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은 자신과 관련된 일에선 거의 예외가 없는 듯하다. 17일 검찰의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사건’ 수사 결과 발표는 십수년 보아온 모습 그대로다.
“우병우 전 민정수석과 전화 주고받았던 고위간부들 다 수사했나?” “궁금해하는 것 싹 다 조사했다.”
기자들이 물은 것은 우 전 수석이 검찰 수사 대상이던 동안에도 매우 자주 통화를 했던 검찰과 법무부 수뇌들을 상대로 수사 개입 여부 등을 조사했느냐는 것이었다. ‘다 조사했다’는 수사 책임자는 바로 며칠 전 같은 질문에 “통화를 한 게 무슨 죄가 되나”라고 말했다. 제대로 조사했을 것 같지 않다. 실제로 공소장에는 이 부분이 아예 없다.
빠진 것은 또 있다. 검찰은 우 전 수석이 세월호 수사팀에 “청와대와 해경 간 전화통화 녹음파일을 꼭 압수해야 하겠는가요”라고 ‘압박’한 사실을 확인하고도 ‘결국 압수수색이 이뤄졌다’는 이유로 직권남용죄를 적용하지 않았다. 대법원 판례가 근거라지만, 침해될 권리 자체가 없었던 판례 사건은 이번과 좀 다르다. 직권남용은 그 때문에 결과가 어그러지지 않았더라도 그런 위험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법리도 있는 터다.


어떤 칼을, 언제, 얼마나 들이대느냐에 따라 결과가 판이한 게 검찰의 일이라고 한다. 우 전 수석에 대해선 검찰이 압수수색과 소환 등 수사 속도를 늦추고, 수사 강도도 조절했다는 비판이 있다. 헐겁고 소략한 영장을 재청구하고, 기각된 뒤에는 보완조사도 없이 그대로 불구속 기소를 한 것도 ‘의도’를 의심받을 만하다.
‘자기 식구 봐주기’ 사례는 기왕에도 허다하다. 2005년 ‘삼성 엑스파일 사건’에서 검찰은 ‘떡값 검사’로 지목된 검찰 간부들을 대면조사도 없이 “당사자들이 부인한다”며 무혐의 처리했다. 금품제공 논의가 담긴 옛 국가안전기획부 도청 파일은 아예 조사하지도 않았다. 소극적 수사의 뻔한 결론이다.
1999년 대전 법조비리 사건은 검사 25명이 변호사한테 돈을 받은 걸로 드러났지만 사표 수리와 징계로 마무리됐다. 진경준 검사장 ‘주식 대박’ 사건도 의혹 제기 석달이 넘도록 이런저런 이유로 수사나 감찰을 미뤘다. 진행 중인 재판에서도 검찰의 유죄 입증 의지가 약하다는 의심이 나온다. 비리 단죄에 써야 할 수사·법률 지식을 ‘봐주기’에 교묘하게 동원한다는 말이 나올 만도 하다.


왜 이런 일이 계속될까. 특정 집단이 자신들의 이익을 보편적 이익보다 우선시하는 행동이나 태도를 행정학에서는 특수주의(Particularism)라고 한다. 사법시험과 사법연수원으로 만들어진 법조계급의 법 독점이 ‘우리 사람’에게 특별한 배려를 요구하는 법문화를 만들었다는 분석도 있다. 검찰은 다른 어떤 조직보다 그런 성향이 강하다. 검찰의 조직문화에서는 우 전 수석의 행동이 ‘그럴 수도 있는 일’로 이해될 수 있다. 실제로도 검찰 안에선 “민정수석의 일이 으레 그렇지 않으냐”는 말이 나온다. 비리 검사에 대해 ‘사표만으로도 처벌’이라거나 ‘변호사로 먹고살게는 해줘야지’라고 말하는 것도 특수주의적 법문화에서 비롯된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점해 뜻대로 휘두르는 ‘자웅동체’ 검찰에는 그런 ‘배려’가 쉬울 것이다.
검찰은 우 전 수석 처리에 대한 여론의 비판을 감수하겠다는 태도라고 한다. 겸허함보다는 오만으로 여길 사람이 많겠다. 이런 일이 상습적으로 벌어지지 않도록 하려면 근원적인 처방이 있어야 한다. 자기치유 능력을 잃은 검찰의 무소불위 권력에 제동을 거는 것이 답이다. 기소권과 수사권 분리,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등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 여현호 -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


