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거짓의 시대

● 칼럼 2017. 3. 7. 21:01 Posted by SisaHan

이제 한국이라는 나라는 가히 ‘거짓말 공화국’이다. 대통령부터 장관, 청와대 고위인사들을 거쳐 재벌총수, 대학총장, 교수, 의사에 이르기까지 최고 권력자와 엘리트들이 지난 몇 달간 펼쳐온 현란한 거짓말 퍼레이드는 경악을 넘어선다. 국민들은 최소한의 윤리도, 자존심도, 수치심도 없는 저들의 파렴치에 할 말을 잃었고, 저런 자들이 나라를 지배해왔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권력자들의 공공연한 거짓말은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지난 미국 대선 전후로 도널드 트럼프가 토해낸 거침없는 거짓말과 거짓 주장은 일일이 헤아릴 수조차 없다. 최근 <워싱턴 포스트>는 트럼프가 대통령 취임 이후 한 달간 쏟아낸 거짓 주장과 사실 왜곡만 132건에 이른다고 전한다.


바야흐로 ‘거짓의 시대’가 열린 것인가. 오죽하면 ‘탈진실의 시대’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겠는가.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탈진실(post-truth)’을 2016년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고, 독일언어학회도 ‘탈사실(postfaktisch)’을 올해의 독일어로 뽑았다.
실로 우리는 탈진실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과 ‘진실’은 폄하되고, ‘거짓’과 ‘사이비’가 활개 치는 세상이다. 이러한 현상은 거대한 사상적, 사회문화적, 기술적 변화와 관련이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치상대주의와 다원주의는 모더니즘의 토대였던 ‘진리’를 해체했고, 개인의 개체화와 익명화는 거짓에 대한 민감성을 둔화시켰으며, 인터넷이 열어놓은 새로운 매체환경은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자신들만의 ‘대안 사실’을 믿는 ‘분할된 마이크로 공론장’(얀베르너 뮐러)을 만들어냈다.
사실과 진실의 권위가 무너진 폐허에서 선동가들의 거짓말이 번져가고 있다. 그들의 거짓말이 위험한 진짜 이유는 그들이 거짓을 사실로 믿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명백한 ‘사실’을 하나의 ‘의견’으로 강등시키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렇게 사실의 신뢰성을 잠식하고 공론장을 왜곡하여, 결국 민주주의의 토대를 허문다. 민주주의는 다양한 의견 사이의 논쟁에 근거하고, 의견의 타당성은 사실에 기초하기 때문에, 사실이 무너지면 의견이 무너지고 결국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것이다.


거짓의 시대가 유독 미국에서 화려하게 개화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나치즘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사유하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이 대륙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대중문화를 통한 주도면밀한 우민화가 만들어낸 이 ‘무사유 사회’에서 그는 새로운 유형의 파시즘의 싹을 본다. 그가 쓴 <계몽의 변증법>(특히 ‘문화산업론’)이나,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동료인 허버트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모두 이 ‘사유하지 않는 인간들’에게서 받은 충격을 이론적으로 이해하고자 한 시도였다.
이들의 예견은 적중했다. 오늘날 ‘트럼프 현상’을 낳은 무사유, 무지, 반지성주의는 미국 사회의 ‘오래된 미래’였던 것이다. 트럼프는 선거유세에서 “나는 무지한 사람들을 사랑한다”며 내놓고 무지를 찬양했다. 바로 이런 대중의 무지가 미국을 ‘거짓의 시대’의 향도로 만든 사회문화적 토양이다.


거짓의 시대에 선동가들에게 맞설 무기는 ‘지식’과 ‘사유’이다.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파시즘은 공포를 먹고 살지만, 민주주의 속에 기생하는 파시즘은 무지를 먹고 산다. 저질 오락방송을 통한 우민화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의 독서율로 상징되는 우리네 일상이야말로 박근혜의 ‘거짓말 공화국’을 탄생시킨 숨은 주범인지도 모른다.
< 김누리 - 중앙대학교 독문학교 교수 >


헌법재판소가 27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의 변론을 마쳤다. 헌재는 국회의 심판 청구 뒤 81일 동안 모두 20차례 심판정을 열어 증거를 조사하고 변론을 들었다. 이제 평의 끝에 내려질 헌재 결정을 온 국민이 간절히 기다릴 것이다.
이번 심판은 현직 대통령이 국민과 역사의 심판대에 선, 헌정사의 일대 사건이다. 헌법과 법률을 어긴 대통령을 탄핵 심판정에 세운 것은 주권자인 국민이다. 헌정 유린의 전말은 물론, 탄핵심판의 처음과 끝은 다시 온전히 역사의 심판에 맡겨질 것이다. 헌정과 법치가 어떻게 위협당했는지, 이를 어떻게 바로잡았는지는 우리 민주주의의 귀중한 자양분이 되어야 한다.


