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끝이 좋아야 아름답다

● 칼럼 2017. 4. 4. 20:28 Posted by SisaHan

끝이 좋아야 아름답고 귀하다. 끝이 좋으면 모든 게 좋아 보인다.
글의 서두를 이렇게 시작하면 벌써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아니면 누군가를 떠올리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요즘 끝이 안좋은 모습들로 인해 장삼이사들의 입길에 오르내리며 세인의 지탄을 받거나 가슴 아프게 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민을 하늘처럼 받들며 잘 섬기겠다고 약속했던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에 그치지 않고 이제 감옥문 앞에 서있다. 그녀의 추락은 열렬한 국민적 지지와 신뢰를 배신한 업보요 스스로 무덤을 판 것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국가적으로 재연돼서는 안될 오욕이기도 하지만, 인간적으로도 최고 권좌에서 하루 아침에 급전직하했으니 그야말로 서글픈 일이다. 무엇보다 철권통치 끝에 비명에 간 독재자 아버지의 비참한 권력말로에서 교훈을 얻기는커녕 그대로 전철을 밟아간 어리석은 권력자의 뒤끝에 깊은 연민과 안타까움이 남는다.

얼마 전 퇴임한 버락 오바마 전 미국대통령은 8년간 재임했다. 그가 역대 대통령 가운데 퇴임 직전 지지율이 가장 높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인기가 얼마나 좋았으면 대선 경선이 진행 중인 프랑스에서 대통령으로 추대하자는 호사가들의 제언이 나왔겠는가.
그의 인기를 논하기에 앞서 눈여겨 볼 대목이 있다. 취임 당시 사진과 퇴임 때 사진을 비교해 보면 왜 오바마의 퇴장을 아쉬워하며 그에게 박수를 보내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다. 그 사이 주름살이 깊어진 얼굴, 하얗게 센 머리가 눈에 띈다. 재임 중 시달리고 고심했던 노고를 그의 풍모에서 읽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의 노고가 비선들에 둘러싸여 권력을 농단하느라 그랬다면 그런 인기가 나왔을까. 국가기강을 무너뜨리고 공직 시스템을 파괴하느라, 또한 헌정질서를 짓밟느라 그랬다면 박수 속에 퇴장할 수가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으로 존경을 받았던 우루과이의 호세 무히카 대통령도 퇴임 때 65%의 지지율을 보인 것으로 유명하다. 당선될 때의 52% 지지도가 5년 후 퇴임 때 훨씬 높아진 것이다. 그는 대통령궁을 노숙자 쉼터로 내주고 대신 수도 몬테비데오 근교의 아내 소유 농장에 거주했다. 집에는 두 명의 경호경찰과 개 한 마리 뿐이었다고 한다. 재산목록은 농기구 몇 개와 트랙터, 그리고 낡은 자동차 한 대였다. 그는 퇴임 후에도 아내와 농사를 지으며 연금의 90%를 기부한다고 한다. 무욕(無慾)의 헌신봉사가 그의 삶에는 큰 축복으로 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그녀는 전임 장사치 대통령의 잘못을 답습하며 재임기간 하루도 국민을 편하게 해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가 떠나니 세월호가 올라왔다는 말은 얼마나 의미심장한 국민들의 탄식인가.


그는 4년 동안에 얼굴의 주름살이 없어지고 훨씬 ‘젊어지고 예뻐져서’ 청와대를 나왔다. 거꾸로 나라는 정치·경제·외교·문화 할 것 없이 망가지고 갈라지고 삭막해져서 어디 한구석 성한 데가 없게 됐다. 나라와 국민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용모와 비선과의 희희낙낙에 노심초사했다는 이야기 밖에 달리 설명할 재료가 없다.
멋진 영화는 마지막 장면이 오래도록 뇌리에 남는다. 유명 소설은 지루한 전개에도 불구하고 결말에서 극적인 반전으로 독자에게 감명을 주는 경우가 많다. 경기 초반에 지지부진 했어도 9회말 공격에서 끝내기 홈런으로 승부를 결정짓는 짜릿한 맛에 ‘야구는 9회말’이라는 조어도 회자된다.
유종의 미(有終之美), 곧 끝이 좋다, 좋아야 한다는 말이다. 끝이 좋음으로 이전의 모든 것이 좋아질 수 있다는 뜻 또한 담겨있다.
 