19대 대통령 선거의 공식 선거운동이 17일 시작됐다. 후보들은 앞으로 각종 유세와 텔레비전 토론 등을 통해 유권자들에게 마지막 선택을 호소한다. 대통령 탄핵에서 비롯된 이번 대선은 과거와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보수 쪽 유력 후보 없이 야야 대결 구도로 짜이면서 지역 구도가 희미해지고 보혁 이념 갈등도 약화됐다. 무엇보다 이번 대선은 ‘촛불 대선’이란 특징을 띠고 있다. 연인원 1700만명이 참여해 한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꿀 것을 주문한 촛불시위의 연장선상에 이번 대선이 자리하고 있다.


선거운동 첫날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동영상 메시지로 대선 승리 각오를 밝힌 뒤 아침에 대구를 찾았고,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인천항 해상교통관제센터를 찾았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를 제외한 문·안 후보, 그리고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와 심상정 정의당 후보는 안산 합동분향소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3주기 기억식’에 나란히 참석했다.
그동안 대선전이 유력 주자들을 중심으로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촛불’은 간데없고 권력 획득 게임 양상으로 변질됐다는 지적이 제기돼왔다. 실제로 선거전은 시민들이 제기했던 정경유착 근절, 검찰 개혁, 재벌 개혁, 방송 개혁, 격차 해소 등 촛불 이슈들은 사라지고 정치인들이 표를 얻기 위해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모양새로 흘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사드 배치 문제에서 한발짝씩 물러나는 듯한 모습도 보였다. 재벌 개혁이나 최저임금 문제 등 절박한 촛불 이슈들에 대한 정책토론은 찾아보기 어렵고 네거티브가 이어졌다.


시민이 직접 행동으로 참여하는 집회와, 유권자로서 투표하는 선거는 서로 다른 민주주의의 대표적 제도다. 선거 때가 되면 시민들이 제기했던 여러 이슈들은 특정 후보와 주요 공약들을 중심으로 수렴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시민들의 헌신으로 쟁취한 촛불 대선이, 보수 표를 의식해 주요 후보들이 우향우 경쟁을 벌이고 상호비방하면서 적대감만 쌓아가는 식으로 흘러서는 곤란하다. 후보들은 시민들이 제기한 개혁과제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을지, 어떻게 민주개혁세력의 힘을 모아 차기 정부에서 개혁과제를 달성할 수 있을지 평가받아 촛불의 염원을 실현해야 한다.


탄핵에 그치지 않고 인신구속까지 되어 인간적으로는 참 안된 일이지만, 생각해보면 국민을 그만큼 괴롭히고 속여왔기에 당연한 귀결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정말 한국민들을 지독히도 힘들게 하고 심한 스트레스를 주었다. 특히 지난 6개월여 동안은 과오가 양파껍질처럼 증빙되는 데도 질기게 버티면서 2천만에 가까운 시민을 길거리와 차가운 땅바닥에 내몰아 촛불을 들고 목이 터져라 외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는 지금도 전혀 반성은커녕 내가 뭘 잘못했느냐는 이기와 오만의 태도를 바꾸지 않고 있다. 그의 자기 합리화 고집은 가히 알아 줄만 하다.


그의 그런 무지와 고집불통으로 인해 가장 심한 고통을 당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따져보면 거기에 공평과 인과응보는 없다는 역설을 떠올린다. 상식적으로는 그를 대통령으로 뽑았던 사람들이 잘못 선택한 ‘죄값’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대통령으로 그를 원하고 표를 주었던 많은 사람들은 실상 거리에서 촛불을 들지도 않았고, 그의 온갖 적폐를 규탄하려고도 않았으며 지금도 그에게 동정을 보내면서 탄핵을 원망하기까지 한다. 그들은 지지하는 정치인이 추락하는 것을 보는 안타까움은 있었을지언정, 혹한의 거리에서 함성을 지르는 심신의 고통은 겪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아무런 애정도, 표를 준 적도 없고 그를 선택하지 않았던 국민들이 ‘표를 안주었던 죄’로 엄혹한 고통을 당한 게 아닌가.
이제 20여일 앞으로 다가온 대선 국면에서도 그런 아이러니는 계속되고 있으니, 세상만사가 다 아이러니의 연속인 것일까. 이번 대선은 박근혜에게 표를 주지 않았던 다수의 힘으로 쟁취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비박(非朴)’과 ‘반박(反朴)’세력 및 그를 택하지 않았던 국민들이 원하는 후보와 비전이 득세를 해야 옳다. 다시 말하면, 적폐세력에게 국정을 맡겨 나라를 망친 ‘원죄’가 있는 사람들은 사죄하고 자숙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당한 것이다.


