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국공합작이라고?

● 칼럼 2016. 9. 8. 19:40 Posted by SisaHan

지난여름 내내 <한겨레>가 <조선일보>와 함께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의 비리 의혹을 연일 보도한 것이 업계에선 꽤 흥미로운 일이었나 보다. 평소 알고 지내는 취재원들로부터 두 신문의 보도를 ‘국공합작’이라고 부른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 실소가 터져나왔다.
조선일보의 첫 보도 내용을 확인한 결과 보도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과거 제국주의 열강에 맞선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의 연합전술에 비유된 것이다. 우 수석의 권력이 제아무리 막강하더라도 제국주의 열강에 견줄 정도는 아니지 않나. 때가 되면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기 마련인데 뭐 그리 대단한 존재라고 두 언론사가 ‘합작’까지 할까. 참으로 시답잖은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우 수석에 대한 기사는 다른 고위 공직자에게 적용했던 기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름 저널리즘의 원칙에 충실하려고 애썼던 보도가 정략적 산물로 비치는 것 같아 기분이 영 찜찜했다.


우 수석이 진경준 전 검사장의 도움으로 처가의 골칫거리였던 서울 강남역 땅을 넥슨에 처분할 수 있었고, 그 고마움 때문에 진 전 검사장의 넥슨 비상장 주식을 눈감아줬다는 조선일보의 보도는, 사실이라면 대단한 특종이 아닐 수 없었다. 고위 공직자 인사 검증과 공직기강을 담당하는 민정수석이 사익에 눈이 멀어 본연의 업무에 소홀했기 때문이다. 명백한 직무유기로 자질 논란을 넘어 실정법 위반까지 따져봐야 할 사안이었다. 우 수석이 서슬 퍼런 권력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기에 더욱 그랬다.
그런데 기록적인 폭염도 잊은 채 연일 우 수석 관련 보도를 이어가던 중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첫 보도를 한 조선일보가 언제부턴가 그 횟수를 눈에 띄게 줄이기 시작한 것이다. 최루탄 가스가 한바탕 터지고 난 뒤 얼떨결에 시위대 앞에 서게 된 황당함이라고나 할까. ‘동지’는 간데없고 홀로 깃발을 들고 외롭게 ‘구호’를 외치는 날이 계속됐다. 우 수석한테서 형사고소와 함께 거액의 민사소송까지 당한 그 신문의 처지를 고려하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최근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의 ‘폭로’는 의문을 더욱 증폭시켰다. 조선일보의 대표적 논객 가운데 한 사람인 송희영 전 주필이 검찰의 대대적인 수사를 받고 있는 대우조선해양의 옛 경영진과 유착 관계에 있다는 내용이었다. 때마침 조선일보의 우 수석 관련 보도가 송 주필에 대한 검찰 수사와 연관이 있다는 내용의 찌라시도 나돌았다.


김 의원의 폭로는 정치 공작의 냄새가 진동하지만, 언론이 그동안 쌓아온 ‘업보’의 대가인 것 같아 마음이 착잡하다. 조선일보의 우 수석 관련 보도는 경쟁사가 인정할 정도로 훌륭했다. 그러나 전혀 엉뚱한 ‘사건’으로 빛이 바랠 위기에 처했다. 언론이 스스로 깨끗하지 못하면 아무리 정당한 주장을 해도 진정성이 의심받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한다.
한겨레 취재에서 진 전 검사장이 우 수석 쪽과 넥슨 사이에서 거간꾼 노릇을 했는지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우 수석이 배우자의 재산을 허위로 신고하고, 가족회사를 설립해 생활비를 회사 비용으로 처리하는 등 다른 비리 의혹들이 속속 드러났다. 검사들 중 상당수가 “언론 보도 내용이 왜 근거가 있는지 수사 경험이 많은 우 수석 스스로가 잘 알 것”이라고 말할 정도다.
그럼에도 우 수석과 청와대는 “의혹만으로는 사퇴하지 않는다”며 버티고 있다. 아마도 이번 사건을 정략적 의도가 담긴 정치 공세로 몰아가려는 것 같다. 그렇다면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다. 우 수석 관련 보도는 정치 문제가 아닌 정의의 문제다.
< 이춘재 - 한겨레신문 법조팀장 >


[한마당] 말기적 ‘전조현상’

