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탁구, 그 재미

● 칼럼 2017. 3. 7. 21:03 Posted by SisaHan

백세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웰빙(well-being)과 웰다잉(well-dying)에 대한 관심이 유별나다. 어떻게 하면 우아한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고, 어떻게 살면 품위와 아름다움으로 생을 마감할 수 있을까? 어느 모임에서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음식과 운동이 화제의 중심이 된지 오래다. 그러나 홍수처럼 넘쳐나는 정보를 어찌 다 믿고 실행할 수 있겠는가. 나는 마음건강을 신체건강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해 온지 오래다. 마음이 편치 않으면 몸도 따라 아팠으니 말이다. 소화도 안되고, 스트레스로 인한 수면장애가 와서 하루 종일 정신이 맑지 못하고, 아무 일도 집중하지 못해 끝내 우울증에 빠져 들곤 하였다. 가능하면 내가 좋아하는 일에 집중하고, 신뢰하는 친구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며, 긍정적 마인드로 살려는 노력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한다. 터널같이 길고 지루한 겨울철을 콘도에 갇혀 보내는 일은 고역이다. 답답한 몸과 마음을 풀어줄 적당한 운동을 찾아 나섰다. 때론 산책이나 헬스 센터에 가기도 했지만, 이왕이면 여러 사람이 함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지역 커뮤니티센터로 발걸음을 향했다.


커뮤니티센터로 들어서면 ‘아이, 아야야, 어~, 아유~, 햐이’ 탁구장을 가득 채운 낯익은 의성어가 밖으로 새어 나온다. 그 정다운 소리에 나도 모르게 쌓인 스트레스가 한방에 날아간다. 마치 이른 새벽 생선시장에나 간 듯 팔팔한 생명감이 느껴온다. 탁구 치는 모습도 사람 얼굴 다르듯 모두 달라 각 사람의 개성이 있어 구경하는 재미가 심심치 않다. 몇 해 전 탁구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붙인 내 별명은 꽃사슴이다. 사슴처럼 몸과 발을 펄쩍펄쩍 뛰며 공을 받는 내 모습을 빗댄 재미있는 표현이다. 어찌 나뿐이겠는가. 모두에게 별명을 붙일 수 있을 만큼 특징이 있다. 번번히 공을 놓치면서도 폼만 좋은 폼순이, 탁구대에 삐죽 붙어 서서 공을 받는 뻐쩡녀, 한 자리에 버티고 서서 절대로 탁구공을 놓치지 않는 탁순이, 자기 게임보다 남의 볼만 찾아주고 있는 오지랖남, 매번 공을 놓친 아쉬움을 소리로 표현하는 애석남… 등등.


내 똑딱볼을 군말 없이 받아주는 남편 아닌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니 운동의 효과뿐만 아니라 삶을 성찰하는 기회도 만나고 있다. 어떤 이는 양쪽 코너로 힘없이 짧게 보내는 약 올리는 볼을 치는가 하면, 내지르는 볼을 주면서 마치 애완견 훈련시키듯 양쪽 방향으로 번갈아 보내는 이도 있다. 그럴 때 잠시라도 상대방을 얕잡아보거나 내 기분을 상할라치면 금세 실점으로 이어진다. 마치 선입견을 갖고 별볼일 없는 사람으로 여겨 잘난 체하다가 제풀에 망신을 당하는 격이다. 감정조절은 필수다. 어떤 이는 길게 힘찬 볼을 건넨다. 이럴 댄 탁구대에 가까이 서지 말고 몇 발짝 뒤로 물러서서 멀리 보고 공을 받아야 실수를 줄인다. 마치 가까이 서있는 나무만 보지 말고, 먼 숲을 바라보듯 삶을 관조해야 하는 것과 동일하다. 힘찬 볼은 상대적으로 힘을 빼고 받아야지 같은 강도로 되받으면 영락없이 아웃 볼을 치게 된다. 그러나 때론 강한 사람에게는 강하게, 약한 사람에게는 약하게 대하는 관계의 기술이 탁구에서도 필요한 것 같다.

물론 숙련된 이가 아니면 어설프게 따라 할 수 없는 고도의 기술이다. 어떤 이는 볼을 돌려 친다. 분명히 눈 앞에 떨어지는 볼을 보고 되받았는데 엉뚱한 방향에 볼이 있어 헛손질하기 일쑤다. 이럴 땐 서두르지 말고 잠시 탁구대에 떨어진 볼이 튀는 방향을 보고 되받아야 한다. 마치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을 대하듯 신중하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과 같다. 어쨌든 어떤 볼이 날아오든 먼저 흥분하여 서두르면 낭패를 본다. 빨리 날아오는 볼을 보고 잠시 숨을 고르며 되받아야 하나, 실력이 떨어질 수록 반격하는 속도가 빨라져 실점할 수 뿐이 없다. 또한 나처럼 몸이 먼저 움직이면 여전히 낭패하기 십상이다. 마치 자기 성질대로 감정대로 다급하게 일을 처리하다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처럼 말이다.


