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임대업자의 나라

● 칼럼 2017. 3. 14. 19:21 Posted by SisaHan

피고인 최서원, 사람들이 아는 이름으로는 최순실. 검찰과 특검이 작성한 조서와 공소장에 기재된 그의 직업은 임대업이다.
최순실은 지난해 12월19일 첫 공판에서 “직업이 임대업이냐”고 묻는 재판장의 질문에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최순실 일가가 소유한 땅과 빌딩이 178건 2230억원(신고가)에 달한다는 수사 결과를 내놓았다. 최순실 소유로 확인한 것은 228억원어치(36건)다.


61살인 그가 언제부터 임대업자, 건물주로 살아왔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20대 후반, 또는 30대 초반부터 이미 부동산 자산을 굴려왔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2007년 6월17일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김해호씨가 의혹을 제기했다가 호되게 당한 그 내용이다.
“최순실이 당시에도 어마어마한 부동산을 소유한 배경을 검증해 주길 바란다. 최순실은 압구정동 중심 상가지역에 수백평대의 토지와 건물을 소유했다. 당시 20대 후반으로 자금 출처 및 각종 부동산 취득 경위가 의심스럽다. 최순실의 다른 자매들 재산 역시 상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위에서는 당연히 최태민이 빼돌린 각종 기금 및 공금이라고 생각했다. 재산 형성 배경과 박근혜와의 관련성을 검증해 주길 바란다.”
10년 전 검찰 수사 자료를 찾아보니 김씨의 구속영장에 적힌 ‘구속을 필요로 하는 사유’와 공소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부정행위를 하여 재산을 형성하였다거나 최순실 등의 재산이 박근혜 후보와 관련된 재산이라는 것이 객관적으로 확인되거나 적어도 그렇게 믿을 만한 합리적인 근거 자료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공연히 확인되지 아니한 사실을 적시하여 대통령선거 후보예정자인 박근혜를 비방함과 동시에 피해자 박근혜, 최순실의 명예를 훼손하고…”.


부동산 공약·정책을 쏟아냈던 박 대통령은 정작 ‘내집 마련’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다. 아버지 덕에 장기거주하던 청와대는 10·26 뒤 전두환에게 내준다. 전두환은 신기수 경남기업 회장에게 박 대통령이 머물 집을 지어주라고 지시한다. 첫번째 ‘내집’인 서울 성북동 집이다. 검찰은 김해호씨 수사 때 이 내용이 1984년 국가안전기획부가 직접 조사한 내용임을 확인했다.
성북동에서 장충동을 거쳐 1990년 삼성동으로 이사한 지 27년 만에 박영수 특검팀은 최순실과 그의 모친, 그러니까 최태민의 부인이 박 대통령의 삼성동 42-6번지 집을 계약하고 집값까지 치른 사실을 밝혀냈다.
박 대통령 변호인은 “장충동 집을 판 돈으로 삼성동 집을 구입했다”고 주장했다. 거저 얻은 성북동 집이 장충동 집의 종잣돈이 됐거나, 집값은 그렇다 치고 삼성동 집을 직접 알아보고 계약한 장본인이 박 대통령이 아니라는 사실은 반박하지 못했다. 초등생도 장래희망으로 꼽곤 한다는 임대업자를 40년 지기로 뒀으니 굳이 고생할 필요가 없었을지 모른다.


국정농단의 주역이 번듯한 생활인이라면 썩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임대업자가 손가락질을 받을 이유는 없다. 다만 수십년 동안 대통령 옷까지 대신 사서 입혀주려면 ‘나인 투 식스’에 야근까지 하는 생활인은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서울 강남 가로수길 주변 건물 10곳 중 4곳이 상속·증여되는, 임대업을 가업으로 대물림하는 나라.
김해호씨는 10년 전 박 대통령을 향해 “최태민과 그 딸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고 했다. 지난 4년, 우리는 정말 ‘임대업자의 나라’에 살았던 것이다.

