장안보가 얼마나 북한의 비핵화를 실현했고 인권 개선에 공헌하였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색깔론만 보여주는 여당의 극장안보 결말이 더 강력한 북핵과 더 불안한 한반도 안보 환경이라면 이 극장을 당연히 폐쇄시켜야 한다. 그 진위가 불분명한 개인의 회고록은 접어두고, 이제 진짜 안보로 경쟁하자.

< 최종건 - 연세대 교수, 정치외교학과 >


[1500자 칼럼] 북의 도발을 원하는가

● 칼럼 2016. 10. 18. 19:01 Posted by SisaHan

북한은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존재다. 우리의 소소한 일상부터 복잡하게 얽혀 있는 국제정치에 이르기까지 국내외 주요 사안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핵심 변수다. 북한을 어떻게 인식하고 대응하느냐에 따라 우리나라의 운명이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정치인, 그중에서도 대통령의 대북관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의 대북 인식과 대응 방식은 너무나 단편적이고 때로는 위험하다. 지난 국군의 날 기념식에서 북한 주민을 상대로 “대한민국으로 오라”고 노골적으로 탈북을 부추긴 데 이어 어제는 “결국 북한은 자멸에 이를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을 붕괴시키겠다는 의중을 가감 없이 드러낸 셈이다.


박 대통령이 북한에 강경하게 대응하는 건 북한이 핵실험을 계속하는 등 대화보다는 대결 자세로 나오는 게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북한이 왜 죽기 살기로 핵무기 개발에 매달리고 있는지부터 정확히 인식하는 게 필요하다.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일차적인 목적은 미국의 위협과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는 게 아니다. 남북한과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6자가 만나 합의한 2005년의 ‘9·19 공동성명’에 이런 내용이 모두 담겨 있다. ‘북한은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 계획을 포기하고, 미국은 핵무기 또는 재래식 무기로 북한을 공격 또는 침공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게 9·19 성명의 주요 내용이다. 이러한 ‘북핵 진실’을 외면하고,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해 남한을 위협한다는 일방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한 북핵 문제 해결은 요원하다.
물론 북한의 핵무기가 우리 안보에 위협적인 존재인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제는 현실적으로 핵 폐기 논의가 무의미할 정도로 심각한 단계에 와 있다. 하지만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일차적인 목적이 무엇이고, 무엇이 부차적인 것인지를 가려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엉뚱한 대책이 나올 수밖에 없다. 최근 사드 배치 결정을 둘러싸고 ‘미국을 겨냥하는 북한 핵무기를 막기 위해 왜 남한에 사드를 배치해 국내 갈등을 야기하고, 동북아의 안정을 해치느냐’는 주장이 제기되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 나오는 것이다.


북한 붕괴론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북한 붕괴론은 김영삼 정부에서 시작돼 이명박 정부를 거쳐 박근혜 정부 들어 더욱 강화되고 있다. 이명박 정부 때만 해도 ‘기다리는 것도 전략’이라며 사실상 북핵 문제를 방치하면서 붕괴를 기다렸다면 박근혜 정부는 적극적으로 북한의 붕괴를 부추기고 있다. 북한을 무너뜨려야 할 정권으로 상정하고 본격적인 행동에 나선 모양새다. 이는 필연적으로 북한의 반발을 불러오면서 남북 사이의 대치 국면이 더욱 첨예해질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는 서로 ‘말폭탄’만 주고받고 있지만 그 강도가 심해지면 언젠가는 실제 폭탄이 오가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끔찍한 일이다.
이런 호전적인 대북관은 국내 정치를 옥죈다는 측면에서 봤을 때도 큰 문제다. 박 대통령은 북한의 위협을 끊임없이 강조하면서 국론 통일을 요구하고 있다. 북한이 핵무기로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으니 한마디로 입 다물고 있으라는 얘기다. 이승만 정권 이후 수십년 동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소리다. 하지만 북한과 극한 대치를 하는 상황에서 이런 목소리가 일정 정도 먹혀드는 것도 사실이다. 만일 휴전선이나 서해안에서 국지적인 군사 충돌이 일어나면 모든 현안이 다 덮이게 돼 있다. 박 대통령이 식상할 법도 한 북한 위협론을 계속해 강조하는 것은 이런 현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박근혜 정권이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극한 상황을 인위적으로 조장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1997년 대선을 앞둔 김영삼 정부 말기에 벌어졌던 이른바 ‘북풍 사건’을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최경환 국민의당 의원이 엊그제 공개한 예비역 장성의 문자메시지는 이런 우려를 깊게 한다. 믿고 싶지는 않지만 “대통령의 다음 수순은 북한이 한미연합군에 의한 보복 빌미를 줄 수 있는 도발을 해오도록 계속 자극할 것”이라는 예비역 장성의 전망은 섬뜩하다. 정권 유지를 위해 한반도를 전쟁터로 만들 것이라는 분석인데 박 대통령의 대북관이 아무리 호전적이라도 제발 그런 일만은 없기를 바랄 뿐이다.