탄핵 사유는 충분히 입증된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이 주권자가 위임한 권력을 비선인 최순실씨 등에게 함부로 넘기고, 심지어 최씨의 사익 추구에 협조한 일은 관여한 이들의 증언과 제출된 증거 등을 통해 사실로 확인됐다. 헌법상 국민주권주의와 대의민주주의 훼손이 분명하다. ‘세월호 7시간’ 동안 대통령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도 드러났다. 국민 안전을 지켜야 할 헌법 의무 위반이다. 공무원들을 함부로 인사 조처한 임명권 남용도 분명하다. 재단 출연금이나 정유라씨 지원 등을 이유로 기업에서 돈을 거둔 것에 대해선 직권남용과 강요에 더해 뇌물 혐의까지 드러난 터다. 법 위반이 대통령직을 도저히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중대하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최종변론에 이르기까지 모든 잘못을 다 부인했다. 지난 몇 달간의 수사와 재판, 심판을 통해 자신의 범죄 혐의와 헌정 유린의 잘못이 애초 알려진 것보다 훨씬 심각하고 중대함이 명백해졌는데도, 처음처럼 그저 “모른다” “억울하다”뿐이다. 관련자들의 자백과 증언도 아예 모른 체다. 잘못을 부끄러워하지도 못하니, 과오에 대한 성찰과 나라를 위한 결단 따위는 아예 기대할 수도 없다.


대통령 대리인단도 가관이다. 변론의 대부분을 터무니없는 억지와 정치적 선동으로 채웠다. 소추 사유의 본질을 정면으로 반박하기는커녕 온갖 수법으로 심판을 지연시키고 핵심을 흐리는 데만 골몰했다. 재판관들까지 공격하더니, 이제는 국회의 탄핵소추 과정이나 헌재 재판부의 결원을 뒤늦게 시비 걸어 헌재 결정에 ‘불복’하겠다고 을러댄다. 참으로 비열한 추태다.


[한마당] 설마를 상상할 자신있나?

● 칼럼 2017. 2. 23. 19:34 Posted by SisaHan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의혹사건이 터진 뒤 해외 주요 언론은 하루가 멀다하고 이를 대서특필했다. 권위지 뉴욕타임즈는 이렇게 보도했다. ‘한국 대통령 둘러싼 스캔들 불거져, 리더십 총체적 위기’라는 제하에 “마치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났다는 의혹의 한 가운데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이 서 있다. 비선에서 대통령을 조종하는 실세, 정실 인사와 파벌주의, 부정 축재, 거기에 믿기 어려운 문란한 소문까지. 한국의 라스푸틴이라는 평을 받는 인물이 등장하고…”
그 뒤 뉴욕타임즈는 ‘heng on the Choi Scandal in South Korea’라는 제목의 만평을 게재하기도 했다. 만평은 ‘PARK GEUN-HYE’라고 적힌 로봇을 그려놓고 로봇의 머릿속에 ‘CHOI SOON-SIL’이라고 적힌 여성이 의자에 앉아 로봇을 조종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박 대통령은 로봇에 불과했고, 사실상 최순실의 조종과 농간에 의해 국정이 운영되었음을 생생하게 묘사한 것이다.


전세계 언론과 SNS에 넘쳐난 실황중계로 대한민국은 졸지에 우스꽝스런 나라로 전락해버렸고, 해외 한인들은 사상 유례없는 수치와 모멸감으로 가슴을 쳐야했다. 그래도 위안이랄까. 1천만 명을 넘어선 대규모 촛불집회가 이어지면서 박근혜 정권의 무능과 부패와는 달리 정의를 외치는 평화시위의 국민 수준과 민주의식에 찬사가 쏟아지기도 했다.
하지만 전 세계인과 지구촌 언론에는 한국 국회가 탄핵한 박근혜 대통령에 얼키고 설킨 국기문란 스캔들이 이미 핫 이슈로 자리잡았다. 이후 특검의 수사가 진행되면서 국내언론 못지않게 굵직한 뉴스들이 수시로 보도됐다. 형사재판이 열리고, 헌법재판소가 탄핵안을 심리하는 한국의 정정불안과 박근혜의 추락은 세계인들의 뇌리에 깊이 박히고 말았다. 글로벌 기업 삼성의 뇌물의혹도 겹쳤으니 세계적인 매체들이 관심을 두는 건 당연했다.