< 김남일 - 한겨레신문 정치팀 기자 >


한국과 미국 군 당국이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 주한미군 배치 작업을 이미 시작했다고 7일 밝혔다. 부지가 조성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장비부터 실어 나르고 있는 것이다. 섣부르고 무책임한 밀어붙이기다. 사드 배치 재검토를 요구하는 시민사회·야권과 대한국 제재를 본격화한 중국 등을 힘으로 억누르겠다는 권위적 행태이기도 하다. 곧 있을 박근혜 대통령 탄핵 결정 이후 대선 국면을 겨냥한 정치적 의도도 엿보인다. 두 나라는 당장 사드 배치를 중단하기 바란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사드 배치 결정 발표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합리적 논의 과정 없이 극단적인 선택을 국민에게 강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지금은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 체제여서 더 부도덕하다. 정부 관계자는 이르면 4월 안에 사드 포대가 경북 성주에 배치될 것이라고 말한다. 속전속결을 시도하는 의도가 ‘다음 정부 출범 전 대못 박기’에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내용과 절차에서 문제가 많은 사드 배치 결정을 재검토하지 못하도록 선수를 치겠다는 반국민적 발상이다. 정부는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고도화하는 상황’을 이유로 들었지만 몇 달 사이에 상황이 별로 달라질 건 없다. 사드와 핵·미사일 위협 저지를 바로 연결하는 것도 근거가 취약한 ‘사드 만능론’일 뿐이다.
트럼프 미국 정부도 동북아 안보 질서를 뒤흔들고 북한 핵 문제를 더 악화시키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미국은 한-미-일 군사·안보 일체화를 위한 핵심 수단으로 사드의 한반도 배치를 추진해왔다. 미사일방어(MD) 통합을 통해 한국을 미-일 동맹의 하위 파트너로 확실하게 편입시키는 것은 중국을 겨냥한 미국의 핵심 아시아 전략 가운데 하나다.


사드 대못 박기의 파장은 가늠하기 쉽지 않다. 중국의 강한 반발은 분명하다. 경제·외교·군사적 대응이 모두 뒤따를 것이다. 한·미 정부가 사드 문제와 관련해 진지한 대중국 협의를 사실상 방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미국은 오히려 중국이 주장하는 전략적 이익의 침해를 자신의 전략적 이익 증가로 해석하는 듯하며, 우리 정부는 사드 배치와 중국은 무관하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미국과 중국의 전략적 관점이 타협을 이루지 못하는 한 한국은 계속 보복 대상이 되기 쉽다. 지금의 경제제재는 시작일 뿐이라고 봐야 한다. 하지만 정부는 대중 관계에서도, 핵 문제에서도 실효성 있는 대책을 전혀 내놓지 못하고 있다. 무능할 뿐만 아니라 위험한 태도다.


한·미와 중국의 갈등이 심해지면 북한 핵 문제도 해법을 찾기가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사드 갈등은 이미 ‘한-미-일 대 북-중-러’라는 신냉전 구조 강화에 기여하고 있다. 사드 밀어붙이기는 박근혜 정부 외교·안보 실패의 결정판이다. 사드 포대를 빨리 설치했다 해도 부작용이 너무 크다. 이제라도 다음 정부에 결정권을 넘기는 게 순리다.


[1500자 칼럼] 탁구, 그 재미

● 칼럼 2017. 3. 7. 21:03 Posted by SisaHan

백세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웰빙(well-being)과 웰다잉(well-dying)에 대한 관심이 유별나다. 어떻게 하면 우아한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고, 어떻게 살면 품위와 아름다움으로 생을 마감할 수 있을까? 어느 모임에서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음식과 운동이 화제의 중심이 된지 오래다. 그러나 홍수처럼 넘쳐나는 정보를 어찌 다 믿고 실행할 수 있겠는가. 나는 마음건강을 신체건강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해 온지 오래다. 마음이 편치 않으면 몸도 따라 아팠으니 말이다. 소화도 안되고, 스트레스로 인한 수면장애가 와서 하루 종일 정신이 맑지 못하고, 아무 일도 집중하지 못해 끝내 우울증에 빠져 들곤 하였다. 가능하면 내가 좋아하는 일에 집중하고, 신뢰하는 친구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며, 긍정적 마인드로 살려는 노력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한다. 터널같이 길고 지루한 겨울철을 콘도에 갇혀 보내는 일은 고역이다. 답답한 몸과 마음을 풀어줄 적당한 운동을 찾아 나섰다. 때론 산책이나 헬스 센터에 가기도 했지만, 이왕이면 여러 사람이 함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지역 커뮤니티센터로 발걸음을 향했다.


