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지금 그가 왜 필요한가

● 칼럼 2017. 6. 28. 13:28 Posted by SisaHan

개인적으로 대한민국 외교부에 호의적이지 않다.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외교전에서도 그렇지만, 국외에서 자국민을 보호하는 일에 무능하고 무정한 외교부의 행태 때문에 억장이 무너졌던 적이 많다. 그런 이유로 7년 전 바로 이 ‘사람그물’ 칼럼에서 나는 이렇게 썼다.
“외무고시는 고시계의 꽃으로 불릴 만큼 최정예 엘리트를 선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렇게 선발·육성된 외교관들 스스로 제일 중요하게 꼽는 능력은 조국애와 인류애다. 하지만 순혈주의로 상징되는 자폐적 내부소통이 관성으로 굳어진 탓에 외교관들이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일에 대한 개념이 거의 상실된 것처럼 국민의 눈에는 비친다.”
자기들끼리 통속에서만 주고받는 게 몸에 배어 있으니 외교전도, 자국민 보호도 잘될 리 없다. 그럼에도 지극히 전문적이고 폐쇄적이어서 당사자들이 나서지 않는 한 검찰이나 국정원만큼 개혁이 어려운 집단이었다. 그런데 드디어 기회가 왔다. 강경화라는 사람이 외교부 장관 후보자가 된 것이다.


강경화는 비고시, 비서울대 출신에 사상 첫 여성 외교부 장관 후보자다. 오랫동안 국외에서 근무해 국내 인맥은 거의 없다. 이른바 약한 고리의 전형이다. 정치적으로 곤경에 처해도 편들어줄 자기편이 없다. 예상대로 강경화는 총력 낙마 대상으로 집중포화를 맞았다. 청문회 대상인 다른 후보자들에 비해 흠결이 더 중대해서가 아니라 약한 고리라서 그렇다. 야비하고 잔인한 관행이다. 결국 야3당은 강 후보자를 부적격자라고 몰아세우며 청문회 보고서를 채택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와 여성단체 등 시민 2만명이 강 후보자 지지 선언을 했다. 더 의미있는 지지 선언은 외교부 내부에서 나왔다. 전직 외교부 장관 10명이 강 후보자가 누구보다 외교부 장관 적임자라고 지지 의사를 밝힌 것이다. 놀랍게도 외교부 공무원노조는 강 후보자에 대한 공식적인 지지를 선언했다. 노조는 외교부 내 폐쇄적인 조직문화와 순혈주의 타파를 언급하며 지금이야말로 외교 패러다임과 문화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필요한데 그 적임자가 강경화 후보자라고 논평했다. 외교부 안팎과 위아래로부터 이토록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장관 후보자가 있었던가. 없다. 일부 내부 구성원들만 감지하던 위기감이 ‘강경화’를 방아쇠 삼아 터져 나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이제 외교부가 자기들만의 통을 부수고 세상 밖으로 나오겠다는 성찰과 개혁의 선언으로 읽힌다.


5대 흠결 인사 배제 원칙으로 인한 논란은 문재인 정부에서 정치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다. 그 희생양이 강경화가 될 이유가 없다. 시대정신이나 상징성으로 본다면 다른 후보자를 포기하더라도 강경화를 지키는 게 맞다. 약한 고리 동정하는 식이 아니라 실제 능력 면에서도, 상징적인 면에서도 그렇다. 강경화에 대한 안팎의 지지 선언과 지지 서명이 그걸 증명한다. 여론도 강경화 임명 찬성이 62%(12일 발표된 리얼미터 조사)로 반대 의견의 2배가 넘는다.
강 후보자 지명 철회를 고려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정한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은 무려 89.4%다. 요즘 국민 유행어인 ‘우리이니 하고 싶은 거 다 해’라는 경쾌한 표현 속엔 그간 우리가 목말라했던 나라다운 나라에 대한 순정한 염원이 담겨 있다. 대통령을 향한 전무후무한 국정지지율은 혹시라도 강경화 지명 철회 같은 과거의 악몽이 되풀이될까봐 압력성 뒷배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방패연처럼 떠오르는 현상이다. 강경화는 여러 측면에서 새날을 여는 방아쇠다. 꼭 외교부 장관에 임명되어야 한다. ‘강경화’가 옳다.