모든 운동은 자신과의 싸움이다. 모자라는 실력으로 득점만 앞세우는 무모한 공격은 영락없이 실점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상대방이 허술해 보일 때를 기회로 삼아 그의 실점을 유도하는 것이 상책임을 실수로 배우고 있다. 그러려면 어떤 상대를 만나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기본실력부터 연마하는 것이 우선이지 싶다. 특히 볼이 약할 때는 강하게 받고, 강한 볼은 약하게 되받는 힘의 강약조절과 몸의 유연함을 훈련해야 할 것 같다. 이즈음은 운동도 될뿐더러 일상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시도로 시작한 탁구로 잃어버린 열정과 도전을 되찾아간다. 건강한 활기를 샘솟게 만드는 탁구, 겨울이 저만치 물러나있다.

< 원옥재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원, 전 회장 >


[칼럼] 거짓의 시대

● 칼럼 2017. 3. 7. 21:01 Posted by SisaHan

이제 한국이라는 나라는 가히 ‘거짓말 공화국’이다. 대통령부터 장관, 청와대 고위인사들을 거쳐 재벌총수, 대학총장, 교수, 의사에 이르기까지 최고 권력자와 엘리트들이 지난 몇 달간 펼쳐온 현란한 거짓말 퍼레이드는 경악을 넘어선다. 국민들은 최소한의 윤리도, 자존심도, 수치심도 없는 저들의 파렴치에 할 말을 잃었고, 저런 자들이 나라를 지배해왔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권력자들의 공공연한 거짓말은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지난 미국 대선 전후로 도널드 트럼프가 토해낸 거침없는 거짓말과 거짓 주장은 일일이 헤아릴 수조차 없다. 최근 <워싱턴 포스트>는 트럼프가 대통령 취임 이후 한 달간 쏟아낸 거짓 주장과 사실 왜곡만 132건에 이른다고 전한다.


바야흐로 ‘거짓의 시대’가 열린 것인가. 오죽하면 ‘탈진실의 시대’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겠는가.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탈진실(post-truth)’을 2016년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고, 독일언어학회도 ‘탈사실(postfaktisch)’을 올해의 독일어로 뽑았다.
실로 우리는 탈진실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과 ‘진실’은 폄하되고, ‘거짓’과 ‘사이비’가 활개 치는 세상이다. 이러한 현상은 거대한 사상적, 사회문화적, 기술적 변화와 관련이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치상대주의와 다원주의는 모더니즘의 토대였던 ‘진리’를 해체했고, 개인의 개체화와 익명화는 거짓에 대한 민감성을 둔화시켰으며, 인터넷이 열어놓은 새로운 매체환경은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자신들만의 ‘대안 사실’을 믿는 ‘분할된 마이크로 공론장’(얀베르너 뮐러)을 만들어냈다.
사실과 진실의 권위가 무너진 폐허에서 선동가들의 거짓말이 번져가고 있다. 그들의 거짓말이 위험한 진짜 이유는 그들이 거짓을 사실로 믿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명백한 ‘사실’을 하나의 ‘의견’으로 강등시키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렇게 사실의 신뢰성을 잠식하고 공론장을 왜곡하여, 결국 민주주의의 토대를 허문다. 민주주의는 다양한 의견 사이의 논쟁에 근거하고, 의견의 타당성은 사실에 기초하기 때문에, 사실이 무너지면 의견이 무너지고 결국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것이다.


거짓의 시대가 유독 미국에서 화려하게 개화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나치즘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사유하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이 대륙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대중문화를 통한 주도면밀한 우민화가 만들어낸 이 ‘무사유 사회’에서 그는 새로운 유형의 파시즘의 싹을 본다. 그가 쓴 <계몽의 변증법>(특히 ‘문화산업론’)이나,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동료인 허버트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모두 이 ‘사유하지 않는 인간들’에게서 받은 충격을 이론적으로 이해하고자 한 시도였다.
이들의 예견은 적중했다. 오늘날 ‘트럼프 현상’을 낳은 무사유, 무지, 반지성주의는 미국 사회의 ‘오래된 미래’였던 것이다. 트럼프는 선거유세에서 “나는 무지한 사람들을 사랑한다”며 내놓고 무지를 찬양했다. 바로 이런 대중의 무지가 미국을 ‘거짓의 시대’의 향도로 만든 사회문화적 토양이다.