커뮤니티센터로 들어서면 ‘아이, 아야야, 어~, 아유~, 햐이’ 탁구장을 가득 채운 낯익은 의성어가 밖으로 새어 나온다. 그 정다운 소리에 나도 모르게 쌓인 스트레스가 한방에 날아간다. 마치 이른 새벽 생선시장에나 간 듯 팔팔한 생명감이 느껴온다. 탁구 치는 모습도 사람 얼굴 다르듯 모두 달라 각 사람의 개성이 있어 구경하는 재미가 심심치 않다. 몇 해 전 탁구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붙인 내 별명은 꽃사슴이다. 사슴처럼 몸과 발을 펄쩍펄쩍 뛰며 공을 받는 내 모습을 빗댄 재미있는 표현이다. 어찌 나뿐이겠는가. 모두에게 별명을 붙일 수 있을 만큼 특징이 있다. 번번히 공을 놓치면서도 폼만 좋은 폼순이, 탁구대에 삐죽 붙어 서서 공을 받는 뻐쩡녀, 한 자리에 버티고 서서 절대로 탁구공을 놓치지 않는 탁순이, 자기 게임보다 남의 볼만 찾아주고 있는 오지랖남, 매번 공을 놓친 아쉬움을 소리로 표현하는 애석남… 등등.


내 똑딱볼을 군말 없이 받아주는 남편 아닌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니 운동의 효과뿐만 아니라 삶을 성찰하는 기회도 만나고 있다. 어떤 이는 양쪽 코너로 힘없이 짧게 보내는 약 올리는 볼을 치는가 하면, 내지르는 볼을 주면서 마치 애완견 훈련시키듯 양쪽 방향으로 번갈아 보내는 이도 있다. 그럴 때 잠시라도 상대방을 얕잡아보거나 내 기분을 상할라치면 금세 실점으로 이어진다. 마치 선입견을 갖고 별볼일 없는 사람으로 여겨 잘난 체하다가 제풀에 망신을 당하는 격이다. 감정조절은 필수다. 어떤 이는 길게 힘찬 볼을 건넨다. 이럴 댄 탁구대에 가까이 서지 말고 몇 발짝 뒤로 물러서서 멀리 보고 공을 받아야 실수를 줄인다. 마치 가까이 서있는 나무만 보지 말고, 먼 숲을 바라보듯 삶을 관조해야 하는 것과 동일하다. 힘찬 볼은 상대적으로 힘을 빼고 받아야지 같은 강도로 되받으면 영락없이 아웃 볼을 치게 된다. 그러나 때론 강한 사람에게는 강하게, 약한 사람에게는 약하게 대하는 관계의 기술이 탁구에서도 필요한 것 같다.

물론 숙련된 이가 아니면 어설프게 따라 할 수 없는 고도의 기술이다. 어떤 이는 볼을 돌려 친다. 분명히 눈 앞에 떨어지는 볼을 보고 되받았는데 엉뚱한 방향에 볼이 있어 헛손질하기 일쑤다. 이럴 땐 서두르지 말고 잠시 탁구대에 떨어진 볼이 튀는 방향을 보고 되받아야 한다. 마치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을 대하듯 신중하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과 같다. 어쨌든 어떤 볼이 날아오든 먼저 흥분하여 서두르면 낭패를 본다. 빨리 날아오는 볼을 보고 잠시 숨을 고르며 되받아야 하나, 실력이 떨어질 수록 반격하는 속도가 빨라져 실점할 수 뿐이 없다. 또한 나처럼 몸이 먼저 움직이면 여전히 낭패하기 십상이다. 마치 자기 성질대로 감정대로 다급하게 일을 처리하다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처럼 말이다.


모든 운동은 자신과의 싸움이다. 모자라는 실력으로 득점만 앞세우는 무모한 공격은 영락없이 실점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상대방이 허술해 보일 때를 기회로 삼아 그의 실점을 유도하는 것이 상책임을 실수로 배우고 있다. 그러려면 어떤 상대를 만나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기본실력부터 연마하는 것이 우선이지 싶다. 특히 볼이 약할 때는 강하게 받고, 강한 볼은 약하게 되받는 힘의 강약조절과 몸의 유연함을 훈련해야 할 것 같다. 이즈음은 운동도 될뿐더러 일상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시도로 시작한 탁구로 잃어버린 열정과 도전을 되찾아간다. 건강한 활기를 샘솟게 만드는 탁구, 겨울이 저만치 물러나있다.