워터게이트의 닉슨처럼, 결국 물러날 것이라는 시각도 번졌다. 촛불민심이 박근혜 대통령의 헌재 탄핵결정을 기정사실화 한 것처럼, 외국의 주요 언론도 탄핵이 불가피함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탄핵의 증거들은 차고 넘친다”는 검찰의 확신과 1천만이 넘는 촛불 민의에 당연히 새롭고 정의로운 민주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공통의 분석과 상식적인 기대가 한국인은 물론 세계인 사이에도 공감대가 확산된 것이다. 쉬운 예로 최근 중국 정부의 한국정부 무시 태도를 보면 그런 심증이 뚜렷함을 본다. 설마 이 엄청난 사건의 중심 인물인 박근혜가 앞으로도 권좌에 앉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국정을 운영해 나갈 수가 있겠는가 하는, 맹신그룹인 친박세력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부인 못할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화장실 갈 때하고 나올 때 마음 다르다’는 말이 경험론적인 진실이듯, 역시 시간이 가다보니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려는 발버둥이 보이기 시작했다. 숨었던 비선 부역자들과 친위세력들이 꿈틀거리며 마각을 드러낸 것이다. 그들은 촛불집회가 거쳐간 궤적을 흉내 내면서 전혀 어울리지 않게 태극기와 성조기까지 꺼내들고 궐기하기에 이르렀다. 숨을 죽이고 잔뜩 주눅들어 있던 사람들이 요즘은 “탄핵은 기각된다”는 이상한 자신감까지 들춰 보이면서 차츰 목청을 키운다. ‘어느 쪽이든’ 헌재결정에 승복하라고 당당하게 압박도 한다.
탄핵에 찬성하는 국민이 80%선에서 별다른 동요가 없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수사기관은 대통령의 뇌물죄를 확신하고, 헌재 심리에서도 탄핵증거가 충분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런데, 시간이 가다보니 상황이 반전되고 있단다. 시간이 가면 흑이 백으로 바뀌는 것인가? 왜 불안심리가 스며드는 것인가.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왜 슬슬 신경을 건드리는 거지? 참 이상한 나라요, 겁나는 현상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하지 않은가. 만에 하나 탄핵이 기각된다면…?
그러면 ‘로봇’은 은밀한 마수의 인공지능에 의지해 다시 기계적으로 꿈틀대게 되나? 국가적 위기상황에 아무 조처없이 미용시술을 즐기며 관저만 맴돌았다는 지도자가 국정을 계속한다? 궁지에 몰렸던 비선 권력이 되살아나 활개를 치며 힘자랑을 한다? 잠시 수모를 당해 응어리졌던 보복의 칼을 휘두르겠다고 설친다?, 권력과 재벌의 검은 밀월은 공인된 합법의 거래가 되어버린다?
결국 80%의 국민이 참패하고 진실은 거짓이, 정의는 불의의 음모론과 꼼수에 제압당해세상이 잿빛 절망으로 뒤덮여 버린다? 국정농단과 헌정파괴가 “뭐 그럴 수도 있지“라고 공인되는 뒤죽박죽인 나라, 사리분별도 모르는 국민, 그리고 그런 우스꽝스런 나라 출신 이민자들의 누추한 몰꼴이라니? 숨이 막히고 낯이 뜨거워 상상만 해도 암담하다. 설마 그런 일을 상상할 자신이 있는가?


< 김종천 편집인 >


나는 암울한 일제강점기와 혼란기를 기도와 찬송의 힘으로 살아낸 분들 속에서 자랐다. “빈들에 마른 풀같이 메마른 나의 영혼, 주님이 허락한 성령 간절히 기다리네.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시듯 성령의 단비를 부어 새 생명 주옵소서” 그분들이 즐겨 부르신 찬송가다.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된 ‘주권국가’에서 태어나 점점 좋아지기만 할 세상에서 살 것이라 믿었던 나/우리는 비틀스와 작년 노벨 평화상을 탄 밥 딜런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세계 평화를 구가했다. 꿈에 부풀어 문명개화, 민족 해방, 조국 근대화와 민주화를 이루는 역사의 시간에 몸을 맡기고 우울이라는 것을 모른 채 달려왔다. 역사가 개인을 배반하지 않은 진보의 시대를 말이다. 그런데 지금, 진리나 사실보다 감정이나 신념이 더 중요한 탈계몽의 ‘포스트-진실’ 시대를 맞아 곧잘 우울에 빠진다.