사람에게 특히 끝이 좋아야 함은 물론이다. 젊어서 철없이 굴며 부화방탕했어도 참회하여 진중하고 고매한 모습으로 노후를 맞는다면 그의 삶은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아무리 천하를 호령한 영웅호걸이라 해도 말년이 볼썽 사나우면 삶 전체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손가락질 당하기 십상이다. 성경을 보아도 지혜로운 군주의 대명사인 솔로몬 왕은 하나님의 계율을 어기고 여자와 우상에 빠져 말년을 망치고 말았다. 그러나 살인자였던 모세는 출애굽의 민족적 지도자가 되었으며, ‘죄인 중의 괴수’라고 자평했던 바울은 위대한 사도가 되었다. 그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라고 인생을 돌아보며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고 유종의 아름다운 삶을 기쁨으로 확신했다.


‘헛되고 헛되도다’는 성경의 준엄한 가르침에도 아랑곳없이 최근 ‘변칙세습’으로 추한 말년을 보인 어느 대형교회 목회자의 모습은 많은 성도들과 한국교회에 실망을 안겨준다.
교회 밖 속세라고 다를 바 없다. 정치 사회의 큰 인물들이 부끄럽고 허망한 말로로 사람들에게 안겨주는 낙담과 원성은 국민들과 나라에 두고두고 오랜 상흔으로 남게 마련이다.


< 김종천 편집인 >


[칼럼] 토론형 대통령

● 칼럼 2017. 4. 4. 20:27 Posted by SisaHan

대통령은 잠시 국가를 경영하는 임시직 공무원이다. 그 임시직 공무원은 모든 것을 알 수도, 할 수도 없다. 따라서 그는 적재적소에 인물을 기용하는 인재경영, 다양한 의견을 바탕으로 정책을 실행하는 지식경영, 그리고 능력 있는 인재들이 제도를 통해 스스로 일하게 만드는 시스템 경영으로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 박근혜는 이 모두에서 철저히 실패했다. 그는 폐쇄적으로 국가를 경영하며, 민주주의의 열린 토론문화를 짓밟아 국정을 농단했다. 그래서 다음 대통령의 자격은 다시 소통이다. 소통의 방식은 토론이어야 한다. 토론의 문화는 심지어 조선에서도 찾을 수 있다.


세종은 훌륭한 지도자였다. 그에겐 정적이 제거된 기반 위에서 즉위할 수 있었던 천운이 따랐다. 하지만 천운만으론 그 재임 기간 중 펼쳐진 엄청난 편찬사업과 제도의 정비를 설명할 수 없다. 그 성공의 배경엔 군신 간의 토론문화와 백성에 대한 공감능력이 있다. 세종은 즉위 3일 만에 “내가 인물을 잘 알지 못하니, 신하들과 함께 의논하여 벼슬을 제수하겠다”고 물었다. 그는 언제나 신하들에게 발언 기회를 최대한 많이 주고 경청하는 에토스를 보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토론에 승리하는 첫 번째 요소로 에토스를 꼽았다. 에토스는 토론자의 품성을 드러내어 승리하게 한다.
세종은 침묵과 대세를 추종하는 신하들의 회의 분위기를 바꾸고 싶어 했다. 그는 임금의 옷이라도 붙잡아 간언하는 신하를 원했다. 그래야 정책의 잘못을 바로잡을 길이 생긴다. 국왕의 잘못을 바로잡으려다 삼족이 멸할지도 모른다는 신하들의 두려움을 깨기 위해, 그는 스스로 계단을 내려와 왕의 부족함을 노출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토론자와 청중 사이의 정서적 공감대로 삼은 파토스의 실천이다.