그런데 요사이 선거판이 그런가. 가령 탄핵된 지도자를 배출하고 엄호해 온 ‘보수의 아성’이라는 지역의 사람들은 한때 “잘 못 뽑았다”고 반성하는 듯 하더니, 요즘은 예전의 기개가 되살아나서 후보들에게 압박을 가하고 있는 것을 본다. 일테면 “보수 후보들이 지리멸렬 하니 차악(次惡)후보에게 몰아주자”라느니, “누구를 택하면 절반의 성공”이라는 말로 지지를 공개적으로 유도한다. 최근 여론 흐름을 보아도 지역민들 역시 그런 주장에 상당히 동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바탕에는 지역 이기와 보수본색의 패거리 의식이 작용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국정농단의 원인을 제공한 묻지마 투표의 잘못을 어느 새 잊어가면서, 인물과 정책을 따져 나라의 장래를 맡겨야겠다는 현명한 표심은 다시금 희박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표심의 회귀를 간파한 일부 몰지각한 정치인은 재빨리 변신하여 영합하기에 바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목소리를 바꾸고 헤어스타일과 표정을 바꾸고, 아예 공약을 언제 그랬냐는 듯 바꾸고, 당 정책마저 변경한다. 그러면서 현실 정치감각이 좋다느니, 학습능력이 뛰어나다느니 미사여구로 포장하며 유권자들에게 다가간다. 아예 도우미가 되어 부추기는 영혼없는 저널리스트와 미디어의 꼴불견도 횡행한다.


우리 한국민들이 왜 고통을 당하고 나라가 망가진 것인가. 장사꾼 기업인 이명박과 함량미달 박근혜를 미화하고 포장한 속임수에 다수 국민이 아무 생각없이 빠져들어 표를 준 때문임을 아직도 깨닫지 못했단 말인가. 알고도 또 그런 우를 범하는 어리석은 백성들인가. 대통령 한사람 잘못 뽑은 죄과로 국민의 고통과 국가적 해악이 얼마나 큰지를 엊그제 생생히 보았는데, 또 다시 달콤한 쇼와 변신으로 속이려는 후보들에게 표를 도둑맞을 작정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정치가 쇼여서는 안된다. 영화배우나 성우 같은, 혹은 성인(聖人) 대통령을 뽑는 것도 아니다. 잠시의 변신과 약속을 뒤집어 표를 얻고 난 다음 원래로 돌아가 버리는 쇼맨들을 한 두번 보았던가.
고전적인 이야기지만, 늘 되새겨야 한다. 그 사람이 걸어 온 삶과 인품을 보고, 정책과 소신과 철학을 따져보고, 그 주변의 인물들을 살펴보면, 최소한 이전의 나라 망친 두 대통령 같은 지도자는 뽑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 김종천 편집인 >


봄날을 맞아 성묘 갔다가 문중 어르신들과 식사 자리를 가졌다. 박정희 대통령 덕에 보릿고개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분들인지라 그 딸에게 투표하셨을 분들이다. 탄핵 이야기를 꺼내니 겸연쩍어하시며 아버지를 가까이서 보고 제대로 배웠을 거라 믿고 뽑아 줬는데 측근 관리도 제대로 못 하는 고집 센 여자였다며 혀를 차신다. 다음 대선에 누구를 뽑을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지만 한 특정 후보만은 뽑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유를 물으니 양반 동네 특유의 어법으로 “그 사람, 이미 대통령 행세한다잖나?”라신다. 누가 그러는데 탄핵 정국에 자신이 대통령이 다 된 듯 팽목항을 찾아갔고 이런저런 위세를 부렸다는 것이다. 세월호 희생자 참배를 가려면 천안함 희생자에 대해 충분히 추모해야 한다면서, 요즘 문제 되고 있는 북한 핵무기도 그 동네가 돈을 퍼주어 만들어진 것이라고, 근거없는 종북론까지 들먹이며 이야기 한다. 하지만 어르신들은 아무려나 누가 되든 선거를 할수록 노인들은 더 잘 먹고 잘 살게 될 것이라며 너털웃음을 웃으셨다.