< 이명수 - 심리기획자 >


1987년 폭압적인 군부독재에 맞서 도도한 민주화의 길을 열어젖힌 6월항쟁이 10일로 30돌을 맞았다.
30년 전 오늘, 전국 주요 도시의 중심가에 나온 수백만 시민·학생들은 맨주먹으로 전투경찰에 맞서 싸우며 한국 민주주의의 이정표를 세웠다. 그러나 민주화의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6월항쟁 이후에도 국민 다수의 선택으로 온전한 민주정부가 들어선 건 10년이 더 지난 1997년 12월 대선을 통해서였다. 김대중·노무현의 민주정권 10년 이후엔 다시 반동이 찾아왔다.


반동의 정점은 사상 유례없는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었다. 6월항쟁 정신은 퇴행적인 박근혜 정권에 맞선 촛불시민혁명으로 타올랐고, 5월9일 새로운 민주정부의 탄생으로 열매를 맺었다. “박종철, 이한열 그런 선배들의 투쟁이 결코 사그라든 게 아니라, 씨앗이 되어 촛불집회로 되살아난 게 아닐까, 그런 자부심이 있다”는 어느 6월항쟁 세대의 회고처럼, 지난해 광장을 수놓은 촛불혁명은 30년 전의 6월항쟁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
한 세대가 걸렸지만, 길게 보면 지나온 질곡의 과정이 꼭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6월항쟁 주역들이 주축이 된 ‘민주정부’가 지금 성공적으로 첫발을 떼고 있는 건 의미심장하다. 숱한 굴곡에도 불구하고 역사가 전진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징표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 6월항쟁의 기억을 뛰어넘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야 할 때다. 문재인 민주정부의 출범은 그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6월항쟁의 현대사적 의미는 효율과 차별로 상징되는 ‘박정희 개발독재 시대’를 뛰어넘어 인권과 탈냉전, 시민사회, 시장경제라는 ‘민주화 시대’로 우리 사회가 접어들었다는 데 있었다. 1987년 6월항쟁으로 개막한 정치·사회 체제를 흔히 ‘87년 체제’라고 한다.‘87년 체제’는 민주주의 진전 등 수많은 긍정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국민을 외면한 정치와 제왕적 대통령제, 경제 양극화의 심화, 진영논리와 이념갈등의 격화 등 짙은 그늘을 남겼다.


지난 겨울 촛불시민혁명은 역사퇴행에 맞선 ‘민주주의 회복 투쟁’인 동시에 87년 체제의 한계를 극복하자는 외침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6월항쟁 정신은 촛불혁명과 뒤이은 민주정부의 탄생을 통해 비로소 완전히 구현될 수 있는 기회를 맞았다고 할 수 있다. 변화와 개혁은 단지 국회에서 논의하는 개헌 작업만으론 이뤄질 수 없다. 정부의 의지와 함께 시민의 적극적 참여와 감시가 6월항쟁과 촛불혁명의 가치를 성공적으로 실현해내는 데 긴요할 것이다.


[1500자 칼럼] 흐르는 강물

● 칼럼 2017. 6. 6. 19:50 Posted by SisaHan

요즘 소위 말하는 선진국이라는 나라에서는 가장 강조하는 것이 있다. ‘생명존중’과 ‘자연보호’, 그 이전까지만 해도 산업화와 경제발전을 위해 쉽게 무시되던 일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얼마만큼 살게 되어 그런지, 아니면 마구 훼손한 자연이 그들에게 얼마만한 피해를 가져왔는지 깨달았기 때문일까? 결국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이다. 무조건 개발이 우선인 시대를 지나 이제는 자연을 존중해야 함을, 자연은 인간의 소모품이 아님을, 나가서는 자연의 힘을 깨닫고 있다. 그리고 자연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만의 것이 아니라 잘 보존하여 후세에 물려주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동안 인간은 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자연환경을 파괴해 왔는가? 그 결과로 우리는 엄청난 기후변화, 지구의 온난화 같은 자연재앙을 맞고 있다. 쓰나미나 지진 같은 자연재앙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인가?

요즘 한국에서는 정권이 바뀌어 여러 가지 새로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다시 불거진 4대강 사업 문제다. ‘단군 이래 최대의 토목공사’라고 불린 이 사업은 그 동안 여러가지 정치적인 이유에 밀려 자세한 내막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에는 무엇 보다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말로는 4대강 살리기라 했지만 오히려 4대강 죽이기였다면 정말 문제가 심각하다. 그 동안 부분적으로 드러난 사실을 볼 때, 22조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돈을 투자한 사업이 애초 목적과는 달리, 또는 정부에서 발표한 말과는 달리, 우리 국토의 젖줄이나 다름없는 4대강을 죽이고 있다면, 더 늦기 전에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정치적인 보복이라고 말하기에는 문제가 너무 심각하다.