세종의 공감능력은 신분을 뛰어넘는다. 그는 1429년 <농사직설>을 편찬해 삼남 지방에 선진적인 농업기술을 보급했다. 그가 즉위 초기에 내린 권농교서는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는 유학의 래디컬함이 녹아 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1433년에는 <향약집성방>을 편찬해 조선의 향의약학을 정리했고, 1446년엔 최만리 등의 반론을 설득해 훈민정음을 반포했다. 이 사건들이 우리 문화의 경로를 바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토론의 마지막 요소에 로고스를 넣었다. 주장의 논리적 측면, 즉 가장 중요한 근거를 로고스가 담당한다. 세종의 로고스는 집현전 학자들로부터 나왔다. 집현전은 도서의 수집과 편찬, 국왕과의 토론 및 자문, 세자와 초계문신의 교육을 담당하는 싱크탱크였다.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에게 실질적인 권한과 연구의 자유를 주어 다양한 정책을 토론에 부쳤다. 정치 엘리트로 성장한 집현전 학자들은 세종과 함께 22분야 350여종의 책을 편찬했고, 그 편찬의 결과는 조선의 궤도를 수정한다.


대통령은 지식경영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젊고 새로운 싱크탱크와 함께해야 한다. 혼자 결정하려 해서는 안 된다. 모든 정책은 토론으로 정교해져야 하고, 모든 일의 배후엔 신음하는 사람들에 공감하는 정서가 배어 있어야 한다. 대본이 없으면 대중 앞에 서지도 못했던 대통령, 자신 때문에 시위 도중 사망한 국민에게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않는 그런 대통령을 탄핵한 우리 국민은, 끊임없는 토론과 정서의 공감대로 무장한 대통령을 원한다. 행정수도의 이름은 세종이다. 적어도 다음 대통령은 세종보다 나은 시대에 산다. 그래도 더 나은 지도자가 되지 못한다면, 그건 권력을 지닌 그의 잘못이다.

< 김우재 - 초파리 유전학자 >


강원도 바닷가 도시에 갔다가 교통사고를 낸 적이 있다. 한가위 연휴가 시작되기 하루 전날이었는데 고속도로가 막히기 전에 빨리 돌아와야겠다고 서두르다 보니 정말로 눈에 뭐가 씌었는지 도심 한복판 비보호 교차로에서 좌회전을 할 때, 왼편에서 달려오는 차가 보이지 않았다. 정면충돌하는가 싶은 순간, 두 차 모두 급히 방향을 바꿔 꽁무니 부분이 서로 부딪치며 한 바퀴 돌았다. 길 건너편에 차를 세우고 달려가서 잘못했노라고, 모두 내 잘못이라고 백배사죄했다.