< 정석구 - 한겨레신문 편집인 >


[칼럼] 이주 노동자 교수

● 칼럼 2016. 10. 18. 19:00 Posted by SisaHan

캐나다 대학에 임용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중국인 교수임용후보자와 저녁 식사가 있었다. 대학으로서는 상당히 중요한 협상의 자리였다. 5명의 교수가 앉아 있었는데, 식사 도중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캐나다 수도에 위치한 대학에서 교수를 뽑는 자리에, 정작 캐나다인은 한 명뿐이었던 것이다. 한 명은 미국인, 필자는 한국인, 임용결정권을 가진 연구소장은 오스트리아, 후보자는 중국 국적을 갖고 있었다. 이런 광경이 한국에서 가능할까?
동아시아 국가에서 외국인 교수를 보는 일도 이제 어렵지 않다. 중국은 엄청난 자본을 무기로 선진국의 외국인 교수를 유혹 중이고, 3년 연속 노벨상에 빛나는 일본은 굳이 나서지 않아도 외국인들이 찾아가는 나라다. 한국도 2002년부터 외국인 전임교원을 늘리려는 자구책으로 브레인 풀 제도를 도입했고, 꾸준히 외국인 전임교원을 확보해 온 것으로 안다. 하지만 15년이 지난 지금, 그 제도는 완전히 실패했다. 참담한 일이다. 서울대를 떠나는 외국인 교수들에 대한 인터뷰가 신문을 도배 중이고, 외국인 전임교원의 수는 3년 연속 하락 중이다. 한국 대학은 외국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아니다.


전시행정의 결과란 참혹하다. 취지는 좋았다. 대학의 국제경쟁력을 높여야 한다. 그래서 대학평가에 외국인 교원의 가중치를 높였다. 대학들은 그 제도를 역이용했다. 무늬만 외국인인 한국계 교수들이 무더기로 임용되었다. 실제로 브레인 풀 제도 아래서 채용된 외국인 교수 중 한국계 외국인은 40%를 웃돈다.
이런 작태를 주도한 대학이 서울대라는 사실도 분개할 일이다. 그보다 앞서 서울대는 학문적 근친교배의 비참한 현실부터 혁신해야 할 것 같다. 서울대 출신 교수의 비율이 85%가 넘는 대학에서 자유로운 학문적 교류란 불가능하다. 그런 위계로 가득한 곳에선, 절대로 자유로운 사상이 움틀 수 없다.
2016년, <네이처>에 한국파스퇴르연구소장 하킴 자바라의 글이 실렸다. 인터뷰는 폐부를 찌른다. 한국의 연구 환경이란, “국립대학인 서울대학교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논문을 내”기 어렵고, “유치원을 함께 나왔으니 너를 지원해줄게”라는 농담이 여전히 유효하며, 심지어 영어로 쓴 연구비 계획서를 받아주지도 않는 곳이다.


과학기술 분야에서 국가라는 경계는 사라졌다. 실리콘밸리는 중국과 인도 출신의 엔지니어들이 주류가 되었고, 미국은 H1B라는 비자로 이들을 끌어들인다. 그곳에서 페이스북과 구글과 애플이 삼성을 압도하고 있다.
지난 15년을 허비한 한국 교수들에게, 외국인이란 금발의 서양인이었을 게다. 검은 머리로 외국에 나가 박사학위를 받은 자신도 실은 외국인었음을 객관적으로 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들은 한국에서 자신들이 가르쳐 박사로 만든, 이주 노동자들과 같은 국가 출신의 제자들에게 절대 서울대 교수 자리를 주지 않는다. 이미 과학기술 대학원 진학은 회피의 대상이 되었고, 비대해진 대학원은 동남아 유학생들로 채워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머릿속에 외국인 교수란 파란 눈의 외국인이다. 21세기의 한국은 20세기 중반 유학을 떠났던 미국과 닮아가고 있는데, 우리의 의식수준은 여전히 조선에 가 있다.
눈을 떠 현실을 보자. 한국은 이미 다문화 국가다. 이 다문화 시대에, 가장 개방적이어야 할 학문에서조차, 우리는 외국인을 차별하고 있다. 서울대에서 우수한 논문을 내고 졸업한 이주 노동자의 아이에게, 우리는 어떤 동지애를 기대할 수 있는가? 그는 외국인인가? 질문해봐야 한다.


< 김우재 - 초파리 유전학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