물고기들은 어떤 물에 사느냐로 종류가 다르다. 깨끗한 물에 사는 물고기들은 물이 오염 되고 더러워지면, 그 이전에 그곳을 떠나거나 바뀐 환경에 적응을 못해 폐사하기 마련이다. 오염되어 가는 물속에 다른 종류의 물고기가 사는 것을 떠나 큰 빛 이끼벌레, 나가서는 실지렁이가 산다면 오염은 심각한 것이다. 인위적으로 쌓아 올려 흐르는 물을 막은 보 때문에 강물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낙동강이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강마다 길이, 넓이, 형태가 다르겠지만, 다른 강에는 두 세 개의 보를 설치했지만 낙동강에는 8개의 보를 설치했다. 그런 까닭에 다른 강에 비해 더 심각한 녹조현상을 보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굳이 환경이나 지리연구의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말한다. “강은 흘러야 한다.” 나도 전문가는 아니지만 이 말을 믿는다. 강이 흐르지 못하고 고이면, 호수가 되고.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여름이면 녹조로 덮인 낙동강 물을 인근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식수로 사용한다고 한다. 물론 정수과정을 거쳐 소독을 한다지만, 그 물이 정말 사람이 마시기 안전한 것인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

물의 등급이 점점 떨어져 언젠가는 농업용수로 사용하기에도 부적절할 날이 올지 모른다. 강은 우리 국토의 젖줄이다. 중요한 생명선인데 날로 죽어가고 있는 것을 우리는 두 손 놓고 보아야 하는가? 4대강 사업에 대한 감사를 정치보복이라 보기에 앞서, 정말 우리의 강이 죽어가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면, 하루라도 빨리 진실을 밝혀 대응책을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이는 한 정권의 문제가 아니다. 나라의 미래가 달린 문제다. 이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는 오염되지 않은 강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책임이 있지 않은가? 죽어가는 강을, 죽은 강을 물려줄 수는 없다.

 지난 해 여름 녹조로 덥힌 낙동강의 사진을 본 것은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유독 여름 기온이 높았던 탓이라 생각도 해보지만 다시 보고 싶지 않다. 더욱이 보를 쌓아 물을 저장하는 것이 정말 홍수와 가뭄을 예방하는 것인지 조차 의심스러운 이 시점이다.
옛날처럼 강이 산 구비구비를 돌아 흐르고, 제 물빛을 찾고, 강가에 반짝이는 금빛 모래를 보고 싶은 것은 나의 값싼 감정일까?

<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


[한마당] 호사다마가 세상사다

● 칼럼 2017. 6. 6. 19:48 Posted by SisaHan

스포츠가 재미있고 매력적인 이유가 여럿 있겠지만, 인생살이와 비슷한 파란만장과 예측불허의 묘미가 가장 으뜸이 아닌가 싶다. 거기에 정치 드라마와 비슷한 반전과 스릴도 있다.
가령 축구를 보면, 많은 선수들은 넘어지고 부딪히고 격한 몸싸움과 문전 돌파에 이어 회심의 일격으로 골문을 뜷어 환호성을 지른다. 때로는 날렵한 공격수가 수비수에 맞서 현란한 기술과 치열한 공방 끝에 겨우 문전에 쇄도하지만 헛발질 끝에 벌러덩 나뒹구는 장면도 흔히 본다. 어떤 선수는 별로 뛰는 것 같지도 않은데 문전에서 얼쩡대다가는 운좋게 굴러오는 공을 살짝 밀어 넣어 쾌재를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상대도 만만할 리가 없다. 골문을 뚫었다는 절정의 기쁨이나 관중의 열광적인 환호성도 잠시, 적군이 순식간에 아군 수비수를 제치고 한방 터뜨려 금세 전세가 뒤집어지기도 한다. 흔치는 않지만 수비진이 골키퍼에게 패스한 볼이 그대로 골문에 빨려 들어가 자책골로 눈물짓는 어이상실의 장면도 있다.