< 원옥재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원, 전 회장 >


[칼럼] 거짓의 시대

● 칼럼 2017. 3. 7. 21:01 Posted by SisaHan

이제 한국이라는 나라는 가히 ‘거짓말 공화국’이다. 대통령부터 장관, 청와대 고위인사들을 거쳐 재벌총수, 대학총장, 교수, 의사에 이르기까지 최고 권력자와 엘리트들이 지난 몇 달간 펼쳐온 현란한 거짓말 퍼레이드는 경악을 넘어선다. 국민들은 최소한의 윤리도, 자존심도, 수치심도 없는 저들의 파렴치에 할 말을 잃었고, 저런 자들이 나라를 지배해왔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권력자들의 공공연한 거짓말은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지난 미국 대선 전후로 도널드 트럼프가 토해낸 거침없는 거짓말과 거짓 주장은 일일이 헤아릴 수조차 없다. 최근 <워싱턴 포스트>는 트럼프가 대통령 취임 이후 한 달간 쏟아낸 거짓 주장과 사실 왜곡만 132건에 이른다고 전한다.


바야흐로 ‘거짓의 시대’가 열린 것인가. 오죽하면 ‘탈진실의 시대’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겠는가.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탈진실(post-truth)’을 2016년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고, 독일언어학회도 ‘탈사실(postfaktisch)’을 올해의 독일어로 뽑았다.
실로 우리는 탈진실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과 ‘진실’은 폄하되고, ‘거짓’과 ‘사이비’가 활개 치는 세상이다. 이러한 현상은 거대한 사상적, 사회문화적, 기술적 변화와 관련이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치상대주의와 다원주의는 모더니즘의 토대였던 ‘진리’를 해체했고, 개인의 개체화와 익명화는 거짓에 대한 민감성을 둔화시켰으며, 인터넷이 열어놓은 새로운 매체환경은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자신들만의 ‘대안 사실’을 믿는 ‘분할된 마이크로 공론장’(얀베르너 뮐러)을 만들어냈다.
사실과 진실의 권위가 무너진 폐허에서 선동가들의 거짓말이 번져가고 있다. 그들의 거짓말이 위험한 진짜 이유는 그들이 거짓을 사실로 믿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명백한 ‘사실’을 하나의 ‘의견’으로 강등시키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렇게 사실의 신뢰성을 잠식하고 공론장을 왜곡하여, 결국 민주주의의 토대를 허문다. 민주주의는 다양한 의견 사이의 논쟁에 근거하고, 의견의 타당성은 사실에 기초하기 때문에, 사실이 무너지면 의견이 무너지고 결국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것이다.


거짓의 시대가 유독 미국에서 화려하게 개화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나치즘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사유하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이 대륙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대중문화를 통한 주도면밀한 우민화가 만들어낸 이 ‘무사유 사회’에서 그는 새로운 유형의 파시즘의 싹을 본다. 그가 쓴 <계몽의 변증법>(특히 ‘문화산업론’)이나,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동료인 허버트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모두 이 ‘사유하지 않는 인간들’에게서 받은 충격을 이론적으로 이해하고자 한 시도였다.
이들의 예견은 적중했다. 오늘날 ‘트럼프 현상’을 낳은 무사유, 무지, 반지성주의는 미국 사회의 ‘오래된 미래’였던 것이다. 트럼프는 선거유세에서 “나는 무지한 사람들을 사랑한다”며 내놓고 무지를 찬양했다. 바로 이런 대중의 무지가 미국을 ‘거짓의 시대’의 향도로 만든 사회문화적 토양이다.


거짓의 시대에 선동가들에게 맞설 무기는 ‘지식’과 ‘사유’이다.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파시즘은 공포를 먹고 살지만, 민주주의 속에 기생하는 파시즘은 무지를 먹고 산다. 저질 오락방송을 통한 우민화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의 독서율로 상징되는 우리네 일상이야말로 박근혜의 ‘거짓말 공화국’을 탄생시킨 숨은 주범인지도 모른다.
< 김누리 - 중앙대학교 독문학교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