● 칼럼 2016. 8. 30. 19:50 Posted by SisaHan

화산이 터지거나 지진이 발생하기 전에 예고성(?)으로 일어나는 징후들을 ‘전조현상’이라고 한다.
화산 폭발 전에는 지하 마그마가 차츰 상승하는 데 따라 지온도 올라가고 소규모 지진이 잦아진다. 또한 화산기체 방출량이 많아지며 지형이 갑자기 변하기도 한다. 지진의 경우에는 동물들의 이상한 현상들이 알려져 있다. 동물원의 짐승들이 우리를 뛰쳐나가고 두꺼비가 떼지어 이동하기도 하며 겨울잠을 자던 곰과 뱀 등이 깨어 밖으로 나왔다는 사례도 전해진다.
얼마 전 부산과 울산에서는 정체모를 악취를 맡은 시민들이 지진의 전조 아니냐는 불안감을 표출하며 신고 전화가 빗발쳐 소동이 일기도 했다.
이렇게 자연재해에 앞서 나타나는 현상들은 과학적으로 규명된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에게 불안과 경각심을 주어 사전 대피하도록 유도하는 잇점이 있다. 그래서 전조현상을 연구하고 예보에 활용하려는 시도가 꾸준히 이어진다. 전조현상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여 화산과 지진이 일기 전에 사람들이 재빨리 피신할 수 있게만 한다면, 자연 재앙으로 인한 피해를 줄이는 데는 획기적인 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도 현실에선 전조현상을 무시하고 방심했다가 막대한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다.


전혀 다른 얘기 같지만, 요즘 청와대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일들을 보면 혹시 말기적 전조증상이 아닌가? 하는 의문과 불안이 커지곤 한다. 뭔가 폭발할 것만 같은 심각한 긴장국면 때문이다. 고발당한 피의자들에 대통령이 둘러싸여 그들을 보호하느라 고생한다는 실감있는 지적도 나온다. 옛날에는 대나무 숲에 대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숨어서 외쳤다지만, 이젠 여기저기서 아예 대놓고 아집과 오기를 들먹이며 “대통령 귀는 불통 귀”라고 힐난하는 양상이다.
대통령 주변 인물들을 감찰하라고 임명받은 감찰관이 수석비서관을 감찰한 게 무슨 잘못일까, 적반하장도 유분수라고 했는데, 대통령이 제 손으로 앉힌 감찰관을 국기문란 사범이라고 단정해 검찰에 수사하라는 무언의 압박을 가했다. 의혹의 민정수석을 경질하라는 비등한 여론에는 “부패한 기득권 세력과 좌파들의 식물정부 만들기 공작”이라는 황당한 반박을 내놨다. 그 의혹의 당사자는 철판으로 심장을 감싼 것인지, 들끓는 민심을 외면한 채 꿋꿋이 버티고 앉아있다. 그러니 마치 화산이나 지진을 예고하는 ‘전조현상’같은 불안감이 청와대 안팎에 감도는 것은 어느 한사람만의 불길한 예감일까.


뭔가 터질 것만 같은 조짐은 민심에 정면 대결을 마다않는 독선과 불통, 그리고 자신만이 옳다는 아전인수(我田引水) 때문이다. 예로부터 민심은 천심(天心), 곧 ‘하늘의 마음’이라 했다. 권력은 민심의 바다에 떠있는 배와 같다는 말도 있는데, 하늘의 뜻인 민심을 묵살하고 깔아뭉개는 어리석고 적대적인 응대를 하고 나선 격이다. 민심의 풍랑에 침몰위기의 조각배처럼 종국으로 치닫는 무모함의 질주를 보는 것만 같아서 답답하다는 이야기다. 일개 수석비서관을 감싸겠다고 대통령이 팔을 걷어 부치면서 국정 컨트롤 타워가 흔들리고 검찰마저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있다. 나라 꼴은 엉망이 되든 말든 비서관 구하기에 나선 대통령의 집착과 무능이 하늘을, 민심을 찌르고 후빈다.
지난해 교수들은 ‘혼용무도’(昏庸無道)라는 정확한 표현으로 대통령과 세태를 꼬집었다. 바로 지금까지도 그처럼 적절한 표현이 없을 정도다. ‘어리석고 무능한 군주와 어지럽고 도리도 땅에 떨어진 세상의 불의함’, 바로 오늘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공자는 논어에서 지도자의 바른 정치를 설파했다. “정치는 바르게 하는 것”(政者正也) 이며 “스스로 솔선하여 올바르게 한다면 누가 감히 바르게 하지 않겠는가?”(子帥以正 孰敢不正) 라고 정도(正道)의 정치를 설명했다. 공자는 또 정치를 “식량과 군대를 넉넉히 하고 백성들의 신뢰를 얻는것”(足食足兵 民信之矣) 이라고 강조한 뒤 그 중에 차례로 버리도 좋은 것을 묻자 “첫째는 군대, 두 번째는 식량”(子帥以正 孰敢不正)이라고 말했다.. 모두 버려도 백성의 신뢰는 버려서는 안된다는 가르침이다. 그 이유를 공자는 “예로부터 사람은 누구나 다 죽게 되지만, 백성들이 믿어주지 않으면 그 나라는 존립하지 못한다”(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고 국가존립의 필수요소로 신뢰를 꼽았다.
풍랑이 거세면 난파를 대비하는 게 상식이다. 민심의 바다에서 거칠게 요동하는 전조현상을 깨닫지 못한다면 어리석다. 배가 뒤집힐 수도 있다는 예감아래 스스로의 과오를 살펴 속죄의 길을 찾는 게 현명하다. 민심을 이기는 권력은 없다. 민심을 거슬러 대적하는 지도자의 말로는 거의가 불행했다.