거짓의 시대에 선동가들에게 맞설 무기는 ‘지식’과 ‘사유’이다.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파시즘은 공포를 먹고 살지만, 민주주의 속에 기생하는 파시즘은 무지를 먹고 산다. 저질 오락방송을 통한 우민화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의 독서율로 상징되는 우리네 일상이야말로 박근혜의 ‘거짓말 공화국’을 탄생시킨 숨은 주범인지도 모른다.
< 김누리 - 중앙대학교 독문학교 교수 >


헌법재판소가 27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의 변론을 마쳤다. 헌재는 국회의 심판 청구 뒤 81일 동안 모두 20차례 심판정을 열어 증거를 조사하고 변론을 들었다. 이제 평의 끝에 내려질 헌재 결정을 온 국민이 간절히 기다릴 것이다.
이번 심판은 현직 대통령이 국민과 역사의 심판대에 선, 헌정사의 일대 사건이다. 헌법과 법률을 어긴 대통령을 탄핵 심판정에 세운 것은 주권자인 국민이다. 헌정 유린의 전말은 물론, 탄핵심판의 처음과 끝은 다시 온전히 역사의 심판에 맡겨질 것이다. 헌정과 법치가 어떻게 위협당했는지, 이를 어떻게 바로잡았는지는 우리 민주주의의 귀중한 자양분이 되어야 한다.


탄핵 사유는 충분히 입증된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이 주권자가 위임한 권력을 비선인 최순실씨 등에게 함부로 넘기고, 심지어 최씨의 사익 추구에 협조한 일은 관여한 이들의 증언과 제출된 증거 등을 통해 사실로 확인됐다. 헌법상 국민주권주의와 대의민주주의 훼손이 분명하다. ‘세월호 7시간’ 동안 대통령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도 드러났다. 국민 안전을 지켜야 할 헌법 의무 위반이다. 공무원들을 함부로 인사 조처한 임명권 남용도 분명하다. 재단 출연금이나 정유라씨 지원 등을 이유로 기업에서 돈을 거둔 것에 대해선 직권남용과 강요에 더해 뇌물 혐의까지 드러난 터다. 법 위반이 대통령직을 도저히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중대하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최종변론에 이르기까지 모든 잘못을 다 부인했다. 지난 몇 달간의 수사와 재판, 심판을 통해 자신의 범죄 혐의와 헌정 유린의 잘못이 애초 알려진 것보다 훨씬 심각하고 중대함이 명백해졌는데도, 처음처럼 그저 “모른다” “억울하다”뿐이다. 관련자들의 자백과 증언도 아예 모른 체다. 잘못을 부끄러워하지도 못하니, 과오에 대한 성찰과 나라를 위한 결단 따위는 아예 기대할 수도 없다.


대통령 대리인단도 가관이다. 변론의 대부분을 터무니없는 억지와 정치적 선동으로 채웠다. 소추 사유의 본질을 정면으로 반박하기는커녕 온갖 수법으로 심판을 지연시키고 핵심을 흐리는 데만 골몰했다. 재판관들까지 공격하더니, 이제는 국회의 탄핵소추 과정이나 헌재 재판부의 결원을 뒤늦게 시비 걸어 헌재 결정에 ‘불복’하겠다고 을러댄다. 참으로 비열한 추태다.


[한마당] 설마를 상상할 자신있나?

● 칼럼 2017. 2. 23. 19:34 Posted by SisaHan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의혹사건이 터진 뒤 해외 주요 언론은 하루가 멀다하고 이를 대서특필했다. 권위지 뉴욕타임즈는 이렇게 보도했다. ‘한국 대통령 둘러싼 스캔들 불거져, 리더십 총체적 위기’라는 제하에 “마치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났다는 의혹의 한 가운데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이 서 있다. 비선에서 대통령을 조종하는 실세, 정실 인사와 파벌주의, 부정 축재, 거기에 믿기 어려운 문란한 소문까지. 한국의 라스푸틴이라는 평을 받는 인물이 등장하고…”
그 뒤 뉴욕타임즈는 ‘heng on the Choi Scandal in South Korea’라는 제목의 만평을 게재하기도 했다. 만평은 ‘PARK GEUN-HYE’라고 적힌 로봇을 그려놓고 로봇의 머릿속에 ‘CHOI SOON-SIL’이라고 적힌 여성이 의자에 앉아 로봇을 조종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박 대통령은 로봇에 불과했고, 사실상 최순실의 조종과 농간에 의해 국정이 운영되었음을 생생하게 묘사한 것이다.