차 뒷좌석에 앉은 ‘대쪽 같은’ 인상의 남자가 분노한 얼굴로, 그러나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 “내가 경찰서장이오.” 세상에… 하고많은 차들 중에서 그 도시 경찰서장의 차를 들이받은 것이다. “젊은 사람인 줄 알았더니, 나이가 꽤 드신 양반이네.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오?” 그렇게 통성명이 시작됐다.
알고 보니, 참여정부 시절 한국 경찰에 인권 개념을 확립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았고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당하다가 숨진 경찰청 건물을 경찰인권센터로 자리 잡게 하는 데에 지대한 공을 세운 사람이었다.
그 얼마 뒤 총경으로 퇴직하고 경찰 개혁을 강도 높게 주장하며 활동하는 모습이 언론에 간간이 보였다. 라디오 방송 인터뷰에서 “다시 경찰로 돌아가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무엇입니까?”라는 진행자 질문에 “경찰노조를 만들고 싶습니다.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지만 많은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라고 답하는 것을 듣고 노동아카데미 강사로 초빙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인권연대 오창익 사무국장이 중간에서 다리를 놓아 강의가 성사된 날은 2016년 3월 말이었다. 경찰 총경 출신 강사가 강의 중에 타이타닉호 사건 영상들을 보여주며 말했다. “타이타닉호 사건입니다. 전세계 사람들이 이 사건에 대해 100년 넘도록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놀라울 정도로 닮은 세월호 사건 영상들을 보여주며 말했다. “세월호 사건입니다. 300명 넘는 사람들이 죽고 2년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얘기를 못 해야 합니까? 더 해야죠. 앞으로 100년 동안은 해야죠…” 마지막 말은 삼켜져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세월호가 인양돼 그 몸체를 서서히 드러내는 장면을 지켜보며 사람들마다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나로서는 그 느낌을 적당한 언어로 표현할 자신이 없다. 다만 한 가지, 경찰 총경 출신인 시민도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세월호 사건이다.
서울대병원이 파업했을 때, 오랜만에 만난 간호사가 말했다. “어제 우리 남편이 하 선생님 만났다고 집에 와서 자랑하던데요.” 나는 ‘어제 만난 사람이 누구였더라…’ 잠시 생각을 해본 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혹시 남편이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가족 활동을 하는….”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틀리지 않는다. “네, 맞아요.” 오랜만의 만남이 주는 즐거움은 이미 훌쩍 날아가 버리고,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가 금세 우리를 감쌌다. “그동안… 그런 일을 겪었군요.” “네, 그래서 휴직했던 거예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 나온 그이가 말했다. “제가 간호사라서요… 위생관념이 철저하니까…. 교대근무 마치고 집에 가면… 매일 가습기를 깨끗이 씻어서… 그걸 열심히 넣어 주었어요….” 마지막 말을 할 때쯤 얼굴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닫혀서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렇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가족들은 자신들이 가해자라는 생각 때문에 그동안 더욱 괴로웠던 거다.
장기 투쟁을 해온 노동자들이 높은 곳에 올라가 농성을 할 때가 있다. 언론이 ‘단독’ 표기를 붙여 특종 보도를 해 주기도 한다. 중요한 투쟁이고 힘을 모아 반드시 이겨야 하는 싸움이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들으며 “우리는 올라갈 굴뚝도 없어요”라고 말하는 노동자들이 있다. 그렇게 말하는 노동자도 길바닥에서 몇 년째 싸우고 있는 사람이다. 누군가 그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세월호 사건의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 우리가 온 힘을 모아 반드시 규명해야 마땅한 일이다. 언론이 세월호 사건에 주목하고 있을 때, 행여 그것조차 부러워하는 사람은 없는지,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가족들이 혹시 그런 사람은 아닌지… 살펴보자. 누군가 그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 하종강 - 성공회대 교수 >


[1500자 칼럼] 나라 사랑

● 칼럼 2017. 3. 28. 20:12 Posted by SisaHan

“우리나라 반만년 역사에 빛나는 애국자들은 누구일까?” 이런 것들은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수 없이 던져보던 질문들이다. 내 대답은 자라면서 바뀌었다. 초등학교 때는 살수대첩의 을지문덕, 안시성 싸움의 연개소문, 한산도 대첩의 이순신, 하얼빈 기차역에서 이등박문을 쏜 안중근 같은, 외부세력에 대항해서 싸운 사람들이 전부였다. 침입자에 대항해서 싸움 한번 안해 본 사람을 어떻게 애국자로 부를 수 있느냐는 것이 나의 애국자에 대한 안목이었다. 나이가 들면서부터 군인 투성이였던 애국자 집단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창의적이고 문화,예술적 업적을 보인 사람들로 슬며시 바뀌었다. 당시로써는 혁신적인 생각을 담은 책을 많이 쓴 다산 정약용, 종두법을 발명한 지석영, 측우기나 해시계 등 여러가지 과학적 기구를 발명한 장영실,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 화가 단원 김홍도, 음악가 박연 등 백성들의 생활에 예술적 감각을 불어넣은 사람들도 애국자 집단에 들어갔다.