골프의 맛 역시 볼이 맘먹은 대로 날아가지 않는 것이기도 하지만, 마치 인생살이 같은 곡절과 함정의 연속인데 있다는 말들을 한다. 티샷을 멋지게 날렸는데 세컨 샷이 엉망인 경우가 흔하다. 물에 빠지거나 벙커에 들어가는가 하면, OB가 나기도 한다. 늘 순탄하게 잘 나가는 것만이 아닌 흐름과 맥락이, 예기치 못한 부침과 의외의 상황에 직면하곤 하는 삶의 도정과 닮은 꼴인 것이다. 기분좋은 버디를 한 다음 티샷이 해저드에 빠지고 마는 ‘버딧 값’ 징크스도 우스갯 소리만은 아니다. 기쁠 때가 있으면 슬퍼 눈물 흘릴 때도 있는 법, 잘 나갈 때 조심해야 한다는 말들을 한다.
등산은 정상에 오르기까지 오랜 인내의 길을 간다. 묵묵히 땀 흘리다 보면 오르막 뿐만이 아니라 평지와 내리막도 지난다. 오솔길 비탈길을 걷고 계곡을 건너 험한 바위를 타기도 한다. 그렇게 한 발짝 한 발짝 오르다보면 세상이 점점 발 아래로 멀어지고, 어느 순간 하늘만이 가득한 곳, 정상에 선다. 가슴에 온 세상을 안은 듯, 지나온 고통의 기억들은 장쾌한 야호~! 메아리에 날아가 버린다. 온 몸의 에너지가 바닥까지 소진되며 내복을 흥건히 적셨던 땀이 시원한 바람에 증발하면서 심신에 찌든 번뇌와 시름마저 말끔히 산화시켜 준다. 온갖 시련과 고난을 딛고 인생의 정점에 서면 그렇게 환희와 감흥이 한꺼번에 밀려들게 마련이다.


하지만, 정복의 영광은 마냥 즐길 수만은 없는 잠시의 환희이기도 하다. 올라갔으면 다시 내려와야 하는 것은 등산의 원리요, 세상사의 철칙이다. 오히려 꼭대기까지 오르기보다 더 힘들고 고통스러운 게 내려가기이며 내리막길인 것은 노련한 등산가들이 들려주는 가장 기본적인 산행의 교훈이다. 정상을 향한 희망이 사라진 하산의 아쉬움은 이내 어서 귀가하고 싶다는 조바심으로 바뀐다. 절정 이후의 피로감은 빠르게 밀려들어 다리근육이 후들대고 무릎관절은 비명을 지른다.

지난 겨울 뜨겁게 타오른 촛불의 위력이 한국에 새 정권을 탄생시켰다. 문재인 대통령은 4년 전의 실패를 딛고 절치부심, 마침내 권좌에 올랐다. 많은 이들이 그에게 환호를 보내고 있다. 탄핵당한 박근혜 정권의 몰상식과 철학부재의 저질국정에 극명히 대비되는 반사효과를 톡톡히 누리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그의 인품과 성정을 다시 보게 된 많은 국민들의 기대와 믿음이 실려 있음도 본다.
“설마 이명박 박근혜 같으랴!” 저마다 입을 모아 희망을 이야기 한다. 진짜 국격과 위상이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거기에 출발도 산뜻하게 하다보니 요즘 인기와 지지도는 하늘을 찌를 듯, 오히려 조마조마 할 정도다. 그야말로 정상에 오른 환희와 감동의 연속이다.


그래서 요사이 여러 경구들이 떠오른다. 일테면 ‘좋을 일에는 악재들도 따른다’는 호사다마(好事多魔)를 명심하고, 주역에 말한 ‘안이불망위(安而不忘危) 치이불망란(治而不忘亂)’ 즉 평안할 때 늘 위기와 혼란을 잊지말고 삼가며 경계하라는 훈계 같은 것들이다. 이제 더 이상의 퇴행이 있어선 안된다는 간절함, 이 정권은 반드시 성공을 해야겠기에 그렇다.
스포츠의 원리처럼 영광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정상에 서면 내려가야 하는 것이 등산의 철칙이다. 오를 만큼 오르면 내려갈 일만 남은 것이 세상의 이치요 섭리다.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도 했다. 벌써 총리와 장관 청문회에서 돌부리에 채이고 있다. 시기하고 질투하며 끌어내리려 호시탐탐 노리는 세력이 도처에 널려있다. 어떻든 이제는 내리막을 생각해야 하고, 바야흐로 내려가게 될텐데, 과연 문재인 정권이 지혜롭고 멋진 하산의 이야기를 써내려 갈 수 있을 것인가, 촛불을 들었던 뜨거운 가슴들이 지켜 볼 것이다.


< 김종천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