전세계 언론과 SNS에 넘쳐난 실황중계로 대한민국은 졸지에 우스꽝스런 나라로 전락해버렸고, 해외 한인들은 사상 유례없는 수치와 모멸감으로 가슴을 쳐야했다. 그래도 위안이랄까. 1천만 명을 넘어선 대규모 촛불집회가 이어지면서 박근혜 정권의 무능과 부패와는 달리 정의를 외치는 평화시위의 국민 수준과 민주의식에 찬사가 쏟아지기도 했다.
하지만 전 세계인과 지구촌 언론에는 한국 국회가 탄핵한 박근혜 대통령에 얼키고 설킨 국기문란 스캔들이 이미 핫 이슈로 자리잡았다. 이후 특검의 수사가 진행되면서 국내언론 못지않게 굵직한 뉴스들이 수시로 보도됐다. 형사재판이 열리고, 헌법재판소가 탄핵안을 심리하는 한국의 정정불안과 박근혜의 추락은 세계인들의 뇌리에 깊이 박히고 말았다. 글로벌 기업 삼성의 뇌물의혹도 겹쳤으니 세계적인 매체들이 관심을 두는 건 당연했다.


워터게이트의 닉슨처럼, 결국 물러날 것이라는 시각도 번졌다. 촛불민심이 박근혜 대통령의 헌재 탄핵결정을 기정사실화 한 것처럼, 외국의 주요 언론도 탄핵이 불가피함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탄핵의 증거들은 차고 넘친다”는 검찰의 확신과 1천만이 넘는 촛불 민의에 당연히 새롭고 정의로운 민주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공통의 분석과 상식적인 기대가 한국인은 물론 세계인 사이에도 공감대가 확산된 것이다. 쉬운 예로 최근 중국 정부의 한국정부 무시 태도를 보면 그런 심증이 뚜렷함을 본다. 설마 이 엄청난 사건의 중심 인물인 박근혜가 앞으로도 권좌에 앉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국정을 운영해 나갈 수가 있겠는가 하는, 맹신그룹인 친박세력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부인 못할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화장실 갈 때하고 나올 때 마음 다르다’는 말이 경험론적인 진실이듯, 역시 시간이 가다보니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려는 발버둥이 보이기 시작했다. 숨었던 비선 부역자들과 친위세력들이 꿈틀거리며 마각을 드러낸 것이다. 그들은 촛불집회가 거쳐간 궤적을 흉내 내면서 전혀 어울리지 않게 태극기와 성조기까지 꺼내들고 궐기하기에 이르렀다. 숨을 죽이고 잔뜩 주눅들어 있던 사람들이 요즘은 “탄핵은 기각된다”는 이상한 자신감까지 들춰 보이면서 차츰 목청을 키운다. ‘어느 쪽이든’ 헌재결정에 승복하라고 당당하게 압박도 한다.
탄핵에 찬성하는 국민이 80%선에서 별다른 동요가 없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수사기관은 대통령의 뇌물죄를 확신하고, 헌재 심리에서도 탄핵증거가 충분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런데, 시간이 가다보니 상황이 반전되고 있단다. 시간이 가면 흑이 백으로 바뀌는 것인가? 왜 불안심리가 스며드는 것인가.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왜 슬슬 신경을 건드리는 거지? 참 이상한 나라요, 겁나는 현상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하지 않은가. 만에 하나 탄핵이 기각된다면…?
그러면 ‘로봇’은 은밀한 마수의 인공지능에 의지해 다시 기계적으로 꿈틀대게 되나? 국가적 위기상황에 아무 조처없이 미용시술을 즐기며 관저만 맴돌았다는 지도자가 국정을 계속한다? 궁지에 몰렸던 비선 권력이 되살아나 활개를 치며 힘자랑을 한다? 잠시 수모를 당해 응어리졌던 보복의 칼을 휘두르겠다고 설친다?, 권력과 재벌의 검은 밀월은 공인된 합법의 거래가 되어버린다?
결국 80%의 국민이 참패하고 진실은 거짓이, 정의는 불의의 음모론과 꼼수에 제압당해세상이 잿빛 절망으로 뒤덮여 버린다? 국정농단과 헌정파괴가 “뭐 그럴 수도 있지“라고 공인되는 뒤죽박죽인 나라, 사리분별도 모르는 국민, 그리고 그런 우스꽝스런 나라 출신 이민자들의 누추한 몰꼴이라니? 숨이 막히고 낯이 뜨거워 상상만 해도 암담하다. 설마 그런 일을 상상할 자신이 있는가?


< 김종천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