어르신들 앞에서 말을 아끼던 문중 ‘청년’과 회식 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르신들이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이런저런 폭탄 정보를 받기도 하면서 요즘 들어 더 ‘빨갱이’ 운운하신다는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에 머물기로 한 이 ‘청년’은 실은 농업정책과 협동조합운동을 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다 살피고 있는 40대 후반 장년인데 최근 노인들의 보수화와 인구 추이를 보면 선거제도에 의구심이 든다고 한다. 이 지역 인구 비율은 노인 일곱 명 사망에 아기 한 명이 태어나는 꼴이라고 했다. 투표일이면 양로원이나 요양원에 누군가가 모시러 갈 것이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잘 모르는 분들은 투표장에 가면서 누구를 찍을지 물어보실 것이다. 이분들이 ‘신성한 국민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인구 불균형 상태에서 대의민주주의를 이야기하기란 힘들 것이다.
광화문의 시민혁명을 경험한 국민들 중에 이번 선거에 큰 기대를 거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반공과 용공, 전라도와 경상도에 이어 세대 대립에 이른 선거판에 너무 안달복달하지 말자고 말하고 싶다. 선거라는 것이 직업전문인들이 주도하는 흥행쇼가 되어버린 지 꽤 되었고 이는 한국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2016년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투표와 트럼프를 당선시킨 미국 대통령 선거에 이어 현재 가장 드라마틱한 난장판을 벌이고 있는 프랑스 대선 정국을 보면 우리나라 상황은 실은 양호한 편에 속한다.


2002년 프랑스 대선 당시의 슬로건이 “파시스트에게 투표할 바에는 차라리 사기꾼에게 투표하라”였다는데 대의제로는 민주주의를 이루어낼 수 없다는 랑시에르의 선언은 이런 현실을 보면서 나온 결론일 것이다. 랑시에르는 애초부터 대의제는 과도제이지 민주제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대의제는 왕권을 붕괴시키고 새 질서를 만들고자 했던 ‘계몽된 지주’들이 뜻을 모으는 제도였다는 것이다. 이제 그들은 국경을 자유롭게 이동하는 글로벌 초국민이 되어 증발해버렸거나 선거 뒷돈을 댈 뿐이다. 선거 무대는 선거철에 잠시 1인 1표를 행사하는 국민으로서 자신의 화를 풀거나 취향을 확인하거나 위로를 받기 위한 자리가 되었다. 국민이라는 자부심 외에 가진 것이 별로 없는 이들이 브렉시트를 결정했고 트럼프를 지지했으며 현재의 프랑스 대선 정국을 스펙터클한 무대로 만들어내고 있다.
선거판에 너무 큰 기대를 걸면 안 된다. 광화문 광장에 울려 퍼진 콜드플레이의 ‘비바 라 비다’ 노래는 쫓겨난 왕의 독백이지만 실은 국민주권이 사라진 대의제의 붕괴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고민이 깊었던 랑시에르는 ‘위임’과 ‘대표’를 구분해야 한다면서 추첨제를 제안하였고 동시에 광범위한 광장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평소에 ‘시민’으로 불리지 못했던 이들이 스스로 시민권을 획득한 영토가 바로 광화문이었다는 이택광의 말처럼 광장의 영토는 새로운 국민들을 탄생시킨다.


강력한 광화문 광장 운동의 기억을 가진 시민들은 무혈혁명에 성공했다고 자화자찬할 때가 아니다. 광화문에 모이는 순간 새로 태어난 시민들은 그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정치시스템을 만들어내야 한다. 모욕과 배신의 정치판은 주로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들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수평적 글로벌 연결망으로 이어진 지방분권의 역사를 써가야 할 때다. 그리고 언제든 다시 광장에 모여 시민의 힘으로 중앙집권 권력의 아우라를 벗겨낼 수 있기를 바란다.

< 조한혜정 - 문화인류학자, 연대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