< 김종천 편집인 >


최근 한국에서 가장 관심을 모으고 있는 일본인은 다름 아닌 아키히토 일왕일 것이다. 일왕이 지난 8일 공식적으로 밝힌 ‘생전 퇴위’ 의사와 일본의 71번째 패전일 추모식 때 언급한 “깊은 반성”이라는 단어가 많은 한국인들의 가슴에 강력한 울림을 남겼기 때문이다.
일왕은 지난 7월10일 자민당 등 개헌 세력이 참의원 선거에서 개헌 정족수를 확보한 직후인 7월13일 궁내청 관계자에게 ‘생전 퇴위’ 의사를 밝혔다. 이 소식은 NHK 방송 등 일본 언론을 통해 신속히 전해졌고, 모든 일본인이 큰 충격을 받았다.
그렇다면 일왕의 생전 퇴위 의사 표명은 아베 신조 총리가 ‘필생의 과업’이라고 해온 개헌을 저지하기 위한 것일까? 정확한 이유야 본인만 알고 있겠지만, 일왕은 평화헌법을 소중히 생각해온 분이시니 아주 조금은 그런 마음을 갖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일본 사회는 이 질문에 답하는 것 자체를 ‘금기’로 여기고 있다.


‘역시 일본인들은 비겁하군.’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저 질문을 금기로 여기는 일본인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상 천황제에 대한 일본인들의 복잡한 심리나 결국 비극으로 치닫고 만 일본의 근현대사를 올바로 이해했다고 말하기 힘들다.
1868년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1880년대 일본인들이 마주한 가장 큰 고민은 일왕이라는 초월적인 존재를 헌법이라는 근대국가의 성문법 틀 속에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일왕이 일본을 통치하는 근거는 뭘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헌법 초안 작성자인 사법성 관료 이노우에 고와시(1844~1895)는 일본의 건국신인 태양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후손인 진무천황 이후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는 일왕가 혈통의 연속성에 주목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대일본제국헌법(1889년 제정) 1조는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이를 통치한다”고 정해졌다. 일본이 헌법을 통해 신의 후손이 만세일계로 다스려온 신국으로 규정된 것이다. 일본 군부는 이후 일왕의 초월적인 권위를 활용해 만주사변, 중일전쟁 등을 일으켰고 이에 저항하는 정치인들은 쿠데타를 통해 암살했다. 그 결과가 끔찍한 전쟁과 비참한 패전이었다.


패전 이후 일왕은 신에서 인간으로 강등됐다. 그리고 일본을 통치하는 ‘원수’에서 실제 권한을 갖지 못한 채 일본 국민들을 통합하는 ‘상징 천황’의 지위에 머무르게 된다. 그와 함께 일본 사회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일왕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일은 절대 해선 안 되는 ‘금기’로 삼는다는 합의를 이루게 된다. 일왕의 권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게 되면 그 뒤로는 합리적인 토론이 불가능해지며, 지난 전쟁 때와 같이 국가 전체가 한 방향으로 폭주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베 총리의 역사 수정주의에 대해 일왕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추도사 속에 ‘깊은 반성’이라는 한두 단어를 넣는 정도이며, 일본인들은 그에 대한 일왕의 절실한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짐짓 모른 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사회에 필요한 것은 ‘현명한 군주’보다는 ‘영향력이 없는 군주’일 것이며, 그보다 더 바람직한 것은 군주 자체가 없는 공화국일지 모른다.
이런 기묘한 일본의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현재 일본에서 천황제를 유지할 필요가 있냐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일본의 헌법 1조는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 국민통합의 상징이며 그 지위는 주권을 갖는 국민의 총의에 기초한다”고 되어 있다. 일본의 주권자는 일왕인가 국민인가. 헌법은 분명 주권자는 국민이라 규정하고 있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평범한 일본 시민들의 생각이지 ‘자애로운’ 일왕의 마음이 아니다.