이들 중에 가장 위대한 애국자는 누구일까? 초등학교 2,3학년 학생들이 물어볼 한 질문이다. 내 생각으로는 이 나라 억조창생들이 자기 생각을 글로 표현할 수 있는 문자를 만들어 준 세종대왕을 꼽는다. 내가 지금 이렇게 세종에 관한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알고 보면 그의 덕이다. 그러나 세종은 단순히 지금 우리가 쓰고있는 한글을 만드신 어른으로만 기억해서는 안된다. 그는 우리민족의 역사 전체를 통털어 가장 찬란하고 화려한 민족문화를 꽃피웠을 뿐 아니라 세상을 다스리는 데 후세에 모범이 되는 태평성대를 이룩한 성군이시다. 현대적 감각으로 봐도 크게 빗나가지 않는, 참으로 멋지게 나라를 다스린 임금. 그는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전반에 걸친 눈부신 업적 뿐 아니라 백성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 또한 지극하였다. 암군은 간신배들을 싸고 돌고 현군은 현명한 신하와 가깝다는 옛말처럼 세종 주위에는 황희나 맹사성 같은 명신들은 물론 성삼문, 신숙주, 정인지 같은 당대를 호령하던 큰 학자들이 온 힘과 정성을 다하여 그를 보필하였다.

고등학교 때 학교 도서관에서 춘원 이광수의 <단종애사>를 빌려와서 밤 늦도록 읽은 적이 있다. 한밤중에 세종대왕이 집현전에 들려 책을 읽다가 잠이 든 성삼문, 신숙주에게 추울세라 가만히 이불을 덮어주던 아버지 같은 세종대왕의 따뜻한 부정을 읽던 생각이 난다. 이팔청춘에 읽은 소설 장면을 60년 세월이 넘게 흐른 오늘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은 한창 사회적으로 민감하기 시작한 나이에 진정한 통치자는 이런 사람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깊이 박혔기 때문이지 싶다.
성군 세종이지만 생전 두 며느리가 쫓겨나는 것을 보는 비극을 겪었다. 그런 비극이야 세월이 가고 다른 며느리가 들어오면 시나브로 잊혀지는 일. 비극 중의 비극은 세종이 죽고 나서 자식들간에 벌어진 골육상쟁이다. 즉 세종이 낳은 자식 중에 둘째 아들 수양대군이 12나이에 왕위에 오른 어린 조카 단종을 임금자리에서 내쫓아 궁산 벽지로 귀양 보냈다가 결국에는 그를 죽이고 자기 동생도 죽여버린 비극이다.

애국심은 무엇인가? 내 생각으로는 내가 태어난 나라의 산천과 거기에 보금자리를 틀고 사는 사람들, 그 나라의 문화와 예술 모든 것에 대한 총체적인 사랑이요 공경심이다. 나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도 고향에 대한 사랑의 연장으로 보는 버릇이 있다. 고향을 잊을래야 잊어버릴 수가 없는 곳. 어느 시조시인의 말처럼 고향이란 먼저 간 우리 선조와 우리세대가 함께 살고있는 곳이다. 우리 선조들은 먼저 갔어도 우리가 사는 꼴을 훤히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
우리가 현충원에 가서 선열들의 묘비 앞에서 묵념을 드리는 것은 선열들이 우리를 훤히 내려다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이다. 또한 그 자리에서 우리는 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굳게 다짐한다. 이 다짐이 곧 나라사랑의 노른자위가 아닐까.

< 이동렬 - 웨스턴 온타리오대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