사회학자 김홍중은 최근 저서에서 대한민국 국민들이 앓고 있는 정치적 우울 현상을 ‘파상’의 개념으로 풀고 있다. 파상은 개인이나 집단을 사로잡고 있던 꿈이 깨지면서 삶의 근거가 부정되는 체험을 말한다. ‘세월호’라는 파국의 시간을 목격하고 마음이 부서지면서 그간 꿈꾸었던 세상의 붕괴를 참담하게 바라보게 되는 그런 체험 같은 것이다. 그는 섣부른 대안을 찾아 나서지 않고 파국 속에 던져지는 것, 현실의 고통과 비참을 마주하는 것, ‘무너지는 마음’을 바라볼 것을 당부한다. 그 무너짐의 과정이 도덕적 인지적 종교적 힘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 전환의 힘은 그간 사회를 지탱했던 꿈과 욕망 구조가 만들어낸 허상을 깨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


내게 광화문 광장의 촛불은 바로 이 파상의 경험을 공통적으로 하게 했다는 점에서 주목받을 사건이다. 그 광장에서 시민들은 그간 홀로 겪은 ‘파상’의 경험을 다른 시민들과 공유하며 도덕적 인지적 종교적 힘을 키울 수 있었다. 그리고 공론장에 대한 감을 회복하게 되었다. 광화문의 촛불 집회와 태극기 집회가 다른 점은 바로 이 점이며 이 둘이 힘겨루기 판이 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간 대통령 탄핵이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줄 것같이 달려왔지만 실은 긴 흐름의 단층일 뿐, 시간 자체를 바꾸어가는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모두가 서로에게서 떨어져 나가서 각자 자기에게 가장 고유한 피로 속으로 빠져드는 “피로사회”(한병철)의 시간, “역사를 불신하고 절망하게 만드는 감각을 생산하는 장치를 벗어난”(엄기호) 시간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긴다고 해도 또 다른 광야를 지날 준비를 해야 한다. 작은 오아시스 하나씩 만드는 거로 견디어진 지난 경험을 떠올리며 마음을 모으고 있다”는 광화문 청년의 말은 그래서 미덥다.


대선주자들은 “국민은 공짜를 원하지 않는다”거나 “과외 금지 국민투표”, ‘대연정’과 같은 단어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사회가 어떻게 무참하게 깨져나가는지를 통감하고 있을까? 개발독재 시대의 시간성에서 벗어나기나 한 걸까? 여론조사를 둘러싼 킹메이킹 놀이로 분주한 그들은 대한민국의 촛불 시민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 어떤 나라보다 급속도로 경제성장을 이루어냈고 그렇기에 어느 나라보다 급속도로 추락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는 대단한 파상력을 가진 시민들이 아주 많다. 그들이 만들어낸 시대 용어와 유튜브 작업만 봐도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정치 대연정은 시민정치가 꽃피는 곳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청년들이 팬클럽 멤버가 아니라 밴드를 만들고 신문사를 만들고 정당을 만들어 시민정치의 장을 활짝 열어갈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탄핵 정국에 자극을 받아 ‘제1회 부끄러운 동문상’이 대학별로 제정되고 있는 모양이다. 바야흐로 부끄러움을 아는 세상이 돌아오는 것일까? 짐작하건대 이 능동적 청년 국민들은 공짜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과 바람과 물과 흙을 포함한 공유재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지구를 망치는 것에 대한 정당한 세금을 매기고 지구를 살릴 시간을 벌기 위한 시민배당을 청구할 것이다.
‘1인 1표 대의제’를 ‘1인 1주 시민배당제’로 보완하는 것은 붕괴하는 중산층을 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 정도는 대선 후보들이 기본으로 알고 시작하면 좋겠다.
다음 대통령은 파상력과 공론의 감각을 가진 사람이 당선되기를! 그렇지 않다 해도 언제든 탄핵할 수 있는 시민력을 충분히 키워가기를!

< 조한혜정 - 문화인류학자, 연세대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