< 길윤형 - 한겨레신문 도쿄특파원 >


[1500자 칼럼] 헌신하는 자들

● 칼럼 2016. 8. 23. 20:01 Posted by SisaHan

선교를 보낼 때나 갈 때나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긍지를 가지면서 가서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는 가보면 자신들이 그들을 보면서 감동을 하고 얻는 게 더 많다.

금년 캄보디아 선교에서 원주민에게서 얻은 감동이나 은혜보다 함께 사역했던 팀을 통해 받은 게 컸다. 이번 우리 교회와 함께 한 사역자 가운데 수도 프놈펜에 있는 헤브론 병원의 의사 내외(부인은 약사)의 헌신적인 모습이었다. 두 내외는 우리 교회 집사님의 사촌 동생으로 우리 팀을 도우기 위해 오신 신실한 집사님으로 내과 전문의였다. 헤브론 병원부터 이야기하자면 원장이신 장로님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세워진 자선 병원으로 캄보디아인에게 무료로 치료해 주기에 재정적으로 크게 열악하여 모든 의사들이 모든 면에서 자원 봉사하여도 재정 자립도는 20% 정도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많은 수술 가운데 심장 수술도 많은데 한국에서 전문의들이 한 번씩 몰아서 수술해 주고 가는데 그것도 자원 봉사라고 했다.
두 내외는 한국에서 내과 병원과 약국을 아래 윗층에서 경영하고 있었는데 과거 하나님께 서원한 바가 있어 병원과 약국을 다 정리하고 1년을 예정하고 이곳에 들어온 것이다. 모든 게 열악하여 약사인 부인 집사님은 병원의 경리까지 담당하고 있었다. 사업이 그렇지만 병원이나 약국을 정리하면 그동안 관계했던 모든 환자나 손님을 잃어버리는 것이고 다시 시작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무료로 진료해주고 한국에서 지원받은 약을 처방해 주면서 하루에 거의 300명의 환자를 보노라 모든 의사들이 육체적으로 지친다. 그렇다고 퇴근 후에 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위험 지역이어서 저녁에 외출도 쉽지 않으니 속칭 문화생활로 즐길 수도 없다. 음악회나 영화관 출입도 쉽지 않지만 환자를 보노라 특별히 시간을 내어 백화점 같은 곳으로 쇼핑할 여유 여가도 없다.
나는 두 분을 보며 나의 헌신은 보잘 것 없다는 생각하면서 두 분에 대한 감사를 표했더니 두 분은 자신보다 더 헌신적인 분을 소개했다. 그 분은 미국에 거주하는 심장 수술에 함께 하시는 간호사인데 헤브론 병원에서 수술이 있을 때마다 두 달 또는 석달에 한 번씩 건너와 수술을 도와주고 돌아 가신다는 것이다. 물론 항공료나 그 모든 비용을 자신이 감당하시면서. 그렇게 하려면 자신에게 주어진 병원의 스케줄을 다른 간호사와 바꾸어 가면서 밤낮으로 일한 뒤 와야 하니 그런 수고와 헌신이 어디 있겠는가.

이쯤에서 헌신을 선교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전인적인 그리고 만사에 대한 올인의 자세가 아니겠는가? 말로 올인이 아니라 삶과 생활을 올인할 때 진정한 선교도 봉사도 헌신도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렇게 헌신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하고 물었더니 모든 것이 다 필요하다고 했다. 부엌일이나 청소 설거지 컴퓨터 등 모든 것에서 필요한 것 뿐이었다. 이제는 은퇴를 앞 둔 목사로서 아쉬운 것은 우리 교회나 또 다른 어떤 교회가 이 헤브론 병원만을 대상으로 선교팀을 구성하여 가서 도와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하는 생각을 했다.
이곳은 전인적으로 헌신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에 전인적인 선교를 원하는 사람들의 훈련장으로 더욱 적합하리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단기선교나 모든 선교에 협력하는 분들의 수고는 대단하다. 평생을 목회로 살겠다는 목회자도 그러하지만 평신도 선교사로 이리 헌신하는 자들을 볼 때 어이 감동하지 않겠는가.

< 김경진 - 토론토 빌라델비아 장로교회 담임목사 >